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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詩 같은 삶을 위하여
☞ 문학의 뜨락

조정권 시 모음

by 石右 尹明相 2022. 9. 7.

 

 

조정권 시인(1949~ 2017) 서울.

중앙대학교 영어교육과. 경희사이버대학교 석좌교수

시집 비를 바라보는 일곱 가지 마음의 형태, 하늘이불, 산정묘지등 다수.

녹원문학상, 김수영문학상, 소월시문학상, 현대문학상 등 수상

 

 

조정권 시 모음

 

 

양파

 

옷을 잔뜩 껴입고 사는 여자가

모임에 나오곤 했었지

어찌나 많은 옷을 껴입고 사는지

비단을 걸치고도 추워하는 조그마한 중국여자 같았지

 

옷을 잔뜩 껴입고 사는 그 여자의 남편도

모임에 가끔 나오곤 했었지

남자도 어찌나 많은 옷을 껴입고 사는지

나온 배가 더 튀어나온 똥똥한 중국남자 같았지

그 두 사람 물에서 건지던 날

옷 벗기느라 한참 걸렸다네

 

 

약리도(躍鯉圖)

 

물고기야 뛰어 올라라

최초의 감동을

나는 붙잡겠다

 

물고기야 힘껏 뛰어 올라라

풀바닥 위에다가

나는 너를 메다치겠다

 

폭포 줄기 끌어내려

네 눈알을 매우 치겠다 매우 치겠다

 

 

산정묘지1

 

겨울 산을 오르면서 나는 본다.

가장 높은 것들은 추운 곳에서

얼음처럼 빛나고,

얼어붙은 폭포의 단호한 침묵.

가장 높은 정신은

추운 곳에서 살아 움직이며

허옇게 얼어 터진 계곡과 계곡 사이

바위와 바위의 결빙을 노래한다.

간밤의 눈이 다 녹아버린 이른 아침,

산정(山頂)

얼음을 그대로 뒤집어 쓴 채

빛을 받들고 있다.

만일 내 영혼이 천상(天上)의 누각을 꿈꾸어 왔다면

나는 신이 거주하는 저 천상(天上)의 일각(一角)을 그리워하리.

가장 높은 정신은 가장 추운 곳을 향하는 법.

저 아래 흐르는 것은 이제부터 결빙하는 것이 아니라

차라리 침묵하는 것.

움직이는 것들도 이제부터는 멈추는 것이 아니라

침묵의 노래가 되어 침묵의 동렬(同列)에 서는 것.

그러나 한번 잠든 정신은

누군가 지팡이로 후려치지 않는 한

깊은 휴식에서 헤어나지 못하리.

하나의 형상 역시

누군가 막대기로 후려치지 않는 한

다른 형상을 취하지 못하리.

육신이란 누더기에 지나지 않는 것.

헛된 휴식과 잠 속에서의 방황의 나날들.

나의 영혼이

이 침묵 속에서

손뼉 소리를 크게 내지 못한다면

어느 형상도 다시 꿈꾸지 않으리.

지금은 결빙하는 계절, 밤이 되면

뭍과 물이 서로

끌어당기며

결빙의 노래를 내 발밑에서 들려 주리.

 

여름 내내

제 스스로의 힘에 도취하여

계곡을 울리며 폭포를 타고 내려 오는

물줄기들은 얼어붙어 있다.

계곡과 계곡 사이 잔뜩 엎드려 있는

얼음 덩어리들은

제 스스로의 힘에 도취해 있다.

결빙의 바람이여,

내 핏줄 속으로

회오리 치라.

나의 발끝에서 머리끝까지

나의 전신을

관통하라.

점령하라.

도취하게 하라.

산정(山頂)의 새들은

마른 나무 꼭대기 위에서

날개를 접은 채 도취의 시간을 꿈꾸고

열매들은 마른 씨앗 몇 개로 남아

껍데기 속에서 도취하고 있다.

여름 내내 빗방울과 입맞추던

뿌리는 얼어붙은 바위 옆에서

흙을 물어뜯으며 제 이빨에 도취하고

바위는 우둔스런 제 무게에 도취하여

스스로 기쁨에 떨고 있다.

 

보라, 바위는 스스로의 무거운 등짐에

스스로 도취하고 있다.

허나 하늘은 허공에 바쳐진 무수한 가슴.

무수한 가슴들이 소거(消去)된 허공으로,

무수한 손목들이 촛불을 받치면서

빛의 축복이 쌓인 나목(裸木)의 계단을 오르지 않았는가.

정결한 씨앗을 품은 불꽃을

천상(天上)의 계단마다 하나씩 바치며

나의 눈은 도취의 시간을 꿈꾸지 않았는가.

나의 시간은 오히려 눈부신 성숙의 무게로 인해

침잠하며 하강하지 않았는가.

밤이여 이제 출동명령을 내리라.

좀더 가까이 좀더 가까이

나의 핏줄을 나의 뼈를

점령하라, 압도하라,

관통하라.

 

한때는 눈비의 형상으로 내게 오던 나날의 어둠.

한때는 바람의 형상으로 내게 오던 나날의 어둠.

그리고 다시 한때는 물과 불의 형상으로 오던 나날의 어둠.

그 어둠 속에서 헛된 휴식과 오랜 기다림

지치고 지친 자의 불면의 밤을

내 나날의 인력으로 맞이하지 않았던가.

어둠은 존재의 처소(處所)에 뿌려진 생목(生木)의 향기

나의 영혼은 그 향기 속에 얼마나 적셔두길 갈망해 왔던가.

내 영혼이 내 자신의 축복을 주는 휘황한 백야(白夜)

내 얼마나 꿈꾸어 왔는가.

육신이란 바람에 굴러가는 헌 누더기에 지나지 않는다.

영혼이 그 위를 지그시 내려 누르지 않는다면.

 

 

근성(根性)

 

배추를 뽑아 보면서 안쓰럽게 버티다가

뽑혀져 나온 뿌리들을 살펴보면서

나는 여지껏 뿌리들이 흙 속에서 악착스럽게

힘을 주고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뿌리는 결국

제 몸통을 따라올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든다

배추를 뽑아 보면서 이렇게 많은 배추들이

제각기 제 뿌리를 데리고 나옴을 볼 때

뿌리들이 모두 떠난 흙의 숙연(肅然)함은

어디서 오는 걸까

배추는 뽑히더라도 뿌리는 악착스러울 이만큼

흙의 혈()을 물고 나온다.

부러지거나 끊어진 배추 뿌리에 묻어 있는 피

이놈들은 어둠 속에서도

흙의 육()을 물어뜯고 있었나보다

이놈들은 흙 속에서 버티다가 버티다가

독하게 제 하반신을 잘라버린 것이라는 생각이든다.

나는 뽑혀지는 것은

절대로 뿌리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뽑혀지더라도 흙 속에는 아직도 뽑혀지지 않은

그 무엇이 악착스럽게 붙어 있다.

흙의 육()을 이빨로 물어뜯은 채.

 

 

고요로의 초대

 

잔디는 그냥 밟고 마당으로 들어오세요

열쇠는 현관문 손잡이 위쪽

담쟁이넝쿨로 덮인 돌벽 틈새를 더듬어 보시구요

키를 꽂기 전 조그맣게 노크하셔야 합니다

적막이 옷매무새라도 고치고 마중 나올 수 있게

대접할 만한 건 없지만 벽난로 옆을 보면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은 장작이 보일 거예요

그 옆에는

낡았지만 아주 오래된 흔들의자

찬장에는 옛 그리스 문양이 새겨진 그릇들

달빛과 모기와 먼지들이 소찬을 벌인 지도 오래되었답니다.

방마다 문을, 커튼을, 창을 활짝 열어젖히고

쉬세요 쉬세요 쉬세요 이 집에서는

바람에 날려 온 가랑잎도 손님이랍니다

많은 집에 초대를 해 봤지만 나는

문간에 서 있는 나를

하인(下人)처럼 정중하게 마중 나가는 것이다

안녕하세요 안으로 들어오십시오

그 무거운 머리는 이리 주시고요

그 헐벗은 두 손도

 

 

白紙 3

 

방황하는 이 옆에서는 아무 질문도 하지 말 것.

침묵으로써, 그에 합당한 예의를 갖출 것.

그 옆에서는 다만 공손함으로써 그 영혼에 합당한 예절을 갖출 것.

요란스러운 화장기를 벗길수록 인간의 영혼이란

고통苦痛, 그 자체에 지나지 않는 것, 살아온 날들과 또 살아야 할

수많은 날들의 두려움에 대하여

지상至上의 위안이란 마치 간섭과도 같은 것.

그것은 또한 내가 내 스스로에 행하는 강요와도 같은 것

때때로 침묵함으로써,

이 시간에 나는 마음과 영혼과 빈손을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도

생명을 느끼고 있다.

살아 있다는 것은 결국 뼈를 찔리는 일이 아닌가.

뼛속 깊이 찔리는 그 실감나는 시간의 축적蓄績인 영혼

흔히 바쁘게 지나치다가도 유정有情한 눈길을 주다 보면

백지白紙는 비어 있음으로써 충일充溢한 불을 켜고 있다.

 

 

수유리(水踰里) 시편(詩篇)

 

여느 새벽보다도 일찍이

화계사 숲속의 약수(藥水)터로 오르다가 보았다.

자색(紫色)안개에 휘감긴 아름드리 태고목(太古木)들의

숙연한 전신침묵(全身沈黙),

한결같이 그 주변에서 무릎을 꿇고 있는

큰 바위들의 단좌(端坐).

그때던가 어제까지도 죽었다고 생각해오던

고목(古木)들의 출렁거리는 뿌리둥치께에서

놋쇠와 놋쇠가 부딪듯이 쩡 하는 소리를 들은 것은.

나는 걸음을 멈추고

이 겨울 내내 산중(山中)에서 두문불출(杜門不出)하고 있는

어느 강철의 근육을 향그러운 쇠망치로

때려 깨우는 소리를 듣고 있었다.

 

 

수유리(水踰里)에 사는 옹()

 

수유리(水踰里)에 사는 옹()을 처음 뵈러 가는 날,

시장 근처 공터를 지나다가 백운대쯤에서 굴러 내린 듯한

집채만 한 바윗덩이를 굵은 동앗줄로 꽁꽁 묶는 이를 만났다.

바위는 이미 묶지 않아도 묶여 있는데 또 묶을 게 뭐요?

묶여 있다는 것을 당신들이 안 보니까 이렇게 묶는 거죠.

기억나는 일이 있다.

두 번째 시집(詩集)을 어느 아는 분에게 드렸더니

며칠 후 책의 몰골을 열십자로 나눠

질긴 노끈으로 꽁꽁 묶어 보내왔다.

겉장과 속 내용들을

한 장 한 장 풀을 발라 봉해 버린 채.

알겠다,

()을 만나면서 책도 묶고 바위도 묶고

혀도 묶고 의미도 봉해 버리는 그 입.

 

 

송곳눈

 

내가 아는 환쟁이 영감은

그림 한 장 그려달라고 하자 보는 앞에서

제 눈을 송곳으로 찌른 모양이야

보기 싫은 작자 영 보지 않겠다고

제 눈알을 파 버린 셈이지

재미있는 것은 그 영감이 파 버린 눈으로

세상을 보며 그림은 그려 왔다는 점이야

두 눈을 뜨고 두루 세상을 보는 것보다

한쪽 눈만을 송곳처럼 뜨고 보는 편이 훨씬 참을 만했다는 거지

송곳 같은 눈으로 그림을 그렸으니 무엇을 그렸겠나

그려 놓고 나선 찢고

그려 놓고 나선 찢고

그림이란 그가 물 위에 써놓고 간 흔적일 뿐이지

물 위에 이름 뿌리고 간 영감

어느 바위틈에다 송곳눈을 박아 놓았을지도 모르지

 

 

헐벗음

 

몸이란 각 부위의 시끄러움이요 삐걱거림이니.

두개골, 환기통 없는 흡연실

목줄, 한숨 지나다니는 통로

, 석탄층 매장돼 있는 곳

흉곽, 제방 공사가 소용없는 늪

대장, 모래 서식지

척추, 구부러지기 직전

팔다리, 곧 지팡이에 의존해야 되는 부위

, 늙을수록 더 시끄럽거나 지루한 혓바닥 살아나는 곳.

영안실 문을 나서

이대로 가도 어쩔 수 없다 끄덕이다가

행길 건너 시장통

순대국 집에서 가부좌한 돼지머리와 마주쳤다.

겉봉 벌렁 열어놓은 코와 귀

옆 볼을 꾹 눌러 보니 웃는 게 아닌가.

코를 꾸욱 눌러 보니 가을 하늘처럼

파안대소하는 게 아닌가.

박장대소하는 게 아닌가.

 

 

숯덩이

 

혁명(革命)이나 정변(政變)으로 단련된

근육(筋肉)투성이가 숯이다

스스로의 권력(權力)과 오만으로

구워낸 것이 숯이다

사람이 서로를 믿지 못한다고 한다

살기가 어려워진 탓이겠지

남대문시장(南大門市場)에서는 사람이 사람을 밟는다

저놈의 숯덩이

수많은 생계(生計)를 밟고 올라선 저놈

사람들은 숯을 사 간다

남보다 더 강렬해지기 위해서

남 앞에 서서 따지고 할 말을 하기 위해서

사람들은 숯을 사 간다

할 말을 하지 못하고 사는 저 병신

안주머니에 시커멓게 손발을 감추고 있는 것도 숯이다

어둑어둑한 골목으로 들어가

손에 먹칠을 해가며 비틀어 죽인 것도 숯이다

 

 

심골(心骨)

 

한 덩이의 마음을 묵()에다 개고 또 개면서

오랫동안 가슴으로 품어 온 비쩍 마른 갈필 하나로

풀어헤쳐 놓은

옛 그림을 보고 있으면

어디선가/ 일만개(一萬個)의 꽃송이를 전신에 단

꽃나무들이 한결같이 밤을 이루면서 몰려들고 있다는 기분이 든다.

어디선가

일만개(一萬個)의 꽃송이를 전신에 단 꽃나무들이

사방에 고요한 암향(暗香)을 끼얹으며

방울을 터뜨리고 있다는 기분이 든다.

저마다 고요한 방울소리로 찰랑대다가

어떤 놈은 적음(寂音)속으로 스며들고

어떤 놈은 갈필 선()의 끝간 곳으로 미끄럼질을 타고 내려간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있다.

마르고 수척한 나뭇가지들이 점점 야위어가고 있다는 점이다.

그림을 볼 때마다, 수척해가고 야위어가는 그놈들이

말라가면서 더 강골(强骨)이 되어 있다는 점이다.

()를 쓰는 내게는 이러한 일이 보통이 아니다.

 

 

코스모스

 

십삼 촉보다 어두운 가슴을 안고 사는 이 꽃을

고사모사(高士慕師) 꽃이라 부르기를 청하옵니다.

뜻이 높은 선비는 제 스승을 홀로 사모한다는 뜻이오나

함부로 절하고 엎드리는

다른 무리와 달리, 이 꽃은

제 뜻을 높이되

익으면 익을수록

머리를 수그리는 꽃이옵니다.

눈 감고 사는 이 꽃은

여기저기 모여 피기를 꺼려

저 혼자 한 구석을 찾아

구석을 비로소 구석다운 분위기로 이루게 하는

고사모사(高士慕師) 꽃이옵니다.

 

 

노점상

 

열 클립의 햇빛을

M16 탄창에 장전하고

유채꽃밭에 난사합니다.

 

5월의 이런 날씨

중랑천변에 앉아 팝니다.

 

 

벼랑 끝

 

그대 보고 싶은 마음 죽이려고

산골로 찾아갔더니, 때 아닌

단풍 같은 눈만 한없이 내려

마음속 캄캄한 자물쇠로

점점 더 한밤중을 느꼈습니다.

벼랑 끝만

바라보며 걸었습니다.

가다가 꽃을 만나면

마음은

꽃망울 속으로 가라앉아

재와 함께 섞이고,

벼랑 끝만 바라보며 걸었습니다.

 

 

어둠의 뿌리

 

열한 시 이후부터 밤은 마당에 혼자 남는다.

지샐 곳이 없는 나뭇잎들이 구석에 모여

구석에 깃든 어둠을 한층 더 짙게 한다.

이런 밤엔 누구와 자도 잠들 수 없다는 것을 나는 안다.

돌맹이가 가득찬 밤하늘이 내리누르는

납덩이같은 어둠 때문만이 아니다.

유난히도 마당 구석에 진하게 모여 있는

나뭇잎의 어둠 때문만이 아니다.

이런 밤엔 기댈 곳이 없는 사람들은

제 뿌리를 그리워한다.

기댈 곳이 없는 모든 것들이

차가운 흙 위에 등을 깔고 누워

흙 속의 어느 따스한 품을 간절히 생각하고 있다.

 

 

1인 시위

 

무더운 날이었다.

얼굴에 셔터를 내린 전경들이 바라보는 가운데

국회의사당 정문 앞에서 아주머니 한 분이 방석 깔아놓고

생수병을 든 채 노래를 부르고 있다.

천남성(天南星) 같은 깃발 하나 보도블록 틈에 세워 놓고

누가 보든 말든 의사당을 향해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신호가 바뀌어도 지나가는 차들은 모두 멈춘 채 듣고 있었다.

고상함과 근엄을 갖춘

신분 높은 집을 식당으로 개조해 막국수를 마는 저 노래.

도마 위의 활어를 웃음바다로 놓아주는 저 노래.

차들이 모두 멈춘 채 서 있었다.

저 노래를 밟고 지나갈 순 없다며.

 

 

머나 먼

 

발은 객지(客地)

죽어라 하고 뛰어내린 곳이

.

 

 

목숨

 

마음의 어디를 동여맨 체 살아가는 이를

사랑한 것이 무섭다고 너는 말했다

두 팔을 아래로 내린 채 눈을 감고

오늘 죽은 이는 내일 더 죽어 있고

모레엔 더욱 죽어 있을 거라고 너는 말했다

사랑할수록 있는 사람들 틈에서 마음껏

사랑하며 살아가는 일

이 세상 여자면 누구나 바라는 아주 평범한 일

아무것도 원하지는 않으나 다만

보호받으며 살아가는, 그런

눈부신 일이 차례가 올 리 없다고 너는 말했다

 

 

 

그는 여기 있으나

그의 얼굴은 먼 바람 소리 속으로

여행을 떠나갔다

그리고 더 먼 곳에 가서

그의 마음을 만났다

 

 

독락당

 

독락당 대월루는

벼랑 꼭대기에 있지만

예부터 그리로 오르는 길이 없다.

누굴까, 저 까마득한 벼랑 끝에 은거하며

내려오는 길을 부셔 버린 이.

 

 

꽃잎

 

퇴근 시간 때 전철에 올라탄

등산복차림 사내가

산철쭉꽃가지 한 묶음 들고 내 옆자리에

그냥 말없이 앉아 있다

동덕여대역에서 내릴 때까지

나는 꽃을 무릎에 앉힌 두 손만 바라보았다.

우리가 사랑했던 것들은

모두 무거운 것들이었구나.

 

 

향그런 봄의 쇠망치소리를 들으며

 

여느 새벽보다도 일찍이

화계사 숲속의 약수터로 오르다가 보았다.

자색 안개에 휘감긴 아름드리

태고목들의 숙연한 전신침묵을,

한결같이 그 주변에서

무릎을 꿇고 있는 큰 바위들의 단좌를.

그때던가 어제까지도 죽었다고 생각해 오던

고목들의 출렁거리는 뿌리 둥치께에서

놋쇠와 놋쇠가 부딪듯이 쩡, 하는 소리를 들은 것은

이 겨울 내내 산중에서 두문불출하고 있는

어느 강철의 근육을 향그러운 쇠망치로

때려 깨우는 소리를 듣고 있었다.

 

 

갑사

 

낙방(落房)에 홀로 남아

먼 하늘에서 참나무 장작패는 소리를

약으로 듣는 늦은 겨울날 오후

 

 

포도 식구들

 

포도 한 송이에

식구들이 한데 모여 살고 있다

가난한 시절 좁은 방에서 열 식구가 산 적이 있었다

가족이란 저렇게 모여 사는 것이다

포도알 같이 저렇게 다닥다닥 살을 붙이고

웃고 또 울고 또 웃는 것처럼

 

 

기억해 내기

 

혼자

.

 

진 채

내게 배송된 꽃.

발송인을 알 수 없던 꽃.

 

그 꽃을 기억해 냈다.

슈베르트 음악제가 한 달간 열린

알프스 산간 마을

한가로이 풀꽃에 코 대고 있는 소 떼들이

목에 달고 다니는 방울

그 아름다운 화음에서.

 

 

그 어른

 

찔레 향 머문 자리에

누군가의 마음이 먼저 문안을 드렸구나.

느껴지는 건 산 보다 산 속의

어른.

 

이놈아 물통처럼 서 있지 말고

옛다, 이거나 받아라.

밭에서 난 장대비 한 아름 꺾어 내게 던진다.

젖은 고구마 잎사귀들 후두둑 쏟아진다.

 

 

겨울 주례사

 

언 호숫가 겨울나무가 서 있다.

흰 눈의 면사포를 쓰고 있다.

눈이 온다.

일생 겨울숲속에서 밑 둥은 얼어있을 것이다.

바람 속에서

견디고 있는 마음과

벌서고 있는 마음

진정 두 마음은 한마음임을 약속하겠는가.

 

 

고요 시편(詩篇)

 

1

누가 이 안을 쓸고 또 쓸었을까.

눌리고 싶어

이 고요 닫아건다.

 

2

안을 담아

밖으로 내놓는다.

안을 열고

활짝 대한다.

안도 시끄럽다.

 

3

안을 열어 두고

이 고요 잠근다.

밖이 가득하다.

 

 

같이 살고 싶은 길

 

1.

일 년 중 한 일주일에서 열흘 정도,

혼자 단풍 드는 길

더디더디 들지만 찬비 떨어지면 붉은 빛 지워지는 길

아니 지워버리는 길

그런 길 하나 저녁나절 데리고 살고 싶다

 

늦가을 청평쯤에서

가평으로 차 몰고 가다 바람 세워놓고

물어본 길

목적지 없이 들어가 본 외길

땅에 흘러다니는 단풍잎들만 쓸고 있는 길

 

일년 내내 숨어 있다가

한 열흘쯤 사람들한테 들키는 길

그런 길 하나 늘그막에 데리고 같이 살아주고 싶다

 

2.

이 겨울 흰 붓을 쥐고 청평으로 가서

마을도 지우고 길들도 지우고

북한강의 나무들도 지우고

김나는 연통 서너 개만 남겨놓고

온종일

마을과

언 강과

낙엽 쌓인 숲을 지운다.

그러나 내가 지우지 못하는 길이 있다.

약간은 구형인 승용차 바큇자국과

이제 어느 정도 마음이 늙어버린

남자와 여자가 걷다가 더 가지 않고 온 길이다

 

 

국도

 

누런 흙물에 쓸려

무너져 내린 용미리 공원묘지

국도(國道)로 흘러내려온 수많은 인간들의 해골과

발에 차이는 관짝들.

해골들 입 벌리고

눈구멍 뚫린 채

현대공업사 공터와

SK주유소 마당까지 들어와

제 몸뚱이 찾아다니고 있다.

트럭과 자가용과 버스가 뒤얽힌 사십삼번 국도.

빗물에 굴러다니는 인간의 해골을 밟고

걷어차며, 축사에서 뛰쳐나온

돼지들이 국도를 돌아다니고 있다.

 

*43번 국도: 세종시 전의면~ 강원도 고성읍을 잇는 도로(295.3

 

 

설일(雪日)

 

흰색이 세상을 청첩했구나

바람이

눈을 쓸고 있네요.

쓸다가 쓸다가 하도 고요해져서

두 손이 하염없어졌네요.

 

 

우기(雨氣) / 조정권

 

밤이 주는 선물은 불면

창밖을 보면 매일 비

새벽 한 시 술 사러 나가면

가로등 불빛이 노숙하고 있다.

우산 던져 버리고

그 불빛 아래서 시가 노숙하고 있다.

 

 

폐병쟁이 내 사내

 

산가시내 되어 독 오른 뱀을 잡고

백정집 칼잽이 되어 개를 잡아

청솔가지 분질러 진국으로만 고아다가

후 불며 먹이고 싶었네

미친 듯 타오르는 눈빛을 재워 선한 물같이

맛깔 데인 잎차같이 눕히고 싶었네

끝내 일어서게 하고 싶었네

어디 내 사내뿐이랴

 

 

개나리 노란 한숨

 

저 바람이 스치며 간다.

노란 한숨이 아직은 작게 내려오는

봄빛 아래에서

바람이 스친, 아린 자리를 쓰다듬으며

허공에 머물러 있다.

사랑한다, 라고 말할 시간이 온 것이다.

아무도 사랑하지 않은 시간은 없었다고

말할 시간이 온 것이다.

 

 

귤 한 알

 

인공적으로 연명하는 나에게

귤은 먹을 수 없는 것이지만

나는 그 작은 귤의 껍질을 깠다.

코로 가져갔다.

사계절이 코끝을 스치며 지나갔다.

향기만이.

향기만이.

그게 삶이라는 듯

병원 창틀에 작은 햇살이 머문다.

이런 날이면 어제의 오후엔

웬 눈이 왔는지 싶다.

청명한 오늘만을 살라고!

오늘만이 삶이라고!"

 

 

겨울산

 

冬至 지나 잎 다 지자

함박눈이 앞 을 크게 안는다.

밤이 들자

다시 한번 크게 안는다.

어둠 속에서

모래 한 알을 품고 있다.

 

 

비를 바라보는 일곱 가지 마음의 형태

 

1.

새앙철 지붕 위로 쏟아지는 쇠못이여

쇠못 같은 빗줄기여

내 어린날 지새우던 한밤이 아니래도 놀다 가거라

 

잔디 위에 흐느끼는 쇠못 같은 빗줄기여

니맘 내 다 안다

니맘 내 다 안다

내 어린 날 첫사랑 몸져눕던 담요짝 잔디밭에 가서

잠시 놀다 오너라

 

집집의 어두운 문간에서

낙숫물 소리로 흐느끼는

니 맘 내 자알안다

니 맘 내 자알안다

 

2.

풀밭에 떨어지면

풀들과 친해지는 물방울같이

그대와 나는 친해졌나니

머언 산 바라보며

우리는 노오란 저녁 해를 서로 나누어 가졌나니

 

오늘 먼 산 바라보며

내가 찾아가는 곳은 그대의 무덤

빈 하늘 가득히 비가 몰려와

눈알을 매웁게 하나니

 

3.

바람이여 네가

웃으며

내게로 달려왔을 때

나무는

가장 깊숙한 빈터에서

흡족한 얼굴을 밝힌다

 

바람이여

네 지순한 손길이

내 몸을 열어놓을 때

나는 낮은 움직임

바다 밑으로 손을 펴

눈먼 이의 눈먼 가슴을 더욱 가라앉힌다

 

4.

지난해의 빗물에 녹이 슨 꽃이 다시 녹슬기 시작한다면

바라보다가 녹이 되어 떨어진 당신의 눈은

향기가 소모된 나무껍질일 것이다

다시 녹슬은 꽃이 우수수 진다면

문질러보다가 분질러진 당신의 손은

참혹한 덩어리일 것이다

빗줄기들이 유리에 부딪혀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는다면

당신은 귓속에 병마개를 틀어막고 들어야 할 것이다

비가 내리는 동안 당신의 시간이 멈춘다면

시간은 죽어 숨소리를 그칠 것이다

 

5.

한없이 어루만지는 부드러움이 되는

당신의 두 팔을 받으며 편안히 눕는다.

당신의 마음은 나의 옷,

포근한 온기를 온몸에 감고 잠이 든다.

당신의 애정은 푸른 밥, 나의 소화기관은

하루 종일 꽃망울을 벌여

일초일초(一抄一抄) 꽃피워낸다.

태양이 한 아이의 손바닥에

가지런히 씨앗을 올려놓고 웃음짓듯이

당신의 눈길이 내 눈을 묶을 때

나는 순한 물이 된다.

속삭이고 싶다 속삭이고 싶다.

지나가는 바람에게 마음을 주고 싶다.

형태 없는 가을에,

내 손에 와 닿는 것들은 순한 물이 되어 고인다.

나의 틀은 좁은 마당에서도 알맞다.

당신의 눈이 내 눈에 고이고,

나는 잘 길들여진 어린 나무,

친근한 빗자루를 들고 마당을 쓸고 싶다.

오래오래 헤매고 싶다.

형태 없는 가을에 사면이 하얗게 칠해진 마당에서

나는 순한 물이 되어

고인다.

당신의 살 위에 내 살을 댄 채.

 

6.

비 내린 풀밭이 파란 건

풀잎 속으로 몰려가는 푸른 힘이 있기 때문이다

풀밭에 힘을 주는 푸른 손목이 숨어 있기 때문이다

풀밭이 노오랗게 시드는 건

힘을 주던 손목이 부러졌기 때문이다

나는 이 사실을 그대에게 보일 것이다

우리들의 몸속에서도 힘을 주던 손목이

사나워져가고 있다고

 

세 명의 사나이가 풀밭에 서면

풀밭과 세 사나이는 하나다

세 명의 사나이가 풀밭을 지나가면

풀밭과 세 사나이는 둘로 격리된다

그것은 튼튼하고 확실한 형태였다

나뭇가지가 부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내 속에서는 분질러진 마음이 오래오래 남아 있었다

그것은 튼튼하고 확실한 형태였다

나는 그대에게 보여줄 것이다

균열된 유리창을 통하여

풀밭을 바라보는 세 가지 마음을

튼튼하고 확실한 형태를

나는 그대에게 보여줄 것이다

비 내린 풀밭으로 걸어 나가는 세 개의 발이

갇혀가다가 도망쳐 나오는 시간의 궤적과 공간을

그 튼튼하고 확실한 형태를

 

7.

그믐밤 헛간에 빠졌을 때다.

나는 부러진 도끼처럼 뒹굴었다.

완강한 어둠 속에서 흰팔의 소리들이

나를 불러내고 있었다.

다 탄 심지처럼 겨울나무들이 몰려오고

얼어붙은 땅바닥에서

바람소리들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흰팔의 소리들이 뼈를 쪼개고 있었다.

소리들은 찢어진 살을 만지고 있었다.

바늘을 삼킨 위독한 나를 부르며

잃어버린 나라에서도 불타오르던 암석들을

데려오고 있었다.

물이 엎질러진 마당구석에서 아이들은 얼굴을

비춰보며 놀고, 나는 얼음이 갈라지는

헛간의 빙벽에 매달려 있었다.

이번에는 소리들이 뼈를 부딪히고 있었다. 소리들은

바다로 기울어져가고,

내 안에서는 하얗게 고함치며 갈라지는

뼈가 있었다. 그러자

바람이 메마른 나뭇가지의 살을 씻어내리다

실신하는 바다에서

흰팔의 소리들이 다시 들려오고 있었다

 

 

올여름도 그냥 가지는 않는구나

 

눈 어두운 사람

귀밖에 없어

비야 부탁한다 라디오 좀 틀어보렴

전국에서 목숨의 대행진이 벌어지고 있다

부탁한다 저 저수지같이 어두운 텔레비전도 켜보렴

필요하다면 네 이빨을 써서라도*

 

*'네 이빨을 써서라도'는 체코의

야로슬라브세이페르트(Jaroslav Seifert, 1901~86)

<페스트 기념비>의 한 구절.

 

 

 

바싹 말라버린 오늘의

새가 날아가는 나뭇가지에

앙상한 내가 보이고

나뭇가지 앙상한 내가

빛나도록 살을 씻어내며

오래오래 달리고 달리고

나는 새가 날아가버린 방향을

바라보는 눈이었다

 

 

대산 對山

 

딱따구리 겨울 저녁을 쪼다가 지나갔다

틀니 하나 남기고.

소나무 가지

밤눈 온 흔적 없다

산은 급히 올라오는 이의 바쁨을 꾸짖고

우둔한 마음으로 아침에 내려 보낸다

 

 

하늘이불

 

착하고 순한 푸줏간집 아저씨가

죽었다

장의사 아저씨가

지나가던 하늘을

한 자락 찢어 내어

이불처럼 덮어 주었다.

 

 

부부

 

시와 시인은 새벽마다 비와 함께 산책 나갔다가

돌아올 때는 각자 혼자 돌아온다.

30년을 살대고 살았어도 등 돌리고 누운 저 잔등은

통화이탈지역 망망대해.

 

 

길 위의 행복

 

마음을 저축하면

이자가 붙나

마음을 투자하면 두 배가 되나

 

아니다 마음을 헌금하는 거다

꽃에다 별에다 새에다 샘물에다 이슬방울에다

피라미에다

길에다

무릎을 땅에 꿇고 두 팔을 땅에 댄 다음

머리가 땅에 닿도록 절하면서

길에다 헌금하는 거다

 

 

목숨

 

마음의 어디를 동여맨 채 살아가는 이를

사랑한 것이 무섭다고 너는 말했다

 

두 팔을 아래로 내린 채 눈을 감고

오늘 죽은 이는 내일 더 죽어있고

모레엔 더욱 죽어 있을 거라고 너는 말했다

 

사랑할 수 있는 사람들 틈에서 마음껏

사랑하며 살아가는 일

이 세상 여자라면 누구나 바라는 아주 평범한 일

아무것도 바라지는 않으나 다만

보호받으며 살아가는

그런 눈부신 일의 차례가 올리 없다고 너는 말했다

 

조금도 나아지 않는 오늘 오늘 오늘 오늘의 연속

이제까지 어렵게 살아왔는데 앞으로도

이렇게 어렵게 살아가야 한다면

차라리 죽음을 택하는 길이 쉬운 거라고 너는 말했다

 

잊혀져가는 거라고 했다

세상 모든 이들로 부터 잊혀져가는 거라고 너는 말했다

 

잊혀진 내일은 내일이면 더 잊혀져있고

그것은 세상일과 가장 많이 닿아 있는 일이라고

너는 말했다

 

 

고구마 푸대

 

폭설로 길 끊어지기 전 고구마 푸대를 짊어진 채

어느 아비의 마음이 급한 산길을 달려 아들이 공부하는

암자로 올라가 아궁이를 지펴놓고 내려가나

벌써 산길 끊어졌다.

 

 

 

거기 강화도 펜션 맞지요?

몇 년 전 제가 묵었는데요.

예약하고 싶은데요.

 

지금은 겨울입니다.

우리 민박집은

이제부터 겨울 파도소리만 받습니다.

 

사람은 받지 않는

그 섬에 가고 싶다.

 

 

누졸(陋拙)

 

누졸하다고 하는 마음은 무엇인가

시는

단벌처럼 빗소리 걸치고 있는 가문비나무 옆에

대문도 없이 누졸하게 지은 초옥

그 초옥에 지붕마저 없다면 얼마나 좋은가.

 

 

처방전

 

뭉게구름 90일분

시냇물 소리 90일분

불암산 바위 쳐다보기 90일분

빈껍데기 달 90일분

 

귀하의 삶은

의료혜택이 적용되지 않습니다.

 

 

빗소리

 

밤잠 없는 손님처럼

수수밭에서 가는 실 말리는 바람소리

수수 잎에 민박하면 좋겠네.

 

수수밭 밟고 지나가는 몇 가닥 빗소리

수수껍데기 밟고 가는 바람소리

내 안으로 들이치면 좋겠네.

 

무한대허로 내 귀때기 끌고 가

가느다란 실에 매달아놓은 밤비소리

창문틀 떨어져나간 두보杜甫네 집

 

잠 달아난 베개 들고

내 들창가로 찾아오면 좋겠네.

내 안으로 들이치면 좋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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