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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詩 같은 삶을 위하여
☞ 문학의 뜨락

김광규 시 모음

by 石右 尹明相 2022. 9. 4.

 

김광규(金光圭)시인. 1941년 서울 출생

1975[문학과 지성] [유무] [영산] [시론] 발표,

1981년 녹원문학상-오늘의작가상, 1984년 김수영문학상 수상.

시집 [우리를 적시는 마지막 꿈] [반달곰에게] [좀팽이처럼] .

 

 

김광규 시 모음

 

 

달팽이의 사랑

 

장독대 앞뜰

이끼 낀 시멘트 바닥에서

달팽이 두 마리

얼굴 비비고 있다

 

요란한 천둥 번개

장대 같은 빗줄기 뚫고

여기까지 기어오는데

얼마나 오래 걸렸을까

 

멀리서 그 그리움에 몸이 달아

그들은 아마 뛰어왔을 것이다

들리지 않는 이름 서로 부르며

움직이지 않는 속도로

숨가쁘게 달려와 그들은

이제 몸을 맞대고

기나긴 사랑 속삭인다

 

짤막한 사랑 담아둘

집 한 칸 마련하기 위하여

십년을 바둥거린 나에게

날 때부터 집을 가진

달팽이의 사랑은

얼마나 멀고 긴 것일까

 

 

나뭇잎 하나

 

크낙산 골짜기가 온통

연록색으로 부풀어 올랐을 때

그러니까 신록이 우거졌을 때

그곳을 지나가면서 나는

미처 몰랐었다

 

뒷절로 가는 길이 온통

주황색 단풍으로 물들고 나뭇잎들

무더기로 바람에 떨어지던 때

그러니까 낙엽이 지던 때도

그곳을 거닐면서 나는

느끼지 못했었다

 

이렇게 한 해가 다 가고

눈발이 드문드문 흩날리던 날

앙상한 대추나무 가지 끝에 매달려 있던

나뭇잎 하나

문득 혼자서 떨어졌다

 

저마다 한 개씩 돋아나

여럿이 모여서 한여름 살고

마침내 저마다 한 개씩 떨어져

그 많은 나뭇잎들

사라지는 것을 보여 주면서

 

 

상행(上行)

 

가을 연기 자욱한 저녁 들판으로

상행 열차를 타고 평택을 지나갈 때

흔들리는 차창에서 너는

문득 낯선 얼굴을 발견할지도 모른다

그것이 너의 모습이라고 생각지 말아 다오

오징어를 씹으며 화투판을 벌이는

낯익은 얼굴들이 네 곁에 있지 않느냐

황혼 속에 고함치는 원색의 지붕들과

잠자리처럼 파들거리는 TV 안테나들

흥미 있는 주간지를 보며

고개를 끄덕여 다오

농약으로 질식한 풀벌레의 울음 같은

심야 방송이 잠든 뒤의 전파 소리 같은

듣기 힘든 소리에 귀 기울이지 말아 다오

확성기마다 울려 나오는 힘찬 노래와

고속도로를 달려가는 자동차 소리는 얼마나 경쾌하냐

예부터 인생은 여행에 비유되었으니

맥주나 콜라를 마시며

즐거운 여행을 해 다오

되도록 생각을 하지 말아 다오

놀라울 때는 다만 '!'라고 말해 다오

보다 긴 말을 하고 싶으면 침묵해 다오

침묵이 어색할 때는

오랫동안 가문 날씨에 관하여

아르헨티나의 축구 경기에 관하여

성장하는 GNP와 증권 시세에 관하여

이야기를 다오

너를 위하여

나를 위하여

 

 

어느 가을날

 

감이 주렁주렁 매달려

골목길 행인들의 눈길을 끌고

동네 사람들이 탐내던

우리집 감나무

큰 가지가 어느 가을 날

뚝 부러졌다

주황색으로 익어 가는 그 탐스런

열매들의 무게 때문에

 

 

가을날

 

누가 부는지 뒷산에서

서투른 나팔 소리 들려온다

견딜 수 없는 피로 때문에

끝내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는

그의 말이 문득 떠오른다

여름내 햇볕 즐기며

윤나는 잎사귀 반짝이던 감나무에

지금은 까치밥 몇 개

높다랗게 매달려 있고

땅에는 떨어진 열매들

아무도 줍지 않았다

나는 어디쯤 떨어질 것인가

낯익은 골목길 모퉁이

어느 공원 벤치에도 이제는

기다릴 사람 없다

차라리 늦가을 벌레 소리에 묻혀

지난날의 꿈을 꾸고

꿈속에서 깨어나

손짓하는 코스모스에게 묻고 싶다

봄에는 너를 보지 못했다

여름에는 어디 있었니

때늦게 길가에 피어난 꽃들

함초롬히 입 가리고 웃을 것이다

아직도 누군가 만나

나누고 싶은 이야기

굳게 입 다물고

두꺼운 안경으로 눈 가리고

앓고 싶지 않은 병

온몸에 간직한 채 나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천천히 그곳으로 다가가고 있다

아득한 젊은 날을 되풀이하는

서투른 나팔 소리

참을 수 없는 졸음 때문에

마지막 기회를 잃어버렸다는

그의 말을 이제는 알 것 같다 *

 

 

좀팽이처럼

 

돈을 몇 푼 찾아가지고

은행을 나섰을 때 거리의

찬바람이 머리카락을 흐트려놓았다

대출계 응접 코너에 앉아 있던

그 당당한 채무자의 모습

그의 땅을 밟지 않고는

신촌 일대를 지나갈 수 없었다

인조대리석이 반들반들하게 깔린

보도에는 껌자국이 지저분했고

길 밑으로는 전철이 달려갔다

그 아래로 지하수가 흐르고

그보다 더 깊은 곳에는

시뻘건 바위의 불길이 타고 있었다

지진이 없는 나라에 태어난 것만 해도

다행한 일이지

50억 인구가 살고 있는

이 땅덩어리의 한 귀퉁이

1,000만 시민이 들 끊고 있는

서울의 한 조각

금고 속에 넣을 수 없는

이 땅에 그 부동산업자가 소유하고 있었다

마음대로 그가

양도하고 저당하고 매매하는

그 땅 위에서 나는 온종일

바둥거리며 일해서 푼돈을 벌고

좀팽이처럼

그것을 아껴가며 살고 있었다

 

 

늙은 소나무

 

새마을 회관 앞마당에서

자연보호를 받고 있는 늙은 소나무

시원한 그림자 드리우고

바람의 몸짓 보여주며

백여 년을 변함없이 너는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송진마저 말라버린 몸통을 보면

뿌리가 아플 때도 되었는데

너의 고달픔 짐작도 못 하고 회원들은

시멘트로 밑둥을 싸 바르로

주사까지 놓으면서

그냥 서 있으라고 한다

아무리 바람직하지 못하다 해도

늙음은 가장 자연스러운 일

오래간만에 털썩 주저앉아 너도

한 번 쉬고 싶을 것이다

쉬었다가 다시 일어나기에

몇백 년이 걸릴지 모르겠지만

너의 졸음을 누가 막을 수 있으랴

백여 년 동안 뜨고 있던

푸른 눈을 감으며

끝내 서서 잠드는구나

가지마다 붉게 시드는 늙은 소나무

 

 

저녁나절

 

썰물이 빠진 뒤

뭍으로 길게 닻을 던진 채

개펄 바닥에 주저앉아 나른한

오후를 보내고 있는 거룻배들

정물로 머무는 동안 소금의

하얀 발자국 조금씩 드러날 때

말나루 먼 바다에서 아련히

밀물 들어오는 소리

갈대숲 어느새 물에 잠기고

물새들 날카롭게 지저귀고

잠에서 깨어난 거룻배들

물 위로 떠오르고

황혼의 냄새 불그스레 번져갈 때

조약돌처럼 널린 땅 위의 기억들

적시며 밀려오는 파도

어두워가는 여생의 하루 *

 

 

땅거미 내릴 무렵

 

짙푸른 여름 숲이 깊어갑니다

텃새들의 저녁 인사도 뜸해지고

골목의 가로등 하나 둘 켜질 때

모기들 날아드는 마당 한구석

낡은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밀려오는 어둠에 잠깁니다

어둠이 스며들며 조금씩

온몸으로 퍼져가는 아픔과 회한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혼자서 지긋이 견딥니다

남은 생애를 헤아리는 것 또한

나에게 주어진 몫이려니

나의 육신이 누리는 마지막 행복이려니

그저 이렇게 미루어 짐작하고

땅거미 내릴 무렵

마당 한구석에 나를 앉혀 둡니다

차츰 환해지는 어둠 속에서

한 점 검은 물체로 내가

멀어져 갈 때까지

 

 

 

남녘 들판에 곡식이 뜨겁게 익고

장대 같은 빗줄기 오랫동안 쏟아진 다음

남지나해의 회오리바람 세차게 불어와

여름내 흘린 땀과 곳곳에 쌓인 먼지

말끔히 씻어갈 때

앞산의 검푸른 숲이 짙은 숨결 뿜어 내고

대추나무 우듬지에 한두 개

누르스름한 이파리 생겨날 때

광복절이 어느새 지나가고

며칠 안 남은 여름 방학을

아이들이 아쉬워할 때

한낮의 여치 노래 소리보다

저녁의 귀뚜라미 울음소리 더욱 커질 때

가을은 이미 곁에 와 있다

여름이라고 생각지 말자

아직도 늦여름이라고 고집하지 말자

이제는 무엇인가 거두어들일 때

 

 

안개의 나라

 

언제나 안개가 짙은 안개의 나라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어떤 일이 일어나도 안개 때문에 아무 것도 보이지 않으므로

안개 속에 사노라면 안개에 익숙해져 아무 것도 보려고 하지 않는다

안개의 나라에서는 그러므로 보려고 하지 말고 들어야한다

듣지 않으면 살 수 없으므로 귀는 자꾸 커진다

하얀 안개의 귀를 가진 토끼 같은 사람들이 안개의 나라에 산다

 

 

동사목凍死木

 

유달리 추웠던 지난겨울

영하 17도의 혹한을 비껴갈 수 없어

뒷동산 언덕배기에 뿌리박은 채

꼿꼿이 서서 얼어 죽은 나무들

전기톱으로 잘라내는 소리

비명처럼 들린다

산 아래 첫 집 담 너머

우리 마당에도 누렇게 얼어 죽은

낙엽송과 단풍나무

한여름 녹음 속에 처연하게 숨 멎은

동사목 두 그루

살아 있는 나무들만 바람에 수런거리고

마른 잎을 떨어버릴 수 있다는

수목의 유언에 귀 기울이며

말 없는 미라를 보듯

두고두고 바라보기만 할 뿐

 

 

까만 목도리

 

어디 있나 찾을 때마다

장난삼아 둘째 음절에 악센트를 주었던

나의 부드러운 목도리

영하 15. 뺨이 얼어붙던 겨울날

어두운 산자락 길 걸어 올라가

워밍암 운동틀 돌리고 내려왔을 때

등산점퍼 속에 걸쳤던

목도리가 보이지 않았다

아무도 없는 밤길

나 혼자 걸었는데

어디서 흘러내렸나

오던 길 되돌아가 살펴보아도

눈에 띄지 않았다

그래도 목을 잃어버리지 않고

목도리만 없어져 다행이지

그것은 결국 내 목에

두르기 전으로 되돌아갔다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

떠나가 버린 것

도대체 무엇을 소유할 수 있다는 착각

속에서 여태까지 살아왔는데

분실과 더불어 느닷없이

나를 찾아온 손재수

반갑지 않은 친구

내 곁에 잠시 머물렀다가

인사도 없이 사라져버린 놈

따스했던 그 까만 목도리

 

 

난간 없는 계단

 

산길 오르막길 내리막길에

크고 작은 돌들이 저절로 쌓여 들쭉날쭉

층진 언덕길 생겨났겠지

이것을 흉내 내어 직립원인들

동굴로 가는 계단 만들었겠지

거기를 오르내리며 때때로

미끄러지거나 넘어지기도 했지만

네발 달린 짐승들은 거침없이

아래위로 뛰어다녔지

산비탈에 층층으로 논발 일구고

하늘로 올라가는 아득한 사닥다리 세우고

바다로 내려가는 가파른 절벽에

걸어서 오르내리는 벼랑길 만들고

이제는 움직이는 계단 위로

위험하게 뛰어다니는 우리들

올라갈 곳만 바라보다가

내려갈 곳 잃고

이리저리 뒤엉켜 몰려다니다가

 

 

밤 눈

 

겨울밤

노천역에서

전동차를 기다리며 우리는

서로의 집이 되고 싶었다

안으로 들어가

온갖 부끄러움을 감출 수 있는

따스한 방이 되고 싶었다

눈이 내려도

바람이 불어도

날이 밝을 때까지 우리는

서로의 바깥이 되고 싶었다

 

 

어느 돌의 태어남

 

아무도 가 본 적 없는

깊은 산골짜기에도

돌이 있을까

아득한 옛날부터

홀로 있는 돌을 찾아

산으로 갔다

 

길도 없이 가파른 비탈

늙은 소나무 밑에

돌이 있었다

이끼가 두둑이 덮인

이 돌은 도대체 얼마나

오랫동안 여기에 있었을까

 

2천 년일까 2만 년일까 2억 년일까

 

아니다

그렇지 않다

지금까지 아무도

본 적 없다면 이 돌은

지금부터 여기에 있다

내가 처음 본 순간

이 돌은 비로소 태어난 것이다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

 

4.19가 나던 해 세밑

우리는 오후 다섯 시에 만나

반갑게 악수를 나누고

불도 없이 차가운 방에 앉아

하얀 입김 뿜으며

열띤 토론을 벌였다

어리석게도 우리는 무엇인가를

정치와는 전혀 관계없는 무엇인가를

위해서 살리라 믿었던 것이다

 

결론 없는 모임을 끝낸 밤

혜화동 로터리에서 대포를 마시며

사랑과 아르바이트와 병역 문제 때문에

우리는 때 묻지 않은 고민을 했고

아무도 귀 기울이지 않는 노래를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노래를

저마다 목청껏 불렀다

돈을 받지 않고 부르는 노래는

겨울밤 하늘로 올라가

별똥별이 되어 떨어졌다

 

그로부터 18년 오랜만에

우리는 모두 무엇인가 되어

혁명이 두려운 기성세대가 되어

넥타이를 매고 다시 모였다

회비를 만원씩 걷고

처자식들의 안부를 나누고

월급이 얼마인가 서로 물었다

치솟는 물가를 걱정하며

즐겁게 세상을 개탄하고

익숙하게 목소리를 낮추어

떠도는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모두가 살기 위해 살고 있었다

아무도 이젠 노래를 부르지 않았다

적잖은 술과 비싼 안주를 남긴 채

우리는 달라진 전화번호를 적고 헤어졌다

몇이서는 포우커를 하러 갔고

몇이서는 춤을 추러 갔고

몇이서는 허전하게 동숭동 길을 걸었다

 

돌돌 말은 달력을 소중하게 옆에 끼고

오랜 방황 끝에 되돌아온 곳

우리의 옛사랑이 피 흘린 곳에

낯선 건물들 수상하게 들어섰고

플라타너스 가로수들은 여전히 제자리에 서서

아직도 남아 있는 몇 개의 마른 잎 흔들며

우리의 고개를 떨구게 했다

 

부끄럽지 않은가

부끄럽지 않은가

바람의 속삭임 귓전으로 흘리며

우리는 짐짓 중년기의 건강을 이야기했고

또 한 발짝 깊숙이 늪으로 발을 옮겼다

 

 

돌아오지 않는 강

 

"아니다, 그렇지 않다"

허튼소리 하지 말게

모름지기 역사의 도도한 물결을 타고

시대와 함께 흘러갈 줄 알아야지...

그 친구의 말을 듣고 나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공화국이 몇 번이나 바뀌어도

변함없이 중심을 맴도는 인물들

그 친구 말고도 얼마나 많은가

시대와 함께 흘러가는 그 많은 동시대인을

도저히 따라갈 수 없어서

망연히 물가에서 바라보았다

도도한 물결을 타고 그들은 자랑스럽게

손을 흔들며 지나갔다 능숙하게

무자맥질하면서 순식간에

아득히 멀어져갔다 시야에서

사라져버렸다

그리고 영영 돌아오지 않았다

 

 

능소화

 

7월의 오후 골목길

어디선가 해피 버스데이 노래를

서투르게 흉내 내는

바이올린 소리

누군가 내 머리를 살짝 건드린다

담 너머 대추나무를 기어 올라가면서

나를 돌아다보는

능소화의

주황색 손길

어른을 쳐다보는 아기의

무구한 눈길 같은

 

 

잃어버린 비망록

 

여권과 지갑을 안주머니에 넣어둔 것은

그래도 천만다행이다.

고속전철에 짐을 옮겨 싣는 이삼 분 사이에

가죽서류가방이 없어졌다.

경찰에 신고하느라고, 기차 두 대를 놓쳤다.

도난품 명세서를 작성하기에 시간이 걸렸기 때문이다.

가방을 뒤적거리며 끄집어낼 물건들을

기억 속에서 찾아내려니, 쉬운 일이 아니었다.

 

보험회사 손해사정 팀도 휴대품 목록을 요구했다.

품목과 수량은 그럭저럭 기입할 수 있었지만,

물품 가격과 구입 시기를 기억해내기는 힘들었다.

 

통째로 잃어버린 가죽서류가방과

싸구려 카메라 및 상비 약품은

비교적 최근에 산 것이라,

대략 비슷한 내용을 적어 넣을 수 있었다.

 

하지만,

보상받을 수 없는 품목들이 사실은 더 많았다.

예컨대 일기장과 비망록, 사진촬영필름,

행사계약서와 여행경비 증빙서류,

각종 수집 자료와 명함 모음 등이

내게는 다할 나위 없이 중요한 분실물이었다.

특히 자잘한 생활 일정이 담긴 탁상 캘린더,

관찰과 느낌과 단상의 토막들을 적어둔

비망록이 없어진 것은 내 생애의 일부가

잘려나간 것이나 다름없었다.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가치를.

나는 잃어버린 다음에야 깨닫게 된 셈인가.

 

 

여름날

 

달리고 싶다

가시덤불 우거진 가파른 산비탈

기관총에 맞은 게릴라처럼

피를 뿜으며

구르고 싶다

풀에 맺힌 이슬로 혀끝 적시고

새가 되어 계곡 깊숙이

날아 내리고 싶다

 

넘어지고 싶다

몰려오는 파도에 채여

깎이지 않는 바닷가

한낮의 햇볕 아래 무릎 꿇고

마지막 땀방울까지

흘리고 싶다

바다 밑 깊은 골짜기에

그림자 드리우고

알몸으로 돌처럼

가라앉고 싶다

 

돌아가고 싶다

끈끈한 어둠의 숨결

무더운 수액 출렁이는 숲 속으로

들어가 길을 잃고

헤매고 싶다

쓰러져

잦아들어

땅 속을 흐르고 싶다

 

 

어린 게의 죽음

 

어미를 따라 잡힌

어린 게 한 마리

 

큰 게들이 새끼줄에 묶여

거품을 뿜으며 헛발질 할 때

게장수의 구럭을 빠져나와

옆으로 옆으로 아스팔트를 기어간다

개펄에서 숨바꼭질하던 시절

바다의 자유는 어디 있을까

눈을 세워 사방을 두리번거리다

달려오는 군용 트럭에 깔려

길바닥에 터져 죽는다

먼지 속에서 썩어가는 어린 게의 시체

아무도 보지 않는 찬란한 빛

 

 

묘비명

 

단 한 줄의 시는커녕

단 한 권의 소설도 읽은 바 없이

그는 한평생을 행복하게 살며

많은 돈을 벌었고

높은 자리에 올라

이처럼 훌륭한 비석을 남겼다

그리고 어느 유명한 문인이

그를 기리는 묘비명을 여기에 썼다

비록 이 세상이 잿더미가 된다 해도

불의 뜨거움 굳굳이 견디며

이 묘비는 살아남아

귀중한 사료가 될 것이니

역사는 도대체 무엇을 기록하며

시인은 어디에 무엇을 남길 것이냐

 

 

안개의 나라

 

언제나 안개가 짙은

안개의 나라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어떤 일이 일어나도

안개 때문에

아무 것도 보이지 않으므로

안개 속에 사노라면

안개에 익숙해져

아무것도 보려고 하지 않는다

안개의 나라에서는 그러므로

보려고 하지 말고

들어야 한다

듣지 않으면 살 수 없으므로

귀는 자꾸 커진다

하얀 안개의 귀를 가진

토끼 같은 사람들이

안개의 나라에 산다.

 

 

밤꽃 향기

 

술잔처럼 오목하거나

접시처럼 동그랗지 않고

양물처럼 길쭉한 꼴로

밤낮없이 허옇게 뿜어내는

밤꽃 향기

쓰러진 초가집 감돌면서

떠난 이들의 그리움 풍겨줍니다

대를 물려 이 집에 살아온

참새들

깨어진 물동이에 내려앉아

고인 빗물에 목을 축이고

멀리서 고속철도 교각을 세우는

크레인과 쇠기둥 박는 소리에 놀라

추녀 끝으로 포르르 날아오릅니다

참새들이 맡을 수 있을까요

아까운 밤꽃 향기

 

 

대장간의 유혹

 

제 손으로 만들지 않고

한꺼번에 싸게 사서

마구 쓰다가

망가지면 내다 버리는

플라스틱 물건처럼 느껴질 때

나는 당장 버스에서 뛰어내리고 싶다

현대 아파트가 들어서며

홍은동 사거리에서 사라진

털보네 대장간을 찾아가고 싶다

풀무질로 이글거리는 불 속에

시우쇠처럼 나를 달구고

모루 위에서 벼리고

숫돌에 갈아

시퍼런 무쇠낫으로 바꾸고 싶다

땀 흘리며 두들겨 하나씩 만들어낸

꼬부랑 호미가 되어

소나무 자루에서 송진을 흘리면서

대장간 벽에 걸리고 싶다

지금까지 살아온 인생이

온통 부끄러워지고

직지사 해우소

아득한 나락으로 떨어져내리는

똥덩이처럼 느껴질 때

나는 가던 길을 멈추고 문득

어딘가 걸려 있고 싶다

 

 

젊은 손수 운전자에게

 

네가 벌써 자동차를 갖게 되었으니

친구들이 부러워할 만도 하다

운전을 배울 때는

어디든지 달려갈 수 있을

네가 대견스러웠다

면허증은 무엇이나 따두는 것이

좋다고 나도 여러 번 말했었지

이제 너는 차를 몰고 달려가는구나

철따라 달라지는 가로수를 보지 못하고

길가의 과일 장수나 생선 장수를 보지 못하고

아픈 애기를 업고 뛰어가는 여인을 보지 못하고

교통 순경과 신호등을 살피면서

앞만 보고 달려가는구나

너의 눈은 빨라지고

너의 마음은 더욱 바빠졌다

앞으로 기름값이 또 오르고

매연이 눈앞을 가려도

너는 차를 두고

걸어다니려 하지 않을 테지

걷거나 뛰고

버스나 지하철을 타고 다니며

남들이 보내는 젊은 나이를 너는

시속 60km 이상으로 지나가고 있구나

네가 차를 몰고 달려가는 것을 보면

너무 가볍게 멀어져 가는 것 같아

나의 마음이 무거워진다

 

 

생각의 사이

 

시인은 오로지 시만을 생각하고

정치가는 오로지 정치만을 생각하고

경제인은 오로지 경제만을 생각하고

근로자는 오로지 노동만을 생각하고

법관은 오로지 법만을 생각하고

군인은 오로지 전쟁만을 생각하고

기사는 오로지 공장만을 생각하고

농민은 오로지 농사만을 생각하고

관리는 오로지 관청만을 생각하고

학자는 오로지 학문만을 생각한다면

 

이 세상이 낙원이 될 것 같지만

 

시와 정치의 사이

정치와 경제의 사이

경제와 노동의 사이

노동과 법의 사이

법과 전쟁의 사이

전쟁과 공장의 사이

공장과 농사의 사이

농사와 관청의 사이

관청과 학문의 사이를

 

생각하는 사람이 없으면 다만

 

휴지와

권력과

돈과

착취와

형무소와

폐허와

공해와

농약과

억압과

통계가

남을 뿐이다.

 

 

인디언과 다른 점

 

그레이하운드 버스를 타고

콜로라도 고원을 달려가던 인디언이

갑자기 벌판 한 가운데서 내려달라고 고집했다.

그렇게 고속을 달려가면,

영혼이 육신을 쫓아올 수 없기 때문에,

육신을 멈추어 서서 영혼을 기다리겠다는 것이었다.

 

점보제트기를 타고 유럽에서 한국까지

불과 열 시간 만에 날아온 날,

현지 시간 적응한답시고,

반주 곁들여 푸짐하게 저녁을 먹고,

그대로 곯아떨어졌다.

자명종이 울리는 새벽에 눈을 뜬 순간,

여기가 어딘가, 어는 호텔 방인가, 국제선 여객기 속인가,

어느새 집에 돌아왔나, 분별이 안 되어 어리둥절

억지로 아침 먹고, 늠름하게 출근하니,

그때부터 눈꺼풀이 무거워지고, 소화가 안 되고,

화장실에 못 가고, 하품만 끊임없이 쏟아져 나온다.

 

정신은 서울에 돌아왔지만,

육체는 아직도 서양의 어느 도시를 헤매고 있구나

인디언과 다른 점인가

정신보다 느린 나의 육체가

우랄알타이 산맥을 넘어 고비 사막을 지나

동쪽으로 동쪽으로 나를 찾아오려면,

앞으로 두 주일은 더 걸릴 듯

 

 

도다리를 먹으며

 

일찍부터 우리는 믿어 왔다

우리가 하느님과 비슷하거나

하느님이 우리를 닮았으리라고

 

말하고 싶은 입과 가리고 싶은 성기의

왼쪽과 오른쪽 또는 오른쪽과 왼쪽에

눈과 귀와 팔과 다리를 하나씩 나누어 가진

우리는 언제나 왼쪽과 오른쪽을 견주어

저울과 바퀴를 만들고 벽을 쌓았다

 

나누지 않고는 견딜 수 없이

자유롭게 널려진 산과 들과 바다를

오른쪽과 왼쪽으로 나누고

 

우리의 몸과 똑같은 모양으로

인형과 훈장과 무기를 만들고

우리의 머리를 흉내내어

교회와 관청과 학교를 세웠다

마침내는 소리와 빛과 별까지도

왼쪽과 오른쪽으로 나누고

 

이제는 우리의 머리와 몸을 나누는 수밖에 없어

생선회를 안주삼아 술을 마신다

우리의 모습이 너무나 낯설어

온몸을 푸들푸들 떨고 있는

도다리의 몸뚱이를 산 채로 뜯어먹으며

묘하게도 두 눈이 오른쪽에 몰려 붙었다고 웃지만

 

아직도 우리는 모르고 있다

오른쪽과 왼쪽 또는 왼쪽과 오른쪽으로

결코 나눌 수 없는

도다리가 도대체 무엇을 닮았는지를

 

 

연통 속에서

 

바닷가 나무 없는 벌판에

직각으로 꺾어진 시멘트 건물

겨우내 비워둔 방

석유난로 연통 속에서

새끼참새 우짖는 소리

짚가리도 처마도 없고

아무 데도 깃들 곳 없어

바람막힌 연통 속에

보금자리를 틀었다

음산한 서북향 연구실에서

난로불도 못 피우고

주머니에 손을 찌른 채

창가를 서성거린다

연통 속에서 함석을 긁는

새발짝 소리 안쓰러워

 

 

달력

 

TV 드라마는 말할 나위없고

꾸며낸 이야기가 모두 싫어졌다

억지로 만든 유행가처럼 뻔한

거짓말을 늘어놓는 글도 넌더리가 난다

차라리 골목길을 가득 채운

꼬마들의 시끄러운 다툼질과

참새들의 지저귐 또는

한밤중 개짖는 소리가 마음에 든다

가장 정직한 것은 벽에 걸린 달력이고

 

 

작은 사내들.

 

작아진다

자꾸만 작아진다

성장을 멈추기 전에 그들은 벌써 작아지기 시작했다

첫사랑을 알기 전에 이미 전쟁을 헤아리며 작아지기 시작했다

그들은 나이를 먹을수록 자꾸만 작아진다

하품을 하다가 뚝 그치며 작아지고

끔찍한 악몽에 몸서리치며 작아지고

노크 소리가 날 때마다 깜짝 놀라 작아지고

푸른 신호등 앞에서도 주춤하다 작아진다

그들은 어서 빨리 늙지 않음을 한탄하며 작아진다

얼굴 가리고 신문을 보며 세상이 너무 평온하여 작아진다

넥타이를 매고 보기 좋게 일렬로 서서 작아지고

모두가 장사를 해 돈 벌 생각을 하며 작아지고

들리지 않는 명령에 귀 기울이며 작아지고

제복처럼 같은 말을 되풀이하며 작아지고

보이지 않는 적과 싸우며 작아지고

수많은 모임을 갖고 박수를 치며 작아지고

권력의 점심을 얻어먹고 이를 쑤시며 작아지고

배가 나와 열심히 골프를 치며 작아지고

칵테일파티에 나가 양주를 마시며 작아지고

아제는 너무 커진 아내를 안으며 작아진다

 

작아졌다

그들은 마침내 작아졌다

마당에서 추녀 끝으로

나는 눈치 빠른 참새보다도 작아졌다

 

그들은 이제 마스크를 쓴 채 담배를 피울 줄 알고

우습지 않을 때 가장 크게 웃을 줄 알고

슬프지 않은 일도 진지하게 오랫동안 슬퍼할 줄 알고

기쁜 일은 깊숙이 숨겨둘 줄 알고

모든 분노를 적절하게 계산할 줄 알고

속마음을 이야기 않고 서로들 성난 눈초리로 바라볼 줄 알고

아무도 묻지 않는 의문은 생각하지 않을 줄 알고

미결감을 지날 때마다 자신의 다행함을 느낄 줄 알고

비가 오면 제각기 우산을 받고 골목길로 걸을 줄 알고

들판에서 춤추는 대신 술집에서 가성으로 노래 부를 줄 알고

사랑할 때도 비경제적인 기다란 애무를 절약할 줄 안다

 

그렇다

작아졌다

그들은 충분히 작아졌다

성명과 직업과 연령만 남고

그들은 이제 너무 작아져 보이지 않는다

그러므로 더 이상 작아질 수 없다

 

 

나 홀로 집에

 

복실이가 뒷다리로 일어서서

창틀에 앞발 올려놓고

방 안을 들여다본다

집 안이 조용해서

아무도 없는 줄 알았나 보다

오후 늦게 마신 커피 덕분에

밀린 글쓰기에 한동안 골몰하다가

무슨 기척이 있어

밖으로 눈을 돌리니

밤하늘에 높이 떠오른

보름달이 창 안을 들여다본다

모두들 떠나가고

나 홀로 집에 남았지만

혼자는 아닌 셈이다

 

 

교대역에서

 

3호선 교대역에서 2호선 전철을 갈아타려면

환승객들 북적대는 지하통행로와

가파른 계단을 한참 오르내려야 한다

바로 그 와중에서 그와 마주쳤다

반세기 만이었다

머리만 세었을 뿐 얼굴은 금방 알아볼 수 있었다

그러나 서로 바쁜 길이라

잠깐 악수만 나누고 헤어졌다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다시는 만날 수 없었다

그와 나는 모두 서울에 살고 있지만

 

 

늙은 소나무

 

새마을회관 앞마당에서

자연보호를 받고 있는

늙은 소나무

시원한 그림자 드리우고

바람의 몸짓 보여주며

백여 년을 변함없이 너는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송진마저 말라 버린 몸통을 보면

뿌리가 아플 때도 되었는데

너의 고달픔 짐작도 못하고 회원들은

시멘트로 밑동을 싸 바르고

주사까지 놓으면서

그냥 서 있으라고 한다

아무리 바람직하지 못하다 해도

늙음은 가장 자연스러운 일

오래간만에 털썩 주저앉아 너도

한번 쉬고 싶을 것이다

쉬었다가 다시 일어나기에

몇 백 년이 걸릴지 모르겠지만

너의 졸음을 누가 막을 수 있으랴

백여 년 동안 뜨고 있던

푸른 눈을 감으며

끝내 서서 잠드는구나

가지마다 붉게 시드는

늙은 소나무

 

 

다시 목련

 

사월이 오면

목련은 왜 옛 마당을 찾아와 피는 것일까

어머님 가신 지 스물네 해

무던히 오랜 세월이 흘러갔지만

나뭇가지에 물이 오르고

잔디잎이 눈을 뜰 때면

어머님은 내 옆에 돌아와 서셔서

어디가 아프냐고 물어보신다

하루 아침엔 날이 흐리고

하늘에서 서러운 비가 나리더니

목련은 한잎 두잎 바람에 진다

목련이 지면 어머님은 옛집을 떠나

내년 이맘때나 또 오시겠지

지는 꽃잎을 두 손에 받으며

어머님 가시는 길 울며 가볼까

 

 

영산

 

내 어렸을 적 고향에는 신비로운 산이 하나 있엇다.

아무도 올라가 본 적이 없는 영산이었다.

 

영산은 낮에 보이지 않앗다.

산허리까지 잠긴 짙은 안개와 그 위를 덮은 구름으로 하여

영산은 어렴풋이 그 있는 곳만을 짐작할 수 있을 뿐이었다.

영산은 밤에도 잘 보이지 않았다.

 

구름 없이 맑은 밤하늘 달빛 속에

또는 별빛 속에 거무스레 그 모습을 나타내는 수도 있지만

그 모양이 어떠하며 높이가 얼마나 되는지는 알 수 없었다.

 

내 마음을 떠나지 않는 영산이 불현듯 보고 싶어

고속버스를 타고 고향에 내려갔더니

이상하게도 영산은 온데간데없어지고

이미 낯선 마을 사람들에게 물어보니

그런 산은 이 곳에 없다고 한다.

 

 

자유시

 

시를 어떻게 만드는가

그것은 자유다

다만 종이에 써서

누구에겐가 보여 주고

발표해야 한다

그러면 그것은 시다

아무에게도 보여 주지 않고

책상서랍에 넣어 둔 것은

시가 아니다

 

마음껏 발효할 수 없을 때

좋은 술은 익을 수 없어

몇 푼 안 되는

원고료를 받아

마시는 술은 피처럼

진하지도 않고

깊은 향기도 없다

(자유시는 그러므로

자유로운 시도 아니고

자유에 관한 시도 아니다)

 

다만 여기에 세금이 붙는다

 

 

술병

 

건강증진센터의 진단과 처방을

미루고 미루다가 마침내

술을 끊었다

지나간 반세기 동안 즐겨온 술을

끊어버리자

술 마시던 나와

술 끊은 나 사이에

새로운 싸움이 시작되었다

두 개의 나 가운데

어느 쪽도 편들 수 없어

괴롭다

오랫동안 술 마셔온 나는

이미 늙고 병들었으니 불쌍하고

얼마 전에 술 끊은 나는

아직 어리니까 손자처럼 귀엽다

하지만 이 둘 사이에서 시달리다가

몸과 마음이 갈라져 나는

결국 쓰러지고 말 것 같다

쓰러져 건강하게 살기는

더욱 힘들 터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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