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외수(李外秀, 1946년~2022년) 시인. 소설가
경상남도 함양 출생, 강원도 인제에서 성장.
춘천교육대학교 중퇴, 강원일보 신춘문예 단편소설 《견습어린이들》로 등단
1975년 《세대》의 문예현상공모에서 중편소설 《훈장》으로 신인문학상 수상
시집 《풀꽃 술잔 나비》 《그리움도 화석이 된다》 외.
이외수(李外秀) 시 모음
◈ 다들 그렇게 살아가고 있어
울지 말게
다들 그렇게 살아가고 있어
날마다 어둠 아래 누워 뒤척이다
아침이 오면,
개똥같은 희망 하나 가슴에 품고
다시 문을 나서지
바람이 차다고
고단한 잠에서 아직 깨어나지 않았다고
집으로 되돌아오는 사람이 있을까
산다는 건 만만치 않은 거라네
아차 하는 사이에 몸도 마음도
망가지기 십상이지
화투판 끗발처럼 어쩌다 좋은 날도
있긴 하겠지만
그거야 그때뿐이지
어느 날 큰 비가 올지
그 비에 뭐가 무너지고
뭐가 떠내려갈지 누가 알겠나
그래도 세상은 꿈꾸는 이들의 것이지
개똥같은 희망이라도
하나 품고 사는 건 행복한 거야
아무 것도 기다리지 않고
사는 삶은 얼마나 불쌍한가
자, 한잔 들게나
되는 게 없다고 이놈의 세상
되는 게 하나도 없다고
술에 코 박고 우는 친구야
◈ 가끔씩 그대 마음 흔들릴 때는
가끔씩 그대 마음 흔들릴 때는
한 그루 나무를 보라
바람 부는 날에는
바람 부는 쪽으로 흔들리나니
꽃 피는 날이 있다면
어찌 꽃 지는 날이 없으랴
온 세상을 뒤집는 바람에도
흔들리지 않는 뿌리
깊은 밤에도
소망은 하늘로 가지를 뻗어
달빛을 건지리라
더러는 인생에도 겨울이 찾아와
일기장 갈피마다
눈이 내리고
참담한 사랑마저 소식이 두절되더라
가끔씩 그대 마음 흔들릴 때는
침묵으로
침묵으로 깊은 강을 건너가는
한 그루 나무를 보라.
◈ 봄날은 간다
부끄러워라
내가 쓰는 글들은
아직 썩어 가는 세상의
방부제가 되지 못하고
내가 흘린 눈물은
아직 고통 받는 이들의
진통제가 되지 못하네
돌아보면 오십 평생
파지만 가득하고
아뿔싸,
또 한 해
어느 새 유채꽃 한 바지게 짊어지고
저기 언덕 너머로 사라지는 봄날이여
◈ 저무는 바다를 머리맡에 두고
살아간다는 것은
저물어 간다는 것이다
슬프게도
사랑은
자주 흔들린다
어떤 인연은 노래가 되고
어떤 인연은 상처가 된다
하루에 한번씩 바다는
저물고
노래도 상처도
무채색으로 흐리게 지워진다
나는 시린 무릎 감싸안으며
나지막히
그대 이름을 부른다
살아간다는 것은
오늘도
내가 혼자임을 아는 것이다
◈ 꽃
안개가 우는 소리를
들었다고
그가 말했다.
수은등 밑에 서성이는
안개는
더욱 슬프다고
미농지처럼 구겨져
울고 있었다.
젖은 기적 소리가
멀리서 왔다.
◈ 더 깊은 눈물 속으로
흐린 날 바다에 나가 보면
비로소 내 가슴에 박혀 있는
모난 돌들이 보인다.
결국 슬프고
외로운 사람이
나뿐 만은 아니라고
흩날리는 물보라에 날개 적시며
갈매기 한 마리
지워진다.
흐린 날 바다에 나가 보면
파도는 목 놓아 울부짖는데
시간이 거대한 시체로
백사장에 누워 있다.
부끄럽다
나는 왜 하찮은 일에도
쓰라린 상처를 입고
막다른 골목에서
쓰러져 울고 있었던가.
그만 잊어야겠다.
지나간 날들은 비록 억울하고
비참했지만
이제 뒤돌아보지 말아야겠다.
누가 뭐라고 해도
저 거대한 바다에는 분명
내가 흘린 눈물도 몇 방울
그때의 순순한 아픔 그대로
간직되어 있나니.
이런 날은 견딜 수 없는 몸살로
출렁거리나니.
그만 잊어야겠다.
흐린 날 바다에 나가 보면
우리들의 인연은 아직 다 하지 않았는데
죽은 시간이 해체되고 있다.
더 깊은 눈물 속으로
더 깊은 눈물 속으로
그대의 모습도 해체되고 있다.
◈ 봄밤의 회상
밤새도록 산문시 같은 빗소리를
한 페이지씩 넘기다가 새벽녘에
문득 봄이 떠나가고 있음을 깨달았네
내 생애 언제 한번
꿀벌들 날갯짓소리 어지러운 햇빛 아래서
함박웃음 가득 베어 물고
기념사진 한 장이라도 찍어 본 적이 있었던가
돌이켜 보면 내 인생의 풍경들은 언제나 흐림
젊은 날 만개한 벚꽃같이 눈부시던 사랑도 끝내는
종식되고 말았네
모든 기다림 끝에 푸르른 산들이 허물어지고
온 세상을 절망으로 범람하는 황사바람
그래도 나는 언제나 펄럭거리고 있었네
이제는 이마 위로 탄식처럼 깊어지는 주름살
한 사발 막걸리에도 휘청거리는 내리막
어허,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가 없네
별로 기대할 추억조차 없는 나날 속에서
올해도 속절없이 봄은 떠나가는데
무슨 이유로 아직도 나는
밤새도록 혼자 펄럭거리고 있는지를
◈ 그리움도 화석이 된다
저녁비가 내리면
시간의 지층이
허물어진다
허물어지는 시간의 지층을
한 겹씩 파내려 가면
먼 중생대 어디쯤
화석으로 남아 있는
내 전생을 만날 수 있을까
그 때도 나는
한 줌의 고사리풀
바람이 불지 않아도
저무는 바다 쪽으로 흔들리면서
눈물보다 투명한 서정시를
꿈꾸고 있었을까
저녁비가 내리면
시간의 지층이
허물어진다
허물어지는 시간의 지층
멀리 있어 그리운 이름일수록
더욱 선명한 화석이 된다
◈ 외로운 세상
힘들고 눈물겨운 세상
나는 오늘도 방황 하나로 저물녘에 닿았다
거짓말처럼 나는 혼자였다
만날 사람이 없었다
보고 싶은 사람도 없었다
그냥 막연하게 사람만 그리워졌다
사람들 속에서 걷고 이야기하고
작별하면서 살고 싶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결코 섞여지지 않았다
그것을 잘 알면서도 나는 왜 자꾸만
사람이 그립다는 생각을 하는 것일까
사랑 그 쓸쓸함에 대하여
다시 또 누군가를 만나서 사랑을 하게 될 수 있을까
그럴 수는 없을 것 같아
도무지 알 수 없는 한 가지 사람을 사랑하게 되는 일
참 쓸쓸한 일인 것 같아
사랑이 끝나고 난 뒤에는 이 세상도 끝나고
날 위해 빛나던 모든 것도 그 빛을 잃어버려
누구나 사는 동안에 한번
잊지 못할 사람을 만나고 잊지 못할 이별도 하지
도무지 알 수 없는 한 가지 사람을 사랑한다는 그일
참 쓸쓸한 일인 것 같아
결국
내가 더 사랑한다고 느낄 때
외로움을 느낀다
◈ 걸인의 노래
삶은 계란
반으로 잘랐더니
그 속에
보름달이
두 개나 숨어 있었네
세상이 이토록 눈부신 뜻
내장만 비우고도 알 수 있는 일
◈ 노을
허공에 새 한 마리
그려 넣으면
남은 여백 모두가 하늘이어라
너무 쓸쓸하여
점하나를 찍노니
세상사는 이치가
한 점안에 있구나.
◈ 놀
이 세상에 저물지 않는 것이 어디 있으랴
누군가가 그림자 지는 풍경 속에
배 한 척을 띄우고
복받치는 울음을 삼키며
뼈 가루를 뿌리고 있다
살아 있는 날들은
무엇을 증오하고 무엇을 사랑하랴
나도 언젠가는 서산머리 불타는 놀 속에
영혼을 눕히리니
가슴에 못다한 말들이 남아 있어
더러는 저녁 강에 잘디잔 물비늘로
되살아나서
안타까이 그대 이름 불러도
알지 못하리
걸음마다 이별이 기다리고
이별 끝에 저 하늘도 놀이 지나니
이 세상에 저물지 않는 것이 어디 있으랴
◈ 한세상 산다는 것
한세상 산다는 것도
물에 비친 뜬구름 같도다
가슴이 있는 자
부디 그 가슴에
빗장을 채우지 말라
살아있을 때는 모름지기
연약한 풀꽃 하나라도
못 견디게 사랑하고 볼 일이다
◈ 강이 흐르리
이승은 언제나 쓰라린 겨울이어라
바람에 베이는 살갗
홀로 걷는 꿈이어라
다가오는 겨울에는 아름답다
그대 기다린 뜻도
우리가 전생으로 돌아가는 마음 하나로
아무도 없는 한적한 길
눈을 맞으며 걸으리니
사랑한다는 말 한 마디마다
겨울이 끝나는 봄녘 햇빛이 되고
오스스 떨며 나서는 거미의 여린 실낱
맺힌 이슬이 되고
그 이슬에 비치는 민들레가 되리라
살아있어 소생하는 모든 것에도
죽어서 멎어 있는 모든 것에도
우리가 불어 넣은 말 한 마디
아
사랑한다고
비로소 얼음이 풀리면서
건너가는 나룻배
저승에서 이승으로 강이 흐르리
◈ 일몰
어릴 때부터
누군가를 막연하게 기다렸어요
서산머리
지는 해
바라보면
까닭 없이
가슴만 미어졌어요
돌아보면 인생은 겨우
한나절
아침에 복사꽃
눈부시던 사랑도
저녁에 놀빛으로
저물어 간다고
어릴 때부터
예감이 먼저 와서
가르쳐 주었어요.
◈ 만추
영혼이 없는 육체를 보았습니까.
그는 영혼을 호주머니 속에 넣어둡니다.
마른 풀씨처럼
불을 붙이면
연기도 없이 지워질 몸은,
차곡차곡 접어서
서랍 속 흰 빨래 옆에 가지런히 놓아둡니다.
가끔은 주머니를 털고
술잔 속에
담배연기 속에
우리들 손등 위에 가만히
그의 영혼을 옮겨 놓습니다.
그리고는 말없이 서랍 속으로 들어가
이 세상과 분리됩니다.
우리가 그를 만나는 것은 무엇일까요.
◈ 가을빛
밥이 보다 요긴했던 시대
밥 때문에 상처받던 시대
사랑도 밥 앞에서는
맥 못 쓰던
그런 날에도.
흰 쌀밥으로만 보이던
원고지 빈 칸
뜯어먹으며 쓴 말
- 밤마다 푸른 잉크로
살아온 날만큼
사랑이라 적으면
눈시울 젖은 채로 죽고 싶어라
◈ 기다림
어느 날은 속삭이듯
배꽃나무 그늘로
스미고 싶다던 그대여.
스며 그에게로
가닿을 수 있다면.
터진 꽃망울의 속살로
피어날 수 있다면.
한 꽃나무에서 다른 꽃나무로
흐를 수만 있다면
고양이
벽에 검둥산 하나
그려 넣고
밤마다 入山하는 그대를
적멸이라 부르랴.
◈ 봄눈
많은 사람들이 세상을 뜨고요
영혼들만
새벽 안개등으로 빛나는 날
샘밭에 가면
강물처럼 흐르는 축축한
혼들의 행렬이 보이지요
안개는 슬픈 사람들의 넋이야
배추밭 뚝에서 젖은 채
흐느끼는 그대를
만나는 날이 많았습니다.
◈ 여름
샘밭에 가면
남루한 옷차림의
노을이,
남루한 사랑이
펼쳐진다. 공복인 그대가
어루만지던 원고지의
빈 칸처럼.
그리움도 사랑도 시든 지
오래.
옛사랑은 노래가 되지 않는다.
◈ 노을
허공에 새 한 마리
그려 넣으면
남은 여백 모두가 하늘이어라
너무 쓸쓸하여
점 하나를 찍노니
세상사는 이치가
한 점 안에 있구나.
◈ 섬
삽작 어귀도 쓸고
댓돌도 쓸고
방 안도 거울처럼
쓸고 닦았다.
벽 속의 달마가 말하기를
웬 쓰레기가
이리 큰 것이 앉았는고.
◈ 수변
벽 속에도
벽 밖에도
담장에도 굴뚝에도
달마만 보였다.
구들장에도 서까래에도
하늘에도 땅에도
그리운 별은 또 어떻고.
버려도 버려도
달마는
비처럼 내렸다.
話頭를 놓았다.
달마도 벽도
간 곳이 없다.
◈ 조각잠1
겨울 강바람이
산발치로
산길 몇 개를 틀어 올리면.
사람이 그리워
내려오는
산길로 들자.
무엇을 더 끊어야 하리.
세상 밖에 나와서
세상을 보는
저 깊은
적멸.
◈ 조각잠2
은유의 마을로
가고 싶다.
그곳에선 내가
소나무고, 민들레고
바람이다.
그대는 별.
사무치는 그리움 되어
너에게로 간다.
◈ 조각잠3
오늘은 먹을 갈다가
맑은 달 하나
건졌습니다.
젖어 창호지에
걸었더니
지나가는 새가
발목을 적시고
갑니다.
◈ 더 깊은 눈물 속으로
흐린 날 바다에 나가 보면
비로소 내 가슴에 박혀 있는
모난 돌들이 보인다
결국 슬프고
외로운 사람이
나뿐만이 아니라고
흩날리는 물보라에 날개 적시며
갈매기 한 마리
지워진다
흐린 날 바다에 나가 보면
파도는 목 놓아 울부짖는데
시간이 거대한 시체로
백사장에 누워 있다
부끄럽다
나는 왜 하찮은 일에도
쓰라린 상처를 입고
막다른 골목에서
쓰러져 울고 있었던가
그만 잊어야겠다
지나간 날들은 비록 억울하고
비참했지만
이제 뒤돌아보지 말아야겠다
누가 뭐라고 해도
저 거대한 바다에는 분명
내가 흘린 눈물도 몇 방울
그때의 순순한 아픔 그대로
간직되어 있나니
이런 날은 견딜 수 없는 몸살로
출렁거리나니
그만 잊어야겠다
흐린 날 바다에 나가 보면
우리들의 인연은 아직 다 하지 않았는데
죽은 시간이 해체되고 있다
더 깊은 눈물 속으로
더 깊은 눈물 속으로
그대의 모습도 해체되고 있다
◈ 송년가
우리 사는 세상 날이 저물어
청산 그림자 섬돌까지 덮었네
오늘 서산으로 기울어진 천년세월
내일 밝산머리 해 하나로 떠오르나니
그대 가는 먼 길 흩날리는 북풍한설
시 한 줄로 아직은 잠재울 수 없어도
내가 사는 세속마을
그대와 멀다고는 생각지 마오
◈ 연말결산 (年末決算)
한 해가 저물고 있다
지나간 날들은 망실되고
사랑한 증거도 남지 않았다
나는 어디로 가야 하나
자폐증에 빠져 있는 겨울풍경
속으로 눈이 내린다
눈이 내리면
시간이 깊어진다
인생은 겨울밤
얼음 밑으로 소리 죽여
흐르는 강물이다
◈ 겨울비
모르겠어
과거로 돌아가는 터널이
어디 있는지
흐린 기억의 벌판 어디쯤
아직도 매장되지 않는 추억의 살점
한 조각 유기되어 있는지
저물녘 행선지도 없이 떠도는 거리
늑골을 적시며 추적추적 내리는 겨울비
모르겠어 돌아보면
폐쇄된 시간의 건널목
왜 그대 이름 아직도
날카로운 비수로 박히는지
◈ 점등인의 노래
이 하룻밤을 살고서
죽는 한이 있더라도
헤어진 사람들은 다시 돌아와
이 등불 가에서 만나게 하라
바람 부는 눈밭을 홀로 걸어와
회한만 삽질하던
부질없는 생애여
그래도 그리운 사람 하나 있었더라
밤이면 잠결마다 찾아와 쓰라리게 보고 싶던 그대
살속 깊이 박히는 사금파리도
지나간 한 생애 모진 흔적도
이제는 용서하며 지우게 하라.
◈ 장마전선
흐린 날
누군가의 영혼이
내 관절 속에 들어와 울고 있다
내게서 버림받은 모든 것들은
내게서 아픔으로 못 박히나니
이 세상 그늘진 어디쯤에서
누가 나를 이토록 사랑하는가
저린 뼈로 저린 뼈로 울고 있는가
대숲 가득 쏟아지는 소나기 소리
◈ 雨季(우계)
밤마다 머리 풀고 가문비나무 숲이 울더라
먼 강물 자욱히 물 넘는 소리
무덤마다 비가 오리라
쑥대풀은 우거지고
쓰러지고
반딧불 한 점 불려가더라
모두가 빈 집이더라
다만 자정 무렵 한 남자가
절벅절벅 젖은 양말로 돌아와
램프의 심지를 죽이며 낮게 울더라
◈ 1월
아무도 가지 않은 길 위에 내가 서 있다
이제는 뒤돌아보지 않겠다
한밤중에 바람은 날개를 푸득거리며
몸부림치고
절망의 수풀들
무성하게 자라 오르는 망명지
아무리 아픈 진실도
아직은 꽃이 되지 않는다
내가 기다리는 해빙기는 어디쯤에 있을까
얼음 밑으로 소리 죽여 흐르는
불면의 강물
기다리는 마음 간절할수록
시간은 날카로운 파편으로 추억을 살해한다
모래바람 서걱거리는 황무지
얼마나 더 걸어야 내가 심은 감성의 낱말들
해맑은 풀꽃으로 피어날까
오랜 폭설 끝에
하늘은 이마를 드러내고
나무들
결빙된 햇빛의 미립자를 털어 내며 일어선다
백색의 풍경 속으로 날아가는 새 한 마리
눈부시다
◈ 2월
도시의 트럭들은 날마다 살해당한
감성의 낱말들을 쓰레기 하치장으로 실어 나른다
내가 사랑하는 낱말들은
지명수배 상태로 지하실에 은둔해 있다
봄이 오고 있다는 예감
때문에 날마다 그대에게 엽서를 쓴다
세월이 그리움을 매장할 수는 없다
밤이면 선잠결에 그대가 돌아오는
발자국 소리
소스라쳐 문을 열면
아무도 보이지 않고
뜬눈으로 정박해 있는 도시
진눈깨비만 시린 눈썹 적시고 있다
◈ 3월
밤을 새워 글을 쓰고 있으면
원고지 속으로 진눈깨비가 내립니다
춘천에는 아직도 겨울이 머물러 있습니다
오늘은 꽃이라는 한 음절의 글자만
엽서에 적어 그대 머리맡으로 보냅니다
꽃이라는 글자를 자세히 들여다보신 적이 있나요
한글 중에 제일 꽃을 닮은 글자는
꽃이라는 글자 하나뿐이지요
자세히 들여다보고 있으면 그 속에 가득 차 있는 햇빛 때문에
왠지 눈시울이 뜨거워집니다
◈ 4월
4월에는 부끄러움 때문에 시를 쓸 수가 없다.
정치가들처럼 욕망 때문에
인생에 똥칠이나 하면서 살지 않으면 천만다행.
이미 젊은 날 접질러진 내 날개는 하늘로 가서 구름으로 흐른다.
문을 열면 온 세상이 시로 가득하거늘. 아침에 일어나
오늘도 해가 떠 있음을 알고
저녁에 잠들어 꿈속에 그대를 만나면 그뿐.
◈ 5월
아이야 오늘처럼 온통 세상이 짙푸른 날에는
지나간 날들을 떠올리지 말자
바람이 불면
허기진 시절을 향해 흔들리는
기억의 수풀
시간은 소멸하지 않고
강물은 바다에 이르러 돌아오지 않는다
연락이 두절된 이름들도
나는 아직 수첩에서 지울 수 없어라
하늘에는
만성피로증후군을 앓으며 뭉게구름 떠내려가고
낙타처럼 피곤한 무릎으로 주저앉는 산그림자
나는 목이 마르다
아이야 오늘처럼 세상이 온통 짙푸른 날에는
다가오는 날들도 생각하지 말자
인생에는 도처에 이별이 기다리고
한겨울 눈보라처럼 흩날리는 아카시아 꽃잎
그 아래
어깨를 늘어뜨리고
모르는 사람 하나 떠나가는 모습
나는 맨발에 사금파리 박히는 아픔을 배우나니
◈ 6월
바람 부는 날 은백양나무 숲으로 가면
청명한 날에도 소낙비 쏟아지는 소리
귀를 막아도 들립니다
저무는 서쪽 하늘
걸음마다 주름살이 깊어가는 지천명(知天命)
내 인생은 아직도 공사중입니다
보행에 불편을 드리지는 않았는지요
오래 전부터
그대에게 엽서를 씁니다
그러나 주소를 몰라 보낼 수 없습니다
서랍을 열어도
온 천지에 소낙비 쏟아지는 소리
한 평생 그리움은 불치병입니다
◈ 7月
그대는
오늘도 부재중인가
정오의 햇빛 속에서
공허한 전화벨 소리처럼
매미들이 울고 있다
나는
세상을 등지고
원고지 속으로
망명한다
텅 빈 백색의 거리
모든 문들이
닫혀 있다
인생이 깊어지면
어쩔 수 없이
그리움도 깊어진다
나는
인간이라는 단어를
방마다 입주시키고
빈혈을 앓으며 쓰러진다
끊임없이 목이 마르다
◈ 8월
여름이 문을 닫을 때까지
나는 바다에 가지 못했다
흐린 날에는
홀로 목로주점에 앉아
비를 기다리며 술을 마셨다
막상 바다로 간다 해도
나는 아직 바람의 잠언을 알아듣지 못한다
바다는
허무의 무덤이다
진실은 아름답지만
왜 언제나 해명되지 않은 채로
상처를 남기는지
바다는 말해 주지 않는다
빌어먹을 낭만이여
한 잔의 술이 한잔의 하늘이 되는 줄을
나는 몰랐다
젊은 날에는
가끔씩 술잔 속에 파도가 일어서고
나는 어두운 골목
똥물까지 토한 채 잠이 들었다
소문으로만 출렁거리는 바다 곁에서
이따금 술에 취하면
담벼락에 어른거리던 나무들의 그림자
나무들의 그림자를 부여잡고
나는 울었다
그러나 이제는 어리석다
사랑은
바다에 가도 만날 수 없고
거리를 방황해도 만날 수 없다
단지 고개를 돌리면
아우성치며 달려드는 시간의 발굽소리
나는 왜 아직도
세속을 떠나지 못했을까
흐린 날에는
목로주점에 앉아
비를 기다리며 술을 마셨다
인생은
비어 있음으로
더욱 아름다워지는 줄도 모르면서
◈ 9月
가을이 오면
그대 기다리는 일상을 접어야겠네
간이역 투명한 햇살 속에서
잘디잔 이파리마다 황금빛 몸살을 앓는
탱자나무 울타리
기다림은 사랑보다 더 깊은 아픔으로 밀려드나니
그대 이름 지우고
종일토록 내 마음 눈시런 하늘 저 멀리
가벼운 새털구름 한 자락으로나 걸어 두겠네
◈ 10월
이제는 마른 잎 한 장조차 보여 드리지 못합니다
버릴수록 아름다운 이치나 가르쳐 드릴까요
기러기떼 울음 지우고 떠나간 초겨울
서쪽 하늘
날마다 시린 뼈를 엮어서 그물이나 던집니다
보이시나요
얼음칼로 베어낸 부처님 눈썹 하나
◈ 11월
세상은 저물어
길을 지운다
나무들 한 겹씩
마음 비우고
초연히 겨울로 떠나는 모습
독약 같은 사랑도
문을 닫는다
인간사 모두가 고해이거늘
바람은 어디로 가자고
내 등을 떠미는가
상처 깊은 눈물도
은혜로운데
아직도 지울 수 없는 이름들
서쪽 하늘에 걸려
젖은 별빛으로
흔들리는 11월
◈ 12월
떠도는 그대 영혼 더욱
쓸쓸하라고
눈이 내린다
닫혀 있는 거리
아직 예수님은 돌아오지 않고
종말처럼 날이 저문다
가난한 날에는
그리움도 조가 되나니
그대 더욱 목메이라고
길이 막힌다
흑백 사진처럼 정지해 있는 시간
누군가 흐느끼고 있다
회개하라 회개하라 회개하라
폭설 속에 하늘이 무너지고 있다
이 한 해의 마지막 언덕길
지워지고 있다
◈ 가을의 창문을 열면
어디쯤 오고 있을까
세월이 흐를수록
마음도
깊어지는 사람 하나
단풍나무 불붙어
몸살 나는 그리움으로
사라질 때
◈ 여름의 끝
이제 여름은 가고
육림공원 빈 의자에
노오란 페인트가 마르고 있다.
낮은 음악이 등 뒤로 다가와
등넝쿨을 가만히 흔들고 있다.
구관조 새장 앞에서
조그만 아이 하나가 말을 가르치고 있는 소리
사
르
비
아
햇빛 속에 한 줄로 피어 있다
◈ 표류기
아직 방황이 끝나지 않았는데
가을이 문을 닫는다
무참히 낙엽은 져 버리고
싸늘한 저녁비에 함몰하는 도시
나는 어디로 가야 하나
걸음을 멈추면
서늘하게 목덜미를 적시는
겨울예감
새떼들이 떠나 버린 광장
맹목의 개들만 어슬렁거리고 있다
예술이 암장되고
희망도 유보된 시대
시계탑은 침묵을 지키고 있다
수은주의 눈금이 내려갈수록
눈물은 투명해진다
나는 투명해지는 눈물로 만들어진
한 마리의 해파리
홀로 시간의 바다를
표류한다
이제는 누구의 사랑도
믿지 않는다
오로지 독약 같은 외로움만
일용할 양식이다
◈ 가을비
사랑하는 그대
이제 우리 다시 만나면
소중한 말은 하지 말고
그저 먼 허공이나 바라보다
헤어지기로 할까
귀신도 하나 울고 가는
저녁 어스름
마른 풀잎 위로
가을비가 내린다.
◈ 은행나무
너는 인어의 비늘이다.
아침에 제일 먼저 바람을 받아
잘게 썰어서 한 짐씩
내 뜨락에 쏟아 놓고
노오란 햇빛만 새로 솎아서
내 빈 가방 속에 담아 놓고
더 멀리도 더 가까이도 갈 수 없는 거리
첫사랑 속 태우던 그 먼 시간
모두 모아 물소리로 설레고 있다..
◈ 그 투명한 내 나이 스무 살에는
그 투명한 내 나이
스무 살에는
선잠결에 스쳐가는
실낱같은 그리움도
어느새 등넝쿨처럼 내 몸을 휘감아서
몸살이 되더라
몸살이 되더라
떠나보낸 사람은 아무도 없는데
세상은 왜 그리 텅 비어 있었을까
날마다 하늘 가득
황사바람
목 메이는 울음소리로
불어나고
나는 휴지처럼 부질없이
거리를 떠돌았어
사무치는 외로움도 칼날이었어
밤이면 일기장에 푸른 잉크로
살아온 날의 숫자만큼
사랑이라는 단어를 채워 넣고
눈시울이 젖은 채로 죽고 싶더라
눈시울이 젖은 채로 죽고 싶더라
그 투명한 내 나이 스무 살이는
◈ 구름 걸린 미루나무
온 세상 푸르던 젊은 날에는
가난에 사랑도 박탈당하고
역마살로 한 세상 떠돌았지요
걸음마다 그리운 이름들
떠올라서
하늘을 쳐다보면 눈시울이 젖었지요
생각하면 부질없이
나이만 먹었습니다
그래도 이제는 알 수 있지요
그리운 이름들은 모두
구름 걸린 언덕에서
키 큰 미루나무로 살아갑니다
바람이 불면 들리시나요
그대 이름 나지막히 부르는 소리
◈ 화선지(畵宣紙)
새 한 마리만 그려 넣으면
남은 여백 모두가 하늘이어라
◈ 강이 흐르리
이승은 언제나 쓰라린 겨울이어라
바람에 베이는 살갗
홀로 걷는 꿈이어라.
다가오는 겨울에는 아름답다
그대 기다린 뜻도.
우리가 전생으로 돌아가는 마음 하나로
아무도 없는 한적한 길
눈을 맞으며 걸으리니.
사랑한다는 말 한 마디마다
겨울이 끝나는 봄녘 햇빛이 되고
오스스 떨며 나서는
거미의 여린 실날 맺힌 이슬이 되고
그 이슬에 비치는 민들레가 되리라.
살아 있어 소생하는 모든 것에도
죽어서 멀리 있는 모든 것에도
우리가 불어 넣은 말 한 마디.
아, 사랑한다고
비로소 얼음이 풀리면서 건너가는 나룻배
저승에서 이승으로 강이 흐르리.
◈ 지렁이
도대체
내가
무얼 잘못 했습니까?
◈ 시간퇴행(時間退行)
아무리 생각해도 내 젊음은 아름답지 않았어
가난이 질척거리는 길바닥 맨발의 슬픔으로
그대에게 보내는 장문의 편지
때로는 미농지처럼 바스락거리는 목숨으로
마른 꽃잎 한 장도 끼워 두었지
언제나 그대는 주소불명
편지는 반송되고
밤마다 허기진 불빛으로 돌아오는
남춘천 마지막 열차
나는 늑골을 적시는 겨울비에 진저리를 치면서
사랑을 예찬하는 모든 시인에게 침을 뱉았어
통금이 임박해 오는 목로주점
밤마다 흐린 백열전구 불빛에 흔들리며
차라리 자살한
어느 저음가수의 통속한 생애를 예찬했지
어디에도 출구는 보이지 않았어
인생은 지느러미를 잘리운 채로
어두운 바다 절망의 동굴 속을 헤엄치는 꿈
내 시간의 폴더에는
불러오기 파일이 손상되고
어느새 무서리 내리는 지천명
잠결에 듣는 바람소리에도 온 생애가 펄럭거리네
불현듯 자리에서 일어나 젊은 날을 회상하면
자판을 두드릴 때마다 돌출하는 메시지
'당신의 인생에 치명적인 오류가 발생했습니다'
◈ 약속
그대는 오지 않았다
사랑이 깊을수록 상처도 깊어
그리움 짙푸른 여름 한나절
눈부시게 표백되는 시간
가로질러
세상에서 가장 쓸쓸한 음악으로
멀어지는 강물소리
◈ 아무도 가지 않은 길 위에 내가 서 있다
이제는 뒤돌아보지 않겠다
한밤중에 바람은
날개를 푸득거리며 몸부림치고
절망의 수풀들
무성하게 자라 오르는 망명지
아무리 아픈 진실도
아직은 꽃이 되지 않는다
내가 기다리는
해빙기는 어디쯤에 있을까
얼음 밑으로 소리 죽여 흐르는
불면의 강물
기다리는 마음이 간절할수록
시간은 날카로운 파편으로 추억을 살해한다
모래바람 서걱거리는 황무지
얼마나 더 걸어야
내가 심은 감성의 낱말들
해맑은 풀꽃으로 피어날까
오랜 폭설 끝에
하늘은 이마를 드러내고
나무들
결빙된 햇빛의 미립자를 털어 내며 일어선다
백색의 풍경 속으로 날아가는 새 한 마리
눈부시다
◈ 엽서
울기 위해서 태어난 것이 아니다
더 높이 날수록 더 멀리 있는 그리움을 보는 눈
해마다 겨울이면
눈 내리는 내 방 창가로 날아와서
오스스 떨고 있는 記憶의 새 한마리
◈ 여름엽서
마음으로만은
사랑을 할 수 없어
밤마다 편지를 썼었지
서랍을 열면
우울한 스무 살 가슴앓이
死語들만 수북히 쌓여 있었지
입대하기 전날 아무도 몰래
편지를 모두 잘게 찢어
그대 집 담벼락에 깊이 묻고
다시는 그리워하지 않으리
나는 바삐 걸었네
황산벌 황사바람 속에서도
바래지 않던 추억
수시로 가시처럼 날카롭게
되살아나서
하루에도 몇 번씩
파고들던 아픔이여
그래도 세월은 가고 있었네
제대해서 돌아와
다시 편지를 쓰려는데
그대는 하늘나라 먼 길을 떠났다던가
보름달은 환하게 밝아 있고
편지를 잘게 찢어 묻은 그 자리
찔레꽃이 무더기로 핀 이유를
비로소 알아내고 혼자 울었지
◈ 살아간다는 것은
살아간다는 것은
저물어 간다는 것이다
슬프게도
사랑은
자주 흔들린다
어떤 인연은 노래가 되고
어떤 인연은 상처가 된다
하루에 한 번씩 바다는
저물고
노래도 상처도
무채색으로
흐리게 지워진다
나는
시린 무릎 감싸 안으며
나즈막히
그대 이름 부른다
살아간다는 것은
오늘도
내가 혼자임을 아는 것이다
◈ 백수가
그대여,
오늘 하루도 잘,
뒹굴
뒹굴
하였는가.
봄날의 곰처럼
정오의 공작처럼
빈둥
빈둥
오, 아름다운 그대의 삶.
그대의 부모는
그대를 보고 말할 것이다.
"자~알 한다.."
"자~알 하는 짓이다."라고
아아.
나 역시 그대를 보고 말하나니
그대여 자~알 한다.
정말이지
자~알 하는 짓이다.
자~알 살고 있는 그대가
오늘도 나에게 물어왔다.
도대체 할 일이 없다고,
도무지
뭘 하고 살아야 할 지 모르겠다고
그대는 나에게 물어왔다.
그렇다 그대여.
지금 그대에게 할 일이 없다.
세상엔 정말이지
그대가 할 만한 일이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는 듯하다.
왜 그런 것일까.
그 이유는
도대체 무엇일까?
나는 그 이유를
그대가 지금 잘 살고 있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물론 어느 기업인은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라는
거창한 말을 외쳤지만
뭐, 할 일이 그렇게도 많다면
많이들 하라 그러고,
오늘은 그대와 나
세계가 아무리 넓어도
도무지 할 일 없는 인간들끼리
뒹굴 뒹굴
빈둥빈둥
방바닥이나 문질러 보자.
그대여.
그대는 지금 멋지게 살고 있다.
그대의 삶은 지극히 정상이며,
지금 이 시기야말로
젊은 날 반드시 거쳐야 할
황금의 터널이니,
나는 그대가
진실로 자랑스럽고
사랑스럽다.
그렇다 그대여.
백수가 아닌 젊음은
젊음이 아니다.
진실로 진실로
나는 그렇게 생각하나니,
아무런 주저 없이
그저 돈이나 벌기 위해
취직부터 하고 보는 젊음이야말로,
얼마나 비정상적이고
몰가치한 삶인가.
물론 세계는 넓고 할 일도 많지만
무릇 한 인간이
평생을 바쳐 할 수 있는 일은
단 한 가지.
단 한 가지에 불과하다.
그것이 직업이다.
자신의 직업, 귀하고 올바른 직업을 찾는 데는
비록 평생을 바친다한들 아까운 일이 아니다.
그대는 그대의 직업을 통해
행복할 수 있어야 한다.
그대의 직업을 통해
그대의 삶,
그대 가족의 삶을 영위해야 함은 물론,
나아가 타인의 삶 역시
이롭게 할 수 있어야 한다.
그대의 직업은
늘 가슴 뛰고,
하면 할수록 보람차고 신나는 것이어야 한다.
그 모든 것이 조화를 이룰 때만이
진정으로 그대는
그대의 직업을 찾았다고 할 수 있다.
그대여.
직업을 찾는다는 것을 이토록 어려운 일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한 인간이 평생을 바쳐 걸어가야 할 길을
오늘의 젊은이들은
너무나 쉽게,
너무나 간편하게
결정해 버리고 만다.
그들은 스스로를 대견스러워 한다.
일찍 취직을 했을수록,
크고 끗발 좋은 직장에 합격했을수록
그들의 어깨엔 힘이 들어가고
그들의 시각은
마비되어 버린다.
그들에게 세상은
그렇게 그런 것이며,
그들의 삶 역시
그저 그렇고 그런 것이다.
나는 그저 그런 식으로 직업을 선택한 이들에게
이렇게 얘기한다.
잘 먹고
잘 살아라...
그 외에는 다른 할 말이 없기 때문이다.
그대는 젊고,
싱싱한 의식을 지니고 있으며,
세상에 마비되지 않은
진지한 시각을 가지고 있다.
세상의 모든 걸 다 가진 것이다.
그리고 다만
직업을 가지지 않았을 뿐이다.
나는 그것을
그대가 무능하기 때문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그대는 지금 그대의 길을 찾고 있는 중이며,
저 널려 있는
천한 직업의 지뢰밭을 통과해
귀하고 귀한
그대의 직업을 찾고 있는 중이다.
그것은 깨어 있는 젊음,
경건한 젊음을 지닌 이로서
지극히 당연하고
당연한 일이다.
그렇다 그대여.
직업엔 분명 귀천이 있다.
물론 빌어먹을 세상은
돈을 많이 버는 직업을 귀한 직업으로.
돈을 못 버는 직업을
천한 직업으로 치부해 버리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진실로 천한 직업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작위 고하를 막론하고
남에게 해를 끼치는 직업,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직업이다.
우리는 밤하늘의 별처럼 무수한
천한 직업들을 보아왔다.
사리사욕에 눈먼 정치가들,
뇌물로 돈을 모은 공무원들,
남의 재산을 탐하는 범죄자들,
아랫사람에게 고통을 주는 직장의 간부들을
우리는 무수히 보아왔다.
이는 모두 천한 직업이다.
분명 이들은 직업을 잘못 선택했으며,
직업을 잘못 선택한 이들이야말로
세상을 망치는 주범들이다.
나는 그대가
아무 생각 없이 그들의 꼬봉이 되어
자신도 모르게 세상을 망치는 일에 일조하는 이가 되지 않기를
진심으로 기도한다.
그대는 여지껏
참고 기다려 왔으며,
이제 잠시 후면
반드시 자신의 역량을 걸맞는
귀하고 귀한 직업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아무리 늦어도
부끄럽지 않는 것.
늦고 늦을수록 그 쓰임이 크고 너그러워
여러 사람을 이롭게 하는...
그런 귀한 직업에 종사하기를
나는 간절히 소망한다.
그대여.
귀한 직업을 가진 삶,
또 그 직업에 평생을 바친 이의 삶은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가.
그리고 그 길을 찾기 위해,
날로 연마하고
묵묵히 기다릴 줄 아는 이의 삶은
얼마나 경건한 것인가.
그렇다 그대여.
누가 백수를 무직이라 했는가.
백수야말로 직업선택업이라는
귀하고 귀한 젊음의 직업이니
보라.
그대의 이름은 백수,
백수는 프로보다 아름답다.
◈ 안개중독자
사랑아
그대가 떠나고 세상의 모든 길들이 지워진다
나는
아직도 안개중독자로 공지천을 떠돌고 있다
흐리게 지워지는 풍경 너머 어디쯤
지난 날 그대에게 엽서를 보내던 우체국이 매몰되어 있을까
길 없는 허공에서 일어나 길 없는 허공에서 스러지는
안개처럼
그토록 아파한 나날들도
손금 속에 각인되지 않은 채로 소멸한다
결국 춘천에서는
방황만이 진실한 사랑의 고백이다
◈ 별
내 영혼이 죽은 채로 술병 속에
썩고 있을 때
잠들어 이대로 죽고 싶다
울고 있을 때
그대 무심히 초겨울 바람 속을 걸어와
별이 되었다
오늘은 서울에 찾아와 하늘을 보니
하늘에는 자욱한 문명의 먼지
내 별이 교신하는 소리 들리지 않고
나는 다만 마음에 점 하나만 찍어두노니
어느 날 하늘 맑은 땅이 있어
문득 하늘을 보면
그 점도 별이 되어 빛날 것이다
◈ 입동
날마다 오후 여섯시부터
길을 잃어버리는 당신
◈ 찔레꽃
마음으로만은
사랑을 할 수 없어
밤마다 편지를 썼었지
서랍을 열면 우울한
스무 살 가슴앓이
死語들만 수북히 쌓여 있었지
입대하기 전날 아무도 몰래
편지를 모두 잘게 찢어
그대 집 담벼락에 깊이 묻고
다시는 그리워하지 않으리
나는 바삐 걸었네
황산벌 황사바람 속에서도
바래지 않던 추억
수시로 가시처럼 날카롭게
되살아나서
하루에도 몇 번씩
파고들던 아픔이여
그래도 세월은 가고 있었네
제대해서 돌아와
다시 편지를 쓰려는데
그대는 하늘나라 먼 길을 떠났다던가
보름달은 환하게 밝아 있고
편지를 잘게 찢어 묻은 그 자리
찔레꽃이 무더기로 핀 이유를
비로소 알아내고 혼자 울었지
◈ 벚꽃
오늘 햇빛 이렇게 화사한 마을
빵 한 조각을 먹는다
아 부끄러워라
나는 왜 사나.
◈ 풀꽃 술잔 나비
그대는 이 나라 어디 언덕에
그리운 풀꽃으로 흔들리느냐
오늘은 네 곁으로 바람이 불고
빈 마음 여기 홀로 술 한잔을 마신다
이 나라 어두움도 모두 마신다
나는 나는 이 깊은 겨울
한 마리 벌레처럼 잠을 자면서
어느 봄날 은혜의 날개를 달고
한 마리 나비되는 꿈을 꾸면서
이 밤을 돌아앉아 촛불을 켠다
그대는 이 나라 어디 언덕에
그리운 풀꽃으로 흔들리느냐
오늘은 네 곁으로 바람이 불고
빈 마음 여기 홀로 술을 마신다
◈ 비오는 날 달맞이꽃에게
이 세상 슬픈 작별들은 모두
저문 강에 흐르는 물소리가 되더라
머리 풀고 흐느끼는
갈대밭이 되더라
해체되는 시간 저편으로
우리가 사랑했던 시어들은
무상한 실삼나무 숲이 되어 자라 오르고
목 메이던 노래도 지금쯤
젖은 채로 떠돌다 바다에 닿았으리
작별 끝에 비로소 알게 되더라
사랑하는 것들은 모두 노래가 되지 않고
더러는 회색하늘에 머물러서
울음이 되더라
범람하는 울음이 되더라
내 영혼을 허물더라
◈ 바위를 위한 노래
날개가 없다고 어찌 비상을 꿈꾸지 않으랴
천만년 한 자리에 붙박혀 사는 바위도
날마다 무한창공을
바라보나니
기다리는 일은 사랑하는 일보다 눈물겹더라
허연 거품을 물고 실신하는 바람
절망하고
눈보라에 속절없이 매몰되는 바다
절망하고
겨울에는
사랑보다 증오가 깊어지더라
지금은 작은 풀 한 포기 자라지 못하는
무덤이더라
그래도 천만년 스쳐가는 인연마다 살을 헐며
날마다 무한창공을
바라보나니
언젠가는 가벼운 먼지 한 점으로
부유하는 그날까지
날개가 없다고 어찌 비상을 꿈꾸지 않으랴
◈ 그대와 헤어지고
그대와 헤어지고
겨울이 온다.
영원으로 깊이 잠든
빙하기의 하늘을 지나
비어나간 내 관절 속으로
와서 우는
가느다란 유리새 울음소리
그대도 깨어있을
지금은 새벽 두 시
빈 조롱 철사줄마다
뜬 눈으로 별들이 매달려 있다
◈ 계란
비록 움직일 수는 없었지만
죽은 것은 아니었어요
날개 없는 이 세상 모든 것들이
멎은 채로 가슴 안에 키우던 꿈
푸른 하늘이지요
당신은 겨우 나를 후라이팬에 튀겨
김밥 속에 쑤셔 넣고 있지만요
조금 전 까지만 해도
내 가슴 안에는
작은 아침 해 하나
금빛 꿈으로 들어 앉아 있었다구요
◈ 사랑의 계단
만약 그대가 어떤 사람을 사랑하고 싶다면
그 사람의 어깨위에 소리 없이 내려앉는
한 점 먼지에게 까지도 지대한 관심을 부여하라.
그 사람이 소유하고 있는 가장 하찮은 요소까지도
지대한 관심의 대상으로 바라볼 수 있을 때
비로소 사랑의 계단으로 오르는 문이 열리리라
◈ 앵두 한 알
어린 시절
처음으로 내 가슴
설레게 하던
여자애
가시에 찔린 손가락
호오 불어 주었지
그 선명한 피 한 방울
아직도
가슴 아리게 하네
◈ 해거름
누이야
전생길 떠날 때 뻐꾸기 피울음은
이승길 돌아와도
뻐꾸기 피울음이지
개망초 무성한 수풀 뒤로
햇살은 돌아눕고
한 걸음만 돌아서도 지워지는 사랑으로
눈썹 언저리에
날개접는 부전나비
누이야
아무리 걸어도 길은 낯설어
물소리만 저 홀로 깊어가더라
◈ 흔들림
바람 불 때 흔들리는 목숨들은
흔들리는 목숨대로
그만한 그리움을 간직하고
살아가나니
잔설 녹는 산비탈
봄날은 깊어
바람도 없는 한나절
꿀물같이 흐르는 햇살에
허리 적시고
산벌들 날개소리에도 흔들리는 싸리꽃.
◈ 모월모일
먼 여행에서 돌아온 날
문틈에 시든 꽃 한 송이
물려 있다
그 애가 왔다갔구나
◈ 빨랫줄
왜 당신의 마음은 세탁해서 널어놓지 않나요
◈ 장대
오로지
그리움
하나 때문에
사시장철
이런
몰골로
서있습니다
◈ 공간소묘
사막이 문을 닫았다
갇힌 바람이 울고 있다
선인장 꽃 한 송이
금강경을 암송하고 있다
기울어지는 여름
◈ 첫사랑
이제야
마음 다 비운 줄 알았더니
수양버들 머리 풀고
달려오는 초여름
아직도 초록색 피 한 방울로
남아 있는
그대 이름
◈ 날마다 하늘이 열리나니
팔이 안으로만 굽는다 하여
어찌 등 뒤에 있는 그대를 껴안을 수 없으랴
내 한 몸 돌아서면 충분한 것을
◈ 엽서를 태우다가
지난 밤 그대에게 보내려고 써 둔 엽서
아침에 다시 보니
부끄럽다는 생각이 들어
성냥불을 붙였다
끝까지 타지 않고 남은 글자들
외로움
◈ 변주곡
변두리로만 떠돌던
내 이십대의 겨울
女子들이 언제나 먼저
나를 버렸지
폐결핵(肺結核)을 앓던 나날
굳게 닫힌 유리창(流璃窓) 앞에 서면
가슴 안에 돋아나는 저승꽃도 보였지
손톱으로 성에를 긁어내며
봄이라고 자꾸만
써보곤 했지
밤이 되면 벽(壁) 속에는
가득한 바람 소리
떠나간 이들의 소식은 모두 끊어지고
잠들면 밤새도록 폭설(暴雪)이 내려
적설량(積雪量)은 내 키보다 높아만 가고
빙점(氷點)에 머물러 얼어 붙은채
누구의 입김으로도 녹일 수 없었던
시(詩)
사랑
눈물이라는 생명(生命)의 말들
방 안 가득 하얗게 죽어있는
파지(破紙)들 이여
그러나 용서(容薯)하라
아무런 의미도 없이
나는 아직도 이렇게 살아 있나니
한 세상(世上) 어둠 안고 떠돌다가
어느덧 마흔 해가 흘러갔는데
오늘 서울 행 버스에서 본 경춘가도(京春街道)
무더기로 개나리가 피어 있더라
사람만은 떠나서 되돌아 오지않고
다만 의암호 깊은 물에
반짝이는 물비늘
그 겨울의 가난이
내 사랑을 죽였다 하더라도
내 낱말은 죽일 수가 없었으리
폐결핵(肺結核)을 앓던 나날
굳게 닫힌 유리창(流璃窓) 앞에 서면
가슴 안에 돋아나는 저승꽃도 보였지만
손톱으로 성에를 긁어내며
봄이라고 자꾸만
써보기도 했지만
◈ 초생달
이제 기울어
가득 찬 일을 잊었다
소슬한 바람에도
허리 굽혀 흐르나니
나 있는 곳이
그대와 멀지않다
이따금 편지를 잊었어도
중천이 맑다
추신 없음.
◈ 풀꽃
세상길 오다가다
나도 법문 같은 개소리
몇 마디쯤 던질 줄은 알지만
낯선 시골길
한가로이 걷다 만나는 풀꽃 한 송이
너만 보면 절로 말문이 막혀 버린다
그렇다면
내 공부는 아직도 멀었다는 뜻
◈ 자살을 꿈꾸는 그대에게
그 누군들 자살을 꿈꾸지 않았으랴.
삶은 외롭고 고달픈 것이니
그대는 지금 그 서러운 길 위에서
절망하고 있다.
절망이란 무엇인가?
문자 그대로 희망이 없는 것이니
그대여
우리의 인생사 서러워라
차가운 세상사
무한히 서러워라.
그대여,
나는 지금 자살을 꿈꾸는 그대 곁에
쪼그리고 앉아 있다.
우리의 인생은 서러운데,
별은 저리도 눈부셔 눈물만 나는구나.
이 뜨거운 삶의 담벼락에 기대앉아
서로의 이를 솎아 주듯
나는 그대와 얘기하고 싶다.
그대여,
희망은 과연 없는 것일까?
과연 세상은 눈곱만큼도 살 가치가 없는 것일까?
나는 지금,
그대 눈물이 마른자리 눈곱을 떼어 주며
눈곱만큼 작은
세상의 희망을 말하고자 한다.
그대여
인간은 누구나 고통을 가지고 있다.
예수님도 부처님도
이 운명의 뼈대를 피해 갈 수 없었나니
생노병사 희노애락
이 여덟 가지의 뼈대가 그것이다.
태어나고, 늙고, 병들고, 죽고,
기뻐하고, 분노하고, 슬퍼하고, 즐거워하고...
무릇 모든 인간의 운명이
이 여덟 가지의 틀로 이루어져 있다는 사실
그대는 우선 이 사실을 받아 들여아 한다.
인생이 왜 서러운가?
이 운명의 뼈대 속에서
오로지 기쁨과 즐거움만을 추구하려 들기 때문이다.
기쁨이 아니라는 이유로, 즐거움이 아니라는 이유로
우리의 늙는 것을 탄식하고, 병듬을 두려워하며
분노와 슬픔을 견디지 못하고
인생을 서러워한다.
그러나 그대여, 이제 알지어다.
生老病死 喜怒哀樂
이 모두가
그대가 '반드시' 겪게 될 인생이니
여지껏 그대의 인생 속에
기쁨과 즐거움이 없었다 하더라도
길고 긴 그대의 미래 속에는
그것이 반드시 포함되어 있다.
◈ 자살을 꿈꾸는 그대에게 2
그런 이유로
세상이 희망만으로 가득하다는 것은 새빨간 거짓말이다.
세상이 절망만으로 가득하다는 것도 새빨간 거짓말이다.
아무리 큰 희망도, 아무리 큰 절망도
운명의 큰 계획 속에선 그저 눈곱에 불과한 것이니
그대여, 지금의 근심을 근심하지 말라.
근심은 언제나 있었던 것이며,
또 모든 근심은 '100%' 없어지는 것이니
돌이켜 보라.
10년 전의 근심을 그대가 기억하고 있는지...
5년 전의 자지러졌던 그 근심이
아직껏 그대에게 남아 있는지
이제 알지어다.
희망도 절망도
그 모두가 눈곱이다.
그대여, 이제 나는 그대에게 이 모든 운명을 사랑하라고 말하려 한다.
태어난 사실을 사랑하라.
눈물겹게 사랑하라.
분노도 슬픔도
늙음조차도 사랑해아 하느니,
만물에 영혼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영혼은 시간과 공간에 구애받지 않으며,
사라지지 않는 것이니
다만 탄생과 죽음을 통해
또 다른 차원, 또 다른 공간으로 변화해 갈 뿐이다.
사랑하라 그대여,
生老病死 喜怒哀樂
이 모두가 그대의 소중한 영혼을 키오고 살찌우기 위한
우주의 계획이기 때문이다.
그대여, 죽는 것이 다가 아니다.
그래도 그대가 자살하고 싶다면
그대는 우선 세상 만물의 동의부터 구해야 한다.
그대의 생명은
그대만의 것이 아니니
진실로 진실로
그대의 생명은 세상 만물의 것이니
그대는 여지껏
부모님의 몸을 빌어 세상에 왔음은 물론,
세상 만물들 -
벼,
배추,
양파,
물고기,
가축...
이 모두의 생명을 지원 받아
존재해 왔기 때문이다.
그대여, 진실로 그대가 자살하고 싶다면
우선 이들 모두로부터 허락을 받아라.
그 소중한 희생에 대해
아무런 보답도 하지 않고 간다면
세상에 이보다
째째한 일이 또 어디 있겠는가.
그대여, 이제 세상을 끊자.
생각을 끊고 마음으로 만물을 바라보자.
마음으로 그대 자신을 바라보고,
세상을 바라보자.
우주가 계획한 그대의 인생을 바라보고,
그대 생명의 소중함을 바라보자.
죽음은
한 세상을 사랑하다 마감하는 경건한 영혼의 분기점이니
진실로 진실로
그대 앞의 생을 사랑한 후에
어느 시인의 아름다운 시처럼
가서 아름다웠다고 말하거라.
◈ 우수(雨秀)
밤마다 머리 풀고 가문비나무 숲이 울더라
먼 강물 자욱히 물 넘는 소리
무덤마다 비가 오리라
쑥대풀은 우거지고
쓰러지고
반딧불 한 점 불려가더라
모두가 빈집이더라
다만 자정 무렵 한 남자가
절벅절벅 젖은 양말로 돌아와
램프의 심지를 죽이며 낮게 울더라
◈ 시간채색
허송세월
발목 잡는 세속에 등 돌리고
세필에 맑은 먹물
가느다란 선 하나로 산을 그렸다
이런 날 그대는
어찌 지내시는가
잠깐 한눈을 파는 사이
내가 그린 산에는
새하얀 눈이 내리고
거기 발자국 하나도 남기지 않은 채
해는 이마를 지우며
어느새 등성이를 넘고 있다
◈ 성냥개비
그대는 알고 있을까
물소리 저 홀로 깊어지는 가을날
그대 유년의 바람 부는 벌판에서
나는
한 그루
몽상의 미루나무
가지마다 순금 빛 음표들 나부끼며
그대를 기다리고 있었네
그러나
지금은 아니라네
유년의 물소리 머나 먼 바다에 이르러
돌아오지 않고
통로가 보이지 않는
직육면체의 단칸방
나는
전신이 천 갈래 만 갈래로 쪼개진 채
가느다란 뼈 하나로 남아 있다네
그대 손바닥 위에
내가 놓여 있어도
그대는 기억할 수 없으리
그대 유년의 바람부는 벌판에서
나는
한 그루
몽상의 미루나무
지금은 소멸의 갈망 속에 침묵하다가
그대 가벼운 손짓 한 번에도
점화대는
영혼의 불꽃
그대는 끝내 알지 못하리
어둠이 짙을수록
눈부시게 소멸하고
소멸한 그 자리에
내가 느낌표 하나로 남아 있어도
◈ 진달래술
생각납니다
폐병 앓던 젊은 날에는 양지바른 산비탈
각혈한 자리마다 진달래가 무더기로 피었지요
지금은 주름살이 깊어가는 지천명
부질없는 욕망은 다 버렸지만
아직도 각혈같은 사랑만은 버리지 못했습니다
술 한 잔 주시겠습니까.
◈ 광장의 저녁바람
이제 우리도 떠나자
더 이상 어두워지기 전에
박수도 없는 빈 층계위로
한 겹씩 날아오르는
빈 껍질의 비둘기들
바람이 불고 불이 꺼진다
쓸쓸히
누군가 은퇴하고 있다
◈ 어느 가로수의 日記에서
다시 어둠이 내립니다
도시에는 어둠이 내리면
안식보다 외로움이 먼저 찾아듭니다
별은 보이지 않습니다
폐병을 앓는 달 하나
기력 없는 얼굴로 떠오릅니다
하나님 제가 진실로
당신이 말씀으로 지으신 한 그루 나무라면
왜 제 영혼 속에는 아직
단 한 마리의 새도
날아와 집을 짓지 않는 걸까요
밤새도록 기도하고
늦잠에서 깨어나 보니
해는 이미 중천에 떠올라 있었고
내 발밑에 드리워진 그늘을 이불삼아
노인 하나 숨져 있었다
유난히 햇볕이 따스한 봄날
새가 되어 날아가는 노인의 영혼을 보았다
◈ 시인의 이름
오늘따라 유난히 그리운 이름 하나
서산 어스름 속에 서성이더라
술 취해 흥얼흥얼 노래 부르며
개떡 같은 세상아 잘 있거라
나 보다 먼저 하늘로 떠난 사람
아직도 서럽게 울고 있더라
◈ 그대를 보내고
이제 집으로 돌아가자
우리들 사랑도 속절없이 저물어
가을날 빈 들녘 환청같이
나지막히 그대 이름 부르면서
스러지는 하늘이여
버리고 싶은 노래들은 저문강에
쓸쓸히 물비늘로 떠돌게 하고
독약 같은 그리움에 늑골을 적시면서
실어증을 앓고 있는 실삼나무
작별 끝에 당도하는 낯선 마을
어느새 인적은 끊어지고
못다 한 말들이 한 음절씩
저 멀리 불빛으로 흔들릴 때
발목에 쐐기풀로 감기는 바람
바람만 자학처럼 데리고 가자
◈ 아직도 살아 있음
삼 년째 문 닫고
만나는 겨울
이따금
폭설이 내렸다는 소식 들었습니다
수은주의 눈금은
영하로 떨어지고
길이라는 길들
모두 끊어졌는데
오늘도 속절없이 저무는 세상
나는 날마다 혼자
원고지 속으로 들어가
새들을 키웁니다
천지에 사랑이라는 이름
소멸하고
헐벗은 나무들
벙어리로 서 있는 창 밖 풍경
언제쯤 내가 키운 새들은
빙판 같은 하늘을 가로질러
그대 사는 마을에 당도 할까요
그대 사는 마을에 당도해서
내가 아직도 살아 있음을
증명해 줄까요
◈ 가을수첩
창문을 연다
가을이
손을 흔들어 보인다
떠나는구나
나는
하늘 한 조각을 오려서
노트 갈피에 끼우고
사랑은 끝내 시리다
라고 적는다
◈ 인연설
안개꽃은
싸락눈을 연상시킵니다
그대가 싸락눈 내리는 날
거리에서
고백도 하기 전에 작별한 사랑은
어느 날 해묵은 기억의 서랍을 떠나
이 세상 어딘가에 안개꽃으로 피어나게 됩니다
아무리 방황해 보아도
겨울은 끝나지 않습니다
불면 속에서
도시는 눈보라에 함몰하고
작별은 오래도록 아물지 않는 상처가 됩니다
그러나 정말로
이 세상 모든 사랑이
꽃으로 피어나게 된다면
그대가
싸락눈 내리는 날 거리에서
고백도 하기 전에 작별한 사랑은
아무래도
안개꽃으로 피어나게 되지 않을까요
◈ 흑백사진을 보며
언젠가는 그대도 만나게 되리
적막강산
흐린 풍경 속으로
새떼들이 떠나고
정지한 벽시계의 문자판
속으로 쏟아지는 함박눈
교통이 두절되고
날이 저물고
그토록 눈부시던 추억마저
무채색으로 퇴락해 버린 자리
기진한 걸음으로 도달한
윤회의 건널목에서
그대는 비로소 알게 되리
시간은 언제나 정지해 있었는데
그대 자신만
부질없이 흐르고 있었음을
◈ 하지만 개떡 같은 세상이여
몸은 병들어
비틀거리고
글은 쓸수록 까마득한데
어느새
머리에는 하얀 무서리
하지만 개떡 같은 세상이여
까불지 마라
아직은
가운데 손가락
힘차게 뻗어
뻑큐를 먹일 기력은 남아 있으니
내 목숨 다 하는 그날까지
겨울에도
시퍼런 대숲
자라 오르고
그 위로 보름달 하나
청명하리라
◈ 흔들림
바람 불 때 흔들리는 목숨들은
흔들리는 목숨대로
그만한 그리움을 간직하고 살아가나니
양지바른 산비탈 봄날은 깊어
바람도 없는 한나절
꿀물같이 흐르는 햇살에 허리 적시고
산벌들 날개소리에도 흔들리는 싸리꽃
◈ 회상수첩(回想手帖)
그해 겨울에는 일기를 쓰지 않았어
집을 나서는 순간부터 언제나
바람이 허파 속에서
부러진 날개를 푸득거리고 있었어
생손앓이 사랑 끝에 도시는 폐쇄되고
톱질 당한 다리 절름거리며
무채색 하늘을 건너가는 가로수들
거리에는 음악소리 저물어 가고
내 목숨 마른 풀잎 하나로 허공을 떠돌았지
기다리던 함박눈은 내리지 않았어
어느새 인적이 끊어진 지하도 가판대
석간신문들은 거만한 목소리로
낭만시대의 종말을 예고하고 있었지
끝내 실종된 친구들은 돌아오지 않았어
시간의 늑골을 분지르며 질주하는 전동차
도시에는 계엄령이 선포되고
사람들은 무표정한 얼굴로 흔들리며
겨울의 중심부로 유배되고 있었지
아무도 침몰하는 세상을 욕하지 않았어
다만 흐린 밀감빛 등불 아래
어느 서정시인의 시집을 펼쳐들고
한 여자가 소리죽여 울고 있었지
문득 고백하고 싶었어
만약 이 세상에 진실로 봄이 온다면
날마다 그녀가 차리는 아침 식탁
내 영혼 푸른 채소 한 잎으로 놓이겠다고
◈ 겨울예감
텅 빈 시간의 강물 가로질러 어디로 날아가니
목덜미를 적시는 가느다란 바람에도 속절없이
허물어지는 사랑 부질없더라 갈대수풀 우거진
벌판 맨발로 절룩거리며 피 흘리던 나날도 부질없더라
목 메이게 부르고 싶던 이름 이제는 떠오르지
않고 안타까이 멀어져 가는 기러기떼 울음만
남아 청명한 서쪽 하늘 해마다 겨울은 예감부터
먼저 당도해 서슬 푸른 비수로 내 가슴을 에이더라
◈ 눈물겹게 사랑하는 마음
별이며 새며 꽃과 나비에도
모두 사람의 마음이 실려 있고
집과 길과 전신주와 쓰레기통 속에도
누군가의 마음이 실려 있다
길섶에서 자라는 보잘 것 없는 풀꽃 하나라도
부디 눈물겹게 사랑하는 마음을 갖도록 하자
그렇게 하기 위해 우리는 먼저 우리가
길섶에서 자라는
보잘 것 없는 풀꽃이 되어야 한다
외롭고 슬픈 사람을 만나면
그 사람이 바로 나 자신이라고 생각하자
온실에서 자란 꽃은 섬약하다
비록 그것이 순간적으로 사람의 마음을
즐겁게 해 줄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세상에 내놓았을 때 얼마나 오랫동안
갈 것인지는 확실히 보장할 수가 없다.
사랑... 낭만이라는 강변에 피어난 꽃이여!
인간을 사랑하라. 그리고 낭만도 사랑하라
낭만이 없는 사람은 사랑도 할 수 없다.
메마른 모래 사막에서는
한 포기의 풀잎도 자랄 수 없듯이...
◈ 먼지
어쩐지 먼 곳으로 떠나는 예감 햇빛 밝은 날
◈ 회복기
나는 이제 사랑을 믿지 않는다
망초꽃 지천으로 흔들리는 벌판
그대 모습 보이지 않고
종일토록 구름 한 장으로 머물러
기다리던 젊은 날
나는 이제 그리움도 믿지 않는다
어느 새 아름다운 언약들은
망실되고
깊어지는 손금 속으로
저물어 가는 세상
선명한 이름은
선명한 상처가 되지만
선명한 상처는
선명한 별이 되지 않는다
새들은
물기 어린 음표들을 하나씩 물고
헐벗은 내 영혼의
실삼나무를 떠난다
사랑은
봄밤에 꿈결같이 내리는 함박눈
내려서 탄식같이 스러지는
소망의 비늘이다
◈ 설야
사람들은 믿지 않으리
내가 홀로 깊은 밤에 시를 쓰며
눈이 내린다는 말 한마디
어디선가
나귀등에 몽상의 봇짐을 싣고
나그네 하나 떠나가는지
방울소리
들리는데
창을 열면 아무도 보이지 않고
함박눈만 쌓여라
숨죽인 새벽 두 시
생각나느니 그리운 이여
나는 무슨 이유로
전생의 어느 호젓한 길섶에
그대를 두고 떠나왔던가
오늘밤엔 기다리며 기다리며
간직해 둔 그대 말씀
자욱한 눈송이로 내리는데
이제 사람들은 믿지 않으리
내가 홀로 깊은 밤에 시를 쓰면
울고 싶다는 말 한마디
이미 세상은 내게서 등을 돌리고
살아온 한 생애가 부질없구나
하지만 이 시간 누구든 홀로
깨어있음으로 소중한 이여
보라 그대 외롭고 그립다던 나날 속에
저리도 자욱히 내리는 눈
아무도 걷지 않은 순백의 길 하나
그대 전생까지 닿아 있음을
◈ 기적을 기다리며
인류의 종말은 어디까지 도래했나
어둠 속에서
시뻘건 십자가들만 발악적으로
비명을 질러대는 도시
산성비가 내린다
이제 영혼이 투명한 자들은
모두 어디로 유배되어 갔을까
척박한 세월
가문 날 논바닥처럼 갈라지는 가슴으로
술을 마시면
아직도 누군가를 죽도록
사랑하고 싶다는 생각
이게 바로 기적이라는 것일까
◈ 거울 밖에서
날이 저물고
나는 실종된다
이제 누구에게 전해야 하나
현실에 절망하는 자에게만
미래에 희망이 기다리고 있다는 말을
암전도시
허파 속으로
비가 내리고
일기장 갈피마다 날갯죽지가 부러진 새들
안쓰럽게 파닥거리는 소리
누군가 나를 미행하고 있다
◈ 비에 관한 명상 수첩
1.
비는 소리부터 내린다.
흐린 세월 속으로 시간이 매몰된다.
매몰되는 시간 속에서 누군가 나지막이 울고 있다.
잠결에도 들린다.
2.
비가내리면 불면증이 재발한다.
오래도록 소중하게 간직하고 싶었던 이름일수록
종국에는 더욱 선명한 상처로 남게 된다.
비는 서랍 속의 해묵은 일기장을 적신다.
지나간 시간들을 적신다.
지나간 시간들은
아무리 간절한 그리움으로 되돌아보아도 소급되지 않는다.
시간의 맹점이다.
일체의 교신이 두절되고 재회는 무산된다.
나는 일기장을 태운다.
그러나 일기장을 태워도 그리움까지 소각되지는 않는다.
3.
비는 뼛속을 적신다.
뼈저린 그리움 때문에 죽어간 영혼들은 새가 된다.
비가 내리는 날은 새들이 보이지 않는다.
이런 날 새들은 어디에서 날개를 접고 뼈저린 그리움을 달래고 있을까.
4.
빗속에서는 시간이 정체된다.
나는 도시를 방황한다.
어디에도 출구는 보이지 않는다.
도시는 범람하는 통곡 속에서 해체된다.
폐점시간이 임박한 목로주점.
홀로 마시는 술은 독약처럼 내 영혼을 질식시킨다.
집으로 돌아와 바하의 우울한 첼로를 듣는다.
몇 번을 반복해서 들어도 날이 새지 않는다.
아무런 이유도 없이 목이 메인다.
5.
우리가 못 다한 말들이 비가 되어 내린다.
결별 끝에는 언제나 침묵이 남는다.
아무리 간절하게 소망해도 돌아갈 수 없는 전생.
나는 누구를 사랑했던가.
유배당한 영혼으로 떠도는 세속의 거리에는
예술이 암장되고 신화가 은폐된다.
물안개 자욱한 윤회의 강변 어디쯤에서
아직도 그대는 나를 기다리고 있는가.
나는 쓰라린 기억의 편린들을 간직한 채
그대로부터 더욱 멀리 떠나야 한다.
세속의 시간은 언제나 사랑의 반대 방향으로 흐르고 있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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