빅토르 위고(Victor Marie Hugo)
1802년 ~ 1885년
프랑스 낭만파 시인. 극작가. 소설가. 정치가로 활동
장편소설(노트르담의 꼽추 Notre Dame de Paris)(1831)· (레 미제라블 Les Misérables)(1862).
빅토르 위고(Victor Marie Hugo) 시 모음
◈ 스텔라
그 밤에 나는 모래밭에서 자고 있었다.
서늘한 바람결에 꿈에서 깨인 나는
눈을 뜨고 새벽별을 바라보았다.
그 별은 하늘 깊숙한 곳에서
한없이 부드럽고 고운 흰 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북풍은 소란을 떨고 달아났다.
빛나는 별빛은 구름을 솜털처럼 엷게 만들었다.
그것은 사객하고 호흡하는 빛이다.
물결이 부딪쳐 흐트러지는 암초 위에 조용함을 가져왔다.
마치 진주를 통해서 영혼을 보는 것 같았다.
밤이었지만 어둠은 힘을 잃어가고
하늘은 거룩한 미소로 밝아졌다.
별빛은 비스듬히 기운 돛대 위를 은색으로 물들였다.
뱃몸은 아직 어둠 속에 있었지만 돛은 희었었다.
가파른 언덕 위에 갈매기 떼들이 앉아,
생각 깊은 모양으로 그 별을 응시하고 있었다.
섬광으로 만든 천국의 새처럼.
백성을 닮은 태양은 별을 향해 움직이고,
나지막이 물결소리를 내며 별이 빛나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하지만 별이 도망갈까 보아 겁내는 것 같았다.
공간을 메우는 표현할 수 없는 사랑,
파란 풀잎들이 내 발밑에서 그 사랑에 겨워 파들거리고 있었다.
새들이 둥우리에서 소곤대고,
잠을 깬 꽃아가씨가 내게 말했다.
저 별은 내 누이라고.
어둠이 천천히 장막을 여는 동안
별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내게 이렇게 말했다.
나는 앞에 서서 오는 별입니다.
사람들이 무덤 속에 누워 있다고 생각하지만
다시 살아나는 별입니다.
나는 시내산 위를 밝혔고 타이제트산 위를 밝혔습니다.
돌을 던지듯이 하느님께서 불의의 면전에 던지시는
황금과 불로 빛은 조약돌입니다.
세상이 무너질 때 다시 살아나오는 별입니다.
백성이여! 나는 뜨거운 시입니다.
모세의 앞길을 비춰주었고 단테의 앞길을 비춰주었습니다.
사자같이 사나운 태양도 나를 좋아합니다.
내가 여기 왔습니다, 파수꾼들이여, 탑 위에 올라가시오!
눈꺼플이여, 눈을 여시오, 동자여, 빛을 내시오.
대지여, 고랑을 파오, 생명이여, 외침을 들으시오,
잠자는 이여, 일어나시오! 나를 쫓아오는 자는
나를 이렇게 전초로 보낸 자는 바로 자연의 천사요.
빛의 거인이오니!
◈ 오네요! 아련한 피리 소리
오네요! 아련한 피리 소리
오네요! 아련한 피리 소리
과수원에서 들려와요.
한없이 고요한 노래
목동의 노래.
바람이 지나가요, 떡갈나무 그늘
연못 어두운 거울에.
한없이 즐거운 노래
새들의 노래.
괴로워 말아요, 어떤 근심에도
우리 사랑할지니! 영원히!
가장 매혹적인 노래
사랑의 노래.
◈ 꽃에 덮인 오월
꽃에 덮인 목장의 오월이 우리를 부르니,
이리 오오!
저 전원, 숲, 아양스런 그늘,
잔잔한 물가에 포근히 드리워진 달빛
신작로로 통하는 오솔길,
미풍과 봄과 끝없는 지평선
수줍고 즐거움에 겨운 이 땅덩이가
입술처럼 하늘의 옷자락 끝에 포개지는 지평선을
당신 마음속에 함뿍 끌어넣지 않으려오.
이리 오오!
겹겹의 막을 뚫고 땅 위에 내려진
마알간 별들의 시선이,
향기와 노래에 넘치는 나무가,
정년의 햇빛으로 뜨거워진 들의 입김이,
그리고 그늘과 태양이, 물결과 녹음이,
당신의 이마 위엔 아름다움을
당신의 마음속엔 사랑을
꽃 피게 하여 주리니!
탐스런 꽃송이처럼.
◈ 모래언덕 위에서 하는 말
나의 인생이 횃불처럼 옴츠러 들어간 지금,
나의 임무가 끝난 지금,
애상과 나이를 먹는 동안
어느 샌가 무덤 앞에 이르게 된 지금,
그리고 마치 사라진 과거의 소용돌이처럼
꿈의 날개를 펴던 저 하늘 속에서
희망에 부풀었던 과거의 시간들이
어둠을 향해 빨려 들어가는 것을 보게 된 지금,
어느 날인가 우리는 승리를 하지만
그 다음날은 모든 것이 거짓이 되고 만다고
말할 수 있게 된 지금,
슬픔을 안고 꿈에 취한 사람모양 몸을 구부린 체,
나는 바라본다.
뭉게구름이 산과 계곡,
그리고 끝없이 물결 짓는 바다 저 위에서
욕심쟁이 북풍의 부리에 휩쓸려 들어가는 것을.
하늘의 바람소리가 ,암초에 부딪치는 물결소리가,
익은 곡식단을 묶는 사람들의 말소리가 들려온다.
나는 귀 기울인다. 그리고는
속삭이는 것과 말하는 것을 내 생각 깊은
마음속에서 비교해 본다.
나는 때때로 모래언덕 위 듬성듬성 난 풀 위에
몸을 던진 체, 꼼짝 않고 시간을 보낸다.
그러노라면 흉조를 띤 달이 떠올라와
꿈을 펴는 것이 보인다.
달은 높이 떠올라 거만스런 긴 빛을 던진다.
공간과 신비와 심연 위에,
광채를 발하는 달과 괴로움에 떠는 나,
우린 서로를 뚫어지게 바라본다.
사라진 내 날들은 어디로 갔을까?
나를 알아주는 이, 하나라도 있을까?
이 노곤한 눈동자 속에
젊은 날의 빛 한 오라기라도 남아 있는가?
모든 것이 달아난 걸까? 나는 외롭고 이젠 지쳤다.
대답없는 부름만을 하고 있구나.
바람아! 물결아! 그래 난 한 가닥 입김과 같은 존재였단 말이냐?
아 슬프게도! 그래 난 한줄기 물결에 지나지 않았단 말이냐?
사랑했던 그 어느 것도 다시 볼 수 없단 말이냐?
나의 마음속 깊숙이 저녁이 내린다.
대지야, 네 안개가 산봉우리를 가리웠구나,
그래 난 유령이고 넌 무덤이란 말인가?
인생과 사랑과 환희와 희망을 모두 살라 먹었을까?
막연히 기대를 건다. 그러다간 애원하는 마음이 되어
한줌이라도 혹 남아 있을지 모른다고
단지마다 기울여 본다.
추억이란 회한과 같은 것인가,
모든 것은 우리에게 울음만을 밀어다 주는구나!
죽음, 너 인간의 문의 검은 빗장아,
너의 감촉이 이리도 차냐!
나는 생각에 잠긴다. 씁쓰레한 바람이 일어오는걸,
물결이 붉게 주름지어 밀려오는 걸 느끼면서,
여름은 웃고, 바닷가 모래밭에는
파아란 엉겅퀴꽃이 피어나는구나.
◈ 봄
봄이구나! 3월
감미로운 미소의 달 4월
꽃 피는 5월 무더운 6월
모든 아름다운 달들은 나의 친구들이다
잠들어 있는 강가의 포플러 나무들
커다란 종려나무처럼 부드럽게 휘어진다.
새는 포근하고 조용한 깊은 숲에서 파닥거린다
모두가 웃고 있는 것 같고 초록의 나무들이 모두들
함께 즐거워하고 시를 읊조리는 것 같다.
해는 시원하고 부드러운 새벽으로부터
왕관을 쓴 듯이 힘차게 솟아오른다
저녁이면 사랑으로 가득차고
밤이면 거대한 그림자 사이로
하늘이 내리는 축복아래
영원히 행복한 뭔가를
노래하는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다.
◈ 바람과 별과 사랑의 詩
저녁 바람이 부드럽게 우리를 어루만져 주던 어제
천천히 퍼지던 꽃향기 또한 얼마나 좋았던가.
밤이 되자 새는 어둠 속에서 잠들었지.
봄은 짙은 향기를 내뿜었지만 그 향기는 네 젊음보다 못하고
별들이 빛난다 하더라도 빛은 네 눈빛보다 약하지.
나는 아주 낮은 목소리로 말했지.
영혼이 가장 부드럽게 노래하는 엄숙한 시간
이렇게 순결한 밤에 너무도 아름다운 그대를 보며
나는 황금 별들에게 말했지. 하늘을 그녀에게 부어다오!
그대의 두 눈에게도 말했지. 사랑을 우리에게 흠뻑 부어다오!
◈ 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
이젠 살만큼 살아서 아무리 괴로워도
날 부축해 줄 사람 없이 혼자 걷는다
어린아이들에게 둘러싸여도 웃음을 잃었고
꽃을 쳐다봐도 즐겁지 않다
봄이 되어 하느님이 자연의 축제를 벌여도
기쁜 마음도 없이 이 찬란한 사랑을 받을 뿐이다
햇빛을 피해 도망치며
은밀한 슬픔만 깨닫는 시간이로다
내 마음의 은근한 희망 이젠 깨어지고
장미 마음 훈훈한 이 봄철에
아, 내 딸이여, 네가 잠든 무덤을 생각한다
이젠 내 가슴도 시들고 몸도 늙었으니
나는 이 지상의 임무를 거절하지 않았다
내가 가꾼 밭, 내가 거둔 열매는 다 여기 있고
나는 언제나 미소하며 편안한 마음으로
신비한 것에 마음 끌리며 살았다
내 할 수 있는 일 다 하였고
남을 위해 봉사했고 밤을 새윘다
남들이 내 슬픔을 비웃는 것도 보았고
남달리 고통 받고 일한 덕분에
놀랍게도 원한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날개도 펼수 없는 이 지상의 도형장(徒刑場)
불평도 없이 피를 흘리며 두 손으로 넘어진 채
서글프게 기진하여 죄수들의 비웃음을 사며
나는 영원한 쇠사슬의 고리를 끌고 왔다
이제 내 눈은 반밖에 뜨이지 않고
누가 불러도 몸을 돌릴수 없다
한잠도 못자고 새벽 일찍 일어난 사람같이
권태와 무감각만이 나를 누른다
입을 모아 나를 비난하는 정적(政敵)에게도
이제 나는 지쳐 응수할 용기조차 없다
오, 주여, 밤의 문을 열어주소서
내 여기를 떠나 멀리 사라지도록
◈ 씨 뿌리는 계절, 저녁
지금은 황혼
나는 황홀히 바라본다, 문턱에 앉아,
노동의 마지막 시간이
비춰주는 하루의 나머지를.
밤이 미역 감긴 대지에서
나는 감동해서 바라본다.
미래의 수확을 밭고랑에
한줌 가득 던지는 누더기 입은 한 노인을,
그의 키 큰 검은 실루에뜨는
어둠이 짙은 밭을 지배한다.
어느 정도 그는 유익한 날들이
하루하루 지나감을 믿어도 좋으리라.
그는 넓은 들판을 걷는다
갔다 왔다 씨를 머얼리 뿌린다,
손을 다시 펴서는 다시 시작한다.
그리고 나는 생각에 잠긴다 눈에 띄지 않은 증인이 되어,
그러는 동안, 닻을 내리며,
어둠은, 소란한 소리와 뒤섞이어,
씨 뿌리는 농부의 엄숙한 모습을
별에까지 뻗치는 듯하다.
◈ 이리 오세요, 눈에 보이지 않는 피리가
이리 오세요, 눈에 보이지 않는 피리가
이리오세요! 눈에 보이지 않는 피리가
목장에서 한숨 쉽니다.
가장 평화로운 노래는
목동의 노래.
바람은 떡갈나무 밑에서,
물의 어두운 거울에 잔물결을 일게 합니다.
가장 즐거운 노래는
새들의 노래.
어떤 걱정에도 괴로워해선 안됩니다.
우리 사랑합시다! 사랑합시다 언제까지나!
가장 매혹적인 노래는
사랑의 노래.
◈ 내일은 새벽부터
내일은 새벽부터 들이 훤해지면
난 떠날 테다. 난 안다, 네가 기다리고 있음을.
나는 가련다, 숲을 지나 산을 넘어.
이 이상 더 너와 멀리 떠나 있을 수가 없구나.
나는 걸을 테다, 나의 눈은 오로지 한 생각에 골똘하여
눈에 보이는 것 귀에 들리는 것 아무것도 없을 게다
홀로, 낯선 나그네, 굽은 등에 두 손을 맞잡고
슬픈 나에겐 대낮도 밤과 같으리라.
나는 저무는 석양녘의 황금빛도
멀리 아르플뢰르 항구 향해 내려가는 돛단배들도 보지 않으련다
다만 너 있는 곳에 다다르면 네 무덤 위에
푸른 호랑가시나무와 꽃핀 히드 다발을 놓으리라.
◈ 12세 소년에 대한 詩
죄 있는 피와 죄 없는 피로 붉게 물든 디딤돌 사이
바리케이드 위에서
12세의 소년이 친구와 함께 체포되었다.
이 자식, 너희도 놈들과 한패지?
소년들은 대답했다.
`우리는 친구입니다.`
`좋아.`
장교는 말했다.
너희는 총살감이다, 차례를 기다려라.
한 소년이 집에 가서 어머니에게 시계를 전해 주고 오겠다고 말했다.
장교는 의심의 눈초리로 소년을 노려보았다.
`그건 핑계지? 도망치려고 그러지?`
`아닙니다. 틀림없이 돌아오겠습니다.`
`좋아, 도중에 도망치고 싶으면 도망쳐.`
장교는 소년을 풀어 주었고 소년은 곧 돌아왔다.
소년은 벽에 등을 기대어 선 채 떳떳하게 외쳤다.
나는 이곳을 떠나지 않을 것입니다.
◈ 올랭피오의 슬픔
암담한 들은 아니었다, 음울한 하늘은 아니었다.
아니, 아침해는 빛나고 있었다, 끝없는 하늘에 누워 있는 대지에.
공기는 향기로, 목장은 초록으로 가득 차 있었다.
일찍이 정열이 그렇듯, 마음을 상처내 주던 여기에
내가 다시 찾아왔을 때!
가을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언덕은 평지를 향하여
누레지기 시작하는 아름다운 숲을 기울이고 있었다.
하늘은 황금빛이었다.
새들은 만물이 사모하여 부르는 하느님을 향해
모름지기 인간이 무어라 말하고 또 노래한
그 거룩한 가락에 맞춰 노래했다!
그는 다시 한 번 모든 것이 보고 싶었다.
못과 주머니 털어 적선하던 그 샘가의 오두막집
가지 숙인 이 늙은 물푸레나무
숲속 눈에 띄지 않는 사랑의 은신처
일체를 잊고 두 영혼이 융해될 때까지 그 속에서
입 맞추던 나무 구멍을!
그는 찾았다, 마당을 또 외딴 집을.
오솔길을 내려다보는 문의 철책과
경사진 과수원을.
그는 창백하게 걷는다. 무겁게 딛는 발자취 따라
그는 본다, 아아! 하나하나의 나무에서 일어나는
지나간 날의 망령들!
그는 듣는다, 숲에서 그 부드러운 바람이 살랑이고
샘은 돌담에 싸였다.
무더운 오후 숲에서 내려와
장난스럽게 그녀가 마시던 샘물.
손바닥에 물을 떴었지, 아아 귀여운 요정이여,
그리고 흘렸지, 손가락 사이로 예쁜 진주를!
길은 험해져 울퉁불퉁 돌이 비어졌다. 지난날에는
깨끗한 모래 길이었다. 거기 또렷이 박힌
그녀의 작은 발자국이 귀엽게 웃는 듯 보였다.
그것보다 너무나 큰 대조를 이룬 내 발과 나란히 서서!
해일 수 없는 세월을 겪은 길가의 바위
이전에 나를 기다리기 위해 그녀가 앉았던 곳
그 돌 역시 닳아졌다, 저녁 길에
삐걱거리며 굴러가는 수레바퀴에.
(자연이 변했다는 것)
숲은 이쪽은 줄어들고 저쪽으론 퍼졌다.
우리 둘의 것이던 모든 것에서 살아 있는 것이란 아무것도 없다.
불꺼져 싸늘해진 잿더미처럼
수많은 회상은 바람 따라 흩어진다!
우리 둘은 이미 존재하지 않는가, 우리의 때는 지나갔는가?
가 버린 세월은 아무리 소리쳐도 허무란 말인가?
내가 울고 있건만 바람은 나뭇가지와 희롱하고
집은 무심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본다.
우리 둘이 머물던 곳에는 다른 사람이 머물리라.
우리 둘이 오던 여기에 이제 다른 사람이 오리라.
일찍이 우리 둘의 혼이 꾸기 시작한 꿈을
이제는 그들이 보리라, 영원히!
그 누구도 이 세상에서는 모두 다 볼 수 없기에
인간의 가장 나쁜 점도 가장 좋은 사람처럼
우리 모두는 같은 곳에서 꿈을 깨어난다.
모든 것은 이 세계에서 시작되고 모든 것을 저쪽에서 끝낸다.
그렇다! 다른 사람들, 흠 없는 남녀가 찾아오리라.
이 행복하고 한적한 매혹의 안식처에서
바람은 마음 속 깊은 골을 떨게 하면서
가슴에 사랑을 불러일으키고
떡갈나무를 뒤흔들며 장미를 쓰다듬어
하나하나의 사물 위에 깃들여 하는
만물의 넋인가 여겨진다!
쓸쓸한 숲에 떨어지고 있는 나뭇잎은
그의 발밑에서 땅으로부터 날아오르려고
들녘 한 가운데를 달린다.
우리의 추억 역시 그와 같아서 때에 따라 넋이 침잠하게 될 때
상한 날개로 한 차례 퍼덕이다가
즉시 땅에 떨어지고 만다.
그는 오래 바라보았다, 평화로운 들판에 대 자연이
장엄한 모습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을,
그는 해질 녘까지 꿈에 잠겼다.
하루 종일 그는 방황했다, 골짜기의 물을 따라
하늘의 숭고한 얼굴과 호수의 맑은 거울을
하나하나 모두 예찬하면서!
아아! 그리워라, 감미로운 사랑의 모험.
천한 종처럼 들어가지도 못하고 울타리 너머로 기웃거리며
그는 온종일 방황했다. 밤이 날개 펼 무렵
그는 느껴, 무덤과 같이 쓸쓸한 마음을,
그리고 외쳤다.
"오오, 이 서글픔이여! 어지러운 넋이여, 나는 알려 했다,
정열의 액은 아직 얼마만큼 이 병에 남았는지를.
나는 보려 했다, 내 마음이 여기에 남긴 것들을.
이 행복의 골짜기가 어떻게 처리했는지를!
모든 것을 바꾸는 데는 실로 짧은 세월로 족하는 도다!
신선한 표정의 자연, 어찌 너는 그리도 빨리 잊고 마는가!
그 탈바꿈의 마디마디를 왜 무참히 자르는가
우리의 마음이 맺어져 있는 신비의 실을!
우리 둘이 묵던 나뭇잎 방은 숲이 되었다!
우리 둘의 머리글자를 새긴 나무는 말라 버렸는가, 쓰러졌는가?
우리 둘이 가꾼 정원의 장미는 도랑을 넘어
놀러 오는 아이들 발길에 뭉개지고 말았다.
호젓한 사랑에 섞여지는 자연 풍물의
몽상과 장엄 모든 것을 길어 올리리라!
우리의 들과 오솔길과 은신처를 다른 사람들이 차지하리라.
내 사랑하는 이여, 네 숲은 낯선 남녀의 것이 되리라.
염치도 모르는 여자들이 목물하러 와서
네 맨발이 닿은 깨끗한 물결을 흐리게 하리라.
그래! 여기서의 우리 사랑은 허무였더란 말인가!
꽃 피는 이 언덕, 정열의 불꽃을 함께 태워
우리 두 존재가 하나 된 곳에 아무것도 남지 않는단 말인가.
오오! 말하라 골짜기여, 맑은 시내여, 익은 포도여,
새둥지 가득한 가지여, 동굴이여, 숲이여, 떨기여,
너희는 다른 사람을 위해 속삭이는가?
다른 사람을 향해 노래하는가?
우리는 너희를 친절하고 주의 깊고 엄격한 것으로 이해하였고
우리의 메아리는 깊이 너희 소리 속에 용해되었다!
우리는 아주 열심히 귀 기울였다.
너희 비밀을 가만히 놔둔 채
너희들이 이따금 말하는 심원한 말에!
대답하라 해맑은 골짜기여, 대답하라 쓸쓸한 땅이여,
아아, 마을에서 한참 외진 이 아름다운 장소에 깃든 자연이여,
영원한 명상으로 돌아가 누운 자들이 취하는
그 모습으로 우리 둘이 무덤 안에 잠든 때에도
그대는 계속해서 무감동하게 우리를 지켜보고
그 사랑과 더불어 죽어 누워 있는 우리를
그대의 평화로운 안식 속에서
여전히 미소 지으며 노래할 것인가?
그대의 산이나 숲이 즉시 분별해 주는 망령의 모습으로
그대의 은신처에서 방황하는 두 사람을 알아보고
그대는 우리에게 말해 주지 않으려나,
재회한 옛 친구에게 사람들이 말하는 그 은밀한 사실들을?
그대는 슬픔과 탄식마저 없이도 볼 수 있는가?
이전에 우리가 거닐던 그 자리에 우리 옛 그림자가 방황함을.
또한 눈물처럼 흐느끼던 샘물가로
사뿐히 껴안으며 나를 인도하던 그녀의 모습을?
눈뜬 사물 하나 없는 어두움 속에 사랑하는 남녀가
그 도취를 은밀히 그대의 꽃그늘에 기대어 있다면
그 귀에 그대는 다가가 속삭여 주지 않겠는가
"너희 살아 있는 자여, 죽은 자를 생각하라!"
신은 잠시 동안 우리에게 목장과 샘과
소슬한 넓은 숲과 깊은 부동의 바위굴과
푸른 하늘과 호수와 평야를 주시고, 그리고 거기에
우리의 마음과 꿈과 사랑을 안겨 주신다.
이윽고 모든 것을 거두어 가고, 신은 우리의 불꽃을 불어 끄신다.
우리가 불빛 밝히는 동굴을 신은 어두운 속에 잠기게 한다.
신은 우리의 넋이 새겨진 계곡을 향해 우리
흔적을 없애고 우리 이름을 잊으라고 하신다.
그래라! 우리를 잊어라, 집이여 정원이여 나무 그늘이여!
잡초여 우리 문을 황폐하게 하라! 가시덤불이여, 우리 발자국을 지워라!
새들아 노래하라! 시내여 흘러라! 나뭇잎이 울창하라!
너희는 잊더라도 나는 너희를 잊지 못한다.
너희는 우리 사랑의 반영 그것이기 때문이다.
너희는 여행 도중에 만나는 오아시스이다!
오오 골짜기여, 너는 최상의 은신처,
네 품안에서 우리는 마주 손잡고 울었었다!
정열은 나이와 더불어 사라지고, 그 어떤 것은
우스꽝스러운 가면을 쓰고, 어떤 것은 비극의 칼을 비껴 차고서
떠들썩한 유랑 악단의 한 패거리처럼
언덕 너머로 멀리 무리 지어 사라져 간다.
그러나 사랑이여, 그 무엇도 매혹스러운 너만은 지울 수 없다!
안개 자욱한 속에서도 빛나는 너, 타오르는 횃불, 계속 불타는 등불.
너는 기쁨으로 그리고 특히 눈물로 우리를 사로잡는다.
젊을 때는 너를 저주하고, 나이 들면 너를 찬양한다.
세월의 무게에 고개가 힘없이 수그러지는 날,
인간이란 계획도 목적도 환상도 없고
이제 자기가 묻힐 묘석밖에 없고
그 아래 덕망도 사랑의 환상도, 모두 모두 묻히는 것을 느끼는 날,
우리 흔히 꿈꾸듯 우리 존재의 심연으로 내려가
드디어 얼음으로 화한 우리 마음 안에
흡사 전장에서 시체를 세듯 하나 또 하나
쇠퇴한 고뇌와 사라진 몽상을 셀 때,
현실의 대상, 활짝 웃는 세계에서 멀고도 먼,
등불을 손에 들고 그 무엇을 찾듯이
그 혼은 어두운 언덕길을 지나 느릿한 걸음으로
내부의 심연에 내동댕이쳐진 쓸쓸한 곳에 이른다.
그리고 거기 어떤 빛도 비치지 않는 칠흑 속
모든 것이 다해졌다 생각되는 곳에서 혼은 느낀다.
아직 무엇인가 베일에 가려 숨 쉬고 있음을
바로 그것은 어둠 속에 잠자는 그대려니, 오오 거룩한 회상이여!
추억만이 남아있을 것이다.
◈ 나비와 꽃
가련한 꽃이 하늘의 나비에게 말했다
도망가지 마!
우리 운명이 이렇게 다르다는 것을 봐. 나는 남고,
너는 떠나고
그러나 우리는 서로 사랑하고,
우리는 인간들로부터 멀리 떨어져
그들 없이 살고
우리는 서로 닮았지.
사람들은 우리를
둘 다 꽃이라 하지
그러나 아! 바람은 너를 앗아가고 땅은 나를 묶는구나
잔인한 운명이여!
나는 내 향기로운 숨결로 너의 날아오르는 몸짓을 하늘위에
영원히 남겨 놓고 싶구나
그러나 너는 너무 멀리 갔구나!
셀 수 없이 많은 꽃들 사이로
너는 떠나고
나는 혼자 남아 본다. 내 그림자가
내 발을 도는 것을
너는 떠나고, 다시 오고, 또다시 너는 떠난다
다른 곳에서 빛나기 위해서
너도 매일 새벽이면 나를 찾는구나
눈물을 흘리며!
오! 우리 사랑이 변하지 않고 흐르기를
오, 나의 왕이여
나처럼 뿌리를 내리든가 아니면 날개를 다오
너와 같이
◈ 다시 또 그대에게
언제나 그대에게
내 거문고는 무엇을 노래하려는가?
사랑의 성가와 결혼의 성가를
내 이 광열을 그 어떤 이름이 깨우치려느냐?
내 이미 다른 노래와 딴 길을 배워 알았던가?
캄캄한 밤도 환해지는 그대 시선
즐거운 맘속에서 빛나는 그대 그림자
내 어둠길을 걸을 때 그대 내 손길을 잡기에
광명도 하늘에 그대 고운 눈매에서 내려오거니
내 운명은 부드러운 그대 기도에 호위되어
나의 천사 잠들면 그 기도 내 위에 밤을 새우나니
상냥하고도 정성된 그대 음성 들으면
심장은 삶을 위해 운명과도 싸움을 하리
그대에게 애원하는 소리 하늘에 나고
그대 꺾으실 꽃들이 이 동산에 있지 않느뇨?
선녀의 자매여 그대 영혼 나의 영혼을 위해
불빛의 반영이요 노래의 반향이오니!
상냥한 그대의 까만 눈 나를 바라보고
그대의 긴 옷깃 내 곁을 스칠 때
나는 거룩한 자리옷을 만지는 듯
토비와 같이 말하리 "천사는 내 맘에 있다"고
성스러운 목동 긴 나그네 길에 시달려
샘터가에 처녀 옴을 봄과 같이
그대 온갖 내 근심의 구름 헤쳐 있나니
그대 운명 내 운명과 함께 있나니
나는 사랑하노라 그대를 내 목숨처럼
어진 늙은 할머니의 말씀처럼
내 온갖 잘못을 걱정하는 누이처럼
또는 늙어서 얻은 막내아들처럼
아! 나는 그대 이름만 사랑하며 우노라
이리도 인생이 죄악으로 꽉 찼음을 나는 우노라
그대 머무르지 아니한 이 황량한 언덕에 앉아 놀던
그 나무가 다시 가지를 뻗는구나
주여 그이에게 평화의 기쁨이 있게 하라
주여 그이에게 하루하루를 번거롭게 말라
덕성 위의 행복의 비밀을 찾는
정성스런 그의 맘을 축복하라.
◈ 나는 그림자와 대리석이 된다
나는 그림자와 대리석이 된다.
나는 나무의 검은 발과 같이
밤으로 침몰한다.
나는 귀를 기울인다. 나는 땅 속에 있다.
그 아래서 나는 천둥에게 말한다.
잠깐! 소란 떨지 마라.
사람들이 시인이라고 부르는 나는,
나는 침묵의 밤에 있는
신비의 계단이다.
나는 어둠의 계단이다.
내 장례의 나선에서
그림자는 그의 어렴풋한 눈을 뜬다.
횃불은 촛불이 되리라.
나의 순결한 계단을 존중하라,
한 낮의 즐거움이여 그냥 지나가라.
나의 계단은, 축제의 날개 달린 발을 위해서도,
사랑의 벌거벗은 발을 위해서도,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나의 창백한 심연 앞에서
모두가 벌벌 떨고, 유령까지도,
진땀을 흘린다.
나는 죽음의 무덤에서 왔다.
나는 어두운 빛이 지나는,
그 문까지 다다른다.
연회는 웃고 타오른다.
주인들은 그들의 선혈 낭자한
옥좌 위에서 즐거움에 차있다.
모두가 그들을 섬기고 무두가 그들을 예찬한다.
그리고 그들의 능력에 딸린 여인이
그녀의 나신을 도사린다.
열쇄와 빗장을 그대로 두어라.
나는 층계이다. 고통이다.
생각하라. 시간이 다가온다.
그림자가 휘감는 누군가가
나의 어두운 계단을 오르리라.
그리고 누군가 계단을 내리리라.
◈ 나는 너를 위해 산 위에서 이 꽃을 땄다
나는 너를 위해 산 위에서 이 꽃을 땄다.
오직 독수리만이 알고 또 접근할 수 있는,
파도 위로 기우는 가파른 절벽에서,
그 꽃은 바위 틈 사이로 평화스럽게 자랐다.
그림자는 음울하게 튀어나온 곶의 옆구리를(측면을) 적셨다.
마치 승리의 장소에
진홍빛으로 찬란한 커다란 개선문을 세우듯
태양이 스러지는 장소에서
나는 어두운 밤이 먹구름 현관을 짓는 것을 보았다.
멀리 아스라한 곳으로 돛배들은 사라졌다.
몇몇 지붕들은 산 중턱 움푹 꺼진 밑바닥에서 빛을 발하며
반짝여 들키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처럼 보였다.
나의 사랑하는 사람아, 나는 너를 위해 이 꽃을 땄다.
그 꽃은 창백하고 향기 나는 화관이 없구나.
그 뿌리는 산꼭대기에서 청록색 해초의 쓰라린 냄새만 취하였다.
나는 말했다. 이 산꼭대기의 가련한 꽃이여
너는 해초와 구름과 돛배들이 떠나는
이 거대한 심연에서 떠나야 한다.
너는 보다 깊은 심연의 심장 위에서 죽거라.
세상이 팔딱거리는(고동치는) 품위에서 시들거라.
파도에 네 꽃잎을 뜯어내기 위하여 너를 창조한 하늘은
대양을 위해 너를 만들었나니 나는 네게 사랑을 보낸다.
바람은 물결을 뒤섞었다. 낮에는 어렴풋이 느리게 지워지는 파도만이 남았다.
내가 꿈꾸는 동안에 그리고 검은 심연이
저녁의 모든 전율과 함께 나의 영혼으로 들어오는 동안에
오! 나의 사념 깊은 곳에서 나는 이처럼 슬프구나.
◈ 내 노래에 날개가 있다면
내 노래에 날개가 있다면
여름과 같이 아름다운 나의 노래를
그대 꽃밭에 보내줄 것을
하늘로 날아가는 새들처럼
내 노래에 날개가 있다면
내 노래에 날개가 있다면
공중에서 번득이는 번갯불처럼
그대 웃음짓는 화롯가를 찾아갈 것을
저 하늘의 천사처럼
내 노래에 날개가 있다면
내 노래에 날개가 있다면
그대 집 등넝쿨 아래에 가서
밤이 새도록 기다릴 것을
질을 재촉하는 사랑의 날개가 있다면.
◈ 슬프고 미친 이곳을 떠날 수 있다면
우리가 이 슬프고 미친 파리를 떠날 수만 있다면,
우리는 도망가리라. 그곳이 어디라 하더라도,
기꺼이 찾으러 가자.
의미 없는 소음과 질투하는 마음으로부터 먼
우리들의 나무와 잔디가 있는 조그만 공간
꽃 피는 자그만 집과 가끔씩의 고독
약간의 침묵과 푸른 하늘지붕에 앉은
한 마리 새의 노래와 그늘이 있다면
아― 그밖에 뭐가 더 필요하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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