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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詩 같은 삶을 위하여
☞ 윤명상 목회 칼럼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윤명상목사]

by 石右 尹明相 2008. 3. 21.

 

 

  ★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세례 요한은 요한복음 3장 30절에서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고 말한다.

내가 쇠하고자 하는 희생과 섬김의 자세로

주님을 드러내고 높여 드릴 때 그가 흥할 수 있다.

이것이 그도 흥하고 나도 흥할 수 있는 비결이다.

 

그러나 한국 교회는 ‘나는 흥하여야 하겠고’를 외치고 있다.

그 결과, 지금 우리나라에서는 몇몇 교회들은 흥했는지 모르지만

상대적으로 예수님은 철저히 외면당하고 있음은 정말로 안타까운 일이다.

그렇다고 진정한 의미의 흥함인지 되묻고 싶다.

겉으로 드러난 웅장함과 화려함은 혹여 ‘회 칠한 무덤’은 아닐는지.

예수님의 흥함을 도모하는 것이 목회의 본질이며 사명의 핵심이다.

주님을 위한다고 하면서 속으로는 목회자 자신의

영달을 추구하고 있지는 않는지 철저히 성찰해 볼 일이다.

 

웅장하고 화려한 건축물로 예수님을 흥하게 했노라고 말한다면

이는 언어도단이다.

예수님은 성경 그 어느 곳에서도 교회당 건축에 대해 언급하시지 않았다.

오히려 당시의 성전에 대한 그릇된 인식과 관행에 대하여

채찍질로 나무라며 호통 치셨다.

 

초대교회 당시에도 교회당은 은혜 받은 이들이

자신의 집을 예배 처소로 제공함으로 이뤄졌다.

오늘날과 같은 교회당 건축이 교회의 지상과제인양

목을 매는 현상이 성경적이고 하나님의 뜻이었다면

성경은 이에 침묵하고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어떤 이들은 시대적인 변화, 교회의 제도화 등등 운운하겠지만

작금의 교회당 건축 붐은 분명 정도를 이탈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그렇다면 남은 것은

이제 주님의 채찍질 밖에 없는 거 아니냐는 염려다.

이제부터라도 진정으로 주님을 흥하게 하는 것이

무엇일까를 고민하며 찾을 때이다.

 

1백 년 전 소위 평양대부흥운동이란 것이 있었다.

1백주년을 맞아 이를 기념하며 각처에서 기념행사 및

집회를 가졌지만 행사를 위한 행사로 끝나고 말았다.

구호는 “평양대부흥운동의 재현” 이었지만

이는 말 그대로 구호일 뿐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체육관 안에서 우리끼리 외치는 함성이었기 때문이다.

평양대부흥은 교회당 내부에서의 외침이 아니라

세상 속에서의 변화였고 역사였다.

 

100년 전의 이러한 변화와 역사는

100년이 지난 오늘에 있어서는 한국 교회 스스로 세운

세상과의 담 때문에 그림의 떡이 되고 만 것이다.

이 담을 헐어야 한다.

그래야 평양대부흥의 재현도 가능할 수 있고

주님이 흥할 수 있는 문도 열리게 된다.

 

한국 교회에서는 종종 기복신앙이 논쟁이 되곤 한다.

문제는 개인주의가 팽배한 상황에서

자기중심의 이기적인 신앙 행위에 있다는 것이다.

내가 복 받기 위해서 헌금도 하고 봉사도 하기 때문에

신앙생활의 시야가 좁을 수밖에 없고,

그러다보니 자신과 직접적인 관계가 없을 때는

주변의 어려움에 대해서도 소극적일 수밖에 없다.

 

한국 교회가 얼마나 많이 사회를 위해 베풀었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교회가 가지고 있는 능력에 비례하여

얼마나 베풀었는가를 따져야 한다.

그렇지 않고 얼마나 많은 일을 했는가만 주장하다보니,

이를 미흡하다고 여기는 사회적 여론은 점점 나빠지고

급기야는 ‘세금징수’를 위한 범국민서명운동이라는

참혹한 대접을 받고 있는 것이다.

 

이타적인 주님의 마음이 신자들의 마음에서,

그리고 사역의 기본 정신에서 점점 식어져가고 있는 한

이 땅에서 주님과 그의 나라는 쇠할 수밖에 없다.

예수님이 쇠하면 교회 역시 본질적으로

쇠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명심하자.

 

 

 [윤명상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