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석정(辛夕汀, 1907~1974) 전북 부안, 본명 석정(錫正).
1931년 “시문학”에 ‘선물’을 발표하며 등단.
시집 “촛불”(1939), “슬픈 목가”(1947), “대바람 소리”(1974) 등.
신석정 시 모음
▶ 들길에 서서
푸른 산이 흰 구름을 지니고 살 듯
내 머리 위에는 항상 푸른 하늘이 있다.
하늘을 향하고 산삼(山森)처럼 두 팔을 드러낼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숭고한 일이냐.
두 다리는 비록 연약하지만 젊은 산맥으로 삼고
부절히 움직인다는 둥근 지구를 밟았거니...
푸른 산처럼 든든하게 지구를 디디고 사는 것이
얼마나 기쁜 일이냐.
뼈에 저리도록 <생활>은 슬퍼도 좋다.
저문 들길에 서서 푸른 별을 바라보자~
푸른 별을 바라보는 것은 하늘 아래 사는
거룩한 나의 일과이거니
▶ 망향(望鄕)의 노래
한 이파리
또 한 이파리
시나브로 지는
지치도록 흰 복사꽃을
꽃잎마다
지는 꽃잎마다
곱다랗게 자꾸만
감기는 서러운 서러운 연륜(年輪)을
늙으신 아버지의
기침소리랑
곤때 가신 지 오랜 아내랑
어리디 어린 손주랑 사는 곳
버리고 온 ‘생활(生活)’이며
나의 벅차던 청춘이
아직도 되살아 있는
고향인 성만 싶어 밤을 새운다.
▶ 바다에게 주는 시
바다여
날이 날마다 속삭이는
너의 수다스런 이야기에 지쳐
해안선(海岸線)의 바위는
‘베―토벤’처럼 귀가 먹었다.
지구(地球)도 나같이 네가 성가시면
참다못해
너를 벌써 엎질렀을 게다.
저 언덕에서
동백꽃은 네가 하 우스워
파란 이파리 속에 숨어서
너를 웃고 있지 않니?
동백꽃이
자꾸만 웃어 대는
고 빨간 입술이
예뻐 죽겠다.
▶ 발음(發音)
살아보니
지구(地球)는
몹시도 좁은 고장이더군요.
아무리
한 억만년(億萬年)쯤
태양을 따라다녔기로서니
이렇게도 호흡(呼吸)이 가쁠 수야 있습니까?
그래도 낡은 청춘을
숨가빠하는 지구(地球)에게 매달려 가면서
오늘은 가슴 속으로 리듬이 없는
눈물을 흘려도 보았습니다.
그렇지만
여보!
안심하십시요,
오는 봄엔
나도 저 나무랑 풀과 더불어
지줄대는 새같이 발음하겠습니다.
▶ 밤의 노래
어둠이 범람하는 지역에
도도히 범람하는 처참한 지역에,
자꾸만 짐승들은 울고
목 놓고 짐승들은 자꾸만 울고,
찌눌린 가슴이라 숨결도 영영 동결되어 가는가?
‘그렇지만 설마 그래서야 될리라구!’
시궁창 같은 세월을 꽃도 머물어,
그대로 멈출 수 없는 작은 핏줄에
핏줄 속에 수떨이는 가느다란 소리 있어,
아직은 뜨거운 가슴을 서로서로
꽃으로 문지르는가?
‘아예 그대로 잦아들 순 없는 것이여!’
몸서리나는 어둔 밤을 비바람 미치게 몰려드는데,
번갯불 사이사이 천둥소리 들려오고,
머언 먼 천둥소리 산을 넘어 들려오고,
새벽을 잉태하는 뼈저린 신음소리,
우리 가슴에 밀려드는 파도소리……
‘그대들의 귀에 젖은 노래소리 아닌가?’
▶ 봄을 기다리는 마음
우수도
경칩도
머언 날씨에
그렇게 차가운 계절인데도
봄은 우리 고운 핏줄을 타고 오고
호흡은 가빠도 이토록 뜨거운가?
손에 손을 쥐고
볼에 볼을 문지르고
으지한 채 체온을 길이 간직하고픈 것은
꽃 피는 봄을 기다리는 탓이리라.
산은
산대로 첩첩 쌓이고
물은
물대로 모여 가듯이
나무는 나무끼리
짐승은 짐승끼리
우리도 우리끼리
봄을 기다리며 살아가는 것이다.
▶ 비가(悲歌)
‘루오’의 그림처럼
어둡게 살아가지만,
눈부신 햇볕을 원하는 건 아니다.
꾀꼬리
옥을 굴리듯 우는 소리보다는
차라리 가슴을 에어내는
귀,
촉,
도,
소리로 멍든 가슴을 채워 달라.
저 검은
까마귀 떼가 지구 밖에서
하늘을 뒤덮는 건
차라리 견딜 수 있는 일이지만
안쓰러운 것들이
눈에 걸리는데
자꾸만 자꾸만
눈에 걸리는데,
그저
소라껍질을
스쳐가는 바람결처럼
차마 눈감을 수도 없거늘,
아아
하늘이여
피가 돌 양이면,
저어
야물딱진
민들레꽃을 피워내듯이
어서 숨을 돌리게 하라.
▶ 비의 서정시(抒情詩)
길이 넘는 유리창에 기대어
그 여인은 자꾸만 흐느껴 울었다.
유리창 밖에서는 놋낱 같은 비가 좌악 좍 쏟아지고
쏟아지는 비는 자꾸만 유리창에 들이치는데
여인의 흐느껴 우는 소리는
빗소리에 영영 묻혀 버렸다.
그때 나는 벗과 같이 극장을 나오면서
그 여배우를 아무래도 잊을 수가 없다고
이야기한 일이 있다.
생활의 창문에 들이치는 비가 치워
들이치는 비에 가슴이 더욱 치워
나는 다시 그 여인을 생각한다.
글쎄 여보!
우리는 이 어설픈 극장에서 언제까지
서투른 배우 노릇을 하오리까?
▶ 비의 抒情詩
길이 넘는 유리창에 기대어
그 여인은 자꾸만 흐느껴 울었다.
유리창 밖에서는 놋낱 같은 비가 좌악 좍 쏟아지고
쏟아지는 비는 자꾸만 유리창에 들이치는데
여인의 흐느껴 우는 소리는
빗소리에 영영 묻혀버렸다.
그때 나는 벗과 같이 극장을 나오면서
그 여배우를 아무래도 잊을 수가 없다고
이야기한 일이 있다.
생활의 창문에 들이치는 비가 치워
들이치는 비에 가슴이 더욱 치워
나는 다시 그 여인을 생각한다.
글쎄 여보!
우리는 이 어설픈 극장에서 언제까지
서투른 배우 노릇을 하오리까?
▶ 빙하(氷河)
동백꽃이 떨어진다,
빗속에 동백꽃이
시나브로 떨어진다.
수(水)
평(平)
선(線)
너머로 꿈 많은 내 소년을 몰아가던
파도소리
파도소리 부서지는 해안에
동백꽃이 떨어진다.
억만 년 지구와 주고받던
회화에도 태양은 지쳐
엷은 구름의 면사포(面紗布)를 썼는데
떠나자는 머언 뱃고동소리와
뚝뚝 지는 동백꽃에도
뜨거운 눈물 지우던 나의 벅찬 청춘을
귀 대어 몇 번이고 소근거려도
가고 오는 빛날 역사란
모두 다 우리 상처 입은 옷자락을
갈가리 스쳐갈 바람결이여
생활이 주고 간 화상(火傷)쯤이야
아예 서럽진 않아도
치밀어오는 뜨거운 가슴도 식고
한 가닥 남은 청춘마저 떠난다면
동백꽃 지듯 소리 없이 떠난다면
차라리 심장(心臟)도 빙하(氷河) 되어
남은 피 한 천 년 녹아
철 철 철 흘리고 싶다.
▶ 산방일기(山房日記)
봉우리 넘어오는 구름
추녀를 스쳐가고
골엔
꾀꼬리 화답(和答)하는 소리
산이 울린다.
방을 둘러가는
산나비 지친 나랫소리―
그저
해만 설핏하면
소쩍새 울고,
산도 을씨년스러워
하늘만 바라보는데,
밤 들기 전
풀벌레 사운대는 속에
나긋나긋 잠이 온다.
▶ 산산산
지구엔
돋아난
산이 아름다웁다.
산은 한사코
높아서 아름다웁다.
산에는
아무 죄 없는 짐승과
에레나보다 어여쁜 꽃들이
모여서 살기에 아름다웁다.
언제나
나도 산이 되어보나 하고
기린같이 목을 길게 늘이고 서서
멀리 바라보는
산
산
산
▶ 산수도(山水圖)
숲길 짙어 이끼 푸르고
나무 사이사이 강물이 희어
햇볕 어린 가지 끝에 산새 쉬고
흰구름 한가히 하늘을 거닌다.
산가마귀 소리 골짝에 잦은데
등 너머 바람이 넘어 닥쳐와
굽어든 숲길을 돌아서 돌아서
시냇물 여음이 옥인듯 맑아라.
푸른 산 푸른 산이 천 년만 가리
강물이 흘러흘러 만 년만 가리
▶ 산으로 가는 마음
내 마음
주름살 많은 늙은 산의 명상하는 얼굴을 사랑 하노니
오늘은
잊고 살든 산을 찾아 내 마음 머언길을 떠나네
산에는
고요한 품안에 고산 식물들이 자라나거니
마음이여
너는 해가 저물어 이윽고 밤이 올 때까지 나를
찾아오지 않아도 좋다
산에서
그렇게 고요한 품안을 떠나와서야 쓰겠니.
▶ 산협인상(山峽印象)
밋밋한 오리나무 숲을
성낸 짐승처럼 함부로 헤쳐나오면
성근 소나무 소나무 사이로
아스므라한 바라 푸른 언덕에 솟아오르고
꾀꼬리 호반새 울어예는 산협에
홈초로니 푸른 오월이 지르르 흘러
시냇물 졸졸졸 사뭇 지즐대는 기슭에
전나무 상나무 대 수풀 우거지고
간지람 나무 바람풍나무 제자리 잡아 서고
언덕을 돌아드는 오월 바람이 간지러워 간지러워
나뭇잎새들은 푸른 손을 자꾸만 뒤흔들며 몸부림친다
나는
짐승도 아니란다.
나무도 아니란다.
얇은 모시두루마기에 덮인 채
백로처럼 날아볼 수도 없고나
태화처럼 흔들릴 수도 없고나
▶ 새벽을 기다리는 마음
잔인한 촛불에게 추방을 당하면서도
나의 침실을 잊지 않는 충실한 어둠이여
오늘밤 나는 너를 위하여 촛불을 끄고
재 작은 침실의 전 면적을 제공하노니
어둠이여 너는 오늘밤에도 나를 안고
새벽이 온다는 단조한 이야기를 계속하겠지?
그러나 나는 밤마다 네가 속삭이는
그 새벽을 한 번도 맞아본 일은 없다
"대체 네가 새벽이 온다는 이야기를 한 것도 오래되건만…"
▶ 생존(生存)
체온(體溫)도 스며들지 않는
서글픈 악수에 지친 주민(住民)이기에
나는 문득
먼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래도 숨이 가빠
그래도 숨이 가빠
어항도곤 좁은 지구를
뛰어나가고 싶었다.
▶ 서가(書架)
개미새끼 흙탑을 쌓아올리듯
작은 서가에 틈 없이 책을 쌓아놓고
마음이 호수처럼 가라앉는 날
한 권 두 권 내들고 읽는 한가한 날
때로는 서가가 드높은 산같이 보이기도 하고
나는 그 산을 천천히 오르기도 하고
곤륜산보다 더 깊숙한 내 서가에
오늘은 난초 향기가 그윽이 흐르는 듯하이
▶ 서정가(抒情歌)
흰 복사꽃이 진다기로서니
빗날 같이 뚜욱 뚝 진다기로서니
아예 눈물짓지 마라 눈물짓지 마라
너와 나의 푸른 봄도
강물로 흘렀거니
그지없이 강물로 흘러갔거니
흰 복사꽃이 날린다기로서니
낙엽처럼 휘날린다 하기로서니
서러울 리 없다 서러울 리 없어
너와 나는 봄도 없는 흰 복사꽃이여
빗날 같이 지다가 낙엽처럼 날려서
강물로 강물로 흘러가 버리는
▶ 서정소곡
삼월보다 따스한
네 손을 달라
백목련보다 하이얀
네 가슴을 달라
불보다 불보다 뜨거운
네 심장을 달라
시방 거리에는
음악 같은 실비 내리고
실비 내리는 속에
동백꽃 뚜욱 뚝 지는 소리 들려오고,
돌멩이의 체온도 그리운
죽음보다 외로운 오후
음악같이 내리는 실비 속에
나는 산처럼 서서 널 생각한다
▶ 선물
하늘가에 붉은 빛 말없이 퍼지고
물결이 자개처럼 반짝이는 날
저녁 해 보내는 이도 없이
초라히 바다를 넘어갑니다.
어슷어슷 하면서도
그림자조차 뵈이지 않는 어둠이
부르는 이 없이 찾아와선
아득한 섬을 싸고돕니다.
주검같이 말없는 바다에는
지금도 물살이 웃음처럼 남실거리는 흔적이 뵈입니다
그 언제 해가 넘어갔는지 그도 모른 체하고―
무심히 살고 또 지내는
해∼ 바다∼ 섬∼ 하고 나는 부르짖으면서
내 몸도 거기에 선물하고 싶었습니다.
▶ 소곡(小曲)
산이여
그 무슨 그리움이 복받쳐
지구와 더불어 탄생한 이후
푸른 하늘을 우러러보느뇨
산이여
나 또한 진정 그리운 것 있어
발돋움하고 우러러보아도
나의 하늘은 너무 아득하고나
▶ 수선화(水仙花)
수선화는
어린 연잎처럼 오므라진 흰 수반에 있다
수선화는
암탉 모양하고 흰 수반이 안고 있다
수선화는
솜병아리 주둥이같이 연약한 움이 자라난다
수선화는
아직 햇볕과 은하수를 구경한 적이 없다
수선화는
돌과 물에서 자라도 그렇게 냉정한 식물이 아니다
수선화는
그러기에 파아란 혀끝으로 봄을 핥으려고 애쓴다
▶ 슬픈 구도
나와
하늘과
하늘 아래 푸른 산뿐이로다.
꽃 한 송이 피어날 지구(地球)도 없고,
새 한 마리 울어 줄 지구도 없고,
노루새끼 한 마리 뛰어다닐 지구도 없다.
나와
밤과
무수한 별 뿐이로다.
밀리고 흐르는 게 밤뿐이요,
흘러도 흘러도 검은 밤뿐이로다.
내 마음 둘 곳은 어느 밤하늘 별이더뇨.
▶ 슬픈 전설(傳說)을 지니고
나무 사이로
가시 사이로
잎 사이로
엽맥이 드러나게 햇볕이 흘러들고
젊은 산맥 멀리 푸른 하늘이 넘어갑니다
어머니
한때는 하늘을 잃어버리고
한때는 햇볕을 잃어버리고
슬픈 전설을 가슴에 지닌 채
죄 없는 짐승처럼 살아왔지만
죄 없는 짐승처럼 살아왔지만
하늘이 너무 푸르지 않습니까?
햇볕이 너무 빛나지 않습니까?
어머니
당신은 아예 슬픈 전설을 빚어내지 마십시오
너그러운 햇볕을 안고
저 푸른 하늘을 우러러
무성한 나무처럼 세차게 서서
무성한 나무처럼 세차게 서서
슬픈 전설은 심장에 지니고
정정한 나무처럼 살아가오리다
▶ 슬픈 전설을 지니고
나무 사이로
가시 사이로
잎 사이로
옆 맥이 드러나게 햇볕이 흘러들고
젊은 산맥 멀리 푸른 하늘이 넘어갑니다
어머니
한때는 하늘을 잃어버리고
한때는 햇볕을 잃어버리고
슬픈 전설을 가슴에 지닌 채
죄 없는 짐승처럼 살아왔지만
죄 없는 짐승처럼 살아왔지만
하늘이 너무 푸르지 않습니까?
햇볕이 너무 빛나지 않습니까?
어머니
당신은 이제 아예 슬픈 전설을 빚어내지 마십시오
너그러운 햇볕을 안고
저 푸른 하늘을 우러러
무성한 나무처럼 세차게 서서
무성한 나무처럼 세차게 서서
슬픈 전설은 심장에 지니고
정정한 나무처럼 살아가오리다
▶ 아직 촛불을 켤 때가 아닙니다
저 재를 넘어가는
저녁 해의 엷은 광선들이 섭섭해합니다.
어머니 아직 촛불을 켜지 말으셔요
그리고 나의 작은 명상의 새 새끼들이
지금도 저 푸른 하늘에서 날고 있지 않습니까?
이윽고 하늘이 능금처럼 붉어질 때
그 새 새끼들은 어둠과 함께 돌아온다 합니다.
언덕에서는 우리의 어린양들이 낡은 녹색 침대에 누워서
남은 햇볕을 즐기느라고 돌아오지 않고
조용한 호수 우에는 인제야
저녁안개가 자욱히 나려오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어머니 아직 촛불을 켤 때가 아닙니다
늙은 산의 고요히 명상하는 얼굴이 멀어가지 않고
머언 숲에서는 밤이 끌고 오는 그 검은 치맛자락이
발길에 스치는 발자욱 소리도 들려오지 않습니다.
멀리 있는 기인 뚝을 거쳐서 들려오던 물결소리도
차츰 차츰 멀어갑니다.
그것은 늦은 가을부터 우리 전원을 방문하는 가마귀들이
바람을 데리고 멀리 가버린 까닭이겠습니다.
시방 어머니의 등에서는 어머니의 콧노래 섞인
자장가를 듣고 싶어하는 애기의 잠덧이 있읍니다.
어머니 아직 촛불을 켜지 말으셔요
인제야 저 숲너머 하늘에 작은 별이 하나 나오지 않았습니까?
▶ 어느 지류(支流)에 서서
강물 아래로 강물 아래로
한 줄기 어두운 이 강물 아래로
검은 밤이 흐른다
은하수가 흐른다
낡은 밤에 숨 막히는 나도 흐르고
은하수 빠진 푸른 별이 흐른다
강물 아래로 강물 아래로
못 견디게 어두운 이 강물 아래로
빛나는 태양이
다다를 무렵
이 강물 어느 지류에 조각처럼 서서
나는 다시 푸른 하늘을 우러러 보리.
▶ 연꽃이었다
그 사람은,
물 위에 떠 있는 연꽃이다
내가 사는 이 세상에는
그런 사람 하나 있다
눈빛 맑아,
호수처럼 푸르고 고요해서
그 속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아침나절 연잎 위,
이슬방울 굵게 맺혔다가
물 위로 굴러 떨어지듯, 나는
때때로 자맥질하거나
수시로 부서지곤 했다
그럴 때마다
내 삶의 궤도는, 억겁을 돌아
물결처럼 출렁거린다
수없이. 수도 없이
그저 그런, 내가
그 깊고도 깊은 물 속을
얼만큼 더 바라볼 수 있을런지
그 생각만으로도 아리다
그 하나만으로도 아프다
▶ 은방울꽃
나는
그때 외롭게
산길을 걷고 있었다.
그때
나뭇가지를 옮아앉으며
‘동박새’가 울고 있었다.
어쩜
혼자 우는 ‘동박새’는
나도 보곤 더 외로웠는지 모른다.
숲길에선
은방울꽃 내음이 솔곳이
바람결에 풍겨오고 있었다.
너희들의
그 맑은 눈망울을
은방울꽃 속에서 난 역력히 보았다.
그것은
나의 꿈이었는지도 모른다.
너희 가슴속에 핀 꽃이었는지도 모른다.
▶ 이 밤이 너무나 길지 않습니까
젊고 늙은 산맥들을
또
푸른 바다의 거만한 가슴을 벗어나
우리들의 태양이
지금은 어느 나라 국경을 넘고 있겠습니까?
어머니
바로 그 뒤
우리는 우리들의 화려한 꿈과
금시 떠나간 태양의 빛나는 이야기를
한참 소근대고 있을 때
당신의 성스러운 유방같이 부드러운 황혼이
저 숲길을 걸어오지 않았습니까?
어머니
황혼마저 어느 성좌로 떠나고
밤∼
밤이 왔습니다
그 검고 무서운 밤이 또 왔습니다
태양이 가고
빛나는 모든 것이 가고
어둠은 아름다운 전설과 신화까지도 먹칠하였습니다
어머니
옛이야기나 하나 들려주세요
이 밤이 너무나 길지 않습니까?
▶ 임께서 부르시면
가을날 노랗게 물들인 은행잎이
바람에 흔들려 휘날리듯이
그렇게 아로리다
임께서 부르시면
호수에 안개 끼어 자욱한 밤에
말없이 재 넘은 초승달처럼
그렇게 가오리다
임께서 부르시면
포곤히 풀린 봄 하늘 아래
굽이굽이 하늘가에 흐르는 물처럼
그렇게 가오리다
임께서 부르시면
파아란 하늘에 백로가 노래하고
이른 봄 잔디밭에 스며드는 햇볕처럼
그렇게 가오리다
임께서 부르시면
▶ 입춘(立春)
가벼운
기침에도
허리가 울리더니
엊그제
마파람엔
능금도 바람이 들겠다.
저
노곤한 햇볕에
등이 근지러운 곤충처럼
나도
맨발로 토방 아랠
살그머니 내려가고 싶다.
‘남풍이 ×m의 속도로 불고
곳에 따라서는 한때 눈 또는 비가 내리겠습니다.’
▶ 작은 짐승
란이와 나는
산에서 바다를 바라보는 것이 좋았다
밤나무
소나무
참나무
느티나무
다문다문 선 사이사이로 바다는 하늘보다 푸르렀다
란이와 나는
작은 짐승처럼 앉아서 바다를 바라보는 것이 좋았다
짐승같이 말없이 앉아서
바다같이 말없이 앉아서
바다를 바라보는 것은 기쁜 일이었다
란이와 내가
푸른 바다를 향하고 구름이 자꾸만 놓아 가는
붉은 산호와 흰 대리석 층층계를 거닐며
물오리처럼 떠다니는 청자기 빛 섬을 어루만질 때
떨리는 심장같이 자지러지게 흩날리는 느티나무 잎새가
란이의 머리칼에 매달리는 것을 나는 보았다
란이와 나는
역시 느티나무 그늘에 말없이 앉아
바다를 바라보는 순하디 순한 짐승이었다
▶ 촐촐한 밤
새새끼 포르르 포르르 날아가 버리듯
오늘밤 하늘에는 별도 숨었네.
풀려서 틈가는 요지음 땅에는
오늘밤 비도 스며들겠다.
어두운 하늘을 제쳐보고 싶듯
나는 오늘밤 먼 세계가 그리워
비 내리는 촐촐한 이 밤에는
밀감 껍질이라도 지근거리고 싶구나!
나는 이런 밤에 새끼궝 소리가 그립고
흰 물새 떠다니는 먼 호수를 꿈꾸고 싶다
▶ 파도(波濤)
갈대에 숨어드는
소슬한 사람
구월도 깊었다.
철 그른
뻐꾸기 목멘 소리
애가 잦아 타는 노을
안쓰럽도록
어진 것과
어질지 않은 것을 남겨 놓고
이대로
차마 이대로
눈감을 수도 없거늘
산을 닮아
입을 다물어도
자꾸만 가슴이 뜨거워오는 날은
소나무 성근 숲 너머
파도소리가
유달리 달려드는 속을
부르르 떨리는 손은
주먹으로 달래 놓고
파도 밖에 트여올 한 줄기 빛을 본다.
▶ 푸른 하늘 바라보는 행복이 있다
따뜻한 햇볕 물 우에 미끄러지고
흰 물새 동당동당 물에 뜨듯 놀고 싶은 날이네
언덕에는 누런 잔디 헤치는 바람이 있고
흰 염소 그림자 물속에 어지러워
묵은 밭에 가마귀 그 소리 한가하고
오늘도 춤이 잦았다…하늘에 해오리…
이렇게 나른한 봄날 언덕에 누워
나는 푸른 하늘 바라보는 행복이 있다
▶ 하도 햇볕이 다냥해서
하도 햇볕이 다냥해서
뱀이 부시시 눈을 떠보았다.
― 그러나 아직 겨울이었다.
하도 땅속이 훈훈해서
개구리도 뒷발을 쭈욱 펴보았다.
― 그러나 봄은 아니었다.
어디서 살얼음 풀린 물소리가 나서
나무 움들도 살포시
밖을 내다보았다.
― 그러나 머언 산엔 눈이 하얗다.
핸 멀찌막히 ‘경칩(驚蟄)’을 세워 놓고
이렇게 따뜻하게 비췰 건 뭐람?
― 그러나 봄 머금은 햇볕이어서 좋다.
미치고 싶도록 햇볕이 다냥해서
나도 발을 쭈욱 펴고 눈을 떠본다.
― 그러나 ‘입춘(立春)’은 칼렌다 속에
숨어 하품을 하고 있었다.
▶ 한대식물(寒帶植物)
푸른 계절이 모조리 휩쓸려가고
건강한 산맥들이 아주 물러앉은 뒤
세월은 오로지 슬픈 이야기만 싣고
장미처럼 받들던 네 심장을 사뭇 지나갔다
한사코 태양을 따라다니던 대낮도 인젠 싫다
푸른 하늘까지도 단숨에 삼키는 거룩한 밤을 가졌노라
한때 곤곤히 흐르던 난류가 멈춘 이후
네 심장에는 나날이 자라가는 한대식물이 무성하고나
▶ 항구(港口)에서
네가 떠난 항구(港口)에
오월 바람이 설렌다.
머리칼을 날리는 젊은 아낙네들은
베피떡이랑 뎀뿌라랑 소주병을 늘어놓고
뱃사람들이 돌아오기를 꼬박꼬박 기두리고 있는 항구(港口).
가대기의 뒤를 따라다니는 발 벗은 아이들은
구호양곡(救護糧穀)의 가마니에서 쑤시알갱이가 빠지면
병아리처럼 주워서는 차대기에 넣는 항구(港口).
Singoara같이 사랑하는 이의
성한 피가 몹시는 먹고프다는 그 백랍 같은 여인도곤
아낙네와 발 벗은 어린 것이 더 안쓰러운 항구(港口).
오월 바람 설레는 항구(港口)에
멀리 떠난 너를 생각하는 눈시울이 뜨겁다.
▶ 화석이 되고 싶어
하늘이 저렇게 옥같이 푸른 날엔
멀리 흰 비둘기 그림자 찾고 싶다
느린 구름 무엇을 노려보듯 가지 않고
먼 강물은 소리 없이 혼자 가네
뽑아 올린 듯 밋밋한 산봉우리 곡선이 또렷하고
명항한 날이라 낮달이 더욱 희고나
석양에 빛나는 까마귀 날개같이 검은 바위에
이런 날엔 먼 강을 바라보고 앉은 대로 화석이 되고 싶어...
▶ 황(篁)
댓이파리
댓이파리
댓이파리에
바람이 왔다.
바람은
댓이파리보다
더 짙푸르다.
난 밋밋한 대와
나란히 서서
쏟아지는 태양(太陽)의 파란 분수(噴水)를
어린 금붕어 새끼처럼 뻐끔뻐끔
마시는 것이
좋다.
나는
갑자기 대가 되어버린다.
파란 대가 섞인
나는 나를 잊어버린 채
대
대랑 산다.
▶ 봄의 유혹
파란 하늘에 흰 구름 가벼이 떠가고
가뜬한 남풍이 무엇을 찾어내일 듯이
강 너머 푸른 언덕을 더듬어 갑니다
언뜻언뜻 숲새로 먼 못물이 희고
푸른 빛 연기처럼 떠도는 저 들에서는
종달새가 오늘도 푸른 하늘의 먼 여행을 떠나겠습니다
시내물이 나직한 목소리로 나를 부르고
아지랑이 영창 건너 먼 산이 고요합니다
오늘은 왜 이 풍경들이 나를 그리워하는 것 같애요
산새는 오늘 어데서 그들의 소박한 궁전을 생각하며
청아한 목소리로 대화를 하겠읍니까?
나는 지금 산새를 생각하는 '빛나는 외로움'이 있읍니다.
임이여 무척 명랑한 봄날이외다
이런 날 당신은 따뜻한 햇볕이 되어
저 푸른 하늘에 고요히 잠들어 보고 싶지 않습니까?
▶ 가을이 지금은 먼 길을 떠나려 하나니
운모(雲母)처럼 투명한 바람에 이끌려
가을이 지금은 먼 길을 떠나려 하나니
푸른 하늘의 대낮을 흰 달이 소리 없이 오고가며
밤이면 물결에 스쳐나려가는 바둑돌처럼
흰구름 엷은 사이사이로 푸른 별이 흘러갑데다
남국의 노란 은행잎새들이
푸른 하늘을 순례한다 먼 길을 떠나기 비롯하면
산새의 노래 짙은 숲엔 밤알이 쌓인 잎새들을 조심히 밟고
묵은 산장 붉은 감이 조용히 석양 하늘을 바라볼 때
가마귀 맑은 소리 산을 넘어 들려옵데다
어머니
오늘은 고양이 졸음 조는
저 후원의 따뜻한 볕 아래서
흰 토끼의 눈동자같이 붉은 석류알을 쪼개어먹으며
그리고 내일은 들장미 붉은 저 숲길을 거닐며
가을이 남기는 이 현란한 풍경들을 이야기하지 않으렵니까
가을이 지금은 먼 길을 떠나려 하나니……
▶ 고운 심장
별도
하늘도
밤도 치웁다.
얼어붙은 심장 밑으로 흐르던
한 줄기 가는 어느 난류(暖流)가 멈추고.
지치도록 고요한 하늘에 별도 얼어붙어 하늘이 무너지고
지구가 정지하고
푸른 별이 모조리 떨어질지라도
그대로 서러울리 없다는 너는
오 너는 아직 고운 심장을 지녔거니
밤이 이대로 억만 년이야 갈리라구.
▶ 그 꿈을 깨우면 어떻게 할까요
어머니
산새는 저 숲에서 살지요?
해 저문 하늘에 날아가는 새는
저 숲을 어떻게 찾아간답디까?
구름도 고요한 하늘의
푸른 길을 밟고 헤매이는데…
어머니 석양에 내 홀로 강가에서
모래성 쌓고 놀 때
은행나무 밑에서 어머니가 나를 부르듯이
안개 끼어 자욱한 강 건너 숲에서는
스며드는 달빛에 빈 보금자리가
늦게 오는 산새를 기다릴까요?
어머니
먼 하늘 붉은 놀에 비낀 숲길에는
돌아가는 사람들의
꿈같은 그림자 어지럽고
흰 모래 언덕에 속삭이던 물결도
소몰이 피리에 귀 기울여 고요한데
저녁바람은 그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언덕의 풀잎이 고개를 끄덕입니다.
내가 어머니 무릎에 잠이 들 때
저 바람이 숲을 찾아가서
작은 산새의 한없이 깊은
그 꿈을 깨우면 어떻게 할까요?
▶ 그 마음에는
그 사사스러운 일로
정히 닦아온 마음에
얼룩진 그림자를 보내지 말라.
그 마음에는
한 그루 나무를 심어
꽃을 피게 할 일이요
한 마리
학으로 하여
노래를 부르게 할 일이다.
대숲에
자취 없이
바람이 쉬어 가고
구름도
흔적 없이
하늘을 지나가듯
어둡고
흐린 날에도
흔들리지 않도록 받들어
그 마음에는
한 마리 작은 나비도
너그러게 쉬어 가게 하라.
▶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
어머니,
당신은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
깊은 삼림대(森林帶)를 끼고 돌면
고요한 호수에 흰 물새 날고
좁은 들길에 들장미 열매 붉어.
멀리 노루새끼 마음놓고 뛰어다니는
아무도 살지 않는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
그 나라에 가실 때에는 부디 잊지 마셔요.
나와 같이 그 나라에 가서 비둘기를 키웁시다.
어머니,
당신은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
산비탈 넌지시 타고 내려오면
양지 밭에 흰 염소 한가히 풀 뜯고
길 솟는 옥수수 밭에 해는 저물어 저물어
먼 바다 물소리 구슬피 들려오는
아무도 살지 않는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
어머니, 부디 잊지 마셔요.
그 때 우리는 어린양을 몰고 돌아옵시다.
어머니,
당신은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
오월 하늘에 비둘기 멀리 날고
오늘처럼 촐촐히 비가 내리면,
꿩 소리도 유난히 한가롭게 들리리다.
서리 까마귀 높이 날아 산국화 더욱 곱고
노오란 은행잎이 한들한들 푸른 하늘에 날리는
가을이면 어머니! 그 나라에서
양지 밭 과수원에 꿀벌이 잉잉거릴 때,
나와 함께 그 새빨간 능금을 또옥 똑 따지 않으렵니까?
▶ 꽃 덤불
태양을 의논하는 거룩한 이야기는
항상 태양을 등진 곳에서만 비롯하였다.
달빛이 흡사 비 오듯 쏟아지는 밤에도
우리는 헐어진 성터를 헤매이면서
언제 참으로 그 언제 우리 하늘에
오롯한 태양을 모시겠느냐고
가슴을 쥐어뜯으며 이야기하며 이야기하며
가슴을 쥐어뜯지 않았느냐?
그러는 동안에 영영 잃어버린 벗도 있다.
그러는 동안에 멀리 떠나버린 벗도 있다.
그러는 동안에 몸을 팔아버린 벗도 있다.
그러는 동안에 맘을 팔아버린 벗도 있다.
그러는 동안에 드디어 서른여섯 해가 지나갔다.
다시 우러러보는 이 하늘에
겨울밤 달이 아직도 차거니
오는 봄엔 분수처럼 쏟아지는 태양을 안고
그 어느 언덕 꽃덤불에 아늑히 안겨보리라.
▶ 꿈의 일부(一部)
바람이
몹시 불고 있었다.
내가 타고 있는 백마의 갈기도
바람에 몹시 날리고 있었다.
출발 직전
백마는 길게 목놓아 울었다.
잠시
지구를 떠나기로 작정했다.
내가 탄 백마는
무작정 달리고만 있었다.
동백꽃이 붉게 타는
어느 해안선을 돌고 있었다.
이윽고
로마궁전의 원주(圓柱)가 멀리 바라보였다.
그 뒤 나는
얼마나 달렸는지 모른다.
메콩강(江) 언덕을 달릴 때였다.
문득 총소리에 내가 깬 것은……
▶ 나랑 함께
비낀 햇빛 아래
문득 바라보는 나무
나무 옆에 서보면
나무가 되고,
꽃 옆에 서보면
꽃이 되어도,
두루미 흘러가는
저 하늘을 이고 보면,
너희들의 가슴 언저리에
그 뜨거운 가슴 언저리에 있고 싶어라.
흐드러진 웃음,
그 웃음소리에도
꽃은 피고
마냥 꽃은 피어나고,
빛나는 너희 눈망울이야
그대로 한 개 별빛이거늘,
흘러간 지난날이사
돌아볼 겨를도 없다.
너희들 내다보는 앞날을
나랑 함께 걷게 하여라.
▶ 나무 등걸에 앉아서
요요한
산이로다.
겹겹이 쌓인 풀 길 없는 우리 가슴같이
깊은 산이로다.
아아라한 오월 하늘 짙푸른 속에
종달새
종달새
종달새는 미치게 울고
산은
첩첩
청대숲보다 더 밋밋하고 무성한데
아기자기한 우리 두 가슴엔
오늘사 태양 따라 환히 트인 길이 있어
이 나무 등걸에 널 껴안은 채
이토록 즐거운 눈물이 자꾸만 쏟아지는 것은
진정 죽고 싶도록 살고 싶은
사랑보다도 뜨겁고 더 존엄한 꽃이
가슴 깊이 피어난 까닭이리라.
▶ 나의 꿈을 엿보시겠습니까
햇볕이 유달리 맑은 하늘의 푸른 길을 밟고
아스라한 산 너머 그 나라에 나를 담쑥 안고 가시겠습니까?
어머니가 만일 구름이 된다면…
바람 잔 밤하늘의 고요한 은하수를 저어서 저어서
별나라를 속속들이 구경시켜주실 수가 있습니까?
어머니가 만일 초승달이 된다면…
내가 만일 산새가 되어 보금자리에 잠이 든다면
어머니는 별이 되어 달도 없는 고요한 밤에
그 푸른 눈동자로 나의 꿈을 엿보시겠습까?
▶ 나의 노래는
나의 노래는
라일락꽃과 그 꽃잎에 사운대는
바람 속에 있다.
나의 노래는
너의 타는 눈망울과
그 뜨거운 가슴속에 있다.
나의 노래는
저어 빨간 장미의 산호 빛 웃음 속에 있다.
나의 노래는
항상 별같이 살고파 하는 네 마음속에 있다.
나의 노래는
흰 나리꽃이 가쁘도록 내쉬는 짙은 향기 속에 있다.
나의 노래는
꽃잎이 서로 부딪치며 이뤄지는 죄 없는 입맞춤 속에 있다.
나의 노래는
소쩍새 미치게 우는 어둔 밤엘랑 아예 찾지 말라.
나의 노래는
태양의 꽃가루 쏟아지는 칠월 바다의 푸르른 수평선에 있다.
▶ 난초(蘭草)
난초는
얌전하게 뽑아 올린 듯 갸륵한 입새가 어여쁘다
난초는
건드러지게 처진 청수한 잎새가 더 어여쁘다
난초는
바위틈에서 자랐는지 그윽한 돌냄새가 난다
난초는
산에서 살던 놈이라 아무래도 산냄새가 난다
난초는
예운림(倪雲林)보다도 청담한 풍모를 갖추었다
난초는
도연명(陶淵明)보다도 청담한 풍모를 갖추었다
그러기에
사철 난초를 보고 살고 싶다
그러기에
사철 난초와 같이 살고 싶다
▶ 날개가 돋쳤다면
어머니
만일 나에게 날개가 돋쳤다면
산새새끼 포르르 포르르 멀리 날아가듯
찬란히 피는 밤하늘의 별밭을 찾아가서
나는 원정(園丁)이 되오리다 별밭을 지키는…
그리하여 적적한 밤하늘에 유성이 뵈이거든
동산에 피는 별을 따 던지는 나의 장난인 줄 아시오
그런데 어머니
어찌하여 나에게는 날개가 없을까요?
어머니
만일 나에게 날개가 돋쳤다면
석양에 능금같이 붉은 하늘을 날아서
똥그란 지구를 멀리 바라보며
옥토끼 기르는 목동이 되오리다 달나라에 가서…
그리하여 푸른 달밤 피리소리 들려오거든
석양에 토끼 몰고 돌아가며
달나라에서 부는 나의 옥퉁소인 줄 아시오
그런데 어머니
어찌하여 나에게는 날개가 없을까요?
▶ 네 눈망울에서는
네 눈망울에서는
초록빛 오월
하이얀 찔레꽃 내음새가 난다
네 눈망울에서는
초롱초롱한
별들이 이야기를 머금었다
네 눈망울에서는
새벽을 알리는
아득한 종소리가 들린다
네 눈망울에서는
머언 먼 뒷날
만나야 할 뜨거운 손들이 보인다
네 눈망울에는
손잡고 이야기할
즐거운 나날이 오고 있다
▶ 눈맞춤
바람은 연신 불고 있었다.
안개 같은 비 사이로
비 같은 안개 사이로
엷은 햇볕이 내다보는 동안
문득
떠난 지 오랜 ‘생활’을 찾던 나의 눈은
아내의 눈을 붙잡았다.
아내의 눈도 나의 눈을 붙잡고 있었다.
불현듯 마주친
아내와 나의 눈맞춤 속에
어쩜 그토록 긴 세월이 흘러갈 수 있을 것인가……
나는 몰랐다.
치열(齒列) 한 모서리가 무너진 아내는
이내 원뢰(遠雷)처럼 조용히 웃고 있었다.
조용한 우리들의 눈맞춤 속에
우
루
루
루
원뢰(遠雷)가 아스라이 또 들려오고 있었다.
▶ 단장소곡(斷腸小曲)
추워 지친 하늘
서럽도록 짙푸르다.
물소리 잦아 시린 속에
해 지고
너는 가고,
종소리
노을에 젖어
목메어 은은한데,
원수도 없는 날을
살고파 타는 가슴
빈주먹 쥐고 펴다
하루해를 또 보냈다.
▶ 대 바람 소리
대 바람 소리
들리더니
소소(蕭蕭)한 대 바람 소리
창을 흔들더니
소설(小雪) 지낸 하늘을
눈 머금은 구름이 가고 오는지
미닫이에 가끔
그늘이 진다
국화향기 흔들리는
좁은 서실(書室)을
무료히 거닐다
앉았다, 누웠다
잠들다 깨어 보면
그저 그런 날을
눈에 들어오는
병풍의「낙지론(樂志論)」을
읽어도 보고
그렇다!
아무리 쪼들리고
웅숭그릴지언정
어찌 제왕의 문에 듦을 부러워하랴
대 바람 타고
들려오는
머언 거문고소리.
▶ 대숲에 서서
대숲으로 간다.
대숲으로 간다.
한사코 성근 대숲으로 간다.
자욱한 밤안개에 벌레 소리 젖어 흐르고
벌레 소리에 푸른 달빛이 배어 흐르고
대숲은 좋더라.
성글어 좋더라.
한사코 서러워 대숲은 좋더라.
꽃가루 날리듯 흥근히 드는 달빛에
기억 없이 서서 나도 대같이 살꺼나
▶ 대춘부(待春賦)
우수도
경칩도
머언 날씨에
그렇게 차거운 계절인데도
봄은 우리 고은 핏줄을 타고 오기에
호흡은 가뻐도 이토록 뜨거운가?
손에 손을 쥐고
볼에 볼을 문지르고
의지한 채 체온을 길이 간직하고픈 것은
꽃피는 봄을 기다리는 탓이리라.
산은
산대로 첩첩 쌓이고
물은
물대로 모여 가듯이
나무는 나무끼리
짐승은 짐승끼리
우리도 우리끼리
봄을 기다리며 살아가는 것이다.
▶ 대화(對話)
모란 순이
새끼손가락만치 자랐습데다.
너는 그렇게도
봄을 기두렸고나.
산수유(山茱萸)꽃이
벌써 시나브로 지던데요.
글쎄
봄은 오자 또 떠나는 게지…
그러기에 우린 아직도
경칩(驚蟄)이 먼 지역의 주민인가 봅니다.
산(山) 같은 침묵(沈?)이 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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