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2~2004 경남 충무
-1946년 [날개]에 [애가]발표,
1958년 한국시인협회상
1959년 자유문학상-대한민국문학상-예술원상 수상
-시집 [꽃의 소묘][김춘수시선] [꽃을 위한 서시] 등
김춘수(金春洙) 시 모음
◈ 꽃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 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 샤갈의 마을에 내리는 눈
샤갈의 마을에는 삼월에 눈이 온다
봄을 바라고 섰는 사나이의 관자놀이에
새로 돋는 정맥이
바르르 떤다
바르르 떠는 사나이의 관자놀이에
새로 돋은 정맥을 어루만지며
눈은 수천수만의 날개를 달고
하늘에서 내려와 샤갈의 마을의
지붕과 굴뚝을 덮는다
삼월에 눈이 오면
샤갈의 마을의 쥐똥만한 겨울 열매들은
다시 올리브빛으로 물이 들고
밤에 아낙들은
그해의 제일 아름다운 불을
아궁이에 지핀다
◈ 서풍부(西風賦)
너도 아니고 그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니라는데...
꽃인 듯 눈물인 듯 어쩌면 이야기인 듯
누가 그런 얼굴을 하고
간다 지나간다. 환한 햇빛 속을 손을 흔들며...
아무것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니라는데,
온통 풀냄새를 널어놓고 복사꽃을 울려놓고 복사꽃을 울려만 놓고
환한 햇빛 속을 꽃인 듯 눈물인 듯
어쩌면 이야기인 듯 누가 그런 얼굴을 하고...
◈ 인동(忍冬)잎
눈 속에서 초겨울의
붉은 열매가 익고 있다
서울 근교(近郊)에서는 보지 못한
꽁지가 하얀 작은 새가
그것을 쪼아 먹고 있다
월동(越冬)하는 인동(忍冬)잎 빛깔이
이루지 못한 인간(人間)의 꿈보다
더욱 슬프다
◈ 꽃 1
그는 웃고 있다. 개인 하늘에 그의 미소는 잔잔한 물살을 이룬다
그 물살의 무늬 위에 나는 나를 가만히 띄워본다.
그러나 나는 이미 한 마리의 황나비는 아니다
물살을 흔들며 바닥으로 나는 가라앉는다.
한나절, 나는 그의 언덕에서 울고 있는데,
도연히 눈을 감고 그는 웃고 있다
◈ 꽃 2
바람도 없는데 꽃이 하나 나무에서 떨어진다.
그것을 주워 손바닥에 얹어 놓고 바라보면 바르르 꽃잎이 훈김에 떤다
화분(花粉)도 난(飛)다.
꽃이여! 라고 내가 부르면
그것은 내 손바닥에서 어디론지 까마득히 떨어져 간다
지금, 한 나무의 변두리에
뭐라는 이름도 없는 것이 와서 가만히 머문다
◈ 꽃을 위한 서시
나는 시방 위험한 짐승이다
나의 손이 닿으면 너는
미지의 까마득한 어둠이 된다
존재의 흔들리는 가지 끝에서
너는 이름도 없이 피었다 진다
눈시울에 젖어 드는 이 무명의 어둠에
추억의 한 접시 불을 밝히고
나는 한밤내 운다
나의 울음은 차츰 아닌 밤 돌개바람이 되어
탑을 흔들다가
돌에까지 스미면 금이 되리라
얼굴을 가린 나의 신부여
◈ 꽃의 소묘
1.
꽃이여, 네가 입김으로
대낮에 불을 밝히면
환히 금빛으로 열리는 가장자리
빛깔이며 향기며
花紛이며 나비며 나비며
축제의 날은 그러나
먼 추억으로서만 온다
나의 추억 위에는 꽃이여
네가 머금은 이슬의 한 방울이
떨어진다
2.
사랑의 불 속에서도
나는 외롭고 슬펐다
사랑도 없이
스스로를 불태우고도
죽지 않는 알몸으로 미소하는
꽃이여
눈부신 순금의 阡의 눈이여
나는 싸늘하게 굳어서
돌이 되는데
3.
네 미소의 가장자리를
어떤 사랑스런 꿈도
침범할 수는 없다
금술 은술을 늘이운
머리에 칠보화관을 쓰고
그 아가씨도
新婦가 되어 울며 떠났다
꽃이여, 너는
아가씨들의 肝을
쪼아먹는다
4.
너의 미소는 마침내
갈 수 없는 하늘에
별이 되어 박힌다
멀고 먼 곳에서
너는 빛깔이 되고 향기가 된다
나의 추억 위에는 꽃이여
네가 머금은 이슬의 한 방울이
떨어진다
너를 향하여 나는
외로움과 슬픔을
던진다
◈ 분수
1.
발돋움하는 발돋움하는 너의 자세는
왜 이렇게
두 쪽으로 갈라져서 떨어져야 하는가
그리움으로 하여
왜 너는 이렇게
산산히 부서져서 흩어져야 하는가
2.
모든 것을 바치고도
왜 나중에는
이 찢어지는 아픔만을
가져야 하는가
네가 네 스스로에 보내는
이별의
이 안타까운 눈짓만을 가져야 하는가
3.
왜 너는
다른 것이 되어서는 안 되는가
떨어져서 부서진 무수한 네가
왜 이런
선연한 무지개로
다시 솟아야만 하는가
◈ 달개비꽃
울고 가는 저 기러기는
알리라
하늘 위에 하늘이 있다
울지 않는 저 콩새는 알리라
누가 보냈을까
한밤에 숨어서 앙금앙금
눈뜨는
◈ 앵오리
우리 고향 통영에서는
잠자리를 앵오리라고 한다
부채를 부치라고 하고 고추를
고치라고 한다
우리 고향 톹영에서는
톹영을 퇴영이라고 한다
팔을 폴이라고 하고 팥을
퐅이라고 한다
우리 고향 통영에서는
멍게를 우렁싱이라고 하고 똥구멍을
미자발이라고 한다
우리 외할머니께서는
통영을 퇴영이라고 하셨고 동경을
딩경이라고 하셨다.그러나
까치는 까치라고 하셨고 까치는
깩 깩 운다고 하셨다.그러나
남망산은
난방산이라고 하셨다
우리 외할머니께서 돌아가셨을 때
내 또래 외삼촌이
오매 오매 하고 우는 것을 나는 보았다
◈ 시(詩) 1
동체(胴體)에서 떨어져 나간 새의 날개가
보이지 않는 어둠을 혼자서 날고
한 사나이의 무거운 발자국이 지구(地球)를 밟고 갈 때
허물어진 세계(世界)의 안쪽에서 우는
가을 벌레를 말하라
아니
바다의 순결(純潔)했던 부분을 말하고
베고니아 꽃잎에 듣는
아침 햇살을 말하라
아니
그을음과 굴뚝을 말하고
겨울습기(濕氣)와
한강변(漢江邊)의 두더지를 말하라
동체(胴體)에서 떨어져 나간 새의 날개가
보이지 않는 어둠을 혼자서 날고
한 사나이의 무거운 발자국이
지구(地球)를 밟고 갈 때
◈ 능금
그는 그리움에 산다.
그리움은 익어서
스스로도 견디기 어려운
빛깔이 되고 향기가 된다.
그리움은 마침내
스스로의 무게로
떨어져 온다.
떨어져 와서 우리들 손바닥에
눈부신 축제의
비할 바 없이 그윽한
여운을 새긴다.
이미 가 버린 그날과
아직 오지 않은 그 날에 머물은
이 아쉬운 자리에는
시시각각의 그의 충실(充實)만이
익어간다.
보라,
높고 맑은 곳에서
가을이 그에게
한결같은 애무의
눈짓을 보낸다.
놓칠 듯 놓칠 듯 숨 가쁘게
그의 꽃다운 미소를 따라가며는
세월도 알 수 없는 거기
푸르게만 고인
깊고 넓은 감정의 바다가 있다.
우리들 두 눈에
그득히 물결치는
시작도 끝도 없는
바다가 있다.
◈ 나의 하나님
사랑하는 나의 하나님, 당신은
늙은 비애다
푸줏간에 걸린 커다란 살점이다
시인 릴케가 만난
슬라브 여자의 마음속에 갈앉은
놋쇠 항아리다
손바닥에 못을 박아 죽일 수도 없고 죽지도 않는
사랑하는 나의 하나님, 당신은 또
대낮에도 옷을 벗는 어리디 어린
순결이다
삼월에
젊은 느릅나무 잎새에서 이는
연둣빛 바람이다
◈ 가을 저녁의 詩
누가 죽어 가나 보다
차마 다 감을 수 없는 눈
반만 뜬 채
이 저녁
누가 죽어 가는가 보다
살을 저미는 이 세상 외롬 속에서
물같이 흘러간 그 나날 속에서
오직 한 사람의 이름을 부르면서
애터지게 부르면서 살아온
그 누가 죽어 가는가 보다
풀과 나무 그리고 산과 언덕
온 누리 위에 스며 번진
가을의 저 슬픈 눈을 보아라
정녕코 오늘 저녁은
비길 수 없이 정한 목숨이 하나
어디로 물같이 흘러가 버리는가 보다
◈ 부재
어쩌다 바람이라도 와 흔들면
울타리는
슬픈 소리로 울었다
맨드라미, 나팔꽃, 봉숭아 같은 것
철마다 피곤
소리 없이 져 버렸다
차운 한겨울에도
외롭게 햇살은
청석(靑石) 섬돌 위에서
낮잠을 졸다 갔다
할일없이 세월은 흘러만 가고
꿈결같이 사람들은
살다 죽었다
◈ 계단
거기 중간쯤 어디서
귀뚜라미가 실솔이 되는 것을 보았다
부르르 수염이 떨고 있었다
그때가 물론 가을이다
끄트머리 계단 하나가 하늘에 가 있었다
◈ 쥐오줌풀
하나님,
나보다 먼저 가신 하느님,
오늘 해질녘
다시 한 번 눈 떴다 눈 감는
하나님,
저만치 신발 두짝 가지런히 벗어놓고
어쩌노 멱감은 까치처럼
맨발로 울고 가신
하나님, 그
하나님
◈ 노새를 타고
기러기는 울지마,
기러기는 날면서 끼루룩 끼루룩 울지 마,
바람은 죽어서 마을을 하나 넘고 둘 넘어
가지 마,멀리 멀리 가지 마,
왜 이미 옛날에 그런 말을 했을까.
도요새는 울지 마,
달맞이꽃은 여름밤에만 피지 마,
언뜻언뜻 살아나는 풀무의 불꽃,
풀무의 파란 불꽃.
◈ 순명(順命)
처서 지나고 땅에서 서늘한 기운이 돌게 되면
고목나무 줄기나 바위의 검붉은 살갗 같은 데에
하늘하늘 허물을 벗어놓고 매미는 어디론가 가 버린다.
가을이 되어 수세미가 누렇게 물들어 가고 있다.
그런 수세미의 허리에 잠자리가 한 마리 붙어 있다.
가서 기척을 해봐도 대꾸가 없다.
멀거니 눈을 뜬 채로다.
날개 한 짝이 사그라지고 보이지 않는다.
내 손이 그의 몸에 닿자
긴 꼬리의 중간쯤이 소리도 없이 무너져 내린다.
◈ 흔적
망석이 어디 갔나
망석이 없으니 마당이 없다
마당이 없으니 삽사리가 없다
삽사리가 없으니
삽사리가 짖어대면
달이 없다
망석이 어디 갔나
◈ 가을 저녁의 시
누가 죽어가나 보다
차마 다 감을 수 없는 눈
반만 뜬 채
이 저녁
누가 죽어 가는가 보다
살을 저미는 이 세상 외롬 속에서
물 같이 흘러간 그 나날 속에서
오직 한 사람의 이름을 부르면서
애터지게 부르면서 살아온
그 누가 죽어 가는가 보다.
풀과 나무 그리고 산과 언덕
온누리 위에 스며 번진
가을의 저 슬픈 눈을 보아라.
정녕코 오늘 저녁은
비길 수 없이 정한 목숨이 하나
어디로 물 같이 흘러가 버리는가 보다.
◈ 갈대 섰는 풍경(風景)
이 한밤에
푸른 달빛을 이고
어찌하여 저 들판이
저리도 울고 있는가
낮 동안 그렇게도 쏘대던 바람이
어찌하여
저 들판에 와서는
또 저렇게도 슬피 우는가
알 수 없는 일이다
바다보다 고요하던 저 들판이
어찌하여 이 한밤에
서러운 짐승처럼 울고 있는가
◈ 거리에 비 내리듯
거리에 비 내리듯
비 개인 다음의
하늘을 보라.
비 개인 다음의
꼬꼬리새 무릎을 보라. 발톱을 보라.
비 개인 다음의
네 입술
네 목젖의 얼룩을 보라.
면경(面鏡)알에 비치는
산과 내
비 개인 다음의 봄바다는
언제나 어디로 떠나고 있다.
◈ 계단
거기 중간쯤 어디서
귀뚜라미가 실솔이 되는 것을 보았다
부르르 수염이 떨고 있었다
그때가 물론 가을이다
끄트머리 계단 하나가 하늘에 가 있었다
◈ 너와 나
맺을 수 없는 너였기에
잊을 수 없었고
잊을 수 없는 너였기에
괴로운 건 나였다.
그리운 건 너
괴로운 건 나.
서로 만나 사귀고 서로 헤어짐이
모든 사람의 일생이려니.
◈ 네가 가던 그 날은
네가 가던 그 날은
나의 가슴이
가녀린 풀잎처럼 설레이었다
하늘은 그린 듯이 더욱 푸르고
네가 가던 그 날은
가을이 가지 끝에 울고 있었다
구름이 졸고 있는
산마루에
단풍잎 발갛게 타며 있었다
네가 가던 그 날은
나의 가슴이
부질없는 눈물에 젖어 있었다
◈ 사모곡
주신 사랑이 적은 듯 싶어도 나 삽니다.
주신 말씀이 적은 듯 싶어도 나 삽니다.
오밤중에 전기불 꺼지듯 나 삽니다.
하나님
나는 꼭 하나만 가질래요.
세상 것 모두 눈 감을래요.
하나님
나는 꼭 그 사람만 가질래요.
산엔 돌치는 징소리 내 가슴에 너 부르는 징소리.
솔밭이 여긴데 솔향기에 젖는데
솔밭도 나도 다 두고 넌 어디쯤서 길 잃었니.
나도 바람이더면 아무대나 갈껄
그대 가는 곳 어디라도 갈껄
내가 물이라면 아무대나 스밀껄
그대 몸 속 마알간 피에라도 스밀껄
◈ 정
외로운 밤이면
자꾸만 별을 보았지.
더 외로운 밤이면
찬란한 유성이 되고 싶었지.
그토록 그리움에
곱게곱게 불타오르다간
그대 심장 가장 깊은 곳에
흐르는 별빛처럼
포옥 묻히고 싶었지.
◈ 명일동 천사의 시
앵초꽃 핀 봄날 아침 홀연
어디론가 가버렸다.
비쭈기나무가 그늘을 치는
돌벤치 위
그가 놓고 간 두 쪽의 희디흰 날개를 본다.
가고나서
더욱 가까이 다가 온다.
길을 가면 저만치
그의 발자국 소리가 들리고
들리고
날개도 없이 얼굴 지운.
◈ 물망초
부르면 대답할 듯한
손을 흔들면 내려올 듯도 한
그러면서도 아득히 먼
그대의 모습
하늘의 별일까요.
꽃피고 바람 잔 우리들의 그 날
날 잊지 마셔요.
그 음성 오늘 따라
더욱 가까이에 들리네
들리네
◈ 처용
인간들 속에서
인간들에 밟히며
잠을 깬다.
숲 속에서 바다가 잠을 깨듯이
젊고 튼튼한 상수리나무가
서 있는 것을 본다.
남의 속도 모르는 새들이
금빛 깃을 치고 있다.
◈ 나비
나비는 가비야운 것이 美다.
나비가 앉으면 순간에 어떤 우울한 꽃도 환해지고 多彩로와진다.
변화(變化)를 일으킨다.
나비는 복음(福音)의 천사(天使)다.
일곱 번 그을어도 그을리지 않는 순금(純金)의 날개를 가졌다.
나비는 가장 가비야운 꽃잎보다도 가비야우면서
영원한 침묵(沈默)의 그 공간(空間)을 한가로이 날아간다.
나비는 신선(新鮮)하다.
◈ 먼 들메나무
슬픔은 슬픔이란 말에 씌워
숨차다.
슬픔은 언제 마음놓고
슬픔이 되나,
해가 지고 더딘 밤이 오면 간혹
슬픔은 별이 된다.
그새 허파의 바람도 빼고 귀도 씻으며
슬쩍슬쩍 몰래 늙어간
산모퉁이 키 머쓱한
그 나무.
◈ 갈대
1
너는 슬픔의 따님인가보다.
너의 두 눈은 눈물에 어리어 너의 시야(視野)는 흐리고 어둡다.
너는 맹목(盲目)이다. 면(免)할 수 없는
이 영겁(永劫)의 박모(薄暮)를 전후좌우(前後左右)로 몸을 흔들
어 천치(天痴)처럼 울고 섰는 너.
고개 다수굿이 오직 느낄 수 있는 것,
저 가슴에 파고드는 바람과 바다의 흐느낌이 있을 뿐
느낀다는 것. 그것은 또 하나 다른 눈.
눈물겨운 일이다.
2
어둡고 답답한 혼돈(混沌)을 열고 네가 탄생(誕生)하던
처음인 그날 우러러 한눈은 하늘의 무한(無限)
을 느끼고 굽어 한눈은 끝없는 대지(大地)의 풍요(豊饒)를 보았다.
푸른 하늘의 무한(無限).
헤아릴 수 없는 대지(大地)의 풍요(豊饒).
그때부터였다. 하늘과 땅의 영원(永遠)히 잇닿을 수 없는
상극(相剋)의 그 들판에서 조그만한 바람
에도 전후좌우(前後左右)로 흔들리는 운명(運命)을 너는 지녔다.
황홀(恍惚)히 즐거운 창공(蒼空)에의 비약(飛躍).
끝없는 낭비(浪費)의 대지(大地)에의 못박힘.
그러한 위치에서 면할 수 없는 너는 하나의 자세(姿勢)를 가졌다.
오! 자세(姿勢)- 기도(祈禱).
우리에게 영원(永遠)한 것은 오직 이것뿐이다.
◈ 늪 2
늪을 지키고 섰는
저 수양버들에는
슬픈 이야기가 하나 있다.
소금쟁이 같은 것 물장군 같은 것
거머리 같은 것
개밥 순채 물달개비 같은 것에도
저마다 하나씩
슬픈 이야기가 있다.
산도 운다는
푸른 달밤이면
나는
그들의 슬픈 혼령(魂靈)을 본다.
갈대가 가늘게 몸을 흔들고
온 늪이 소리 없이 흐느끼는 것을
나는 본다.
◈ 경(瓊)이에게
경이는 울고 있었다.
풀덤불 속으로
노란 꽃송이가 갸우뚱 내다보고 있었다.
그것뿐이다.
나는
경이가 누군지를 기억지 못한다.
구름이 일다
구름이 절로 사라지듯이
경이는 가 버렸다.
바람이 가지 끝에
울며 도는데
나는
경이가 누군지를 기억지 못한다.
경이,
너는 울고 있었다
풀덤불 속으로
노란 꽃송이가 갸우뚱 내다보고 있었다.
◈ 나목(裸木)과 시(詩)
1
시를 잉태한 언어는
피었다 지는 꽃들의 뜻을
든든한 대지처럼
제 품에 그대로 안을 수가 있을까,
시를 잉태한 언어는
겨울의
설레이는 가지 끝에
설레이며 있는 것이 아닐까,
일진의 바람에도 민감한 촉수를
눈 없고 귀 없는 무변(無邊)으로 뻗으며
설레이는 가지 끝에
설레이며 있는 것이 아닐까,
2
이름도 없이 나를 여기다 보내 놓고
나에게 언어를 주신
모국어로 불러도 싸늘한 어감의 하나님,
제일 위험한 곳
이 설레이는 가지 위에 나는 있습니다.
무슨 층계의
여기는 상(上)의 끝입니까,
위를 보아도 아래를 보아도
발뿌리가 떨리는 것입니다.
모국어로 불러도 싸늘한 어감의 하나님,
안정이라는 말이 가지는
그 미묘하게 설레이는 의미말고는
나에게 안정은 없는 것입니까,
3
엷은 햇살의
외로운 가지 끝에
언어는 제만 혼자 남았다.
언어는 제 손바닥에
많은 것들의 무게를 느끼는 것이다.
그것이 몸 저리는
희열이라 할까, 슬픔이라 할까,
어떤 것들은 환한 얼굴로
언제까지나 웃고 있는데,
어떤 것들은 서운한 몸짓으로
떨어져 간다.
- 그것들은 꽃일까,
외로운 가지 끝에
혼자 남은 언어는
많은 것들이 두고 간
그 무게의 명암을
희열이라 할까, 슬픔이라 할가,
이제는 제 손바닥에 느끼는 것이다.
4
새야,
그런 위험한 곳에서도
너는
잠시 자불음에 겨우 눈을 붙인다.
3월에는 햇살도
네 등덜미에서 졸고 있다.
너희들처럼
시도
잠시 자불음에 겨우 눈을 붙인다.
비몽사몽간에
시는 우리가
한동안 씹어 삼킨 과실들의 산미(酸美)를
미주(美酒)로 빚어 영혼을 적신다.
시는 해탈이라서
심상의 가장 은은한 가지 끝에
빛나는 금속성의 음향과 같은
음향을 들으며
잠시 자불음에 겨우 눈을 붙인다.
◈ 돌
돌이여,
그 캄캄한 어둠 속에 나를 잉태(孕胎)한
나의 어머니,
태어나올 나의 눈망울
나의 머리카락은 모두
당신의 오랜 꿈의
비밀(秘密)입니다.
아직은 나의 이름을
부르지 마십시오.
무겁게
겹도록 달이 차서
소리하면 당신의 일어설 그때까지
당신의 가장 눈부신 어둠 속에
나의 이름은
감추어 두십시오.
그 한 번도 보지 못한 나를 위하여
어둠 속에 사라진 무수한 나……
돌이여,
꿈꾸는 돌이여,
◈ 타령조(打令調) 1
사랑이여, 너는
어둠의 변두리를 돌고 돌다가
새벽녘에사
그리운 그이의
겨우 콧잔등이나 입 언저리를 발견(發見)하고
먼동이 틀 때까지 눈이 밝아 오다가
눈이 밝아 오다가, 이른 아침에
파이프나 입에 물고
어슬렁어슬렁 집을 나간 그이가
밤, 자정(子正)이 넘도록 돌아오지 않는다면
어둠의 변두리를 돌고 돌다가
먼동이 틀 때까지 사랑이여, 너는
얼마만큼 달아서 병(病)이 되는가,
병(病)이 되며는
무당(巫堂)을 불러다 굿을 하는가,
넋이야 넋이로다 넋반에 담고
타고동동(打鼓冬冬) 타고동동(打鼓冬冬) 구슬채찍 휘두르며
역귀신(役鬼神)하는가,
아니면, 모가지에 칼을 쓴 춘향(春香)이처럼
머리칼 열 발이나 풀어뜨리고
저승의 산하(山河)나 바라보는가,
사랑이여, 너는
어둠의 변두리를 돌고 돌다가…
◈ 타령조(打令調) 2
저
머나먼 홍모인紅毛人의 도시
비엔나로 갈까나,
프로이드 박사를 찾아갈까나,
뱀이 눈뜨는
꽃피는 내 땅의 삼월 초순에
내 사랑은
서해로 갈까나 동해로 갈까나,
용의 아들
라후라(羅?羅) 처용아빌 찾아갈까나,
엘리 엘리 나마사박다니
나마사박다니, 내 사랑은
먼지가 되었는가 티끌이 되었는가,
굴러가는 역사의
차바퀴를 더럽히는 지린내가 되었는가
구린내가 되었는가,
썩어서 과목들의 거름이나 된다면
내 사랑은
뱀이 눈뜨는
꽃피는 내 땅의 삼월 초순에,
◈ 타령조(打令調) 7
시무룩한 내 영혼의 언저리에
툭 하고 하늘에서
사과 알 한 개가 떨어진다.
가을은 마음씨가 헤프기도 하여라.
땀 흘려 여름 내내 익혀 온 것을
아낌없이 주는구나.
혼자서 먹기에는 부끄러운 이상으로
나는 정말 처치곤란이구나.
누구에게 줄꼬.
받아 든 한 알의 사과를
사랑이여,
나는 또 누구에게 줄꼬,
마음씨가 옹색해서
삼시 세 끼를 내 먹다 남은 찌꺼기
비릿한 것의
비릿한 그 오장육부 말고는
너에게 준 것이라곤 나는 아무것도 없다.
아무것도 없다. 허구한 날 손가락 끝이 떨리기만 하고
나는 너에게
가을에 사과 알 한 개를 주지 못했다.
받아 든 한 알의 사과를
사랑이여,
나는 또 누구에게 줄꼬,
◈ 타령조(打令調) 8
등골뼈와 등골뼈를 맞대고
당신과 내가 돌아누우면
아데넷사람 플라튼이 생각난다.
잃어버린 유년, 잃어버린 사금파리 한 쪽을 찾아서
당신과 나는 어느 이데아 어느 에로스의 들창문을
기웃거려야 하나,
보이지 않는 것의 깊이와 함께
보이지 않는 것의 무게와 함께
육신의 밤과 정신의 밤을 허위적거리다가
결국은 돌아와서 당신과 나는
한 시간이나 두 시간 피곤한 잠이나마
잠을 자야 하지 않을까,
당신과 내가 돌아누우면
등골뼈와 등골뼈를 가르는
오열과도 같고, 잃어버린 하늘
잃어버린 바다와 잃어버린 작년의 여름과도 같은
용기가 있다면 그것을 참고 견뎌야 하나
참고 견뎌야 하나, 결국은 돌아와서
한 시간이나 두 시간 내 품에
꾸겨져서 부끄러운 얼굴을 묻고
피곤한 잠을 당신이 잠들 때,
◈ 수련별곡(水蓮別曲) 1
바람이 분다.
그대는 또 가야 하리
그대를 데리고 가는 바람은
어느 땐가 다시 한 번
낙화(落花)하는 그대를 내 곁에 데리고 오리,
그대 이승에서
꼭 한 번 죽어야 한다면
죽음이 그대 눈시울을
검은 손바닥으로 꼭 한 번
남김없이 덮어야 한다면
살아서 그대 이고 받든
가도 가도 끝이 없던 그대 이승의 하늘,
그 떫디떫던 눈웃음을 누가 가지리오?
◈ 봄이 와서 2
꼬부라진 샛길을 빠져나와
또 하나 꼬부라진 샛길을 따라가면
뜻밖에도
타작마당만한 공지(空地)가 나오고
넝마더미가 널려 있고
그런 곳에
장다리꽃 너댓 송이 피어 있더라.
늙은 산(山)이 하나
낮달을 안고 누워 있고
눈썹이 없는 아이가 눈썹이 없는 아이를
울리고 있더라.
◈ 밤의 시(詩)
왜 저것들은 소리가 없는가
집이며 나무며 산(山)이며 바다며
왜 저것들은
죄(罪)지은 듯 소리가 없는가.
바람이 죽고
물소리가 가고
별이 못 박힌 뒤에는
나뿐이다 어디를 봐도
광대무변(廣大無邊)한 이 천지간(天地間)에 숨 쉬는 것은
나 혼자뿐이다.
나는 목메인 둣
누를 불러볼 수도 없다
부르면 눈물이
작은 호수(湖水)만큼 쏟아질 것만 같다.
― 이 시간(時間)
집과 나무와 산(山)과 바다와 나는
왜 이렇게도 약(弱)하고 가난한가
밤이여
나보다도 외로운 눈을 가진 밤이여.
◈ 무구한 그들의 죽음과 나의 고독
1
스스로도 모르는
어떤 그날에
죄(罪)는 지었습니까?
우러러도 우러러도 보이지 않는
치솟은 그 절정(絶頂)에서
누가 그들을 던졌습니까?
그 때부텁니다
무수한 아픔들이
커다란 하나의 아픔이 되어
번져간 것은―
2
어찌 아픔은
견딜 수 있습니까?
어찌 치욕(恥辱)은
견딜 수 있습니까?
죄(罪)지은 기억(記憶)없는 무구(無垢)한 손들이
스스로의 손바닥에 하나의
장엄(莊嚴)한 우주(宇宙)를 세웠습니다.
3
그러나
꽃들은 괴로웠습니다.
그 우주(宇宙)의 질서(秩序) 속에서
모든 것은 동결(凍結)되어
죽어갔습니다.
4
죽어가는 그들의 눈이
나를 우러러보았을 때는
내가 그들에게
나의 옷과 밥과 잠자리를
바친 뒤였습니다.
내가 그들을 위하여
나의 땀과 눈물과 피를
흘린 뒤였습니다.
5
그러나
그들의 몸짓과 그들의 음성과
그들의 모든 무구(無垢)의 거짓이 떠난 다음의
나의 외로움을
나는 알고 있습니다.
수정(水晶)알처럼 투명(透明)한
순수(純粹)해진 나에게의 공포(恐怖)를
나는 알고 있습니다.
내가 죽어가는 그들을 위하여
무수한 우주(宇宙) 곁에
또 하나의 우주(宇宙)를 세우는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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