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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詩 같은 삶을 위하여
☞ 윤명상 목회 칼럼

한국교회를 향한 고언, 그리고 신앙의 성찰 [윤명상목사]

by 石右 尹明相 2008. 2. 24.

 

 

한국교회를 향한 고언 그리고 신앙의 성찰

 

 

       ★ 순   서 ★

 

      1. 군림하는 교회

      2. 교회건축-그 지상과제

     3. 건축 대신 해야 할 일

      4. 교회의 심각한 빈부격차

      5. 차라리 목회 그만 둬

      6.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7. 화 있을진저…

      8. 설교에 대한 함정

      9. 마지막 외침

 

 

 

 

  1. 군림하는 교회

 

지금 한국의 기독교는 전반적으로 사회로부터 심한 배척과 질시를 받고 있다.

개인적으로 기독교를 싫어하거나 거부하는 수준을 넘어

집단화 조직화된 기독교 안티그룹으로 교회에 대한 비판의 전면에서

사회적인 여론몰이를 하고 있는 것이다.

교회가 비호감 내지는 혐오집단으로 매도되는 현실은 각종 매스컴이나 인터넷,

그리고 차갑고 적대적인 여론에서 쉽게 발견된다.

그러나 문제는 우리 기독교가 받는 질타의 원인이

기독교에 대한 일반 사람들의 오해나 편견 때문이 아니라

그동안 교회가 세상에 보여준 탐욕스러운 이기적인 모습에 대한

당연한 결과라는 점에서 가슴이 아프고 답답하다. 아니, 분노하게 된다.

한국 교회는 본연의 사명인 ‘구원의 문’을 스스로 닫는 우를 범하고 있다.

구원을 외치며 전도에 열을 올리면서도 그 관심과 열성이 오히려

부정적인 모습으로 비춰지는 데는 전적으로 교회의 책임이라 할 것이다.

한때는 한국의 기독교인 수가 1천 2백만 명이라 했지만 지금은 그수를

현재의 기독교인 규모로 이야기하는 목회자나 신자는 거의 없다.

대부분의 주요 교단들은 매년 교세가 줄어들고 있는데,

특히 청년층 청소년층 유년층으로 내려갈수록 크리스천의 감소는

심각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전체적인 신자의 감소는 분명 엄청난 충격이다.

그러나 그보다 더 큰 충격은 한국 교회가 전도해야 할 (세상)사람들로부터

신뢰를 잃었다는 것이다.

그것도 한술 더 떠 혐오의 대상으로….

 

작금의 이러한 형태는 교회의 종교권력에 대한 세상의 견제가 시발일 것이다.

여기에는 ‘교회가 우리와는 다른 특별한 부류’라는 이질감,

그리고 날로 확장되고 높아지고 웅장해지는 교회의 규모만큼 커지는

사회적 약자들의 허탈감과 배신감 등이 가미되어 있는 것이다.

 

수백억 원을 들여 건축하는 교회의 높이만큼

세상과는 허물 수 없는 담이 되는 것이다.

예수님은 고아와 과부들의 보호자요

병들고 헐벗은 거지들의 친구이자 구세주이셨다.

한국 교회가 엄청난 자금을 불우이웃 돕기와 선교에 쏟아 부으면서도

칭찬은커녕 욕을 먹는 이유는 겉으로는 예수님을 이야기 하면서

예수님을 본받는 데는 시늉만 내고, 속으로는 교회당 건축과 편의시설을 내세운

각종의 호화시설에 막대한 자금을 투자하면서 빚은 결과인 것이다.

물론 모든 교회가 그런 것은 아니다.

대부분의 한국 교회들은(대략 80% 정도) 가난하며, 심지어 목회자 가족이

끼니조차 자체적으로 해결하지 못하는 교회들이 허다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기업화된 중대형 교회들이 물을 흐려 놓았다.

목회의 우선순위는 언제부터인가 “교회건축”으로 바뀌었고,

교회 건물을 건축하면 “목회 성공했다”는 자자한 칭찬이후발 교회들에게 자극이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교회당 건축 붐과 풍요로운 교회의 외형을 바라보는 세상 사람들은

스스로 왕관을 쓰고 대중 위에 군림하는 종교권력의 실상으로 느끼고 있는 것이다.

교회의 고급화, 귀족화는 주님의 친구였던 그들을

결국 더 이상 친구로 남아있지 못하게 막는 꼴이 되어 버렸다.

한 때는 교회가 문화를 통해 세상과의 간격을 좁혀보려고 애도 썼다.

예컨대 열린예배며 CCM(contemporary christian music)의 보급 등이 좋은 예다.

그러나 그것도 잠깐이었고,

세상을 품기는커녕 오히려 거리는 점점 멀어짐을 느낀다.

그 이유는, 문제의 원인은 그대로이거나 더욱 확대되고 있는데

나팔만 분다고 될게 아니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을 때의 상황을 음미해야 한다.

눈높이를 가장 낮게 하심으로 누구에게나 눈을 마주보실 수 있었던 주님을

지금은 어느 교회가 마주볼 수 있을까?

 

 

 

2. 교회건축-그 지상과제

 

현재와 같은 교회당 건축에 대한 이상 현상은

분명 병든 교회(목회)의 전형이라 할 수 있다. 물론 여기에는 기준이 있다.

기본적인 예배 처소와 시설을 싸잡아 하는 말은 아니다.

하지만 이미 건축을 했거나 현재 건축하는 교회들의 거의 대부분이 빚을 안고

건축한다는 점에서 병든 교회(목회)라는 지칭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다.

그 빚은 고스란히 하나님의 몫이다.

왜냐하면 교회를 목회자나 신자 중 어느 개인의 소유로 하지 않고

모든 교회들이 공히 ‘주님의 몸 된 교회’로

혹은 ‘하나님께 봉헌된 교회’ 임을 부각해서 헌금을 하게하여 건축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교회당 건축 빚은 결국 거룩한 하나님을

빚쟁이 하나님으로 전락시키는 모욕적인 행위인 것이다.

어느 교회는 신자의 숫자와 재정 규모를 감안하여

“몇 년 정도면 빚을 갚을 수 있겠다”는 계산 하에 건축을 먼저 시작한다.

그리고 그 계산대로 모든 빚을 상환한다지만

그 몇 년간의 왜곡되고 빗나간 교회적 사명은 무엇으로 보상하랴.

왜냐하면 교회당 건축이 교회의 사명이거나 목회의 목표가 돼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된 언급은 성경 그 어디에도 없다.

어느 목회자는 교회당 건축에 매달리다 쓰러져 몇 달간 입원해야 했고,

어느 교회는 건축 문제로 분란이 일어나

신자들이 두세 갈래로 갈라져 흩어지고 말았다.

그런가하면 건축하고 15년이 지났는데도 아직까지

이자와 원금의 일부를 갚아 나가는 교회도 있다.

그 교회 목회자는 피골이 상접해서 하는 말이 “미쳐 죽을 지경이다”라면서

하루하루가 돈(빚)과의 전쟁이라 했다.

목회자의 모든 관심이 “이번 주에는 헌금이 얼마나 나올까”에 집중되고,

간혹 전도를 받고 새로 나오는 사람을 보면

우선 헌금을 얼마나 할 수 있는 사람인가 분석하게 된다고 말한다.

그는 “목회란 이런 게 아닌데…”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또 다른 목회자는 건축 빚을 감당 못하고는 야반도주하고,

교회 건물은 경매에 붙여지고…

 그런데도 한국 교회들이 교회당 건축에 목숨을 거는 이유는

 교회당 건축이 곧 목회성공이라는 착각 때문이다.

 이 착각은 수십 년간 전통이 되어 ‘가장 의미 있는 일’

‘평생에 한번은 건축해야 축복’이라는 등의 왜곡된 포장 탓에

 재고해 볼 여지도 없이 붐이 되어 몰아닥친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로 나타난 웅장한 교회당 건물은 ‘축복’이라고 언급하기에는 섬뜩한

야유와 비난의 돌이 되어 지금 한국 교회를 향해 무차별 던져지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한 가지는, 이러한 교회당 건축 신드롬에는

“건축하면 사람들이 모인다.”는 사기성 심리가 전제되어 있다는 것이다.

 

 

  3. 건축 대신 해야 할 일

 

 

이러한 한국 교회의 왜곡된 교회 건축에 대한 이상 현상 속에서도

몇몇 교회(목회자)들은 그에 한 눈 팔거나 물들지 않고

교회적 사명에 열중하는 천연기념물적인 교회들이 몇 있음을 안다.

이름하여 ‘깡통교회’ ‘천막교회’ 그리고 중.고등학교에 체육관을 지어주고

그 체육관을 주일에 예배처소로 이용하는 교회들 말이다.

또는 교회 건물도 없이 걸인들, 노숙자들과 더불어 길거리에서 예배를 드리며

신앙공동체를 이루는 특별한 사역도 눈에 띈다.

 

만약, 한국 교회가 지금까지 교회당을 건축하는데 사용된 천문학적인 비용을

최소한의 예배처소를 마련하는 데만 사용하고 나머지를 사회를 위해,

불우한 이웃을 위해 과감히 베풀었다면

오늘날과 같이 교회를 향해 돌을 던지는 일은 결코 없었을 것이다.

물론 미련함과 몰이해 때문에 교회를 적대시하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

그런 경우라면 교회는 부끄러움 대신 당당하게 발바닥의 먼지를 떨어낼 수 있다.

그러나 현재의 한국 교회 양심상 그럴만한 체면은 가지고 있지 못하다.

부의 축적과 부동산 투기, 고급스런 레저 활동 등 몇몇 중대형 교회와

상류층 목회자의 문제일 수 있지만 세상 사람들은

모든 교회와 목회자를 동일한 시각으로 본다.

그러나 교회당 건축과 관련해서는

크고 작은 교회가 따로 없이 현재의 비난에 대한 책임에서 예외일 수 없다.

경쟁적으로 건축에 올인 하는 모습이 비기독교인의 시각으로 볼 때는

“교회가 잘 된다”는 일종의 사업으로 인식하기 때문에

“신자의 돈을 갈취해서 목사만 배불린다.”는 비판으로 쏟아진다.

실제로 필자가 잘 알고 지내는 어떤 이와 대화중에 들은 항변이다.

이제 한국 교회는 ‘무조건 건축’이라는 망상에서 벗어나야 한다.

건축할 비용으로 주님이 본을 보여 주시고 분부하셨던

섬김과 베풂의 사역에 활용하여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리 ‘평양대부흥100주년기념’을 외치며 그 부흥운동의

이 시대 재현을 강조한들 체육관 속에서만 울려 퍼지는 메아리에 그칠 뿐이다.

 

이제 교회의 위상을 되찾아야 한다.

음부의 권세를 이기며 아름다운 구원의 메시지를 사랑에 담아

세상에 아낌없이 베풀 수 있는 본연의 모습으로 말이다.

혹, 이것이 지나친 욕심이라면 최소한 세상의 그 어떤 것보다도

교회나 신자들의 모습이 못하다는 비난은 받지 말아야 한다.

이를 위해 제기될 수 있는 여러 가지 방편 가운데 하나가

교회당 건축에 대한 자제다.

교회당 건물이 필요 이상의 규모나 감당할 수 없는 건축 비용을

“오직 믿음으로”라는 자기 최면만 가지고 밀어 붙이는 무모함은 내버려야 한다.

필자가 미국의 유명한 교회를 방문한 적이 있다.

아름답고 웅장한 교회로 수천 명을 수용할 수 있는 규모지만

정작 출석하는 교인은 백여 명에 불과하고, 연간 1만 5천여 명의

관광객만 다녀간단다.

지금 한국 교회가 눈에 불을 켜고 건축하는 건물들도

지금 같은 성경에 역행하는 목회와 교회 성장의 정체 상태라면

아마도 얼마 가지 못해 관광 상품으로 전락할 수 있다.

아니면, 주님이 곧 재림하셔서 휴거가 된다면 ‘아뿔싸~!’ 그 억울함을

어떻게 할 것인가? 차라리 건축할 비용과 시간과 노력으로 이웃을 섬겼더라면

더 많은 구원의 열매를 맺었을 것이 아닌가.

교회당을 건축했다 해서 교회를 다니지 않던 사람이 교회에 등록하는 경우는

생각처럼 많지 않다고 한다. 아니, 지금 같은 우리나라의

기독교 성장 추세에 비춰볼 때 아예 없다는 것이 맞을 것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건축했더니 하나님이 채워주셨다”거나

“부흥됐다”는 이야기를 가끔은 듣게 되는데, 그 채워진 대부분의 신자들은

다름 아닌 주변의 개척교회나 작은 교회 신자들, 혹은 떠돌이 철새 신자들이다.

 

몇 년 전 8백 명 정도 모이는 중형교회가 어마어마한 비용을 들여

교회당을 건축했다. 담임목사의 공언처럼 호텔 급의 시설이었다.

그리고 1년 후, 그 교회는 ‘교회부흥을 기념하는 축제’라는 이름으로

2주간에 걸친 대대적인 행사와 잔치를 벌였다.

그러나 부흥이라는 말은 빛 좋은 개살구로, 실상은 주변에 있던

2천 명 정도 모이는 교회의 신자들 절반이 그 교회로 옮겨간 것이라 했다.

그리고 주변에 있는 크고 작은 교회의 신자들이 주님께 매료 되서가 아니라

건물과 시설에 매료되어 하나 둘 등록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필자와 친분이 있는 그 교회에 다니는 중직자의 증언이다.

이러한 현상은 교회의 영적 권위를 실추시키고

신뢰를 무너뜨리는 결과 밖에 얻는 게 없다.

주님이 기뻐하실까? 시설보고 쫒아간 사람들이 은혜생활, 신앙생활에

진실할 수 있을까? 십중팔구는 명목상 그리스도인이 되지 않을까 염려된다.

그만큼 교회와 신자들이 세속화 되어 보암직하고 먹음직해 보이는 것만을 쫒는

인본주의에 깊이 빠져 있다는 증거가 아닐까?

 

몇 해 전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는 도발적인 서적이

세간을 떠들썩하게 했던 일이 있다.

마찬가지로 현재 한국 교회는 아이러니 하게도 교회를 살린다는 명목으로

건축에 매달리지만 정작 교회를 죽이는 꼴이 되어 버린 것 이다.

물론, 건축이라는 한 가지 사항이 교회가 비호감이 된 유일한 주범은 아니다.

그러나 여러 부정적인 요인들이 정도에 지나친 건축물로 보여 지고 증거로 남는

상황에서 당연히 문제제기의 주범으로 떠오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

 

 

 

   4. 교회의 심각한 빈부격차

 

 목사란 직임은 고유한 성직이자 사회적 책임을 요구 받는 지도층이다.

한 때는 인기 있는 직업의 상위권에 올랐고, 서울의 유수한 여자대학교 학생들의 선호하는 신랑감 순위에도 빠지지 않았다는 기록도 있다.

그러나 현재의 목회자의 생활 실상은 그렇지 못하다.

인터넷에 수없이 올라오는 교회에 대한 비난의 글들을 보면

모든 목회자들을 싸잡아 비판한다. 호의호식하고 자녀들을 외국에 유학 보내고

고급승용차와 주택을 소유한 막강한 권력자로,

월 수천만 원의 사례비와 활동비를 사용한다는 등의 고발성 글들이다.

그러나 그만한 부를 누리는 목회자가 몇 명이나 될까.

일반적으로 한국교회의 80%는 작은 교회, 혹은 미자립교회로 본다.

문제는 작은 교회(미자립교회)를 담임하는 목회자들과 부교역자들이다.

이들에 대한 정확하고 전체적인 조사 내용은 없지만, 막노동 등 부업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목회자들을 우리 주변 곳곳에서 너무도 쉽게 볼 수 있다.

목회자가 직접 돈벌이에 나서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 부인들은 예외 없이

생계를 위해 노동 현장을 기웃거릴 수밖에 없다. 목회자 부인들 중 전문직은 제외 하더라도 주로 식당일을 도와주는 단순노동이 가장 많은 것으로 보여 진다.

필자가 알고 있는 경우만 볼 때, 사모들은 슈퍼점원, 텔레마케터,

정수기회사 코디, 카드회사 영업사원, 유치원이나 어린이집 보모,

학원 통학차 운전, 심지어는 남편 목사와 함께 대리운전으로 밤을 꼬박

지새우는 이들도 있다.

목회자들의 부업실태도 크게 다르지 않다.

어떤 이는 기념품 가게에서 주문받은 물건을 포장하거나

스티커를 붙이는 일을 하기도 하고, 오후 3시쯤부터 새벽 1시까지

아파트 골목길에서 붕어빵 장사를 하기도 한다.

이런저런 기술이 없는 목회자들은 주로 건설현장에서 막노동을 하거나

택배회사에서 밤을 새며 물건을 나르는 일도 하고 있다.

이러한 목회자들의 삶의 실상을 모두, 그리고 자세히 언급하기에는

너무도 벅차다.

 

그러나 최근에 생계를 위해 대리운전을 하던 개척교회 목회자가

사고로 숨졌다는 보도는 짚고 넘어갈 일이다.

이 개척교회 목회자의 불행한 사고가 있은 며칠 후 필자는 인터넷에서 자료를

검색하다가 우연히 그 사고 기사와 누리꾼들이 달아 놓은 답글을 보게 되었다.

그 답글들을 읽으면서 사건기사를 읽을 때 보다 마음이 더욱 슬퍼짐을 느꼈다.

아니, 개척교회의 실상과 목회자들의 열악한 생활에 대한

몰이해는 차치하고서라도 불행에 대한 동정이나 염려는 고사하고,

목사가 대리운전을 했다는 것에 대한 비난과 야유가 주를 이루고 있었기에

마음이 아팠던 것이다.

답글 중에는 “목사가 기도에 목숨을 걸어야지 새벽에 무슨 대리운전이냐.

그러니깐 죽었지”라는 악담도 있었다.

혹은 “목회에만 전념해야 한다” “죽어도 교회에서 죽어야 한다” 등의 글도 올랐다.

개척교회 목사가 대리운전대를 잡기까지는 몸부림치며 부르짖고

기도했을 것은 분명하다.

낮에도 이 사람 저 사람이 동네 저 동네 골목마다 다니며

전도했을 것은 삼척동자도 다 알만한 상황이다.

교회부흥을 이뤄보자고 각종 세미나인들 마다했겠는가.

한국 교회의 목회자들, 특히 개척교회 목회자들은

부흥을 꿈꾸며 목숨을 건 특심이 남다르지 않던가.

 그러나 우리 모두는 오늘 날 전도가 쉽지 않다는 것을 잘 안다.

 요즘 부흥했다는 교회들 모두가 새신자로 부흥된 것이 아니라

 주변 교회 신자들이 이동해 와서 채워짐으로 성장한 것임을 누구도 부인 못한다.

그러니 개척교회, 작은 교회는 더 어려울 수밖에 없다.

게다가 목회자의 자녀들이 자라면서 돈의 씀씀이는 커져만 간다.

부지런히 전도하면서 틈만 나면 기도하던 목회자도

더 이상 버틸 수 없는 상황이 된다.

목회자 혼자는 어떤 상황인들 견디지 못할게 있겠는가마는

아이들이 보챌 때는 삶의 현실을 외면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일거리를 찾기에 이르는 것이다.

 

당장 생활이 어려워 부득이 일을 해야 하는 목회자와

‘쪽팔려서’ 그랜저(승용차)를 버리고 에쿠스를 타야겠다는

대형교회 목회자를 우리는 어떻게 보아야 할까?

교회 강단에 앉아 기도 안하고 그 시간에 대리운전을 한 목회자는 죄인이고,

1억 원짜리 승용차를 몰고 다니며 집회 장소마다 가서 “기도응답 받았다”고

“축복 받았다”고 자랑하는 목회자는 의인이란 말인가?

다윗이 백향목궁에 거하면서 여호와의 궤를 생각했을 때

하나님 앞에 민망하고 송구스러워 어찌할 줄을 몰라 했던

겸손한 심정이 그에게는 왜 없는 것일까?

 

 

 

   5. 차라리 목회 그만 둬

 

 

필자가 알고 있는  몇몇 목회자들은 노골적으로 말한다.

“그렇게 (목회가)힘들면 그만 둬, 목회가 사명이 아닌가보다 생각해야지…”

이렇게 말하는 이들은 모두 교세가 최소한 안정적이든가

그 이상의 규모를 가진 교회의 목회자들이다.

“내 것을 나누겠다.”는 생각보다는 내 것을 나누어야 될 상황이 오면 어쩌나 하는

염려와 욕심이 그대로 묻어나 있음을 볼 수 있다.

이러한 제 맛을 잃은 정신이 한국 교회의 목회기반이 되어

점점 더 하나님의 나라를 황폐케 하는 것이다.

 

개교회의 교세가 목회를 계속해도 되거나 그만 둬야 되는 기준으로

인식되는 현실이 교회 안에 만연한 황금만능주의 실태를 말해 준다.

목회자 가운데 더러는 직업적 선택이나 본인의 의사와는 달리

부득이하게 목회를 시작한 이도 있겠지만, 그러나 대부분 소명을 받고

목회사역에 헌신하는 것을 기본으로 여기고 각 교단에서도 신학교를 통해

교육하고 소정의 과정을 거쳐 목사안수를 주고 있지 않은가.

그런데도 교세가 약하다는 이유로 차라리 목회를 그만 두고

운전대라도 잡으라고 한다면 그를 부르신 하나님을 얕보는 것이 아니겠는가.

 어느 교회가 월등히 교세가 커졌다면 그것은 그 든든한 재정과 인적자원으로

 세상을 섬기며 작은 교회의 협력자가 되라는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겠는가

 말이다.

 

그러나 한국 교회는 지금까지 그 여유를 건축에 쏟아 붓고

개인적 철옹성으로 만드는데 전심전력해 왔던 것이다.

혹, 성장한 교회들 중에서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우리도 많은 미자립교회들을 도와주고 선교비를 지원했다”고.

하지만 그것은 생색이자 명분일 뿐이다.

월 5만원 혹은 10만원씩 지원하면서 교회당을 건축하는 데는

수십억, 수백억 원을 과감히 투자한 것이 사실이다.

그리고는 건축 때문에 당분간 선교비를 지원해 줄 수 없다고

일방적으로 중단해 버린다.

실제로 1천여 명의 신자가 모이고 연간 경상비가 수십억 원에 이르는 교회가

전 건축을 했다.

그러나 건축 빚을 갚아야 된다는 이유로

대부분의 선교비 지출을 중단한 교회가 있다.

그 교회는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라는 책망을 받았던

사데교회 같은 유형이다.

 

‘작은 교회’는 내팽개치거나 버려야 할 대상이 아니다.

더더구나 실패를 운운할 주제는 더욱 아니다.

만약에 ‘작은 교회는 곧 목회 실패’라는 오늘날 같은 시각과 논리로 접근한다면

초대교회들은 어떻게 이해를 해야 할까.

우리는 사도행전에서 극한 가난에 쪼들리던 마케도니아 교회들을

가장 모범적인 교회로 소개하고 있음을 본다.

사역의 성패는 외적인 규모에 있는 것이 아니다.

교회적 사명을 감당하고 있는 한 그 자체만으로도 성공인 것이다.

그리고 재정적 어려움은 모든 교회들이 서로 돌아보며 협력하므로 해결했다.

그러나 오늘날은 교단간의 대립과 교회간의 경쟁이 도를 지나쳐

어려운 이웃 교회들을 보면서도 강 건너 불로 치부하고 만다.

 

 목회란 그 자체가 고귀하고 거룩한 사역이다.

 그런데도 규모가 작다는 이유 때문에 수많은 목회자들이

 사회의 최빈곤층으로 전락한 현실이 가슴 아프다.

 

 게다가 ‘목회 실패자’로 낙인찍는 현실은

 예수님을 또 다시 십자가에 못 박는 무지라는 사실을 직시해야 한다.

어떤 면에서 목회를 그만 둬야할 강제적인 상황이 벌어진다면

궁여지책으로 노동의 현장으로 내몰린 소위 작은 교회 실패한 목회자 보다는,

성공주의 물량주의로 세속화된 자칭 성공한 목회자가 더 우선이 아닐까

생각한다.

목회의 규모가 작거나 힘든 사역의 현실은 죄도 실패도 아니다.

부족하면 좀 더 분발하고, 여유가 되면 기꺼이 도우라는

주님의 메시지로 받아들이면 된다.

더 이상 “실패했다”고 “그만두라”고 지쳐있는 동역자들에게

돌을 던지는 일은 없어야겠다. 그 돌에 주님이 얻어맞고 계시기 때문이다.

 

 

   6.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세례요한은 요한복음 3장 30절에서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고 말한다.

 내가 쇠하고자 하는 희생과 섬김의 자세로 주님을 드러내고 높여 드릴 때

 그가 흥할 수 있다. 이것이 그도 흥하고 나도 흥할 수 있는 비결이다.

 

그러나 한국 교회는 ‘나는 흥하여야 하겠고’를 외치고 있다.

그 결과, 지금 우리나라에서는 몇몇 교회들은 흥했는지 모르지만

상대적으로 예수님은 철저히 외면당하고 있음은 정말로 안타까운 일이다.

그렇다고 진정한 의미의 흥함인지 되묻고 싶다.

겉으로 드러난 웅장함과 화려함은 혹여 ‘회 칠한 무덤’은 아닐는지.

예수님의 흥함을 도모하는 것이 목회의 본질이며 사명의 핵심이다.

주님을 위한다고 하면서 속으로는 목회자 자신의

영달을 추구하고 있지는 않는지 철저히 성찰해 볼 일이다.

웅장하고 화려한 건축물로 예수님을 흥하게 했노라고 말한다면

이는 언어도단이다.

예수님은 성경 그 어느 곳에서도 교회당 건축에 대해 언급하시지 않았다.

오히려 당시의 성전에 대한 그릇된 인식과 관행에 대하여

채찍질로 나무라며 호통 치셨다.

초대교회 당시에도 교회당은 은혜 받은 이들이

자신의 집을 예배 처소로 제공함으로 이뤄졌다.

오늘날과 같은 교회당 건축이 교회의 지상과제인양 목을 매는 현상이

성경적이고 하나님의 뜻이었다면 성경은 이에 침묵하고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어떤 이들은 시대적인 변화, 교회의 제도화 등등 운운하겠지만 작금의 교회당

건축 붐은 분명 정도를 이탈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그렇다면 남은 것은 이제 주님의 채찍질 밖에 없는 거 아니냐는 염려다.

이제부터라도 진정으로 주님을 흥하게 하는 것이

무엇일까를 고민하며 찾을 때이다.

 

1백 년 전 평양대부흥운동이 있었다.

1백주년을 맞아 이를 기념하며 각처에서 기념행사 및 집회를 가졌지만

행사를 위한 행사로 끝나고 말았다.

구호는 “평양대부흥운동의 재현” 이었지만 이는 말 그대로 구호일 뿐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체육관 안에서 우리끼리 외치는 함성이었기 때문이다.

평양대부흥은 교회 내부에서의 외침이 아니라 세상 속에서의 변화였고 역사였다.

100년 전의 이러한 변화와 역사는 100년이 지난 오늘에 있어서는

한국 교회 스스로 세운 세상과의 담 때문에 그림의 떡이 되고 만 것이다.

이 담을 헐어야 한다. 그래야 평양대부흥의 재현도 가능할 수 있고

주님이 흥할 수 있는 문도 열리게 된다.

한국 교회에서는 종종 기복신앙이 논쟁이 되곤 한다.

문제는 개인주의가 팽배한 상황에서

자기중심의 이기적인 신앙 행위에 있다는 것이다.

내가 복 받기 위해서 헌금도 하고 봉사도 하기 때문에

신앙생활의 시야가 좁을 수밖에 없고, 그러다보니 자신과 직접적인

관계가 없을 때는 주변의 어려움에 대해서도 소극적일 수밖에 없다.

 

한국 교회가 얼마나 많이 사회를 위해 베풀었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교회가 가지고 있는 능력에 비례하여 얼마나 베풀었는가를 따져야 한다.

그렇지 않고 얼마나 많은 일을 했는가만 주장하다보니,

이를 미흡하다고 여기는 사회적 여론은 점점 나빠지고 급기야는

‘세금징수’를 위한 범국민서명운동이라는 참혹한 대접을 받고 있는 것이다.

이타적인 주님의 마음이 신자들의 마음에서, 그리고 사역의 기본 정신에서

점점 식어져가고 있는 한 이 땅에서 주님과 그의 나라는 쇠할 수밖에 없다.

예수님이 쇠하면 교회 역시 본질적으로 쇠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명심하자.

 

 

 

 

   7. 화 있을진저…

 

 

마태복음 23장 15절에 예수님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향하여 책망하신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교인 하나를 얻기 위하여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생기면 너희보다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하는도다”

지난 봄에 있었던 일화이다.

필자가 담임하는 교회에 50대 후반의 여성 두 분이 예배에 참석했다.

그들은 자매간으로 동생은 이미 신앙생활을 하는 권사였고

언니는 난생 처음으로 교회에 나와 보는 것이라 했다.

동생은 언니를 전도할 목적으로 4시간 넘게 차를 타고 와서

교회로 데려왔던 것이다.

언니를 교회에 등록 시키고 동생 권사는 자신의 집으로 돌아갔다.

그 날부터 2주 동안 그 부인은 저녁마다 퇴근길에 교회에 들러

성경공부를 하면서 기본적인 신앙생활의 지침들을 배웠다.

그는 몹시 만족해하며 교회에 나오게 된 것에 대해 자랑스러워했다.

그런데 3주째 되던 주일에 그는 교회에 나오지 않았다.

교회는 그 부인에게 줄 선물을 준비하고 기다렸지만 모습을 보이지 않은 것이다.

예배 후 전화 통화를 하고난 뒤에야 상황을 알게 되었다.

그는 미안하고 죄송하다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교회에 나가게 된 것이 얼마나 기쁘고 자랑스러운지 가깝게 지내는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나도 교회에 나가게 됐노라고 말했더니

교회 집사인 그 친구는 대뜸 어느 교회냐고 묻더란다.

그러더니 왜 힘들게 고생하려고 개척교회에 나가느냐,

내가 다니는 큰 교회로 가자며 설득을 하더니, 결국 주일날 아침에

일찍 데리러 오는 바람에 할 수 없이 따라갔는데 그 교회에 자신을 등록시키고

인사까지 시켜서 면목 없다며 전화를 끊었다. 탄식이 나왔다.

교인을 빼앗겼다는 세속적인 생각이나 피해의식에서가 아니라

한국 교회의 현주소를 보는 것 같아서였다. 예전, 어느 교계신문에

“명목상 그리스도인이 늘고 있다”는 특집기사 내용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한편으로는 상식 밖의 상황에 대해 수용해야 하는,

어처구니없는 빗나간 신앙윤리와 목회 정서가 더욱 가슴을 아프게 했다.

 

필자는 전도를 다니다가 교회를 다니는 사람을 만나면 의례히

교회의 좋은 일꾼이 되라거나 믿음으로 승리하라는 말을 해왔기에

“고생하니깐 개척교회 가지 말라”는 말에는 충격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전도하면서 십자가를 회피시키고 취미활동 하듯

 교회와 신앙생활을 외곡해서 인식시킨다면 그 영혼은 어찌 되겠는가.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하는도다” 주님의 책망처럼 안타까울 뿐이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가 한국 교회 전반에 걸쳐 자행되고 있기에 더 큰 문제다.

이름 하여 교인쟁탈전이다. 아무런 죄의식도 없이 버젓이, 그리고 당연한 듯

신자들을 빼돌리고는 사뭇 본인이 전도한양 떠벌린다.

목회자들도 알면서 묵인하고 오히려 은근히 부추기는 상황이다.

많은 교회들이 각종의 고급 편의시설로 사람들을 유혹하는  이면에는

수고나 희생 없이 편하게 문화 혜택을 보면서 교회에 다니려는

명목상 그리스도인을 양산하는 함정에 다름없다.

신앙생활, 곧 신앙으로 산다는 것은 주님을 따르며

주님을 본받고 주님의 분부하신 바를 행하며 산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신앙생활에서 고생스러움도 부담도 책임도 다 빼버리고

편의만 추구한다면 그것은 결코 믿음일 수 없다.

오히려 더 많이 일할 수 있는 교회,

더 많이 봉사하고 섬길 수 있는 교회를 찾아가는 것이 주님의 기쁨이다.

그리고 한 알의 밀알처럼

희생하기 위해서 교회를 찾는 믿음이 가장 절실한 때이다.

 

 

 

 

   8. 설교에 대한 함정

 

목회자들에게 목회에 있어 가장 비중이 큰 것은

설교라고 말하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신학교에서부터 설교학 과목을 통해 설교와 관련한 다양한 방편들을 습득한다.

설교시연이나 대학 축제 때 설교술대회 등을 통해 설교의 경쟁력을 키우기도

한다.

목회자들을 대상으로 한 설교 관련 세미나는 봇물을 이룬다.

설교시간은 얼마가 적당하며 예화는 몇 편이 들어가야 하는지,

표정이나 시선의 각도, 그리고 옷매무새, 억양이나 표현력, 제스처,

심지어는 쇼맨십 등 관련 내용들도 세부적이고 다양하다.

또는 유명하다는 목회자, 설교 잘한다는 목회자들의 설교분석도

빠지지 않는 단골 메뉴다.

그러나 과연 설교를 이토록 기술적으로 다루고 익혀야만 하는 것인지,

오히려 설교의 학문화는 말씀의 진실성과 진정성을 훼손하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요즘 몇몇 인기 있는 목회자들의 화려한 미사여구와 현란한 제스처,

 그리고 청중을 사로잡는 쇼맨십은 순수하게 말씀을 전달하는 도구

 그 이상으로 자리매김이 되는 현실을 보면서 주객이 전도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단순히 인기 있는 설교자에 대한 질투에서 하는 비판이 아니라

그동안 수십 명의 신자들을 인터뷰하면서 느낀 문제점들을 짚어보며

그 해악이 단순한 정도가 아니라 심각한 상태임을 알리기 위함이다.

우리의 순수한 신앙의 회복과 주님과의 올바른 관계의 유지를

바라는 마음에서다.

지방 오지의 어느 시골교회 집사는 스스로를 텔레비전에 종종 나오는

아무개 목사의 팬이라고 했다. 이유는 너무 설교를 재미있게 하기 때문이란다.

그래서 도시에서 자취하며 학교에 다니는 자녀를 찾아올 때마다

그 교회에 가서 설교를 듣는다고 했다.

또 어떤 이는 “너무 웃겨서 스트레스가 확 풀린다”고 말한다. 이 같은 이유로

그 목회자의 설교를 듣기 위해 찾아오는 교인들이 대부분이라고 한다.

단언하건데, 이들은 그 목회자의 설교 마니아일 뿐이다.

 

언젠가 교계 신문에 목회자의 가장 큰 고민 중 하나는

“변화되지 않는 신자들”이라는 거였다.

백날 설교해도 신자들은 별반 달라지지 않는다.

왜? 설교 테크닉이 부족해서? 천만의 말씀이다.

한국 교회 목회자들은 설교에 대한 준비와 열정에 있어서만큼은

세계에서 둘째가라면 서운할 정도다.

그럼, 설교가 부족해서? 아니다. 오늘날은 설교가 홍수를 이룬다.

필자는 그 이유를 앞서 지적한 대로 기술적으로 재단되고

학문적으로 연출된 설교 탓이라고 본다.

그 만큼 설교는 재밌어지고 다이나믹해 졌지만 진실성, 진정성이 훼손됐기에

듣기에는 좋은데 가슴을 울리고 마음을 찢기에는 역부족이라는 것이다.

“한국교회 신자들이여, 재미로 설교를 듣지 마십시오. 귀만 커질 뿐

 영혼은 여전히 차갑지 않습니까?”

재미있는 설교만 찾다보면 이에 중독된다.

그래서 감정적, 감각적으로 웃겨지지 않으면 못하는 설교로,

은혜 없는 설교로 단정하여 마음을 닫고 거부하고 만다.

결국 ‘재미있는 설교’는 자기만족이라는 함정이 될 수 있다.

설교의 진정한 묘미는 메시지를 통해 주님을 만나는 영적 체험에 있는 것이다.

설교에 가미되는 유머나 몸동작 등 여러 부수적인 행위들은

설교의 주체가 아니라 메시지가 청중들에게 효과적으로 전달되도록 하기 위한

보조수단일 뿐이다.

그런데도 신자들은 설교의 목적과 주체는 잃어버리고 쇼맨십에 의한

우스운 몸동작이나 개그맨 같은 입담에 열광하고 만다.

목회자들도 이러한 신자들의 반응에 고무되어 마냥 웃기고 열광하게 하고 싶은

충동에 빠지면서 결국 예배를 쇼로 만들어 놓고 마는 것이다.

이러하니 그 웃기고 재미있는 설교에 매료되어 열성 팬이 돼서도, 스트레스가

확 풀리는 즐거움을 가지고서도 삶은 변화되지 않고 여전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너무 재미에 치중된 설교는 위험한 신앙의 함정일 수 있다.

 

 사도 바울은 스스로 “말에는 졸하나”라고 자신의 설교를 평했다.

 그러나 그 졸한 설교는 유럽과 아시아의 수많은 영혼들로 하여금

 주님을 만나게 하는 매개가 되었던 것이다.

설교자는 다름 아닌 예수님을 투영시키는 임무자다.

세례요한처럼 내가 아닌 그가 보여 지도록 나를 통해서 그를 나타내는 것이다.

그리고 설교자는 예수님이 인식되도록 투과되는 위치여야 한다.

예수님과 신자 사이에 설교자가 가로막고 있다면, 그래서 예수님은 볼 수 없고

설교자만 보여 진다면 이는 주의 영광을 가로채는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않다.

이제 더 이상 재미있는 설교만 찾는 청각적 신앙에 빠지지 말자.

오죽했으면 목사들은 입만 천국가고

신자들은 귀만 천국 갔다는 우스갯소리가 나왔을까.

 

 

 

 

   9. 마지막 외침

 

 얼마 전 후배 목사가 교회 개척을 한다기에 찾아갔다.

그는 상가건물 지하를 임대해서 개척을 했는데, 교회 입구 벽면에는

앞으로 건축하겠다는 예배당의 마스터플랜이 웅장한 모습으로 걸려 있었다.

그는 언제쯤 어떻게 건축할 것인가에 대해 장황하게 신이 나서 설명했다.

옆에 있던 그 교회 개척 멤버인 집사는

“우리 목사님은 꿈이 크다”며 맞장구를 쳤다.

이제 막 교회를 개척한 젊은 목사의 패기는 좋지만 목회계획과 목표가

교회당 건축이라는 사실에 대해서는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었다.

 그는 주님이 명하신 목회가 아닌 개인의 꿈과 야망을 이루기 위한 사업을

 구상하면서 목회인양 착각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한국교회의 실상이다.

 

 

이제 정신을 차려야 한다.

총체적으로 세속화된 신앙의 탈을 벗어버리고

최소한 우리나라 초기 기독교의 순수함과 사회에 이바지했던

청빈함을 회복한다면 야유와 비난 대신 제2의 부흥의 역사는 얼마든지 가능하다.

이 글은 한국교회의 문제를 파헤쳐 정죄하기 위함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치부에 대한 반성과 거듭나기 위한

회개의 심정으로 주님 앞에 올리는 부끄러운 고백일 뿐이다.

또한 금방 뭔가 달라질 거라는 성급한 기대도 금물이다.

한 세기에 걸친 부흥과 성장의 뒤 안에 기생하며 자리 잡은 세속화의 흐름이

이제는 어엿한 문화와 전통으로 위장되어 깊숙이 뿌리내린 상황에서,

이 같은 글 몇 마디로 달라질 것이라고는 보지 않는다.

그러나 문제를 문제로 인식하는 의식이 무엇보다 필요하기에

누워 침 뱉는 자학의 심정으로 외치는 것이다.

부디 음부의 권세를 이겨야 할 교회가 예배당을

바벨탑으로 만들어 가는 일 만큼은 중단하자.

 

우리의 못난 믿음 때문에 주님이 욕을 먹는 일은 없어야겠다.

다시 꿈을 꾸자. 빛이 되고 소금이 되기를…

 

(새생명교회 윤명상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