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금녀 시인(1939년 함경남도 영흥 출생)
시집 『큐피드의 독화살』 『저 분홍빛 손들』
『가본 적 없는 길에 서서』 『길 위에 시간을 묻다』 외
서울신문·대한일보 기자 역임.
현대시인상, 미네르바 작품상, 충청문학상 등
최금녀 시 모음
◈ 5월
여기 저기
언덕 기슭
흰 찔레꽃
거울 같은 무논에
드리운
산 그림자
산빛
들빛 속에
가라앉고 싶은
5월.
◈ 불광동
불광동은
새로 산 신발처럼 불편하고
조금씩 헐거워지고
봄에도 눈이 질퍽거렸다
발이 아플 때마다 마음이 아플 때마다 눈이 내렸다
발이 아픈 곳에서 눈이 다시 시작됐다
미끄러지는 발을 자주 씻었다
생각은 밤거리에 있었고
내 발은 눈 속에서 얼었다
불광동에서 나는 사랑 시를 썼다
◈ 녹는다
눈이 내리지 않아도 미끄러진다
미끄러지지 않으려고 톱날 같은 신발을 바꿔 신는다
눈 속에 떨어진 신문을 안고
계단을 밟아 올라오는
그의 새벽 발걸음이 미끄럽다
이 세상의 모든 염화칼슘은 눈보다 먼저 녹는다
신문들이 녹지 않은 것들은 시커멓다고 썼다
어젯밤부터 녹지 않는 눈 기사가 대부분이다
흰 벌판에서 잃어버린 길을 되찾는 작업을 한다
종일의 노동으로
살아서 꿈틀거리는 길들이
벌판을 허물며 사람들 뒤를 따라다닌다
미끄러질 사람은 미끄러져도
다니던 길을 바꾸지 않는다
미끄러지기 전에
한 번쯤은 하늘을 올려다봐야 할 텐데
계단에 엎드린 그의 발자국이
금방이라도 내게 손을 내밀듯
◈ 녹색 표지판
패스 프리
패널티 없음
제한속도 없음
어떤 배색도 끼어들 수 없음
빨간불 없는 녹색지대
◈ 어워
기침만 해도
두 손을 비비시던 할머니
몽골에도 성황당 어워가 있었다
누가 방금 다녀갔는지
어지럽게 널린 콜라병, 과자, 지폐, 술병, 짐승의 등뼈
할머닌 흰 쌀밥을 짚으로 싸 갖다 놓으셨지
초록 지평선을 끌고
문득 문득 나타나는 어워
푸르고 붉은 헝겊이
허깨비처럼
바람에 나부낄 때마다
할머니 거기 계신 듯
걸음을 재촉
고개 숙여 인사드리고
돌 하나 주워
공손하게 올려놓으면
아가, 먼 길 조심해서 가거라.
◈ 그 섬을 가슴에 묻고
물드무엔 늘 물이 가득했다
자식들이 오면 물이 모자라지 않게
옹배기로 길어다 부우시던
어머니-
한 생애, 가없는 수평선만 넘실거렸을
수심 깊은 물살을
들여다본 적이 없었다
볼 겨를이 없었다
몇 십 년 만에 무위도를 찾아간다
수평선 가득 물을 품어 안고
한평생 외로이 떠 있는
물 항아리 같은 섬,
물길을 열어놓고 기다리며
내가 놓친 수평선까지
물을 재우고 있는 섬,
어머니를 향해 떠난다.
◈ 감꼭지에 마우스를 대고
내 몸에는 어머니의 뱃속에서
나를 따내온 흔적이 감꼭지처럼 붙어 있다
내 출생의 비밀이 저장된 아이디다
몸 중심부에 고정되어
어머니의 양수 속을 떠나온 후에는
한 번도 클릭해 본 적이 없는 사이트다
사물과 나의 관계가 기우뚱거릴 때
감꼭지를 닮은 그곳에 마우스를 대고
클릭, 더블클릭을 해보고 싶다
감꼭지와 연결된 신의 영역에서
까만 눈을 반짝일 감의 씨앗들을 떠올리며
오늘도 나는 배꼽을 들여다 본다
열어볼 수 없는 아이디 하나
몸에 간직하고 이 세상에 나온 나.
◈ 야생차를 마시며
지리산 자락에서는 차 끓이는 냄새가 난다
산 깊은 곳, 물 맑은 곳에서
야생차 한 잔을 두 손으로 받아
한 모금, 다시 한 모금, 입 안이 달아오른다
눈 쌓인 토치카에서 마주친 열일곱의 눈망울과
자욱한 피보라 계곡의 스케치가 목으로 넘어간다
목에서 가슴으로 넘어간다
불길로 울먹이며 넘어간다
바람소리에 따끈한 물 부어 다시 우려내어
단번에 마시고 나면 바람은 어느새 달아나고
어디서 산새가 더 깊은 맛으로 운다
산새소리 잔에 남아 우러난다
이 겨울 지리산에서
저희들끼리 몸 비비는 바람소리 들으며
야생차 그 깊은 맛에 취해
산새와 단 둘이
한 잔 또 한잔 .
◈ 봄이 태몽을 꾸다
흙덩이가 비닐하우스 찢어진 틈새로
햇볕을 끌어당긴다
실개천의 살얼음이
스르르 옷고름을 풀어내며 뜨거워지고
길게 누운 강둑으로 잔웃음 치며
가는 손끝 내밀어 가쁘게 끌어올리는
삼월의 햇볕
터지는 웃음소리 참으며
치맛자락 속으로 스미는 분홍빛 바람
꽃물이 터지고 수수꽃다리의 살 냄새
번져 나오는 봄의 몸맵시
비닐하우스 찢어진 틈새로 봄날은
태몽을 꾸고 있다.
◈ 산비둘기 한 박자 쉬며 운다
산비둘기 울음 한 대목이
칼빛처럼 스쳐 지나간다
뼛속 깊은 곳을 에돌아
한 박자 쉬며 넘기는 소리의 휘어짐이
명창의 쉰 듯한 음색으로
가슴 속 허공을 가른다
명치가 끊어지는 듯한
한 박자의 쉬임은 슬픔을 터뜨리며
저승과 이승을 이어내고
그 여름
수심을 장대로 휘저어 보던
어미의 피울음 속으로 건너간다
사람의 세상에는
한 박자 쉬어서도 넘길 수 없는 슬픔이
번갯불처럼 명치에 꽂히지만
날짐승, 저 죄값 없는 세상에도
저승과 이승은 한 박자로 이어지며
가슴에 구멍을 내는 것일까.
◈ 내 영혼 속에 엎지른 잉크 흔적
포동화 꽃잎은
젊은 날
내 영혼 속에 엎지른
잉크 흔적 같은 것
아무도 모른다
한 다발씩 덩어리로 피어나던
스무 살의 보랏빛
빛의 그물 속에 가두어진 나를
보랏빛 그 문 열고 들어가면
부르지 못한 이름들이
다시 돌아올 수 있을까
피고 지던 꽃잎마다
삶과 죽음을 골똘히 새겨 넣던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있을까
푸르디푸른 잉크빛으로
영혼 속에 선연하게 남은
내 젊은 날의 포동화 꽃잎들.
◈ 어미의 초상
품어
굴리고
데워
녹인다
삼백 번 다듬고
삼백 날 촛불 켜도 마음 못 놓아
살점 뜯어 고이고
핏줄기로 기둥 세워
혼(魂)을 빚는 어미
어제
오늘
또 내일
무쇠 같은 날들 속으로
불을 안고 달려간다.
◈ 유전자 그래프
딸거리는 신호에
잠에서 깨면
유전자 그래프의
한 눈금이 눈을 뜬다
출렁거리는 젊음을 지나
지명(知命)을 지나 가쁜 숨 몰아쉬며
서서히 하강하는 프로젝트
0.001의 오차도 없이
삶의 남은 여백 위를 자전(自轉)하는
생명줄 위 한 점이
천천히 하향곡선을 그리고 있다
예정되지 않은
나의 안녕, 나의 평온
오늘 한 눈금이 지워지고
나는 그 옆에 쓸쓸히 눕는다.
◈ 다섯 시의 베팅
지금은 다섯 시
내 몫으로 떨어진
몇 장의 카드와 몇 개의 칩이
파장의 어둠 속에 묻히고 있는
송곳 같은 시간
햇살이 토끼뜀으로 달아나고
새들도 저무는 나뭇가지에 앉아 눈알을 굴린다
새들은 이 저녁 어디로 가는 것일까
지금은 다섯 시
손 안에서 땀이 고인다
내가 바라고 취한 숫자 모두를 내던져
나를 일으켜 세워야 할
마지막 베팅의 순간이 왔다
토끼뜀으로 달아나는 저 햇살에
내 생 어느 한 곳을 걸어
남은 카드 한 장에 베팅해야 할 것인지
손끝이 떨린다
어머니가 나를 낳을 때 흘려준 땀을
오늘 내가 흘리고 있다.
◈ 종이관
장롱 맨 윗칸 명주 보자기에 싸여 있는
종이관 속에서
여름내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났다
잠이 든 아버지의 수의에 좀이 들끓지나 않았는지,
습기가 많을 때엔 거풍을 해야 한다지만
아버지의 꿈을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명주옷 부드러움에 싸여 있는
그분의 잠을 깨우고 싶지 않았다
그런 밤이면
그분을 따라붙던 불개미들이
수의에 송글송글 구멍을 내는 꿈을 꾸었다
수리부엉이 같아진 그분의 눈과
종이관 속에서 잠을 깬 수의가 만나는 걸 보기도 했다
장롱 맨 윗칸
종이관 속
아버지의 마지막 의관을
햇볕에 널어야겠다
내 두 손으로.
◈ 구룡폭포 편지 - 금강산 記
구룡폭포에서
가슴에 품었던 엽서 한 장을
소지로 태워 올렸다
비는 계속해서 내려부었다
소리 내어 울지 못하는 내 안의 폭포도
지워지는 순간이었다
가까이 오지 않던 산과 들의 무표정도
내 탓으로 돌려놓으며
만장 나부끼며 나를 떠나가는
내용 없는 엽서 한 장도 비에 젖었다
태 묻은 곳 그려보며 50년
숨소리 들리지 않는
그 몸에 귀대어본 2박 3일
내 가슴 쓸어내리며
구룡폭포에 봉분을 만들었다
언제 다시 돌아볼 사람조차 없는
무연고 봉분을.
◈ 오래 참고 달인다
미역국을 끓인다
짠맛도 매운맛도 없는 미역국을 끓인다
중심까지 흔들려 멀미가 날 때
미역국을 끓이고 있으면
가고 없는 어머니가
내 속을 들여다보며 참견하신다
얘야, 미역국은 오래 참고 달여야 맛이 난다
나와 내 새끼의 명운을 외줄에 꿰어놓고
심심하게 미역국을 달여 한 양푼
내 앞에 밀어 놓던 그분,
김장배추 씻는 손 시린 새벽에
처음으로 심심한 맛에 눈을 떴다
오늘 아침,
짜지도 맵지도 않게 끓인 미역국 한 그릇을
그분 앞에 밀어 놓으며
어머니,
이제는 제가 오래 참고 달이는 법을 모두 익혔습니다
짜지도 맵지도 않은 심심한 세월이 여기 있어요
한 그릇 잡숴 보세요
미역국을 달이며 중얼거려 본다.
◈ 벼꽃 필 때
한여름
논둑길
더운 밥 양푼에 고봉으로 담아
무장아찌 열무김치 한 광주리, 보자기 씌워 이고
나는 듯 앞서 가던
풍속화 한 폭, 몸에 와 감긴다
가난 같은 찰거머리 뚝뚝 떼어
패댕이치며 모여 앉던
구리빛 얼굴들 그리워라
밀짚모자 그늘 아래
소망처럼 부푼 밥숟가락
한 볼때기 터지도록 눈물겹던 새참
흰 치마폭 기세 좋게 휘날리던
시어머니의 영토
벼꽃 피어도 볼 수 없는 얼굴들.
◈ 지리산으로 간다
가끔씩 그 여자를 찾아간다
서방을 맞이하듯
갓 떠온 생수로 따뜻이 밥을 지어놓아
사철 내가 그리워하는 여자
밥상 모서리로 뻐꾸기 소리 불러 모으고
칠불사 운판소리와 산나물과
솔가지 냄새로 장단을 쳐주는 여자
이롭지 않은 옛일은 안개와 구름으로
가리워 내색 않는
아무도 보고 싶지 않은 날에는
그 여자를 찾아간다
나무들 얼굴을 씻어놓고
노고단 안개길을 햇살로 씻어 내리며
내 젖은 몸의 물기를 말리울 채비를 하는
그 몸에 붙여 키우던 당귀, 도라지, 야생차도
마련해 놓는 어머니 같은 여자
그 여자가 그리운 날에는
먼 길 다섯 시간을 단걸음에 달려간다.
◈ 산 씻김
무위로 떠 있는 햇볕
부는 바람조차 조신한
아직도 강화섬은 청정하다
아버지 힘없는 수저 위에
갓 떠온 바닷물 한 토막을 놓아 드리면
그의 입 속에서 출렁이는 바다
건져 올린 해삼, 멍게 ,광어의 흰 뱃살이
상에 올라 몸을 뒤집는다
수평선 어디선가
둥둥둥 북소리 울어
흰 무명 한 필 그의 길을 열고 있다
바닷물이 슬픔으로 깊어지고
무위의 햇볕이 그 몸을 감싸안을 때
바람은 뒷길로 빠진다
저승꽃 곱게 핀
아버지를 모시고 산 씻김을 한다
매주 한 번
나는 아버지를 모시고 강화섬으로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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