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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詩 같은 삶을 위하여
☞ 문학의 뜨락

권갑하 시조 모음

by 石右 尹明相 2022. 6. 29.

 

 

권갑하 시인(1958~) 언론인, 경북 문경시.

한양대학교 대학원

1992'조선일보', '경향신문' 신춘문예 시조 당선

2012.~2015. 농민신문사 논설실장

2021. 김상옥백자예술상 본상

시집 세한의 저녁4. 중앙시조대상, 한국시조작품상 등

 

 

권갑하 시조 모음

 

 

목련

 

내 안에 막대기로 버티어놓은 허공

누가 떠나가는지 바르르 떨리는 손

눈물도 다 마른 저녁 몰래 건네는 흰 손수건

 

 

 

동백꽃 틈

 

어느 정변의 뜰 안, 바람 소스라치는

검붉게 타오르던 쿵쿵 산 무너지던

눈물도

미처 거두지 못한

소리 없는 저 절규!

 

 

 

가을 그림자

 

앞서거니 뒤서거니 뒤꿈치 문 숨바꼭질

울음마저 가슴에 묻은 꿈속까지 따라와

안과 밖 드리운 허물 한 빛깔로 지운다

 

바람 불지 않아도 흔들리는 날이 잦은

독백처럼 우두커니 석양 비켜 홀로 서면

아득히 열린 에움길 뭄을 위어 알려주네

 

상처도 매만지면 단풍보다 고운 모양

한날 얼룩이라도 상감되는 눈물인 것을

키질한 하늘 한 장이 그림자를 끌고 온다

 

 

 

바다 이미지6 밤바다

 

팽팽한

빗장을 풀고

하늘 다 허문 수평선

 

온종일

맨살을 빚어

하얀 연서 날려 보내더니

 

갈매기

목쉰 울음 같은

이 어둠을 풀어놓다.

 

하나 둘

별 헤는 일

그 참맛을 알 때쯤이면

 

사는 일

다 간절한 투정

바람결 눈발 같은 것.

 

새도록

베갯머리에

철썩이는 하얀 달빛

 

 

 

담쟁이

 

삶은 가파른 벽을 온몸으로 오르는 것

무성한 잎을 드리워 속내는 숨기는 것

비워도 돋는 슬픔은 벽화로 그려낼 뿐

 

 

 

겨울나기1

 

때론 미친 바람도

적을 물고 날아간다.

무참히 짓밟혔던 그 날

그 발자국 따라 말없이

흐르는 저 강물 위로

검은 양심의 폐유를 끝없이 흘러 보내고

의식마저 콜레스테롤 가득 찬

그 알량한 지식에 저당 잡힌 채,

잊은 듯,

감감히 잊은 듯,

또 하루를 보내느니.

 

 

 

구층암 모과나무

 

-시상에 뭐 볼끼 있다고 이리 가는교?

-아주 기맥힌 것이 시상에 있어라우!

동서東西간 붉은 화답에 산도 활활 타오른다

 

-기둥 좀 보아, 저 생불 좀 보랑께요!

-몸보시가 따로 있는 게 아니구마이!

한 생애 굴곡진 옹이 맑고 고운 흰 가슴

 

-득도한 고승대덕의 뼈마디가 저럴까요!

-삶과 죽음이 따로 있지 않다 안 한다요!

내 마음 천불 뜨락 가득 모과향이 짠하다

 

 

 

겨울 안부

 

진저리치던 울음은 꼬투리째 떨어졌다

한낮의 막막한 현기, 뒤채던 애잔함도

먼 고요 줄을 고르듯 소슬한 현을 퉁긴다

 

노을처럼 그댄 타오르고 싶다지만

난 매정스레 업신여김을 받고 싶다

불감의 손마디 마디 살얼음만 되감기는

 

떨어지며 피는 꽃이 어디 눈물뿐이랴

다 지운 생이라도 삭은 대궁은 남아

희디 흰 기다림으로 네 안부를 묻는다

 

 

 

하도리 해녀군상

 

등 뒤로 바르팟 흰 살결 아롱아롱 피워 올리는

북제주군 하도리 해안도로변 해녀들은

함부로 그 날 얘기를 풀어놓지 않는다.

 

뿔 돋은 소라껍질 밀물 썰물 모래가 되고

젖 부른 엄마는 자꾸 아이 젖을 물리지만

현무암 검은 가슴엔 하얀 포말이 섬뜩하다.

 

이여싸나 이여싸나

혼백상자 등에 지곡

가슴 아피 두렁박 차곡

한질 두질 들어가난

저승길이 왓닥갓닥

이여싸나 이여싸나

 

머리엔 흰 수건, 두 손엔 빗창과 호미

-이 호-이 숨비질소리 수평선 띄워 놓고

일 천여 분노의 노래 주재소로 몰려갔다.

 

그날 밤 덩치 큰 해일이 섬을 다 삼켰다.

불턱에 갈무려 둔 불씨마져 다 지우고

바다는 고요가 잠든 밤 속으로만 흐느꼈다.

 

 

 

그대 맨발로 오라문경새재 1

 

오랜 안부를 묻듯 목련은 피어나고

누군가 저만치 기다리고 있을 것 같은

산보다 마음이 앞서 문을 먼저 여는 길

 

물박달 잎새에 이는 향긋한 푸른 전설

길은 멀어도 우리 사랑 끝이 없으니

세상 일 다 벗어놓고 그대 맨발로 오라

 

먼 그대에게로 흘러가는 계곡물 따라

새소린 청아한 곡조로 하늘 다시 펼치고

비질한 황톳빛 가슴 달빛 쏟아지리니

 

 

 

독도는 한반도다

 

너는 獨島가 아니다 외론 절도絶島가 아니다

동해의 붉은 해가 가장 먼저 너를 깨우고

공연히 푸른 파도가 밤낮없이 호위하겠느냐

 

꿈속에서도 너의 심장은 뜨겁게 고동치고

날이 밝으면 장엄한 백두의 위용 그대로다

오천 년 역사를 일궈온 강골의 내 피붙이다

 

이젠 널 외론 섬 독도라 부르지 않겠다

보라 네 가슴에 선명한 한반도의 형상을

오대양 육대주를 향해 뻗어나간 저 기상을

 

그렇다 너는 한반도다 붉은 피가 들끓는

배달겨레의 자존, 깨어있는 혼이다

이 땅의 자유와 평화 지켜나갈 불사조다

 

 

 

인사동에서

 

()

슬픔의 서랍에

손때를 묻히는 일

 

해지고

벗겨지고

금이 가고 깨지고

 

얼룩도

향기도 없는

한 생이 찻잔 속에 어린다.

 

 

 

외등의 시간

 

울렁이는 욕망들이 굽은 등마다 흘러나오는

지워진 먼 길 끝에선 이우성도 몰려온다.

허물을 덮어주려면 몰래 별도 띄워야겠지.

 

은밀한 갈증들은 발만 동동 구르고

헤진 상처 감추려 지친 바람 분주하지만

실직의 허기진 강은 눈물에도 젖지 않는다.

 

안간힘으로 굴린 공은 어디로 굴러갔나.

홀로 깬 기다림은 파도소리로 훌쩍이는데

쓸쓸한 작별의 행방은 시치미를 떼고 있다.

 

제 가슴 속 불을 밝혀 외따로 돌아가는

어둠을 건너는 외등의 경건한 고독이여

아득한 혼잣말처럼 문득 빗방울이 환하다.

 

 

 

()을 띄우다-발해를 찾아서

 

연을 날린다 광활한 발해의 하늘 위로

장백의 안개 헤치고 압록 두만도 훌쩍 넘어

적층된 연대 속으로

연을 띄워 올린다

 

여기가 어디인가 굽어보고 돌아보며

주름진 오욕의 역사 해진 상흔도 다독이며

가끔은 천둥 번개 불러

곤한 잠도 깨워가며

 

너무 높게는 말고 낮게는 더욱 말고

연바람 멈추면 노래도 멎고 말 것이니

당겨라, 얼레를 팽팽히

풀었다 다시 당겨라

 

오래 떠나 있어 낯설고 물설겠지만

내 어버이 온몸으로 일군 모토(母土) 아니던가

다물(多勿) , 돛을 올리듯

꼬리 긴 연을 띄운다

 

 

 

저 바다가 아니다

 

망연히 바라보는 것은 저 바다가 아니다

더는 쪼갤 수 없는 아픔 또 찢어지지만

손 한번 뻗어주지 못하고 발만 동동 굴렀던

 

저 울음 저 절규 저 우왕좌왕 앞에

시간은 여지없이 어둠 속으로 빨려들고

침몰된 시퍼런 가슴엔 장대비만 쏟아졌다

 

미안해, 정말 사랑해

숨막혀오는 그 순간에도

진달래꽃보다 더 붉고 더 고운 눈망울들

사랑해그 한마디마저도

전하지 못한 죄인들

 

아무렇지 않은 듯 또 사월이 오겠지

다투어 호들갑떨며 또 서로를 탓하겠지

목 놓아 분노해야 할 것은

저 바다가 아니다

 

 

 

겨울강가에서

 

사공이 되어 다시 이 세월의 사공이 되어

나룻배 한 잎에다 근심 하나 동여매고

무색의 이 일상 앞에 거울처럼 비춰 선 달().

 

 

 

춤추는 처용

 

일몰 앞에 서면 동해도 높다란 벽

그 물굽이 끝 별떨기로 불려나던 내 눈빛은

광화문

지하도 속으로

노도 없이 흔들린다.

 

아침마다 은행나무 잎에 끝없이 부침하다

내가 닿을 나라는 수평선으로 돌아앉고

또 다른

어둠 속으로

닻을 감는 내 가슴.

 

날마다 눈보라 끝 날아오를 흰구름처럼

수십 마리 나비떼 네온 불로 키운 밤이면

용궁도

수십 지하 계단으로

막아서는 파도소리.

 

 

 

누이 감자

 

1.

잘린 한쪽 젖가슴에 독한 재를 바르고

눈매 곱던 누이는 흙을 덮고 누웠다.

비릿한 눈물의 향기

향수처럼 풀어놓고

 

2.

잘린 그루터기에서 솟아나는 새순처럼

쪼그라든 시간에도 형형한 눈빛은 살아

끈적한 생의 에움길

꽃을 피워 올렸다

 

3.

허기진 사연들은 차마 말로 못하는데

서늘한 눈매를 닮은 오랜 내력의 길이

철없이 어린 꿈들은

촉을 자꾸 내밀었다

 

 

 

 

한 톨의 씨알로 영근 눈물 같은 목숨임을

배 곪아본 사람은 안다 이라는 것을

혼이요 생명인 것을 빼앗겨 본 민족은 안다.

 

 

 

보리

 

처절히 짓밟힐수록 퍼렇게 일어서는

농익어도 꼿꼿한 까끄라기 자존으로

막막한 식민의 고갯길 땅을 짚고 넘었지.

 

 

 

 

좁쌀로 뒤웅박 파는 그런 삶이라지만

길들면 강아지풀도 노랗게 여물어서

가물던 어머니 젖에 사무치던 이유식

 

 

 

 

목숨의 뿌리 같은 든든한 종부 같은

흑간장 하얀 두부 누런 된장 청국장

변하지 말아야 할 것은 입맛만이 아니다.

 

 

 

기장

 

밥 인심이 좋아야지 하늘같은 밥 아니던가

계절 따라 체질 따라 어우러진 아홉 나물

찰기장 한 줌 더하면 약보다 귀한 오곡밥

 

 

 

연화문 수막새

 

기억이란 얼마나 시퍼런 허공 속인가

말발굽에 부서지고 시간에 지워져도

머금은 청동빛 역사 장막을 걷어낸다

 

하트형 연잎 두른 둥글게 싼 자방(子房)처럼

고구려에 통일신라, 당 문화도 새겨 넣은

까마득 천삼백 년이 깨어날 듯 탱탱하다

 

 

 

은하수 햅별 밥상

 

흉년의 꽃밭서널 서러움도 다 헹군 듯

울컥 눈물을 삼켜 허기 넘던 굽이굽이

천수답 한평생에도 달빛 신념 넘쳤었지

 

()은 뭇별()들의 장엄한 향연()임을

바람에 이는 시름 목이 메는 추임새로

한 됫박 허연 쌀뜨물 은하수로 펼쳤으니

 

듣는가 어디쯤 가슴 치는 뜨거운 선율

앞앞이 어둠이래도 옹기종기 나누던 정

꿈꾸듯 그리 살았제, 간절한 눈망울들

 

 

 

세한의 저녁

 

공원 벤치에 앉아 늦은 저녁을 끓이다

더 내릴 데 없다는 듯 찻잔 위로 내리는 눈

맨발의 비둘기 한 마리 쓰레기통을 파고든다.

 

돌아갈 곳을 잊은 사람은 아무도 없는지

눈꽃 피었다 지는 부치지 않은 편지 위로

등 굽은 소나무 말없이 젖은 손을 뻗고 있다.

 

간절히 기댈 어깨 한 번 되어주지 못한

빈 역사(驛舍) 서성이는 파리한 눈송이들

추스른 가슴 한쪽이 자꾸 무너지고 있다.

 

 

 

 

사람아, 우리 사랑에 눈멀었을 때도

눈멀어 거친 들판 정처 없이 헤매일 때도

한자리 웅크리고 앉아 밤을 새던 사람아

 

아득한 물결 위로 또 천년이 흘러가고

흘러 그대에게 영영 가 닿지 못할지라도

신새벽 맑은 눈빛으로 반짝이던 사람아

 

시나브로 그 고운 눈빛 사위어 갈지라도

보이지 않는 눈부심으로 타오르고 싶네

빛나는 그대 이름으로 이 어두움을 건너고 싶네

 

 

 

우포 여자

 

설렘도 미련도 없이 질펀하게 드러누운

그렇게 오지랖 넓은 여잔 본적이 없다

비취빛 그리움마저 개구리밥에 묻어버린

 

본 적이 없다 그토록 숲이 우거진 여자

일억 오천만년 단 하루도 마르지 않은

마음도 어쩌지 못할 원시의 촉촉함이여

 

생살 찢고 솟아오르는 가시연 붉은 꽃대

나이마저 잊어버린 침잠의 세월이래도

말조개 뽀글거리고 장구애비 헐떡인다

 

누가 알리 저 늪 속 같은 여자의 마음

물옥잠 생이가래 물풀 마름 드렁허리

제 안을 정화시켜온 눈물 보기나 했으리

 

칠십만 평 우포 여자는 오늘도 순산이다

쇠물닭 홰 친 자리 물병아리 쏟아지고

안개빛 자궁 속으로 삿대 젓는 목선 한 척

 

 

 

손금을 따라가다

 

잎 떨군 가지들이 빈 그늘에 사무친다.

수렁인 줄 알면서도 온몸으로 몰고 갔던

바람은 음각된 길 하나 몰래 들춰본다.

 

이쯤서 감전되어 몽유병환자처럼 헤맸으리라

지우지 못할 흉터, 뚝뚝 지는 슬픔들도

빈주먹 움켜쥘 때마다 깊게 패었으리라

 

한 때 나를 흔들어 깨운 아편 같은 노래를

그 눈물을 빌어 꽃을 달아주면 안되나

시간은 고집스럽게 발을 또 헛디딘다.

 

 

 

아름다운 공존

 

다양성을 인정하며 지배하지 않는다.

각기 다른 색깔이지만 아름다운 무지개

눈높이 상대에 맞추면 내가 더욱 빛난다.

 

 

 

부항꽃

 

가슴에 꽃 한 송이 달아주지 못했는데

산비탈처럼 기운 아내의 야윈 등에

그 무슨 훈장 새기듯 둥근 꽃 피우네

 

속 썩혀 고인 것들 울컥, 울혈로 솟고

밤새 끙끙대던 통증 멍으로 올라와

피보다 검붉은 문양 눈물꽃을 피우네

 

 

 

뒤축

 

빛나는 모든 일들 앞축에 넘겨주고

중심을 잡느라 조금씩 기운 각도

제 몸을 허물어트려 나를 바로 세웠구나.

 

눈물이면 어떻고 기쁨인들 뭣하랴

안 뵈는 뒷자리에 그저 그냥 묵묵히

마음이 실린 쪽으로 조금씩 닳아질 뿐

 

앞이 너무 환해 보이지 않던 것들

욕심에 개개어서 상처를 냈던 날들

환한 듯 아픈 저녁이 뒤뚱대며 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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