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탁번 시인(1943년~, 충북 제천시)
고려대학교 대학원, 대학교수
196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
김삿갓문학상, 공초문학상 수상
오탁번 시 모음
◈ 굴비
수수밭 김매던 계집이 솔개그늘에서 쉬고 있는데
마침 굴비장수가 지나갔다
―굴비 사려, 굴비! 아주머니, 굴비 사요
―사고 싶어도 돈이 없어요
메기수염을 한 굴비장수는
뙤약볕 들녘을 휘 둘러보았다
―그거 한 번 하면 한마리 주겠소
가난한 계집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품 팔러 간 사내의 얼굴이 떠올랐다
저녁 밥상에 굴비 한 마리가 올랐다
―웬 굴비여?
계집은 수수밭 고랑에서 굴비 잡은 이야기를 했다
사내는 굴비를 맛있게 먹고 나서 말했다
―앞으로는 절대 하지 마!
수수밭 이랑에는 수수 이삭 아직 패지도 않았지만
소쩍새가 목이 쉬는 새벽녘까지
사내와 계집은
풍년을 기원하며 수수방아를 찧었다
며칠 후 굴비장수가 다시 마을에 나타났다
그날 저녁 밥상에 굴비 한 마리가 또 올랐다
―또 웬 굴비여?
계집이 굴비를 발라주며 말했다
―앞으로는 안 했어요
사내는 계집을 끌어안고 목이 메었다
개똥벌레들이 밤새도록
사랑의 등 깜빡이며 날아다니고
베짱이들도 밤이슬 마시며 노래 불렀다
◈ 그렇지
어떻게 지내냐 물으면 ‘그렇지’할 뿐 더 이상 말이 없다.
이 말만 듣고는 무슨 뜻인지 종잡을 수 없다.
하나 우리 동네에서는 이 말만 듣고도
엊저녁 밤농사가 신통했는지 안 했는지
고추 농사 재미봤는지 비료값 농약값 빼고 나면
말짱 헛농사 지었는지 훤하게 안다.
눈빛과 말품을 보고 안다.
사람의 진짜 뜻은 애당초
말이나 글로는 다 나타낼 수 없다는 것을 사람들은 안다.
장에 가서 농산물을 팔고 오는 이에게 오늘 어땠느냐고 물어도
‘그렇지’ 이 한 마디 뿐 더 이상 대꾸가 없다.
그러나 다 안다.
헐값에 팔았는지 유기농이라고 허풍 떨어서
바가지 씌었는지 갈쌍갈쌍 눈빛을 보면 다 안다.
몇 년 전 외아들이 선산까지 다 팔아먹고 도망간
정미소 늙은 홀아비는 동네사람들이 위로하면
기러기 날아가는 하늘 한 번 쳐다보며 ‘그렇지’
늘 이 한 마디뿐이다.
옥양목 두루마기의 헐렁한 소매처럼!
빨랫줄에 앉아있던 잠자리가 쇠파리 잡으려고 날아올랐다가
이내 고 자리로 다시 돌아오는 것처럼!
◈ 그 옛날의 사랑
지붕 위에 널린 빨간 고추의 매운 뺨에
가을 하늘 실고추처럼 간지럽고
애벌레로 길고 긴 세월을 땅 속에 살다가
우화羽化되어 하늘을 날으는 쓰르라미의
짧은 생애를 끝내는 울음이
두레박에 넘치는 우물물만큼 맑을 때
그 옛날의 사랑이여
우리들이 소곤댔던 정다운 이야기는
추석 송편이 솔잎 내음 속에 익는 해거름
장지문에 창호지 새로 바르면서
따다가 붙인 코스모스 꽃잎처럼
그때의 빛깔과 향기로 남아 있는가
물동이 이고 눈썹 훔치면서 걸어오던
누나의 발자욱도
배추흰나비 날아오르던
잘 자란 배추밭의 곧바른 밭이랑도
그 자리에 그냥 있는가
방물장수가 풀어놓던
빨간 털실과 오디빛 참빗도
어머니가 퍼주던 보리쌀 한 되만큼 소복하게
다들 그 자리에 잘 있는가
툇마루에 엎드려
몽당연필에 침 발라가며 쓴
단기 4287년 가을 어느 날의 일기도
마분지 공책에
깨알처럼 그냥 그대로 있는가
그 옛날의 사랑이여
◈ 백담사(百潭寺)
百潭寺에서는
석가모니釋迦牟尼보다 만해萬海를 팔아야
장사가 잘된단 말씀이야
스님의 능청거림
다 듣고 있다는 듯
벼랑 위의 위태위태한
소나무의 金빛 솔잎이
따갑다
釋迦牟尼를 만나면
눈깔을 뽑고
萬海를 만나면
수염을 뽑아야 한단 말씀이야
날다람쥐 쥐 한 마리
단풍나무 가지에서
쫑긋쫑긋 엿듣다가
잽싸게 날아간다
잿밥 같은 중생衆生들은
염병할 염불이나 포시보다
땀띠 난 사타구니 사이에
열반涅槃에 드는 길이 있다는 것을
땅뜀도 못한단 말씀이야
萬海의 굵은 눈썹에
문둑 떨어지는
솔개의 물똥
◈ 사랑 사랑 내 사랑
논배미마다 익어가는 벼이삭이
암놈 등에 업힌
숫메뚜기의
겹눈 속에 아롱진다
배추밭 찾아가던 배추흰나비가
박넝쿨에 살포시 앉아
저녁답에 피어날
박꽃을 흉내낸다
눈썰미 좋은 사랑이여
나도
메뚜기가 되어
그대 등에 업히고 싶다
◈ 선운사에서
1.
선운사 입구
민박집 마당에서 모이를 쪼아먹는
토실토실한 암탉도
나팔꽃 우산 쓰고 선운사 찾아가는
어린 여학생들의 맨종아리도
다 선운사 기운을 빼다 박았다
암탉이 갓 낳은 피묻은 달걀이나
송곳니로 톡톡 구멍 내어
쭉 빨아 먹어봤으면
솜털 보송보송한 뺨이나
그냥 한 번 만져봤으면
2.
동백꽃은 다 떨어져
서녘 바다로 흘러가고
빽빽한 동백숲이
엿 먹어라 엿 먹어라
헛손뼉을 친다
금동불상 앞에 합장은 하지 않고
해우소에 들러
근심걱정 모두 버린다
똥오줌만 버리는 것이 아니라
비 오는 선운사에서
내 몸도 모두 버린다
나는 이제 몸이 없다
간절한 생각뿐이다
◈ 수세미외
1.
청계산 등산로 가에 있는
찻집 알프스 샬레의 토요일 오후
배란다 난간의 수세미외 넝쿨에서
수세미외 하나 뚝 따서
눈빛 서늘한 여인에게 주었다
"수세미외가 무슨 상징일까?"
여인은 대꾸를 하지 않고
청계산 가을 나뭇잎들만
뺨 붉히며 웃어댄다
"암 암 알고 말고"
정말 쓸쓸한 마음이 되어
수세미외 하나 뚝 따서
쓸쓸한 여인에게 건네주는 일이
썩 괜찮다는 듯
2.
밤마다 지아비의 그걸 꼭 잡고 자던
하늘가로 날아가 버린 어느 아내가
예쁜이수술 받고 입원했을 때
폴로라이드 카메라 받혀놓고
입원실에서 지아비와 사랑을 나누었것다?
"아파? 아파? 안 아파?"
지아비의 말에 배시시 웃던
한쪽 젖이 작은 그 아내는
이젠 폴로라이드 천연색 사진 속에
사랑의 추억으로만 남았다
"안 아파요 안 아파"
저승으로 간 예쁜 그 아내의
가만가만 속삭이는 소리에
아주 크고 잘 생긴 수세미외가
눈물 뚝뚝 흘리고 있다
◈ 열쇠
미아리 삼양동 산비탈에서
삭월 셋방에 살던 신혼시절
주인여자는 대문으로 출입하고
내 가난한 아내는
담벼락에 낸 쪽문으로 드나들었다
쪽문을 열고 부엌을 지나
대여섯 평 좁은 방에서
신혼의 단꿈을 꾸며 살았다
뚱뚱한 주인여자의
짜랑짜랑하는 열쇠소리에 주눅이 들어
사랑을 나눌 때 숨도 크게 쉬지 못했다
몇 년 후 장위동에다
전세방 끼고 대출 받아서
스무 평 집을 장만했을 때
아내와 나의 꿈이 드디어 이루어졌다
열쇠고리에 달린
대문 열쇠, 현관 열쇠, 방 열쇠를 보면서
아내는 함박웃음을 웃었다
열쇠고리를 짜랑짜랑 흔들며
당당하게 대문을 따고
우리 집을 맘 놓고 드나들었다
열쇠가 늘어날수록
아내의 허리도 굵어지고
아들 딸 낳아 살다가
10년 후에는 아파트로 이사를 했다.
아파트를 분양받은 것이 아니라
열쇠 꾸러미를 분양받은 것 같았다
현관 열쇠, 방 열쇠, 장롱 열쇠, 싱크대 열쇠
화장실 열쇠, 다용도실 열쇠, 장식장 열쇠
그것도 각각 네 개씩이나 되는
묵직한 열쇠 꾸러미를 받아든 아내는
열쇠에 맺힌 한을 풀었다는듯
한동안 손에서 놓지 않았다
그토록 자랑스럽던 열쇠도
세월 따라 하나하나 사라지고
이제 아파트도 오피스텔도
디지털 키와 카드 키로 다 바뀌었다
제 집 문을 열 때는
열쇠를 구멍에 찔러 넣고
홱 돌려야 제 맛인데
손끝으로 번호를 톡톡 누르니까
꼭 남의 집에 몰래 들어가는 것 같다
열쇠란 열쇠는
몽땅 다 사라져버렸기 때문일까
이순의 저녁나절도 아득히 흘러간 오늘
아내의 방을 여는
사랑의 열쇠를 어디다 뒀는지
통 생각나지 않는다.
삭월 셋방 가난했던 그 시절엔
대문을 따는 열쇠는 없었지만
밤마다 사랑의 방을 여는
금빛 열쇠가 나에게 있었는데
이젠 아무리 찾아도
찾을 수 없다.
◈ 잠지
할머니 산소 가는 길에
밤나무 아래서 아빠와 쉬를 했다
아빠가 누는 오줌은 멀리 나가는데
내 오줌은 멀리 안 나간다
내 잠지가 아빠 잠지보다 더 커져서
내 오줌이 멀리멀리 나갔으면 좋겠다
옆집에 불나면 삐용삐용 불도 꺼주고
황사 뒤덮인 아빠 차 세차도 해주고
내 이야기를 들은 엄마가 호호호 웃는다
- 네 색시한테 매일 따스운 밥 얻어 먹겠네
◈ 장모님
거실에서 자정까지 티브이를 보고 나서 잠을 자려고 안방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뜻밖에도 침대 위에 스탠드 전등을 켜고 잡지를 읽는 안경 낀 장모님이 계셨다.
아니 장모님 어쩐 일이십니까.
목구멍까지 올라온 말을 황급히 삼키고 나는 정신을 가다듬었다.
장모님이라니 장모님은 벌써 몇 해 전에 돌아가셔서
지금은 천안공원묘지에 잠들어 계신데 장모님이라니 아뿔싸.
잡지를 읽고 있던 아내는 나의 착각이 대수롭잖다는 듯 웃고 말았지만
그날부터 우리 집에는 참으로 이상한 평화가 도래했다.
아내와 다툴 일도 없고 깨 쏟아질 일도 없게 되었다.
장모님 모시고 사는 사위의 예절만 있으니까
남편과 아내로서의 비장의 무기도 탄약도 다 떨어졌다.
아내가 스물한 살 처녀일 때 부산까지 가서 당신의 딸과 결혼하겠다고 말했을 때
아주 난감해 하시던 스물다섯 해 전 장모님의 모습이
어쩌면 지금 아내의 모습과 이토록 흡사하단 말인가.
우리들의 가난한 사랑을 근심하는 어른들의 뜻은 아랑곳하지 않고
해운대 해변을 손잡고 거닐던 그 시절의 바다 물결이
어느 날 자정 무렵에 나의 집 안방 침대 위에까지 밀려와 나를 벌주는 것인가.
낯모르는 사람끼리 저녁 이슬 내리듯 새벽안개 걷히듯
이상한 인연으로 만나서 결혼하고 아이 낳아 기르고 울고 웃고
비장의 무기 꺼내어 첩보전 국지전 전면전 치르면서
휴전 종전 항복 탈주를 밥 먹듯 하면서 살아가는 남편과 아내의 사회는
중성자 망원경으로도 포착되지 않는 전자파들의 폭풍우일까
모든 시간과 공간을 송두리째 집어삼키는 블랙홀의 무서운 운명일까.
아내여 장모님이 된 나의 아내여
이제는 흰 뼈로 흔적만 남아 민들레 씨앗처럼 가벼워진
그 옛날의 장모님이여 오늘밤 나를 울리는 미운 아내여
◈ 폭설暴雪
삼동三冬에도 웬만해선 눈이 내리지 않는
남도南道 땅 끝 외진 동네에
어느 해 겨울 엄청난 폭설이 내렸다
이장이 허둥지둥 마이크를 잡았다
- 주민 여러분! 삽 들고 회관 앞으로 모이쇼잉! 눈이 좃나게 내려부렸당께!
이튿날 아침 눈을 뜨니
간밤에 또 자가웃 폭설이 내려
비닐하우스가 몽땅 무너져내렸다
놀란 이장이 허겁지겁 마이크를 잡았다
- 워메, 지랄나부렸소잉! 어제 온 눈은 좆도 아닝께 싸게싸게 나오쇼잉!
왼종일 눈을 치우느라고
깡그리 녹초가 된 주민들은
회관에 모여 삼겹살에 소주를 마셨다
그날 밤 집집마다 모과빛 장지문에는
뒷물하는 아낙네의 실루엣이 비쳤다
다음날 새벽잠에서 깬 이장이
밖을 내다보다가, 앗!, 소리쳤다
우편함과 문패만 빼꼼하게 보일 뿐
온 천지天地가 흰눈으로 뒤덮여 있었다
하느님이 행성行星만한 떡시루를 뒤엎은 듯
축사 지붕도 폭삭 무너져내렸다
좆심 뚝심 다 좋은 이장은
윗목에 놓인 뒷물대야를 내동댕이치며
우주宇宙의 미아迷兒가 된 듯 울부짖었다
- 주민 여러분! 워따. 귀신 곡하겠당께!
인자 우리 동네 몽땅 좆돼버렸소잉!
◈ 굿 모닝
아침 일찍 일어나면
화장실로 먼저 간다
강추위에 안녕한지
살피러 간다
물을 내리니, 쏴!
굿 모닝? 하니
굿 모닝! 하네
늙은 아내 잠자는
안방을 살짝 열어본다
문 여는 소리에
홱 돌아눕는다
꿈나라 잠보!
굿 모닝? 해도
굿 모닝! 안 하네
◈ 연애
자가운전 하는 예쁜 여자가
내가 달리는 차선으로
얌체같이 끼어들기하고는
차창 밖으로 흔드는 하얀 손을 보면
무 베어먹듯 그냥 한 입 물고 싶다
눈 마주치면 눈흘레나 하고 싶다
뒤에서 들이받을 생각 아예 말고
살가운 접촉사고나 내고 싶다
ㅡ지금쯤 고향의 억새밭 물녘에서는
무지개도 뛰어넘을 만한 힘센 황소가
녈비에 황금빛 털이 간지럽겠디
밤길에 잽싸게 끼어들기하고는
점멸등 깜박이며 달아나는 차를 보면
반딧불이가 반딧반딧 짝을 찾는 것 같다
나도 한 마리 반딧불이가 되어
하늬바람에 공중제비하고 싶다
홰친홰친하는 낚싯대 펴고
동동거리는 형광찌 불빛따라
얄미운 붕어 한 마리 잡고 싶다
ㅡ지금쯤 고향 집 지붕에는
하양 박꽃이 환하게 피어
은하수까지 다 물들이겠다
◈ 우리 시대의 시창작론
시를 시답게 쓸 것 없다
시는 시답잖게 써야 한다
껄껄껄 웃으면서 악수하고
이데올로기다 모더니즘이다 하며
적당히 분바르고 개칠도 하고
똥마려운 강아지처럼
똥끝타게 쏘다니면 된다
똥냄새도 안 나는
걸레냄새 나는 방귀나 뀌면서
그냥저냥 살아가면 된다
된장에 풋고추 찍어 보리밥 먹고
뻥뻥 뀌어대는 우리네 방귀야말로
얼마나 똥냄새가 기분 좋게 났던가
이 따위 처억에 젖어서도 안 된다
저녁연기 피어오르는 옛마을이나
개불알꽃에 대한 명상도
아예 엄두 내지 말아야 한다
시를 시답게 쓸 것 없다
시는 시답잖게 써야 한다
걸레처럼 살면서
깃발 같은 시를 쓰는 척하면 된다
걸레도 양잿물에 된통 빨아서
풀먹여 다림질하면 깃발이 된다
노스탤지어의 손수건이 된다
-벙그는 난초꽃의 고요 앞에서
『우리 시대의 시창작론』을 쓰고 있을 때
내 마빡에서 별안간
'네 이놈!'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그만 연필이 뚝 부러졌다
◈ 토요일 오후
토요일 오후 학교에서 돌아온 딸과 함께
베란다의 행운목을 바라보고 있으면
세상일 세상사람 저마다 눈을 뜨고
아주 바쁘고 부산스럽게 몸치장 예쁘게 하네
하루일 하루공부 다 끝내고 중고생 관람가
못된 장면은 가위질한 그저 알맞게 재미난 영화
팝콘이나 먹으며 구경하러 가는 것일까
한주일의 일과 추억을 파라솔 접듯 조그맣게 접어서
가볍게 들고 한강 시민공원으로 나가는 것일까
매일 물을 뿌려 주어야 싱싱한 잎을 자랑하는
베란다의 행운목이 펼쳐 주는 손바닥만큼씩한 행복
토요일 오후의 우리집은 온통 행복뿐이네
세 살 난 여름에 나와 함께 목욕하면서 딸은
이게 구슬이나? 내 불알을 만지작거리며 물장난하고
아니 구슬이 아니고 불알이다 나는 세상을 똑바로
가르쳤는데 구멍 가게에 가서 진짜 구슬을 보고는
아빠 이게 불알이나?하고 물었을 때
세상은 모두 바쁘게 돌아가고 슬픈 일도 많았지만
나와 딸아이 앞에는 언제난 무진장의 토요일 오후
모두다 예쁘게 몸치장을 하면서 춤추고 있었네
구슬이나? 불알이나? 딸의 어릴 적 질문법에 대하여
아빠가 시를 하나 써야겠다니까 여중 2학년은
아니 아니 아빠 저를 망신시킬 작정이세요?
문법도 경어법도 딱 맞게 말하는 토요일 오후
모의고사를 열 문제나 틀리고도 행복하기만한
강남구에서 제일 예쁜 내 딸아
아이고 예쁜 것!
◈ 밥 냄새 1
하루걸러 어머니는 나를 업고
이웃 진외가 집으로 갔다
지나다가 그냥 들른 것처럼
어머니는 금세 도로 나오려고 했다
대문을 들어설 때부터 풍겨오는
맛있는 밥냄새를 맡고
내가 어머니의 등에서 울며 보채면
장지문을 열고 진외당숙모가 말했다
-언놈이 밥 먹이고 가요
그제야 나는 울음을 뚝 그쳤다
밥소라에서 퍼주는 따끈따끈한 밥을
내가 하동지동 먹는 걸 보고
진외당숙모가 나에게 말했다
-밥 때 되면 만날 온나
아, 나는 이날 이때까지
이렇게 고운 목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다
태어나서 젖을 못 먹고
밥조차 굶주리는 나의 유년은
진외가 집에서 풍겨오는 밥냄새를 맡으며
겨우 숨을 이어갔다
◈ 액막이연
내내 썰매 타고 눈싸움만 하느라
색동 설빔은 그만 얼룩이 다 졌지만
정월 대보름 아침이 밝아오면
부럼을 깨물고 더위도 팔고
고드름 따먹으며 고샅길을 내달린다
저녁이 되어 보름달이 둥실 떠올라
온 동네는 白夜처럼 환해지고
돌담가 달집에 불을 놓으면
달집에 쌓인 생솔가지가 불타며
냄비 속 쥐이빨 옥수수 튀는 소리를 낸다
달빛이 눈처럼 희디희어
올 여름 장마 걱정하면서
방패연에 이름과 생일 또박또박 적는다
허릿대 대오리도 팽팽한 방패연에
하늘길 노자할 동전 한 닢과
누에고치를 매달아 불을 붙이고
얼레의 연줄 죄다 풀어서
厄막이 厄막이 외치며 연을 날린다
액厄막이연鳶은
제 목숨 다 하는 줄도 모르고
창과 방패 쥐고 출전하는 무사처럼
달빛 넘치는 하늘로 높이 날아오른다
불에 타는 고치가 마지막 잉걸처럼
공중에서 아스라이 깜박일 때
연줄이 툭 끊어지며
방패연은 되똥되똥 내 厄運을 싣고
까마득한 하늘길로 떠나버린다
厄막이鳶 하늘 높이 날아갔으니
구구단 받아쓰기 죄다 백점 맞고
키도 쑥쑥 자라서
올해는 보리고개 잘 넘어가면 좋겠다
불장난 많이 한 대보름 밤
잠이 들면
잣눈이 내린 고샅길을 지나
키 쓰고 소금 얻으러 가는 꿈을 꾼다
◈ 블랙홀
같은 동네에 사는 이종택과 함께
백운지 아래 방학리에 사는
초등학교 동창 김종명이네 집에 놀러갔다
멍석에 널린 고추가 뙤약볕 같이 따갑고
함석지붕에는 하양 박이 탐스러웠다
누렁이 한 마리가 마당에서
제 똥냄새 맡다가 꼬리를 쳤다
찰칵! 한 장 찍고 싶은
우리 농촌의 옛 풍경 속으로
재작년 추석 무렵에 무심코 쑥 들어갔다
안방에서 머리가 하얀 안노인네가 나왔다
어릴 때 친구 집에 놀러 가면
나는 어른들께 답작답작 큰절을 잘 했다
그러면 친구 어머니가 씨감자도 쩌주고
보리쌀 안쳐 더운밥도 해주곤 했다
-종명이 어머니가 여태 살아계시는구나!
나는 얼른 큰절을 하려고 했다
그 순간 몇 만 분의 1초의 시간이 딱 멈추었다
종명이가 제 어머니에게 말하는 소리가
우주에서 날아오는 초음파처럼
아득하게 들려왔다
-임자! 술상 좀 봐!
초등학교 동창 마누라에게 큰절할 뻔한 나는
블랙홀에 빠진 채 허우적거렸다
머리가 하얀 초등학생 셋은
무중력 우주선을 타고
저녁놀 질 때까지 술을 마셨다
-放鶴里에 왔으니 鶴 한 마리 잡아다가
안주로 구워먹자, 씨벌!
종택이와 종명이는 내 말에 장단을 맞췄다
-그럼 그렇고 말고지, 네미랄!
광속보다 빠르게 블랙홀을 가로지르는
鶴을 쫓아가다가
그만 나는 정신을 잃고
종택이 경운기에 실려 돌아왔다
◈ 감자밭
흙냄새 향기로운 감자밭 이랑에
하양 비닐을 씌우는
농부 내외의 주름진 이마에는
따사로운 봄볕이 오종종하다
서방은 비닐을 앞에서 끌고
아낙은 뒤에서 그걸 잡고 있는데
비닐 끝을 흙으로 덮기도 전에
자꾸 앞으로 나가니까
소를 몰 때 하듯이 아낙이 말한다
-워! 워!
그 말을 듣고
서방이 씩 웃으며 한마디 한다
-워,라니?
흙을 다 덮은 아낙이 또 말한다
-이랴! 이랴!
신방에 들어가는 새댁처럼
가지런한 감자밭 아랑은
물이랑 되어 찰랑이는 비닐을
비단 홑이불처럼 덮고
제 몸을 어루만져주기를 기다린다
농부 내외는
바소쿠리에 가득한 씨감자눈을
비닐을 뚫고 하나하나 꾹꾹 심는다
멧돼지와 고라니들이 내려와
감자를 반나마 나눠 먹을 테지만
주먹만한 감자알을 떠올리며
새흙을 덮어 다독여준다
감자밭 이랑은
아기를 잉태한 새댁처럼
다소곳이 엎드린 채
감자알이 여무는
하짓날 긴긴 해를 꿈꾸고 있다
◈ 작별
오늘 아침 그대들과 작별하고 싶다
꿈꾸며 바라본 설핏한 저녁 노을
진토닉에 몸을 푸는 빨간 체리
서해바다 노을 한강까지 밀어올리며
얼음 밑에서 겨울을 나는 누치 한 마리
그대들과 선선히 작별하고 싶다
미끈미끈한 비늘도 모두 흩어지고
목마른 입술 닿은 종이컵도
재활용 봉투 속에서 잠들고 있다
첨탑에서 종소리 아득해질 때마다
내 눈썹 시리게 한
생애의 벼랑도
뜨거운 알코올 목구멍에 쏟아
나의 욕망 연소시킬 불씨도
이젠 그만 사그라지면 좋겠다
아무리 불러봐야 메아리도 없는 아침
떠나간 빈 자리 메워줄 슬픔 하나로
텅 빈 자리에 호젓이 남고 싶다
면도한 두 볼에 스킨로션 바르고
구겨진 넥타이로 목을 감고
죽어가는 관절 일으켜 세워
그대들과 절뚝거리며 작별하고 싶다
◈ 여기쯤에서
여기쯤에서 그만 작별을 하자
눈뜨고 사는 이에게는
생애의 벼랑은 언제나 있는 법
거기 피어 있는 이름 모를 풀꽃
하나 따서 가슴에 달고
뜻 없는 목숨 하나 따서
만났던 그 자리 그 어둠 앞에
우리의 죄로 젖어 있는 추억을 심고
그만 여기쯤에서 작별을 하자
똑같은 항아리가 어느 한쪽에
깨어져서 들어가야 한다면
그것은 이미 사랑도 아니다
우리의 입술은 아침저녁 비가 오고
내 몸에 묻어 있는 눈썹 하나
머리칼 한 올이 나의 새벽까지
따라와서 죄를 짓자고 속삭인다 해도
너의 찬 손이 뜨거워지고
나의 안경이 흐려진다해도
말 하지마, 아무 말도 하지 마
작별을 하자 그만 여기쯤에서 생애의
벼랑에서 뛰어내려 젖은 입술을
입술에 부비며 말하지마, 아무 말도 하지 마
◈ 기차汽車
할머니가 부산하게 비설거지하고
외양간 하릅송아지도 젖을 보챌 때면
저녁연기가 아이들 복숭아뼈 적시며
섬돌 아래 고샅길로 낮게 퍼졌다
숙제 끝내고 토끼풀도 다 뜯어다주고
심심해서 사물사물해졌을 때
산 너머 기차 소리가 들려오면
몽당연필에 마분지 공책 들고
아이들은 앞산 등성이로 달려갔다
까치발 암만해도 기차는 보이지 않고
두엄더미 지렁이울음처럼
기차소리만 치치포포 하릿하게 들렸다
기차를 한번도 본 적이 없지만
귀를 모으고 기차소리 들으며
재바르게 기차 그림을 그렸다
여물통 같은 기차, 달구지 같은 기차!
개다리소반 같은 기차, 바소쿠리 같은 기차!
아이들은 기차소리를 그리며
멀고먼 나라로 가는 기차표를 끊었다
손에 쥔 기차표 하뭇해하며
아득한 미리내 여울 건너듯
저녁연기 밟으며 돌아올 때면
깜깜해진 비구름이 빗방을 흩뿌리며
쏭당쏭당 개찰하듯 기차표를 적셨다
◈ 감자밭
흙냄새 향기로운 감자밭 이랑에
하양 비닐을 씌우는
농부 내외의 주름진 이마에는
따사로운 봄볕이 오종종하다
서방은 비닐을 앞에서 끌고
아낙은 뒤에서 그걸 잡고 있는데
비닐 끝을 흙으로 덮기도 전에
자꾸 앞으로 나가니까
소를 몰 때 하듯이 아낙이 말한다
-워워!
그 말을 듣고
서방이 씩 웃으며 한마디 한다
-워, 라니?
흙을 다 덮은 아낙이 말한다
-이랴! 이랴!
신방에 들어가는 새댁처럼
가지런한 감자밭 이랑은
물이랑 되어 찰랑이는 비닐을
비단 홑이불처럼 덮고
제 몸을 어루만져주기를 기다린다
농부 내외는
바소쿠리에 가득한 씨감자눈을
비닐을 뚫고 하나하나 꾹꾹 심는다
멧돼지와 고라니들이 내려와
감자를 반나마 나눠먹을 테지만
주먹만한 감자알을 떠올리며
새흙을 덮어 다독여준다
감자밭 이랑은
아기를 잉태한 새댁처럼
다소곳이 엎드린 채
감자알이 여무는
하짓날 긴긴 해를 꿈꾸고 있다
◈ 사랑의 깊이
너를 떠나보내고 돌아오는 길에도
어둠의 깊이만큼 비애가 끝간 데 없었다.
만나면 만날수록 이별의 시간이 다가오고
어쩔 수 없이 젖어드는 그리움의 얼굴
바람이 불고 눈이 오고 또 꽃이 피고
천둥 번개 요란한 새벽마다 눈을 뜨고
너의 옷을 하나씩 벗겼다 알몸에 알몸을
가까이하고 여름 여치가 날개를 비벼대며 울 듯
너를 떠나보내고 돌아오는 길에는
사랑의 깊이만큼 우수가 손에 잡히지 않았다
이별의 시간이 다가올수록 더욱 빛나는
너의 흰 손 흰 이마 가슴 적시는 눈물 방울
◈ 겨울 강
겨울 강 얼음 풀리며 토해내는 울음 가까이
잊혀진 기억 떠오르듯 갈대잎 바람에 쓸리고
얼음 밑에 허리 숨긴 하양 나룻배 한 척이
꿈꾸는 겨울 홍천강 노을빛 아래 호젓하네
쥐불 연기 마주 보며 강촌에서 한참 달려와
겨울과 봄 사이 꿈길 마냥 자욱져 있는
얼음짱 깨지는 소리 들으며 강을 건너면
겨울나무 지피는 눈망울이 눈에 밟히네
갈대잎 흔드는 얼음 속에 가는 눈썹 숨기고 잠든
아련한 추억이 버들개지 따라 실눈을 뜨네
슬픔은 슬픔끼리 풀려 반짝이는 여울 이루고
기쁨은 기쁨끼리 만나 출렁이는 물결이 되어
이제야 닷 올리며 추운 몸뚱아리 꿈뜰대는
겨울 강 해빙의 울음소리가 강마을을 흔드네
◈ 백두산 천지
1
하늘과 땅 사이가 너무 가까워 장백소나무 종비나무 자작나무 우거진 원시림 헤치고
백두산 천지에 오르는 순례의 한나절에 내 발길 내딛을 자리는 아예 없다
사스레나무도 바람에 넘어져 흰 살결이 시리고
자잘한 산꽃들이 하늘 가까이 기어가다 가까스로 뿌리 내린다
손톱만한 하양 물매화 나비날개인 듯 바람결에 날아가는
노랑 애기금매화 새색시의 연지빛 곤지처럼 수줍게 피어있는 두메자운이
나의 눈망울 따라 야린 볼 붉히며 눈썹 날린다
무리를 지어 하늘 위로 고사리 손길 흔드는 산미나리아재비 구름국화 산매발톱도
이제 더 가까이 갈 수 없는 백두산 산마루를 나 홀로 이마에 받들면서
드센 바람 속으로 죄지은 듯 숨죽이며 발걸음 옮긴다
2
솟구쳐 오른 백두산 멧부리들이 온뉘 동안 감싸 안은 드넓은 천지가
눈앞에 나타나는 눈 깜박할 사이 그 자리에서 나는 그냥 숨이 막힌다
하늘로 날아오르려는 백두산 그리메가 하늘보다 더 푸른 천지에 넉넉한 깃을 드리우고
애꿎은 우렛소리 지나간 여름 한나절 아득한 옛 하늘이 내려와 머문 천지 앞에서
내 작은 몸뚱이는 한꺼번에 자취도 없다
내 어린 볼기에 푸른 손자국 남겨 첫 울음 울게 한
어머니의 어머니 쑥 냄새 마늘냄새 삼베적삼 서늘한 손길로
손님이 든 내 뜨거운 이마 짚어주던 할머니의 할머니가
백두산 천지 앞에 무릎 꿇은 나를 하늘눈 뜨고 바라본다
백두산 멧부리가 누리의 첫 새벽 할아버지의 흰 나룻처럼 어렵고 두렵다
3
하늘과 땅 사이는 애초부터 없었다는 듯 천지가 그대로 하늘이 되고 구름결이 되어
백두산 산허리마다 까마득하게 푸른 하늘 구름바다 거느린다
화산암 돌가루가 하늘 아래로 자꾸만 부스러져 내리는 백두산 천지의
낭떠러지 위에서 나도 자잘한 꽃잎이 되어 아스라한 하늘 속으로 흩어져 날아간다
아기집에서 갓 태어난 아기처럼 혼자 울지도 젖을 빨지도 못한다
온 가람 즈믄 뫼 비롯하는 백두산 그 하늘에 올라 마침내 바로 서지도 못하고
젖배 곯아 젖니도 제때나지 못할 내 운명이 새삼 두려워
백두산 흰 멧부리 우러르며 얼음 빛 푸른 천지 앞에 숨결도 잊은 채 무릎 꿇는다
◈ 배추흰나비
호수보다 더 잔잔한 기다림으로
저녁노을 지는 그리운 하늘아래
배추흰나비처럼 날아다녔다.
저녁 새 깃드는 먼 숲을 바라보았다
하늘이 나무 아래 이끼를 기르듯
그렇게 수많은 아픔으로
갑자기 구름이 몰려오고
어둠속으로 사라지는 얼굴
보고 싶은 눈썹 날리는 머리칼
양 한마리가 초원으로 멀리 숨듯
눈을 떠도 눈을 감아도
흐려지는 눈앞에 밟히는
눈 코 입 귀 머리칼
나무숲보다 더 그윽한 그리움으로
이슬방울조차 무서운 배추흰나비처럼
지금 나는 날아오르고 싶다.
◈ 고향
제천군 백운면 평동리 장터
비바람에 그냥 젖는
버스 정류장 옆 조그만 가게
바깥 세상 겨우 내다보이는
가게의 금간 유리창에
흰 종이가 별 모양으로
오종종 붙어 있다
천등산 그림자 일렁이는 앞개울에는
모래빛 모래무지 한 마리가
한사코 모래바닥에 숨는다
꼬리에 알 가득 밴 여울목의 가재는
무지개빛 수염을 한껏 치켜들고
물속에 비친
천등산 이마를 간지럽힌다
셈본 숙제 끝낸 배고픈 아이들이
흰 토끼풀꽃 손목시계를 본다
오디도 복숭아도 아직 익지 않았고
개개비만 까불까불 흰 똥을 싼다
여울여울 이랑이랑
아이들의 꿈이 욜랑욜랑 헤덤빈다
실비 오는 하늘에 무지개가 뜬다
◈ 죽음에게
한숨도 눈물도 다 지워진 나이
어두운 모퉁이길 돌아서면
문득 보이는 그대의 이마
여기쯤에 와서야
비로소 눈뜨는 나의 염치
정말 염치없네
미움도 사랑도 다 지워진 나이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이승의 침대맡
세상은 아직도 빛나고
불두덩이 가득 기어나온
오욕의 창자들
지나온 나의 생애 다 안다는 듯
거웃이 다 깍여진 빈 불두덩이
눈뜨고 차마 볼 수 없는
나의 생애
이 낭패감
이 절망감
죄짓고 싸다닌 저녁 골목
깨어진 가로등
방뇨했던 전신주
이제는 다 외우지도 못하는
마포 여의도 잠실 뚝섬의
전화번호들
욕설도 배설도 다 지워진 나이
빈 불두덩이로
그대에게 가야겠네
◈ 순은(純銀)이 빛나는 이아침에
눈을 밟으면 귀가 맑게 트인다.
나뭇가지마다 순은(純銀)의 손끝으로 빛나는
눈 내린 숲길에 멈추어 선
겨울 아침의 행인들.
원시림(原始林)이 매몰될 때 땅이 꺼지는 소리,
천년동안 땅에 묻혀
딴딴한 석탄(石炭)으로 변모하는 소리,
캄캄한 시간 바깥에 숨어 있다가
발굴되어 건강한 탄부(炭夫)의 손으로
화차에 던져지는,
원시림(原始林) 아아 원시림(原始林)
그 아득한 세계(世界)의 운반(運搬)소리.
이층 방 스토브 안에서 꽃불 일구며 타던
딴딴하고 강경한 석탄(石炭)의 발언(發言).
연통을 빠져나간 뜨거운 기운은
겨울 저녁의
무변(無邊)한 세계(世界) 끝으로 불리어 가
은빛 날개의 작은 새,
작디작은 새가 되어
나뭇가지 위에 내려 앉아
해 뜰 무렵에 눈을 뜬다.
눈을 뜬다.
순백(純白)의 알에서 나온 새가 그 첫 번째 눈을 뜨듯.
구두끈을 매는 시간만큼 잠시
멈추어 선다.
행인들의 귀는 점점 맑아지고
지난밤에 들리던 소리에
생각이 미쳐
앞자리에 앉은 계장 이름도
버스·스톱도 급행번호도
잊어버릴 때, 잊어버릴 때,
분배된 해를 순금(純金)의 씨앗처럼 주둥이 주둥이에 물고
일제히 날아오르는 새들의 날개짓.
지난밤에 들리던 석탄(石炭)의 변성(變成)소리와
아침의 숲의 관련 속에
비로소 눈을 뜬 새들이 날아오르는
조용한 동작 가운데
행인들은 저마다 불씨를 분다.
행인들의 순수(純粹)는 눈 내린 숲 속으로 빨려가고
숲의 순수(純粹)는 행인에게로 오는
이전(移轉)의 순간,
다 잊어버릴 때, 다만 기다려질 때,
아득한 세계(世界)가 운반(運搬)되는
은빛 새들의 무수한 비상(飛翔) 가운데
겨울 아침으로 밝아가는 불씨를 분다.
◈ 사랑 사랑 내 사랑
논배미마다 익어가는 벼이삭이
암놈 등에 업힌
숫메뚜기의
겹눈 속에 아롱진다
배추밭 찾아가던 배추흰나비가
박넝쿨에 살포시 앉아
저녁답에 피어날
박꽃을 흉내낸다
눈썰미 좋은 사랑이여
나도
메뚜기가 되어
그대 등에 업히고 싶다
◈ 사랑하고 싶은 날
앵두나무 꽃그늘에서
벌떼들이 닝닝 날면
앵두가 다람다람 열리고
앞산의 다래나무가
호랑나비 날개짓에 꽃술을 털면
아기 다래가 앙글앙글 웃는다
태초 후
45억 년쯤 지난 어느 날
다랑논에서 올벼가 익어갈 때
청개구리의 젖은 눈알과
알밴 메뚜기의 볼때기에
저녁노을 간지럽다
된장독에 쉬 슬어놓고
앞다리 싹싹 비벼대는 파리도
거미줄 쳐놓고
한나절 그냥 기다리는
굴뚝빛 왕거미도
다 사랑하고 싶은 날
◈ 봄
겨우내 살이 오른 딱정벌레 작은 알이
봄 아침 눈을 뜨고 나무 밑둥 간질일 때
그리움 가지 끝마다 새잎 나며 보챈다
버들개지 실눈 뜨는 여울목 아지랑이
눈물겨운 물거울로 꿈결 속에 반짝일 때
이제야 견딜 수 없는 꽃망울이 터진다
◈ 미당을 위하여
1.
당신은 내가 한밤중 홀로 마시는
약간 쓰디쓴 매실주 한 잔입니다
빛바랜 습작노트 갈피에 있는
향나무 냄새나는 몽당연필입니다
'껌정거북표의 고무신짝'이라뇨?
'기러기표 옥양목'이라뇨?
이 기막힌 브랜드가
내 전생의 습작노트에 적혀 있던
지상과 천상의 이미지라는 것
용용 몰랐죠?
2.
까마득한 신라의 하늘 아래
옛날 옛적 당신의 이모 한 분이
우리 동복 오씨 잘생긴 남정네한테
꽃가마에 놋요강 싣고 시집을 왔을까?
당신의 멀고먼 당숙 한 분이
우리 집 밭 부쳐 먹고 도지도 안 내고
마늘쫑보다 싱싱한 사랑의 혓바닥으로
내 아득한 고모(姑母)의 몸을 홀려냈을까?
당신은 왕겨빛 그리움이죠?
피어오르는 저녁연기 - 맞죠?
◈ 너의 별에서
너는 어느 별에서 태어났기에
이토록 무서운 광속으로 다가와서
나도 모르는 나의 생애를 불밝혀 놓고
눈물빛 핏빛 사랑으로 불타고 있는가
겨울 철새 모두 떠난 한강 물결
봄이 오는 소리 선연한 노을 아래
물 속 깊이 숨은 누치 보이지 않고
하늘 멀리 떠난 나의 아기는
깃 하나 남기지 않고 나를 울린다
흰 수염 가득한 턱을 고이고
생각에 잠기고 또 잠기지만
아아 또는 오오
이러한 모음으로는 형언할 수 없는
내 운명이 벼랑 끝에 홀로 서는 소리
무좀으로 썩어가는 새끼발톱까지도
너의 별에서 날아온 사랑의 빛 앞에
까뒤집어져서 탄로가 났다
나는 전생에서부터 은닉했던 증거 앞에
모두 모두 자백하였다
너의 별이 내뿜는 사랑의 빛은
1초에 우주를 일흔 바퀴씩 돌면서
나의 전생에서부터 오늘 한강 물결까지
완전하게 발가벗기고 있다
오오 자백의 황홀과 나체의 쾌락으로
너의 별이 검은 구멍으로 빨려들어가서
그곳에서 살고 싶다
죽고 싶다!
◈ 낙향(落鄕)을 위하여
까마득하게 흐려져버린
내 사랑의
호적등본만한 빈터가
실은 내 생애의 전부였음을
이제야 알겠다
술지게미 먹고
깨금발로 뛰어놀던
내 사랑의 빈터에
말 안 해도 마음 다 알아줄
아주 예쁜 사람이
살고 있음을
이제야 알겠다
지에밥에 누룩 풀어 담근
술항아리에서
상강 날 해거름쯤
술이 익으면
첫서리 내린 들창문
반쯤 열어놓고
마주 앉아 잔 비우고 싶은
내 마음의 노른자위가 될
아주 예쁜 사람을
전생의 꿈을 꾸듯
찾아가야겠다
◈ 과추풍령유감(過秋風嶺有感)
가까운 山
더 가까이 보이고
먼 山
더 멀리 보인다
참새 똥 뒤집어 쓴
허수아비 하나
수수밭 두렁에서
웃고 있다
아득하기만 한
이 가을날
오직 나 하나
눈물방울 사이로
가까운 山
더 멀리 보이고
먼 山
더 가까이 보인다
◈ 고욤나무
갑사 들어가는 아름드리 숲길에서 문득 만난
키만 싱겁게 큰 비쩍 마른 고욤나무 한 그루
잎사귀도 고욤도 없이 빈 손 하늘까지 펴고
계룡산 깊은 울음소리 염주알처럼 헤아린다
봄여름 다 보내고 단풍잎 어지러운 하늘에
꿈속에서도 그리운 뺨 눈물 머금은 저녁노을
고욤나무의 적막한 꿈이 가지 끝에 이울고
부처님의 금빛 손가락 목탁소리에 무심하다
◈ 고란사에서
고란사 뒤안 절벽 바위틈에서
한사코 몸을 숨기는
눈썹만한 그대여
낙화암 푸른 전설 다 안다는 듯
천년 묵은 소나무는
굵은 뿌리를 바윗가에 드러내고
강물결 춤출 때마다
금빛 솔잎 따갑게 흔들리는데
눈씻고 보아야
겨우 눈에 띄었다가는
햇빛 비치면 다시 몸을 숨기는
고란초여
이제는 다 흘러가버린
천 년 전의 사랑
아직도 못 잊겠다는 듯
그늘에 숨어서도
제 모습 부끄럽다 하네
비에 젖은 눈썹 훔치며
목숨과 바꾼 사랑
남 몰래 속삭이고 있네
◈ 1미터의 사랑
석 자 가웃 되는 1미터의 정확한 길이는
빛이 진공 속에서 2억 9천 79만 2천 4백
58분의 1초 동안 진행된 거리라고 하는데,
그대와 나 사이에 가로놓인 그리움의 거리는
베틀 위의 팽팽한 눈썹줄이 잉아에 닿을 때
북에서 풀리는 비단실의 떨림이라도 되는지,
우리들 사랑의 이 영겁과도 같이 멀기만 한
닿을 수 없는 허기진 목숨의 허공 속에는
칠월 초이렛날 미리내를 날으는 까막까치의
하마하마 기다리던 날갯질 소리 가득하지만,
내 약지를 그대의 약지에 마주 비벼서
10조분의 1미터의 목마름 죄다 지우고
운석 떨어지고 화광 박히는 우주 속에서
미리내를 건너는 그리움이 금빛으로 물들 때,
아스라한 길녘 어느 1미터의 물이랑 위에
지필묵과 궁시(弓矢)와 실타래 가지런히 놓아서
애비에미 이별은 나비잠 속에서도 꿈꾸지 않을
외씨 같은 젖니 난 우리 아기의 첫 돌을 잡히고.
◈ 여기쯤에서
여기쯤에서 그만 작별을 하자
눈 뜨고 사는 이에게는
생애의 벼랑은 언제나 있는 법
거기 피어 있는 이름 모를 풀꽃
하나 따서 가슴에 달고
뜻 없는 목숨 하나 따서
만났던 그 자리 그 어둠 앞에
우리의 죄로 젖어 있는 추억을 심고
그만 여기쯤에서 작별을 하자
똑같은 항아리가 어느 한쪽에
깨어져서 들어가야 한다면
그것은 이미 사랑도 아니다
우리의 입술은 아침저녁 비가 오고
내 몸에 묻어있는 눈썹 하나
머리칼 한 올이 나의 새벽까지
따라와서 죄를 짓자고 속삭인다 해도
너의 찬 손이 뜨거워지고
나의 안경이 흐려진다 해도
말하지 마, 아무 말도 하지 마
작별을 하자 그만 여기쯤에서 생애의
벼랑에서 뛰어내려 젖은 입술을
입술에 부비며 말하지 마, 아무 말도 하지 마
◈ 잉어를 위한 헌사
새벽안개 자욱한 물결 위로 물총새 날아갈 때
잉어 한 마리 낚으려고 깻묵 뭉쳐 던졌다
첫 달거리하는 계집애인 듯 비릿한 몸 냄새
잉어 한 마리 좇아 흰 턱수염 까맣게 잊고
낚시 바늘 날카롭게 세워서 유혹의 손짓을 했다
잉어는 낮잠을 자고 난데없는 피라미들이
사정없이 달려들면서 새벽 난봉꾼을 놀렸다
어떤 놈은 불그스레한 혼인색을 띠고
피라미 같은 놈아 나하고 그 짓이나 하자는 듯
힘 있게 세운 낚시 찌 마구 흔들어댔다
새벽안개 걷히자 왜가리 한 마리가
피라미 잡아먹고 물똥 내갈기며 날아갔다
러브호텔의 살냄새도 물침대도 아닌
초평지 흐린 물 위에 뜬 낡은 조대 위에서
피라미 같은 놈이 잉어와 수작하는 꼴 우습다고
왜왜왜 발가락질하면서 왜가리가 날아갔다
◈ 영희 누나
내가 백운국민학교 3학년이었을 때
충주사범을 갓 졸업한 권영희 선생님이
나의 담임교사로 부임해 왔다
내 생애의 한복판에 민들레꽃으로 피어서
배고픈 열한 살의 나를 숨막히게 했다
멀리 솟은 천둥산 아래 잠든 마을에
풍금을 잘 치는 예쁜 여교사가 왔다
어는 날 하교길에 개울의 돌다리를 건너며
들국화 한 송이 가리키듯 나를 손짓했다
탁번아 너 내 동생되지 않을래?
전쟁 때 부모가 다 돌아가시고
오빠도 군대에 가서 나는 너무 외롭단다
선생님이 누나가 되는 정말 이상한 일이
아무렇지도 않은 듯 일어났다
송화가루 날리는 봄언덕에서
누나다 누나다 선생님이 이젠 누나다
영희누나다 영희누나다
가을물 반짝이는 평장골 뒷개울에서도
고드름 떨어지는 겨울 한나절에도
누나의 동생으로 꾸는 꿈은
솔개그늘처럼 아늑했다
영희누나가 있으면 배고프지 않았다
울지도 않고 숙제도 잘했다
영희누나한테 착한 어린이가 되지 못한 날은
꿈속에서 벌서며 오줌을 쌌다
◈ 작별
오늘 아침 그대들과 작별하고 싶다
꿈꾸며 바라본 설핏한 저녁노을
진토닉에 몸을 푸는 빨간 체리
서해 바다 노을 한강까지 밀어올리며
얼음 밑에서 겨울을 나는 누치 한 마리
그대들과 선선히 작별하고 싶다
미끈미끈한 비늘도 모두 흩어지고
목마른 입술 닿은 종이컵도
재활용 봉투 속에서 잠들고 있다
첨탑에서 종소리 아득해질 때마다
내 눈썹 시리게 한
생애의 벼랑도
뜨거운 알콜 목구멍에 쏟아
나의 욕망 연소시킬 불씨로
이젠 그만 사그라지면 좋겠다
아무리 불러봐야 메아리도 없는 아침
떠나간 빈자리 메워줄 슬픔 하나로
텅 빈 자리에 호젓이 남고 싶다
면도한 두 볼에 스킨로션 바르고
구겨진 넥타이로 목을 감고
죽어가는 관절을 일으켜 세워
그대들과 절뚝거리며 작별하고 싶다
◈ 초겨울 아침
첫눈이 내린 초겨울 아침
지난봄에 시집간 제자한테서
전화가 왔다
―저 아기 가졌어요
눈을 뒤집어쓴 나뭇가지들이
아기 예수의
하얀 배내옷 입고
옹알옹알 옹알이 한다
크리스마스트리의 꼬마전등알처럼
나뭇가지마다
눈송이들이 반짝인다
―저 아기 가졌어요
첫눈이 내린 초겨울 아침
지난봄에 시집간 제자한테서
전화가 왔다
◈ 그대의 별자리
비상등 켜고 전조등 밝혀도
그대가 가는 길 보이지 않는다
네거리에 가까스로 왔지만
직진해야 하는지 우회전해야 하는지
가늠할 수가 없다
황도 십이궁도 광막한 어둠에 싸여
전갈자리인지 사자자리인지
북극성 곧바로 보이는
오리온자리인지
분별할 수가 없다
길은 뚫린 곳에서 스스로 막힌다
그대가 가는 길 찾는
나의 그리움은
저 혼자 시간의 강물로 빠지며
내 생애의 길을 지워버린다
울고 싶을 때
나는 울고 싶다
◈ 이별
이제는 친구들을 만나는 일이
그전 같지 않다
삼겹살 곱창 갈매깃살 제비추리
두꺼비 오비 크라운
아리랑 개나리 장미 라일락
비우고 피우고 노래했는데
봄여름 나나 가을 저물도록
얼굴 한 번 못 보다가
아들딸 결혼식장에서나
문상 간 영안실에서나
오랜만에 만나 인사를 나누지
오늘 헤어지면 언제 또 만날까
영영 오지 않을 봄을 기다리듯
다 헛말인 줄 알면서도
자주자주 만나자
약속하고 헤어지지
그래그래 마음으로야
좋은 친구 자주 만나
겨울강 강물소리 듣고 싶지만
예쁜 아이 착한 녀석
새 친구로 맞이하는
아들딸 결혼식장에서나
그냥 그렇게 또 만나겠지
이제 언젠가
푸르른 하늘 노을빛으로 물들고
저녁별이 눈시울에 흐려지면
영안실 사진틀 속에
홀로 남아서
자주자주 만나자고
헛 약속한 친구들
그냥 물끄러미 바라보겠지
다시는 못 만날 그리운 친구야
죽음이 꼭 이별만이랴
이별이 꼭 죽음만이랴
'☞ 문학의 뜨락' 카테고리의 다른 글
양녕대군(讓寧大君)의 시조 3편 (0) | 2022.04.26 |
---|---|
송수권(宋秀權) 시 모음 (0) | 2022.04.20 |
임보(林步) 시 모음 (0) | 2022.04.05 |
최영미 시 모음 (0) | 2022.03.28 |
문정희 시 모음 (0) | 2022.03.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