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육사(李陸史, 1904년~1944년)
본명 이원록. 경북 안동
일제 강점기 시대 한국을 대표하는 시인, 독립운동가
1933년 잡지 《신조선》에 시 〈황혼〉을 발표.
1946년 동생 이원조에 의해 유고집 《육사시집》 발간.
이육사(李陸史) 시 모음
◈ 청포도
내 고장 칠월은
청포도가 익어 가는 시절
이 마음 전설이 주저리주저리 열리고
먼데 하늘이 꿈꾸며 알알이 들어와 박혀
하늘 밑 푸른 바닷가 가슴을 열고
靑袍(청포)를 입고 찾아온다 했으니
내 그를 맞아 이 포도를 따먹으며
두 손 함뿍 적셔도 좋으련
아이야 우리 식탁엔 은쟁반에
하이얀 모시 수건을 마련해 두렴
◈ 광야
까마득한 날에
하늘이 처음 열리고
어데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
모든 산맥들이
바다를 연모해 휘달릴 때도
차마 이곳을 범하던 못하였으리라.
끊임 없는 광음을
부즈런한 계절이 피어선 지고
큰 강물이 비로소 길을 열었다.
지금 눈 나리고
매화향기 홀로 아득하니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다시 천고의 뒤에
백마타고 오는 초인이 있어
이 광야에서 목놓아 부르게 하리라.
◈ 교목
푸른 하늘에 닿을듯이
세월에 불타고 우뚝 남아서셔
차라리 봄도 꽃피진 말어라.
낡은 거미집 휘두르고
끝없는 꿈길에 혼자 설내이는
마음은 아예 뉘우침 아니라
검은 그림자 쓸쓸하면
마침내 호수(湖水)속 깊이 거꾸러저
참아 바람도 흔들진 못해라.
◈ 꽃
동방은 하늘도 다 끝나고
비 한방울 나리잖는 그때에도
오히려 꽃은 빨갛게 피지 않는가
내 목숨을 꾸며 쉬임 없는 날이여
북(北)쪽 「쓴드라」에도 찬 새벽은
눈 속 깊이 꽃맹아리가 옴자거려
제비 떼 까맣게 날라오길 기다리나니
마침내 저바리지 못할 약속(約束)이며!
한 바다복판 용솟음치는 곳
바람결 따라 타오르는 꽃성(城)에는
나비처럼 취(醉)하는 회상(回想)의 무리들아
오늘 내 여기서 너를 불러 보노라
◈ 남한산성
넌 제왕(帝王)에 길들인 교룡(蛟龍)
화석(化石) 되는 마음에 이끼가 끼어
승천하는 꿈을 길러 준 열수(洌水)
목이 째지라 울어예 가도
저녁 놀빛을 걷어 올리고
어디 비바람 있음직도 않아라.
◈ 노정기
목숨이란 마치 깨여진 배쪼각
여기저기 흩어져 마을이 구죽죽한 어촌(漁村)보담 어설프고
삶의 틔끌만 오래묵은 포범(布帆)처럼 달아매였다.
남들은 기뻤다는 젊은 날이었것만
밤마다 내 꿈은 서해(西海)를 밀항(密航)하는 「짱크」와 같애
소금에 절고 조수(潮水)에 부프러 올랐다.
항상 흐렸한 밤 암초(暗礁)를 벗어나면 태풍(颱風)과 싸워가고
전설(傳說)에 읽어본 산호도(珊瑚島)는 구경도 못하는
그곳은 남십자성(南十字星)이 비쳐주도 않았다.
쫓기는 마음 지친 몸이길래
그리운 지평선(地平線)을 한숨에 기오르면
시궁치는 열대식물(熱帶植物)처럼 발목을 오여쌋다
새벽 밀물에 밀려온 거미이냐
다 삭아빠즌 소라 깍질에 나는 붙어 왔다.
머-ㄴ 항구(港口)의 노정(路程)에 흘러간 생활(生活)을 드려다보며
◈ 말
흐트러진 갈기
후줄근한 눈
밤송이 같은 털
오! 먼 길에 지친 말
채찍에 지친 말이여!
수굿한 목통
축 처―진 꼬리
서리에 번쩍이는 네 굽
오! 구름을 헤치려는 말
새해에 소리칠 흰말이여!
◈ 바다의 마음
물새 발톱은 바다를 할퀴고
바다는 바람에 입김을 분다.
여기 바다의 은총(恩寵)이 잠자고 잇다.
흰 돛(白帆)은 바다를 칼질하고
바다는 하늘을 간질여 본다.
여기 바다의 아량(雅量)이 간직여 있다.
낡은 그물은 바다를 얽고
바다는 대륙(大陸)을 푸른 보로 싼다.
여기 바다의 음모(陰謀)가 서리어 있다
◈ 반묘(班猫)
어느 사막의 나라 유폐된 후궁(后宮)의 넋이기에
몸과 마음도 아롱져 근심스러워라
칠색(七色) 바다를 건너서 와도 그냥 눈동자에
고향의 황혼을 간직해 서럽지 않뇨.
사람의 품에 깃들면 등을 굽히는 짓새
산맥을 느낄사록 끝없이 게을러라.
그 적은 포효는 어느 조선(祖先) 때 유전이길래
마노(瑪瑙)의 노래야 한층 더 잔조로우리라.
그보다 뜰 아래 흰나비 나즉이 날아올 땐
한낮의 태양과 튤립 한 송이 지킴직하고
◈ 산
바다가 수건을 날여 부르고
난 단숨에 뛰여 달여서 왔겠죠
천금(千金)같이 무거운 엄마의 사랑을
헛된 항도(航圖)에 역겨 보낸날
그래도 어진 태양(太陽)과 밤이면 뭇별들이
발아래 깃드려 오고
그나마 나라나라를 흘러 다니는
뱃사람들 부르는 망향가(望鄕歌)
그야 창자를 끊으면 무얼하겠오
◈ 소년에게
차디찬 아침이슬
진주가 빛나는 못가
연(蓮)꽃 하나 다복히 피고
소년(少年)아 네가 낳다니
맑은 넋에 깃드려
박꽃처럼 자랐세라
큰 강(江) 목 놓아 흘러
여을은 흰 돌쪽마다
소리 석양(夕陽)을 새기고
너는 준마(駿馬) 달리며
죽도(竹刀) 져 곧은 기운을
목숨같이 사랑했거늘
거리를 쫓아 단여도
분수(噴水)있는 풍경(風景)속에
동상답게 서봐도 좋다
서풍(西風) 뺨을 스치고
하늘 한가 구름 뜨는 곳
희고 푸른 지음을 노래하며
그래 가락은 흔들리고
별들 춥다 얼어붙고
너조차 미친들 어떠랴
◈ 잃어진 고향
제비야
너도 고향(故鄕)이 있느냐
그래도 강남(江南)을 간다니
저 노픈 재우에 힌 구름 한 쪼각
제깃에 무드면
두 날개가 촉촉이 젓겠구나
가다가 푸른숲우를 지나거든
홧홧한 네 가슴을 식혀나가렴
불행(不幸)이 사막(沙漠)에 떠러져 타죽어도
아이서려야 않겠지
그야 한 떼 나라도 홀로 높고 빨라
어느 때나 외로운 넋이였거니
그곳에 푸른 하늘이 열리면
엇저면 네새고장도 될법하이.
◈ 자야곡
수만호 빛이래야 할 내 고향이언만
노랑나비도 오잖는 무덤 우에 이끼만 푸르러라.
슬픔도 자랑도 집어삼키는 검은 꿈
파이프엔 조용히 타오르는 꽃불도 향기론데
연기는 돛대처럼 나려 항구에 들고
옛날의 들창마다 눈동자엔 짜운 소금이 저려
바람 불고 눈보래 치잖으면 못살이라
매운 술을 마셔 돌아가는 그림자 발자최 소리
숨막힐 마음속에 어데 강물이 흐르느뇨
달은 강을 따르고 나는 차듸찬 강맘에 드리느라
수만호 빛이랴야 할 내 고향이언만
노랑나비도 오잖는 무덤 우에 이끼만 푸르러라.
◈ 절정(絶頂)
매운 계절의 채찍에 갈겨
마침내 북방으로 휩쓸려오다.
하늘도 그만 지쳐 끝난 고원
서릿발 칼날 진 그 위에 서다
어디다 무릎을 꿇어야 하나
한 발 재겨 디딜 곳조차 없다.
그러매 눈감고 생각해 볼 밖에
겨울은 강철로 된 무지갠가 보다.
◈ 파초
항상 앓는 나의 숨결이 오늘은
해월(海月)처럼 게을러 은(銀)빛 물결에 뜨나니
파초(芭蕉) 너의 푸른 옷깃을 들어
이닷 타는 입술을 추겨주렴
그 옛적 『사라센』의 마즈막 날엔
기약(期約)없이 흩어진 두낱 넋이었어라
젊은 여인(女人)들의 잡아 못논 소매 끝엔
고은 손금조차 아즉 꿈을 짜는데
먼 성좌(星座)와 새로운 꽃들을 볼때마다
잊었던 계절(季節)을 몇 번 눈우에 그렷느뇨
차라리 천년(千年)뒤 이 가을밤 나와 함께
비ㅅ소리는 얼마나 긴가 재어보자
그리고 새벽하늘 어데 무지개 서면
무지개 밟고 다시 끝없이 헤여지세
◈ 편복
광명을 배반한 아득한 동굴에서
다 썩은 들보라 무너진 성채 위 너 홀로 돌아다니는
가엾은 박쥐여! 어둠의 왕자여!
쥐는 너를 버리고 부자집 곳간으로 도망했고
대붕도 북해로 날아간 지 이미 오래거늘
검은 세기의 상장이 갈가리 찢어질 긴 동안
비둘기 같은 사랑을 한번도 속삭여 보지도 못한
가엾은 박쥐여! 고독한 유령이여!
앵무와 함께 종알대여 보지도 못하고
딱따구리처럼 고목을 쪼아 울리지도 못하거니
마노보다 노란 눈깔은 유전을 원망한들 무엇하랴
서러운 주문일사 못 외일 고민의 이빨을 갈며
종족과 홰를 잃어도 갈곳조차 없는
가엾은 박쥐여! 영원한 보헤미안의 넋이여!
제 정열에 못 이겨 타서 죽은 불사조는 아닐망정
공산 잠긴 달에 울어 새는 두견새 흘리는 피는
그래도 사람의 심금을 흔들어 눈물을 짜내지 않는가!
날카로운 발톱이 암사슴의 연한 간을 노려도 봤을
너의 먼-선조의 영화롭든 한시절 역사도
이제는 아이누의 가계와도 같이 서러워라
가엾은 박쥐여! 멸망하는 겨레여!
운명의 제단에 가늘게 타는 향불마자 꺼졌거든
그 많은 새즘생에 빌붙일 애교라도 가졌단 말가?
상금조처럼 고운 뺨을 채롱에 팔지도 못하는 너는
한 토막 꿈조차 못 꾸고 다시 동굴로 돌아가거니
가엾은 박쥐여! 검은 화석의 요정이여!
◈ 황혼
내 골방의 커-텐을 걷고
정성된 마음으로 황혼(黃昏)을 맞아드리노니
바다의 흰 갈메기들 같이도
인간(人間)은 얼마나 외로운 것이냐
황혼(黃昏)아 네 부드러운 손을 힘껏 내밀라
내 뜨거운 입술을 맘대로 맞추어보련다
그리고 네 품안에 안긴 모든 것에
나의 입술을 보내게 해다오
저-십이(十二) 성좌(星座)의 반짝이는 별들에게도
종(鍾)ㅅ소리 저문 삼림(森林) 속 그윽한 수녀(修女)들에게도
쎄멘트 장판우 그 많은 수인(囚人)들에게도
의지할 가지없는 그들의 심장(心臟)이 얼마나 떨고 있는가
『고비』사막(沙漠)을 걸어가는 낙타(駱駝)탄 행상대(行商隊)에게나
『아프리카』 녹음(綠陰)속 활 쏘는 토인(土人)들에게라도,
황혼(黃昏)아 네 부드러운 품안에 안기는 동안이라도
지구(地球)의 반(半)쪽만을 나의 타는 입술에 맡겨다오
내 오월(五月)의 골방이 아늑도 하니
황혼(黃昏)아 내일(來日)도 또 저-푸른 커-텐을 걷게 하겠지
정정(情情)히 사라지긴 시냇물 소리 같아서
한번 식어지면 다시는 돌아올 줄 모르나보다
◈ 한 개의 별을 보자
한 개의 별을 노래하자 꼭 한 개의 별을
십이성좌(十二星座) 그 숱한 별을 어찌나 노래하겠니
꼭 한 개의 별! 아침 날 때 보고 저녁 들 때도 보는 별
우리들과 아-주 친(親)하고 그 중 빛나는 별을 노래하자
아름다운 미래(未來)를 꾸며 볼 동방(東方)의 큰 별을 가지자
한 개의 별을 가지는 건 한 개의 지구(地球)를 갖는 것
아롱진 설움밖에 잃을 것도 없는 낡은 이 땅에서
한 개의 새로운 지구(地球)를 차지할 오는 날의 기쁜 노래를
목안에 핏대를 올려가며 마음껏 불러 보자
처녀의 눈동자를 느끼며 돌아가는 군수야업(軍需夜業)의 젊은 동무들
푸른 샘을 그리는 고달픈 사막(沙漠)의 행상대(行商隊)도 마음을 축여라
화전(火田)에 돌을 줍는 백성(百姓)들도 옥야천리(沃野里)를 차지하자
다 같이 제멋에 알맞는 풍양(豊穰)한 지구(地球)의 주재자(主宰者)로
임자 없는 한 개의 별을 가질 노래를 부르자
한 개의 별 한 개의 지구(地球) 단단히 다져진 그 땅 위에
모든 생산(生産)의 씨를 우리의 손으로 휘뿌려 보자
영속(▩粟)처럼 찬란한 열매를 거두는 찬연(餐宴)엔
예의에 끄림 없는 반취(半醉)의 노래라도 불러 보자
염리한 사람들을 다스리는 신(神)이란 항상 거룩합시니
새 별을 찾아가는 이민들의 그 틈엔 안 끼여 갈 테니
새로운 지구(地球)엔 단죄(罪) 없는 노래를 진주(眞珠)처럼 흩이자
한 개의 별을 노래하자. 다만 한 개의 별일망정
한 개 또 한 개의 십이성좌(十二星座) 모든 별을 노래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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