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정희 시인, 수필가
1947년, 전남 보성
동국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서울여자대학교 대학원
1969년 월간문학 시 '불면’으로 등단
목월문학상, 정지용 문학상
시집 《문정희 시집》, 《새떼》, 《찔레》, 《하늘보다 먼 곳에 매인 그네》 등
문정희 시 모음
◈ 한계령을 위한 연가
한겨울 못 잊을 사람하고
한계령쯤을 넘다가
뜻밖의 폭설을 만나고 싶다.
뉴스는 다투어 수십 년만의 풍요를 알리고
자동차들은 뒤뚱거리며
제 구멍들을 찾아가느라 법석이지만
한계령의 한계에 못 이긴 척 기꺼이 묶였으면.
오오, 눈부신 고립
사방이 온통 흰 것뿐인 동화의 나라에
발이 아니라 운명이 묶였으면.
이윽고 날이 어두워지면 풍요는
조금씩 공포로 변하고 현실은
두려움의 색채를 드리우기 시작하지만
헬리콥터가 나타났을 때에도
나는 결코 손을 흔들지는 않으리.
헬리콥터가 눈 속에 갇힌 야생조들과
짐승들을 위해 골고루 먹이를 뿌릴 때에도...
시퍼렇게 살아 있는 젊은 심장을 향해
까아만 포탄을 뿌려 대던 헬리콥터들이
고라니나 꿩들의 일용할 양식을 위해
자비롭게 골고루 먹이를 뿌릴 때에도
나는 결코 옷자락을 보이지 않으리.
아름다운 한계령에 기꺼이 묶여
난생 처음 짧은 축복에 몸 둘 바를 모르리.
◈ 흙
흙이 가진 것 중에
제일 부러운 것은 그의 이름이다
흙 흙 흙 하고 그를 불러보라
심장 저 깊은 곳으로부터
눈물 냄새가 차오르고
이내 두 눈이 젖어온다
흙은 생명의 태반이며
또한 귀의처인 것을 나는 모른다
다만 그를 사랑한 도공이 밤낮으로
그를 주물러서 달덩이를 낳은 것을 본 일은 있다
또한 그의 가슴에 한 줌의 씨앗을 뿌리면
철 되어 한 가마의 곡식이 돌아오는 것도 보았다
흙의 일이므로
농부는 그것을 기적이라 부르지 않고
겸허하게 농사라고 불렀다
그래도 나는 흙이 가진 것 중에
제일 부러운 것은 그의 이름이다
흙 흙 흙 하고 그를 불러 보면
눈물샘 저 깊은 곳으로부터
슬프고 아름다운 목숨의 메아리가 들려온다
하늘이 우물을 파 놓고 두레박으로
자신을 퍼 올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 작가의 사랑
여성 작가 여섯이 한방에 모여
사랑의 경험을 이야기하자고 한 밤
마른 입술을 오므리며
폴란드 시인이 말했어
사랑 이야기라면 당신들은 우선
유대인을 잊어서는 안 돼! 오슈비엥침!
아우슈비츠를 알기 전에 사랑을 말하는 것은
진정한 작가가 아니야
순간 모두는 입을 다물고 말았어
도박판에서 전 재산을 탕진하고 돌아온 새벽처럼
텅 빈 눈으로
나는 창밖을 바라보았어
멀리 두고 온 땅, 조국이라는 말만으로
괜히 눈물이 차올랐어
빌어먹을, 나는 진짜 시인인가 봐!
잘 알아, 하지만 작가가 언제까지
한곳에 못 박혀 있을 수는 없어
자유로운 상상력으로
인간을 더 깊이 써야 해
그리스 작가인지 터기 작가가 말했어
애절한 근친과 죄와 폭력 들
내 여권 속의 분단과 증오와 노란 리본 들
검고 흰 살과 피 으깨어진 화상의 흔적을
남미와 아프리카와 유럽과 동아시아 작가가
한방에 모여 사랑을 이야기하고자 한 밤
내가 불쑥 말했어
애국심은 팬티와 같아 누구나 입고 있지만
나 팬티 입었다고 소리치지 않아
먼저 팬티를 벗어야 해
우리는 팬티를 벗었어
하지만 나는 끝내 벗지 못한 것 같아
눈만 뜨면 팬티를 들고 흔드는 거리에서 자란
나는 하나를 벗었지만, 그 안에
센티멘털 팬티를 또 겹겹이 입고 있었지
사랑은 참 어려워
사랑은 지옥에서 온 개
◈ 늙은 코미디언
코미디를 보다가 와락 운적이 있다
늙은 코미디언이 맨 땅에 드러누워
풍뎅이처럼 버둥거리는 것을 보고
그만 울음을 터뜨린 어린 날이 있었다
사람들이 깔깔 웃으며 말했다
아이가 코미디를 보고 운다고
그때 나는 세상에 큰 비밀이 있음을 알았다
웃음과 눈물 사이
살기 위해 버둥거리는
어두운 맨 땅을 보았다
그것이 고독이라든가 슬픔이라든가
그런 미흡한 말로 표현되는 것을 알았을 때
나는 그 맨 땅에다 시 같은 것을 쓰기 시작했다
늙은 코미디언처럼
거꾸로 뒤집혀 버둥거리는
풍뎅이처럼
◈ 남편
아버지도 아니고 오빠도 아닌
아버지와 오빠 사이의 촌수쯤 되는 남자
내게 잠 못 이루는 연애가 생기면
제일 먼저 의논하고 물어보고 싶다가도
아차, 다 되어도 이것만은 안 되지 하고
돌아 누워버리는
세상에서 제일 가깝고 제일 먼 남자
이 무슨 원수인가 싶을 때도 있지만
지구를 다 돌아다녀도
내가 낳은 새끼들을 제일로 사랑하는 남자는
이 남자일 것 같아
다시금 오늘도 저녁을 짓는다
그러고 보니 밥을 나와 함께
가장 많이 먹은 남자
나에게 전쟁을 가장 많이 가르쳐 준 남자
◈ 남자를 위하여
남자들은
딸을 낳아 아버지가 될 때
비로소 자신 속에서 으르렁거리던 짐승과
결별한다.
딸의 아랫도리를 바라보며
신이 나오는 길을 알게 된다.
아기가 나오는 곳이
바로 신이 나오는 곳임을 깨닫고
문득 부끄러워 얼굴 붉힌다.
딸에게 뽀뽀를 하며
자신의 수염이 때로 독가시였음도 안다.
남자들은
딸을 낳아 아버지가 될 때
비로소 자신 속에서 으르렁거리던 짐승과
화해한다.
아름다운 어른이 된다.
◈ 마흔 살의 시
숫자는 시보다도 정직한 것이었다
마흔 살이 되니
서른아홉 어제까지만 해도
팽팽하던 하늘의 모가지가
갑자기 명주솜처럼
축 처지는 거라든가
황국화 꽃잎 흩어진
장례식에 가서
검은 사진테 속에
고인 대신 나를 넣어놓고
끝없이 나를 울다 오는 거라든가
심술이 나는 것도 아닌데 심술이 나고
겁이 나는 것도 아닌데 겁이 나고 비겁하게
사랑을 새로 시작하기보다는
잊기를 새로 시작하는 거라든가.
마흔 살이 되니
웬일인가?
이제가지 떠돌던
세상의 회색이란 회색
모두 내게로 와서
어딘가에 전화를 걸어
새 옷을 예약하는 거라든가
아, 숫자가 내 기를 시든 풀처럼
팍 꺾어놓는구나.
◈ 내가 세상을 안다고 생각할 때
내가 세상을 안다고 생각할 때
얼마나 모르고 있는지
그때 나는 별을 바라본다.
별은 그저 멀리서 꿈틀거리는 벌레이거나
아무 의도도 없이 나를 가로막는 돌처럼
나의 운명과는 상관도 없지만
별을 나는 좋아한다.
별이라고 말하며 흔들린다. 아무래도
나는 사물보다 말을 더 좋아하는가보다.
혼자 차를 마시면서도
차를 마시고 싶다라는 말을 하고 싶고
여행보다
여행 떠나고 싶다라는 말을
정작 연애보다는
사랑한다라는 말을 나는 좋아한다.
어쩌면 별도 사막일지 몰라
결국 지상에는 없는 불타는 지점
하지만 나는 별을 좋아한다.
나의 조국은 별 같은 말들이 모여서 세운
시의 나라
나를 키운 고향은 책인지도 몰라
◈ 물 만드는 여자
딸아, 아무 데나 서서 오줌을 누지 말아라
푸른 나무 아래 앉아서 가만가만 누어라
아름다운 네 몸 속의 강물이 따스한 리듬을 타고
흙 속에 스미는 소리에 귀 기울려 보아라
그 소리에 세상의 풀들이 무성히 자라고
네가 대지의 어머니가 되어가는 소리를
때때로 편견처럼 완강한 바위에다
오줌을 갈겨 주고 싶을 때도 있겠지만
그럴 때일수록
제의를 치르듯 조용히 치마를 걷어 올리고
보름달 탐스러운 네 하초를 대지에다 살짝 대어라
그리고는 쉬이 쉬이 네 몸속의 강물이
따스한 리듬을 타고 흙 속에 스밀 때
비로소 너와 대지가 한 몸이 되는 소리를 들어보아라
푸른 생명들이 환호하는 소리를 들어보아라
내 귀한 여자야
◈ 몸이 큰 여자
저 넓은 보리밭을 갈아엎어
해마다 튼튼한 보리를 기르고
산돼지 같은 남자와 씨름하듯 사랑을 하여
알토란 아이를 낳아 젖을 물리는
탐스런 여자의 허리 속에 살아 있는 불
저울과 줄자의 눈금이 잴 수 있을까
참기름 비벼 맘껏 입 벌려 상추쌈을 먹는
야성의 핏줄 선명한
뱃가죽 속의 고향 노래를
젖가슴에 뽀얗게 솟아나는 젖샘을
어느 눈금으로 잴 수 있을까
몸은 원래 그 자체의 음악을 가지고 있지*
식사 때마다 밥알을 세고 양상추의 무게를 달고
그리고 규격 줄자 앞에 한 줄로 줄을 서는
도시 여자들의 몸에는 없는
비옥한 밭이랑의
왕성한 산욕(産慾)과 사랑의 노래가
몸을 자신을 태우고 다니는 말로 전락시킨
상인의 술책 속에
짧은 수명의 유행 상품이 된 시대의 미인들이
둔부의 규격과 매끄러운 다리를 채찍질하며
뜻 없이 시들어가는 이 거리에
나는 한 마리 산돼지를 방목하고 싶다
몸이 큰 천연 밀림이 되고 싶다
* 미국의 심리분석학자 클라리사 P. 에스테스가 한 말.
◈ 오빠
이제부터 세상의 남자들을
모두 오빠라고 부르기로 했다.
집안에서 용돈을 제일 많이 쓰고
유산도 고스란히 제몫으로 차지한
우리 집의 아들들만 오빠가 아니다.
오빠!
이 자지러질 듯 상큼하고 든든한 이름을
이제 모든 남자를 향해
다정히 불러주기로 했다.
오빠라는 말로 한방 먹이면
어느 남자인들 가벼이 무너지지 않으리
꽃이 되지 않으리.
모처럼 물안개 걷혀
길도 하늘도 보이기 시작한
불혹의 기념으로
세상 남자들은
이제 모두 나의 오빠가 되었다.
나를 어지럽히던 그 거칠던 숨소리
으쓱거리며 휘파람을 불러주던 그 헌신을
어찌 오빠라 불러주지 않을 수 있으랴
오빠로 불리워지고 싶어 안달이던
그 마음을
어찌 나물 캐듯 캐내어 주지 않을 수 있으랴
오빠! 이렇게 불러주고 나면
세상엔 모든 짐승이 사라지고
헐떡임이 사라지고
오히려 두둑한 지갑을 송두리째 들고 와
비단구두 사주고 싶어 가슴 설레이는
오빠들이 사방에 있음을
나 이제 용케도 알아버렸다.
◈ 조등이 있는 풍경
이내 조등이 걸리고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아무도 울지 않았다
어머니는 80세까지 장수했으니까
우는 척만 했다
오랜 병석에 있었으니까
하지만 어머니가 죽었다
내 엄마, 그 눈물이
그 사람이 죽었다
저녁이 되자 더 기막힌 일이 일어났다
내가 배가 고파지는 것이었다
어머니가 죽었는데
내 위장이 밥을 부르고 있었다
누군가 갖다준 슬픈 밥을 못 이긴 척 먹고 있을 때
고향에서 친척들이 들이닥쳤다
영정 앞에 그들은 잠시 고개를 숙인 뒤
몇 십 년 만에 내 손을 잡았다
그리고 위로의 말을 건넸다
"아니, 이 사람이 막내 아닌가? 폭 늙었구려."
주저 없이 나를 구덩이 속에 처박았다.
이어 더 정확한 조준으로 마지막 확인 사살을 했다
"못 알아보겠어.
꼭 돌아가신 어머니인 줄 알았네"
◈ 탯줄
대학병원 분만실 의자는 Y자였다
어디로도 도망칠 수 없는
새끼 밴 짐승으로
두 다리 벌리고 하늘 향해 누웠다
성스러운 순간이라 말하지 말라
하늘이 뒤집히는
날카로운 공포
이빨 사이마다 비명이 터져 나왔다
불인두로 생살 찢기웠다
드디어
내 속에서 내가 분리되었다
생명과 생명이 되었다
두 생명 사이에는
지상의 가위로는 자를 수 없는
긴 탯줄이 이어져 있었다
가장 처음이자
가장 오래인 땅 위의 끈
이보다 확실하고 질긴 이름을
사람의 일로는 더 만들지 못하리라
얼마 후
환속한 성자처럼
피 냄새 나는 분만실을
한 어미와 새끼가
어기적거리며 걸어 나왔다
◈ 나의 아내
나에게도 아내가 있었으면 좋겠다
봄날 환한 웃음으로 피어난
꽃 같은 아내
꼭 껴안고 자고 나면
나의 씨를 제 몸 속에 키워
자식을 낳아주는 아내
내가 돈을 벌어다 주면
밥을 지어주고
밖에서 일할 때나 술을 마실 때
내 방을 치워놓고 기다리는 아내
또 시를 쓸 때나
소파에서 신문을 보고 있을 때면
살며시 차 한 잔을 끓여다주는 아내
나 바람나지 말라고
매일 나의 거울을 닦아주고
늘 서방님을 동경 어린 눈으로 바라보는
내 소유의 식민지
명분은 우리 집안의 해
나를 아버지로 할아버지로 만들어주고
내 성씨와 족보를 이어주는 아내
오래 전 밀림 속에 살았다는 한 동물처럼
이제 멸종되어간다는 소식도 들리지만
아직 절대 유용한 19세기의 발명품 같은**
오오, 나에게도 아내가 있었으면 좋겠다
◈ 손의 고백
가만히 손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우리의 손이 언제나 욕망을 쥐는 데만
사용되고 있다는 말도 거짓임을 압니다
솨아솨아 작은 오솔길을 따라가 보면
무엇을 쥐었을 때보다
그저 흘려보낸 것이 더 많았음을 압니다
처음 다가든 사랑조차도
그렇게 흘러보내고 백기처럼
오래 흔들었습니다
대낮인데도 밖은 어둡고 무거워
상처 입은 짐승처럼
진종일 웅크리고 앉아
숨죽여 본 사람은 압니다
아무 욕망도 없이 캄캄한 절벽
어느새 초침을 닮아버린 우리들의 발걸음
집중 호우로 퍼붓는 포탄들과
최신식 비극과
햄버거처럼 흔한 싸구려 행복들 속에
가만히 손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생매장된 동물처럼
일어설 수도 걸어갈 수도 없어
가만히 손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솨아솨아 흘려보낸 작은 오솔길이
와락 감동으로 다가옵니다
◈ 고향을 찾아서 1
십 수 년 만에 고향에 돌아가
민 대머리처럼 흙이 벗겨진
아버지 무덤 앞에 섰다.
부끄럽구나
저 널부러진 검불 하나에도
나됩구는 사금파리 하나에도
나는 몸 둘 바를 모르겠구나.
내가 때묻은 티티새처럼
이름도 없는 항구로
떠돌아다니는 동안에도
저 산맥 저 무덤은 비바람에
이마를 적시며 날 기다리고 있었구나.
언젠가 돌아올
내 속살을 보고 있었구나.
◈ 고향을 찾아서 2
가을도 아닌데 고향 사람들은
모두 낙엽 되어 흩어져 있었다.
다리에 구렁이 같은 힘줄이 솟아
쌀 두 가마 등짐 지던 사출이 아저씨도
이빨로 소주병을 까던 기훈이 오빠도
엉댕이가 맷돌 같던 쌀장수 화순댁도
모두 어김없이 낙엽이 되었다.
키다리 선출이 칠푼이 알밤이조차도
모두 낙엽이 되었다.
수북한 낙엽 속에서 용케
송장 메뚜기처럼
살아남은 이복언니가 튀어나왔다.
그녀는 날 보고 그 자리에서
땅을 치며 통곡했다.
마른 갈비뼈 사이로
쉬잇쉬잇 해수병이 드나드는
목쉰 울음 속에
그녀는 내 이름 부르지 않고
30년 전에 죽은
울 아버지 부르며 통곡했다.
내 슬픔 당당하게 뺏어들고
땅을 치며 먼저 울어버렸다.
나는 슬픔조차 빼앗겨
타관 사람처럼
그냥 서 있기만 했다
◈ 꿈
내 친구 연이는 꿈 많던 계집애
그녀는 시집갈 때 이불보따리 속에
김찬삼의 세계여행기 한 질 넣고 갔었다.
남편은 실업자 문학청년
그래서 쌀독은 늘 허공으로 가득했다.
밤에만 나가는 재주 좋은 시동생이
가끔 쌀을 들고 와 먹고 지냈다.
연이는 밤마다
세계일주 떠났다.
아테네 항구에서 바다가제를 먹고
그 다음엔 로마의 카타꼼베로!
검은 신부가 흔드는
촛불을 따라 들어가서
천 년 전에 묻힌 뼈를 보고
으스스 떨었다.
오늘은 여기서 자고 내일 또 떠나리.
아! 피사, 아시시, 니스, 깔레...
구석구석 돌아다니느라
그녀는 혀가 꼬부라지고
발이 부르텄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는 그만
뉴욕의 할렘 부근에서 쓰러지고 말았다.
밤에만 눈을 뜨는
재주끈 시동생이
김찬삼의 세계여행기를 몽땅 들고 나가
라면 한 상자와 바꿔온 날이었다.
그녀는 비로소 울었다.
결혼반지를 팔던 날도 울지 않던
내 친구 연이는
그날 뉴욕의 할렘 부근에 쓰러져서 꺽꺽 울었다
◈ 찔레
꿈결처럼
초록이 흐르는 이 계절에
그리운 가슴 가만히 열어
한 그루
찔레로 서 있고 싶다.
사랑하던 그 사람
조금만 더 다가서면
서로 꽃이 되었을 이름
오늘은
송이송이 횐 찔레꽃으로 피워놓고
먼 여행에서 돌아와
이슬을 털듯 추억을 털며
초록 속에 가득히 서 있고 싶다.
그대 사랑하는 동안
내겐 우는 날이 많았었다.
아픔이 출렁 거려
늘 말을 잃어갔다.
오늘은 그 아픔조차
예쁘고 뽀족한 가시로
꽃 속에 매달고
슬퍼하지 말고
꿈결처럼
초록이 흐르는 이 계절에
무성한 사랑으로 서 있고 싶다.
◈ 성공시대
어떻게 하지? 나 그만 부자가 되고 말았네
대형 냉장고에 가득한 음식
옷장에 걸린 수십 벌의 상표들
사방에 행복은 흔하기도 하지
언제든 부르면 달려오는 자장면
오른발만 살짝 얹으면 굴러가는 자동차
핸들을 이리저리 돌리기만 하면
나 어디든 갈 수 있네
나 성공하고 말았네
이제 시만 폐업하면 불행 끝
시 대신 진주목걸이 하나만 사서 걸면 오케이
내 가슴에 피었다 지는 노을과 신록
아침 햇살보다 맑은 눈물
도둑고양이처럼 기어오르던 고독 다 귀찮아
시 파산 선고
행복 벤처 시작할까
그리고 저 캄캄한 도시 속으로
폭탄같이 강렬한 차 하나 몰고
미친 듯이 질주하기만 하면
◈ 제비를 기다리며
제비들을 잘 돌보는 것은 우리 집 가풍
말하자면 흥부의 영향이지만, 솔직히
제비보다는 박씨, 박씨보다는
박씨에서 쏟아질 금은보화 때문이지만
아시다시피 나는 가풍을 잘 이어가는 착한 딸
처마 밑에 제비들을 두루 잘 키우고 싶답니다
하지만 요즘에는 강남에도
제비들이 좀체 나타나지 않아
지하철역에서 복권을 사서
주말이면 허공으로 날리기도 하고
참다못해 빈 제비집에 손을 넣었다가
뜻밖에 숨은 뱀에게 물리기도 한답니다
포장마차에서 죽은 제비다리를 구워먹으며
시름을 달래며
솔직히 내가 기다리는 것은
박씨거나 박 속에서 쏟아질 금은보화가 아니라
물찬 제비!
날렵하게 사모님처럼 허리를 감고
한 바퀴 제비와 함께 휘익! 돌고 싶은 것은
누구보다 당신이 더 잘 아시겠지
◈ 밤(栗) 이야기
내 어머니는 분명 한쪽 눈이 먼 분이셨다
어릴 적 운동회 날, 실에 매단 밤 따먹기에 나가
알밤은 키 큰 아이들이 모두 따가고
쭉정이 밤 한 톨 겨우 주워온 나를
이것 봐라, 알밤 주워왔다! 고 외치던 어머니는
분명 한쪽 눈이 깊숙이 먼 분이셨다
어머니의 노래는 그 이후에도
30년도 더 넘게 계속되었다
마지막 숨 거두시는 그 순간까지도
예나 지금이나 쭉정이 밤 한 톨
남의 발밑에서 겨우 주워오는
내 손목 치켜세우며
이것 봐라, 내 새끼 알밤 주워왔다! 고
사방에 대고 자랑하셨다
◈ 나의 장미
시인은 아름다운가
시간 위에 장미를 피우려고
피를 돌리는 존재
그는 생명인가, 언어인가
그의 감옥에는
홀로 앉아 시를 쓰는 손만 보일 뿐
그는 소경인지도 모른다
시 속에서만 부엉이처럼 눈을 뜨고 사니
현실은 늘 저주
사랑은 언제나 이별
그의 독방에는
그가 풀어놓은 말들이 저희끼리
서로 연애를 하여
결국 까만 알을 낳는다
시는 언어의 딸이 아니라
침묵의 딸인지도 모른다
그는 사랑을 말한 적도 없다
시 쓰다 보면 거기 사랑이 있을 뿐
숨 쉬는 장미 같은...
◈ 순간
찰랑이는 햇살처럼
사랑은
늘 내 곁에 있었지만
나는 그에게
날개를 달아주지 못했다
쳐다보면 숨 막히는
어쩌지 못하는 순간처럼
그렇게 눈부시게 보내 버리고
그리고
오래오래 그리워했다
◈ 할머니와 어머니
김포공항을 떠날 때 나는 등 뒤에다
모든 것을 두고 떠나왔다
남편의 사진은 옷장 속에 깊이 숨겨두었고
이제는 바다처럼 넓어져서
바람소리 숭숭 들려오는 넉넉한 나이도
기꺼이 주민등록증 속에 끼워두고 왔다
그래서 나는 큰 가방을 들었지만
날을 듯이 가벼웠었다
내가 가진 거라곤 출렁이는 자유,
소금처럼 짭짤한 외로움
이거면 시인의 식사로는 풍족하다
그런데 웬 일일까
십 수 년 전에 벌써 죽은 줄로만 알았던
우리 할머니와 우리 어머니가
감쪽같이 나를 따라와
내 가슴 깊숙이 자리 잡고 앉아
사사건건 모든 일에 간섭하고 있다
두 눈 동그랗게 뜨고
“조심조심 길조심” 성가시게 한다
◈ 율포의 기억
일찍이 어머니가 나를 바다에 데려간 것은
소금기 많은 푸른 물을 보여주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바다가 뿌리 뽑혀 밀려 나간 후
꿈틀거리는 검은 뻘 밭 때문이었다
뻘 밭에 위험을 무릅쓰고 퍼덕거리는 것들
숨 쉬고 사는 것들의 힘을 보여주고 싶었던 거다
먹이를 건지기 위해서는
사람들은 왜 무릎을 꺾는 것일까
깊게 허리를 굽혀야만 할까
생명이 사는 곳은 왜 저토록 쓸쓸한 맨살일까
일찍이 어머니가 나를 바다에 데려간 것은
저 무위(無爲)한 해조음을 들려주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물 위에 집을 짓는 새들과
각혈하듯 노을을 내뿜는 포구를 배경으로
성자처럼 뻘 밭에 고개를 숙이고
먹이를 건지는
슬프고 경건한 손을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 출세한 시인에게
너는 생각보다 더 빨리 하수인이 되고 말았다
물고기처럼 싱싱한 상상력과 지느러미 대신
갈퀴처럼 날카로운 손이라는 도구를 쓸 줄 알았다
너에게 속도와 질주를 말한 것은
그런 뜻이 아니었다
복권에 당첨된 표정 같은 득의만면이 아니라
안개 속에 두려움을 커튼처럼 젖히고 나가
비로소 저 산정에 서서 땀을 씻으라는 것이었다
서서히 네 자신에 도달하라는 것이었다
지난밤의 외로움을 바다 끝까지 밀고나가
심연에 살며
불온한 천재로 자꾸 태어나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네가 제일 먼저 배운 것은 위험한 방식으로
남을 밀어뜨리는 일이었다
관습과 지배의 얼굴을 빠른 속도로 익히고
그 아래 꽃을 바치는 일이었다
시인아, 너는 힘 있는 구두와 빠른 골목을
너무 쉽게 알아버렸다
조금 더 헤매어도 좋았을 것을…
배회와 방황을 속으로 비웃으며
유명한 이름아, 네가 읊조리는 시는
겨우 의미의 시중을 들기 바쁘구나
그래, 매소부(賣笑婦)처럼
예쁘게 부드럽게 손을 흔들어라
이제 물심양면의 하수인들이
책을 사들고 상패를 싸 들고
네 앞에 장강(長江)을 이룰 시간이 되었다
◈ 찬밥
아픈 몸 일으켜 혼자 찬밥을 먹는다
찬밥 속에 서릿발이 목을 쑤신다
부엌에는 각종 전기 제품이 있어
1분만 단추를 눌러도 따끈한 밥이 되는 세상
찬밥을 먹기도 쉽지 않지만
오늘 혼자 찬밥을 먹는다
가족에겐 따스한 밥 지어 먹이고
찬밥을 먹던 사람
이 빠진 그릇에 찬밥 훑어
누가 남긴 무우 조각에 생선 가시를 핥고
몸에서는 제일 따스한 사랑을 뿜던 그녀
깊은 밤에도
혼자 달그락거리던 그 손이 그리워
나 오늘 아픈 몸 일으켜 찬밥을 먹는다
집집마다 신을 보낼 수 없어
신 대신 보냈다는 설도 있지만
홀로 먹는 찬밥 속에서 그녀를 만난다
나 오늘
◈ 유방
윗옷 모두 벗기운 채
맨살로 차가운 기계를 끌어안는다
찌그러지는 유두 속으로
공포가 독한 에테르 냄새로 파고든다
패잔병처럼 두 팔 들고
맑은 달 속의 흑점을 찾아
유방암 사진을 찍는다
사춘기 때부터 레이스 헝겁 속에
꼭꼭 싸매 놓은 유방
누구에게나 있지만 항상
여자의 것만 문제가 되어
마치 수치스러운 과일이 달린 듯
깊이 숨겨왔던 유방
우리의 어머니가 이를 통해
지혜와 사랑을 입에 넣어주셨듯이
세상의 아이들을 키운 비옥한 대자연의 구릉
다행히 내게도 두 개나 있어 좋았지만
오랜동안 진정 나의 소유가 아니었다
사랑하는 남자의 것이었고
또 아기의 것이었으니까
하지만 나 지금 윗옷 모두 벗기운 채
맨살로 차가운 기계를 안고 서서
이 유방이 나의 것임을 뼈저리게 느낀다
맑은 달 속의 흑점을 찾아
축 늘어진 슬픈 유방을 촬영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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