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인환(朴寅煥) 시인,(1926년~1956년)
강원 인제, 평양의전 중퇴.
1946년 〈거리〉를 발표하여 등단.
광복 후 서울에서 서점 경영,
1949년 5인 합동시집 《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을 발간
1955년 《박인환 시선집》을 간행.
1976년에 시집 《목마와 숙녀》가 간행.
박인환(朴寅煥) 시 모음
◈ 木馬와 淑女
한 잔의 술을 마시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와
목마를 타고 떠난 숙녀의 옷자락을 이야기한다
목마는 주인을 버리고 거저 방울소리만 울리며
가을 속으로 떠났다 술병에서 별이 떨어진다
상심한 별은 내 가슴에 가볍게 부서진다
그러한 잠시 내가 알던 소녀는
정원의 초목 옆에서 자라고
문학이 죽고 인생이 죽고
사랑의 진리마저 애증의 그림자를 버릴 때
목마를 탄 사랑의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세월은 가고 오는 것
한 때는 고립을 피하여 시들어 가고
이제 우리는 작별하여야 한다
술병이 바람에 쓰러지는 소리를 들으며
늙은 여류작가의 눈을 바라다보아야 한다
등대에…
불이 보이지 않아도
그저 간직한 페시미즘의 미래를 위하여
우리는 처량한 목마소리를 기억하여야 한다
모든 것이 떠나든 죽든
그저 가슴에 남은 희미한 의식을 붙잡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서러운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
두 개의 바위틈을 지나 청춘을 찾은 뱀과 같이
눈을 뜨고 한 잔의 술을 마셔야 한다
인생은 외롭지도 않고
그 저 낡은 잡지의 표지처럼 통속하거늘
한탄할 그 무엇이 무서워서 우리는 떠나는 것일까
목마는 하늘에 있고
방울소리는 귓전에 철렁거리는데
가을바람 소리는
내 쓰러진 술병속에서 목메어 우는데
◈ 무도회
연기와 여자들 틈에 끼어
나는 무도회에 나갔다
밤이 새도록 나는 광란의 춤을 추었다
어떤 屍體를 안고
황제는 불안한 샹들리에와 함께 있었고
모든 물체는 회전하였다
눈을 뜨니 運河는 흘렀다
술보다 더욱 진한 피가 흘렀다
이 시간 전쟁은 나와 관련이 없다
광란된 의식과 불모의 육체…그리고
일방적인 대화로 충만된 나의 무도회
나는 더욱 밤 속에 가라앉아 간다
石膏의 여자를 힘있게 껴안고
새벽에 돌아오는 길 나는 내 전우가
전사한 통지를 받았다
◈ 장미의 온도
나신(裸身)과 같은 흰 구름이 흐르는 밤
실험실 창밖
과실의 생명은
화폐모양 권태하고 있다
밤은 깊어 가고
나의 애욕은
수목(壽木)이 방탕 하는 포도(鋪道)에 질주한다
나팔 소리도 폭풍의 부감(俯瞰)도
화판(花瓣)의 모습을 찾으며
무장(武裝)한 거리를 헤맸다
태양이 추억을 품고
암벽을 지나던 아침
요리와 위대한 평범을
Close-up한 원시림의
장미의 온도
◈ 세 사람의 가족
나와 나의 청순한 아내
여름날 순백한 결혼식이 끝나고
우리는 유행품으로 화려한
상품의 쇼우 윈도우를 바라보며 걸었다
전쟁이 머물고
평온한 지평에서
모두의 단편적인 기억이
비둘기의 날개처럼 솟아나는 틈을 타서
우리는 내성과 회환에의 여행을 떠났다
평범한 수확의 가을
겨울은 백합처럼 향기를 풍기고 온다
죽은 사람들은 싸늘한 흙 속에 묻히고
우리의 가족은 세 사람
토르소의 그늘 밑에서
나의 불운한 편력인 일기책이 떨고
그 하나 하나의 지면은
음울한 회상의 지대로 날아갔다.
아 창백한 세상과 나의 생애에
종말이 오기 전에
나는 고독한 피로에서
방화처럼 잠들은 지나간 세월을 위해
시를 써본다
그러나 창 밖
암담한 상가
고통과 구토가 동결된 밤의 쇼우 윈도우
그 곁에는
절망과 기아의 행렬이 밤을 세우고
내일이 온다면
이 정막의 거리에 폭풍이 분다
◈ 약속
먹을 것이 없어도
배가 고파도
우리는 살아 나갈 것을
약속합시다.
세상은 그리 아름답지
못하나
푸른 하늘과 내
마음은 영원한 것
오직 약속에서 오는
즐거움을 기다리면서
남보담 더욱 진실히
살아 나갈 것을
약속합시다.
◈ 가을의 유혹
가을은 내 마음에
유혹의 길을 가리킨다
숙녀들과 바람의 이야기를 하면
가을은 다정한 피리를 불면서
회상의 풍경을 지나가는 것이다
전쟁이 길게 머물은 서울의 노대에서
나는 모딜리아니의 화첩을 뒤적거리며
적막한 하나의 생애의 한시름을
찾아보는 것이다
그러한 순간
가을은 청춘의 그림자처럼 또는
낙엽보양 나의 발목을 끌고
즐겁고 어두운 사념의 세계로 가는 것이다
즐겁고 어두운 가을의 이야기를 할때
목메인 소리는 나는 사랑의 말을 한다
그것은 폐원에 있던 벤치에 앉아
고갈된 분수를 바라보며
지금은 죽은 소녀의 팔목을 잡고 있던 것과 같이
쓸쓸한 옛날의 일이며
여름은 느리고 인생은 가고
가을은 또다시 오는 것이다
회색 양복과 목관 악기는 어울리지 않는다
그저 목을 늘어뜨리고
눈을 감으면
가을의 유혹은 나로 하여금 잊을 수 없는
사랑의 사람으로 한다
눈물 젖은 눈동자로 앞을 바라보면
인간이 매몰될 낙엽이
바람에 날리어 나의 주변을 휘돌고
◈ 세월이 가면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네
바람이 불고 비가 올 때도
나는 저 유리창 밖 가로등
그날 밤을 잊지 못하지
사랑은 가고 옛날은 남는 것
여름날의 호숫가 가을의 공원
그 벤치 위에 나뭇잎은 떨어지고
나뭇잎은 흙이 되고
나뭇잎에 덮여서
우리들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네
내 서늘한 가슴에 있네
◈ 거리
나의 시간에 스코올과 같은 슬픔이 있다
붉은 지붕 밑으로 향수가 광선을 따라가고
한없이 아름다운 계절이
운하의 물결에 씻겨 갔다
아무 말도 하지 말고
지나간 날의 동화를 운율에 맞춰
거리에 화액을 뿌리자
따뜻한 풀잎은 젊은 너의 탄력같이
밤을 지구 밖으로 끌고 간다
지금 그곳에는 코코아의 시장이 있고
과실처럼 기억만을 아는 너의 음향이 들린다
소년들은 뒷골목을 지나 교회에 몸을 감춘다
아세틸렌 냄새는 내가 가는 곳마다
음영같이 따른다
거리는 매일 맥박을 닮아 갔다
베링 해안 같은 나의 마을이
떨어지는 꽃을 그리워한다
황혼처럼 장식한 여인들은 언덕을 지나
바다로 가는 거리를 순백한 식장으로 만든다
전정의 수목 같은 나의 가슴은
베고니아를 끼어 안고 기류 속을 나온다
망원경으로 보던 천만의 미소를 회색 외투에
싸아
얼은 크리스마스의 밤길로 걸어 보내자
◈ 검은 강
신이란 이름으로서
우리는 최종의 노정을 찾아보았다
어느 날 역전에서 들려오는
군대의 합창을 귀에 받으며
우리는 죽으러 가는 자와는
반대 방향의 열차에 앉아
정욕처럼 피폐한 소설에 눈을 흘겼다
지금 바람처럼 교차하는 지대
거기엔 일체의 불순한 욕망이 반사되고
농부의 아들은 표정도 없이
폭음과 초연이 가득찬
생과 사의 경지에 떠난다
달은 정막보다도 더욱 처량하다
멀리 우리의 시선을 집중한
인간의 히로 이룬
자유의 성채
그것은 우리와 같이 퇴각하는 자와는 관련이 없었다
신이란 이름으로서
우리는 저 달 속에
암담한 검은 강이 흐르는 것을 보았다
◈ 고향에 가서
갈대만이 한없이 무성한 토지가
지금은 내 고향
산과 강물은 어느 날의 회화
피 묻은 전신주 위에
태극기 또는 작업모가 걸렸다
학교도 군청도 내 집도
무수한 포탄의 작열과 함께
세상엔 없다
인간이 사라진 고독한 신의 토지
거거 나는 동상처럼 서 있었다
내 귓전에 싸늘한 바람이 설레이고
그림자는 망령과도 같이 무섭다
어려서 그땐 확실히 평화로웠다
운동장을 뛰어다니며
미래와 살던 나의 내 동무들은
지금은 없고
연기 한 줄기 나지 않는다
황혼 속으로
감상 속으로
차는 달린다
가슴 속에 흐느끼는 갈대의 소리
그것은 비창한 합창과도 같다
밝은 달빛
은하수와 토끼
고향은 어려서 노래 부르던
그것뿐이다
비 내리는 사경의 십자가와
아메리카 공병이
나에게 손짓을 해 준다
◈ 낙하
미끄럼판에서
나는 고독한 아킬레스처럼
불안의 깃발 날리는
땅 위에 떨어졌다
머리 위의 별을 헤아리면서
그 후 20년
나는 운명의 공원 뒷담 밑으로
영속된 죄의 그림자를 따랐다
아 영원히 반복되는
미끄럼판의 승강
친근에의 증오와 또한
불행과 비참과 굴욕에의 반항도 잊고
연기 흐르는 쪽으로 달려가면
오욕의 지난날이 나를 더욱 괴롭힐 뿐
멀리선 회색사면과
불안한 밤의 전쟁
인류의 상흔과 고뇌만이 늘고
아무도 인지하지 못할
망각의 이 지상에서
더욱 더욱 가라앉아 간다
처음 미끄럼판에서
내리달린 쾌감도
미지의 숲 속을
나의 청춘과 도주하던 시간도
나의 낙하하는
비극의 그늘에 있다
◈ 남풍
거북이처럼 괴로운 세월이
바다에서 올라온다
일찌기 외복을 빼앗긴 토민
태양 없는 말레이
너의 사랑이 백인의 고무원에서
쟈스민처럼 곱게 시들어졌다
민족의 운명이
쿠멜신의 영광과 함께 사는
앙코르 와트의 나라
월남인민군
멀리 이 땅에서도 들려오는
너희들의 항쟁의 총소리
가슴 부서질 듯 남풍은 온다
계절이 바뀌면 태풍은 온다
아시아 모든 위도
잠든 사람이여
귀를 기울여라
눈을 뜨면
남방의 향기가
가난한 가슴팍으로 스며든다
◈ 불행한 신
오늘 나는 모든 욕망과
사물에 작별하였습니다
그래서 더욱 친한 죽음과 가까워집니다
과거는 무수한 내일에
잠이 들었습니다
불행한 신
어디서나 나와 함께 사는
불행한 신
당신은 나와 단둘이서
얼굴을 비벼대고 비밀을 터놓고
오해나
인간의 체험이나
고절된 의식에
후회하지 않을 겁니다
또다시 우리는 결속되었습니다
황제의 신하처럼 우리는 죽음을 약속합니다
지금 저 광장의 전주처럼 우리는 존재됩니다
쉴 새 없이 내 귀에 울려오는 것은 불행한 신
당신이 부르시는
폭풍입니다
그러나 허망한 천지 사이를
내가 있고 엄연히 주검이 가로놓이고
불행한 당신이 있으므로
나는 최후의 안정을 즐깁니다
◈ 살아 있는 것이 있다면
살아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나와 우리들의 죽음보다도
더한 냉혹하고 절실한
회상과 체험일지도 모른다
살아 있는 것이 있다면
여러 차례의 살육에 복종한 생명보다도
더한 복수와 고독을 아는
고뇌와 저항일지도 모른다
한 걸음 한 걸음 나는 허물어지는
정적과 초연의 도시 그 암흑 속으로-
명상과 또다시 오지 않을 영원한 내일로-
살아 있는 것이 있다면
유형의 애인처럼 손잡기 위하여
이미 소멸된 청춘의 반역을 회상하면서
회의와 불안만이 다정스러운
모멸의 오늘을 살아나간다
아 최후로 이 성자의 세계에
살아 있는 것이 있다면 분명히
그것은 속죄의 회화 속의 나녀와
회상도 고뇌도 이제는 망령에게 팔은
철없는 시인
나의 눈감지 못한
단순한 상태의 시체일 것이다
◈ 어린 딸에게
기총과 포성의 요란함을 받아 가면서
너는 세상에 태어났다 주검의 세계로
그리하여 너는 잘 울지도 못하고
힘없이 자란다
엄마는 너를 껴안고 삼개월간에
일곱 번이나 이사를 했다
서울에 피와 비와
눈바람이 섞여 추위가 닥쳐오던 날
너는 입은 옷도 없이 벌거숭이로
화차 위 별을 헤아리면서 남으로 왔다
나의 어린 딸이여 고통스러워도 애소도 없이
그대로 젖만 먹고 웃으며 자라는 너는
무엇을 그리우느냐
너의 호수처럼 푸른 눈
지럼 멀리 적을 격멸하러 바늘처럼 가느다란
기계는 간다. 그러나 그림자는 없다
엄마는 전쟁이 끝나면 너를 호강시킨다 하나
언제 전쟁이 끝날 것이며
나의 어린 딸이여 너는 언제까지나
행복할 것인가
전쟁이 끝나면 너는 더욱 자라고
우리들이 서울에 남은 집에 돌아갈 적에
너는 네가 어데서 태어났는지도 모르는
그런 계집애
나의 어린 딸이여
너의 고향과 너의 나라가 어데 있느냐
그때까지 너에게 알려 줄 사람이
살아 있을 것인가
◈ 얼굴
우리 모두 잊혀진 얼굴들처럼
모르고 살아가는 남이 되기 싫은 까닭이다
길을 걷고 살면 무엇하나
꽃이 내가 아니듯
내가 꽃이 될 수 없는 지금
물빛 눈매을 닮은
한마리의 외로운 학으로 산들 무엇하나
사랑하기 이전부터
기다림을 배워버린 습성으로 인해
온 밤에 비가 내리고 이젠 내 얼굴에도
강물이 흐른다
가슴에 돌담 쌓고
손 흔들던 기억보다 간절한 것은
보고 싶다는 단 한마디
먼지 나는 골목을 돌아서다가
언뜻 만나서 스쳐간 바람처럼
쉽게 잊혀져버린 얼굴이 아닌 다음에야
신기루의 이야기도 아니고
하늘을 돌아 떨어진 별의 이야기도 아니고
우리 모두 잊혀진 얼굴들처럼
모르고 살아가는 남이 되기 싫은 까닭이다
◈ 열차
폭풍이 머문 장거장 거기가 출발점
정욕과 새로운 의욕 아래
열차는 움직인다
격동의 시간
꽃의 질서를 버리고
공규한 운명처럼
열차는 떠난다
검은 기억은 전원에 플로가고
속력은 서슴없이 죽음의 경사를 지난다
청운의 복받침을
나의 시야에 던진채
미래에의 외접선을 눈부시게 그으며
배경은 핑크빛 향기로은 대화
깨진 유리창 밖 황폐한 도시의 잡음을 차고
율동하는 풍경으로
활주하는 열차
가난한 사람들의 슬픈 관습과
봉건의 터널 특권의 장막을 뚫고
피비린 언덕 너머 곧
광선의 진로를 따른다
다음 헐벗은 수목의 집단 바람의 호흡을 안고
툰이 타오르는 처음의 녹지대
거기엔 우리들의 황홀한 영원의 거리가 있고
밤이면 열차가 지나온
커다란 고난과 노동의 불이 빛난다
혜성보다도
아름다운 새날보담도 밝게
◈ 태평양에서
갈매기와 하나의 물체
고독
연월도 없고 태양도 차갑다
나는 아무 욕망도 갖지 않겠다
더욱이 낭만과 정서는
저기 부서지는 거품 속에 있어라
죽어간 자의 표정처럼
무겁고 침울한 파도 그것이 노할 때
나는 살아 있는 자라고 외칠 수 없었다
그저 의지의 믿음만을 위하여
심유한 바다 위를 흘러가는 것이다
태평양에 안개가 끼고 비가 내릴 때
검은 날개에 검은 입술을 가진
갈매기들이 나의 가까운 시야에서 나를 조롱한다
환상
나는 남아 있는 것과
잃어버린 것과의 비례를 모른다
옛날 불안을 이야기했었을 때
이 바다에선 포함이 가라앉고
수십만의 인간이 죽었다
어둠침침한 조용한 바다에서 모든 것은 잠이 들었다
그렇다 나는 지금 무엇을 의식하고 있는가?
바람이 분다
마음대로 불어라. 나는 데키에 매달려
기념이라고 담배를 피운다
무한한 고독 저 연기는 어디로 가나
밤이여 무한한 하늘과 물과 그 사이에
나를 잠들게 해라
◈ 한 줄기 눈물도 없이
음산한 잡초가 무성한 들판에
용사가 누워 있었다
구름 속에 장미가 피고
비둘기는 야전병원 지붕 위에서 울었다
존엄한 죽음을 기다리는
용사가 대열을 지어
전선으로 나가는 뜨거운 구두 소리를 듣는다
아 창문을 닫으시오
고지탈환전
제트기 박격포 수류탄
어머니! 마지막 그가 부를 때
하늘에서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옛날은 화려한 그림책
한 장 한 장마다 그리운 이야기
만세소리도 없이 떠나
흰 붕대에 감겨
그는 남모르는 토지에서 죽는다
한 줄기 눈물도 없이
인간이라는 이름으로서
그는 피와 청춘을
자유를 바쳤다
음산한 잡초가 무성한 들판엔
지금 찾아오는 사람이 없다
◈ 행복
노인은 육지에서 살았다
하늘을 바라보며 담배를 피우고
시들은 풀잎에 앉아
손금도 보았다
차 한 잔을 마시고
정사한 여자의 이야기를
신문에서 읽을 때
비둘기는 지붕위에서 훨훨 날았다
노인은 한숨도 쉬지 않고
더욱 아무것도 바라지 않으며
성서를 외우고 불을 끈다
그는 행복이라는 것을 말하지 않았다
그저 고요히 잠드는 것이다
노인은 꿈을 꾼다
여러 친구와 술을 나누고
그들이 죽음의 길을 바라보던 전 날을
노인은 입술에 미소를 띄우고
쓰디쓴 감정을 억제할 수가 있다
그는 지금의 어떠한 순간도
증오할 수가 없었다
노인은 죽음을 원하기 전에
옛날이 더욱 영원한 것처럼 생각되며
자기와 가까이 있는 것이
멀어져 가는 것을 분간할 수가 있었다
◈ 언덕
연 날리던 언덕
너는 떠나고
지금 구름 아래
연을 따른다
한 바람 두 바람
실은 풀리고
연이 떨어지는 곳
너의 잠든 곳
꽃이 지니
비가 오며 바람이 일고
겨울이니
언덕에는 눈이 쌓여서
누구 하나 오지 않아
네 생각하며
연이 떨어진 곳
너를 찾는다
◈ 전원
1.
홀로 새우는 밤이었다
지난 시인의 걸어온 길을
나의 꿈길에서 부딪혀 본다
적막한 곳엔 살 수 없고
겨울이면 눈이 쌓일 것이
걱정이다
시간이 갈수록
바람은 모여들고
한 칸 방은 잘 자리도 없이
좁아진다
밖에는 옥수수
낙엽 소리에
나의 몸은
점점 무거워 진다
2.
풍토의 냄새를
산마루에서 지킨다
내 가슴보다도
더욱 쓰라린
늙은 농촌의 황혼
언제부터 시작되고
언제 그치는
나의 슬픔인가
지금 쳐다보기도 싫은
기울어져 가는
만하
전선 위에서
제비들은 바람처럼
나에게 작별한다
3.
찾아든 고독 속에서
가까이 들리는
바람소리를 사랑한다
창을 부수는 듯
별들이 보였다
7월의
저무는 전원
시인이 죽고
괴로운 세월은
어데론지 떠났다
비 내리면
떠난 친구의 목소리가
강물보다도
내 귀에
서늘하게 들리고
여름의 호흡이 쉴 새 없이
눈앞으로 지난다
4.
절름발이 내 어머니는
삭풍에 쓰러진
고목 옆에서 나를
불렀다
얼마 지나
부서진 추억을 안고
염소처럼 나는
울었다
마차가 넘어간
언덕에 앉아
지평에서 걸어오는
옛 사람들의
모습을 본다
생각이 타오르는
연기는 마음을 덮는다
◈ 벽(壁)
그것은 분명히 어제의 것이다.
나와는 관련이 없는 것이다.
우리들이 헤어질 때에
그것은 너무도 부정하였다.
하루종일 나는 그것과 만난다.
피하면 피할수록
더욱 접근하는 것
그것은 너무도 불길(不吉)을 상징하고 있다.
옛날 그 위에 명화(名畵)가 그려졌다 하여
즐거워하던 예술가들은
모조리 죽었다.
지금 거기엔 파리와
아무도 읽지 않고
아무도 바라보지 않는
격문(檄文)과 정치포스터가 붙어 있을 뿐
나와는 아무 인연이 없다.
그것은 감성(感性)도 이성(理性)도 잃은
멸망(滅亡)의 그림자
그것은 문명과 진화(進化)를 장해(障害)하는
사탄의 사도
나는 그것이 보기 싫다
그것이 밤낮으로
나를 가로막기 때문에
나는 한 점의 피도 없이
말라 버리고
여왕이 부르시는 노래와
나의 이름도 듣지 못한다.
◈ 어느 날의 시가 되지 않는 시
당신은 일본인이지요?
차이니스? 하고 물을 때
나는 불쾌하게 웃었다.
거품이 많은 술을 마시면서
나도 물었다
당신은 아메리카 시민입니까?
나는 거짓말 같은 낡아빠진 역사와
우리 민족과 말이 단일하다는 것을
자랑스럽게 말했다.
황혼.
타아반 구석에서 흑인은 구두를 닦고
거리의 소년이 즐겁게 담배를 피우고 있다.
여우(女優) 가르보의 전기책(傳記冊)이 놓여 있고
그 옆에는 디텍티브 스토리가 쌓여 있는
서점의 쇼윈도
손님이 많은 가게 안을 나는 들어가지 않았다.
비가 내린다
내 모자 위에 중량이 없는 억압이 있다.
그래서 뒷길을 걸으며
서울로 빨리 가고 싶다고
센티멘털한 소리를 한다.
◈ 식물
태양은 모든 식물에게 인사한다.
식물은 24시간 행복하였다.
식물 위에 여자가 앉았고
여자는 반역한 환영(幻影)을 생각했다.
향기로운 식물의 바람이 도시에 분다.
모두들 창을 열고 태양에게 인사한다.
식물은 24시간 잠들지 못했다.
◈ 부드러운 목소리로 이야기할 때
나는 언제나 샘물처럼 흐르는
그러한 인생의 복판에 서서
전쟁이나 금전이나 나를 괴롭히는 물상(物象)과
부드러운 목소리로 이야기할 때
한줄기 소낙비는 나의 얼굴을 적신다.
진정코 내가 바라던 하늘과 그 계절은
푸르고 맑은 내 가슴을 눈물로 스치고
한때 청춘과 바꾼 반항도
이젠 서적처럼 불타버렸다.
가고 오는 그러한 제상(諸相)과 평범 속에서
술과 어지러움을 한(恨)하는 나는
어느 해 여름처럼 공포에 시달려
지금은 하염없이 죽는다.
사라진 일체의 나의 애욕아
지금 형태도 없이 정신을 잃고
이 쓸쓸한 들판
아니 이즈러진 길목 처마 끝에서
부드러운 목소리로 이야기한들
우리들 또다시 살아 나갈 것인가.
정막처럼 잔잔한
그러한 인생의 복판에 서서
여러 남녀와 군인과 또는 학생과
이처럼 쇠퇴한 철없는 시인이
불안이다 또는 황폐롭다
부드러운 목소리로 이야기한들
광막한 나와 그대들의 기나긴 종말의 노정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노라.
오 난해한 세계
복잡한 생활 속에서
이처럼 알기 쉬운 몇 줄의 시와
말라 버린 나의 쓰디쓴 기억을 위하여
전쟁이나 사나운 애정을 잊고
넓고도 간혹 좁은 인간의 단상에 서서
내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이야기할 때
우리는 서로 만난 것을 탓할 것인가
우리는 서로 헤어질 것을 원할 것인가.
◈ 센티멘탈 쟈니
주말 여행
엽서 – 낙엽
낡은 유행가의 설움에 맞추어
피폐한 소설을 읽던 소녀
이태백의 달은
울고 떠나고
너는 벽화에 기대어
담배를 피우는 숙녀
카프리 섬의 원정
파이프의 향기를 날려 보내라
이브는 내 마음에 살고
나는 그림자를 잡는다
세월은 관념
독서는 위장
그저 죽기 싫은 예술가
오늘도 가고 또 하루가 온들
도시에 분수는 시들고
어제와 지금의 사람은
천상유사를 모른다
술을 마시면 즐겁고
비가 내리면 서럽고
분별이여 구분이여
수목은 외롭다
혼자 길을 가는 여자와 같이
정다운 것은 죽고
다리 아래 강은 흐른다
지금 수목에서 떨어지는 엽서
긴 사연은 구름에 걸린 달 속에 묻히고
우리들은 여행을 떠난다
주말여행
별말씀
그저 옛날로 가는 것이다
아, 센티멘탈 쟈니
센티멘탈 쟈니
◈ 죽은 아포롱
- 이상 그가 떠난 날에
오늘은 3월 열 이렛날
그래서 나는 망각의 술을 마셔야 한다
여급 마유미가 없어도
오후 세시 이십오분에는
벗들과 제비의 이야기를 하여야 한다
그날 당신은
동경 제국대학 부속병원에서
천당과 지옥의 접경으로 여행을 하고
허망한 서울의 하늘에는 비가 내렸다
운명이여 얼마나 애태운 일이냐
권태와 인간의 날개
당신은 싸늘한 지하에 있으면서도
성좌를 간직하고 있다
정신의 수렵을 위해 죽은
랭보와도 같이
당신은 나에게
환상과 흥분과
열병과 흥분과
열병과 착각을 알려주고
그 빈사의 구렁텅이에서
우리 문학에
따뜻한 손을 빌려준
정신의 황제
무한한 수면
반역과 영광
임종의 눈물을 흘리며 결코
당신은 하나의 증명을 갖고 있었다
이상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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