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45년 충남 서천 출생.
* 초등학교 교사 정년퇴임.
* 1971년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시 당선.
* 시집 『대숲 아래서』 외 여러 권.
* 현재 공주문화원장.
나태주 시 모음
◈ 행복
저녁때
돌아갈 집이 있다는 것
힘들 때
마음속으로 생각할 사람 있다는 것
외로울 때
혼자서 부를 노래 있다는 것
◈ 겨울 연가
한겨울에 하도 심심해
도로 찾아 꺼내 보는
당신의 눈썹 한 켤레.
지난여름 아무리 찾아도 찾을 수 없던 그것들.
움쩍 못하게 얼어붙은
저승의 이빨 사이
저 건너 하늘의 한복판에.
간혹 매운바람이 걸어 놓고 가는
당신의 빛나는 알몸.
아무리 헤쳐도 헤쳐도
보이지 않던 그 속살의 깊이.
숙였던 이마를 들어 보일 때
눈물에 망가진 눈두덩이.
그래서 더욱 당신의 눈썹 검게 보일 때.
도로 찾아 드는
대이파리 잎마다에 부서져
잔잔히 흐느끼는
옷 벗은 당신의 흐느낌 소리.
가만가만 삭아 드는 한숨의 소리.
◈ 그리움
가지 말라는데
가고 싶은 길이 있다
만나지 말자면서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다
하지 말라면
더욱 해보고 싶은 일이 있다
그것이 인생이고 그리움
바로 너다
◈ 3월
어차피 어차피
3월은 오는구나
오고야 마는구나
2월을 이기고
추위와 가난한 마음을 이기고
넓은 마음이 돌아오는구나
돌아와 우리 앞에
풀잎과 꽃잎의 비단방석을 까는구나
새들은 우리더러
무슨 소리든 내보라 내보라고
조르는구나
시냇물 소리도 우리더러
지껄이라 그러는구나
아, 젊은 아이들은
다시 한번 새옷을 갈아입고
새 가방을 들고
새 배지를 달고
우리 앞을 물결쳐
스쳐가겠지
그러나 3월에도
외로운 사람은 여전히 외롭고
쓸쓸한 사람은 쓸쓸하겠지
◈ 6월 기집애
너는 지금쯤 어느 골목
어느 낯선 지붕 밑에 서서 울고 있느냐
세상은 또다시 6월이 와서
감꽃이 피고 쥐똥나무 흰꽃이 일어
벌을 꼬이는데
감나무 새 잎새에 6월 비단햇빛이 흐르고
길섶의 양달개비
파란 혼불꽃은 무더기 무더기로 피어나는데
너는 지금쯤 어느 하늘
어느 강물을 혼자 건너가며 울고 있느냐
내가 조금만 더 잘해주었던들
너는 그리 쉬이 내 곁을 떠나지 않았을 텐데
내가 가진 것을 조금만 더 나누어주었던들
너는 내 곁에서 더 오래 숨쉬고 있었을 텐데
온다간다 말도 없이 떠나간 아이야
울면서 울면서 쑥굴헝의 고개 고개를
넘어만 가고 있는 쬐꼬만 이 6월 기집애야
돌아오려무나 돌아오려무나
감꽃이 다 떨어지기 전에
쥐똥나무 흰꽃이 다 지기 전에
돌아오려무나
돌아와 양달개비 파란 혼불꽃 옆에서
우리도 양달개비 파란 꽃 되어
두 손을 마주 잡자꾸나
다시는 나뉘어지지 말자꾸나
◈ 9월이
9월이
지구의 북반구 위에
머물러 있는 동안
사과는 사과나무 가지 위에서 익고
대추는 대추나무 가지 위에서 익고
너는
내 가슴속에 들어와 익는다
9월이
지구의 북반구 위에서
서서히 물러가는 동안
사과는
사과나무 가지를 떠나야 하고
너는
내 가슴속을 떠나야 한다
◈ 가시나무새의 슬픈 사랑이야기
1
사랑하는 사람아, 너는 모를 것이다.
이렇게 멀리 떨어진 변방의 둘레를 돌면서
내가 얼마나 너를 생각하고 있는가를
사랑하는 사람아, 너는 까마득 짐작도 못할 것이다.
겨울 저수지의 외곽길을 돌면서
맑은 물낯에 산을 한 채 비춰보고
겨울 흰 구름 몇 송이 띄워보고
볼우물 곱게 웃음 웃는 너의 얼굴 또한
그 물낯에 비춰보기도 하다가
이내 싱거워 돌멩이 하나 던져 깨드리고 마는
슬픈 나의 장난을
2.
솔바람 소리는 그늘조차 푸른빛이다.
솔바람 소리의 그늘에 들면 옷깃에도
푸른 옥빛 물감이 들 것만 같다.
사랑하는 사람아,
내가 너를 생각하는 마음조차 그만
포로소롬 옥빛 물감이 들고 만다면
어찌겠느냐 어찌겠느냐.
솔바람 소리 속에는
자수정빛 네 눈물 비린내 스며 있다.
솔바람 소리 속에는
비릿한 네 속살 내음새 묻어 있다.
사랑하는 사람아,
내가 너를 사랑하는 이 마음조차 그만
눈물 비린내에 스미고 만다면
어찌겠느냐 어찌겠느냐.
3.
나는 지금도 네게로 가고 있다.
마른 갈꽃내음 한 아름 가슴에 안고
살얼음에 버려진 골목길 저만큼
네모난 창문의 방안에 숨어서
나를 기다리는
빨강 치마 흰버선 속의 따스한 너의 맨발을 찾아서
네 열게 발가락의 잘 다듬어진 발톱들 속으로.
지금도 나는 네게로 가고 있다.
마른 갈꽃송이 꺾어 한 아름 가슴에 안고
처마 밑에 정갈히 내건 한 초롱
네 처녀의 등불을 찾아서.
네 이쁜 배꼽의 한 접시 목마름 속으로
기뻐서 지줄대는 네 실핏줄의 노래들 속으
◈ 강물과 나는
맑은 날
강가에 나아가
바가지로
강물에 비친
하늘 한 자락
떠올렸습니다
물고기 몇 마리
흰구름 한 송이
새소리도 몇 움큼
건져 올렸습니다
한참동안 그것들을
가지고 돌아오다가
생각해보니
아무래도 믿음이
서지 않았습니다
이것들을
기르다가 공연스레
죽이기라도 하면
어떻게 하나
나는 걸음을 돌려
다시 강가로 나아가
그것들을 강물에
풀어 넣었습니다
물고기와 흰구름과
새소리 모두
강물에게
돌려주었습니다
그 날부터
강물과 나는
친구가 되었습니다.
◈ 개나리 꽃대에
개나리 꽃대에 노랑불이 붙었다. 활활.
개나리 가늘은 꽃대를 타고 올라가면
아슬아슬 하늘나라까지라도 올라가 볼 듯
심청이와 흥부네가 사는 동네 올라가 볼 듯
◈ 내가 꿈꾸는 여자
1
내가 꿈꾸는 여자는
발가락이 이쁜 여자.
발뒤꿈치가 이쁜 여자.
발톱이 이쁜 여자.
정말로 내가 꿈꾸는 여자는
발가락에 때가 묻지 않은 여자.
발뒤꿈치에 때가 묻지 않은 여자.
발톱에 때가 묻지 않은 여자.
그리고 감옥 속에 갇혀서
다소곳이 기다릴 줄도 아는 발을 가진
그러한 여자.
2
그녀의 발은 꽃이다.
그녀의 발은 물에서 금방 건져낸 물고기다.
그녀의 발은 풀밭에 이는 바람이다.
그녀의 발은 흰 구름이다.
그녀의 발은
내 가슴을 짓이기기 위해서만 존재한다.
그녀의 발아래서
나의 가슴은 비로소 꽃잎일 수 있다.
그녀의 발아래서
나의 가슴은 비로소 흰 구름일 수 있다.
금방 물에서 건져낸 물고기일 수도 있다.
◈ 내가 사랑하는 계절
내가 제일로 좋아하는 달은
11월이다
더 여유있게 잡는다면
11월에서 12월 중순까지다
낙엽 져 홀몸으로 서 있는 나무
나무들이 개끔발을 딛고 선 등성이
그 등성이에 햇빛 비쳐 드러난
황토 흙의 알몸을
좋아하는 것이다
황토 흙 속에는
時祭 지내려 갔다가
막걸리 두어 잔에 취해
콧노래 함께 돌아오는
아버지의 비틀걸음이 들어 있다
어린 형제들이랑
돌담 모퉁이에 기대어 서서 아버지가
가져오는 對送 꾸러미를 기다리던
해 저물녘 한 때의 굴품한 시간들이
숨 쉬고 있다
아니다 황토 흙 속에는
끼니 대신으로 어머니가
무쇠 솥에 찌는 고구마의
구수한 내음새 아스므레
아지랑이가 스며 있다
내가 제일로 좋아하는 계절은
낙엽 져 나무 밑둥까지 드러나 보이는
늦 가을 부터 초겨울까지다
그 솔직함과 청결함과 겸허를
못 견디게 사랑하는 것이다
◈ 내장산 단풍
내일이면 헤어질 사람과
와서 보시오,
내일이면 잊혀질 사람과
함께 보시오,
왼 산이 통째로 살아서
가쁜 숨 몰아 쉬는 모습을.
다 못 타는 이 여자의
슬픔을 …
◈ 누님의 가을
바야흐로 이 나라에는 누님의 가을입니다.
뻐꾸기 뻐꾸기 꾀꼬리 찌르레기 같은 것들
모두 목이 쉬어 재 넘어가고 먹구름도 따라가고
이제 이 나라에는 바위 틈서리로 섬돌 밑으로
날카롭고 미세한 강물 다시 흐르기 시작하여
눈물어린 안구를 말갛게 씻고 바라보아야 할
누님의 가을입니다
누님.
그 아득한 미리내를 건너
깊은 밤마다 꽃상여 타고 하늘나라로 시집가신 누님.
들국화 꺾어 싸리꽃 꺾어 꽃다발 만들어 드릴 테니
무덤을 열고 꽃가마 타고
서리기러기 줄 서 날으는 하늘로 해서
치마 끝에 초록 수실 빨강 수실 넘실거리며
두 눈고피에 파란 불 켜 달고
오십시요. 부디 이 땅에 다시 강림하십시오.
이제 이 땅의 모든 꽃들과 열매와 나무들은
일 년치의 죽음을 장식하기 위하여
예쁘게 예쁘게 치마저고리를 갈아입었고
이제 이 땅의 모든 사람들은
죽어서도 이름이 잊혀지지 않기를 꿈꾸지 않습니다.
그러나 누님.
어찌하여 풀벌레 울음소리는 밤새워
아직도 우리에게
돌아오라, 돌아오라, 돌아오라, 목청을 돋구어
이 땅의 적막을 보태는 것이겠습니까?
어찌하여 여윈 풀잎은 작은 이슬방울 하나에도 힘겨워
고개를 떨궈야 하는 것이겠습니까?
누님.
바야흐로 이 나라에는 누님의 가을입니다.
그 아득하고 깜깜한 눈물의 무덤을 열고
저 미세한 풀벌레 울음소리의 강물을 노 저어
아무도 모르게 가만가만
이 땅의 풀과 나무들 속으로 오십시요.
오셔서 붉은 나뭇잎들을 더욱 불게 물들이고
익어 가는 온갖 과일들을 더욱 달디달게 익히시어
이 나라의 가을을 더욱 완전무결한 죽음이게 하십시요.
이 나라의 가을을 완성하게 하십시오.
◈ 다락방
이담에 집을 마련한다면
지붕 위에 다락방 하나 달린 집을
마련하겠습니다.
문틈으로 하늘 구름도 잘 보이고
바람의 옷소매도 잘 보일 뿐더러
밤이면 별이 하나 둘 돋아나는 것도
곧잘 볼 수 있는
그러한 다락방을 하나
마련하겠습니다.
그리하여 속상하거나 답답한 날은
다락방에 꽁꽁 숨으렵니다.
그대도 짐작 못하고
하느님도 찾지 못하시도록.
◈ 다시 9월
기다리라 오래 오래
될 수 있는 대로 많이
지루하지만 더욱
이제 치유의 계절이 찾아온다
상처받은 짐승들도
제 혀로 상처를 핥아
아픔을 잊게 되리라
가을 과일들은
봉지 안에서 살이 오르고
눈이 밝고 다리 굵은 아이들은
멀리까지 갔다가 서둘러 돌아오리라
구름 높이 높이 떴다
하늘 한 가슴에 새하얀
궁전이 솟아올랐다
이제 떠날 사람은 떠나고
남을 사람은 남게 되는 시간
기다리라 더욱
오래 오래 그리고 많이.
◈ 다시 산에 와서
세상에 그 흔한 눈물
세상에 그 많은 이별들을
내 모두 졸업하게 되는 날
산으로 다시 와
정정한 소나무 아래 터를 잡고
둥그런 무덤으로 누워
억새풀이나 기르며
솔바람 소리나 들으며 앉아 있으리.
멧새며 소쩍새 같은 것들이 와서 울어주는 곳,
그들의 애인들꺼정 데불고 와서 지저귀는
햇볕이 천년을 느을 고르게 비추는 곳쯤에 와서
밤마다 내리는 이슬과 서리를 마다하지 않으리.
길길이 쌓이는 壯雪을 또한 탓하지 않으리.
내 이승에서 빚진 마음들을 모두 갚게 되는 날,
너를 사랑하는 마음까지
백발로 졸업하게 되는 날
갈꽃 핀 등성이 너머
네가 웃으며 내게 온다 해도
하낫도 마음 설레일 것 없고
하낫도 네게 들려줄 얘기 이제 내게 없으니
너를 안다고도
또 모른다고도
숫제 말하지 않으리.
그 세상에 흔한 이별이며 눈물,
그리고 밤마다 오는 불면들을
내 모두 졸업하게 되는 날,
산에 다시 와서
싱그런 나무들 옆에
또 한 그루 나무로 서서
하늘의 천둥이며 번개들을 이웃하여
떼강물로 울음 우는 벌레들의 밤을 싫다하지 않으리.
푸르디푸른 솔바람 소리나 외우고 있으리.
◈ 달밤
어수룩히 숙어진 무논 바닥에
외딴집 호롱불 깜박이는
산이 내리고
소나기처럼 우는
개구리 울음에
물에 뜬 달이 그만 바스라지다.
달밤.
안개는 피어서 꿈으로 가나,
물에 절은 쌍꺼풀눈
설운 네 손톱을,
한 짝은 어디 두고
홀로이 와서
입안에 집어넣고 자근자근 씹어주고 싶은
네 아랫입술 한 짝을,
눈물 아슴아슴
돌아오는 길.
어디서 아득히 밤뻐꾸기 한 마리
울다말다 저 혼자도 지치다.
나 혼자 이슬에 젖는 어느 밤.
◈ 당신을 알고부터 시작된 행복
나의 삶에 지치고 힘들 때 언제든지
찾아가 엉켜진 모든 짐을 내려놓을 수 있는
당신을 알게 되어 행복합니다.
오늘처럼 이렇게 행복한날이
내 생애 몇 날이나 있을런지
하루살이 인생 이라면 그 하루의 전부를
주저 없이 당신을 사랑하겠습니다.
하루살이처럼 오늘만 살고 간다면
당신 허락 없이 내 맘대로
당신을 사랑하다 가겠습니다.
세월이 말없이 흘러가는 것처럼
내마음은 큰 강물이 되어
당신에게로 흘러갑니다.
나는 당신 사랑해도 되냐고
묻지 않겠습니다.
나보더 훨씬 먼저
당신이 나를 사랑했기 때문이죠.
이 세상 끝은 어디쯤일까?
궁금해 하지도 않겠습니다.
당신과 함께 가는 길은
시작과 끝이 같으니까요
당신을 알고부터 시작된 행복
이제는
매일 당신과 함께
호흡함에 행복합니다.
◈ 대숲 아래서
1
바람은 구름을 몰고
구름은 생각을 몰고
다시 생각은 대숲을 몰고
대숲 아래 내 마음은 낙엽을 몬다.
2
밤새도록 댓잎에 별빛 어리듯
그슬린 등피에는 네 얼굴이 어리고
밤 깊어 대숲에는 후득이다 가는 밤 소나기 소리.
그리고도 간간이 사운대다 가는 밤바람 소리.
3
어제는 보고 싶다 편지 쓰고
어젯밤 꿈엔 너를 만나 쓰러져 울었다.
자고 나니 눈두덩엔 메마른 눈물자죽.
문을 여니 산골엔 실비단 안개.
4
모두가 내 것만은 아닌 가을,
해 지는 서녘구름만이 내 차지다.
동구 밖에 떠드는 애들의
소리만이 내 차지다.
또한 동구 밖에서부터 피어오르는
밤안개만이 내 차지다.
하기는 모두가 내 것만은 아닌 것도 아닌
이 가을
저녁밥 일찍이 먹고
우물가에 산보 나온
달님만이 내 차지다.
물에 빠져 머리칼 헹구는
달님만이 내 차지다.
(★1971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당선작)
◈ 뒷모습
뒷모습이 어여쁜 사람이 참으로
아름다운 사람이다
자기의 눈으로는 결코 확인이 되지 않는 뒷모습
오로지 타인에게로만 열린
또 하나의 표정
뒷모습은 고칠 수 없다
거짓말을 할 줄 모른다
물소리에게도 뒷모습이 있을까 ?
시드는 노루발풀꽃, 솔바람소리
찌르레기 울음소리에게도
뒷모습은 있을까 ?
저기 저
가문비나무 윤노리나무 사이
산길을 내려가는
야윈 슬픔의 어깨가
희고도 푸르다
◈ 똥풀꽃
방가지똥풀꽃
애기똥풀꽃
가만히 이름을 불러 보면
따뜻해지는 가슴
정다워지는 입술
어떻게들 살아 왔니?
어떻게들 이름이나마 간직하며
견뎌 왔니?
못났기에 정다워지는 이름
방가지똥풀꽃
애기똥풀꽃
혹은 쥐똥나무,
가만히 이름 불러 보면
떨려 오는 가슴
안쓰러움은 밀물의
어깨.
◈ 멀리서 빈다
어딘가 내가 모르는 곳에
보이지 않는 꽃처럼 웃고 있는
너 한 사람으로 하여 세상은
다시 한 번 눈부신 아침이 되고
어딘가 네가 모르는 곳에
보이지 않는 풀잎처럼 숨쉬고 있는
나 한사람으로 하여 세상은
다시 한 번 고요한 저녁이 온다
가을이다, 부디 아프지 마라.
◈ 몸
아침저녁 맑은 물로
깨끗하게 닦아 주고
매만져 준다
당분간은 내가 신세지며
살아야 할 사글세방
밤이면 침대에 반듯이 눕혀
재워도 주고
낮이면 그럴 듯한 옷으로
치장해 주기도 하고
더러는 병원이나 술집에도
데리고 다닌다
처음에는 내 집인 줄 알았지
살다보니 그만 전셋집으로 바뀌더니
전세 돈이 자꾸만 오르는 거야
견디다 못해 전세 돈 빼어
이제는 사글세로 사는 신세가 되었지
모아둔 돈은 줄어들고
방세는 점점 오르고
그러나 어쩌겠나
당분간은 내가 신세져야 할
나의 집
아침저녁 맑은 물로 깨끗하게
씻어 주고 닦아준다
◈ 무인도
바다에 가서 며칠
섬을 보고 왔더니
아내가 섬이 되어 있었다
섬 가운데서도
무인도가 되어 있었다
◈ 바람이 붑니다
바람이 붑니다
창문이 덜컹댑니다
어느 먼 땅에서 누군가 또
나를 생각하나 봅니다
바람이 붑니다
낙엽이 굴러갑니다
어느 먼 별에서 누군가 또
나를 슬퍼하나 봅니다
춥다는 것은 내가 아직도
숨쉬고 있다는 증거
외롭다는 것은 앞으로도 내가
혼자가 아닐거라는 약속
바람이 붑니다
창문에 불이 켜집니다
어느 먼 하늘 밖에서 누군가 한 사람
나를 위해 기도를 챙기고 있나 봅니다.
◈ 부탁
너무 멀리까지는
가지 말아라
사랑아
모습 보이는 곳
까지만
목소리 들리는 곳
까지만 가거라.
돌아올 길
잊을까 걱정이다.
사랑아
◈ 붓꽃
슬픔의 길은
명주실 가닥처럼이나
가늘고 길다
때로 산을 넘고
강을 따라가지만
슬픔의 손은
유리잔처럼이나
차고도 맑다
자주 풀숲에서 서성이고
강물 속으로 몸을 풀지만
슬픔에 손목 잡혀 멀리
멀리까지 갔다가
돌아온 그대
오늘은 문득 하늘
쪽빛 입술 붓꽃 되어
떨고 있음을 본다.
◈ 비에 젖은 풀잎을
비에 젖은 풀잎을 밟고 오시는 당신의 맨발
빗소리와 빗소리 사이를 빠져나가는 당신의 나신
종아리에 핏빛 여린 생채기 진다.
가슴팍에 예쁜 핏빛 무늬가 선다.
◈ 사는 일이란
아, 오늘도 하루를
무사히 잘 보냈구나
저녁 어스름 자전거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며 다시
너를 생각한다
오늘도 잘 냈겠지
생각만으로도 내 가슴은
꽃밭이 되고 너는 제일로
곱고도 예쁜 꽃으로 피어난다
저녁노을이
자전거 바퀴살에 휘어 감기며
지친 바람이 어깨를 스쳐도
나는 여전히 살아서
숨쉬고 있다는 생각
그 생각만으로도 나는
다시금 꿈을 꾸고 내일을
발돋움하는 사람이 된다
그래 내일도 부디 잘 지내기를
아무 일 없기를
어두워 오는 하늘에도
길가의 나무와 풀에게도
빌어본다
사는 일이란 이렇게얹나
애달프고 가엾은 것이란다.
틀렸다
◈ 사랑이여 조그만 사랑이여
가보지 못한 골목들을
그리워하며 산다.
알지 못한 꽃밭,
꽃밭의 예쁜 꽃들을
꿈꾸면서 산다.
세상 어디엔가
우리가 아직 가보지 못한 골목길과
우리가 아직 알지 못하던 꽃밭이
숨어 있다는 것은
그것만으로도 얼마나
희망적인 일이겠니!
만나지 못했던 사람들을
만나기 위해서 산다.
세상 어디엔가
우리가 아직 만나지 못한 사람들이
살고 있다는 것은
그것만으로도 얼마나
가슴 두근거려지는 일이겠니
◈ 사랑하는 마음 내게 있어도
사랑하는 마음
내게 있어도
사랑한다는 말
차마 건네지 못하고 삽니다
사랑한다는 그 말끝까지
감당할 수 없기 때문
모진 마음
내게 있어도
모진 말
차마 하지 못하고 삽니다
나도 모진 말 남들한테 들으면
오래오래 잊혀지지 않기 때문
외롭고 슬픈 마음
내게 있어도
외롭고 슬프다는 말
차마 하지 못하고 삽니다
외롭고 슬픈 말 남들한테 들으면
나도 덩달아 외롭고 슬퍼지기 때문
사랑하는 마음을 아끼며
삽니다
모진 마음을 달래며
삽니다
될수록 외롭고 슬픈 마음을
숨기며 삽니다.
◈ 산행
마음을 비우고 몸을 비우고
당신을 찾아가는 날에 관음보살님,
석련을 꺾어 드신 손이 이쁘고
벗은 발이 이쁘고 이뻐서
혼자만 슬프신 관음보살님,
당신은 벌써 비자나무 숲길에
한 마리 다람쥐 되어 나를 반기고 계셨습니다.
시냇물 되어 도글도글
조약돌을 굴리고 계셨습니다.
머리를 비우고 가슴을 비우고
당신을 찾아가던 날에 관음보살님,
당신은 이미 징검다리 돌길을 건너는
갈래머리 산처녀, 산처녀 되어
나의 앞길을 먼저 가고 계셨습니다.
◈ 새로운 길
나는 신문을 한 1년쯤
묵혔다 읽는다
어떤 때는 2, 3년, 더한 때는
10년이 지난 신문을 읽을 때도 있다
그렇게 읽어도 새로운 소식을
담은 신문이 내게는 정말로
신문이 될 수 있기 때문
나는 남들이 새로운 길이라고 소리치며
달려가는 길은 가지 아니한다
오히려 사람들이 왁자지껄 그 길을
걸어서 멀리 사라진 뒤
그 길이 사람들한테 잊혀질 만큼 되었을 때
그 길을 찾아가 본다
그런 뒤에도 그 길이 나에게
새로운 길일 수 있다면 정말로
새로운 길일 수 있기 때문
나에게 새로운 길은 언제나
누군가에게서 버림받은
풀덤불에 묻힌 낡은 길이다.
◈ 석류꽃
이 꽃은
예로부터 고요하고 아름다운 동방의 나라
아침 이슬 냄새가 묻어나는 꽃.
이 꽃은
이 땅에 대대로 생겨나서
발뒤꿈치가 달걀처럼 이쁜 새댁들의
웃음소리가 들어 있는 꽃.
허물어진 돌덤불 가에 장독대 옆에
하늘 나라의 촛불인 양 피어 선연히
그 며느리들을 대대로 내려가며
투기하는 이 땅의 시어머니들의
한숨 소리도 들어 있는 꽃.
앞으로도 이 땅에서
끊이지 않고 생겨나서
발뒤꿈치가 달걀처럼 이쁠 새댁들의
웃음소리가 연이어 들어 있을 꽃.
연이어 들어 있을 꽃.
◈ 선물
나에게 이 세상은 하루하루가 선물입니다.
아침에 일어나 만나는 밝은 햇빛이며 새소리,
맑은 바람이 우선 선물입니다
문득 푸르른 산 하나 마주했다면 그것도 선물이고
서럽게 서럽게 뱀 꼬리를 흔들며 사라지는
강물을 보았다면 그 또한 선물입니다
한낮의 햇살 받아 손바닥 뒤집는
잎사귀 넓은 키 큰 나무들도 선물이고
길 가다 발 밑에 깔린 이름 없어 가여운
풀꽃들 하나 하나도 선물입니다
무엇보다도 먼저 이 지구가 나에게 가장 큰 선물이고
지구에 와서 만난 당신,
당신이 우선적으로 가장 좋으신 선물입니다
저녁 하늘에 붉은 노을이 번진다 해도 부디
마음 아파하거나 너무 섭하게 생각지 마서요
나도 또한 이제는 당신에게
좋은 선물이었으면 합니다
◈ 섬에서
그대, 오늘
볼 때마다 새롭고
만날 때마다 반갑고
생각날 때마다 사랑스런
그런 사람이었으면 좋겠습니다
풍경이 그러하듯
풀잎이 그렇고
나무가 그러하듯이.
◈ 수선화
언 땅의 꽃밭을 파다가 문득
수선화 뿌리를 보고 놀란다.
어찌 수선화, 너희에게는 언 땅 속이
고대광실 등 뜨신 안방이었드란 말이냐!
하얗게 살아 서릿발이 엉켜 있는 실뿌리며
붓끝으로 뽀족이 내민 예쁜 촉.
봄을 우리가 만드는 줄 알았더니
역시 우리의 봄은 너희가 만드는 봄이었구나.
우리의 봄은 너희에게서 빌려온 봄이었구나.
◈ 숲
비 개인 아침 숲에 들면
가슴을 후벼내는
비의 살내음.
숲의 샅내음.
천 갈래 만 갈래 산새들은 비단 색실을 푸오.
햇빛보다 더 밝고 정겨운 그늘에
시냇물은 찌글찌글 벌레들인 양 소색이오.
비 개인 아침 숲 속에 들면
아, 눈물 비린내. 눈물 비린내.
나를 찾아오다가 어디만큼 너는
다리 아파 주저앉아 울고 있는가
◈ 시
마당을 쓸었습니다
지구 한 모퉁이가
깨끗해졌습니다
꽃 한 송이 피었습니다
지구 한 모퉁이가
아름다워졌습니다
마음속에
시 하나 싹 텄습니다
지구 한 모퉁이가
밝아졌습니다
나는 지금
그대를 사랑합니다
지구 한 모퉁이가
더욱 깨끗해지고
아름다워졌습니다
◈ 아무 것도 모르면서
아무 것도 모르면서
땅바닥에 주저앉아
발부비며 우는 철부지
어린아이이고 싶다.
사람의 냄새와
사람의 껍질을 벗고서도
또 사람이고 싶다.
작은 바람에도 살아 쓸리는 여린 풀잎,
미세한 슬픔에도 상처받아 우는 작은 별빛,
드디어 나는 나만 아는
차고 맑고 그윽한 향기를 머금고 싶다.
◈ 안부
오래
보고 싶었다
오래
만나지 못했다
잘 있노라니
그것만 고마웠다
◈ 어쩌다 이렇게
있는 듯 없는 듯
있다 가고 싶었는데
아는 듯 모르는 듯
잊혀지고 싶었는데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
그대 가슴에 못을 치고
나의 가슴에 흉터를 남기고
어쩌다 이 지경이 되었을까
나의 고집과 옹졸
나의 고뇌와 슬픔
나의 고독과 독선
그것은 과연 정당한 것이었던가
그것은 과연 좋은 것이던가
사는 듯 마는 듯 살다 가고 싶었는데
웃는 듯 마는 듯 웃다 가고 싶었는데
그대 가슴에 자국을 남기고
나의 가슴에 후회를 남기고
모난 돌처럼 모난 돌처럼
혼자서 쓸쓸히.
◈ 오월
벙그는 목련꽃송이 속에는
아, 아, 아, 아프게 벙그는 목련꽃송이 속에는
어느 핸가 가을 어스름
내가 버린 우레 소리 잠들어 있고
아, 아, 아, 굴뚝 모퉁이 서서 듣던
흰 구름 엉켜드는 아픈 소리
깃들어 있고
천 년 전에 이 꽃의 전신을 보시던 이,
내게 하시는 말씀도 스며서 있다.
당신이 천 년 전에 생겨나든지
제가 천년 후에 생겨나든지
둘 중에 하나가 되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시무룩히 고개 숙인 옆얼굴까지 속눈썹까지
겹으로 으슥히 스며서 있다.
그늘 아래 샘물로 스며서 있다.
◈ 외로운 사람
전화 걸때마다
꼬박꼬박 전화를 받는 사람은
외로운 사람입니다.
불러주는 사람 별로 없고
세상과의 약속도 별로 많지 않은
사람이 분명하니까요
전화 걸때마다
한 번도 전화를 받지 않는 사람은
더욱 외로운 사람입니다.
아예 전화기가 멀리 떨어져
새 소리나 바람소리.
물소리 길을 따라가며
흰 구름이나 바라보고 있는
그런 사람이 분명할 테니까요
◈ 외할머니
시방도 기다리고 계실 것이다,
외할머니는
손자들이
오나오나 해서
흰옷 입고 흰버선 신고
조마조마
고목나무 아래
오두막집에서
손자들이 오면 주려고
물렁감도 따다 놓으시고
상수리묵도 쑤어 두시고
오나오나 해서
고갯마루에 올라
들길을 보며
조마조마 혼자서
기다리고 계실 것이다,
시방도 언덕에 서서만 계실 것이다,
흰옷 입은 외할머니는.
◈ 욕심
너무 욕심을 부리지 말아야지
비어 있는 나의 잔
다 알아서 주시는 분이 계시는데
투정을 부리지 말아야지
나의 자리 낮음과
가난함과
나약함과
무능함
괜찮다 괜찮다
고개 끄득여 주시는 분이 계시는데.
◈ 유월은
유월은
네 눈동자 안에 내리는 빗방울처럼
화사한 네 목소릴 들려주셔요.
유월은
장미 가시 사이로 내리는 빗방울처럼
화안한 네 웃음 빛깔을 보여 주셔요.
하늘 위엔 흰구름 가슴 속엔 무지개
너무 가까이 오지 마셔요.
그만큼 서 계셔도 숨소리가 들리는 걸요.
유월은
네 화려한 레이스 사이로 내다보이는 강변
쓸리는 갈대숲 갈대새 노래 삐릿삐릿
유월은
네 받쳐든 비닐우산 사이로 빙글빙글 돌아가는 하늘빛
비 개인 하늘빛 속살을 보여 주셔요.
◈ 젊은 딸들에게
딸들아,
우리나라의 젊고 이쁜 딸들아,
이제 우리나라에는 가을이 가고
가을 풀벌레들의 강물 소리도 얼어붙고
낡은 무덤과 지붕들 위에 지친 산맥들 위에
순백의 흰눈이 내려 덮여야 하는 겨울이 온다.
그러나 딸들아,
나는 오늘 잘 여문 벼이삭 수수이삭들을 보며
너희들의 잘 여문 가슴을 생각하고
잘 익은 콩꼬투리며 팥꼬투리들을 보며
너희들의 그 이쁜 발가락 손가락을 생각한다.
또한 딸들아,
감나무 가지 위에 마지막 남은 홍시를 보며
너희들의 탐스런 대리석의 젖가슴을 생각하고
가을 하늘같이 맑고 맑은 눈빛을 생각한다.
생각하고 생각한다.
겨울에도 얼지 않고 속삭이는 작은 시냇물 소리를
그 가슴 안에 가진 딸들아,
보다 더 많이 눈에 덮여
은은히 살 부비며 흐느끼는
솔바람 소리를 그 가슴 속에 지닌 딸들아.
너희들은
햇빛 속을 희고 빛나는 이빨로 웃으며
크고 튼튼한 알종아리로 종종종 걷다가도
돌아와선 수틀 앞에 조용히 앉을 줄도 알고
방안의 그 큰 고요의 호수 속에도 잠길 줄 알아야 한다.
그래야 한다.
그러므로 딸들아,
우리나라의 젊고 이쁜 딸들아,
나는 오늘 믿는다.
너희들의 가슴의 그 고요한 호수만을 믿는다.
믿고 또 믿는다.
◈ 천천히 가는 시계
천천히, 천천히 가는
시계를 하나 가지고 싶다
수탉이 길게, 길게 울어서
아, 아침 먹을 때가 되었구나 생각을 하고
뻐꾸기가 재게, 재게 울어서
어, 점심 먹을 때가 지나갔군 느끼게 되고
부엉이가 느리게, 느리게 울어서
으흠, 저녁밥 지을 때가 되었군 깨닫게 되는
새의 울음소리로만 돌아가는 시계
나팔꽃이 피어서
날이 밝은 것을 알고 또
연꽃이 피어서 해가 높이 뜬 것을 알고
분꽃이 피어서 구름 낀 날에도
해가 졌음을 짐작하게 하는
꽃의 향기로만 돌아가는 시계
나이도 먹을 만큼 먹어가고
시도 쓸 만큼 써보았으니
나도 인제는, 천천히 돌아가는
시계 하나쯤 내 몸 속에
기르고 싶다.
◈ 첫차
낯선 고장 낯선 여관방에서
하루 밤 묵고 일어나
깨끗한 이부자리에게 감사하고
밤새도록 선잠 든 얼굴 비춰준
전등불에게 감사하고
푸석한 얼굴 씻어줄 맑은
수돗물에게도 마저 감사한다
이 새벽아침에도 따끈한 국물을 파는
밥집이 열려 있었구나
밥을 먹으면서도 감사하고
깍두기를 씹으면서도 감사한다
지금껏 내가 사랑한 것은 오로지
나 자신이 아니었던가!
새삼스럽지 않은 깨달음에도 짐짓
소스라치며 진저리치며
어둠을 뚫고 가는 자동차에게 감사하고
운전기사에게도 감사해야지
나 오늘도 나 자신을 더욱 사랑하기 위해
나 자신을 찾기 위해 첫차로 떠난다
세상 속으로 서둘러 돌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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