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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詩 같은 삶을 위하여
☞ 문학의 뜨락

박용철(朴龍喆) 시 모음

by 石右 尹明相 2022. 3. 9.

 

용아 박용철 시인. 1904~1938(광주)

시인, 번역가, 평론가

배재고. 연희전문학교. 은관문화훈장.

 

 

박용철(朴龍喆) 시 모음

 

 

떠나가는 배

 

나두야 간다.

나의 이 젊은 나이를

눈물로야 보낼 거냐.

나 두 야 가련다.

 

아늑한 이 항구인들 손쉽게야 버릴거냐.

안개같이 물 어린 눈에도 비치나니

골짜기마다 발에 익은 묏부리 모양

주름살도 눈에 익은 아아 사랑하든 사람들.

 

버리고 가는 이도 못 잊는 마음

쫓겨 가는 마음인들 무어 다를거냐.

돌아다보는 구름에는 바람이 희살짓는다.

앞 대일 언덕인들 마련이나 있을거냐.

 

나 두 야 가련다.

나의 이 젊은 나이를

눈물로야 보낼거냐.

나 두 야 간다.

 

 

 

바람 부는 날

 

오늘따라 바람이 저렇게 쉴 새 없이 설레고만 있음은

오늘은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을 여위고만 있음을

바람도 나와 함께 안단 말인가.

 

풀잎에 나뭇가지에 들길에 마을에

가을날 잎들이 발갛게 쏠리듯이

나는 오늘 그렇게 내게 있는 모든 것을 여희고만 있음을

바람도 나와 함께 안다는 말인가.

 

! 지금 바람이 저렇게 못 견디게 설레고만 있음은

오늘은 또 내가 내게 없는 모든 것을 깨닫고 있음을

바람도 나와 함께 안다는 말인가.

 

 

 

고향

 

고향은 찾어 무얼 하리

일가 흩어지고 집 흐너진 데

저녁 까마귀 가을 풀에 울고

마을 앞 시내로 옛 자리 바뀌었을라.

 

어린 때 꿈을 엄마 무덤 위에

남겨두고 떠도는 구름 따라

멈추는 듯 불려온 지 여남은 해

고향은 이제 찾어 무얼 하리.

 

하늘가에 새 기쁨을 그리어보랴

남겨둔 무엇일래 못 잊히우랴

모진 바람아 마음껏 불어쳐라

흩어진 꽃잎 쉬임 어디 찾는다냐.

 

험한 발에 짓밟힌 고향 생각

-아득한 꿈엔 달려가는 길이언만-

서로의 굳은 뜻을 남께 앗긴

옛 사랑의 생각 같은 쓰린 심사여라.

 

 

 

이대로 가랴마는

 

설만들 이대로 가기야 하랴마는

이대로 간단들 못 간다 하랴마는

 

바람도 없이 고이 떨어지는 꽃잎같이

파란 하늘에 사라져 버리는 구름쪽같이

 

조그만 피로 지금 수떠리는 피가 멈추고

가는 숨길이 여기서 끝맺는다면-

 

- 얇은 빛 들어오는 영창아래서

차마 흐르지 못하는 눈물이 온 가슴에 젖어나리네.

 

 

 

너의 그림자

 

하이얀 모래

가이 없고

 

적은 구름 우에

노래는 숨었다

 

아지랑이 같이 아른대는

너의 그림자

 

그리움에

홀로 여위어 간다

 

 

 

 

비가 조록조록 세염없이 나려와서

쉬일 줄도 모르고 일도 없이 나려와서

나무를 지붕을 고만히 세워놓고 축여준다.

올라가는 기차소리도 가즉히 들리나니

비에 흠출히 젖은 기차모양은 애처롭겠지

내 마음에서도 심상치 않은 놈이 흔들려 나온다

 

비가 조록조록 세염없이 흘러나려서

나는 비에 흠출 젖은 닭같이 네게로 달려가련다

물 건너는 한줄기 배암같이 곧장 기어가련다

검고 붉은 제비는 매끄름히 날아가는 것을

나의 마음은 반득이는 잎사귀보다 더 한들리어

밝은 불 켜놓은 그대의 방을 무연히 싸고돈단다

 

나는 누를 향해 쓰길래 이런 하소를 하고 있단가

이러한 날엔 어는 강물 큰애기 하나 빠져도 자취도 아니남을라

전에나 뒤에나 빗방울이 물낱을 튀길 뿐이지

누가 울어보낸 물 아니고 섧기야 무어 설으리마는

저기 가는 나그네는 누구이길래 발자취에 물이 괸다니

마음 있는 듯 없는 듯 공연한 비는 조록조록 한결같이 나리네

 

 

 

눈은 내리네

 

이 겨울의 아침을

눈은 내리네

 

저 눈은 너무 희고

저 눈의 소리 또한 그윽하므로

내 이마를 숙이고 빌까 하노라

 

임이여 설운 빛이

그대의 입술을 물들이나니

그대 또한 저 눈을 사랑하는가

 

눈은 내리어

우리 함께 빌 때러라.

 

 

 

싸늘한 이마

 

큰 어둠 가운데 홀로 밝은 불 켜고 앉아 있으면

모두 빼앗기는 듯한 외로움

한 포기 산꽃이라도 있으면 얼마나한 위로이랴

 

모두 빼앗기는 듯 눈덮개 고이 나리면

환한 왼몸은 새파란 불 붙어 있는 인광

까만 귀뚜리 하나라도 있으면 얼마나한 기쁨이랴

 

파란 불에 몸을 사르면 싸늘한 이마

맑게 트이어 기어가는 신경의 간지러움

길 잃은 별이라도 맘에 있다면 얼마나한 즐검이랴

 

 

 

절망

 

나는 이제 절망의 흙속에

파묻혀 엎드린 한 개의 씨

! 한없는 어둠과 고요,

 

그러나 그러나

천천이 천천이

나는 고개를 든다.

 

천천이 천천이

그러나 힘있게 우으로

나는 머리를 밀어 올린다.

 

나는 숨을 쉬었다. 지구를 나는 뚫었다-

나는 팔을 뻗힌다

나는 다리를 뻗힌다

 

! 나는 아침해 비친 언덕 우에

두 팔 쳐들어 왼몸 훨씬 펴고 서 있는

! 서 있는 사람이로다.

 

 

 

기다리는 때

 

솔사이를 어른어른

올라오는 그의 얼굴

얼핏 내려다본 나의 마음

 

살짜기 등지고 앉어서

반이운 꽃을 어여뻐 하는체

피여나는 꽃을 어여삐 하는체

뒤에 들리는 발자취만

기다리네

 

와 멈추는 발자취

귀 뒤에 들리는 숨소리

무슨 작난을 하려는 듯

 

자석에 끌리는 바늘같이

햇발따라 송이같이

틀었든 내 얼굴

하염없이 돌아가니

오 나의 해

나의 사랑!

 

 

 

어디로

 

내 마음은 어디로 가야 옳으리까

쉬임 없이 궂은비는 나려오고

지나간 날 괴로움의 쓰린 기억

내겐 어둔 구름되어 덮히는데

바라지 않으리라는 새론희망

생각지 않으리라든 그런생각

번개같이 어둠을 깨친다마는

그대는 닿을 길 없이 높은 데 계시오니

- 내 마음은 어디로 가야 옳으리까

 

 

 

비 나리는 날

 

세엄도 업시 왼하로 나리는 비에

내 맘이 고만 여위어 가나니

앗가운 갈매기들은 다 저저 죽엇겠다

 

비에 젖은 마음

불도 없는 방안에 쓰러지며

내쉬는 한숨 따라 '아 어머니!' 석기는 말

모진 듯 참어 오는 그의 모든 설어움이

공교로운 고임새의 문허져 나림같이

이 한말을 따라 한 번에 쏟아진다.

 

 

 

단상(斷想).1

 

가끔 가끔(새삼스리)

살기가 싱거워집니다

그렇다고

애써 죽기야 또 어찌합니까

그러기에

한 다리를 끌고 절룸발이 걸음을 걷습니다

 

잊고 살다가도

돌이켜보면 싱거웁지요

애써 살 값도 없지요마는

그렇다고

애써 죽기는 또 힘들지요

우리 웃음은 속이 비이고

기쁘단 말은 字典에서도 지워지오

 

나는 아주 悲觀하기로 결심을 했소

 

 

 

연애

 

어제 날이 채 가지도 않아

또 새로운 날이 부채살을 펴는 나라 오--

 

언덕에는 꽃이 가득히 피고

새들은 수없이 가지에서 노래한다.

 

 

 

안 가는 시계

 

네가 그런 엄숙한 얼굴을 할 줄은 몰랐다

 

 

 

비에 젖은 마음

 

불도 없는 방안에 쓰러지며

내쉬는 한숨따라 '아 어머니!' 석기는 말

모진 듯 참어오는 그의 모든 설어움이

공교로운 고임새의 문허져 나림같이

이 한말을 따라 한 번에 쏟아진다.

 

 

 

빛나는 자취

 

다숩고 밝은 햇발 이같이 나려 흐르느니

숨어 있던 어린 풀싹 소근거려 나오고

새로 피어 수줍은 가지 우 분홍 꽃잎들도

어느 하나 그의 입맞춤을 막아보려 안합니다

 

푸른밤 달 비쵠 데서는 이슬이 구슬되고

길바닥에 고인 물도 호수같이 별을 잠급니다

조그만 반딧불은 여름밤 벌레라도

꼬리로 빛을 뿌리고 날아다니는 혜성입니다

 

그대시어 허리 가느단 계집애 앞에

무릎 꿇고 비는 사랑을 버리옵고

몸에서 스사로 빛을 내는 사나이가 되옵소서

 

고개 빠뜨리고 마음 떨리는 사랑을 버리옵고

은비둘기 같이 가슴 내밀고 날아가시어

다만 나의 흐린 눈으로 그대의 빛나는 자취를 따르게 하옵소서

 

 

 

밤기차에 그대를 보내고

 

1

온전한 어둠 가운데 사라져버리는

한 낱 촛불이여.

이 눈보라 속에 그대 보내고 돌아서 오는

나의 가슴이여.

쓰린 듯 비인 듯한데 뿌리는 눈은

들어 안겨서

발마다 미끄러지기 쉬운 걸음은

자취 남겨서

머지도 않은 앞이 그저 아득하여라.

 

2

밖을 내어다보려고, 무척 애쓰는

그대로 설으렷다.

유리창 검은 밖에 제 얼굴만 지쳐 눈물은

그렁그렁하렷다.

내 방에 들면 구석구석이 숨겨진 그 눈은

내게 웃으렷다.

목소리 들리는 듯 성그리는 듯 내 살은

부대끼렷다.

가는 그대 보내는 나 그저 아득하여라.

 

3

얼어붙은 바다에 쇄빙선같이 어둠을

헤쳐나가는 너.

약한 정 뿌리쳐 떼고 다만 밝음을

찾아가는 그대.

부서진다 놀래랴 두 줄기 궤도를

타고 달리는 너.

죽음이 무서우랴 힘있게 사는 길을

바로 닫는 그대

실어가는 너 실려가는 그대 그저 아득하여라.

 

4

이제 아득한 겨울이면 머지 못할 봄날을

나는 바라보자.

봄날같이 웃으며 달려들 그의 기차를

나는 기다리자.

'잊는다' 말인들 어찌 차마! 이대로 웃기를

나는 배워보자.

하다가는 험한 길 헤쳐가는 그의 걸음을

본받아도 보자.

마침내는 그를 따르는 사람이라도 되어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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