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동화 시인(1949년~ ), 경북 구미시.
영남대학교 국어과 졸업.
1978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시조 당선.
시집 『낙화암』 『낮은 물소리』 『영원을 꿈꾸다』 『나 하나 꽃 피어』 등
경주교회 담임목사 역임.
이호우시조문학상, 유심작품상 등 수상.
조동화 시. 시조 모음
▶ 낙화암
죽음보다 깊은 적막이
거기 엉켜 있더이다.
꽃 피 고 꽃 진 자리
꽃대공만 남아 있듯
강 따라 다 흘러간 자리
바위 우뚝 섰더이다.
눈물로,
그 많은 피로
얼룩졌던 바위서리
천년이 흘러가고
또 천년이 흐르는데
몸 가도 넋 들은 사무쳐
진달래로 피더이다.
그날 끊어진 왕조의
단면인 양 슬픈 벼랑
다만 함묵(含默)으로는
못 다스릴 한이기에
고란사 낡은 쇠북도
피를 쏟아 울더이다.
▶ 조화(調和)의 힘
봄이 오면 묵은 나뭇가지에서 일제히 새순이 돋아나
꼬깃꼬깃 접어온 잎들을 펼치며
한 해의 새 가지들을 이룬다
이어서 여름을 지나 가을이 저물 때까지
꽃피우고 열매 키워 익히느라
하루도 한가한 날이 없는 새 가지들,
낯나는 일과 영광이
모두 그들의 몫임은 참으로 당연한 일이다
그렇다고 묵은 가지들이 뒷방늙은이처럼
죽을 날만 기다리는 퇴물(退物)은 아니다
새 가지들의 그늘에 가려 묵묵히 살아가지만
오히려 벽 속에 숨어 건물을 떠받치는 철골들처럼
언제나 보이지 않는 데서
쉴 새 없이 하늘거리는 새 가지들을 든든히 붙잡고 있다
무슨 대가도 바라지 않고 한 마디 불평도 없이
죽기까지 자식들의 밑거름이 되는 어버이들같이
밤낮으로 깨어 새 가지들을 붙들어주고 있다
나무들이 곧잘 거목이 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 나 하나 꽃 피어
나 하나 꽃 피어
풀밭이 달라지겠냐고
말하지 말아라
네가 꽃 피고 나도 꽃 피면
결국 풀밭이 온통
꽃밭이 되는 것 아니겠느냐
나 하나 물들어
산이 달라지겠냐고도
말하지 말아라
내가 물들고 너도 물들면
결국 온 산이 활활
타오르는 것 아니겠느냐
그랬다지요
▶ 강은 그림자가 없다
해 아래서는
크든 작든 저마다의 푼수만큼
검은 그늘 한 자락씩 나누어
제 발목에 꿰찰 수밖에 없지만
세상의 가장 낮은 곳에 누워
온갖 물상物象들의 허물 가슴으로 거두며
더욱 낮은 바다 향해
홀로 제 아픈 등 밀고 가는 강은
그림자가 없다
▶ 길 위의 삶
나는 누구이며 우리는 누구인가
또 한번 대이동을 시작하는 누 떼들
거대한 소용돌이 속 얼룩말도 휩쓸린다
팽팽히 당겨진 채 돌아가는 먹이사슬
흡사 빚쟁이 같은 치타며 또 사자며
강에선 숨어 기다리는 악어들도 먹여야 한다
무엇이 한 방향으로 우리를 내모는가
숨 가쁜 삶과 죽음 공존하는 대초원
누구도 묻지 않는다 그냥 함께 달릴 뿐…
끊어지지 않는 길은 언제나 곡선이다
한 굽이 돌아가면 이어지는 또 한 굽이
그 위에 목숨이 있다 건너야 할 강이 있다
▶ 목련
잎 다 진 야윈 손에
몇 자루 붓을 들고
겨울 먼 풍설(風雪) 속으로
아득히 떠났던 너
사월의 그 하늘 밑을 잊지 않고 왔구나
마른 붓끝에다
엷은 먹물 듬뿍 찍어
적적한 세상 하나 문득 환히 밝혀 놓고
잎들을 그리기 전에
잠시 손을 멈춘 한때
▶ 시월
봄은 낮은 곳부터 조금씩 차오르더니
가을은 꼭대기부터 서서히 내려온다
숨가쁜 중턱을 지나
마침내는 발치까지
산은 산대로 하늘은 또 하늘대로
흡사 심연처럼 깊어만 가는 세상
생각의 추를 내려도
끝이 닿지 않는다
▶ 가을 속으로 떠나다
한기가 척후병처럼 숨어드는 자정 무렵
거대한 안개 군단이 마을을 엄습한다
여름과 동서남북을 순식간에 지워 버리며
결국 또 이렇게 떠날 때가 된 것이다
적당한 게으름과 무기력의 포구로부터
더 깊은 우울과 침잠, 더 낮은 나를 찾아
서둘러 거룻배에 올라 밤새 노를 저어간다
아득히 열려오는 내 안의 먼 먼 바다
눈부신 벌레 소리가 고물 가득 쌓인다
▶ 월명스님의 피리소리
목소리 가운데
유달리 반짝이는 목소리를
구슬 같은 목소리라 하듯
월명 스님의 피리소리
그것은 분명 소리는 소리였지만
먼데서 보면
영락없이 눈이 부신 빛이었던가 봅니다
먼저 간 누이동생 생각에
자 남짓 젓대에
저승까지 사무치는
그리움을 싣는 밤
하늘의 달,
눈멀어 눈멀어
가지 않고
아주 멈추었던 것을 보면
월명리
월명 스님의 피리소리,
그것은
구공구천에서는
정말 앞이 캄캄한 섬광들의 꿰미였던가 봅니다.
▶ 나무의 정체
장작을 태워보고 알았다
나이테는
한 겹 한 겹 쌓인 세월이 아니라
켜켜이 잠재운 불이었음을,
온몸의 잎들을 집열판처럼 펴서
해해연년 봄부터 가을까지
그가 열렬히 흠모한 태양이었음을,
마침내 땅에 묶인 저주를 풀고
하늘 향해 회오리치는
자유의 혼이었음을
장작을 태워보고서야 처음 알았다
▶ 흰 동백
낮 달,
사금파리,
물새 눈부신 죽지
절벽에 부서지는 파도의 큰 눈사태
천 년 전 계림을 적신
이차돈의 핏자국
▶ 몸
일흔 언저리인데 관절들이 삐거덕거린다
위쪽을 바로잡으면 아래쪽이 틀어지고
오른쪽 받쳐주는 순간 왼쪽이 또 기운다
기계라면 벌써 몇 번 새 것으로 바꿨으련만
혼을 담은 이 그릇 부품마저 아예 없다
기워도 이내 미어지고 때워 봐야 금이 가는
아무나 넘볼 수 있는 봉우리가 아니거니
함부로 백세시대라 들먹이지 말 일이다
내려와! 준엄한 한 마디에 벗고 떠날 이 남루(襤樓)
▶시론
가령 화폭에다 산 하나를 담는다 할 때
그 뉘도 모든 것을 다 옮길 순 없다
이것은 턱없이 작고 저는 너무 크므로.
그러나 그렇더라도 요량 있는 화가라면
필경은 어렵잖아 한 법을 떠올리리
고삐에 우람한 황소 이끌리는 그런 이치!
하여 몇 개의 선, 얼마간의 여백으로도
살아 숨 쉬는 산 홀연히 옮겨 오고
물소리, 솔바람 소리는 덤으로 얹혀서 온다.
▶ 洛東江
1. 어린 시절 나는 엄마의 등에 업혀 처음으로 洛東江을 보았다.
冬栢기름 냄새 향긋한 엄마의 어깨 너머 멀리 아득히 보이던 비취빛 강물…
그러나 미처 그것이 江인 줄을 모르고,
하늘이 제 많은 자락 중에 유독 짙푸른 한 자락을 내려,
山과 山 사이로 천천히 끌어가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2. 江을 사이에 두고 숨 가쁜 戰爭이 오가던 그 여름,
아버지는 먼 길을 떠나셨지.
江을 건너서 마른 黃土,
먼지 이는 산굽이길을 뚜벅뚜벅 아버지는 멀어져 가셨지.
3. 학교가 파하고 나면 나는 홀로 강둑에 앉아
종무소식終無消息인 아버지를 그리며 종이배를 접어 띄우곤 하였다.
물결을 따라 물결 앞세우고 따라갈 수 없는 먼 곳으로
남실남실 사라져 가던 하얀 종이배…
아버지는 보셨는지 몰라,
그리움을 실어, 내 少年을 실어 날마다 띄워 보낸 그 많은 종이배를.
4. 깊은 밤 어머니는 곧잘 江으로 가셨다.
아버지는 마지막 뒷모습을 보셨던 것일까.
달빛에 젖어 빛나던 어머니의 눈물.
꼭 어디론가 훌쩍 떠나가실 것만 같은 豫感에 몰래
어머니의 뒤를 밟아온 나는 또한 소리 없이 울었다.
무성한 갈대숲에 몸을 숨긴 채.
5. 오래 응석받이 손주의 든든한 울이셨던 할아버지,
당신께서는 生前에 즐겨 자주 蘭을 치셨지.
눈부신 畵宣紙 위에 늘 알맞게 휘어져 있던 墨蘭 이파리.
이제 나는 알겠네.
흰 달빛 아래 아득한 모랫벌이 한 장 畵宣紙로 깔리는 이 밤,
비로소 고개 끄덕이며 알아보겠네.
먼 산굽이 휘어져 돌아가는 墨蘭 이파리 하나.
한평생 휘어지고 또 휘어져서
마침내 아주 강물 위에 포개진 할아버지 그 墨蘭을.
6. 아침나절,
나는 어린것의 손을 잡고 산 위에 올라 落東江을 보았다.
첩첩한 산기슭을 돌고 돌아서 아스라이 굽이치는 純銀빛 먼 강물.
흰 두루마기 입은 할아버지 뒤를 素服한 어머니도 따라가고 있었다.
옹, 얼마나 아프고 소중한 因緣의 모습이랴!
나는 문득 어린것을 무등태우고 오래오래 먼 강물 가리켜 보였다.
▶ 강가에 앉아
잔잔한 강물 위 허공에 못 박힌 듯
물총새 문득 날아와 정지비행을 한다
팽팽한 일촉즉발의 숨 막히는 한순간
표적이 잡히자마자 온몸을 내리꽂아
홀연히 그 부리로 잡아채는 은비녀,
비린 살 마구 파닥이는 저 눈부신 화두(話頭)여!
▶ 참깨꽃
보리를 걷어내고
그루터기에 바로 참깨를 심었다.
씨앗이 눈을 뜨면
잡초들도 일제히 함께 올라와
한눈만 팔아도 벌써 풀밭이었지.
할매와 나는 둘이서
뙤약볕 쏟아지는 여름 한철을
온통 밭에서 살았다.
바랭이, 쇠비름, 방동사니 들을 뽑으며
긴 긴 실구리처럼 풀리는
할매의 서러운 내력을 따라가다 보면
칠월은 금방 하순으로 접어들어
어느새 내 무릎만큼의 높이로
황토밭 가득 일던 하얀 참깨꽃.
때맞춰 온갖 벌들도 날아들어
산밭은 온종일 잔칫집만 같았지.
바람에 쓰러지지 말라고
뿌리께에 수북이 북을 돋우시며
참깨꽃이 참 사랑스럽다던 할매,
그때는 미처 몰랐다.
할매의 작은 행복도
고달프기만 하던 농사일도
돌아보면 이렇게 모두 그리움일 줄을.
▶ 시
흰 하늘 배경으로 선 겨울 대추나무처럼
때로는 시원스레 행간을 비워 두자
낮에는 간간이 새 날아와 앉고
밤이면 앓는 별도 몇 쉬었다 가게
▶ 2월
겨울 아흔아홉 굽이 멀기만 하니
하늘도 땅도 두루 심심하신가
어제는 들녘 자우룩이 눈발 날리고
오늘은 어둔 뜰 한쪽 매화가 피고
▶ 고대적 시간
자귀나무
잎 열면
아침밥 때
자귀나무
잎 오므리면
저녁밥 때
▶ 봄 바다에서
절벽에서 바다를 향해 휘어져
환히 꽃핀 복숭아나무가 한 그루
결테는 막 연초록 새순을 뽑아 올린
물오리나무가 또 한 그루
그 밝고 깨끗한 꽃까지 옆가지 위에
봄 바다와 먼 섬들이 송두리째 실렸다
살랑살랑 바람이 불어올 때마다
가지들은 연신 흔들리지만
한 방울도 엎질러지지 않는 바다
여린 가지들의 수고를 덜어주기라도 하듯
이따금씩 통통배 한 척이 가로질러
풍경의 위쪽 절반을 떼어가곤 하였다
▶ 파적破寂
10시쯤이면 들르곤 하던 우편배달부도 오지 않고
수다쟁이 대숲마저 기척 없는 봄날,
새삼 화첩을 꺼내어
김득신의 파적도를 보다
벌써 200년이 좋이 넘었건만
붙잡힌 한 순간이
볼 때마다
그물로 막 건져 올린 물고기만큼이나 싱싱하다
고양이 입에 물린 병아리의 처절한 비명소리
날개를 엉거주춤 벌린 암탉의 다급한 울부짖음,
자리를 짜다말고 용수철처럼 튀어 일어나
툇마루로 나서는 두 양주의 고함소리!
어느새 나의 적막은
바위에 막 떨어뜨린 놋양푼이 된다.
▶ 꿈꾸는 숲
시월의 숲은 꿈을 꾼다
지난 계절
초록 일색의 무미(無味)를
외곬의 청솔들에나 주어버리고
나무들은 모두 꿈을 꾸기에 바쁘다
붉나무는 붉나무대로,
박쥐나무는 박쥐나무대로,
가막살나무는 가막살나무대로,
쉬나무, 노각나무, 대팻집나무는
쉬나무, 노각나무, 대팻집나무대로,
복자기, 화살나무, 참빗살나무는
복자기, 화살나무, 참빗살나무대로
나무들은 익숙하게
저마다의 꿈을 찾아내고 있다
그러나 다시 보아라, 시월의 숲에는
그 모든 것 말고도
형형색색으로 어우러진
꿈 하나가 더 있다
거대한 모자이크 같기도 하고
장엄한 교향악 같기도 한,
작은 꿈들을 잇대고 잇댄 꿈
시월의 숲은
한 해의 가장 크고 화사한 꿈을 꾼다
▶ 지구의 무게
아침이면 누군가
풀잎 하나
천칭저울 삼아
지구의 무게를 달아보고 있다
한쪽은
뿌리에 칭칭
지구를 동여매 놓고
또 한쪽은
풀잎 끝에 달랑
분동 하나 올려놓아
그 아찔한 균형을 확인해 보고 있다
오늘 아침도
지구의 무게는
정갈한 이슬
한 방울!
▶ 도라지꽃
산아, 이제 다시
가신 이들의 붉은 피와
서러운 저 하늘빛을
반반씩만 섞으렴
쑥꾹새 우는 등성이마다
가없는 그리움
또 한 번 눈물 나게
그려 넣어 보자꾸나
▶ 나생이
찾아가 캐고
다듬어 헹구고
데쳐 무친 뒤
씹어서 삼켜도
아직은 추워라
산 넘고 물 건너
오시는 먼 봄
▶ 제천행
늦은 가을 오후
제천행 완행열차를 타면
오래 전에 두고 온 고향의 모습이
차창 속에 있어 좋다
경부선이 이 나라의
앞마당을 지나가는 일이라면
중앙선은 또 이 나라의
외진 뒤꼍을 지나가는 일
고만고만한 산모퉁이를 돌 때마다
들판이 있고 마을이 있고
잎 다 진 늙은 동구나무 우듬지에
으레 흔들리는 까만 까치집
누구 하나 아는 이 없지만
큰 역, 작은 역, 더러는 또 간이역
차창에 스쳐가는 지명(地名)들이
꼭 옛 친구의 이름처럼 정겹고
이따금 암울한 한 시대 같은 터널도 있어
그 어두운 터널을 빠져나올 때마다
와락 달려드는 눈부신 햇빛에
새 세상 만나듯 가슴 설레기도 하는 길
늦은 가을 오후
제천행 완행열차를 타면
한 점 꾸밈없는 고향의 모습이
차창 속에 있어 좋다
▶ 엄마의 속곳 끈
넷댓 살 무렵 엄마는
"나 없으면 니 우째 살래?"하고 걸핏하면 날 붙들고 우셨지
그때마다 난 어리둥절해서 죄 지은 듯 먼 산만 바라봤었네.
그러나 밤이 되면 나 잠든 사이 정말 훌쩍 어디론가 떠나갈까 싶어
엄마의 속곳 끈을 내 작은 손아귀에 칭칭 감은 뒤에
비로소 잠이 들곤 했었네.
그러나 그건 애초부터
마음까지 붙들어 매는 동아줄은 아니었던 것,
어느 날 밤 엄마는 결국 속절없이 내 곁을 떠나가고 말았네.
목이 잠기도록 불러보고 몸부림으로 울어 봐도
한 번 빠져나간 그 속곳 끈
다시는 내 손아귀에 들어오지 않았네.
아아, 바로 그날 이후 나는 이 세상 무엇으로도 채울 길 없는
텅 빈 들녘 하나 가슴으로 가지게 되었지
죽는 날까지 양도가 불가능한 그 쓰리고 헛헛한 황원(荒原)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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