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형도(1960~1989).
경기도 연평도 출생
1979 연세대 정법대
1984 중앙일보사 입사.
1985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 ‘안개’로 당선.
유고 시집 [입 속의 검은 잎] 출간
기형도 시 모음
◈ 길 위에서 중얼거리다
그는 어디로 갔을까
너희 흘러가버린 기쁨이여
한때 내 육체를 사용했던 이별들이여
찾지 말라, 나는 곧 무너질 것들만 그리워했다
이제 해가 지고 길 위의 기억은 흐려졌으니
공중엔 희고 둥그런 자국만 뚜렷하다
물들은 소리없이 흐르다 굳고
어디선가 굶주린 구름들은 몰려왔다
나무들은 그리고 황폐한 내부를 숨기기 위해
크고 넓은 이파리들을 가득 피워냈다
나는 어디로 가는 것일까, 돌아갈 수조차 없이
이제는 너무 멀리 떠내려 온 이 길
구름들은 길을 터주지 않으면 곧 사라진다
눈을 감아도 보인다
어둠 속에서 중얼거린다
나를 찾지 말라, 무책임한 탄식들이여
길 위에서 일생을 그르치고 있는 희망이여
◈ 엄마 생각
열무 삽 십 단을 이고
시장에 간 우리 엄마
안 오시네, 해는 시든지 오래
나는 찬밥처럼 방에 담겨
아무리 천천히 숙제를 해도
엄마 안 오시네
배추잎 같은 발자국 소리 타박타박
안 들리네, 어둡고 무서워
금간 창틈으로 고요히 빗소리
빈방에 혼자 엎드려 훌쩍거리던
아주 먼 옛날
지금도 내 눈시울 뜨겁게 하는
그 시절, 내 유년의 윗목
◈ 우리 동네 목사님
읍내에서 그를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철공소 앞에서 자전거를 세우고 그는
양철 홈통을 반듯하게 펴는 대장장이 망치질을 조용히 보고 있었다.
자전거 짐들 위에는 두껍고 딱딱해 보이는
성경책만한 송판들이 실려 있었다.
교인들은 교회당 꽃밭을 마구 밟고 다녔다.
일주일 전에 목사님은 폐렴으로 둘째 아이를 잃었다.
장마통에 교인들은 반으로 줄었다.
더구나 그는 큰 소리로 기도하거나 손뼉을 치며
찬송하는 법도 없어 교인들은 주일마다 쑤군거렸다.
학생회 소년들과 목사관 뒷터에 푸성귀를 심다가
저녁 예배에 늦은 적도 있다.
성경이 아니라 생활에 밑줄을 그어야 한다는
그의 말은 집사들 사이에서 맹렬한 분노를 자아냈다.
폐렴으로 아이를 잃자 마을 전체가
은밀히 눈빛을 주고받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 주에 그는 우리 마을을 떠나야 한다.
어두운 천막교회 천정에 늘어진 작은 전구처럼
하늘에는 어느덧 하나둘 맑은 별들이 켜지고
대장장이도 주섬주섬 공구를 챙겨들었다.
한참동안 무엇인가 생각하던 목사님은
그제서야 동네를 향해 천천히 페달을 밟았다.
저녁 공기 속에서 그의 친숙한 얼굴은 어딘지 조금 쓸쓸해 보였다.
◈ 나리 나리 개나리
누이여
또다시 은비늘 더미를 일으켜 세우며
시간이 빠르게 이동하였다
어느 날의 잔잔한 어둠이
이파리 하나 피우지 못한 너의 생애를
소리 없이 꺾어 갔던 그 투명한
기억을 향하여 봄이 왔다.
살아 있는 나는 세월을 모른다.
네가 가져간 시간과 버리고 간 시간
시간들의 얽힌 영토 속에서
한 뼘의 폭궁도 없이 나는 고요했다.
다만 햇덩이 이글거리는 벌판을
맨발로 산보할 때
어김없이 시간은 솟구치며 떨어져
이슬 턴 풀잎새로 엉겅퀴 바늘을
살라주었다.
봄은 살아 있지 않은 것은 묻지 않는다.
떠다니는 내 기억의 얼음장마다
부르지 않아도 뜨거운 안개가 쌓일 뿐이다
잠글 수 없는 것이 어디 시간뿐이랴
아아, 하나의 작은 죽음이 얼마나 큰 죽음들을 거느리는가
나리나리 개나리
네가 두드릴 곳 하나 없는 거리
봄은 또다시 접혔던 꽃술을 펴고
찬물로 눈을 헹구며 유령처럼 나는 꽃을 꺾는다.
◈ 노을
하루 종일 지친 몸으로만 떠돌다가
땅에 떨어져 죽지 못한
햇빛들은 줄지어 어디로 가는 걸까
웅성웅성 가장 근심스런 색깔로 西行(서행)하며
이미 어둠이 깔리는 燒却場(소각장)으로 몰려들어
몇 점 폐휴지로 타들어가는 午後 6시의 참혹한 刑量(형량)
단 한 번 후회도 용서하지 않는 무서운 時間(시간)
바람은 긴 채찍을 휘둘러
살아서 빛나는 온갖 象徵(상징)을 몰아내고 있다.
都市(도시)는 곧 活字(활자)들이 일제히 빠져 달아나
速度(속도) 없이 페이지를 펄럭이는 텅 빈 한 권 冊(책)이 되리라.
勝負(승부)를 알 수 없는 하루와의 싸움에서
우리는 패배했을까. 오늘도 물어보는 사소한 물음은
그러나 우리의 일생을 텅텅 흔드는 것.
午後(오후) 6時(시)의 소각장 위로 말없이
검은 연기가 우산처럼 펼쳐지고
이젠 우리들의 차례였다.
두렵지 않은가.
밤이면 그림자를 빼앗겨 누구나 아득한 혼자였다.
문득 거리를 빠르게 스쳐가는 日常(일상)의 恐怖(공포)
보여다오. 지금까지 무엇을 했는가 살아 있는 그대여
오후 6시
우리들 이마에도 아, 붉은 노을이 떴다.
그러면 우리는 어디로 가지?
아직도 펄펄 살아 있는 우리는 이제 각자 어디로 가지?
◈ 빈집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
창밖을 떠돌던 겨울 안개들아
아무것도 모르던 촛불들아, 잘 있거라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아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아
잘 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
가엾은 내 사랑 빈집에 갇혔네
◈ 숲으로 된 성벽
저녁노을이 지면
神들의 商店엔 하나둘 불이 켜지고
농부들은 작은 당나귀들과 함께
城 안으로 사라지는 것이었다
성벽은 울창한 숲으로 된 것이어서
누구나 寺院을 통과하는 구름 혹은
조용한 공기들이 되지 않으면
한걸음도 들어갈 수 없는 아름답고
신비로운 그 城
어느 골동품 商人이 그 숲을 찾아와
몇 개 큰 나무들을 잘라내고 들어갔다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가 본 것은 쓰러진 나무들뿐,
잠시 후 그는 그 공터를 떠났다
농부들은 아직도 그 평화로운 城에 살고 있다
물론 그 작은 당나귀들 역시
◈ 장미빛 인생
문을 열고 사내가 들어온다
모자를 벗자 그의 남루한 외투처럼
희끗희끗한 반백의 머리카락이 드러난다
삐걱이는 나무의자에 자신의 모든 것을 밀어넣고
그는 건강하고 탐욕스러운 두 손으로
우스꽝스럽게도 작은 컵을 움켜쥔다
단 한번이라도 저 커다란 손으로 그는
그럴듯한 상대의 목덜미를 쥐어본 적이 있었을까
사내는 말이 없다, 그는 함부로 자신의 시선을 사용하지 않는 대신
한 곳을 향해 그 어떤 체험들을 착취하고 있다
숱한 사건들의 매듭을 풀기 위해, 얼마나 가혹한 많은 방문객들을
저 시선은 노려보았을까, 여러 차례 거듭되는
의혹과 유혹을 맛본 자들의 그것처럼
그 어떤 육체의 무질서도 단호히 거부하는 어깨
어찌 보면 그 어떤 질투심에 스스로 감격하는 듯한 입술
분명 우두머리를 꿈꾸었을, 머리카락에 가리워진 귀
그러나 누가 감히 저 사내의 책임을 뒤집어쓰랴
사내는 여전히 말이 없다, 비로소 생각났다는 듯이
그는 두툼한 외투 속에서 무엇인가 끄집어낸다
고독의 완강한 저항을 뿌리치며, 어떤 대결도 각오하겠다는 듯이
사내는 주위를 두리번거린다, 얼굴 위를 걸어다니는 저 표정
삐걱이는 나무의자에 자신의 모든 것을 밀어넣고
사내는 그것으로 탁자 위를 퍼내기 시작한다
건장한 덩치를 굽힌 채, 느릿느릿
그러나 허겁지겁, 스스로의 명령에 힘을 넣어가며
나는 인생을 증오한다
◈ 가는 비 온다
간판들이 조금씩 젖는다
나는 어디론가 가기 위해 걷고 있는 것이 아니다
둥글고 넓은 가로수 잎들은 떨어지고
이런 날 동네에서는 한 소년이 죽기도 한다.
저 식물들에게 내가 그러나 해줄 수 있는 일은 없다
언젠가 이곳에 인질극이 있었다
범인은 '휴일'이라는 노래를 틀고 큰 소리로 따라 부르며
자신의 목을 긴 유리조각으로 그었다
지금은 한 여자가 그 집에 산다
그 여자는 대단히 고집 센 거위를 기른다
가는비는 사람들의 바지를 조금 적실뿐이다
그렇다면 죽은 사람의 음성은 이제 누구의 것일까
이 상점은 어쩌다 간판을 바꾸었을까
도무지 쓸데없는 것들에 관심이 많다고
우산을 쓴 친구들은 나에게 지적한다
이 거리 끝에는 커다란 전당포가 있다, 주인의 얼굴은
아무도 모른다, 사람들은 시간을 빌리러 뒤뚱뒤뚱 그곳에 간다
이를테면 빗방울과 장난을 치는 저 거위는
식탁에 오를 나날 따위엔 관심이 없다
나는 안다, 가는 비는 사람을 선택하지 않으며
누구도 죽음에게 쉽사리 자수하지 않는다
그러나 어쩌랴, 하나뿐인 입들을 막아버리는
가는 비오는 날, 사람들은 모두 젖은 길을 걸어야 한다
◈ 가을에
잎 진 빈 가지에
이제는 무엇이 매달려 있나.
밤이면 유령처럼
벌레 소리여.
네가 내 슬픔을 대신 울어줄까.
내 음성을 만들어줄까.
잠들지 못해 여윈 이 가슴엔
밤새 네 울음소리에 할퀴운 자국.
홀로 된 아픔을 아는가.
우수수 떨어지는 노을에도 소스라쳐
멍든 가슴에서 주르르르
네 소리.
잎 진 빈 가지에
내가 매달려 울어볼까.
찬바람에 떨어지고
땅에 부딪혀 부서질지라도
내가 죽으면
내 이름을 위하여 빈 가지가 흔들리면
네 울음에 섞이어 긴 밤을 잠들 수 있을까.
◈ 기억할 만한 지나침
그리고 나는 우연히 그곳을 지나게 되었다
눈은 퍼부었고 거리는 캄캄했다
움직이지 못하는 건물들은 눈을 뒤집어쓰고
희고 거대한 서류뭉치로 변해갔다
무슨 관공서였는데 희미한 불빛이 새어나왔다
유리창 너머 한 사내가 보였다
그 춥고 큰방에서 書記는 혼자 울고 있었다!
눈은 퍼부었고 내 뒤에는 아무도 없었다
침묵을 달아나지 못하게 하느라 나는 거의 고통스러웠다
어떻게 해야 할까, 나는 중지시킬 수 없었다
나는 그가 울음을 그칠 때까지 창 밖에서 떠나지 못했다
그리고 나는 우연히 지금 그를 떠올리게 되었다
밤은 깊고 텅 빈 사무실 창밖으로 눈이 퍼붓는다
나는 그 사내를 어리석은 자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 病
내 얼굴이 한 폭 낯선 풍경화로 보이기
시작한 이후, 나는 主語를 잃고 헤매이는
가지 잘린 늙은 나무가 되었다.
가끔씩 숨이 턱턱 막히는 어둠에 체해
반토막 영혼을 뒤틀어 눈을 뜨면
잔인하게 죽어간 붉은 세월이 곱게 접혀 있는
단단한 몸통 위에,
사람아, 사람아 단풍든다.
아아, 노랗게 단풍든다.
◈ 껍질
空中을 솟구친 길은
그늘을 끼고 돌아왔고
아무것 알지 못하는 그는
한줌 가슴을 버리고
떠났다.
車窓 안쪽에 비쳐오는
낯선 거리엔
大理石보다 차가운
내 幻影이 떠오른다.
아무것 알려 하지 않는 그는
미련 없이 머리를 깎았다.
그는 나보다 앞선 歲月을 살았고
나와 同甲이었다.
감싸안은 두 발이
천장을 디디고 휘청거리는데
단단히 굳어버린 鋪道엔 바람이 일고
이 밤은 여느 때 마냥 춥다
◈ 꽃
내
靈魂이 타오르는 날이면
가슴앓는 그대 庭園에서
그대의
온 밤내 뜨겁게 토해내는 피가 되어
꽃으로 설 것이다.
그대라면
내 허리를 잘리어도 좋으리.
짙은 입김으로
그대 가슴을 깁고
바람 부는 곳으로 머리를 두면
선 채로 잠이 들어도 좋을 것이다.
◈ 노인들
감당하기 벅찬 나날들은 이미 다 지나갔다
그 긴 겨울을 견뎌낸 나뭇가지들은
봄빛이 닿는 곳마다 기다렸다는 듯 목을 분지르며 떨어진다
그럴 때마다 내 나이와는 거리가 먼 슬픔들을 나는 느낀다
그리고 그 슬픔들은 내 몫이 아니어서 고통스럽다
그러나 부러지지 않고 죽어 있는 날렵한 가지들은 추악하다
◈ 달밤
누나는 조그맣게 울었다.
그리고 꽃씨를 뿌리면서 시집갔다.
봄이 가고.
우리는, 새벽마다 아스팔트 위에 도우도우새들이 쭈그려 앉아
채송화를 싹뚝싹뚝 뜯어먹는 것을 보고 울었다.
맨홀 뚜껑은 항상 열려 있었지만
새들은 엇갈려 짚는 다리를
한 번도 빠뜨리지 않았다.
여름이 가고.
바람은, 먼 南國(남국)나라까지 차가운 머리카락을 갈기갈기풀어 날렸다.
이쁜 달[月]이 노랗게 곪은 저녁,
리어카를 끌고 新作路를 걸어오시던 어머니의 그림자는
달빛을 받아 긴 띠를 발목에 매고, 그날 밤 내내
몹시 허리를 앓았다.
◈ 물속의 사막
밤 세시, 길 밖으로 모두 흘러간다 나는 금지된다
장마비 빈 빌딩에 퍼붓는다
물위를 읽을 수 없는 문장들이 지나가고
나는 더 이상 인기척을 내지 않는다
유리창, 푸른 옥수숫잎 흘러내린다
무정한 옥수수나무..... 나는 천천히 발음해본다
석탄가루를 뒤집어쓴 흰 개는
그해 장마통에 집을 버렸다
비닐집, 비에 잠겼던 흙탕마다
잎들은 각오한 듯 무성했지만
의심이 많은 자의 침묵은 아무것도 통과하지 못한다
밤 도시의 환한 빌딩은 차디차다
장마비 아버지 얼굴 떠내려오신다
유리창에 잠시 붙어 입을 벌린다
나는 헛것을 살았다, 살아서 헛것이었다
우수수 아버지 지워진다
빗줄기와 몸을 바꾼다
아버지 비에 묻는다 내 단단한 각오들은 어디로 갔을까?
번들거리는 검은 유리창, 와이셔츠 흰빛은 터진다
미친 듯이 소리친다
빌딩 속은 악몽조차 젖지 못한다
물들은 집을 버렸다
내 눈 속에는 물들이 살지 않는다
◈ 바람의 집
내 유년 시절 바람이 문풍지를 더듬던 동지의 밤이면
어머니는 내 머리를 당신 무릎에 뉘고 무딘 칼 끝으로
시퍼런 무를 깎아주시곤 하였다. 어머니 무서워요.
저 울음소리, 어머니조차 무서워요, 얘야,
그것은 네 속에서 울리는 소리란다. 네가 크면 너는
이 겨울을 그리워하기 위해 더 큰 소리로 울어야 한다.
자정 지나 앞마당에 은빛 금속처럼 서리가 깔릴 때까지
어머니는 마른 손으로 종잇장 같은 내 배를 자꾸만
쓸어내렸다. 처마 밑 시래기 한줌 부스러짐으로 천천히
등을 돌리던 바람의 한숨, 사위어가는 호롱불 주위로
방안 가득 풀풀 수십 장 입김이 날리던 밤,
그 작은 소년과 어머니는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할까?
◈ 봄날은 간다
햇빛은 분가루처럼 흩날리고
쉽사리 키가 변하는 그림자들은
한 장 熱風에 말려 둥글게 휘어지는구나
아무 때나 손을 흔드는
미루나무 얕은 그늘 속을 첨벙이며
2시반 시외버스도 떠난 지 오래인데
아까부터 서울집 툇마루에 앉은 여자
외상값처럼 밀려드는 대낮
신작로 위에는 흙먼지, 더러운 비닐들
빈 들판에 꽂혀 있는 저 희미한 연기들은
어느 쓸쓸한 풀잎의 자손들일까
밤마다 숱한 나무젓가락들은 두 쪽으로 갈라지고
사내들은 화투패마냥 모여들어 또 그렇게
어디론가 뿔뿔이 흩어져간다
여자가 속옷을 헹구는 시냇가엔
하룻밤새 없어져버린 풀꽃들
다시 흘러들어온 것들의 人事
흐린 알전구 아래 엉망으로 취한 군인은
몇 해 전 누이 얼굴을 알아보지 못하고, 여자는
자신의 생을 계산하지 못한다.
몇 번인가 아이를 지울 때 그랬듯이
습관적으로 주르르 눈물을 흘릴 뿐
끌어안은 무릎 사이에서
추억은 내용물 없이 떠오르고
小邑은 무서우리만치 고요하다, 누구일까
세숫대야 속에 삶은 달걀처럼 잠긴 얼굴은
봄날이 가면 그뿐
宿醉는 몇 장 紙錢 속에서 구겨지는데
몇 개의 언덕을 넘어야 저 흙먼지들은
굳은 땅 속으로 하나둘 섞여들는지
◈ 아이야 어디서 너는
아이야, 어디서 너는 온몸 가득 비[雨]를 적시고
왔느냐. 네 알몸 위로 수천의 江물이 흐른다. 찬
가슴팍 위로 저 世上을 向한 江이 흐른다.
갈밭을 헤치고 왔니. 네 머리카락에 걸린 하얀 갈꽃이
누운 채로 젖어 있다. 그 갈꽃 무너지는 西山을 아비는
네 몸만큼의 짠 빗물을 뿌리며 넘어갔더란다. 아이야
아비의 그 구름을 먹고 왔느냐.
호롱을 켜려무나. 뿌옇게 몰려오는 소나기를 가득 담고
어둠 속을 흐르는, 네 눈을 켜려무나. 하늘에 실노을이
西行하고 어른거리는 불빛은 꽃을 쫓는다.
닦아도닦아도 흐르는 꽃술[花酒] 같은 네 江물.
갈꽃은 붉게붉게 익어가는데, 아이야 네 눈 가득
아비가 젖어 있구나.
◈ 쥐불놀이
어른이 돌려도 됩니까?
돌려도 됩니까 어른이?
사랑을 목발질하며
나는 살아왔구나
대보름의 달이여
올해는 정말 멋진 연애를 해야겠습니다
모두가 불 속에 숨어 있는걸요?
돌리세요,나뭇가지
사이에 숨은 꿩을 위해
돌리세요,술래
는 잠을 자고 있어요
헛간 마른 짚 속에서
대보름의 달이여
온 동네를 뒤지고도 또
어디까지?
아저씨는 불이 무섭지 않으셔요?
◈ 질투는 나의 힘
아주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
힘없는 책갈피는 이 종이를 떨어뜨리리
그때 내 마음은 너무나 많은 공장을 세웠으니
어리석게도 그토록 기록할 것이 많았구나
구름 밑을 천천히 쏘다니는 개처럼
지칠 줄 모르고 공중에서 머뭇거렸구나
나 가진 것 탄식밖에 없어
저녁거리마다 물끄러미 청춘을 세워두고
살아온 날들을 신기하게 세어보았으니
그 누구도 나를 두려워하지 않았으니
내 희망의 내용은 질투뿐이었구나
그리하여 나는 우선 여기에 짧은 글을 남겨둔다
나의 생은 미친 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었으나
단 한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노라
◈ 엄마 걱정
열무 삼십 단을 이고
시장에 간 우리 엄마
안 오시네, 해는 시든 지 오래
나는 찬밥처럼 방에 담겨
아무리 천천히 숙제를 해도
엄마 안 오시네, 배추잎 같은 발소리 타박타박
안 들리네, 어둡고 무서워
금간 창틈으로 고요히 빗소리
빈방에 혼자 엎드려 훌쩍거리던
아주 먼 옛날
지금도 내 눈시울을 뜨겁게 하는
그 시절, 내 유년의 윗목
◈ ‘가을의 무덤 - 祭亡妹歌’
누이야
네 파리한 얼굴에
철철 술을 부어주랴
시리도록 허연
이 零下의 가을에
망초꽃 이불 곱게 덮고
웬 잠이 그리도 길더냐.
풀씨마저 피해 나는
푸석이는 이 자리에
빛바랜 단발머리로 누워 있느냐.
헝클어진 가슴 몇 조각을 꺼내어
껄끄러운 네 뼈다귀와 악수를 하면
딱딱 부딪는 이빨 새로
어머님이 물려주신 푸른 피가 배어나온다.
물구덩이 요란한 빗줄기 속
구정물 개울을 뛰어 건널 때
왜라서 그리도 숟가락 움켜쥐고
눈물보다 찝찝한 설움을 빨았더냐.
아침은 항상 우리 뒷켠에서 솟아났고
맨발로도 아프지 않던 산길에는
버려진 개암, 도토리, 반쯤 씹힌 칡.
질척이는 뜨물 속의 밥덩이처럼
부딪히며 河口로 떠내려갔음에랴.
우리는
神經을 앓는 中風病者로 태어나
全身에 땀방울을 비늘로 달고
쉰 목소리로 어둠과 싸웠음에랴.
편안히 누운
내 누이야.
네 파리한 얼굴에 술을 부으면
눈물처럼 튀어오르는 술방울이
이 못난 영혼을 휘감고
온몸을 뒤흔드는 것이 어인 까닭이냐..
◈ 안개
1
아침저녁으로 샛강에 자욱이 안개가 낀다.
2
이 읍에 와본 사람은 누구나
거대한 안개의 강을 거쳐야 한다.
앞서간 일행들이 천천히 지워질 때까지
쓸쓸한 가축들처럼 그들은
그 긴 방죽 위에 서 있어야 한다.
문득 저 홀로 안개의 빈 구멍 속에
갇혀 있음을 느끼고 경악할 때까지.
어떤 날은 두꺼운 공중의 종잇장 위에
노랗고 딱딱한 태양이 걸릴 때까지
안개의 軍團은 샛강에서 한 발자국도 이동하지 않는다.
출근길에 늦은 여공들은 깔깔거리며 지나가고
긴 어둠에서 풀려나는 검고 무뚝뚝한 나무들 사이로
아이들은 느릿느릿 새어나오는 것이다.
안개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은 처음 얼마 동안
보행의 경계심을 늦추는 법이 없지만, 곧 남들처럼
안개 속을 이리저리 뚫고 다닌다. 습관이란
참으로 편리한 것이다. 쉽게 안개와 식구가 되고
멀리 송전탑이 희미한 동체를 드러낼 때까지
그들은 미친 듯이 흘러 다닌다.
가끔씩 안개가 끼지 않는 날이면
방죽 위로 걸어가는 얼굴들은 모두 낯설다. 서로를 경계하며
바쁘게 지나가고, 맑고 쓸쓸한 아침들은 그러나
아주 드물다. 이곳은 안개의 聖域이기 때문이다.
날이 어두워지면 안개는 샛강 위에
한 겹씩 그의 빠른 옷을 벗어놓는다. 순식간에 공기는
희고 딱딱한 액체로 가득 찬다. 그 속으로
식물들, 공장들이 빨려 들어가고
서너 걸음 앞선 한 사내의 반쪽이 안개에 잘린다.
몇 가지 사소한 사건도 있었다.
한밤중에 여직공 하나가 겁탈 당했다.
기숙사와 가까운 곳이었으나 그녀의 입이 막히자
그것으로 끝이었다. 지난겨울엔
방죽 위에서 醉客 하나가 얼어 죽었다.
바로 곁을 지난 삼륜차는 그것이
쓰레기더미인 줄 알았다고 했다. 그러나 그것은
개인적인 불행일 뿐, 안개의 탓은 아니다.
안개가 걷히고 정오 가까이
공장의 검은 굴뚝들은 일제히 하늘을 향해
젖은 총신을 겨눈다. 상처 입은 몇몇 사내들은
험악한 욕설들 해대며 이 폐수의 고장을 떠나갔지만
재빨리 사람들의 기억에서 밀려났다. 그 누구도
다시 읍으로 돌아온 사람은 없었기 때문이다.
3
아침저녁으로 샛강에 자욱이 안개가 낀다.
안개는 그 읍의 명물이다.
누구나 조금씩은 안개의 주식을 갖고 있다.
여공들의 얼굴은 희고 아름다우며
아이들은 무럭무럭 자라 모두들 공장으로 간다.
◈ 입 속의 검은 잎
택시운전사는 어두운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어
이따금 고함을 친다. 그때마다 새들이 날아간다
이곳은 처음 지나는 벌판과 황혼,
나는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그를 생각한다
그 일이 터졌을 때 나는 먼 지방에 있었다
먼지의 방에서 책을 읽고 있었다
문을 열면 벌판에는 안개가 자욱했다
그 해 여름 땅바닥은 책과 검은 잎들을 질질 끌고 다녔다
접힌 옷가지를 펼칠 때마다 흰 연기가 튀어나왔다
침묵은 하인에게 어울린다고 그는 썼다
나는 그의 얼굴을 한 번 본 적이 있다
신문에서였는데 고개를 조금 숙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일이 터졌다, 얼마 후 그가 죽었다
그의 장례식은 거센 비바람으로 온통 번들거렸다
죽은 그를 실은 차는 참을 수 없이 느릿느릿 나아갔다
사람들은 장례식 행렬에 악착같이 매달렸고
백색의 차량 가득 검은 잎들은 나부꼈다
나의 혀는 천천히 굳어갔다, 그의 어린 아들은
잎들의 포위를 견디다 못해 울음을 터뜨렸다
그 해 여름 많은 사람들이 무더기로 없어졌고
놀란 자의 침묵 앞에 불쑥불쑥 나타났다
망자의 혀가 거리에 흘러넘쳤다
택시운전사는 이따금 뒤를 돌아다 본다
나는 저 운전사를 믿지 못한다, 공포에 질려
나는 더듬거린다, 그는 죽은 사람이다
그 때문에 얼마나 많은 장례식들이 숨죽여야 했던가
그렇다면 그는 누구인가, 내가 가는 곳은 어디인가
나는 더 이상 대답하지 않으면 안 된다, 어디서
그 일이 터질지 아무도 모른다, 어디든지
가까운 지방으로 나는 가야 하는 것이다
◈ 조치원
사내가 달걀 하나 건넨다.
일기예보에 의하면 1시쯤에
열차는 대전에서 진눈깨비를 만날 것이다.
스팀 장치가 엉망인 까닭에
마스크를 낀 승객 몇몇이 젖은 담배 필터 같은
기침 몇 개를 뱉아 내고
쉽게 잠이 오지 않는 축축한 의식 속으로
실내등의 어두운 불빛들은 잠깐씩 꺼지곤 하였다.
서울에서 아주 떠나는 기분 이해합니까?
고향으로 가시는 길인가보죠,
이번엔, 진짜, 낙향입니다.
달걀 껍질을 벗기다가 손끝을 다친 듯
사내는 잠시 말이 없다.
조치원에서 고등학교까지 마쳤죠, 서울 생활이란
내 삶에 있어서 하찮은 문장 위에 찍힌
방점과도 같은 것이었어요.
조치원도 꽤 큰 도회지 아닙니까?
서울은 내 둥우리가 아니었습니다. 그곳에서
지방 사람들이 더욱 난폭한 것은 당연하죠.
어두운 차창 밖에는 공중에 뜬 생선 가시처럼
놀란 듯 새하얗게 서 있는 겨울 나무들.
한때 새들을 날려 보냈던 기억의 가지들을 위하여
어느 계절까지 힘겹게 손을 들고 있는가.
간이역에서 속도를 늦추는 열차의 작은 진동에도
소스라쳐 깨어나는 사람들. 소지품마냥 펼쳐보이는
의심 많은 눈빛이 다시 감기고
좀 더 편안한 생을 차지하기 위하여
사투리처럼 몸을 뒤척이는 남자들.
발밑에는 몹쓸 꿈들이 빵봉지 몇 개로 뒹굴곤 하였다.
그러나 서울은 좋은 곳입니다. 사람들에게
분노를 가르쳐주니까요. 덕분에 저는
도둑질 말고는 다 해보았답니다.
조치원까지 사내는 말이 없다. 그곳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그의 마지막 귀향은
이것이 몇 번째일까, 나는 고개를 흔든다.
나의 졸음은 질 나쁜 성냥처럼 금방 꺼져버린다.
설령 사내를 며칠 후 서울 어느 거리에서
우연히 마주친다 한들 어떠랴. 누구에게나 겨울을 위하여
한 개쯤의 외투를 갖고 있는 것.
사내는 작은 가방을 들고 일어선다. 견고한 지퍼의 모습으로
그의 입은 가지런한 이빨을 단 한번 열어보인다.
플랫폼 쪽으로 걸어가던 사내가
마주 걸어오던 몇몇 청년들과 부딪친다.
어떤 결의를 애써 감출 때 그렇듯이
청년들은 톱밥같이 쓸쓸해 보인다.
조치원이라 쓴 네온 간판 밑을 사내가 통과하고 있다.
나는 그때 크고 검은 한 마리 새를 본다. 틀림없이
사내는 땅 위를 천천히 날고 있다. 시간은 0시.
눈이 내린다.
◈ 내 인생의 中世
이제는 그대가 모르는 이야기를 하지요
너무 오래되어 어슴프레한 이야기
미루나무 숲을 통과하면 새벽은
맑은 연못에 몇 방울 푸른 잉크를 떨어뜨리고
들판에는 언제나 나를 기다리던 나그네가 있었지요
생각이 많은 별들만 남아 있는 공중으로
올라가고 나무들은 얼마나 믿음직스럽던지
내 느린 걸음 때문에 몇 번이나 앞서가다 되돌아오던
착한 개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나는 나그네의 깊은 눈동자를 바라보았지요
◈ 거리에서
우리가 오늘 거둔 수확은 무엇일까 그대여 하고 물으면
갑자기 地上엔 어둠, 거리를 疾走하는 바람기둥.
그대여, 우리는 지금 出口를 알 수 없는
巨大한 圖畵紙 위에 서 있다.
제각기 하루의 스위치를 내리고
웅성이며 사람들이 돌아가는 시간이면
都市의 끝에서 끝까지 아픈 다리를 데리고 걸으면서
우리는 누구도 時間을 묻지 않았다. 문득
우리의 軌跡으로 그어진 꺾은선 그래프에 허리를 찔리우고
어디에도 갈 곳이 없었기에 어둠이 달려왔다.
어둠이여 그러나 숨길 그 무엇이 있어 너를 부르겠는가
빌딩 너머 몇 점 노을로도 갑자기 수척해지는 거리를 보며
우리는 말없이 서 있을 뿐이다.
全身으로 서 있을 뿐이다 어둠이여
왜 우리는 세상에 이 크나큰 빈 箱子 속에 툭
툭 採集되어야 했을까
팽팽하게 얼어붙는 한 장 바람의 形狀이 되어
우우 어디로 가서 기댈까
우리가 활활 消滅할 수 있는 未知의 불은 어디?
우리는 都市의 끝, 그 바람만 줄달음치는 驛舍를 배회하였다.
그러나 旅客運賃表로 할당되는 가난한 우리의 생.
갈 곳은 황량한 都市뿐이었다.
그래도 어딘가 낯선 도시 한켠에 주저앉아 휘파람 부는
우리 같은 사람들이 살아 있을까.
그 믿음을 무엇이라 부를까.
우리는 무엇을 두려워했던 것일까.
늘 時間이 停止해 있는 도시.
푯말 없이 오늘도 캄캄하게 버티고 선
아아, 잎 뚝뚝 떨어지는 우리들의 도시.
急流처럼 참혹하게 살고 싶었다, 우리
現在는 언제나 삶의 끝임을 잘 알고 있었다.
그리하여 絶壁에서 뒤 돌아보는
우리의 조용한 행적은?
어둠이 靜寂의 보자기를 펄럭여 세상을 덮고
온통 바람만 이삭처럼 툭툭 굴러다니는 都市에
페이지를 넘기면 막 가을이구나.
그대여, 秋收하기에 너무도 우리의 生은 이르다.
그러나 우리가 寂寞으로 廢墟가 된 뜨락에 부끄럽게 설 때
오, 그래도 당당하게 드러나는
몇 움큼 퇴비로 변한 우리들의 사랑
가자, 얼굴은 감춘 그대여
個人으로 살기에는 너무도 힘겨운 世上
함께 가자, 어디에든 노을은 피고 바람 속에서 새벽은 오는 것
이제는 일생을 걸어야 할 때, 지친 하루를 파묻고 일어서면
캄캄한 어느 골목에선가 휘파람처럼 暴風처럼
아아, 화강암 같은 時間의 호각 소리가 우릴 부르고 있네
◈ 대학 시절
나무의자 밑에는 버려진 책들이 가득하였다.
은백양의 숲은 깊고 아름다웠지만
그곳에는 나뭇잎조차 무기로 사용되었다.
그 아름다운 숲에 이르면 청년들은 각오한 듯
눈을 감고 지나갔다, 돌층계 위에서
나는 플라톤을 읽었다, 그 때마다 총성이 울렸다.
목련철이 오면 친구들은 감옥과 군대로 흩어졌고
시를 쓰던 후배는 자신이 기관원이라고 털어놓았다.
존경하는 교수가 있었으나 그분은 원체 말이 없었다.
몇 번의 겨울이 지나자 나는 외토리가 되었다.
그리고 졸업이었다, 대학을 떠나기가 두려웠다.
◈ 아버지의 寫眞(사진)
어떤 江물도 그의 聖域(성역)을 범람하지 못했으리라
한 世上(세상) 뜬구름만 잡으려 길을 떠난 아버지는
뜬구름으로 돌아와 四角(사각) 빤닥종이 위에 復古風(복고풍)으로 앉아
銀貨(은화) 같은 웃음만 철철 흘리고 계셨다
大理石(대리석)으로 기둥을 댄 그이 神殿(신전) 밑동에서
일찍이 사금파리 따위로 손가락을 베어내는
못생긴 재주만을 익힌 나의 南國(남국)의 房(방)에서
나는 出發(출발)했던 것일까 아버지의 聖域(성역)에선
날감자 냄새 幼蟲(환충)의 알같이 모여 있는 햇빛의 등속
平和(평화)란 그런 것이니라. 世上(세상)의 끝간데는 한가닥
바람도 일지 않았더라 밤이 들어 새앙쥐들이 물고
뜯는 더러운 달빛이나 풀벌레들의 고요한 입술을 보았느냐
어떤 江(강)물도 나의 聖域(성역)을 범람ㅎ지 못했던 까닭은
내가 때로는 혼탁한 江물로 먼저 흐르고 비가 되기 전에
먹구름 속으로 물총새처럼 파묻혔던 것을. 아들아, 世上(지상)은
살아볼 만한 것이냐 너의 파닥거리는 經驗(경험) 이전에
나는 이미 너의 中心(중심)을 잡는 助骨(조골)이 되어 있느니라
해바라기 커다란 靑銅(청동)잎새 지는 가을날 뜨락
오랜 時間(시간)의 질곡은 언제나 습한 順風(순풍)으로 後代(후대)의
피를 덥혀주고 우리가 사랑에 힘입고 무럭무럭 자라날 때
어떠한 평야를 살찌우지 못하랴 어느 광야를 잠재우지 못하랴
사랑이란 이름으로 平和(평화)란 이름으로 되살아 흘러내릴 江(강)물 속으로
아버지의 다리에 구겨진 칼날 같은 흔적조차 미더운 傳說(전설)임에랴.
◈ 죽은 구름
구름으로 가득 찬 더러운 창문 밑에
한 사내가 쓰러져 있다, 마룻바닥 위에
그의 손은 장난감처럼 뒤집혀져 있다
이런 기회가 오기를 기다려 온 것처럼
비닐 백의 입구같이 입을 벌린 저 죽음
감정이 없는 저 몇 가지 음식들도
마지막까지 사내의 혀를 괴롭혔을 것이다
이제는 힘과 털이 빠진 개 한 마리가 접시를 노린다
죽은 사내가 살았을 때, 나는 그를 몇 번인가 본 적이 있다
그를 사람들은 미치광이라고 했다, 술과 침이 가득 묻은 저
엎어진 망토를 향해, 백동전을 던진 적도 있다
아무도 모른다, 오직 자신만이 홀로 즐겼을 생각
끝끝내 들키지 않았을 은밀한 성욕과 슬픔
어느 한때 분명 쓸모가 있었을 저 어깨의 근육
그러나 우울하고 추악한 맨발 따위는
동정심 많은 부인들을 위한 선물이었으리
어쨌든 구름들이란 매우 조심스럽게 관찰해야 한다
미치광이, 이젠 빗방울조차 두려워 않을 죽은 사내
자신감을 얻은 늙은 개는 접시를 엎지르고
마루 위엔 사람의 손을 닮은 흉칙한 얼룩이 생기는 동안
두 명의 경관이 들어와 느릿느릿 대화를 나눈다
어느 고장이건 한두 개쯤 이런 빈집이 있더군,
이 따위 미치광이들이 어떻게 알고 찾아와 죽어 갈까
더 이상의 흥미를 갖지 않는 늙은 개도 측은하지만
아무도 모른다, 저 홀로 없어진 구름은
처음부터 창문의 것이 아니었으니
◈ 포도밭 묘지 2
아아, 그때의 빛이여.
빛 주위로 뭉치는 어둠이여.
서편 하늘 가득 실신한 청동의 구름떼여.
목책 안으로 툭툭 떨어져 내리던 무엄한 새들이여.
쓴 물 밖으로 소스라치며 튀어 나오던 미친 꽃들이여.
나는 끝을 알 수 없는 질투심에 휩싸여 너희들을 기다리리.
내 속의 모든 움직임이 그치고
탐욕을 향한 덩굴손에서 방황의 물기가 빠질 때까지.
밤은 그렇게 왔다.
포도 압착실 앞 커다란 등받이 의자에 붙어
한 잎 식물의 눈으로 바라보면 어둠은 화염처럼 고요해지고
언제나 내 눈물을 불러내는 저 깊은 空中들.
기억하느냐, 그해 가을 그 낯선 저녁 옻나무 그림자 속을
홀연히 스쳐가던 천사의 검은 옷자락과
아아, 더욱 높이 흔들리던 그 머나먼 주인의 임종.
從者여, 네가 격정을 사로잡지 못하여 죽음을 환난과 비교한다면
침묵의 구실을 만들기 위해 네가 울리는 낮은 종소리는
어찌 저 놀라운 노을을 설명할 수 있겠느냐.
저 공중의 욕망은 어둠을 지치도록 내버려두지 않고
종교는 아직도 지상에서 헤맨다. 묻지 말라,
이곳에서 너희가 완전히 불행해질 수 없는 이유는
神이 우리에게 괴로워할 권리를
스스로 사들이는 법을 아름다움이라 가르쳤기 때문이다.
밤은 그렇게 왔다. 비로소 너희가 전생애의 쾌락을 슬픔에 걸 듯이
믿음은 不在 속에서 싹트고 다시 그 믿음은
부재의 씨방 속으로 돌아가 영원히 쉴 것이니,
골짜기는 정적에 싸이고 우리가 그 정적을 사모하듯이
어찌 비밀을 숭배하는 무리가 많지 않으랴.
밤은 그렇게 노여움을 가장한 모습으로 찾아와
어두운 실내의 램프불을 돋우고 우리의 후회들로 빚어진
주인의 말씀은 정신의 헛된 식욕처럼 아름답다.
듣느냐, 이 세상 끝간 곳엔 한 자락 바람도 일지 않았더라.
어떠한 슬픔도 그 끝에 이르면
짓궂은 변증의 쾌락으로 치우침을 네가 아느냐.
밤들어 새앙쥐를 물어뜯는 더러운 달빛 따라가며
휘파람 부는 작은 풀벌레들의 그 고요한 입술을 보았느냐.
햇빛은 또 다른 고통을 위하여 빛나는 나무의 알을 잉태하느니
從者여, 그 놀라운 보편을 진실로 네가 믿느냐.
◈ 종이달
1
과거는 끝났다.
송곳으로 서류를 뚫으며 그는
블라인드를 내리고 있는 김(金)을 본다.
자네가 무엇을 생각하는지 모르겠어.
수백 개 명함들을 읽으며
일일이 얼굴들을 기억할 순 없지.
또한 우리는 미혼이니까, 오늘도
분명한 일은 없었으니까
아직은 쓸모 있겠지. 몇 장 얄팍한 믿음으로
남아 있는 하루치의 욕망을 철(綴)하면서.
2
그들이 무어라고 말하겠는가.
한두 시간 차이 났을 뿐. 내가 아는 것을
그들이 믿지 않을 뿐.
나에게도 중대한 사건은 아니었어.
큐대에 흰 가루를 바르면서
김은 정확하게 시간의 각을 재어본다.
각자의 소유만큼씩 가늠해보는 가치의 면적.
물론 새로운 것은 아니지.
잠시 잇고 있었을 뿐. 좀 복잡한 타산이니까.
똑바로 말한 적이 자네는 한 번도 없어.
감정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럴 수도 있지.
와이셔츠 단추 한 개를 풀면서
날 선 칼라가 힘없이 늘어질 때까지
어쨌든 우리는 살아온 것이니.
오늘의 뉴스는 이미 상식으로 챙겨듣고.
3
믿어주게.
나도 몇 개의 동작을 배웠지.
변화 중에서도 튕겨져 나가지 않으려고
고무풀처럼 욕망을 단순화하고
그렇게 하나의 과정이 되어갔었네. 그는
층계 밑에 서서 가스라이터 불빛 끝에 손목을 매달고
무엇인가 찾는 김을 본다. 무엇을 잃어버렸나.
잃어버린 것은 찾지 않네. 그럴 만큼 시간은 여유가 없어.
잃어버려야 할 것들을 점검중이지.
그럴 만큼의 시간만 있으니까.
아무리 조그만 나프탈렌처럼 조직의 서랍 속에 숨어 있어도
언제나 나는 자네를 믿어왔네. 믿어주게.
로터리를 회전하면서 그것도 길의 중간에서
날씨야 어떻든 상관없으니까.
4
사람들은 조금씩 빨라진다.
속도가 두려움을 만날 때까지. 그러나
의사의 기술처럼 간단히 필라멘트는
가열되고 기계적으로 느슨히
되살아나는 습관에 취할 때까지 적어도
복잡한 반성 따위는 알콜 탓이거니 아마
시간이 승부의 문제였던 때는 지났겠지.
신중한 수술이 아니어도 흰색 가운을 입듯이
누구나 평범한 초침(秒針)으로 손을 닦는 나이임을
우리는 너무 잘 알고 있으니까.
알아들을 수 없는 말만 하여주게. 휴식에 도움이 될 수 있다면
아주 사무적인 착상이군. 여기와 지금이 별개이듯이
내가 집착한 것은 단순한 것이었어. 그래서
더욱 붙어 있어야 함을 알아두게. 일이 끝나면
굳게 뚜껑을 닫는 만년필처럼.
5
소리 나는 것만이 아름다울 테지.
소리만이 새로운 것이니까 쉽게 죽으니까.
소리만이 변화를 신고 다니니까.
그러나 무엇을 예약할 것인가.
방이 모두 차 있거나 모두 비어 있는데.
무관심만이 우리를 쉬게 한다면 더 이상 기억할 필요는 없어진다.
과거는 끝났다.
즐거움도 버릇같은 것.
넥타이를 고쳐매면서 거울 속의 키를
확인하고 안심하듯이 우리는 미혼이니까.
속성으로 떠오르는 달을 보면서 휘파람불며
각자의 가치는 포켓 속에서 짤랑거리며
똑바로 말한 적이 자네는
한 번도 없어. 제발 그만두게. 자네를 위해서
내가 줄 수 있는 것은 다 토해냈네. 또한
무엇이든 분명한 일이 없었고
아직도 오늘은 조금 남아있으니까. 그럼.
굿바이.
◈ 껍질
空中을 솟구친 길은
그늘을 끼고 돌아왔고
아무것 알지 못하는 그는
한줌 가슴을 버리고
떠났다.
車窓 안쪽에 비쳐오는
낯선 거리엔
大理石보다 차가운
내 幻影이 떠오른다.
아무것 알려 하지 않는 그는
미련 없이 머리를 깎았다.
그는 나보다 앞선 歲月을 살았고
나와 同甲이었다.
감싸안은 두 발이
천장을 디디고 휘청거리는데
단단히 굳어버린 鋪道엔 바람이 일고
이 밤은 여느 때마냥 춥다
◈ 388번 종점
구겨진 불빛을 펴며
막차는 떠났다.
寂寞(적막)으로 무성해진 가슴 한켠 空地(공지)에서
캄캄하게 울고 있는 몇 점 불씨
가만히
그 스위치를 끄고 있는 한 사내의 쓸쓸한 손놀림.
◈ 정거장에서의 충고
미안하지만 나는 이제 희망을 노래하련다
마른 나무에서 연거푸 물방울이 떨어지고
나는 천천히 노트를 덮는다
저녁의 정거장에 검은 구름은 멎는다
그러나 추억은 황량하다, 군데군데 쓰러져 있던
개들은 황혼이면 처량한 눈을 껌벅일 것이다
물방울은 손등 위를 굴러다닌다, 나는 기우뚱
망각을 본다, 어쩌다가 집을 떠나 왔던가
그곳으로 흘러가는 길은 이미 지상에 없으니
추억이 덜 깬 개들은 내 딱딱한 손을 깨물 것이다
구름은 나부낀다, 얼마나 느린 속도로 사람들이 죽어갔는지
얼마나 많은 나뭇잎들이 그 좁고 어두운 입구로 들이닥쳤는지
내 노트는 알지 못한다, 그 동안 의심 많은 길들은
끝없이 갈라졌으니 혀는 흉기처럼 단단하다
물방울이여, 나그네의 말을 귀담아들어선 안 된다
주저앉으면 그뿐, 어떤 구름이 비가 되는지 알게 되리
그렇다면 나는 저녁의 정거장을 마음 속에 옮겨 놓는다
내 희망을 감시해 온 불안의 짐짝들에게 나는 쓴다
이 누추한 육체 속에 얼마든지 머물다 가시라고
모든 길들이 흘러온다, 나는 이미 늙은 것이다
◈ 레코오드판에서 바늘이 튀어오르듯이
그것은 어느 늦은 겨울날 저녁
조그만 카페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누구를 기다리기로 작정한 것도 아니었다
부르기 싫은 노래를 억지로 부르듯
黑人가수의 노래가 천천히
탁자에는 시든 꽃 푸른 꽃 위에는 램프
어두웠다 벽면에 긴 팽이모자를 쓴
붉고 푸른 가면들이 춤추며
액자 때문은 아니었다
예감이라도 했던들 누군가
나를 귀찮게 했던들 그 일이 일어날 수 있었겠는가
나는 大學生이었다
뚜렷한 이유도 없이 그래서 더욱 무서웠다
가끔씩 어떤 홀연한 계기를 통하여
우리는 우리의 全靑春이
한꺼번에 허물어져버린 것 같은
슬픔을 맛볼 때가 있듯이
레코오드판에서 바늘이 튀어오르듯이
그것은 어느 늦은 겨울날 저녁
조그만 카페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나는 마른 나뭇가지처럼 힘없이
천천히 탁자 아래로 쓰러졌다.
◈ 水彩畵(수채화)
가느다란 새[鳥]의 다리가
어항 속에 잠겨 있다.
하얀 살[肉]에서
말갛게 비치는
푸른 靜脈(정맥)
透明(투명)한 물위엔
어떤 붕어가 잃고 간
아가미 한 쪽.
빨간 薔薇(장미)를 보여주세요
빨간 薔薇(장미).
깃털처럼
흰 畵幅(화폭)에
波濤(파도)가 잘게 배어나온다.
◈ 나의 플래시 속으로 들어온 개
그날 너무 캄캄한 길모퉁이를 돌아서다가
익숙한 장애물을 찾고 있던
나의 감각이, 딱딱한 소스라침 속에서
최초로 만난 사상(事象), 불현 듯
존재의 비밀을 알아버린
그날, 나의 플래시 속으로 갑자기, 흰
◈ 소리의 뼈
김교수님이 새로운 학설을 발표했다
소리에도 뼈가 있다는 것이다
모두 그 말을 웃어넘겼다, 몇몇 학자들은
잠시 즐거운 시간을 제공한 김교수의 유머에 감사했다
학장의 강력한 경고에도 불구하고
교수님은 일 학기 강의를 개설했다
호기심 많은 학생들이 장난삼이 신청했다
한 학기 내내 그는
모든 수업 시간마다 침묵하는
무서운 고집을 보여주었다
참지 못한 학생들이, 소리의 뼈란 무엇일까
각자 일가견을 피력했다
이군은 그것이 침묵일 거라고 말했다.
박군은 그것을 숨은 의미라 보았다
또 누군가는 그것의 개념은 중요하지 않다고 했다
모든 고정관념에 대한 비판에 접근하기 위하여 채택된
방법론적 비유라는 것이었다
그의 견해는 너무 난해하여 곧 묵살되었다
그러나 어쨌든
그 다음 학기부터 우리들의 귀는
모든 소리를 훨씬 더 잘 듣게 되었다.
◈ 진눈깨비
때마침 진눈깨비 흩날린다
코트 주머니 속에는 딱딱한 손이 들어 있다
저 눈발은 내가 모르는 거리를 저벅거리며
여태껏 내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사내들과 건물들 사이를 헤맬 것이다
눈길 위로 사각의 서류 봉투가 떨어진다, 허리를 나는 굽히다 말고
생각한다, 대학을 졸업하면서 참 많은 각오를 했었다
내린다 진눈깨비, 놀랄 것 없다, 변덕이 심한 다리여
이런 귀가길은 어떤 소설에선가 읽은 적이 있다
구두 밑창으로 여러 번 불러낸 추억들이 밟히고
어두운 골목길에 불켜진 빈 트럭이 정거해 있다
취한 사내들이 쓰러진다, 생각난다 진눈깨비 뿌리던 날
하루 종일 버스를 탔던 어린 시절이 있었다
낡고 흰 담벼락 근처에 모여 사람들이 눈을 턴다
진눈깨비 쏟아진다, 갑자기 눈물이 흐른다, 나는 불행하다
이런 것은 아니었다, 나는 일생 몫의 경험을 다했다, 진눈깨비
◈ 사강리(沙江里)
아무도 가려 하지 않았다.
아무도 간 사람이 없었다.
처음엔 바람이 비탈길을 깎아 흙먼지를 풀풀 날리었다.
하늘을 깎고 어둠을 깎고 눈(雪)의 살을 깎는 소리가 떨어졌다.
산도 숲속에 숨어 있었다.
얼음도 깎인 벼의 밑둥을 붙잡고 좋지 않았다.
매 한 마리가 산가치를 움켜잡고 하늘 깊숙이 파묻혔다.
얼음장 위로 얼굴을 내밀었던 은빛 햇살도 사라졌다.
묘지에 서로 모여 갈대가 울었다. 그 속으로 눈발이
힘없이 쓰러졌다.
어둠이 하얗게 질린 얼굴로 사위어 있었다.
뒤엉켜 죽은 망초꽃들이 휘익휘익 공중에서 말하고 지나갔다.
'그것 봐' '그것 봐'
황토빛 자갈이 주르르 넘어졌다. 구르고 지난 자리마다
사정없이 눈(雪)이 꽂혔다.
◈ 孤獨(고독)의 깊이
한차례 장마가 지났다.
푹푹 파인 가슴을 내리쓸며 구름 자욱한 江(강)을 걷는다.
바람은 내 외로움만큼의 重量(중량)으로 肺腑(폐부) 깊숙한
끝을 부딪는다
傷處(상처)가 푸르게 부었을 때 바라보는
江(강)은 더욱 깊어지는 法
그 깊은 江(강)을 따라 내 食事(식사)를 가만히 띄운다.
그 아픔은 잠길 듯 잠길 듯 한 장 파도로 흘러가고.....
아아, 雲霧(운무) 가득한 가슴이여
내 苦痛(고통)의 비는 어느 날 그칠 것인가.
◈ 어느 날
그대도 알 거야
노을이나 눈[雪] 욕설
바람 부는 것
엘리어트 詩集(시집) 한 권 값
예리한 나이프로 잘려나간
몇 장 기억 같은 것
물론 그대도 알 거야
거리 곳곳에 포스터처럼 발려 있는
鮮明(선명)한 면도 자국 같은
알 거야
봄 여름 가을, 겨울
이 廣漠(황막)한 時代(시대)의
얼음의 原理(원리). 나이테 측정법 같은
1時(시), 2時(시), 3時(시) 30分(분)까지도
그대 역시 알 거야
알겠지, 빠짐없어...
가만,..?
그런데?
◈ 비가1 - 좁은 문
1
열병은 봄이 되어도
오는가, 출혈하는 논둑, 미나리 멍든 허리처럼
오는가 분노가 풀리는 해빙의 세상
어쩔 것인가 겨우내 편안히 버림받던
편안히 썩어가던 이파리들은 어쩔 것인가
분노 없이 살 수 없는 이 세상에
봄은 도둑고양이처럼
산, 들, 바다. 오! 도시
그 깊은 불치의 언저리까지 유혹의 가루약을 뿌리고 있음을
겨울잠에서 빠져나오는
단 한 자루의 촛불까지도 꺼트리는 무서운 빛의 비명을
침침한 시력으로 떨고 있는 낡은 가로등 발목마다
화사한 성장의 여인, 눈물만큼씩의
쓸쓸한 애벌레들의 행렬을
빙판에 숨죽여 엎드린 썰매. 날카롭게 잘린
손칼만큼의 공포를
아는가 그대여. 헛됨을 이루기 위한 최초의 헛됨이
3월의 스케이트장처럼 다가오는 징조를
곧이어 비참한 기억으로서 되살아날
숨 가쁜 유혹의 덫이 그리움의 가면을 쓰고 있는 것을.
◈ 비가 2 - 붉은 달
1
그대, 아직 내게
무슨 헤어질 여력이 남아 있어 붙들겠는가.
그대여, x자로 단단히 구두끈을 조이는
양복 소매끈에서 무수한 달의 지느러미가 떨어진다.
떠날 사람은 떠난 사람.
그대는 천국으로 떠난다고 장기 두는 식으로
용감히 떠난다고 짧게 말하였다.
하늘나라의 달
2
너는 이내 돌아서고
나는 미리 준비해 둔 깔깔한 슬픔을 껴입고 돌아왔다.
우리 사이 협곡에 꽂힌 수천의 기억의 돛대,
어느 하나에도
걸리지 못하고 사상은 남루한 옷으로 지천을 떠돌고 있다.
아아 난간마다 안개 휘파람의 섬세한 혀만 가볍게 말리우는 거리는
너무도 쉽게 어두워진다.
나의 추상이나 힘겨운 감상의 망토 속에서
폭풍주의보는 삐라처럼 날리고
어디선가 툭툭 매듭이 풀리는 소리가 들렸다.
어차피 내가 떠나기 전에 이미 나는 혼자였다.
그런데 너는 왜 천국이라고 말하였는지.
네가 떠나는 내부의 유배지는 언제나 푸르고 깊었다.
불더미 속에서 무겁게 터지는 공명의 밤
그리하여 도시, 불빛의 사이렌에 썰물처럼 골목은 우회하면
고무줄처럼 먼저 튕겨 나와 도망치는 그림자를 보면서도
나는 두려움으로 몸을 떨었다.
떨리는 것은 잠과 타종 사이에서 비틀거리는 내 유약한 의식이다.
책갈피 속에서 비명을 지르는 우리들 창백한 유년, 식물채집의 꿈이다.
여름은 누구에게나 무더웠다.
3
잘 가거라, 언제나 마른 손으로 악수를 청하던 그대여
밤 새워 호루라기 부는 세상 어느 위치에선가 용감한 꿈꾸며 살아 있을
그대, 잘 가거라 약기운으로 붉게 얇은 등을 축축히 적시던 헝겊 같은
달빛이여, 초침 부러진 어느 젊은 여름밤이여,
가끔은 시간을 앞질러 골목을 비어져 나오면 아,
온통 체온계를 입에 물고 가는 숱한 사람들 어디로 가죠? (꿈을 생포하러)
예? 누가요 (꿈 따위는 없어) 모두 어디로, 천국으로
세상은 온통 크레졸 냄새로 자리 잡는다. 누가 떠나든 죽든
우리는 모두가 위대한 혼자였다. 살아 있으라, 누구든 살아 있으라.
턱턱, 짧은 숨 쉬며 내부의 아득한 시간의 숨 신뢰하면서
천국을 믿으면서 혹은 의심하면서 도시,
그 변증의 여름을 벗어나면서
◈ 달밤
누나는 조그맣게 울었다.
그리고 꽃씨를 뿌리면서 시집갔다.
봄이 가고.
우리는, 새벽마다 아스팔트 위에 도우도우새들이 쭈그려앉아
채송화를 싹뚝싹뚝 뜯어먹는 것을 보고 울었다.
맨홀 뚜껑은 항상 열려 있었지만
새들은 엇갈려 짚는 다리를
한 번도 빠뜨리지 않았다.
여름이 가고.
바람은, 먼 南國(남국)나라까지 차가운 머리카락을 갈기갈기 풀어 날렸다.
이쁜 달[月]이 노랗게 곪은 저녁,
리어카를 끌고 新作路를 걸어오시던 어머니의 그림자는
달빛을 받아 긴 띠를 발목에 매고, 그날 밤 내내
몹시 허리를 앓았다.
◈ 새벽이 오는 방법
밤에 깨어 있음.
방 안에 물이 얼어 있음.
손(手)은 零下 1度.
문(門)을 열어도 어둠 속에서 바람이 불고 있다.
갈대들이 쓰러지는 강변에 서서 뼛속까지 흔들리며 강기슭을 바라본다.
물이 쩍쩍 울고 있다. 가로등에 매달려 다리(橋)가 울고 있다.
쓰러진 나무들이 어지러이 땅 위에서 흔들린다.
썩은 나무 등걸처럼 나는 쓰러진다.
바람 이 살갗에 줄을 파고 지났다.
쿡쿡 가슴 이 허물어지며 온몸에 푸른 노을이 떴다.
살이 갈라지더니 形體(형체)도 없이 부서진다.
얼음가루 四方(사방)에 떴다.
호이호이 갈대들이 소리친다.
다들 그래 모두모두 대지와 아득한 거리에서 눈이 떨어진다.
내 눈물도 한 點(점) 눈이 되었음을 나는 믿는다.
江 속으로 곤두박질하며 하얗게 엎드린다. 어이 어이 갈대들이 소리쳤다. 우린 알고 있었어, 우린 알았어
끝없이 눈이 내렸다.
어둠이 눈발 사이에 숨기 시작한다.
도처에서 얼음가루 날리기 시작한다.
서로 비비며 서걱이며 잠자는 새벽을 천천히 깨우기 시작한다.
◈ 우중의 나이
- 모든 슬픔은 논리적으로 규명되어질 필요가 있다.
1
미스 한, 여태껏 여기에 혼자 앉아 있었어?
대단한 폭우라구.
알고 있어요. 여기서도 선명한 빗소리가 들려요. 다행이군.
비 오는 밤은 눅눅해요. 늘 샤워를 하곤 하죠.
샤워. 물이 떨어져 요. 우산을 접으세요.
나프타린처럼 조그맣게 접히는 정열? 커피 드세요. 고맙군.
그런데 지금까지 내 생을 스푼 질 해온 것은 무엇이었을까.
시시한 소리예요. 기형도 씨 무얼했죠?
집을 지으려 했어. 누구의 집? 글쎄 그걸 모르겠어.
그래서 허물었어요? 아예 짓지를 않았지. 예? 아니, 뭐. 그저…
치사한 감정이나 무상 정도로, 껌 씹을 때처럼.
2
등사 잉크 가득 찬 밤이다.
나는 근래 들어 예전에 안 꾸던 악 몽에 시달리곤 한다.
시간의 간유리. 안개.
이렇게 빗소리 속에 앉아 눈을 감으면
내 흘러온 짧은 거리 여기저기서 출렁거리는
습습한 생의 경사들이
피난민들처럼 아우성치며 떠내려가는 것이 보인다.
간혹 씩 모래사장 위에서 발견되기도 하는 건조한 물고기 알들.
봄이 가고 여름이 가면
그런 식으로 또 나의 일 년은 마취약처럼 은밀히 지나가리라.
술래를 피해 숨죽여 지나가듯. 보인다.
내 남은 일생 곳곳에 미리 숨어 기다리고 있을
숱한 폭우들과 나무들의 짧은 부르짖음이여.
3
고양일 한 마리 들여놨어요.
발톱이 앙증맞죠? 봐요.
이렇게 신기하게 휘어져요. 파스텔같이.
힘없이 털이 빠지는 꼴이란,
앗, 아파요. 할퀴었어요. 조심해야지.
정지해 있는 것은 언제나 독을 품고 있는 법이야.
4
시험지가 다 젖었을 것이다.
위험 수위. 항상 준비해야 한다.
충분한 숙면. 물보다 더욱 가볍게 떠오르기.
하얗게 씻겨 더욱 찬란히 빛나는 삽날의 꿈.
당신의 꿈은?
5
지난봄엔 애인이 하나 있었지.
떠났어요? 없어졌을 뿐이야. 빛 의 명멸.
멀미 일으키며 침입해오던 여름 노을의 기억뿐이야.
사랑해 보라구? 사랑해봐.
비가 안 오는 여름을 상상할 수 있겠어?
비 때문은 아녜요. 그렇군.
그런데 뭐 먹을 것이 없을까?
6
그리하여 내가 이렇게 묻는다면.
미스 한. 혼자 앉아서 이젠 무엇을 할래?
집을 짓죠. 누구의 집? 그건 비밀. 그래.
우리에게 어떤 운명적인 과제가 있다면.
그것은 애초에 품었던 우리들 꿈의 방정식을
각자의 공식대로 풀어가는 것일 터이니.
빗소리. 속의 빗소리. 밖은 여전히 폭우겠죠?
언제나 폭우. 아. 그러면 모든 슬픔은 논리적으로 논리적으로,
논리, 300원의 논리.
여름엔 여름옷을 입고 겨울엔 겨울옷을 입고?
◈ 어느 푸른 저녁
1
그런 날이면 언제나 이상하기도 하지,
나는 어느새 처음 보는
푸른 저녁을 걷고 있는 것이다,
검고 마른 나무들 아래로
제각기 다른 얼굴들을 한 사람들은
무엇엔가 열중하며 걸어오고 있는 것이다,
혹은 좁은 낭하를 지나 이상하기도 하지,
가벼운 구름들과 같이 서로 통과해가는
나는 그것을 예감이라고 부른다,
모든 움직임은 홀연히 정지하고,
거리는 일순간 정적에 휩싸이는 것이다
보이지 않는 거대한 숨구멍 속으로 빨려 들어가듯
그런 때를 조심해야 한다, 진공 속에서 진자는
곧,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검은 외투를 입은 그 사람들은
다시 저 아래로 태연히 걸어가고 있는 것이다,
조금씩 흔들리는 것은 무방하지 않는가
나는 그것을 본다
모랫더미 위에 몇몇 사내가 앉아 있다, 한 사내가
조심스럽게 얼굴을 쓰다듬어본다
공기는 푸른 유리병,
그러나 어둠이 내리면 곧 투명해질 것이다,
대기는 그 속에서 둥글고
빈 통로를 얼마나 무수히 감추고 있는가!
누군가 천천히 속삭인다,
여보게 우리의 생활이란 얼마나 보잘것없는 것인가
세상은 얼마나 많은 법칙들을 숨기고 있는가
나는 그를 향해 고개를 돌린다,
그러나 느낌은 구체적으로 언제나 뒤늦게 온다,
아무리 빠른 예감이라도 이미 늦은 것이다
이미 그곳에는 아무도 없다
2
가장 짧은 침묵 속에서 사람들은
얼마나 많은 결정들을 한꺼번에 내리는 것일까
나는 까닭 없이 고개를 갸우뚱해본다
둥글게 무릎을 기운 차가운 나무들, 혹은
곧 유리창을 쏟아버릴 것 같은 검은 건물들 사이를 지나
낮은 소리들을 주고받으며
사람들은 걸어오는 것이다
몇몇은 딱딱해 보이는 모자를 썼다
이상하기도 하지, 가벼운 구름들과 같이
서로를 통과해가는 나는 그것을 습관이라 부른다,
또다시 모든 움직임은 홀연히 정지하고,
거리는 일순간 정적에 휩싸이는 것이다,
그러나 안심하라,
감각이여!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검은 외투를 입은 그 사람들은 다시 저 아래로
태연히 걸어가고 있는 것이다
어느 투명한 저녁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모든 신비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하여
◈ 10월
1
흩어진 그림자들, 모두
한곳으로 모이는
그 어두운 정오의 숲속으로
이따금 나는 한 개 짧은 그림자 되어
천천히 걸어 들어간다
쉽게 조용해지는 나의 빈 손바닥 위에 가을은
둥글고 단단한 공기를 쥐어줄 뿐
그리고 나는 잠깐 동안 그것을 만져볼 뿐이다
나무들은 언제나 마지막이라 생각하며
작은 이파리들은 떨구지만
나의 희망은 이미 그런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너무 어두워지면 모든 추억들은
갑자기 거칠어진다
내 뒤에 있는 캄캄하고 필연적인 힘들에 쫓기며
나는 내 침묵의 심지를 조금 낮춘다
공중의 나뭇잎 수효만큼 검은
옷을 입은 햇빛들 속에서 나는
곰곰이 내 어두움을 생각한다, 어디선가 길다란 연기들이 날아와
희미한 언덕을 만든다, 빠짐없이 되살아나는
내 젊은 날의 저녁들 때문이다
한때 절망이 내 삶의 전부였던 적이 있었다
그 절망의 내용조차 잊어버린 지금
나는 내 삶의 일부분도 알지 못한다
이미 대지의 맛에 익숙해진 나뭇잎들은
내 초라한 위기의 발목 근처로 어지럽게 떨어진다
오오, 그리운 생각들이란 얼마나 죽음의 편에 서 있는가
그러나 내 사랑하는 시월의 숲은
아무런 잘못도 없다
2
자고 일어나면
머리맡의 촛불은 이미 없어지고
하얗고 딱딱한 옷을 입은
빈 병만 우두커니 나를 쳐다본다
◈ 그 집 앞
그날 마구 비틀거리는 겨울이었네
그때 우리는 섞여 있었네
모든 것이 나의 잘못이었지만
너무도 가까운 거리가 나를 안심시켰네
나 그 술집 잊으려네
기억이 오면 도망치려네
사내들은 있는 힘 다해 취했네
나의 눈빛 지푸라기처럼 쏟아졌네
어떤 고함 소리도 내 마음 치지 못했네
이 세상에 같은 사람은 없네
모든 추억은 쉴 곳을 잃었네
나 그 술집에서 흐느꼈네
그날 마구 취한 겨울이었네
그때 우리는 섞여있었네
사내들은 남은 힘 붙들고 비틀거렸네
나 못생긴 입술 가졌네
모든 것이 나의 잘못이었지만
벗어둔 외투 곁에서 나 흐느꼈네
어떤 조롱도 무거운 마음 일으키지 못했네
나 그 술집 잊으려네
이 세상에 같은 사람은 없네
그토록 좁은 곳에서 나 내 사랑 잃었네
◈ 詩人 1
나의 魂(혼)은 主人(주인)없는 바다에서 一萬(일만)갈래
물살로 흘렀다. 一千(일천)갈래는 고기떼로 표류
하였다. 그 중 너덧 마리는 그물에 걸리었다.
한 마리는 뭍에 오르자 곧 물새가 되어 날아갔다.
부리가 흰 물새는 한 번도 울지 못하고 죽었다.
그는 하늘에 올라가 구름이 되었다. 물새의 魂(혼)은
九萬里(구만리) 공중을 날다가 비가 되었다. 내릴 데
없는 물 같은 비가 되었다
◈ 팬터마임
房(방)안에는
새로 誕生(탄생)한 아이들이
人形(인형)을 가지고 놀고 있었다.
한 아이가
손을 들었다
눈에서 물이 나왔다
그 아이는
수염이 돋아 있었고
손에 붕대를 감았는데
내가 끝없이 붕대를 풀자
놀랍게도 벌거숭이가 되었다
그 아이가 손목을 던졌고
그것은 빨간 掌匣(장갑)이었다
눈물이 묻은 빨간 장갑이었다.
◈ 희망
이젠 아무런 일도 일어날 수 없으리라
언제부턴가 너를 생각할 때마다 눈물이 흐른다
이젠 아무런 일도 일어날 수 없으리라
그러나
언제부턴가 아무 때나 나는 눈물 흘리지 않는다
◈ 쓸쓸하고 장엄한 노래여
가라, 어느덧 황혼이다
살아 있음도 살아 있지 않음도 이제는 용서할 때
구름이여, 지우다 만 어느 창백한 생애여
서럽지 않구나 어차피 우린
잠시 늦게 타다 푸시시 꺼질
몇 점 노을이었다
이제는 남은 햇빛 두어 폭마저
밤의 굵은 타래에 참혹히 감겨들고
곧 어둠 뒤편에선 스산한 바람이 불어올 것이다
우리는 그리고 차가운 풀섶 위에
맑은 눈물 몇 잎을 뿌리면서 落下하리라
그래도 바람은 불고 어둠 속에서
밤이슬 몇 알을 낚고 있는 흰 꽃들의 흔들림!
가라, 구름이여, 살아 있는 것들을 위해
이제는 어둠 속에서 빈 몸으로 일어서야 할 때
그 후에 별이 지고 세상에 새벽이 뜨면
아아, 쓸쓸하고 장엄한 노래여, 우리는
서로 등을 떠밀며 피어오르는 맑은 안개더미 속에 있다
◈ 交換手(교환수)
曜日(요일)을 알 수 없는 하루
그 속을 비집고 들어가면
바람 없이 우수수 이파리를 터는
슬픈 老人(노인)의 肖像(초상)이 우뚝 섰다.
우리는 눈물 한 항아리 가슴에 싣고
흔들리는 孀兒(상아)로 달려와
방울방울 남을 주며, 버리며
남김없이 가슴을 비우고
흔들리는 古木(고목)으로 달려간다.
처음부터 우리는
손바닥에 손금을 새기듯
각기 老人(노인)의 肖像(초상) 하나를 키우며
그렇게 成長(성장)하는 것이다.
그 사이에 꽃이 피고,
바람을 섬기는 兒童(아동) 하나
歲月(세월)을 건네주는 交換手(교환수)의 헝클어진 얼굴을 하고
曜日(요일) 없이 돌아가는 겨울 속에 주저앉는다.
◈ 이 쓸쓸함은
누구였을까
直線(직선)의 슬픔같이
짧은 밤 簡易驛(간이역) 號角(호각)소리 같이
한 사나이가 비밀처럼 지나갔다.
상관없는 일이다. 1981년 平凡(평범)한 가을
목 쉰 불빛 몇 점
구겨진 마른 수건처럼 쓸쓸한 얼굴
내가 그를 지나쳤다
불빛 가운데 새하얀 생선 가시
몇 개로 떠 있는 나무
軍服(군복)의 외로운 角(각)짐.
상관없는 일이다. 1981년 平凡(평범)한 가을
쿵, 쿵, 쿵, 쿵
그런데 누구였을까
외투도 없이 얼핏
쉼표처럼 漠漠(막막)한 이 쓸쓸함은...
◈ 나쁘게 말하다
어둠 속에서 몇 개의 그림자가 어슬렁거렸다
어떤 그림자는 캄캄한 벽에 붙어 있었다
눈치챈 차량들이 서둘러 불을 껐다
건물들마다 순식간에 문이 잠겼다
멈칫했다, 석유 냄새가 터졌다
가늘고 길쭉한 금속을 질질 끄는 소리가 들렸다
검은 잎들이 흘끔거리며 굴러갔다
손과 발이 빠르게 이동했다
담뱃불이 반짝했다, 골목으로 들어오던 행인이
날카로운 비명을 질렀다
저들은 왜 밤마다 어둠 속에 모여 있는가
저 청년들의 욕망은 어디로 가는가
사람들의 쾌락은 왜 같은 종류인가
◈ 오후 4시의 희망
金은 블라인드를 내린다, 무엇인가
생각해야 한다, 나는 침묵이 두렵다
침묵은 그러나 얼마나 믿음직한 수표인가
내 나이를 지나간 사람들이 내게 그걸 가르쳤다
김은 주저앉는다, 어쩔 수 없이 이곳에
한번 꽂히면 어떤 건물도 도시를 빠져나가지 못했다
김은 중얼거린다, 이곳에는 죽음도 살지 못한다
나는 오래 전부터 그것과 섞였다, 습관은 아교처럼 안전하다
김은 비스듬히 몸을 기울여본다,
쏟아질 그 무엇이 남아 있다는 듯이
그러나 물을 끝없이 갈아주어도 저 꽃은 죽고 말 것이다,
빵 껍데기처럼 김은 상체를 구부린다,
빵 부스러기처럼 내겐 얼마나 사건이 많았던가,
콘크리트처럼 나는 잘 참아왔다
그러나 경험 따위는 자랑하지 말게 그가 텅텅 울린다,
여보게 놀라지 말게, 아까부터 줄곧 자네 뒤쪽에 앉아 있었네
김은 약간 몸을 부스럭거린다,
이봐, 우린 언제나 서류뭉치처럼 속에 나란히 붙어 있네,
김은 어깨를 으쓱해 보인다
아주 얌전히 명함이나 타이프 용지처럼 햇빛 한 장이 들어온다,
김은 블라인드 쪽으로 다가간다
그러나 가볍게 건드려도 모두 무너진다,
더 이상 무너지지 않으려면 모든 것을 포기해야 하네
김은 그를 바라본다,
그는 김 쪽을 향해 가볍게 손가락을 튕긴다,
무너질 것이 남아 있다는 것은 얼마나 즐거운가
즐거운가, 과장을 즐긴다는 것은 얼마나 지루한가
김은 중얼거린다, 누군가 나를 망가뜨렸으면 좋겠네,
그는 중얼거린다
나는 어디론가 나가게 될 것이다,
이 도시 어디서든 나는 당황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당황할 것이다
그가 김을 바라본다, 김이 그를 바라본다
한 번 꽂히면 김도, 어떤 생각도,
그도 이 도시를 빠져나가지 못한다
김은, 그는 천천히 눈을 감는다,
나는 블라인드를 튼튼히 내렸었다
또다시 어리석은 시간이 온다,
김은 갑자기 눈을 뜬다,
갑자기 그가 울음을 터트린다, 갑자기
모든 것이 엉망이다,
예정된 모든 무너짐은 얼마나 질서정연한가
김은 얼굴이 이그러진다
◈ 도로시를 위하여-幼年에게 쓴 편지 1
1
도로시. 그리운 이름. 그립기에 먼 이름. 도로시.
나는 아직도 너를 기억한다.
그 얕은 언덕과 어두운 헛간,
비가 내리던 방죽에서 우리가 함께 뛰어놀던 그리운 幼年들.
네 빠른 발과 억센 손은 같은 또래의 사내아이들을 제치고
언제나 너를 골목대장으로 만들어주었지.
우리는 아무도 여자애 밑에서 졸병노릇 하는 것을 불평하지 않았다.
언젠가 위험을 무릅쓰고 꺾어온 산나리꽃 덕분에
네가 내게 달아준 별 두 개의 계급장도 난 잊을 수 없다.
모두가 네 명령 밑에서는 즐겁고 가벼웠다.
네가 혼혈소녀였던 것도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어머니의 죽음 앞에서
한 방울의 눈물도 흘리지 않았던 용감한 도로시.
네가 고아원으로 떠나던 날의 그 이슬비를 아직도 나는 기억한다.
네가 떠나자 우리는 얼마나 슬펐는지 모른다.
서로 번갈아가며 대장 노릇도 해봤지만 아무런 흥미도 없었다.
도로시. 그러나 우리가 어떻게 다시
재밌는 전쟁놀이를 시작했는지 알고 있니?
우리는 마치 네 가 우리와 함께 놀고 있는 것처럼 행동했다.
공터에서 술래잡기를 하고 철길 위를 뛰어다녔다.
네가 명령을 내렸다. 도로시.
우리는 서로의 눈빛만 보아도 너의 명령을 알아차렸다.
너는 어디에도 없었지만
비어 있는 대장의 자리에서 늘 웃고 있었다.
언제이던가 나는 네가 늘 앉아 있던 자리에
남몰래 찐빵을 갖다 놓은 적도 있었단다.
그렇게 우리는 네가 없어도 너와 함께 즐겁게 놀 수 있었다.
그것은 모두 너에 대한 우리의 짧은 사랑 때문이었겠지.
2
도로시. 먼 이름. 멀기에 그리운 이름. 도로시.
너는 그 머나먼 대륙으로 떠나기 전에
딱 한 번 우리 마을에 들렀었다.
가엾은 도로시. 너는 오지 말았어야 했다.
우리는 벌써 네가 필요 없었다.
너는 주근깨투성이, 붉은 머리의 말라깽이 소녀에 불과했다.
왜 그날도 이슬비가 내렸는지 모른다.
그날 마을 어귀에서 네가 보여준 그 표정,
도로시. 그것은 슬픔이었을까,
아니면 대장으로서 보여줄 수 있었던 마지막 비웃음이었을까.
그 후 우리는 재빨리 나이가 먹었고 쉽게 너를 잊었다.
도로시. 그러나 절대로 우리가 버릴 수 없는 도로시.
그리운 이름.
◈ 허수아비
- 누가 빈 들을 지키는가
밤새 바람이 어지럽힌 벌판,
발톱까지 흰, 지난여름의 새(鳥)가 죽어 있다.
새벽을 거슬러 한 사내가 걸어온다.
얼음 같은 살결을 거두는 손.
사내의 어깨에 銀빛 서리가 쌓인다.
빈 들에 차가운 촛불이 켜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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