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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詩 같은 삶을 위하여
◈ 할 말은 한다

청부론과 청빈론

by 石右 尹明相 2015. 2. 28.

 


 청부론과 청빈론

- 김동호 목사에게 보내는 김영봉 교수의 공개서한 -


공개토론의 한계


저는 공개토론을 믿지 않는 편입니다.

그것이 사회적 문제에 대한 것이든 선거를 위한 것이든,

공개토론에서 무엇인가를 판가름내자는 태도를 저는 매우 경계합니다.

텔레비전이나 인터넷을 통한 토론인 경우에는 더 그렇습니다.

‘들리는 것’보다 ‘보이는 것’에 의해 영향을 받을 위험이 크기 때문입니다.

형식상 문제의 본질을 들춰내기보다는 재치와 기지의 싸움이 되기 쉽기 때문에

어떤 형태의 공개토론회도 위험한 도구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시청률을 올리고 문제의식을 확산시키는데는 효과적일 수 있으나,

문제의 본질을 드러내는데는 한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중요한 문제일수록 좀더 깊이 연구하고 생각하여

토론하는 방법을 택하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고 생각합니다.

목사님께서 공개토론회를 제안해 왔을 때 제가 사양한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지만,

공개토론회에 대한 근본적인 불신이 가장 중요한 이유였습니다.

깊이 생각하고 연구하면서 토론해 보자면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그런 토론은 좋은 결실을 맺을 수 있습니다.

제가 [바늘귀를 통과한 부자]를 써내면서 기대한 것이 그런 것이었습니다.

저는 이 책의 초고를 출판사에 보내기 전에 먼저 목사님께 보내드렸습니다.

그 원고를 보내면서 ‘제가 잘못 이해한 것이 있으면 지적해 달라’는 요청도 했고,

‘저의 비판에 대한 응답을 쓴다면

책의 뒷면에 후기로 포함시키겠다’는 제안도 했던 것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때 저는 말로 하는 토론이 아니라 글로 하는 토론,

순간적인 재치 싸움이 아니라 깊은 연구의 토론을 제안했습니다.

그러나 그 이후에 연락이 두절되어 결국 저의 제안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나중에 목사님은 메일 계정에 문제가 생겨서 연락을 하지 못했다고 설명하셨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저의 책이 나왔고

여러 매체에서 문제를 삼자 목사님은 갑자기 공개토론회를 제안해 오셨습니다.

그 제의에 한편으로 놀라기도 했지만,

여러 가지 생각 끝에 저는 사양하는 것이 좋겠다고 판단했습니다.

공개토론회에 참여하지 않은 또 다른 중요한 이유는

저로서는 책을 통해 할 말을 충분히 했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침묵하고 다른 사람들의 말을 듣고 배우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습니다.

토론이 김동호와 김영봉의 한계에서 맴돌지 말기를 바랐습니다.

당사자가 공개석상에서 마주치면 감정이 개입될 여지가 커집니다만,

제3자가 참여하게 되면 감정의 개입 없이 이성적인 논의가 될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두 당사자가 보지 못한 점들을 객관적 입장에서 평가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목사님께서 청부론 패널로 직접 출연하심으로

결국 토론회는 감정 섞인 자기 방어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하긴, 목사님을 대신하여 청부론을 변호하기 위해 나설 신학자가 과연 있을까 싶긴 합니다.

반면, 영성적 가난론은 구름 같은 증인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토론회를 다 듣고 난 후, 저에게는 목사님과 김남호 집사님이 과연 청부론에 대한

비판의 소리를 성의 있게 읽고 소화했는가에 대해 강한 의구심이 생겼습니다.

꼭 저의 책만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저의 책이 나오기 훨씬 이전부터 인터넷서점의 독자 서평과 숭의교회 홈페이지,

그리고 다른 많은 지면에서 청부론에 대한 비판의 글들이 수 없이 많이 올라왔습니다.

저의 책은 그러한 ‘대중의 소리’를 조직적이고 체계적으로 대변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책임 있는 저자라면 그런 소리를 귀담아 들으며

자신의 주장을 점검해 보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고 믿습니다.

토론회에서 두 분이 ‘영성적 가난 사상’에 대해 비판하는 내용은 제 책의 내용과도 상관없고

그 동안 제기된 책임 있는 비판에도 해당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목사님은 토론회 이후에도 “천국의 열쇠”라는 네 편의 설교를 통해

그리고 다른 인터뷰를 통해 청부론에 대한 비판에 대해 응답해 왔습니다.

하지만 청부론에 대한 핵심적 비판에 대해서는 하나도 답하지 않았습니다.

저의 책이 나온 다음, 목사님의 말과 글과 설교에서

제 비판에 대해 정확하게 답하는 내용을 한번도 본 적이 없습니다.

목사님은 제 책을 읽지 않았거나, 읽었다면 철저히 무시했거나,

무시하지 않았다면 오해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습니다.

어떤 경우가 되었든, 이것은 존경받는 베스트셀러 저자로서의 책임을 외면하는 것입니다.

한국 기독교의 여론을 이끌어 가시는 오피니언 리더답게

자신의 입장에 대한 책임 있는 비판에 대해 성의 있게 귀담아 듣고

잘잘못을 따져 나가는 것을 많은 사람들은 기대하고 있습니다.

숭의교회 홈페이지에서 어떤 사람이,

목사님은 정작 중요한 비판에 대해서는 침묵으로 일관하고 자신을 드러낼 수 있는

질문에 대해서만 답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을 제기한 것을 보았습니다만,

그것이 진실이 아니기를 바랍니다.


청부론의 공헌


저는 청부론의 공헌을 어느 정도 인정하는 입장입니다.

한국교회가 갱신되는 과정에서 목사님의 공헌도 어느 정도는 인정받아야 한다고 믿습니다.

이 점은 저의 책에서도 밝힌 바 있습니다.

[바늘귀를 통과한 부자]가 처음에는 [깨끗한 부자]의 내용에 대해

조목조목 반박하는 형식으로 시작했기 때문에

저는 저의 비판에 책임지기 위해 오디오 북까지 다 들었습니다.

여덟 편의 설교를 들으면서 저는 목사님의 음성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을 느낄 수 있었고,

그것이 예민하고 어려운 주제를 다루는 설교자의 부담감의 표현임을 알 수 있었습니다.

목사님은 그 설교 내용의 상당 부분이

회중석에 앉아 있는 부자들에게 부담될 것을 알고 계셨던 것입니다.

설교를 시작할 때마다 왜 이런 설교를 해야 하는지를 누차 설명했는데,

그것도 역시 회중들이 느낄 부담을 의식했기 때문입니다.

저는 목사님의 책이 부자들에게 ‘잘못된 위로’를 줄 것이라고 비판했지만,

사실 오늘 한국교회의 경제의식을 본다면, 청부론은 위로보다는 아픔을 주어야 마땅합니다.

제 책에서도 말했지만, 청부론은 과거 한국교회를 지배했던 축복 지향적 복음과

여러 가지 면에서 차별성을 보여줍니다.

부(富)를 복 받음이 아니라 은사로 규정한 것,

돈을 버는 과정이 의로워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 것,

자신이 번 돈에서 다른 사람의 몫을 정직하게 떼어내야 한다는 주장,

그리고 유산을 물려주지 않아야 한다는 주장은

과거 한국교회 강단에서 별로 들어보지 못했던 내용입니다.

특히 대형교회 목회자에게서 이런 주장이 나온 것은

따지고 보면 매우 반길 일이라 할 만합니다.

과거 한국교회는 세금 문제조차 제대로 다루지 못하고 쉬쉬해 왔습니다.

헌금의 액수에만 관심을 두었지, 그 돈의 성격에 대해서는 관심을 두지 않는 분위기였습니다.

청부론은 이러한 상황에 대해 책임을 느낀 한 목회자가 일정한 인센티브(incentive)를 주면서

책임을 요청한, 진일보한 의식이라고 평할 수 있습니다.

[깨끗한 부자]에 대한 지나친 비판에 대해

목사님이 부당하고 억울하게 느끼는 것을 저는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목사님으로서는 많은 사람들이 하기 싫어하는 일을 소명감을 가지고 하셨습니다.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단 것입니다.

그런데 그 수고를 알아주기는커녕 ‘왜 그런 방울을 달았느냐?’

혹은 ‘왜 방울을 그렇게 달았느냐?’고 따져 드니,

목사님으로서는 매우 당황스럽고 억울하게 느껴질 것입니다.

그런 반응에 기름을 부은 격인 저는 그런 점에서 목사님께 인간적 부담을 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될 수 있는 한 말을 아끼고 지내왔습니다.

이 공개서한을 쓰는 이유는 지난 몇 개월 동안에 목사님께서 설교와 다른 글에서 하신

응답에 대해 한 번 정도 저의 입장을 밝히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제가 [바늘귀를 통과한 부자]에서 의도한 것은

청부론을 전면적으로 부정하자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청부론이 멈춘 지점에서 더 나아가자는 것이었습니다.

청부론이 좋은 점을 가지고 있지만 지금 상태에서 멈추고 만족한다면

오히려 더 위험한 잘못에 빠질 수도 있음을 상기시키며 보완하려 했습니다.

그리고 계속되는 토론을 통해 저의 부족함도 보완되어

기독교인의 경제 윤리에 대한 인식이 바로 서기를 기대했습니다.

<기독교사상>에서 앞으로 이 프로젝트를 진행한다니 기대해 볼 일입니다.

신학의 제반 분야에서 이 문제를 진지하게 고찰함으로 편벽되지 않은

기독교인 경제 윤리 사상이 체계화되고 한국교회에 널리 의식화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청빈은 특별한 은사다?


전체적으로 볼 때 이번 토론회는 목사님의 논리에서 맴돌고 말았습니다.

가장 큰 이유는 목사님 쪽에서 ‘청빈론’이라는 허수아비를 세워 놓고

상대방의 논리를 끊임없이 청빈론으로 축소시켜 응답했기 때문입니다.

목사님의 말씀을 일부 인용합니다.

"청빈은 누구나 설명 안 해도 훌륭하다는 것을 다 안다.

 그런 면에서 청부론자는 핸디캡이 있다. 청빈론은 훌륭하다.

 그러나 극단으로 흐르면 잘못이다.

 청빈 그 자체로는 기독교 윤리와 철학으로서 문제가 많다.

 정말 존재 지향적으로 살기 위해서 자발적 가난을 선택한 사람이 있으나, 솔직히 몇 안 된다.

 특별한 은사가 있는 사람이나 가능하다.

 특별한 은사 가진 사람의 경우를 보편적 진리처럼 얘기하면 세상이 무너진다."


목사님은 처음부터 끝까지 이런 식의 논리를 반복했습니다.

이것은 목사님의 책에서도 수없이 반복되고 있고, 그 이후의 설교와 다른 글에서도 반복됩니다.

이러한 반복 때문에 토론은 끝내 제자리를 맴돌았습니다.

반대 패널이 논의를 진전시키려 해도 항상 같은 식의 응답만을 들어야 했습니다.

바로 그것이 토론회를 들은 많은 사람들이 느꼈던 답답함의 원인이었다고 저는 판단합니다.

저는 제 책에서 제시한 청부론 비판에 대해 구체적으로 반론이 제기되기를 기대했지만,

그런 일은 없었습니다.

제 책을 읽지 않고 토론회만 들은 사람들은 청부론을 비판하는 사람들이

개인주의적인 사고에 빠져서 패배주의적으로 살며

‘나물 먹고 물 마시는 것’으로 만족하기를 꾀하는 사람들처럼 비쳤을 것입니다.

역사에 대한 책임도, 사회에 대한 참여도 거부하며 홀로 독야청청하기 위해

은둔해 살기를 택하는 사람들처럼 보였을 것입니다.

두 분이 제 주장을 혹은 다른 많은 비평자들의 주장을 그런 식으로 왜곡시켰습니다.

기독교인이라고 자처하는 사람들 치고

이러한 삶의 태도를 옳다고 할 사람은 별로 없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토론회만 들은 사람들에게는 청부론 쪽의 주장이

훨씬 진취적이고 현실적이고 설득력 있게 느껴졌을 것입니다.

목사님은 4월 6일 설교(“말만 많은 크리스천”)에서도 같은 논리로 청부론을 옹호했습니다.

저는 이런 식으로 논리가 진행되는 것에 대해 참을 수 없어,

“청빈론으로 호도하지 말아 주십시오”라는 글을 제 자신의 홈페이지와

숭의교회 홈페이지에 올렸습니다(이 글에 대해서도 목사님은 답하지 않았습니다).

사실, 청부론을 비판하는 사람들 가운데

목사님이 비판하는 식의 청빈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하나도 없습니다.

사회적 책임을 등한시하며 홀로 독야청청하기를 꾀하며 ‘나물 먹고 물 마시며’ 살기를 택하는

그런 태도가 기독교인들의 마땅한 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불교에서는 청빈한 삶을 이상으로 여겨 왔습니다.

특히 탁발승들의 청빈은 절대 무소유를 이상으로 추구합니다.

주어지는 것에 만족하며 살아가자는 것입니다.

유교도 역시 청빈을 이상으로 여겨왔습니다.

하지만 유교가 말하는 청빈은 절대 무소유의 삶이 아니라 의롭게 살겠다는 기개요 결심입니다.

의롭게 살아 가난하게 되면 가난을 기뻐하겠으며, 의롭게 살아 부자가 되었다면

그 부에 대해 부끄러워하지 않겠다는 태도입니다.

유교에서 말하는 청빈은 의로운 부자가 되었을 때

그 부를 이웃에게 너그럽게 베푸는 것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는 유교의 청빈 사상과 목사님의 청부 사상이 별로 다르지 않다고 보는 것입니다.

저를 포함하여 청부론을 비판하는 사람들이 주장하는 것은

불교식의 청빈도, 유교식의 청빈도 아닙니다.

그래서 굳이 ‘자발적 가난’ 혹은 ‘영성적 가난’이라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기독교인들이 청빈하게 살아야 한다’는 말은 자신에게 주어진 것을 마음껏 누리며

호의호식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며, 자신의 소유를 할 수 있는 한 나누며 살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것은 절대 무소유의 삶을 살자는 말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청부론은 누구나 실천할 수 있는 이상이고, 그 반대 사상은

특수한 사람들이나 행할 수 있는 고도의 이상이라고 말씀하시면 안 됩니다.

우리 개신교인들은 천주교에서 믿는 이중 윤리를 믿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시하신 이상은 모든 사람들에게 다 같이 적용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영성적 가난 혹은 자발적 가난은 모든 기독교인들이 추구해야 하는 이상이며,

영성 성장의 과정에서 점차 성숙해 가는 과정입니다.


영성적 가난은 영지주의적이다?


목사님은 5월 11일에 행한 “천국의 열쇠(3)”이라는 설교에서

영지주의의 논리를 사용하여 청부론을 변호하셨습니다.

최근에 방영된 CBS와의 대담에서도

목사님은 청부론의 상대 개념으로 영지주의를 제시했습니다.

설교의 일부를 옮기면 다음과 같습니다.

"그런데 사람들 중에는 ‘영은 선한 것’이고 ‘육은 악한 것이다’라고 생각하여 육의 부활을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것은 완전한 기독교의 구원관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와 같은 구원관은 1세기와 2세기에 나타났던 영지주의 이단의 구원관과 같은 것인데,

 영지주의자들은 세상을 물질계와 영계로 나누고 영계와 영적인 것을 선한 것으로 보았고,

 물질계와 육적인 것을 무조건 악한 것으로 보고 죄악시하였습니다.

 때문에 저들은 이 세상을 악하고 천한 것으로 보아 이 세상을 창조한 구약의 하나님을

 최고의 신이 아닌 낮은 신(the demiurgus)이라고까지 주장하였습니다.

 그와 같은 잘못된 구원관을 가지고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뜻밖에 우리들 중에 많이 있습니다.

 특별히 예수를 좀 열심히 잘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 중에 많이 있습니다.

 예수를 잘 믿는 사람들은 그리고 열심히 믿으려고 하는 사람들은 물질과 세상에 대한 욕심이

 깨끗한 영성을 방해한다는 것을 알고 자신 속에 있는 물질과 세상에 대한 욕심을 버리기 위하여

 그것과 싸웁니다. 그러다가 착각하여 물질과 세상에 대한 욕심과 싸우지 아니하고

 물질과 세상 그 자체를 악한 것으로 보고 그것과 싸웁니다. 그리고 무조건 물질과

 세상을 악한 것으로, 기만적인 것으로 보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이 설교만을 들으면 청부론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모두 영지주의적 이원론에 빠진 사람들처럼

오인될 수 있고, 청부론에 대한 대안은 영지주의밖에 없는 것처럼 오인될 수 있습니다.

여기서 한 걸음만 더 나가면 ‘그들은 이단이니 조심하라’는 위험한 지경에 빠집니다.

하지만 제가 아는 청부론 비판자들 가운데 영지주의적 이원론을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저도 교회생활을 하는 가운데 지나친 이원론으로 경도되어 물질과 육신을 악하게 보고

지나친 금욕주의적 경향으로 흐르는 사람들을 가끔 보아 왔습니다.

하지만 제대로 신학 교육을 받은 사람 치고 영지주의적 이원론에 따라

물질과 육신을 악하게 볼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무조건 물질과 세상을 악한 것으로, 기만적인 것으로 보고 주장합니다’라는 말은

고세훈 교수님의 주장을 염두에 둔 표현일 가능성이 큰데,

그를 영지주의적 이원론자라고 암시하는 것은 큰 잘못입니다.

금욕주의적 경향이 보인다고 해서

‘무조건’ 영지주의적 이단 운운하는 것은 너무나 단순한 논리입니다.

금욕주의적 성향이 강했던 다석 유영모의 글을 보면, 그는 몸을 섬기는 일에 정성을 다했고,

피조 세계를 관찰하고 그 신비에 감사하는 글을 많이 남겼습니다.

그는 금욕주의자처럼 살았으나 ‘몸 성히, 맘 놓이, 뜻 태움’이라는

그의 모토가 보여주는 것처럼 영지주의적 이원론자가 아니었습니다.

목사님의 표현대로 하자면, 그는 욕망과 싸우려 했지 물질과 싸우려 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욕망이 물질을 통해 자극되기 때문에 물질에 대한 경계심을 풀지 않았을 뿐입니다.

토론회에서 고세훈 교수님은 “모든 물질은 기만적 요소를 가지고 있다”고 말했는데,

물질이 본질적으로 악하다는 뜻으로 한 말은 아니었음이 분명합니다.

이것을 이원론적 신앙의 표현으로 치부하는 것은 지나친 왜곡입니다.

금욕주의적 경향이 기독교적이 아니라고 단언하는 것도 왜곡입니다.

신약성서를 제대로 읽는 사람이라면 욕망에 대한 끊임없는 경고를 무시할 수 없을 것입니다.

욕망은 언제나 물질을 통해 우리를 넘어뜨리기 때문에 물질에는 항상 기만적 요소가 있습니다.

언젠가 어느 연극인이 큰 상을 받고 인터뷰를 하는 과정에서 좌우명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받고

‘돈에 긴장하라’는 말이라고 답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기독교인이 아닌 사람들도 물질의 위험을 알고 이렇게 살아가는데,

기독교 지도자들이 나서서 ‘돈에 대한 긴장을 풀라’고 말하는 것을 보면

뭔가 크게 잘못되었다는 느낌이 듭니다.

이번 토론회를 보면서도 저는 뭔가 심하게 잘못되었다고 느낀 것이 있습니다.

당대 최고라는 목사님과 경제학자가 맞서 토론하면서, 목사님은 계속하여

‘가난이 싫다’거나 ‘돈에는 문제가 없다’거나 ‘부자로 살아도 된다’고 주장하고,

경제학자는 ‘돈에 긴장해야 한다’거나 ‘부는 위험하다’고 맞섰습니다.

저는 이것을 보면서 역할이 뒤바뀐 것 같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습니다.

목사님이 해야 할 말을 경제학자가 말하고,

경제학자가 해야 할 말을 목사님이 하고 있다는 느낌 말입니다.

목사님의 단순 논리에 대해 한 마디 덧붙이겠습니다.

사람들이 목사님의 설교와 글을 좋아하는 중요한 이유 중 하나는

단순하고 명쾌하다는 것인데, 이 논리에 기만적 요소가 있다는 것을 지적하려고 합니다.

누구도 놀고 먹는 청빈론을 주장하지 않았는데 상대를 청빈론으로 축소하여 비판하는 것이나,

누구도 영지주의적 이원론을 주장하지 않았는데 상대를 이원론자들로 치부하는 것이 기만적입니다.

뿐만 아니라, ‘청빈론 대 청부론’ 혹은 ‘영지주의적 이원론 대 청부론’을 단순 대립시킴으로써,

청부론에 대한 대안이 청빈론이나 영지주의적 이원론밖에 없는 것처럼 청중을 호도합니다.

이렇게 되면 청부론이 가장 그럴듯한 대안으로 비추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 청부론을 비판하는 사람들이 제시하는 대안은 그렇게 단순화시킬 수 없는,

매우 탄탄한 성서적 기반과 실천적 고려 위에 서 있음을 외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영성적 가난론은 비현실적이다?


토론회 이후, 청부론 비판에 대해 목사님이 자주 제기하는 반문 중에 ‘영성적 가난이

제시하는 기준은 도대체 무엇이냐? 어디까지 가난해지자는 말이냐?’는 것이 있습니다.

토론회 중에 두 분이 모두 이런 질문을 제기했고,

그 이후에 홈페이지 게시판에서 질문에 답하면서 목사님은 자주 이런 반문을 하셨습니다.

이 질문에 대해 고세훈 교수님이 토론회에서 충분히 응답했으나,

두 분은 그 응답을 귀담아 듣지 않았습니다.

목사님은 “말만 많은 크리스천”이라는 설교에서,

청부론을 비판하는 사람들을 추상적인 이론이나 제시하고 남의 트집을 잡는 일에 몰두하는

바리새인 같은 사람들로 빗대면서, 정말 중요한 것은 구체적인 기준을 정하고

그것을 행하는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중의 일부를 인용합니다.

"‘청부’와 ‘청빈’을 주장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저는 그것이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론적으로 ‘청부론’이 더 성서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것을 주장합니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제가 옳다고 생각하는 청부론의 기준과 표준을 세우고 참으로 힘들고 어렵지만

 그대로 살아보려고 발버둥질 치고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분은 청부론을 쉽게 생각하여 넓은 길을 가는 것으로 오해합니다만,

 저는 청부론이 그 어떤 길보다 좁은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청빈론의 이론과 주장에도 관심이 있습니다.

 그러나 제가 관심을 가지는 것은 그 청빈론의 구체적인 기준과 표준은 무엇이며

 그것을 주장하는 사람은 그 표준과 기준대로 살기 위하여

 지금 구체적으로 어떤 삶을 살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저는 누구보다도 논리를 좋아하지만 제가 더 관심을 가지는 것은 이론과 논리가 아니라

 자신의 이론과 논리대로 과연 기준과 표준을 정하고 그것을 실천하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목사님은 자신이 주장하는 바대로 몫 가르기를 하면

최소한 수입의 34.8%(십일조 10%+3년마다 바치는 십일조의 1년분 3.33%+네 귀퉁이

헌물 21.45%= 34.8%)를 떼 내야 하는데, 도대체 청부론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얼마나 행하고 있는지 궁금하다고 반문하십니다.

목사님의 기준으로 볼 때, 수입의 34.8% 정도를 하면 그래도 깨끗한 부자 반열에 들 수 있고,

그 정도 나누었다면 나머지 몫에 대해서는 ‘호의호식할 권리’를 보장해 주는 것이 옳다는 것입니다.

목사님은 토론회에서 “이 기준으로 면죄부를 주어야 한다면 면죄부를 주고 싶다”고 말씀했습니다.

복음의 요청을 실천 가능한 기준으로 축소시키는 위험에 대해서는

토론회에서 고세훈 교수님이 충분히 지적했습니다.

그러나 똑같은 반문을 지금까지 되풀이하는 것을 보면

그 위험성을 인정하지 않으시는 것이 분명해 보입니다.

저는 책의 서두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은

‘전면적’이고 ‘무제한적’이고 ‘총체적’이라는 사실을 언급했습니다.

하나님의 총체적이고 무제한적 부르심이 가장 분명하게 드러난 말씀이

산상설교의 여섯 반제(마 5:21-48)입니다.

예수님은 여기에서 율법의 요청과 하나님의 요청을 대비시킵니다.

율법의 요청은 하나님의 요청을 실현 가능한 수준에서 규범화시킨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하는 것을 반대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법이 없는 자’라고 비난했습니다.

법과 기준을 중시하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지나친 이상주의자처럼 보이거나

아니면 율법의 요청을 피하기 위해 교묘한 말장난을 하는 것처럼 보였을 것입니다.

지금 목사님께서 청부론 비판자들에게 제기하시는 반문은

예수님께 바리새인들이 제기한 질문과 정확하게 일치합니다.

예수님 당시에 열심 있는 바리새인들은 십의 삼조를 했습니다.

수입의 30%를 하나님께 바쳤다는 뜻입니다.

목사님이 제시한 기준과 거의 같은 정도의 몫을 갈라 내놓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들을 칭찬하지 않았습니다.

30%의 십일조를 빌미로 70%의 수입을 호의호식하는 데 사용했기 때문이며,

수입이 너무 작아 10%도 바칠 수 없는 사람들을 ‘죄인’으로 낙인 찍고 정죄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존재, 우리의 소유 전체가 하나님의 것임을 천명하셨고,

그렇기 때문에 전부를 하나님께 드리도록 요청하셨습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것’은 ‘하나님의 뜻에 맞게 사용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헌금과 구제를 개인적 지출과 분리시키면 안 됩니다. 수입의 30%를 바치고

‘나머지는 내 몫이니 누리자’라고 생각하는 사람보다는 10%만 바치더라도

‘나머지 90%도 하나님의 것이니 하나님의 뜻대로 사용하자’고 생각하는 사람이

예수님의 뜻에 더 가깝습니다.

스스로 어느 정도의 기준을 정해 놓고 그 기준을 만족시키는 것을 의로 여긴다면

그것은 복음을 율법화시키는 잘못을 범하는 것입니다.

이 문제에 대해 어느 독자에게 답하면서 저는 이런 비유를 썼습니다.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마 5:28)는

예수님의 말씀에 많은 청년들이 좌절감을 느낍니다.

도저히 행할 수 없는 것을 예수님이 요청하신다고 생각합니다.

조셉 클라우스너(Joseph Klausner)의 말대로

예수님이 인간을 과대평가했다는 불평이 나올 만 합니다.

이 말씀에 대해서 어떤 사람이 이렇게 제안했다 칩시다.

‘이 말씀이 너무 이상적이고 실현 불가능하니, 실현 가능한 기준을 정하자.

키스하는 것까지는 순결한 것으로 인정하자.’ 이렇게 되면 실현 가능한 기준이 생기므로

훨씬 편안하게 느껴질 것입니다. 혈기 왕성한 젊은이들은 위로를 받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예수님의 의도를 훼손시키는 일이라는 것은 너무나도 자명한 일입니다.

청부론의 주장은 이것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의 소유 전부가 하나님의 것이니 할 수 있는 대로 단순하게 살고 할 수 있는 대로

많이 나눠야 한다는 가르침이 지금 같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지나치게 이상적이고

실현 불가능하다는 주장이나, 사람은 사랑의 대상이지 이용의 대상이 아니니

모든 사람들을 형제와 자매처럼 깨끗하게 대하라는 가르침이 지금 같은

성적 분위기에서 지나치게 이상적이고 실현 불가능하다는 주장이나 맥락이 같은 것입니다.

저는 레위기에서 34.8%라는 수치를 도출해낸 과정을 보며

목사님의 기발한 사고력을 다시 한번 확인했습니다.

‘네 귀퉁이를 떼라’는 명령을 기하학적으로 계산하여

21.46%라는 수치를 끌어내신 것은 정말 놀라운 일입니다.

그러나 계산 방법은 기발하지만, 그 기준을 ‘성서적’이라고 제시할 수는 없습니다.

‘네 귀퉁이를 떼라’는 말씀이

그런 기하학적 계산을 염두에 두고 한 표현이 아님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목사님 스스로 마련한 기준이며, 스스로 약속한 기준입니다.

목사님 개인적으로 34.8%를 기준으로 삼고 노력하는 것은 경탄할 만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충분한 기준으로 제시하는 것은 말씀을 오도하는 것입니다.

참으로 실례되는 말씀입니다만,

예수님 당시에 바리새인들이 떠받들던 ‘조상의 유전’(할라카, 구전 율법)이

모두 그런 과정으로 만들어진 것임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오경에 나와 있는 율법을 자신들의 방법과 기준으로 계산하여 규정으로 만든 것입니다.

잘 아시다시피, 예수님은 그것을 모두 거부하셨습니다.

목사님은 최소한 34.8%를 떼 내야 한다고 믿으시니 그렇게 행하시면 됩니다.

그것을 탓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그것이 충분한 기준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며, 그 나머지에 대해서

마음껏 누려도 된다고 주장하는 것은 더 큰 잘못임을 분명히 하고 싶습니다.

사실, 청부론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불편해 하는 이유는 바로 이 ‘누림의 권리’ 때문입니다.

정직하게 일해야 한다는 주장에도 동의하고,

수입에서 다른 사람의 몫을 정직하게 구분해내야 한다는 데에도 동의합니다.

문제는 그 이후에 남는 것에 대해

‘누려도 된다’고 혹은 ‘호의호식해도 된다’고 선언하는 데 있습니다.

목사님은 이 지적에 대해 끊임없이 외면하면서 34.8%를 떼는 것에 대한 고통만을 강조하십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비판하는 사람들의 초점을 흐리게 만드십니다.

최근에 이 문제에 대한 응답에서 목사님과 김남호 집사님은 이렇게 응답하십니다.

“자기 수입에서 34.8% 정도를 떼 낼 정도의 사람이라면

나머지를 가지고 호의호식할 리가 있는가?” 이 반문은 목사님께서

[깨끗한 부자]에서 주장한 ‘누림의 권리’를 스스로 부정하시는 것입니다.

만일 영성이 그만큼 성장하여 34.8%를 기쁨으로 떼는 사람이라면

두 분이 말한 대로 나머지를 가지고 호의호식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영성 성장의 결과로 한 것이 아니라 신앙적 의무감 때문에

‘손이 떨리도록 힘들지만’(목사님의 설교의 표현) 힘써 노력한 것이라면 문제는 달라집니다.

그런 사람은 율법적 공로감에 빠져 자만하기 쉽고, 그로 인한 자의식 때문에

나머지 몫으로 호의호식하는 데 아무런 거리낌을 느끼지 못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전면적인 부르심을 따르기 위해

단계적으로 실천 가능한 목표를 정하고 실행해 나가는 것은 좋은 방법입니다.

목사님께서 개인적으로 34.8%를 잠정적인 목표로 설정하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시면서

영성 성장에 비례하여 그 수치를 점차로 높여 가신다면 아무도 비판할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마치 그것을 성서적 기준인 것처럼 제시하면서,

‘이만큼만 행하면 면죄부를 줄 만하다’거나 ‘이만큼 행하지 못한다면

나를 비판할 자격도 없다’는 식으로 말씀하시니, 저 같은 사람은

목사님께서 율법주의적 오류에 빠지지 않았나를 심각하게 걱정하는 것입니다.

전부를 요구하시는 하나님 앞에서는 10%를 나누는 사람이나

50%를 나누는 사람이나 동일한 죄인일 뿐입니다.

우리가 50%를 나누고 있다 해도 10%를 나누는 사람에 대해

비교적 우월감을 갖는다면 하나님께 책망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바울 사도의 말씀대로 우리는 어디에 이르렀든지

항상 부족함을 느끼며 더 나아가도록 힘써야 합니다.

34.8%를 자랑하시면서 ‘당신들은 얼마나 하느냐?’고 물으시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신앙적 태도가 아닙니다.


그건 누구나 범하는 잘못이다?


최근에 [성서 속의 백만장자]라는 책이 번역되어 나왔습니다.

[깨끗한 부자]가 청부론을 서술적으로 주장한 것이라면,

이 책은 청부론의 성서적 사례를 든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책의 제목을 보고 저는 어떤 인물을 다루었는지 궁금해졌습니다.

‘신약의 인물이 하나라도 포함되었을까?’

저의 기대는 보기 좋게 무너졌습니다.

룻을 제외하면 모든 사례가 창세기에서 나왔습니다.

저의 기대가 무너진 것은 다행이기도 하고 불행이기도 합니다.

아무리 왜곡된 시선을 가진 사람이라도 신약성서에서

청부론의 사례를 찾을 수 없다는 사실을 확인했기 때문에 ‘다행’이라는 것이고,

신약의 계시를 무시한 채 구약만 가지고 기독교 청부론을 주장하는 책이

또 하나 나온 것이 ‘불행’이라고 말하는 이유입니다.

사실, 구약성서도 전체적으로 옳게 이해한다면 청부론을 함부로 주장할 수 없습니다.

자기가 좋아하는 부분만을 선택해서 해석하기 때문에 이런 문제가 발생합니다.

토론회 중에 허종 목사님이 성서를 자기 마음에 맞는 부분만 택해서 왜곡하면 곤란하다는

지적을 했을 때, 목사님은 “그거야 누구나 범하는 잘못 아니냐?”고 응수했습니다.

저는 이 대목에서 경악했습니다. 목사는 성서를 가장 중요하게 대하는 사람입니다.

목사의 생명은 성서를 얼마나 바르게 읽고 해석하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그러므로 목사가 가장 두려워해야 할 비판은 성서를 왜곡한다는 비판입니다.

이런 비판이 제기되면 ‘혹시나 그 비판이 사실이 아닐까?’ 하는 마음으로 자신을 살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목사님께서 “누구는 그런 잘못 범하지 않는가?”라고

응수하고 넘어가는 것을 보고 제 귀를 의심해야 했습니다.

누구나 범하는 잘못이기 때문에 더 조심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특히 대중에게 막강한 영향력을 가진 설교자라면

자신의 성서 해석이 바른지 그른지를 항상 살펴야 하는 것 아닐까요?

성서학자로서 제가 목사님의 성서 해석에서 발견하는 문제들은 적지 않습니다.

가장 큰 오류는 앞에서 지적한 편향성에 있습니다.

경제 문제에 대해 논하는 과정에서

목사님이 금과옥조처럼 여기는 본문은 레위기 19장 15-16절입니다.

목사님은 CBS와의 인터뷰에서 이 본문을 보고 경제 문제에 대한 고민을 해결 받았다고 했습니다.

목사님의 고민을 결정적으로 해결해 준 것은 “가난한 자의 편을 들지 말며”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이 구절을 근거로 하여 ‘하나님은 무조건 가난한 자의 편을 들어주지 않으시며,

가난한 자가 무조건 의로운 것은 아니다’라는 주장을 펴십니다.

하나님은 가난한 자의 편이 아니라 의로운 자의 편이라는 주장을 하십니다.

현실 역사로부터 떠나 이 주장만을 생각하면 분명히 옳습니다.

하지만 목사님은 구약성서 안에 오직 한 번 나오는 구절을 붙들고

모든 것을 설명하려는 오류를 범했습니다.

성서를 처음 읽는 사람이 그런 판단을 했다면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 사람은 성서를 계속 읽어가면서 시편과 예언서에 수없이 기록되어 있는

‘가난한 자에 대한 하나님의 관심’과 ‘부자에 대한 비판’을 읽게 될 것입니다.

그 즈음에 이르면 ‘아, 원리적으로는 하나님이 의로운 자의 편이지만, 현실 속에서는

하나님이 가난한 자를 두둔하실 경우가 훨씬 많구나’ 하는 진실을 목도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초신자가 아니라 목사님께서 시편과 예언서의 그 많은 증언을 도외시하고

레위기에 있는 한 구절을 절대적인 표준으로 생각하시는 것은

‘의도적 선택’이라고밖에는 평할 수 없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신약의 말씀 혹은 예수님의 말씀을 전적으로 무시하거나

아주 적은 일부만을 선택하지 않고는 청부론을 펴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황호찬 교수는 ‘예수님이 하나님 나라 외에 가장 많은 말씀을 하신 주제가 바로 돈이다’라고

지적한 바 있는데, 복음서에는 돈 혹은 재물에 관한 말씀이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특히, 경제 문제에 관심을 많이 쏟았던 누가복음 안에는

이와 관련된 말씀과 행적과 비유들이 많이 나옵니다.

그런데 ‘돈과 신앙’의 문제에 대해 본격적으로 다루겠다고 펴낸 책에서

누가복음에 기록된 말씀과 비유가 거의 다루어지지 않았다면 과연 옳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적어도 예수님이 경제 문제에 대해 하신 중요한 말씀들은 다루었어야 합니다.

『깨끗한 부자』의 가장 큰 결점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신앙과 돈’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을 전체적으로 연구하고 결론을 낸 것이 아니라,

이미 가지고 있는 철학을 입증하기 위해 성서를 선택적으로 사용한 것입니다.

제임스 스마트(James Smart)는 [성경이 왜 교회에서 침묵하는가?]라는 책에서

선택적 사용이 성서를 침묵시키는 치명적 오류라고 지적한 바 있습니다.

제가 보기에 예수님의 말씀을 연구하고 씨름하여 청부론이 나온 것이 아니라,

이미 세워진 청부론을 입증하기 위해 성서를 선택적으로 사용했다는 의혹이 너무나도 큽니다.

이것은 목사님이 지적했듯이 설교자들이 자주 범하는 잘못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조심해야 하고, 잘못이 발견되었을 때는 서슴없이 승인하고 수정해야 합니다.

그것이 ‘말씀의 심부름꾼’이 가져야 할 태도일 것입니다.

‘말씀의 심부름꾼’에게 중요한 것은 자신의 체면과 명성이 아니라

말씀이 얼마나 충실하게 전해졌는가에 있습니다.


부자 기독교인에게도 지침을 주어야 한다?


자발적 가난론 혹은 영성적 가난론에 대해 목사님께서 드러내신 오해 중 또 하나는

그것이 일부에게만 해당하는 특수 윤리라는 것입니다.

토론회에서 목사님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부는 사회적 현상이다. 부자와 가난한 자가 있다.

 가난한 자와 부자에 대해서 모두 얘기해 줘야 한다.

 부자에 대해서 바르고 깨끗하게 살아야 한다고 가르치고 그 기준을 정해 주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청부론을 썼다. …'부자가 깨끗하기 힘들다.

 그러나 전면 부정하면 가능성은 무너진다. 그러면 가르치지 말고 포기해야 하나?

 부자는 어떻게 되어야 하는가를 성경적으로 가르쳐야 한다."


이 말은 영성적 가난 사상이 부자에 대해 아무런 지침도 주지 못한다는 전제를 깔고 있습니다.

부자가 엄연히 존재하는 현실을 무시한다는 것입니다.

부의 문제가 이렇게도 문제가 되는데, 왜 가난에 대해서만 말하려 하느냐는 반문입니다.

여기서도 역시 목사님이 청부론에 대한 비판에 성의껏 귀를 기울이지 않았음을 확인합니다.

저의 책도 그렇지만, 최근에 쏟아져 나온 청부론 비판들은

모두 중산층 이상의 독자들을 대상으로 하고 있습니다.

천민자본주의적 왜곡상을 그냥 두고 볼 수 없어서

중산층 이상의 기독교인 독자들에게 책임을 요청하는 목소리들입니다.

부자에게 가르치는 일을 포기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저는 목사님의 말씀대로 “부자는 어떻게 되어야 하는가를

성서적으로 가르쳐야 한다”는 사명감으로 {바늘귀를 통과한 부자}를 썼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책을 읽은 독자들 가운데

‘아무 재산이 없는 나는 어떻게 해야 하나요?’라고 질문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제대로 읽은 것입니다.

저는 빈곤선 아래에서 고통받는 사람들을 위해 이 글을 쓴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분들을 위해서는 다른 책이 쓰여져야 할 것입니다.

저는 [깨끗한 부자]가 겨냥한 바로 그 독자들을 겨냥해서 글을 썼습니다.

청부론을 비판하는 다른 사람의 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이 청부론을 문제삼은 것은 부의 문제를 외면하자는 뜻이 아니라

부의 문제를 더 철저히 붙들고 씨름하자는 뜻입니다.

패널의 한 사람으로 나온 김남호 집사님은 더욱 이해하기 힘든 말씀을 합니다.

토론회 중에 한 발언의 한 대목입니다.

"늘 영성적 가난을 추구하는 것이 옳은 것은 인정한다.

 그러나 그것에 너무 치중하다 보면 개인윤리를 강조하게 되고,

 그로 인해 교회 부패와 사회로부터 분리가 야기된다. 새로운 대안을 내놓아야 한다.

 ‘깨끗한 부자’의 논리적 한계를 지적하지만, 청부론은 굉장히 중요한 시작을 한 것이다.

 직업 윤리에 있어서 더 이상 도피자로 만들어서는 안 된다.

 영성적 가난에는 개인윤리로 돌아가자는 회귀성이 보인다.

 지난 30년 간 한국교회는 개인윤리를 강조하다가 교회는 철저히 부패했다."


이 말에서 그분이 저의 책을 읽지 않고 ‘영성적 가난’을 운운했던 것이 분명해 보입니다.

만일 읽었다면 의도적으로 혹은 무의식중에 제 주장을 왜곡한 것입니다.

영성적 가난은 그분이 해석했듯이 ‘은둔자적 무소유’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제가 주장한 그리고 많은 기독교인들이 생각하는 ‘영성적 가난’은 오히려 인간의 삶에 대해,

신앙의 소명에 대해 그리고 사회적 문제에 대해 더 철저하고 깊은 사고와 헌신을 요구합니다.

제 책의 4부와 5부가 이 문제를 논하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깨끗한 부자]에서는 볼 수 없는 거시적 사회 인식과 책임적 태도가 제시되어 있습니다.

사실, 청부론에 대해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우려하는 이유는 김남호 집사님이

영성적 가난론에 대해 우려한 바로 그 위험 요소가 청부론에 있다고 판단되기 때문입니다.

목사님의 청부론의 큰 약점 중 하나는 사회의식의 결여 혹은 사회의식의 미숙함입니다.

청부론에 대한 글과 설교는 항상 개인에게 집중되어 있습니다.

기독교인의 경제 윤리의 문제를 미시적으로만 파악하고 해법을 제공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회구조적 악의 문제는 피상적으로 언급되거나 미화됩니다.

제가 주장한 영성적 가난은 사회에 대한 거시적 시각을 견지한 상태에서

개인의 윤리적 책임을 고려합니다.

김남호 집사님은 “직업 윤리에 있어서 더 이상 도피자로 만들어서는 안 된다”고 했는데,

이것은 저의 주장과는 전혀 상관없는 비판입니다.

최근에 청부론을 비판한 사람 중에 사회적 도피를 암시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오히려 청부론을 주장하는 사람들보다 더 강력한 사회적 헌신을 요청합니다.

저는 책이 출판된 후 다양한 반응을 접해 왔고, 그에 대해 정성껏 응답하기 위해 힘쓰고 있습니다.

그러는 한편, 기독교 고전들을 계속해서 읽으며 저 자신의 이론에 대해 점검하고 있습니다.

다행스러운 것은 교회의 사랑을 받아온 위대한 고전들이 제가 주장한 것보다

훨씬 더 철저하고 높은 이상을 제시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제가 읽은 고전 안에서 청부론과 가까운 사상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저의 책에 혹시 허물이 있다면

복음의 순도와 명도를 흐린 허물이 있을 뿐이라는 것이 지금의 제 판단입니다.


긴 편지를 정리합니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제가 영성적 가난을 제창한 것은

청부론의 단계에서 멈추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환기시키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청부론이 한국교회의 경제 윤리 의식을 제고시키는 데 큰 공헌을 한 것은 잘한 일입니다.

김남호 집사님의 지적대로 “청부론은 굉장히 중요한 시작을 한 셈”입니다.

제가 그리고 많은 청부론 비판자들이 하고자 하는 말은 그것이 시작임을 잊지 말자는 것입니다.

청부론이 시작이라면 완성해 가야 할 책임이 남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목사님을 통해 청부론을 제창하게 하심으로써

경제 윤리 문제에 대한 의식 개혁의 첫 발을 딛게 하셨다고 저는 믿습니다.

테이야르 드 샤르댕(Pierre Teilhard de Chardin)이 지적한 바

‘사회적 의식의 갑작스러운 개명’이 지금 한국교회에 시작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목사님의 노력으로 그 개명이 시작되었습니다.

저는 [바늘귀를 통과한 부자]에서 힘닿는 대로 그 빛을 더 밝게 하려고 애썼습니다.

이제 광명한 천지가 되게 하기 위해 모두가 더욱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목사님과 다른 청부론자들이 비판의 목소리를

좀더 성의 있게 경청하고 응답해 주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지금까지의 응답에는 미진한 점과 아쉬운 점이 너무 많았습니다.

청부론을 비판하는 사람들도 그 실체를

좀더 긍정적으로 연구하고 책임 있는 비판을 하면 좋겠습니다.

비판만이 아니라 건설적 대안을 제시하는 데까지 가야 할 것입니다.


▲김영봉 목사.
이것은 누가 옳고 그른가를 따지는 싸움이 아닙니다.

자신의 입장을 얼마나 잘 변호하느냐가 아니라

진리에 얼마나 자신을 접근시키느냐가 참된 성공입니다.

진리에 비하면 우리의 명성이나 자존심이나 인기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오직 진리파지(眞理把持)의 영만이 이 논의를 이끌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예수께서 전해 주신 진리에 가까이 이르기 위해,

그리하여 개명의 빛이 온 누리를 비출 때까지

구도자적 순수함과 열정으로 진지하게 힘써 노력해야 할 일입니다.

목사님의 사역에 진리의 영이 더욱 함께 하시기를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