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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詩 같은 삶을 위하여
☞ 문학의 뜨락

정완영 시조 모음

by 石右 尹明相 2022. 7. 8.

 

정완영 시조시인(1919~2016. 경북 김천). 호는 백수(白水).

1960년 국제신보 신춘문예 '해바라기'로 등단,

1962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조시인협회 회장 역임.

김천시문학상, 은관문화훈장, 만해시문학상 등 수상

저서 [산이 나를 따라와서], [꽃가지를 흔들 듯이], [난보다 푸른 돌] 등 다수

   

정완영 시조 모음

   

조국

 

행여나 다칠세라 너를 안고 줄 고르면

떨리는 열 손가락 마디마디 에인 사랑

손닿자 애절히 우는 서러운 내 가얏고여

 

둥기둥 줄이 울면 초가삼간 달이 뜨고

흐느껴 목메이면 꽃잎도 떨리는데

푸른 물 흐르는 정에 눈물 비친 흰 옷자락

 

통곡도 다 못하여 하늘은 멍들어도

피맺힌 열두 줄은 굽이굽이 애정인데

청산아 왜 말이 없이 학처럼만 여위느냐

 

   

풀잎과 바람

 

나는 풀잎이 좋아, 풀잎 같은 친구 좋아

바람하고 엉켰다가 풀 줄 아는 풀잎처럼

헤질 때 또 만나자고 손 흔드는 친구 좋아.

 

나는 바람이 좋아, 바람 같은 친구 좋아

풀잎하고 헤졌다가 되찾아 온 바람처럼

만나면 얼싸안는 바람, 바람 같은 친구 좋아.

 

 

애모

 

서리 까마귀 울고 간 북천은 아득하고

수척한 산과 들은 네 생각에 잠겼는데

내 마음 나뭇가지에 깃사린 새 한마리

 

고독이 연륜마냥 감겨오는 둘레가에

국화 향기 말라 시절은 저물고

오늘은 어느 우물가 고달픔을 긷는가

 

일찌기 너와 더불어 푸르렀던 나의 산하

애석한 날과 달이 낙엽지는 영마루에

불러도 대답없어라 흘러만 간 강물이여

 

 

들녘에 서서

 

어머님 풀어 논 앞섭 그 허망한 가슴 저편

계절은 머물다 가고 들녘은 누워 있다

일월이 두고 간 광음 그 허허로움 충만 위에.

 

회억(懷億)은 노을에 타고 세월은 강물에 멀다

꽃은 떨어지고 열매는 묻혔느니

우리들 또 빈 벌에 서서 무슨 꿈을 경작하리.

 

더러는 마음을 두고 더러는 길을 열어

때로는 슬픔이오고 때로는 한이 가도

지자(智者)여 증거(證據)할 억년의 그 후일이 뭐겠는가.

 

탄식하라 소망이여 눈 뜬 씨앗 뼈아프다

성근 숲 빛나는 별 광음은 빗질을 하네

내일은 홀로 나그네 수달로나 갈 것이다.

 

 

아침 한 때

 

참 희한도 한 일이다 이도 가을의 몸짓일까

궁전(宮殿)만한 잠을 누리어 아침 꿈이 깊었더니

그 무슨 수런거림에 놀라 잠을 깨었다.

 

한 그릇 세숫물에도 가을은 와 닿는 건데

지난 밤 귀를 적시며 영()을 넘던 서리하며

이 아침 쏟어져 오는 저 무리새 울음소리.

 

창을 열고 물 뿌리고 소제하고 뜰에 나리니

무너질 듯 무너질 듯이 물이 들어 장중한 나무

그 너머 우람한 하늘이 빛을 쌓고 있어라.

 

가을새 울음소리는 듣다 문듯 놓치는 것

저 동녘 원초(原初)의 불을 이끌어다 올려놓고

어느 새 먼 산 숲으로 자리 뜨고 없구나.

 

 

가을빛 염주

 

황악산 산주山主가 보내준 진보리수 염주 한 줄

삼십 년 세월이 흘러도 날 샌 줄을 모르더니

오늘은 가을빛 한 자락 눈을 뜨고 앉았어라.

 

 

감나무 속잎 피는 날

 

빗발도 스쳐가고 바람결도 잠이 들고

추녀 끝 풍경소리도 엿듣고만 있습니다

오늘은 우리 집 감나무 속잎 피는 날입니다.

 

 

감을 따 내리며

 

저토록 푸른 하늘이 어디에다 가마 걸고

이토록 붉은 열매를 주저리로 구워 내렸나

여든 해 이 땅에 살아도 가마터를 나는 몰라.

  

 

호박꽃

 

호박꽃을 들여다보면 벌 한 마리 놀고 있다

호박꽃을 들여다보면 초가삼간이 살고 있고

경상도 어느 산마을 노오란 등불이 타고 있다.

 

 

홍도-홍도기행시

 

어느 고독의 신이 이 수승殊勝을 빚었던가

동백 잔홍殘紅에 석양빛 홀로 타고

바위 끝 해조海鳥 한 마리 날줄조차 잊었다.

 

 

황악산 쇠북소리

 

일흔 고개, 여든 고개, 다 넘어선 아흔 고개

세월도 털이 빠지면 가벼울 줄 알았는데

황악산 쇠북소리는 굴릴수록 더 무겁다.

 

 

강 건너 마을

 

거리마다 밀리는 사람들 얼굴마다 이역異域 같고

암암暗暗히 묻히는 청산, 강 건너 마을 고향 같네

정 주고 눈물 준 이들 다 건너가 사는 마을.

 

 

개구리 우는 마을

 

논에는 물이 가득 물속에는 하늘이 가득

우리 마을 개구리 소리 개굴개굴 모 심는다

구름도 물속에 내려와 포기 포기 모 심는다.

 

 

개구리 울음소리

 

배꽃이 흐드러지게 봄을 웃고 떠나간 후

배꽃 같은 개구리 울음이 온 골 안을 흔듭니다

배밭도 논밭도 귀가 먹먹 마을이 온통 떠나갑니다.

 

 

겨울나무 3

 

조금은 수척해 있어야 겨울새가 앉는 거래

조금은 비워두어야 눈발이 와 닿는 거래

아니래 가득해 있어야 동풍冬風이 와 우는 거래.

 

 

겨울나무 10

 

긴 겨울 보내는 것도 고목나무 잔가지고

새 봄빛 부르는 것도 고목나무 잔가지다

가는() 비 굵은 눈 한세월 얽은 것도 잔가지다.

 

 

감꽃

 

바람 한 점 없는 날에, 보는 이도 없는 날에

푸른 산 뻐꾸기 울고, 감꽃 하나 떨어진다

감꽃만 떨어져 누워도 온 세상은 환! 하다.

 

울고 있는 뻐꾸기에게, 떨어져 누운 감꽃에게

이 세상 한 복판이 어디냐고 물었더니

여기가 그 자리라며, 감꽃 둘레 환! 하다.

 

 

내 손녀 연정에게

 

내 손녀 연정이가 느닷없이 나를 보고

산 좋고 물 좋은 마을에 할아버지 가서 살란다

그래야 휴가철이면 찾아 갈 집 저도 있단다.

 

그렇구나, 그리운 네 꿈도 산 너머에 살고 있구나

들찔레 새순 오르듯 하얀 구름 오르는 날

뻐꾸기 우는 마을에 나도 가서 살고 싶단다.

 

 

팽이의 하늘

 

석자 꽃가지에 앉아도 달팽이는 하늘 만지고

86백 히말라야 상상봉에 올라서도

하늘이 거기 없다고 사람들은 탄식하네.

 

그렇다면 한 길도 못 되는 꽃가지가 더 높은가

구름도 디디고 올라선 히말라야가 더 높은가

곰곰이 생각해 보자, 달팽이를 만나 보자.

 

 

바다 앞에서

 

아무리 바다가 넓어도 돛배 하나 없어 봐라

갈매기 불타는 저녁놀 고깃배가 없어 봐라

그것이 바다겠는가 물만 가득 사막이지.

 

아무리 바다가 멀어도 저 항구가 없어 봐라

흔든 손 흔드는 깃발 뱃고동이 없어 봐라

그것이 바다겠는가 파도뿐인 물굽이지.

 

 

시암詩菴의 봄

 

내가 사는 초초艸艸 시암詩菴은 감나무가 일곱 그루

여릿여릿 피는 속잎이 청이 속눈물이라면

햇살은 공양미 삼백 석 지천으로 쏟아진다.

 

옷고름 풀어 논 강물 열두 대문 열고 선 산

세월을 뺑덕어미라 날 속이고 달아나고

심봉사 지팡이 더듬듯 더듬더듬 봄이 또 온다.

 

 

엄마 목소리

 

보리밭 건너오는 봄바람이 더 환하냐

징검다리 건너오는 시냇물이 더 환하냐

아니다 엄마 목소리 목소리가 더 환하다.

 

혼자 핀 살구나무 꽃그늘이 더 환하냐

눈 감고도 찾아드는 골목길이 더 환하냐

아니다 엄마 목소리 그 목소리 더 환하다.

 

 

적막한 봄

 

산골짝 외딴 집에 복사꽃 혼자 핀다

사람은 집 비우고, 물소리도 골 비우고

구름도 제풀에 지쳐 오도 가도 못한다.

 

봄날이 하도 고아 복사꽃 눈 멀겠다

저러다 저 꽃 지면 산도 골도 몸져눕고

꽃보다 어여쁜 적막을 누가 지고 갈 건가.

 

 

전등사傳燈寺

 

찾아가 반만 본 산 돌아와서 다 뵙디다

눈에는 낡았던 절 가슴에는 불입디다

뜨는 눈 감은 사이가 부침浮沈인가 봅디다.

 

섬은 서해西海 서녘 가뭇 가는 돛배였소

산 숲은 높이 걸린 바람 받은 돛이였소

절이야 애당초 그 배에 실린 꿈이었다오.

 

 

풀잎과 바람

 

나는 풀잎이 좋아, 풀잎 같은 친구 좋아

바람하고 엉켰다가 풀 줄 아는 풀잎처럼

헤질 때 또 만나자고 손 흔드는 친구 좋아.

 

나는 바람이 좋아, 바람 같은 친구 좋아

풀잎하고 헤졌다가 되찾아온 바람처럼

만나면 얼싸안는 바람 바람 같은 친구 좋아.

 

 

풍경風磬에게

 

아무도 없는 고향, 텅 비워 둔 내 고향집

너랑 같이 내려가서 나랑 같이 살자하고

달래고 타일러주려고 풍경 한 좌를 사 들었다

 

너는 구원의 향기, 밤하늘에 먹을 갈고

너는 태초의 별빛 먼 성좌星座에 불을 달고

숙조宿鳥! 꿈 깊은 밤이면 내 가슴에 잠 들거라.

 

 

 

그것은 아무래도 태양의 권속은 아니다

두메산골 긴긴 밤을 달이 가다 머문 자리

그 둘레 달빛이 실려 꿈으로나 익은 거다.

 

눈물로도 사랑으로도 다 못 달랠 회향懷鄕의 길목

산과 들 적시며 오는 핏빛 노을 다 마시고

돌담 위 시월 상천上天을 등불로나 밝힌 거다.

 

초가집 까만 지붕 위 까마귀 서리를 날리고

한 톨 감 외로이 타는 한국 천년의 시장기여

세월도 팔짱을 끼고 정으로나 가는 거다.

 

 

경포대 달밤

 

동해에 오른 달은 동해 바다 켜들었고

대관령 가는 달은 대관령을 켜들었다

경포대 잠 못 든 달이야 내 술잔을 켜들고

 

 

고가故家

 

산도 너무 높으면 너무 큰 상받음 같고

물도 너무 깊으면 이내 지쳐 돌아 왔네

낮은 산 낮은 물 내 고향 낮은 밥상 같은 옛집.

 

 

고목장춘

 

어린 제 늙었던 나무 늙어 와도 오히려 푸르네

소년은 간 곳 없건만 풍상 속에 지켜 선 나무

나무는 그 때 그 하늘 조용하게 펴 들었다

 

 

고추장이 쫓던 소년

 

세월도 한 구비만 돌아들면 옛터일까

고추장이 쫓던 소년 눈망울에 젖은 구름

애호박 닮았던 소녀가 다시 한 번 보고 싶다.

 

 

고향은 없고

 

고향에 내려가니 고향은 거기 없고

고향에서 돌아오니 고향은 거기 있고

흑염소 울음소리만 내가 몰고 왔네요.

 

 

고향 행 열차

 

지난 추석에는 형님 찾아 고향 갔네

형님은 석굴암 대불 실려 가는 난 뜬구름

남행 차 기적소리가 풀잎처럼 흔들렸네.

 

 

구룡폭포에서-금강산 기행시초

 

펼쳐든 불 단풍에 떨쳐입은 흰 구름에

유산가遊山歌 한마당이 질펀하게 쏟아진다

구천에 매달린 물줄기 만 이천 봉 흔든다.

 

 

구름 산방

 

날아온 우편물들 낙엽처럼 널려있고

허름한 옷가지들 구름처럼 걸려있고

이따금 전화벨 소리가 산과山果처럼 떨어진다.

 

 

관악산 봄빛

 

하늘이 넓다 해도 아랫마을 윗말 사이

해님이 밝다 해도 갓 돋아난 민들레꽃

관악산 넘는 봄빛은 만 리보다 더 먼데.

 

 

까치밥 등불

 

담배 한 대 피워 물고 옛 언덕에 올라서니

저기가 고향인가 세월이란 가지 끝에

남겨둔 까치밥 같은 등불 하나 타고 있다.

 

 

꽃가지를 흔들 듯이

 

까치가 깍깍 울어야 아침 햇살이 몰려들고

꽃가지를 흔들어야 하늘빛이 살아나듯이

엄마가 빨래를 헹궈야 개울물이 환히 열린다.

 

 

꽃과 바다-제주의 봄

 

유채꽃이 바다에 들면 한바다가 꽃밭 되고

바닷물이 꽃밭에 오르면 유채밭도 바다일세

이 저승 따로 없어라 꽃과 물이 한세상.

 

 

꽃의 적막

 

이 세상 오기 전에 꽃은 어디 살았을까

낙화로 지고 말면 어디 가서 꽃은 살까

꽃보다 적막한 저 세상 별자리는 불러줄까.

 

 

나한전의 봄

 

황악산 천년 직지사 오신 봄이 상기 어려

산수유 눈 못 뜨고 물소리도 잠겼는데

나한전 동불童佛님들만 목련처럼 펴올랐다.

 

 

낙산사洛山寺 풍경소리

 

풍경도 낙산사 풍경은 태를 지어 우는 걸까

솔바람 닿을 제면 난향으로 흔들리고

먼 동해 썰물 소리엔 방생하는 풍경소리.

 

 

보다 푸른 돌

 

옛날엔 칼보다 더 푸른 난을 내가 심었더니

이제는 깨워도 잠 깊은 너 돌이나 만져본다

천지간 어여쁜 물소리 새소리를 만져본다.

 

  

내 고향 징검다리

 

징검다리 건너가면 저 세상이 거기 있고

징검다리 건너오면 이 세상도 거기 있고

그 환한 눈물의 이치가 냇물 속에 흘렀었네.

 

 

내 마음이 있습니다

 

저무는 먼 숲 속에 싸락눈이 내리듯이

영혼의 허기진 골에 일모日暮는 쌓이는데

보채는 저녁놀 같은 내 외롬이 있습니다.

 

피 묻은 발자국을 두고 가는 낙엽들의

무덤으로 가는 길은 등불만한 사랑으로

오늘도 밝혀야 하는 내 설움이 있습니다.

 

한 오리 실바람에도 흔들리는 물결 속에

차고도 단단한 물먹은 차돌처럼

말없이 지니고 사는 내 마음이 있습니다.

 

 

모과

 

시골서 보내온 모과 울퉁불퉁 늙은 모과

서리 묻은 달 같은 것이 광주리에 앉아있다

타고난 모양새대로 서너 개나 앉아있다.

 

시골서 보내온 모과 우리 형님 닮은 모과

주름진 고향 산처럼 근심스레 앉아있다

먼 마을 개 짖는 소리 그 소리로 앉아있다.

 

시골서 보내온 모과 등불처럼 타는 모과

어느 날 비라도 젖어 혼자 들어오는 밤은

수수한 바람소리로 온 방안에 앉아있다.

 

 

부자상父子像

 

사흘 와 계시다가 말없이 돌아가시는

아버님 모시 두루막 빛바랜 흰 자락이

웬일로 제 가슴 속에 눈물로만 스밉니까.

 

어스름 짙어오는 아버님 여일餘日 위에

꽃으로 비춰드릴 제 마음 없아오매

생각은 무지개 되어 고향 길을 덮습니다.

 

손 내밀면 잡혀질 듯한 어린제 시절이온데

할아버님 닮아가는 아버님의 모습 뒤에

저 또한 그 날 그 때의 아버님을 닮습니다.

 

 

세월이 무엇입니까

 

세월이 무엇입니까 젖은 모래성입니다

아니면 손사래로 빠져 나간 꿈입니까

이 달도 마지막 하루가 촛불처럼 다 탑니다.

 

하루 가면 하루만큼의 이승은 멀어지고

어제 죽어 묻힌 벗이나 구름결을 생각하며

뻐꾸기 울음소리가 산 빛 엮어 내립니다.

 

시름이 가슴에 고이면 소가 된다 하옵기에

산다는 이치 하나로 한세월을 흘려놓고

망초꽃 흩어진 사연을 강기슭에 줍습니다.

 

 

을숙도乙淑島

 

세월도 낙동강 따라 칠백리 길 흘러와서

마지막 바다 가까운 하구에선 지쳤던가

을숙도 갈대밭 베고 질펀하게 누워있데.

 

그래서 목로주점엔 대낮에도 등을 달고

흔들리는 흰 술 한 잔을 낙일落日앞에 받아 놓면

갈매기 울음소리가 술잔에 와 떨어지데.

 

백발이 갈대처럼 서걱이는 노사공老沙工

강물만 강이 아니라 하루해도 강이라며

김해金海벌 막막히 저무는 또 하나의 강을 보데.

 

 

조그만 날의 곡조曲調

 

곰곰이 불씨를 모아 상기 먼 봄을 가늠하며

간구한 미염米鹽의 길에 옷깃 여며 사노라면

이 철도 회포라리까, 절로 겨운 이 마음.

 

우수절雨水節 해동 빗소리 종일을 타이르듯이

진실로 조그만 날에 흐느끼는 내 곡조는

개울가 실버들 가지 물 오르듯 합니다.

 

봄이야 꽃들도 많아 차라리 적막하지만

그래도 눈여겨보면 눈물도 속잎 피는데

탓 없이 고향 길 가듯 또 한 봄을 가리까.

 

 

조손祖孫의 봄

 

새벽마다 내 방을 문안해 성가시는 어린 손주

흡사 그 자벌레 닮아 밝은 꿈을 접고 펴누나

할아빈 굽은 연륜의 고목처럼 잠이 설고.

 

개나리 빛 노오란 웃음을 전신으로 흘리면서

삼삼 굽 자질을 하는 네 재롱을 보노라면

천 리 밖 고향 숲 같은 흰 터럭도 속잎 날까.

 

이 봄도 할아빈 늙고 아가 자라 거북 되면

어느 날 창랑滄浪 헤치며 이끌고 올 장강수長江水

낙일落日도 내 날의 낙일落日은 네가 업어 오겠고나.

 

 

추청秋晴

 

필시 무슨 언약이 있기라도 한가부다

산자락 강 자락들이 비단 필을 서로 펼쳐

서로들 눈이 부시어 눈 못 뜨고 섰나부다.

 

산 너머 어는 산마을, 그 덕 너머 어느 분교分校

그 마을 잔칫날 같은 운동회 날 갈채 같은

그 무슨 자지러진 일 세상에는 있나부다.

 

평생에 편지 한 장을 써 본 일이 없다던 너

꽃씨 같은 사연을 받아 봉지 지어 온 걸 봐도

천지에 귓속 이야기 저자라도 섰나부다.

 

 

과 바람

 

옛날 우리 마을에는 동북 밖에 연밭 두고

너울너울 푸른 연잎을 바람결에 실어 두고

마치 그 눈 푸른 자손들 노니는 듯 지켜봤었다.

 

연밭에 연잎이 실리면 연이 들와왔다 하고

연밭에 연이 삭으면 연이 떠나갔다 하며

세월도 인심의 영측(盈仄)도 연밭으로 점쳤었다.

 

더러는 채반 만하고 더러는 맷방석 만한

직지사 인경소리가 바람 타고 날아 와서

연밭에 연잎이 되어 앉는 것도 나는 봤느니.

 

훗날 석굴암 대불이 가부좌하고 앉아

먼 수평 넘는 돛배가 이 저승의 삼생(三生)이나

동해 저 푸른 연잎을 접는 것도 나는 봤느니.

 

설사 진흙 바닥에 뿌리 박고 산다 해도

우리들 얻는 백발도 연잎이라 생각하며

바람에 인경소리를 실어 봄즉 하잖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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