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수권 시인(1940~2016). 전남 고흥
서라벌예술대학
1975년 시 '산문에 기대어'로 등단
구상문학상. 김삿갓문학상 수상
순천대학교 인문예술대학 문예창작학과 명예교수
송수권(宋秀權) 시 모음
◈ 산문(山門)에 기대어
누이야
가을산 그리메에 빠진 눈썹 두어 낱을
지금도 살아서 보는가
정정(淨淨)한 눈물 돌로 눌러 죽이고
그 눈물 끝을 따라 가면
즈믄 밤의 강이 일어서던 것을
그 강물 깊이깊이 가라앉은 고뇌의 말씀들
돌로 살아서 반짝여 오던 것을
더러는 물 속에서 튀는 물고기같이
살아 오던 것을
그리고 산다화 한 가지 꺾어 스스럼 없이
건네이던 것을
누이야 지금도 살아서 보는가
가을산 그리메에 빠져 떠돌던, 그 눈썹 두어 낱을 기러기가
강물에 부리고 가는 것을
내 한 잔은 마시고 한 잔은 비워두고
더러는 잎새에 살아서 튀는 물방울같이
그렇게 만나는 것을
누이야 아는가
가을산 그리메에 빠져 떠돌던
눈썹 두어 낱이
지금 이 못 물 속에 비쳐옴을
◈ 인연
내 사랑하던 쫑이 죽었다
어초장 언덕바지 감나무 밑에 묻어 주었다
이듬해 봄 감나무 잎새들 푸르러
겅겅 짖었다
◈ 혼자 먹는 밥
혼자 먹는 밥은 쓸쓸하다
숟가락 하나
놋젓가락 둘
그 불빛 속
딸그락거리는 소리
그릇 씻어 엎다 보니
무덤과 밥그릇이 닮아 있다
우리 生(생)에서 몇 번이나 이 빈 그릇
엎었다
되집을 수 있을까
창문으로 얼비쳐 드는 저 그믐달
방금 깨진 접시 하나.
◈ 시골길 또는 술통
자전거 짐받이에서 술통들이 뛰고 있다
풀 비린내가 바퀴살을 돌린다
바퀴살이 술을 튀긴다
자갈들이 한 치씩 뛰어 술통을 넘는다
술통을 넘어 풀밭에 떨어진다
시골길이 술을 마신다
비틀거린다
저 주막집까지 뛰는 술통들의 즐거움
주모가 나와 섰다
술통들이 뛰어내린다
길이 치마 속으로 들어가 죽는다
◈ 세한도(歲寒圖)
먹붓을 들어 빈 공간에 선을 낸다.
가지 끝 위로 치솟으며 몸놀림하는 까치 한 쌍이
여백에서 폭발하는 울음
먹붓을 들어 빈 공간에 선을 낸다.
고목나무 가지 끝 위에 까치집 하나
더 먼 저승의 하늘에서 폭발하는 울음.
한 폭의 그림이
질화로같이 따숩다.
◈ 까치밥
고향이 고향인 줄도 모르면서
긴 장대 휘둘러 까치밥 따는
서울 조카 아이들이여
그 까치밥 따지 말라
남도의 빈 겨울 하늘만 남으면
우리 마음 얼마나 허전할까
살아온 이 세상 어느 물굽이
소용돌이치고 휩쓸려 배 주릴 때도
공중을 오가는 날짐승에게 길을 내어주는
그것은 따뜻한 등불이었으니
철없는 조카들이여
그 까치밥 따지 말라
사랑방 말쿠지*에 짚신 몇 죽* 걸어 놓고
할아버지는 무덤 속을 걸어가시지 않았느냐
그 짚신 더러는 외로운 길손의 길보시*가 되고
한밤중 동네 개 컹컹 짖어 그 짚신 짊어지고
아버지는 다시 새벽 두만강 국경을 넘기도 하였느니
아이들아, 수많은 기다림의 세월
그러니 서러워하지도 말아라
눈 속에 익은 까치밥 몇 개가
겨울 하늘에 떠서
아직도 너희들이 가야 할 머나먼 길
이렇게 등 따숩게 비춰 주고 있지 않으냐.
◈ 땡볕
삼한적 하늘이었는가 고려적 하늘이었는가
하여튼, 그 자즈러지는 하늘 밑에서
'확 콩꽃이 일어야 풍년이라는디,
원체 가물어놔서 올해도 콩꽃 일기는
다 글렀능갑다'
두런두런거리며 밭을 매는 두 아낙
늙은 아낙은 시어머니, 시집온 아낙은 새댁,
그 새를 못 참아 엉금엉금 기어나가는 것은
샛푸른 샛푸른 새댁,
내친김에 밭둑 너머 그 짓도 한번
'어무니, 나 거기 콩잎 몇 장만
따 줄라요?"
(오실할 년, 콩꽃은 안 일어 죽겠는디 콩잎은 무슨 콩잎?)
옛다, 받아라 밑씻개 콩잎
멋모르고 닦다보니 항문에서 불가시가 이는데
호박잎같이 까끌까끌한 게 영 아니라
'이거이 무슨 밑씻개?"
맞받아치는 앙칼진 목소리,
"며느리밑씻개'
어찌나 우습던지요
그 바람에 까무러친 민들레 홀씨
하늘 가득 자욱하니 흩어져 날았어요
깔깔거리며 날았어요
대명천지, 그 웃음소리 또 멋도 모르고
덩달아 콩꽃은 확 일었어요.
◈ 강
이 겨울에는
저무는 들녘에 혼자 서서
단호한 믿음 하나로 이마를 번득이며
숫돌에 칼을 가는 놈이 있다
제 섰던 자리
벌판을 두 동강 내어
어슬어슬 황혼 속을 걸어가는 놈이 있다
보아라 저 방랑의 검객
한 굽이 검돌면서 모래톱을 만들고
또 한 굽이 감돌면서 모래밭을 만드는 것은 힘이다
누가 저 유연한 힘의 가락 다시 꺾을 수 있느냐
누가 저 유연한 힘의 노래 다시 부를 수 있느냐
우리는 어느 산굽이
또 한 바다에 퍼런 굽이 설 때까지
흐득흐득 지는 잎새로나 숨어
유유히 황혼 속을 사라지는
저 검객의 뒷모습이나 지켜볼 일이다
◈ 겨울 이사
추적추적 겨울비가 내리는 날
이삿짐을 나르며 변두리 전셋방으로 몰리면서도
기죽지 않고 까부는 아이들이 대견스럽다.
오늘은 그들의 뒤통수를 유난히 쓰다듬고 싶은 하루였다.
돌아보매 사십 평생 고통과 비굴 속에 흔적 없고
좋은 시절 다 넘기고 우리는 뒤늦게 이 도시에 쳐들어와
말뚝 하나 박을 곳이 없다.
차 한 잔 값에도 찔리고 수화기를 들어도
멀리서 친구가 오지 않나 몸을 사린다.
어떻게들 살아가는 걸까, 때로는 의문을 제기해도
삶의 공식은 쉽게 풀리지 않는다.
한 달에도 몇 번씩 걷히는 무슨 유사다, 회비다,
서투른 몸짓에 뒤늦게 코 깨지는 걸 알고 발을 뺐더니
또 누구는 자폐증 환자라 꾸짖는다.
애경사를 당해봐라. 또 누구는 겁을 준다.
며칠 전은 불우 문우 돕기 만 원을 빼내려고
아내와 치고받다 나도 이 말을 멋지게 써 먹었다.
그것도 정작 가야 할 곳으로 가지 못하고 홀짝
커피값으로 축이 났다.
정말 어떻게들 살아가는 걸까.
내 오늘 친구 말대로 이 바닥 일만 평 적막을 흩뿌릴까보다.
정말 다들 어떻게 살아가는 걸까.
회색빛 하늘 속에 이삿짐을 따라가며
기죽기 않고 까부는 아이들이 대견스럽다.
아내여, 결코 거러지 같은 바닥 이 세기의 문 앞에서
그대 눈물을 보이지 말라.
우리 모두 죽어서는 평등하리라
◈ 그늘
그늘이란 말 아세요
맺고 풀리는 첩첩 열두 소리 마당
恨의 때깔을 벗고 나면
그늘을 친다고 하네요.
개미란 말 아세요
좋은 일 궂은 일 모래알로 다 씻기고
오늘은 남도 잔치 마당 모두들 소반상을 둘러앉아
맛을 즐기며
개미가 쏠쏠하다고들 하네요.
순채란 말 아세요
물 속에 띠를 늘이고 사는 환상의 풀
모세관의 피를 맑게 거르는
솔찮이란 말 아세요
마음 외로운 날 들로 산으로 바자니며
나물 바구니에 솔찮이 쌓이던 나숭개 봄나물들
그러고도 쑥국과 냉이 진달래 보릿닢 홍어앳국
벌천이란 말 아세요
시집온 지 사흘 벌써부터 기러기 고기를 먹고 왔는지
깜박깜박 그릇을 깨기만 하는 이웃집 새댁
사는 재미도 오밀조밀 맛도 아기자기
산 굽굽, 말 굽굽 휘어지는 남도 칠백 리
다 우리 씀씀이 넉넉한 품새에서
그늘을 치고 온 말들이에요.
◈ 꿈꾸는 섬
말없이 꿈꾸는 두 개의
섬은 즐거워라
내 어린 날은 한 소녀가 지나다니던 길목에
그 소녀가 흘려 내리던 눈웃음결 때문에
길섶의 잔 풀꽃들도 모두 걸어 나와
길을 밝히더니
그 눈웃음결에 밀리어 나는 끝내 눈병이 올라
콩알만한 다래끼를 달고 외눈끔적이로도
길바닥의 돌멩이 하나도 차지 않고
잘도 지내왔더니
말없이 꿈꾸는 두 개의
섬은 슬퍼라
우리 둘이 지나다니던 그 길목
쬐그만 돌 밑에
다래끼에 젖은 눈썹 둘, 빼어 눌러 놓고
그 소녀의 발부리에 돌이 채여
그 눈구멍에도 다래끼가 들기를 바랐더니
이승에선 누가 그 몹쓸 돌멩이를
차고 갔는지
눈썹 둘은 비바람에 휘몰려
두 개의 섬으로 앉았으니
말없이 꿈꾸는 저 두 개의
섬은 즐거워라
◈ 나팔꽃
바지랑대 끝 더는 꼬일 것이 없어서 끝이다 끝 하고
다음날 아침에 나가보면 나팔꽃 줄기는 하공에
두 뼘은 더 자라서 꼬여 있는 것이다.
움직이는 것은 아침 구름 두어 점, 이슬 몇 방울
더 움직이는 바지랑대는 없을 것이었다.
그런데도 다음날 아침에 나가보면 덩굴손까지 흘러나와
허공을 감아쥐고 바지랑대를 찾고 있는 것이다.
이젠 포기하고 되돌아올 때도 되었거니 하고
다음날 아침에 나가보면 가냘픈 줄기에
두세 개의 鐘(종)까지 매어달고는
아침 하늘에다 은은한 종소리를 퍼내고 있는 것이다.
이젠 더 꼬일 것이 없다고 생각되었을 때
우리의 아픔도 더 한 번 길게 꼬여서 푸른 종소리는 나는 법일까
◈ 난
난을 보고 사는 마음은
섣달 하늘의 쇠기러기 울음소리 같은 것이다
푸른 잎 사이 창창한 꽃대의 뻗쳐오름은
황산벌에 뜨는 계백의 창날인가
어린 관창이 보듯 난은 혀끝을 차며 나를 본다
얼마나 가야 나는 이 세상 용서하는 법을 배울까
아침마다 난은 제 그늘로 꽃대를 휘며
이 세상 너무 늙고 오래되었다 네 갈 길을 가라
스스로를 가르친다
휘어져라 휘어져라 곧은 잎새뿐 아니라
저무는 수락산도 그 잔등에 솔숲을 깔아
비탈길 내는 법을 안다고 타이른다
그 비탈길 위에 고깔 쓴 여승도 올려놓고
언뜻언뜻 장삼 자락도 얼비쳐내면서
그렇지 않느냐 우리 사는 법 고개를 끄덕이게 한다
난을 보고 사는 마음은
섣달 갈밭 사이 길을 가는 쇠기러기 울음소리 같은 것이다
◈ 내 사랑은
저 산 마을 산수유꽃도 지라고 해라
저 아래뜸 강 마을 매화꽃도 지라고 해라
살구꽃도 복사꽃도 앵두꽃도 지라고 해라
하구 쪽 배 밭의 배꽃들도 다 지라고 해라
강물 따라가다 이런 꽃들 만나기로서니
하나도 서러울 리 없는 봄날
정작 이 봄은 뺨 부비고 싶은 것이 따로 있는 때문
저 양지쪽 감나무 밭 감잎 움에 햇살 들치는 것
이 봄에는 정작 믿는 것이 있기 때문
연초록 움들처럼 차 오르면서,
햇빛에도 부끄러우면서
지금 내 사랑도 이렇게 가슴 두근거리며 크는 것 아니랴
감잎 움에 햇살 들치며 숨가쁘게 숨가쁘게
그와 같이 뺨 부비는 것, 소곤거리는 것,
내 사랑 저만큼의 기쁨은 되지 않으랴.
◈ 더러는 그리워하며
더러는 비워놓고 살 일이다.
하루에 한 번씩
저 뻘밭이 갯물을 비우듯이
더러는 그리워하며 살 일이다.
하루에 한 번씩
저 뻘밭이 밀물을 쳐보내듯이
갈밭머리 해 어스름녘
마른 물꼬를 치려는지
돌아갈 줄 모르는
한 마리 해오라기처럼
먼 산 바래서서
아, 우리들의 적막한 마음도
그리움으로 빛날 때까지는
또는
바삐바삐 서녘 하늘을 깨워 가는
갈바람 소리에
우리 으스러지도록 온몸을 태우며
마지막 이 바닷가에서 캄캄하게 저물 일이다.
◈ 도라지꽃
도라지 도라지
심심산천에 백도라지
풋보리밥 한술 된장국 말아먹고
지름댕기 팔랑팔랑
올해 네 나이 몇 살이더냐
도래샘도 띠앗집도 다 버리고
눈 오는 날 주재소 앞마당 전남班으로
너는 열여섯 정신대 머릿수건을 쓰고
고목나무 뒤에 붙어 참매미처럼 희게 울더니
오끼나와 테니안 라바울 사이펀
그 어디쯤 흘러가
한 초롱 여름산 더윗술을 걸러주며
여적 그 섬 기슭 혼자 폈느냐
내 어려선 막내고모 같던 종꽃
도라지 너를 보면
삼한적 맑은 하늘
이슬 내리는 소리
호궁 소리”
◈ 들불
먼 지평에 들불이 떴다.
빠른 속도로 벌판을 가로 질러 타들어 오고 있었다.
국도를 가로 질러가는 교차로
길을 막은 차단기 앞에서
우리는 숨 죽여 바라보고 있었다.
덜커덕거리며 지나가는 들불
불 켜진 창마다
툭툭 걸려 넘어진 수급들
코도 눈도 없는 해골들의 까무러치는 소리
참혹한 죽음을 태우며 다시 벌 끝을 타들어 가는 들불
그 입구 쪽에서 밤 까마귀 한 마리 까옥거리고 있었다.
우리는 뒤돌아보았다.
기적 한 끝이 잘려 나간 밤국도에
어지러운 혼이 불티 날 듯 하고 있었다
◈ 땅 끝에서
등대가 서 있는 방파제 끝
빚에 몰린 한 여자가 투신했다
마을 사람들 횃불을 들고 나와
간신히 구조되었다
이듬해 유채꽃이 피어서야
그 여자 이바지 떡짐을 이고 왔다
암, 쇠똥에 굴러도 이승이 백 번 낫지
마을 노인들 저마다 한 소식씩 던졌다
암, 그렇고말고 죽고 나서야 찍는 발자국이
첫 발자국이지!
◈ 물 꽃
세월이 이처럼 흘렀으니
그대를 잊어도 되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나는 오늘도 채석강 가에 나와 돌 하나 던집니다
강은 온몸으로 경련을 일으킵니다
상처가 너무 깊은 까닭입니다
상처가 너무 큰 까닭입니다
돌 하나가 떠서 물 위에 꽃 한 송이 그립니다
인제는 향기도 빛깔도 냄새도 없는 그것을
물꽃이라 불러도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오늘도 채석강 가에 나와 돌 하나 던집니다
◈ 밀잠자리
어찌나 이쁘든지요
이른 아침 논둑 길을 걷다가 볏 잎 뒤에 붙은
푸시시 막 잠깨는 밀잠자리 한 마리
어느 날 내 영혼도 저렇게 가벼울 수만 있다면
젖은 이슬 털어 말릴 수만 있다면……
어찌나 이쁘든지요
그 견인의 시간 다 지나고 신생의 아침
투명한 햇살에 날아오르는 아른아른한 빈 날개
저 알 수 없는 하늘 뒤로 사라지는…
◈ 봄날
앵두꽃이 피었다 일러라 살구꽃이 피었다 일러라
또 복사꽃이 피었다 일러라
할머니 마루 끝에 나앉아 무연히 앞산을 보신다
등이 간지러운지 자꾸만 등을 긁어신다
올해는 철이 일들었나 보다라고 말하는 사이
그 앞산에도 진달래꽃 분홍 불이 붙었다
앞대 개포가에선 또 나죽한 뱃고동이 운다
집집마다 부뚜막에선 왱병이 울고 야야, 쭈꾸미 왱병 ㅡ 식초병
배가 들었구나 , 할머니 쩝쩝 입맛을 다신다
빙초산 맛이 입에 들척지근하고 새콤한 것이
달기가 햇뻐꾸기 소리 같다
아버지 주꾸미 한 뭇을 사오셨다 어머니 고추장
된장을 버물 또 부뚜막의 왱병을 기울이신다
주꾸미 대가리를 씹을 때마다 톡톡 알이 터지면서
아삭아삭 씹히는 맛, 아버지 하신 말씀
니 할매는 이 맛을 두고 어찌 갔을거나
환장한 환장한 봄날이었다
집집마다 부뚜막에선 왱병이 오도방정을 떨고
앞대 개포가에선
또 나즉한 뱃고동이 울었다
◈ 봄비는 즐겁다
며칠째 봄비가 지난다.
한 떼씩 마치 진군의 나팔 소리 같다.
샤넬 향수병을 따놓은 병마개 같다.
촉촉히 마음에 젖어 드는 얼굴,
세상이 보기 싫다며 손나발을 입에 대고
불던 친구가 있었다.
물구나무서서 가랑이 사이로
세상을 건네 보던 친구가 있었다.
젖지도 못하고 마른 종이처럼 구겨졌으면 어쩌나.
큰길로 나서니 빨강 분홍 초록 파랑 우산 속에
소녀들의 밝은 표정이 갇혀 있다.
한 떼의 봄비처럼 조잘거리며 내를 건너 숲을 건너
밀림 속으로 사라져간다. 저 가벼운 종아리들,
문득 발을 막고 제재소가 나무 켜는 톱질소리가 들려온다.
향긋하다. 눈을 감는다.
거대한 삼나무 숲 속살들이 톱밥으로 무너져 내린다.
자꼬만 밀림 속에서 휘파람새, 휘파람새가 운다.
생각이 발통이 되어 축축한 통나무들을 몰고 간다.
나무 찍는 우리나라 강릉 크낙새의 빨간 주둥이가 보인다.
뚝방길 위 버드나무에 하얀 젖니를 뱉고 가는 봄비는 즐겁다.
아, 들길에 서서 나는 명아주 싹이라도 세어볼 건가.
강을 건너 북상하는 한 떼의 봄비, 뒷 발꿈치가 다 젖는다.
오늘은 강가에 나가 남풍에 실려 종종걸음 치는 한 떼의 봄비.
조용한 전별식을 갖고 싶다.
◈ 빈집
오래도록 잠긴 저 문에
누군가 빗장을 푼다
삭아내린 싸리 울바자 다시 세우고
눈보라가 설쳐대는 툇마루와
댓돌을 쓸고
댓돌 위에 신발 몇 켤레도 가지런하다
어제는 서울서 일만이네 식구가 내려와
밤새도록 저 창호 문발에 불빛 따뜻하다
그 불빛 새어 나와
온 마을이 다 환하다
낯선 듯 동네 개가 컹컹 짖고
올바자를 넘는 애기 울음소리
동쪽 하늘에 뜬 샛별이 다 파르르 떤다
마당가 바지랑대에 널린 애기똥물빛
이제야 사람이 사람답게 보이기 시작한다
아침부터 굴뚝의 연기가 치솟아
한밭재 대숲머리를 돌아나가는
저 들판의 자욱한 연기 보아라
오래 잊힌 자진모리 설움 한 가락이
그렇게 풀리는구나
IMF가 대순가 돌아가야지 돌아가야지
벼르고 벼르던 30년 세월
조금 일찍 돌아온 것뿐이다
조금 앞당겨 돌아온 것뿐이다
◈ 뻘 물
이 질퍽한 뻘내음 누가 아나요
아카시아 맑은 향이 아니라 밤꽃 흐드러진
페로몬 냄새 그보다는 문클한
이 질퍽한 뻘내음 누가 아나요
아카시아 맑은 향이야
열 몇 살 가슴 두근거리던 때 이야기지만
들찔레 소복이 피어지던 그 언덕에서
나는 비로소 살 냄새를 피우기 시작했어요
여자도 낙지발처럼 앵기는 여자가 좋고
그대가 어쩌고 쿡쿡 찌르는 여자가 좋고
하여튼 뻘 물이 튀지 않는 꽹과리 장고 소리보단
땅을 메다치는 징 소리가 좋아요
하늘로는 가지 마……
하늘로는 가지 마……
캄캄하게 저물면 뒤늦게 오는 땀 울음
그 징 소리가 좋아요
저물다가 저물다가 하늘로는 못 가고
저승까진 죽어 갔다가
밤길에 쏘내기 맞고 찾아드는 계집처럼
새벽을 알리며 뒤늦게 오는 소리가 좋아요.
◈ 새해 아침
새해 아침은 불을 껐다 다시 켜듯이
그렇게 떨리는 가슴으로 오십시오
답답하고 화나고 두렵고
또 얼마나 허전하고 가난했습니까?
그 위에 하얀 눈을 내리게 하십시오
지난밤 제야의 종소리에 묻어둔 꿈도
아직 소원을 말해서는 아니 됩니다
외로웠습니까? 그 위에 하얀 눈을 내리게 하십시오
억울했습니까? 그 위에 하얀 눈을 내리게 하십시오
슬펐습니까? 그 위에 하얀 눈을 내리게 하십시오
얼마나 하고 싶은 일들이 많았습니까?
그 위에 우레와 같은 눈을 내리게 하십시오
그 위에 침묵과 같은 눈을 내리게 하십시오
낡은 수첩을 새 수첩으로 갈며
떨리는 손으로 잊어야 할 슬픈 이름을
두 줄로 금긋듯
그렇게 당신은 아픈 추억을 지우십시오
새해 아침은
찬란한 태양을 왕관처럼 쓰고
끓어오르는 핏덩이를 쏟아놓으십시오
새해 아침은
첫날밤 시집온 신부가 아침나절에는
저 혼자서도 말문이 터져 콧노래를 부르듯
그렇게 떨리는 가슴으로 오십시오.
◈ 숨비기꽃 사랑
칠월의 제주 바닷가 숨비기꽃
숨비기꽃 피어나면
섬 계집들 사랑도
피어나리
작열한 햇빛 입에 물고
전복을 따랴, 미역을 따랴
천 길 물 속 물이랑을 넘는
저 숨비기꽃들의 숨비소리
아직 바다가 쪽빛이긴 때 이르고
오명가명 한 소쿠리씩
마른 꽃을 따다가 베갯솜을 놓는
눈물 끝을 비친 사랑아
그 베개 모세혈관 피를 맑게 걸러서
멀미 끝에 오는 시력을 다시 회복하고
저승 속까지 연보라 燈을 실어놓고
밝은 눈을 하나씩 얻어서 돌아가는
시집갈 땐 이불 속에 누구나
藥베개 하나씩 숨겨가는
그 숨비기꽃 사랑 이야길 아시나요.
◈ 쓰러진 나무
심산유곡 나무 한 그루 쓰러져 있다고
괜히 걱정 말아라
너의 연민이 안쓰러움이고 사랑일 수 없다
벌써부터 달팽이 한 마리 뿔을 흔들며 온다
달팽이 오는 길을 따라 무당벌레 날아들고
줄고사리 참나무버섯이 먼저 와 앉았다
붉은 줄무늬 다람쥐 한 마리 그 나무 위에 올라앉아
입을 오물거리다 말고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앞발로 얼굴을 씻는다
수리부엉이 한 마리 숲 위를 맴돌다가
방금 일어난 일 오랜 경험으로 안다
걱정하지 말아라
쓰러진 나무에서 이상한 향기가 난다
◈ 아그라 마을에 가서
우리의 신은 콩꽃 속에 숨어 있고
듬뿍 떠놓은 오동나무 잎사귀
들밥 속에 있고
냉수 사발 맑은 물 속에 숨어 있고
형벌처럼 타오르는 황토밭 길 잔등에 있다
바랭이 풀 지심을 매는 어머니 호미 끝에
쩌렁쩌렁 울리는 땅
얼마나 감격스럽고 눈물 나는 것이냐
캄캄한 숲 너머
모닥불빛 젖어 내리는 서북항로
아그라, 아그라
내 사는 조그만 마을
왔다메!
문둥아 내 문둥아 니 참말로 왔구마
그 말 듣기 좋아
그 말 너무 서러워
아 가만히 불러 보는 어머니
솥단지 안에 내 밥그릇 국그릇
아직 식지 않고
처마 끝 어둠 속에 등불을 고이시는 손
그 손끝에 나의 신은 숨쉬고
허옇게 벗겨진 맨드라미
까치 대가리
장독대 위에 내리는 이슬
정화수 새로 짓고
나의 신은 늙고 태어나고
새 새끼처럼 조잘댄다.
◈ 아내의 맨발
갑골문 甲骨文
뜨거운 모래밭 구멍을 뒷발로 파며
몇 개의 알을 낳아 다시 모래로 덮은 후
바다로 내려가다 죽은 거북을 본 일이 있다
몸체는 뒤집히고 짧은 앞 발바닥은 꺾여
뒷다리의 두 발바닥이 하늘을 향해 누워있었다
유난히 긴 두 발바닥이 슬퍼 보였다
언제 깨어날지도 모르는 마취실을 향해
한밤중 병실마다 불꺼진 사막을 지나
침대차는 굴러간다
얼굴엔 하얀 마스크를 쓰고 두 눈은 감긴 채
시트 밖으로 흘러나온 맨발
아내의 발바닥에도 그때 본 갑골문자들이
수두룩하였다
◈ 여름 낙조
왜 채석강변에 사는지 묻지 말아라
나는 지금 만 권의 책을 쌓아 놓고 글을 읽는다
만 권의 책, 파도가 와서 핥고 핥는 절벽의 단애
사람들은 그렇게 부른다
나의 전 재산을 다 털어도 사지 못할 만 권의 책
오늘은 내가 쓴 초라한 저서 몇 권을 불지르고
이 한바다에 재를 날린다
켜켜이 쌓은 책 속에 무일푼 좀벌레처럼
세들어 산다
왜 채석강변에 사느냐 묻지 말아라
고통에 찬 나의 신음 하늘에 닿았다 한들
끼룩끼룩 울며 서해를 날으는 저 변산 갈매기만큼이야 하겠느냐
물 썬 다음 저 뻘밭에 피는 물잎새들만큼이야
자욱하겠느냐
그대여, 서해에 와서 지는 낙조를 보고 울기 전에
왜 나 채석강변에 사는지 묻지 말아라
◈ 여승
어느 해 봄날이던가, 밖에서는
살구꽃 그림자에 뿌여니 흙바람이 끼고
나는 하루 종일 방 안에 누워서 고뿔을 앓았다.
문을 열면 도진다 하여 손가락에 침을 발라 가며
장지문에 구멍을 뚫어
토방 아래 고깔 쓴 여승이 서서 염불 외는 것을 내다보았다
그 고랑이 깊은 음색과 설움에 진 눈동자 창백한 얼굴
나는 처음 황홀했던 마음을 무어라 표현할 순 없지만
우리 집 처마 끝에 걸린 그 수그린 낮달의 포름한 향내를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나는 너무 애지고 막막하여져서 사립을 벗어나
먼발치로 바리때를 든 여승의 뒤를 따라 돌며
동구 밖까지 나섰다
여승은 네거리 큰 갈림길에 이르러서야 처음으로 뒤돌아보고
우는 듯 웃는 듯 얼굴상을 지었다
(도련님, 소승에겐 너무 과분한 적선입니다.
이젠 바람이 찹사운데 그만 들어가 보셔얍지요.)
나는 무엇을 잘못하여 들킨 사람처럼 마주 서서 합장을 하고
오던 길로 되돌아 뛰어오며 열에 흐들히 젖은 얼굴에
마구 흙바람이 일고 있음을 알았다
그 뒤로 나는 여승이 우리들 손이 닿지 못하는 먼 절간 속에
산다는 것을 알았으며 이따금 꿈속에선
지금도 머룻잎 이슬을 털며 산길을 내려오는
여승을 만나곤 한다
나는 아직도 이 세상 모든 사물 앞에서 내 가슴이 그때처럼
순수하고 깨끗한 사랑으로 넘쳐흐르기를 기도하며 시를 쓴다.
◈ 여자
이런 여자라면 딱 한번만이라도 살았으면 좋겠다.
잘하는 일 하나 없는 계산도 할 줄 모르는 여자
허나, 세상을 보고 세상을 보태는 마음은
누구보다 넉넉한 여자
어디선가 숨어 내 시집 속의 책갈피를 모조리 베끼고
찔레꽃 천지인 봄 숲과 미치도록 단풍 드는
가을과 내 시를 좋아한다고
내가 모르는 세상 밖에서 떠들고 다니는 여자
그러면서도 부끄러워 자기 시집 하나 보내지 못한 여자
어느 날 이 세상 큰 슬픔이 찾아와 내가 필요하다면
대책없이 떠날 여자, 여자라고 말하며
'여자'란 작품 속에만 숨어 있는 여자
이르크르츠쿠와 타슈켄트를 그리워하는
정말, 그 거리 모퉁이를 걸어가며 햄버거를 씹는
전신주에 걸린 봄 구름을 멍청히 쳐다보고 서 있는
이런 여자라면 딱 한 번만 살았으면 좋겠다
팔십리 해안 절벽 진달래가
산벼랑마다 드러눕는 봄날 오후에
◈ 연비
목어가 울 때마다 물고기들의 싱싱한 비늘이 떨어지고
운판이 자지러질 때마다 날짐승들마저 숨죽이며 날았다
어떤 침묵 하나가 이 세상을 여행 와서 더 큰 침묵 하나를
데리고 그림자처럼 지난다
문득 희나리*의 불꽃 더미 속에서 조실祖室 스님의 흰 팔뚝
하나가 불쑥 떠올라왔다 그 흰 팔뚝에서 아롱진
연비** 몇 방울이 생살로 타면서
얼음에 갇힌 꽃잎처럼 나의 감각을 흔들었다
사람이 죽으면 하늘로 가 구름 되고 비가 되어
칠칠한 숲을 기르는 물이 되고 햇빛 되는 걸까
그 후, 나는 고개를 꺾으며 몹쓸 습에 걸려
무심히 핀 들꽃, 날아가는 새에서도
조실의 흰 팔뚝을 떠올리며 어린애처럼 자주 길을 잃고
헛기침 끝에 온 몸을 떨었다
아니다, 아니다, 조실은 가지 않았다
어떤 믿음의 확신 하나가 이 세상에 다시 와서
나는 참으로 몹쓸 병을 꿈에서도 앓았다
눈보라치는 섣달 겨울 어느 날, 그의 방문을 열다가
평상시와 다름없이 윗목에 놓인 매화분의 둥그럭***에서
빨간 꽃망울 몇 개가 벌고 있음을 보았다
뜨거운 연비 몇 방울이 바야흐로 겨울 하늘에서 녹아 흘러
꽃들은 피고 있었다.
* 희나리 : 덜 마른 장작.
* 연비燃臂 : 불교에서 수행자들이 계를 받고 나서 팔뚝에 불을 놓아
문신처럼 떠내는 의식 또는 그 자국.
◈ 연엽에게
그녀의 피 순결하던 열 몇 살 때 있었다
한 이불 속에서 사랑을 속삭이던 때 있었다
蓮 잎새 같은 발바닥에 간지럼 먹이며
철없이 놀던 때 있었다
그녀 발바닥을 핥고 싶어 먼저 간지럼 먹이면
간지럼 타는 나무처럼 깔깔거려
끝내 발바닥은 핥지 못하고 간지럼만 타던
때 있었다
이제 그 짓도 그만두자고 그만두고
나이 쉰 셋
정정한 자작나무, 백혈병을 몸에 부리고
여의도 성모병원 1205호실
1번 침대에 누워
그녀는 깊이 잠들었다
혈소판이 깨지고 면역체계가 무너져 몇 개월 째
마스크를 쓴 채, 남의 피로 연명하며 살아간다
나는 어느 날 밤
그녀의 발이 침상 밖으로 흘러나온 것을 보았다
그때처럼 놀라 간지럼을 먹였던 것인데
발바닥은 움쩍도 않는다
발아 발아 가치마늘 같던 발아!
蓮 잎새 맑은 이슬에 씻긴 발아
지금은 진흙밭 삭은 잎새 다 된 발아!
말굽쇠 같은 발, 무쇠솥 같은 발아
잠든 네 발바닥을 핥으며 이 밤은
캄캄한 뻘밭을 내가 헤매며 운다
그 蓮 잎새 속에서 숨은 민달팽이처럼
너의 피를 먹고 자란 詩人, 더는 늙어서
피 한 방울 줄 수 없는 빈 껍데기 언어로
부질없는 詩를 쓰는구나
오, 하느님
이 덧없는 말의 교예
짐승의 피!
거두어 가소서
◈ 적막한 바닷가
더러는 비워놓고 살 일이다
하루에 한번씩
저 뻘밭이 갯물을 비우듯이
더러는 그리워하며 살 일이다
하루에 한번씩
저 뻘밭이 밀물을 쳐보내듯이
갈밭머리 해 어스름녘
마른 물꼬를 치려는지 돌아갈 줄 모르는
한 마리 해오라기처럼
먼 산 바래서서
아, 우리들의 적막한 마음도
그리움으로 빛날 때까지는
또는 바삐바삐 서녘 하늘을 깨워 가는
갈바람 소리에
우리 으스러지도록 온몸을 태우며
마지막 이 바닷가에서
캄캄하게 저물 일이다
◈ 젊은 날의 초상
위로받고 싶은 사람에게서 위로받는
사람은 행복하다
슬픔을 나누고자 하는 사람에게서 슬픔을
나누는 사람은 행복하다
더 주고 싶어도 끝내
더 줄 것이 없는 사람은 행복하다
강 하나늘 사이에 두고 그렇게도 젊은
날을 헤매인 사람은 행복하다
오랜 밤의 고통 끝에 폭설로 지는 겨울밤을
그대 창문의 불빛을 떠나지 못하는
한 사내의 그림자는 행복하다
그대 가슴속에 영원히 무덤을 파고 간 사람은
더욱 행복하다
아, 젊은 날의 고뇌여 방황이여
◈ 정
아이들이 크는 동안은 다 이렇듯 귀여운 것인가
꽃밭 하나를 차지하고 꽃을 가꾸는 아이들을 보면
더욱 그렇다
그들이 피워낸 꽃이 비록 작은
분꽃이나 나팔꽃일지라도
내 딸아이도 꽃밭 하나를 가지고 있다
무엇이 마음에 차지 않을 때에는
일부러 개 울음소리를 흉내낸다
아빠가 성난 얼굴을 하면
월, 월, 월, 혀를 내둘러놓고는 냅다 뛴다
냅다 뛴 자리, 가만히 쫓아가 발을 딛고 서보면
그 애의 꽃밭에서 흘러온 듯한 나팔꽃 분꽃 내음새가
온통 개 오줌으로 엎질러져서 가슴을 적신다
오늘 아침은 그 애 먼저 꽃밭에 나가 물을 주었다
바지랑대를 타고 오른 나팔꽃 몇 송이가 푸르디푸른
종소리를 내고
분꽃 속에서 까맣게 토라져 나온 꽃술이
월, 월, 월, 개 울음소리를 내었다
까닭도 없이 슬픔이 향기로 남아서.
◈ 조팝나무 가지 위의 흰 꽃들
온몸에 자잘한 흰 꽃을 달기로는
사오 월 우리 들에 핀 욕심 많은
조팝나무 가지의 꽃들만 한 것이 있을라고
조팝나무 가지 꽃들 속에 귀를 모아본다
조팝나무 가지 꽃들 속에는 네다섯 살짜리 아이들
떠드는 소리가 들린다
자치기를 하는지 사방차기를 하는지
온통 즐거움의 소리들이다
그것도 볼따구니에 정신 없이 밥풀을 쥐어발라서
머리에 송송 도장버짐이 찍힌 놈들이다
코를 훌쩍이는 녀석들도 있다
금방 지붕 위의 까치에게 헌 이빨을 내어주고 왔는지
앞니 빠진 밥투정이도 보인다
조팝나무 가지 꽃들 속엔 봄날 이런 아이들 웃음소리가
한종일 떠날 줄 모른다
◈ 지리산 뻐꾹새
여러 산봉우리에 여러 마리의 뻐꾸기가
울음 울어
떼로 울음 울어
석 석 삼년도 봄을 더 넘겨서야
나는 길뜬 설움에 맛이 들고
그것이 실상은 한 마리의 뻐꾹새임을
알아냈다
지리산 하(下)
한 봉우리에 숨은 실제의 뻐꾹새가
한 울음을 토해 내면
뒷산 봉우리 받아 넘기고
또 뒷산 봉우리 받아 넘기고
그래서 여러 마리의 뻐꾹새로 울음 우는 것을
알았다
지리산 중(中)
저 연연한 산봉우리들이 다 울고 나서
오래 남은 추스림 끝에
비로소 한 소리 없는 강이 열리는 것을 보았다
섬진강 섬진강
그 힘센 물줄기가
하동 쪽 남해를 흘러들어
남해군도의 여러 작은 섬을 밀어올리는 것을 보았다
봄 하룻날 그 눈물 다 슬리어서
지리산 하(下)에서 울던 한 마리 뻐꾹새 울음이
이승의 서러운 맨 마지막 빛깔로 남아
이 세석(細石) 철쭉꽃밭을 다 태우는 것을 보았다
◈ 징검다리
햇빛은 산과 들에 부드럽게 빛나고
물결은 풀어져 물방아는 쿵쿵
바둑이가 든 그림책 한 권을 잘도 넘기도 갔다
바둑이 대신 어머니는 자꾸 나를 부르시고……
지금도 물방앗간 앞을 가로지른 서른 몇 채의
어느 징검돌 위에 서서
나의 다릿심을 풀어내느라
어머니는 손을 내밀고 서서 나를 부른다
아마 그때가 입학하던 첫날이었을 게다
물방아도 봄이 되자 더 힘을 내어 돌고
내 이웃의 소녀들처럼 뒷머리 채를 흔들어대며
징검돌들은 흐젓이도 물 속에 처박혔었다
낄낄낄 웃음소리를 내고 도령아 이도령아
내 뒷머리 채 못 밟아준 것도 죄지……
이 날은 해가 꼴딱 지도록 어머니와 그 짓을 되풀이하여
내 다릿심이 반남아 풀리는 것을 보았다
팔짝, 팔짝, 쿵, 쿵, 물방아는 돌고 세월은 가고……
어른이 된 지금에도 아주아주 슬픔에 발을 적시어
내가 영 일어서지 못하는 날은
조약돌 몇 개로 물 낯 바닥을 마구 흐려 놓고
어머니는 그 돌들 위에 서서 나를 부른다.
◈ 첫눈
눈이 내린다.
어제도 내리고 오늘도 내린다.
미욱한 세상,
깨달을 것이 너무 많아
그 깨달음 하나로 눈물 젖은 손수건을 펼쳐들어
슬픈 영혼을 닦아내 보라고,
온 세상 하얗게 눈이 내린다.
어제도 내리고 오늘도 내린다.
살아있는 모든 것, 영혼이 있고,
내 생명 무거운 육신을 벗어 공중을 나는새가 되라고,
살아 있는 티벳인이 되라고 한밤중에도 하얗게 내린다.
히말라야 삼나무숲을 흔들며,
말울음 소릴 내며 이렇게 고요하게 지금 첫눈이내린다.
◈ 초록의 감옥
초록은 두렵다
어린 날 녹색 칠판보다도
그런데 자꾸만 저요, 저요, 저, 저요 손 흔들고
사방 천지에서 쳐들어온다.
이 봄은 무엇을 나를 실토하라는 봄이다
물이 너무 맑아 또 하나의 나를 들여다보고
비명을 지르듯이
초록의 움트는 연두빛 눈들을 들여다보는 일은 무섭다
초록에도 감옥이 있고 고문이 있다니!
이 감옥 속에 갇혀 그 동안 너무 많은 말들을
숨기고 살아왔다.
◈ 풍장
오늘은 할아버지 고향 가는 날
차마 성한 육신, 백발로는 가지 못하고
혼백으로 바람 타고 가는 날
살아서는 산도 옮길 듯한 한이
삭아서는 한줌의 재
물길 따라 바람 따라 고향 가는 날
바람아 불어다오
추석달이 뜨면 갈거나
임진각 누마루에 올라 함부로
북녘땅 여기저기 손가락을 디미시던 할아버지
어느 날은 채송화며 봉숭아
꽃씨 주머니를 풍선 끝에 매달아
바람도 없는 날
우우우우......우
입으로 불어올리시던 할아버지
조선호텔 로비에선 웬수 같기만 하던 얼굴이
TV화면에 불꽃처럼 스치던 날
예수당이 강냥욱이 지금도 살아 있었수구레
동갑내기라고 좋아서 껄껄 웃으시며
여기 땅문서가 있다고 고의춤 풀어놓고
손바닥을 흔들던 할아버지
임진강 나루목을 건너 저기 저
개성 뒷산을 넘어서
황해도 해주 근처 옹진반도 안악골까지
바람아 불어다오
오늘은 할아버지 물길 따라 바람 따라
고향 가는 날.
◈ 하얀 갈매기
목섬이 있고 누님의 바다가 있는 三千浦
살아서는 삼천포가 고향이라서 곧잘 삼천포로만
빳던 하얀 갈매기.
파란 바다 물결에 어려 노래하면서도
한 번도 물결치는 삶을 살지 못한 하얀 갈매기.
한 번은 면목 없이 면목동 하늘을 날다가
한 번은 고향 가까운 목섬 같은 변두리목동 하늘을 날다가
오늘은 공주다운 삶을 찾아
정말 공주로 이사가나보다
누구나 한 번쯤은 집을 옮겨야 하는 거지.
집들이한다는 부름 소리 듣고도
나는 서해 뻘밭 진수렁 진펄을 밟으며
몇 번이나 끊기는 다큐멘터리 필름 속에서
생을 헛딛고 김 피디의 레이 고우 속에 몰래 울음을 삼킨다
무심코 눈 들어 수평선을 바라본다
순결한 믿음 하나가 억겁 회귀
벌써 이 세상에 와서 하얀 갈매기로 난다
우리 목섬이 있는 삼천포로 가서 살지 않을래
물 고랑 흔들며 자꾸만 끼룩인다
◈ 해빙기
며칠째 쌓이던 눈이
다시 녹으면서
대성동(大成洞) 마을 움집들의 추녀 끝을 둘러
고드름발을 쳤다.
우리 고숙(姑叔)은
삼동(三冬)내 눈사태 속을 흐르는
물소리도 싫어지고
마른 산약(山藥) 뿌리를 다듬으며
달장깐이나 막힌 화개(花開)장길이 못내 서운타.
지리산(智異山)을 겉돌면서 살아온
고숙의 한평생
이 봄은 심메마니 어린 싹이라도 볼까
삼동(三冬) 허연 꿈 속에서도 만나지는 떡애기.
아장아장 걸어오는 부리시리 산삼
한 뿌리라도 만나질까.
유마경(維摩經) 한 구절 같은 햇빛 하나가
고드름발에 엉기면서
지리산(智異山)일대의 산봉우리들을
거느리고 왔다.
산맥들이 풀리면서 돌아가는
엇둘 엇둘 소리
◈ 석남꽃 꺾어
무슨 죄 있기 오가다
네 사는 집 불빛 창에 젖어
발이 멈출 때 있었나니
바람에 지는 아픈 꽃잎에도
네 모습 어리울 때 있었나니
늦은 밤 젖은 행주를 칠 때
찬그릇 마주 칠 때 그 불빛 속
스푼들 딸그락거릴 때
딸그락거릴 때
행여 돌아서서 너도 몰래
눈물 글썽인 적 있었을까
우리 꽃 중에 제일 좋은 꽃은
이승이나 저승 안 가는 데 없이
겁도 없이 넘나들며 피는 그 언덕들
석남꽃이라는데…
나도 죽으면 겁도 없이 겁도 없이
그 언덕들 석남꽃 꺾어들고
밤이슬 풀 비린내 옷자락 적시어가며
네 집에 들리라.
'☞ 문학의 뜨락'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박인환(朴寅煥) 시 모음 (0) | 2022.06.14 |
---|---|
양녕대군(讓寧大君)의 시조 3편 (0) | 2022.04.26 |
오탁번 시 모음 (0) | 2022.04.14 |
임보(林步) 시 모음 (0) | 2022.04.05 |
최영미 시 모음 (0) | 2022.03.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