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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명상 목회 칼럼

교회건축 - 그 지상과제[윤명상목사]

by 石右 尹明相 2008. 3. 21.

 

 

1. 교회건축 - 그 지상과제

 

현재와 같은 교회당 건축에 대한 이상 현상은 분명 병든 교회(목회)

전형이라 할 수 있다. 물론 여기에는 기준이 있다.

기본적인 예배 처소와 시설을 싸잡아 하는 말은 아니다.

하지만 이미 건축을 했거나 현재 건축하는 교회들의 거의 대부분이

빚을 안고 건축한다는 점에서 병든 교회(목회)라는 지칭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다.

그 빚은 고스란히 하나님의 몫이다.

왜냐하면 교회를 목회자나 신자 중 어느 개인의 소유로 하지 않고

모든 교회들이 공히 주님의 몸 된 교회

혹은 하나님께 봉헌된 교회임을 부각해서 헌금을 하게하여 건축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교회당 건축 빚은 결국 거룩한 하나님을 빚쟁이 하나님으로

전락시키는 모욕적인 행위인 것이다.

 

어느 교회는 신자의 숫자와 재정 규모를 감안하여 몇 년 정도면

빚을 갚을 수 있겠다는 계산 하에 건축을 먼저 시작한다.

그리고 그 계산대로 모든 빚을 상환한다지만 그 몇 년간의 왜곡되고

빗나간 교회적 사명은 무엇으로 보상하랴.

왜냐하면 교회당 건축이 교회의 사명이거나 목회의 목표가 돼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된 언급은 성경 그 어디에도 없다.

 

어느 목회자는 교회당 건축에 매달리다 쓰러져 몇 달간 입원해야 했고,

어느 교회는 건축 문제로 분란이 일어나 신자들이 두세 갈래로

갈라져 흩어지고 말았다.

그런가하면 건축하고 15년이 지났는데도 아직까지 이자와 원금의

일부를 갚아 나가는 교회도 있다.

그 교회 목회자는 피골이 상접해서 하는 말이 미쳐 죽을 지경이다라면서

하루하루가 돈()과의 전쟁이라 했다.

목회자의 모든 관심이 이번 주에는 헌금이 얼마나 나올까에 집중되고,

간혹 전도를 받고 새로 나오는 사람을 보면 우선 헌금을 얼마나 할 수

있는 사람인가 분석하게 된다고 말한다.

그는 목회란 이런 게 아닌데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또 다른 목회자는 건축 빚을 감당 못하고는 야반도주하고,

교회 건물은 경매에 붙여지고

 

그런데도 한국 교회들이 교회당 건축에 목숨을 거는 이유는

교회당 건축이 곧 목회성공이라는 착각 때문이다.

이 착각은 수십 년간 전통이 되어 가장 의미 있는 일

평생에 한번은 건축해야 축복이라는 등의 왜곡된 포장 탓에

재고해 볼 여지도 없이 붐이 되어 몰아닥친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로 나타난 웅장한 교회당 건물은 축복이라고

언급하기에는 섬뜩한 야유와 비난의 돌이 되어 지금 한국 교회를 향해

무차별 던져지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이러한 교회당 건축 신드롬에는

건축하면 사람들이 모인다.”는 사기성 심리가 전제되어 있다는 것이다.

 

 

2. 건축 대신 해야 할 일

 

이러한 한국 교회의 왜곡된 교회 건축에 대한 이상 현상 속에서도

몇몇 교회(목회자)들은 그에 한 눈 팔거나 물들지 않고 교회적 사명에

열중하는 천연기념물적인 교회들이 몇 있음을 안다.

이름하여 깡통교회’ ‘천막교회그리고 중.고등학교에 체육관을 지어주고

그 체육관을 주일에 예배처소로 이용하는 교회들 말이다.

또는 교회 건물도 없이 걸인들, 노숙자들과 더불어 길거리에서

예배를 드리며 신앙공동체를 이루는 특별한 사역도 눈에 띈다.

 

만약, 한국 교회가 지금까지 교회당을 건축하는데 사용된

천문학적인 비용을 최소한의 예배처소를 마련하는 데만 사용하고

나머지를 사회를 위해, 불우한 이웃을 위해 과감히 베풀었다면

오늘날과 같이 교회를 향해 돌을 던지는 일은 결코 없었을 것이다.

물론 미련함과 몰이해 때문에 교회를 적대시하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

그런 경우라면 교회는 부끄러움 대신 당당하게 발바닥의 먼지를

떨어낼 수 있다.

 

그러나 현재의 한국 교회 양심상 그럴만한 체면은 가지고 있지 못하다.

부의 축적과 부동산 투기, 고급스런 레저 활동 등 몇몇 중대형 교회와

상류층 목회자의 문제일 수 있지만 세상 사람들은

모든 교회와 목회자를 동일한 시각으로 본다.

그러나 교회당 건축과 관련해서는 크고 작은 교회가 따로 없이

현재의 비난에 대한 책임에서 예외일 수 없다.

 

경쟁적으로 건축에 올인하는 모습이 비기독교인의 시각으로 볼 때는

교회가 잘 된다는 일종의 사업으로 인식하기 때문에

신자의 돈을 갈취해서 목사만 배불린다.”는 비판으로 쏟아진다.

실제로 필자가 잘 알고 지내는 어떤 이와 대화중에 들은 항변이다.

 

이제 한국 교회는 무조건 건축이라는 망상에서 벗어나야 한다.

건축할 비용으로 주님이 본을 보여 주시고 분부하셨던

섬김과 베풂의 사역에 활용하여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리 평양대부흥100주년기념을 외치며

그 부흥운동의 이 시대 재현을 강조한들 체육관 속에서만 울려 퍼지는

메아리에 그칠 뿐이다.

 

이제 교회의 위상을 되찾아야 한다.

음부의 권세를 이기며 아름다운 구원의 메시지를 사랑에 담아

세상에 아낌없이 베풀 수 있는 본연의 모습으로 말이다.

, 이것이 지나친 욕심이라면 최소한 세상의 그 어떤 것보다도

교회나 신자들의 모습이 못하다는 비난은 받지 말아야 한다.

이를 위해 제기될 수 있는 여러 가지 방편 가운데 하나가

교회당 건축에 대한 자제다.

교회당 건물이 필요 이상의 규모나 감당할 수 없는 건축 비용을

오직 믿음으로라는 자기 최면만 가지고 밀어 붙이는 무모함은

내버려야 한다.

 

필자가 미국의 유명한 교회를 방문한 적이 있다.

아름답고 웅장한 교회로 수천 명을 수용할 수 있는 규모지만

정작 출석하는 교인은 백여 명에 불과하고,

연간 15천여 명의 관광객만 다녀간단다.

 

지금 한국교회가 눈에 불을 켜고 건축하는 건물들도

지금 같은 성경에 역행하는 목회와 교회의 양적 성장의 정체 상태라면

아마도 얼마 가지 못해 관광 상품으로 전락할 수 있다.

아니면, 주님이 곧 재림하셔서 휴거가 된다면 아뿔싸!’

그 억울함을 어떻게 할 것인가?

차라리 건축할 비용과 시간과 노력으로 이웃을 섬겼더라면

더 많은 구원의 열매를 맺었을 것이 아닌가.

 

교회당을 건축했다 해서 교회를 다니지 않던 사람이

교회에 등록하는 경우는 생각처럼 많지 않다고 한다.

아니, 지금 같은 우리나라의 기독교 성장 추세에 비춰볼 때

아예 없다는 것이 맞을 것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건축했더니 하나님이 채워주셨다거나

부흥됐다는 이야기를 가끔은 듣게 되는데,

그 채워진 대부분의 신자들은 다름 아닌 주변의 개척교회나

작은 교회 신자들, 혹은 떠돌이 철새 신자들이다.

 

몇 년 전 8백 명 정도 모이는 중형교회가 어마어마한 비용을 들여

교회당을 건축했다.

담임목사의 공언처럼 호텔 급의 시설이었다.

그리고 1년 후, 그 교회는 교회부흥을 기념하는 축제라는 이름으로

2주간에 걸친 대대적인 행사와 잔치를 벌였다.

그러나 부흥이라는 말은 빛 좋은 개살구로, 실상은 주변에 있던

2천 명 정도 모이는 교회의 신자들 절반이 그 교회로 옮겨간 것이라 했다.

그리고 주변에 있는 크고 작은 교회의 신자들이 주님께 매료 되서가

아니라 건물과 시설에 매료되어 하나 둘 등록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필자와 친분이 있는 그 교회에 다니는 중직자의 증언이다.

 

이 같은 현상은 교회의 영적 권위를 실추시키고

신뢰를 무너뜨리는 결과 밖에 얻는 게 없다.

주님이 기뻐하실까?

시설보고 쫒아간 사람들이 은혜생활, 신앙생활에 진실할 수 있을까?

십중팔구는 명목상 그리스도인이 되지 않을까 염려된다.

그만큼 교회와 신자들이 세속화 되어 보암직하고 먹음직해 보이는

것만을 쫒는 인본주의에 깊이 빠져 있다는 증거가 아닐까?

 

몇 해 전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는 도발적인 서적이

세간을 떠들썩하게 했던 일이 있다.

마찬가지로 현재 한국 교회는 아이러니 하게도 교회를 살린다는 명목으로

건축에 매달리지만 정작 교회를 죽이는 꼴이 되어 버린 것 이다.

물론, 건축이라는 한 가지 사항이

교회가 비호감이 된 유일한 주범은 아니다.

그러나 여러 부정적인 요인들이 정도에 지나친 건축물로 보여 지고

증거로 남는 상황에서 당연히 문제제기의 주범으로

떠오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윤명상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