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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詩 같은 삶을 위하여
☞ 윤명상 목회 칼럼

설교에 대한 함정 [윤명상목사]

by 石右 尹明相 2008. 3. 21.

 

 

설교에 대한 함정

 

 목회자들에게 목회에 있어 가장 비중이 큰 것은

설교라고 말하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신학교에서부터 설교학 과목을 통해 설교와 관련한

다양한 방편들을 습득한다.

설교시연이나 대학 축제 때 설교술대회 등을 통해

설교의 경쟁력을 키우기도 한다.

 

목회자들을 대상으로 한 설교 관련 세미나는 봇물을 이룬다.

설교시간은 얼마가 적당하며 예화는 몇 편이 들어가야 하는지,

표정이나 시선의 각도, 그리고 옷매무새, 억양이나 표현력, 제스처,

심지어는 쇼맨십 등 관련 내용들도 세부적이고 다양하다.

 

또는 유명하다는 목회자, 설교 잘한다는 목회자들의

설교분석도 빠지지 않는 단골 메뉴다.

그러나 과연 설교를 이토록 기술적으로 다루고 익혀야만 하는 것인지,

오히려 설교의 학문화는 말씀의 진실성과 진정성을

훼손하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요즘 몇몇 인기 있는 목회자들의 화려한 미사여구와 현란한 제스처,

그리고 청중을 사로잡는 쇼맨십은 순수하게 말씀을 전달하는

도구 그 이상으로 자리매김이 되는 현실을 보면서

주객이 전도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단순히 인기 있는 설교자에 대한 질투에서 하는 비판이 아니라

그동안 수십 명의 신자들을 인터뷰하면서 느낀 문제점들을 짚어보며

그 해악이 단순한 정도가 아니라 심각한 상태임을 알리기 위함이다.

우리의 순수한 신앙의 회복 내지는

주님과의 올바른 관계의 유지를 바라는 마음에서다.

 

지방 오지의 어느 시골교회 집사는 스스로를 텔레비전에 종종 나오는

아무개 목사의 팬이라고 했다.

이유는 너무 설교를 재미있게 하기 때문이란다.

그래서 도시에서 자취하며 학교에 다니는 자녀를 찾아올 때마다

그 교회에 가서 설교를 듣는다고 했다.

 

또 어떤 이는 너무 웃겨서 스트레스가 확 풀린다고 말한다.

이 같은 이유로 그 목회자의 설교를 듣기 위해 찾아오는 교인들이

대부분이라고 한다.

단언하건데, 이들은 그 목회자의 설교 마니아일 뿐이다.

언젠가 교계 신문에 목회자의 가장 큰 고민 중 하나는

변화되지 않는 신자들이라는 거였다.

 

백날 설교해도 신자들은 별반 달라지지 않는다.

? 설교 테크닉이 부족해서? 천만의 말씀이다.

한국 교회 목회자들은 설교에 대한 준비와 열정에 있어서만큼은

세계에서 둘째가라면 서운할 정도다.

그럼, 설교가 부족해서? 아니다.

오늘날은 설교가 홍수를 이룬다.

 

필자는 그 이유를 앞서 지적한 대로 기술적으로 재단되고

학문적으로 연출된 설교 탓이라고 본다.

그 만큼 설교는 재밌어지고 다이내믹해졌지만

진실성, 진정성이 훼손됐기에 듣기에는 좋은데

가슴을 울리고 마음을 찢기에는 역부족이라는 것이다.

한국교회 신자들이여, 재미로 설교를 듣지 마십시오.

 귀만 커질 뿐 영혼은 여전히 차갑지 않습니까?”

 

 재미있는 설교만 찾다보면 이에 중독된다.

그래서 감정적, 감각적으로 웃겨지지 않으면 못하는 설교로,

은혜 없는 설교로 단정하여 마음을 닫고 거부하고 만다.

결국 재미있는 설교는 자기만족이라는 함정이 될 수 있다.

설교의 진정한 묘미는 메시지를 통해

주님을 만나는 영적 체험에 있는 것이다.

설교에 가미되는 유머나 몸동작 등 여러 부수적인 행위들은

설교의 주체가 아니라 메시지가 청중들에게 효과적으로

전달되도록 하기 위한 보조수단일 뿐이다.

 

그런데도 신자들은 설교의 목적과 주체는 잃어버리고 쇼맨십에 의한

우스운 몸동작이나 개그맨 같은 입담에 열광하고 만다.

목회자들도 이러한 신자들의 반응에 고무되어

마냥 웃기고 열광하게 하고 싶은 충동에 빠지면서

결국 예배를 쇼로 만들어 놓고 마는 것이다.

이러하니 그 웃기고 재미있는 설교에 매료되어 열성 팬이 돼서도,

스트레스가 확 풀리는 즐거움을 가지고서도 삶은 변화되지 않고

여전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너무 재미에 치중된 설교는 위험한 신앙의 함정일 수 있다.

 사도 바울은 스스로 말에는 졸하나라고 자신의 설교를 평했다.

그러나 그 졸한 설교는 유럽과 아시아의 수많은 영혼들로 하여금

주님을 만나게 하는 매개가 되었던 것이다.

 

설교자는 다름 아닌 예수님을 투영시키는 임무자다.

세례요한처럼 내가 아닌 그가 보여 지도록 나를 통해서

그를 나타내는 것이다.

그리고 설교자는 예수님이 인식되도록 투과되는 위치여야 한다.

예수님과 신자 사이에 설교자가 가로막고 있다면,

그래서 예수님은 볼 수 없고 설교자만 보여 진다면

이는 주의 영광을 가로채는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않다.

이제 더 이상 재미있는 설교만 찾는 청각적 신앙에 빠지지 말자.

오죽했으면 목사들은 입만 천국가고 신자들은 귀만 천국 갔다는

우스갯소리가 나왔을까.

 

 

[윤명상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