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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詩 같은 삶을 위하여
☞ 문학의 뜨락

최영미 시 모음

by 石右 尹明相 2022. 3. 28.

   

최영미 시인(1961), 서울

홍익대학교 대학원

1992'창작과 비평' 등단.

2006년 이수문학상

 

 

최영미 시 모음

 

 

여행

 

왜 떠나려 해?

나도 모르겠어.

 

이유를 알고 떠난 적은 한 번도 없었지.

 

 

  짧은 생각

 

양심과 도덕에 구애받지 않는 자들이

이 세계를 만들고 파괴하지

 

단순한 흑백보다는 복잡한 회색이 인류에게 덜 해롭다

 

 

지하철 유감

 

내 앞에 앉은 일곱 사람 중에

청바지를 발견할 수 없다면

청바지를 앉히지 않은 의자가 있다면,

 

내 앞에 앉은 일곱 남녀 가운데

휴대전화를 만지작거리지 않는 사람이

(하나라도!) 있다면,

나는 이 스마트한 문명을 용서해줄 수 있다

 

 

시골 장례식

 

용문에서 목격한 어느 죽음.

앞산 뒤뜰이 떠들썩하게 소리와 색으로 물들어

꽃 같은 죽음.

생일잔치 같은 장례식.

 

이 세상에 나올 때,

그리고 들어갈 때만 화려한 사람들.

  

 

꽃샘추위

 

찬바람 속에 봄을 숨겨놓은

3월이 제일 춥다

 

겨울이 끝나고

봄을 기다리는 마음에

봄이 오기도 전에

두터운 외투를 치우고

 

당신을 숨겨놓은 방은 춥지 않았지

  

 

지리멸렬한 고통

 

내게 칼을 겨눈 그들은

내 영혼의 한 터럭도 건드리지 못했어

 

피를 흘리지는 않았지만

눈물을 보이지는 않았지만

 

지리멸렬한 고통이 제일 참기 힘들지

 

 

예정에 없던 음주

 

위로받고 싶을 때만

누군가를 찾아가, 위로하는 척했다

 

 

최소한의 자존심

 

지금은 아니야.

나는 내가 완전히 잊혀진 뒤에 죽겠어.

알지도 못하면서 이러쿵저러쿵 떠드는 자들에게

무덤에서 일어나 일일이 대꾸하고 싶지 않으니까.

 

 

굳은 빵에 버터 바르듯

 

그는 내가 그를 사랑할 시간도

미워할 시간도 주지 않았다

 

언젠가, 기쁨도 고통도 없이

굳은 빵에 버터 바르듯

너희들을 추억하리라

 

 

황혼

 

이마를 태우는 건

여름 한낮의 작열하는 태양만이 아니다

황혼빛에 눈이 멀 수도 있다

 

 

세기말, 제기랄

 

잔치가 끝난 뒤에도 설거지 중인

내게 죄가 있다면

이 세상을 사랑한 죄밖에.

 

한 번도 제대로 저지르지 못했으면서

평생을 속죄하며 살았다.

 

비틀거리며 가는

세기말, 제기랄이여.

 

 

닮은꼴

 

월드컵 골 모음 비디오를 보고 나는 알았다

같은 골은 하나도 없다

비슷하지만 다른 인생을 다루는

진짜 작가라면 같은 문장을 두 번 쓰지 않는다

 

 

인생보다 진실한 게임

 

돈과 폭력과 약물로 오염된

아무리 더러운 경기장에도

한 조각의 진실이 살아 움직인다.

그래서 인생보다 아름다운 게임이 축구다.

 

 

인간의 두 부류

 

공격수는 골대를 향해

수비수는 골대를 등지며 서 있고

공격수는 한 골로는 부족하지만

수비수는 득점을 못해도 실점이 없으면 만족한다.

 

먼저 경기장에 나서지는 않지만, 때가 되면 나는

전 세계와도 맞서 싸우는 수비수가 되련다.

 

 

가을바람

 

가을바람은 그냥 스쳐가지 않는다

밤 별들을 못 견디게 빛나게 하고

가난한 연인들 발걸음을 재촉하더니

헤매는 거리의 비명과 한숨을 몰고 와

어느 썰렁한 자취방에 슬며시 내려앉는다

 

그리고 생각나게 한다

지난여름을, 덧없이 보낸 밤들을

못 한 말들과 망설였던 이유들을

성은 없고 이름만 남은 사람들을

낡은 앨범 먼지를 헤치고 까마득한 사연들이 튀어나온다

 

가을바람 소리는 속절없는 세월에 감금된 이의

벗이 되었다, 연인이 되었다

안주가 되었다

 

가을바람은 재난이다

 

 

가을에는

 

내가 그를 사랑한 것도 아닌데

미칠 듯 그리워질 때가 있다

바람의 손으로 가지런히 풀어놓은, 뭉게구름도 아니다

양떼구름도 새털구름도 아니다

아무 모양도 만들지 못하고

이리저리 찢어지는 구름을 보노라면

 

내가 그를 그리워한 것도 아닌데

그가 내 속에 들어온다

뭉게뭉게 피어나 양떼처럼 모여

새털처럼 가지런히 접히진 않더라도

유리창에 우연히 편집된 가을 하늘처럼

한 남자의 전부가 가슴에 뭉클 박힐 때가 있다

 

무작정 눈물이 날 때가 있다

가을에는, 오늘처럼 곱고 투명한 가을에는

이 세상에서 가장 슬픈 표정으로 문턱을 넘어와

엉금엉금, 그가 내 곁에 앉는다

그럴 때면 그만 허락하고 싶다

사랑이 아니라도, 그 곁에 키를 낮춰 눕고 싶다

 

 

겨울의 문

 

고장 난 생의 시계가 움직이고

사랑이 눈처럼 쏟아지는 오후

 

멈춰 선 바퀴, 유리문 안에서

다시 만난 우리는

아련한 청춘을 더듬으며

삼십 년의 세월을 지워나갔다

뜨거운 입김에 가려

바깥세상이 까맣게 멀어지고

 

하얀 눈 위에 떨어진 가녀린 낙엽

거울에 새겨진 서러운 입술 자국들

 

 

괴물

 

En선생 옆에 앉지 말라고

문단 초년생인 내게 K시인이 충고했다

젊은 여자만 보면 만지거든

 

K의 충고를 깜박 잊고 En선생 옆에 앉았다가

Me too

동생에게 빌린 실크 정장 상의가 구겨졌다

 

몇 년 뒤, 어느 출판사 망년회에서

옆에 앉은 유부녀 편집자를 주무르는 En을 보고,

내가 소리쳤다

이 교활한 늙은이야!”

감히 삼십년 선배를 들이박고 나는 도망쳤다

En이 내게 맥주잔이라도 던지면

새로 산 검정색 조끼가 더러워질까봐

코트자락 휘날리며 마포의 음식점을 나왔는데,

 

100권의 시집을 펴낸

“En은 수도꼭지야. 틀면 나오거든

그런데 그 물이 똥물이지 뭐니

(우리끼리 있을 때) 그를 씹은 소설가 박 선생도

En의 몸집이 커져 괴물이 되자 입을 다물었다

 

자기들이 먹는 물이 똥물인지도 모르는

불쌍한 대중들

 

노털상 후보로 En의 이름이 거론될 때마다

En이 노털상을 받는 일이 정말 일어난다면,

이 나라를 떠나야지

이런 더러운 세상에서 살고 싶지 않아

 

괴물을 키운 뒤에 어떻게

괴물을 잡아야 하나

 

 

그대에게

 

내가 연애시를 써도 모를 거야

사람들은, 그가 누군지

한 놈인지 두 놈인지

오늘은 그대가 내일의 당신보다 가까울지

비평가도 모를 거야

그리고 아마 너도 모를 거야

내가 너만 좋아 했는 줄 아니?

사랑은 고유명사가 아니니까

때때로 보통으로 바람피는 줄 알겠지만

그래도 모를 거야

언제나 제자리로 돌아오는 건 습관도 뭣도 아니라는 걸

속아도 크게 속아야 얻는 게 있지

내가 계속 너만을 목매고 있다고 생각하렴

사진처럼 안전하게 붙어 있다고 믿으렴

어디 기분만 좋겠니?

힘도 날거야

다른 여자 열 명은 더 속일 힘이 솟을 거야

하늘이라도 넘어갈거야

그런데 그런데 연애시는 못 쓸걸

제 발로 걸어 나오지 않으면 두드려 패는 법은 모를 걸

아프더라도 스스로 사기 칠 힘은 없을 걸, 없을 걸

 

 

꽃집에서

 

프리지아

백합

국화

안개꽃

 

화려한 꽃다발은 저리 치우고

 

섞이지 않는

하나의 향기로 너는 다가와라

 

 

꿈의 페달을 밟고

 

내 마음 저 달처럼 차오르는데

네가 쌓은 돌담을 넘지 못하고

새벽마다 유산되는 꿈을 찾아서

잡을 수 없는 손으로 너를 더듬고

말할 수 없는 혀로 너를 부른다

몰래 사랑을 키워온 밤이 깊어 가는데

 

꿈의 페달을 밟고 너에게 갈 수 있다면

시시한 별들의 유혹은 뿌리쳐도 좋았다

 

 

꿈이 빠져나간 주머니

 

전성기가 지난 속옷들이

빨랫줄에 걸려 있다

 

꿈이 빠져나간 주머니

나란히 접힌 순면 100퍼센트가 슬퍼

 

일요일 저녁에 구워먹은 소고기가

적막한 위를 통과하고

낡은 나의 자화상을 응시하는 시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던

금요일과 토요일이 바구니에 담겨

 

세탁기에 들어가

구겨지는 욕망

90도로 삶아도 지워지지 않는 지난여름의 얼룩들

초대받지 못한 젊음이

이불을 두 겹 덮고도 추운 겨울밤

 

 

낙엽

 

아스팔트 위에 먼지처럼

왔다 가는 인생들

 

낙엽만이 위안이다

 

반 지하 셋방에서 목숨을 부지하는

서러운 현재를 덮고

어머니의 도저히 갚지 못할 해묵은 빚도 파묻고

나의 알량한 죄의식도 바람에 날려 보내고

 

오래 참은 눈물처럼 쏟아지는 낙엽

 

유행가를 들으며

내 손에서 부드럽게 구겨지는 너

여름은 사랑의 계절

여름은 젊음의 계절

내게도 여름이 있었던가?

   

 

내 마음의 비무장지대

 

커피도 홍차도 아니야

재미없는 소설책을 밤늦도록 붙잡고 있는 건

비 그친 뒤에도 우산을 접지 못하는 건

짐을 쌌다 풀었다 옷만 갈아입는 건

어제의 시를 고쳐 쓰게 하는 건

커피도 홍차도 아니야

 

울 수도 웃을 수도 없어

돌아누워도 엎드려도

머리를 헝클어도 묶어보아도

 

새침 떨어볼까요 청승 부려볼까요

처맨 손 어디 둘 곳 몰라

찻잔을 쥘까요 무릎 위에 단정히 놓을까요

은근히 내리깔까요 슬쩍 훔쳐볼까요

들쑥날쑥 끓는 속 어디 맬 곳 몰라

계절이 바뀔 때마다 가슴속 뒤져보면

 

그래도 어딘가 남아 있을, 잡초 우거진

내 마음의 비무장지대에 그대, 들어오겠나요

어느 날 문득 소나기 밑을 젖어보겠나요

잘 달인 추억 한술

취해서 꾸벅이는 밤

너에게로, 너의 정지된 어깨 너머로

잠수해 들어가고픈

 

비라도 내렸으면

 

 

내 마음의 지중해

 

갈매기 울음만 비듬처럼 흐드득 듣는 해안

 

바람도 없고

파도도 일지 않는다

 

상한 몸뚱이 끌어안고

물결만 아프게 부서지는

 

지중해, 내 마음의 호수

너를 향한 그리움에 갇혀

넘쳐도 흐르지 못하는

불구(不具)의 바다.

 

그 단단한 고요 찾아 나, 여기 섰다

내 피곤한 이마를 잠시 데웠다 떠나는 정오의 햇살처럼

자욱이 피어올라 한 점 미련 없이 사라지는 물안개처럼

흔적 없이

널 보낼 수 있을까

 

 

내 속의 가을

 

바람이 불면 나는 언제나 가을이다

 

높고 푸른 하늘이 없어도

뒹구는 낙엽이 없어도

지하철 플랫폼에 앉으면

시속 100킬로로 달려드는 시멘트 바람에

기억의 초상들이 우르르 몰려왔다 흩어지는

 창가에 서면 나는 언제나 가을이다

 

따뜻한 커피가 없어도

녹아드는 선율이 없어도

바람이 불면

오월의 풍성한 잎들 사이로 수많은 내가 보이고

거쳐 온 방마다 구석구석 반짝이는 먼지도 보이고

어쩌다 네가 비치면 그림자 밟아가며, 가을이다

담배연기도 뻣뻣한 그리움 지우지 못해

 

알미늄 샷시에 잘려진 풍경 한 컷,

우수수

 

네가 없으면 나는 언제나 가을이다.

팔짱을 끼고

   

 

내 편지는 지금 가고 있는 중

 

불륜은 아름답다고

불륜은 추하다고

카운터의 아가씨들은 저희끼리 돌아앉아 화장을 고치고

수다와 수다 사이 비가 내린다

노래는 흐른다 아, 시간아 멈춰다오

그녀의 머릿속에서 그에게로 가는 편지가 되돌아오고

결코 용서할 수 없다고,

서교동 Cafe´Havana에서 오늘도 커피잔을 깨뜨리며

오후의 정사처럼 부스스한 추억을 꿰맞추는 밤

창밖에선 허술한 어깨들이 서로 젖지 않으려 어깨를 비비고

우산 하나로 세상의 비를 다 막겠다는 것인지

멀리서 비에 젖는 어느 영혼을 위하여 빌고 싶은 밤

취한 건, 추한 건, 불륜만이 아니었다.

 

 

너에게로 가는 길을 나는 모른다

 

그리하여 이 시대 나는 어떤 노래를 불러야 하나

창자를 뒤집어 보여줘야 하나

 

나도 너처럼 썩었다고 적당히 시커멓고 적당히 순결하다고

버티어온 세월의 굽이만큼 마디마디 꼬여 있다고

그러나 심장 한 귀퉁이는 제법 시퍼렇게 뛰고 있다고

동맥에서 흐르는 피만큼은 세상모르게 깨끗하다고

은근히 힘을 줘서 이야기해야 하나

 

살아남은 자의 슬픔을

나도 충분히 부끄러워 할 줄 안다고

그때마다 믿어달라고, 네 손을 내 가슴에 얹어줘야 하나

 

내게 일어난 그 모든 일에도 불구하고

두 팔과 두 다리는 악마처럼 튼튼하다고

그처럼 여러 번 곱씹은 치욕과, 치욕 뒤의 입가심 같은 위로와

자위 끝의 허망한 한 모금 니코틴의 깊은 맛을

어떻게 너에게 말해야 하나

 

양치질할 때마다 곰삭은 가래를 뱉어낸다고

상처가 치통처럼, 코딱지처럼 몸에 붙어 있다고

아예 벗어부치고 보여줘야 하나

아아 그리하여 이 시대 나는 어떤 노래를 불러야 하나

 

아직도 새로 시작할 힘이 있는데

성한 두 팔로 가끔은 널 안을 수 있는데

너에게로 가는 길을 나는 모른다

 

 

마지막

 

산을 보았고

바다를 보았다

붉은 벽돌로 지은 집

고대 왕국의 폐허도 보았다

 

깨어진 기왓장에 새겨진 장인의 손바닥

거짓을 모르는 아이의 얼굴

어미의 눈가에 어른거리는 죽음의 그림자

팔다리가 마비된 아버지의 치부도 보았다

내 입술과 겹쳐졌던 입술들도 보였고

떠나간 친구의 뒷모습도 보였다

 

열차는 종착점에 가까워지는데

너의 어깨는 보이지 않았지

나를 매장할 손은

떠오르지 않았지

 

눈을 감고

산을 넘고

강을 건너도

 

 

미치도록 그리웠던 사랑

 

가을에는

내가 그를 사랑한 것도 아닌데

미칠 듯 그리워질 때가 있다

 

바람의 손으로 가지런히 풀어놓은, 뭉게구름도 아니다

양떼구름도 새털구름도 아니다

아무 모양도 만들지 못하고 이리저리 찢어지는 구름을 보노라면

내가 그를 그리워한 것도 아닌데

그가 내 속에 들어온다

 

뭉게뭉게 피어나 양떼처럼 모여

새털처럼 가지런히 접히진 않더라도

유리창에 우연히 편집된 가을 하늘처럼

한 남자의 전부가 가슴에 뭉클 박힐 때가 있다

 

무작정 눈물이 날 때가 있다

가을에는, 오늘처럼 곱고 투명한 가을에는

이 세상에서 가장 슬픈 표정으로 문턱을 넘어와

엉금엉금, 그가 내 곁에 앉는다

 

그럴 때면 그만 허락하고 싶다

사랑이 아니라도, 그 곁에 키를 낮춰 눕고 싶다.

 

 

백화점 가는 길

 

내 욕망의 절반은

백화점이 해결해준다

 

식품관은 지하에

화장품은 1층에

청바지는 2층에

구두는 3층에

침대는

 

전 세계가 모인 곳

미국과 유럽과 아시아의 상점에서도 진열되지 않은

내 욕망의 나머지 절반을 채워줄

 

, 에게 발견되고파

치명적인 향기를 수집한다

샤넬 디올 아베다……

 

갖고 싶어서

갖고 싶지 않아서

아무 것도 사지 못한 불안한 오후

 

샴푸는 1층에

청바지는 2층에

구두는 3층에

그이는 어디에?

어디쯤 가고 있을까?

 

 

불면의 일기

 

어떤 책도 읽히지 않았다

어떤 별도 쏟아지지 않았다

 

고독은 이 시처럼 줄을 맞춰 오지 않는다

 

내가 떠나지 못하는 이 도시

끝에서 끝으로 노래가 끊이지 않고

십 년 보다 긴 하루가 뒤돌아 제 그림자를 지워나갈 때

지상에서 마지막 저녁을 마시려 버스를 탄다

밤은 멎었지만 밤보다 더 어두운 저녁에

차창 가에 닻을 내린 한숨이 묻어둔,

그 의미를 해독하지 못해 아직도 낯선 과거를 불러낸다

서로 빠져나오려 싸우는 기억들이 서로를 삼키는 시간

? 지나간 것들은... 지나간 것들은…… 용서하지 못하는가

잃어버린 삶의 지도를 찾아 그리는

눈동자 속에 흔들리며 떠 있는 나무 한 그루, 병든 잎들이

바람에 몸을 떨며 아우성친다

얼마나 더 흔들려야 무너질 수 있나

 

우리가 변화시킨 세상이, 세상이 변화시킨 우리를 비웃고

총천연색으로 시위하는 네온사인 불빛들이 멀리 하늘의 별을 비웃고

딸꾹질하듯 저녁에 어이없이 넘어가는데

지난날의 들뜬 노래와 비명을 매장한 뒷골목을 순례하며

두리번거린다

조각난 상념들을 꿰맞추며 두리번거린다

 

, 차라리, 온전히 미치기라도 했으면

읽고 싶지 않은 이 세상을 웃어, 넘기라도 할 텐데

 

 

사는 이유

 

투명한 것은 날 취하게 한다

시가 그렇고

술이 그렇고

아가의 뒤뚱한 걸음마가

어제 만난 그의 지친 얼굴이

안부 없는 사랑이 그렇고

지하철을 접수한 여중생들의 깔깔웃음이

생각나면 구길 수 있는 흰 종이가

창밖의 비가 그렇고

빗소리를 죽이는 강아지의 컹컹거림이

매일 되풀이되는 어머니의 넋두리가 그렇다

 

누군가와 싸울 때마다 난 투명해진다

치열하게

비어가며

투명해진다

 

아직 건재 하다는 증명

아직 진통할 수 있다는 증명

아직 살아 있다는 무엇

 

투명한 것끼리 투명하게 싸운 날은

아무리 마셔도 술이 오르지 않는다

 

 

사랑의 시차

 

내가 밤일 때 그는 낮이었다.

그가 낮일 때 나는 캄캄한 밤이었다.

 

그것이 우리 죄의 전부였지

 

나의 아침이 너의 밤을 용서 못하고

너의 밤이 나의 오후를 참지 못하고

 

피로를 모르는 젊은 태양에 눈멀어

제 몸이 까맣게 타들어 가는 줄도 모르고

맨발로 선창가를 서성이며 백야의 황혼을 잡으려 했다.

 

내 마음 한켠에 외로이 떠있던 백조는

여름이 지나도 떠나지 않고

 

기다리지 않아도 꽃이 피고 꽃이 지고

그리고 가을, 그리고 겨울.

 

곁에 두고 가고 오지 못했던

너와 나, 면벽한 두 세상……

 

  

사랑의 힘

 

커피를 끓어 넘치게 하고

죽은 자를 무덤에서 일으키고

촛불을 춤추게 하는

 

사랑이 아니라면

밤도 밤이 아니다

술잔은 향기를 모으지 못하고

종소리는 퍼지지 않는다

 

그림자는 언제나 그림자

나무는 나무

바람은 영원한 바람

강물은 흐르지 않는다

 

사랑이 아니라면

겨울은 뿌리째 겨울

꽃은 시들 새도 없이 말라죽고

아이들은 옷을 벗지 못한다

 

머리칼이 자라나고

초생달을 부풀게 하는 사랑이 아니라면

처녀는 창가에 앉지 않고

태양은 솜이불을 말리지 못한다

 

석양이 문턱에 서성이고

베갯머리 노래를 못 잊게 하는

그런 사랑이 아니라면

미인은 늙지 않으리

여름은 감탄도 없이 시들고

아카시아는 독을 뿜는다

 

한밤중에 기대앉아

바보도 시를 쓰고

멀쩡한 사람도 미치게 하는

정녕 사랑이 아니라면

아무도 기꺼이 속아 주지 않으리

 

책장의 먼지를 털어 내고

역사를 다시 쓰게 하는

시랑이 아니면 계단은 닳지 않고

아무도 문을 두드리지 않는다

 

커피를 끊어 넘치게 하고

죽은 자를 무덤에 일으키고

촛불을 춤추게 하는

그런 사랑이 아니라며

 

 

서른 잔치는 끝났다

 

물론 나는 알고 있다

내가 운동보다도 운동가를

술보다도 술 마시는 분위기를 더 좋아했다는 걸

그리고 외로울 땐 동지여!로 시작하는 투쟁가가 아니라

낮은 목소리로 사랑노래를 즐겼다는 걸

그러나 대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잔치는 끝났다

술 떨어지고, 사람들은 하나 둘 지갑을 챙기고 마침내 그도 갔지만

마지막 셈을 마치고 제각기 신발을 찾아 신고 떠났다

어렴풋이 나는 알고 있다

여기 홀로 누군가 마지막까지 남아

주인 대신 상을 치우고

그 모든 걸 기억해내며 뜨거운 눈물 흘리리란 걸

 

그가 부르다 만 노래를 마저 고쳐 부르리란 걸

어쩌면 나는 알고 있다

누군가 그 대신 상을 차리고, 새벽이 오기 전에

다시 사람들을 불러 모으리란 걸

환하게 불 밝히고 무대를 다시 꾸미리라

그러나 대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선물

 

사랑해

당신을 삼십년 사랑했어

 

너무 늦게 나타났어

나는 네가 누구인지 몰라

 

어느 겨울날, 내 방에 들어온 청춘의 빛

잔치가 끝난 뒤의 서른 송이 장미

그의 손에서 내 손으로

그의 심장에서 나의 심장으로 불이 붙어

하나로 포개지려는데

 

물에 잠긴 장미 봉오리가

점점 크게 벌어지게

 

나의 마음도

나의 거기도

 

 

선운사에서

 

꽃이

피는 건 힘들어도

지는 건 잠깐이더군

골고루 쳐다볼 틈 없이

님 한 번 생각할 틈 없이

아주 잠깐이더군

 

그대가 처음

내 속에 피어날 때처럼

잊는 것 또한 그렇게

순간이면 좋겠네

 

멀리서 웃는 그대여

산 넘어 가는 그대여

 

꽃이

지는 건 쉬워도

잊는 건 한참이더군

영영 한참이더군

 

 

슬픈 까페의 노래

 

언젠가 한번 와본 듯하다

언젠가 한번 마신 듯하다

이 까페 이 자리 이 불빛 아래

가만있자 저 눈웃음치는 마담

살짝 보조개도 낯익구나

 

어느 놈하고 였더라

시대를 핑계로 어둠을 구실로

객쩍은 욕망에 꽃을 달아줬던 건

아프지 않고도 아픈 척

가렵지 않고도 가려운 척

밤 새워 날 세워 핥고 할퀴던

아직 피가 뜨겁던 때인가

 

있는 과거 없는 과거 들쑤시어

있는 놈 없는 년 모다 모아

도마 위에 씹고 또 씹었었지

호호탕탕 훌훌쩝쩝

마시고 두드리고 불러제꼈지

그러다 한두 번 눈빛이 엉켰겠지

어쩌면

부끄럽다 두렵다 이 까페 이 자리는

내 간음의 목격자

 

 

아도니스를 위한 연가

 

너의 인생에도

한번쯤

휑한 바람이 불었겠지.

바람에 갈대숲이 누울 때처럼

먹구름에 달무리 질 때처럼

남자가 여자를 지나간 자리처럼

시리고 아픈 흔적을 남겼을까?

너의 몸 골목골목

너의 뼈 굽이굽이

상처가 호수처럼 괴어 있을까?

 

너의 젊은 이마에도

언젠가

노을이 꽃잎처럼 스러지겠지

그러면 그때 그대와 나

골목골목 굽이굽이

상처를 섞고 흔적을 비벼

너의 심장 가장 깊숙한 곳으로

헤엄치고프다, 사랑하고프다.

 

 

옛날의 불꽃

 

잠시 훔쳐온 불꽃이지만

그 온기를 쬐고 있는 동안만은

세상 시름, 두려움도 잊고

따뜻했었다

 

고맙다

네가 내게 해준 모든 것에 대해

주지 않은 것들에 대해서도

 

 

월동준비

 

그림자를 만들지 못하는 도시의 불빛

바람에 날리는 쓰레기

인간이 지겨우면서 그리운 밤

 

애인을 잡지 못한 늙은 처녀들이

미장원에 앉아 머리를 태운다

지독한 약품냄새를 맡으며

점화되지 못한 욕망

 

올해도 그냥 지나가는구나

내 머리에 손댄 남자는 없었어

남자의 손길이 한 번도 닿지 않은 머리를 매만지며

안개처럼 번지는 수다,

겨울을 견딜 스타일을 완성하고

거울을 본다.

 

머리를 자르는 것도

하나의 혁명이던 때가 있었다.

생머리가 적과 동지를 구분하는 표식이던,

단순한 시대가

 

 

한국의 정치인

 

대학은 그들에게 명예박사 학위를 수여하고

기업은 그들에게 후원금을 내고

교회는 그들을 위해 기도하고

병원은 그들에게 입원실을 제공하고

비서들이 약속을 잡아주고

운전수가 문을 열어주고

보좌관들이 연설문을 써주고

말하기 곤란하면 대변인이 대신 말해주고

미용사가 머리를 만져주고

집 안 청소나 설거지 따위는 걱정할 필요도 없고

"도대체 이 인간들은 혼자 하는 일이 뭐지?"

 

  

행복론

 

사랑이 올 때는 두 팔 벌려 안고

갈 때는 노래하나 가슴속에 묻어놓을 것

 

추우면 몸을 최대한 웅크릴 것

남이 닦아논 길로만 다니되

수상한 곳엔 그림자도 비추지 말며

자신을 너무 오래 들여다보지 말 것

 

답이 나오지 않는 질문은 아예 하지도 말며

확실한 쓸모가 없는 건 배우지 말고

특히 시는 절대로 읽지도 쓰지도 말 것

지나간 일은 모두 잊어버리되

엎질러진 물도 잘 추스려 훔치고

네 자신을 용서하듯 다른 이를 기꺼이 용서할 것

 

내일은 또 다른 시시한 해가 떠오르리라 믿으며

잘 보낸 하루가 그저 그렇게 보낸 십 년 세월을

보상할 수도 있다고, 정말로 그렇게 믿을 것

그러나 태양 아래 새로운 것은 없고

인생은 짧고 하루는 길더라.

 

 

혼자라는 건

 

뜨거운

순대국밥을 먹어본 사람은 알지

혼자라는 건

실비집 식탁에 둘러앉은 굶주린 사내들과 눈을 마주치지 않고

식사를 끝내는 것만큼 힘든 노동이라는 걸

 

고개 숙이고

순대국밥을 먹어본 사람은 알지

들키지 않게 고독을 넘기는 법을

소리를 내면 안돼

수저를 떨어뜨려도 안돼

 

서둘러

순대국밥을 먹어본 사람은 알지

허기질수록 달래가며 삼켜야 한다는 걸

체하지 않으려면

안전한 저녁을 보내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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