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윤숙(毛允淑, 1909년 ~ 1990년) 시인.
함경남도 원산, 호는 영운(嶺雲),
이화여자전문학교 졸업, 명신여학교, 배화여자고등보통학교 교사.
1931년 잡지 『동광(東光)』에 시 「피로 색인 당신의 얼굴」을 발표.
1933년 10월 첫 시집 『빛나는 지역(地域)』을 출간.
대표작으로 <빛나는 지역>, <렌의 애가> 등
1991. 금관문화훈장 외 다수
모윤숙(毛允淑) 시 모음
◈ 국군은 죽어서 말한다
나는 廣州 산곡을 헤매이다
문득 혼자 죽어 넘어진 국군을 만났다
산 옆 외따른 골짜기에
혼자 누워 있는 국군을 본다
아무 말, 아무 움직임 없이
하늘을 향해 눈을 감은 국군을 본다
누런 유니폼
햇빛에 반짝이는 어깨의 표식
그대는 자랑스런 대한민국의 소위였구나
가슴에선
아직도 더운 피가 뿜어 나온다
장미 냄새보다 더 짙은 피의 향기여!
엎드려 그 젊은 주검을 통곡하며
나는 듣노라!
그대가 주고 간 마지막 말을 ...
나는 죽었노라
스물 다섯 젊은 나이에
대한민국의 아들로 나는 숨을 마치었노라
질식하는 구름과 바람이
미쳐 날뛰는 조국의 산맥을 지키다가
드디어 드디어 나는 숨지었노라
내 손에는 범치 못할 총자루
내 머리엔 깨지지 않을 철모가 씌워져
원수와 싸우기에
한 번도 비겁하지 않았노라
그보다도 내 핏속엔
더 강한 대한의 혼이 소리쳐
나는 달리었노라
산과 골짜기, 무덤 위와 가시숲을
이순신 같이, 나폴레온 같이, 시이저 같이,
조국의 위험을 막기 위해
밤낮으로 앞으로 앞으로 진격! 진격!
원수를 밀어 가며 싸웠노라
나는 더 가고 싶었노라
저 원수의 하늘까지 밀어서
밀어서 폭풍우같이 모스코바
크레믈린 탑까지 밀어 가고 싶었노라
내게는 어머니,
아버지, 귀여운 동생들도 있노라
어여삐 사랑하는 소녀도 있었노라
내 청춘은 봉오리지어
가까운 내 사람들과 함께
이 땅에 피어 살고 싶었었나니
아름다운 저 하늘에
무수히 날으는 내 나라의 새들과 함께
나는 자라고 노래하고 싶었어라
나는 그래서 더 용감히 싸웠노라
그러다가 죽었노라
아무도
나의 주검을 아는 이는 없으리라
그러나 나의 조국, 나의 사랑이여!
숨지어 넘어진 내 얼굴의 땀방울을
지나가는 미풍이
이처럼 다정하게 씻어 주고
저 하늘의 푸른 별들이
밤새 내 외로움을 위안해 주지 않는가?
나는 조국의 군복을 입은 채
골짜기 풀숲에 유쾌히 쉬노라
이제 나는 잠시 피곤한 몸을 쉬이고
저 하늘에 날으는 바람을 마시게 되었노라
나는 자랑스런 내 어머니 조국을 위해 싸웠고
내 조국을 위해 또한 영광스리 숨 지었노니
여기 내 몸 누운 곳 이름 모를 골짜기에
밤이슬 나리는 풀숲에 나는 아무도 모르게 우는
나이팅게일의 영원한 짝이 되었노라
바람이여!
저 이름 모를 새들이여!
그대들이 지나는 어느 길 위에서나
고생하는 내 나라의 동포를 만나거든
부디 일러 다오
나를 위해 울지 말고
조국을 위해 울어 달라고.
저 가볍게 날으는 봄나라 새여
혹시 네가 날으는 어느 창가에서
내 사랑하는 소녀를 만나거든
나를 그리워
울지 말고 거룩한 조국을 위해
울어 달라 일러 다고
조국이여! 동포여!
내 사랑하는 소녀여!
나는 그대들의 행복을 위해 간다
내가 못 이룬 소원
물리치지 못한 원수
나를 위해
내 청춘을 위해 물리쳐다오
물러감은 비겁하다
항복보다 노예보다 비겁하다
둘러싼 군사가 다 물러가도
대한민국 국군아!
너만은 이 땅에서 싸워야 이긴다
이 땅에서 죽어야 산다
한 번 버린 조국은 다시 오지 않으리라
다시 오지 않으리라
보라! 폭풍이 온다
대한민국이여!
이리와 사자 떼가 강과 산을 넘는다
내 사랑하는 형과 아우는
시베리아 먼 길에 유랑을 떠난다
운명이라
이 슬픔을 모른 체 하려는가?
아니다
운명이 아니다
아니 운명이라도 좋다
우리는 운명보다는 강하다.
강하다
이 원수의 운명을 파괴하라
내 친구여!
그 억센 팔 다리
그 붉은 단군의 피와 혼
싸울 곳에 주저 말고 죽을 곳에 죽어서
숨지려는 조국의 생명을 불러일으켜라
조국을 위해선 이 몸이 숨길 무덤도
내 시체를 담을 작은 관도 사양하노라
오래지 않아
거친 바람이 내 몸을 쓸어가고
저 땅의 벌레들이 내 몸을 즐겨 뜯어가도
나는 즐거이 이들과 함께 벗이 되어
행복해질 조국을 기다리며
이 골짜기 내 나라 땅에
한 줌 흙이 되기 소원이노라
산 옆 외따른 골짜기에
혼자 누운 국군을 본다
아무 말, 아무 움직임 없이
하늘을 향해 눈을 감은 국군을 본다
누른 유니폼
햇빛에 반짝이는 어깨의 표식
그대는 자랑스런 대한민국의 소위였구나
가슴에선
아직 더운 피가 뿜어 나온다
장미 냄새보다
더 짙은 피의 향기여!
엎드려 그 젊은 주검을 통곡하며
나는 듣노라!
그대가 주고 간 마지막 말을 ...
◈ 어머니의 기도
높이 잔물지는 나뭇가지에
어린 새가 엄마 찾아 날아들면
어머니는 매무시를 단정히 하고
산 위 조그만 성당 안에 촛불을 켠다
바람이 성서를 날릴 때
그리로 들리는 병사의 발자국 소리들
아들은 어느 산맥을 지금 넘나 보다
쌓인 눈길을 헤엄쳐
폭풍의 채찍을 맞으며
적의 땅에 달리고 있나 보다
쌓인 눈길을 헤엄쳐
폭풍의 채찍을 맞으며
적의 땅에 달리고 있나 보다
애달픈 어머니의 뜨거운 눈엔
피 흘리는 아들의 십자가가 보인다
주여
이기고 돌아오게 하옵소서
이기고 돌아오게 하옵소서
◈ 기다림
천년을 한 줄 구슬에 꿰어
오시는 길을 한 줄 구슬에 이어드리겠습니다.
하루가 천년에 닿도록
길고 긴 사무침에 목이 메오면
오시는 길엔 장미가 피어 지지 않으오리다.
오시는 길엔 달빛도 그늘지지 않으오리다.
먼먼 나라의 사람처럼
당신은 이 마음의 방언을 왜 그리 몰라 들으십니까?
우러러 그리움이 꽃피듯 피오면
그대는 저 오월 강 위로 노를 저어 오시렵니까?
감초인 사랑이 석류알처럼 터지면
그대는 가만히 이 사랑을 않으려나이까?
내 곁에 계신 당신이온데
어이 이리 멀고 먼 생각의 가지에서만
사랑은 방황하다 돌아서 버립니까?
◈ 렌의 애가(哀歌)
시몬!
이렇게 밤이 깊었는데 나는 홀로 작은 책상을 마주 앉아 밤을 새웁니다.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면 작고 큰 별들이 떨어졌다 모였다
그 찬란한 빛들이 무궁한 저편 세상에 요란히 어른거립니다.
세상은 어둡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땅 위는 무한한 암흑 속에 꼭 파묻혔습니다.
이렇게 어두운 허공중에서 마치 나는 당신의 이야기 소리를 들으려는 듯이
조용히 꿇어앉았습니다.
광명한 밤하늘 저편으로부터 어둠을 멸하려는 순교자의 자취와 같이
당신은 지금 내 적막한 주위를 응시하고 서신 듯도 합니다.
이 침묵의 압박을 무엇으로 깨치리까?
밤바람이 주고 가는 멜로디가 잠깐 램프의 그늘을 흔들리게 합니다.
아직 나는 뜰 앞의 장미를 볼 수 없습니다.
당신이 심어 주신 그 장미를!
여름 신의 애무가 있기 전에 장미는 나에게 향기를 전할 수 없을 줄 압니다.
이런 밤 장미가 용이하게 내 곁에 가까이 있다면 나는
그 숭고한 향기로 당신을 명상하기에 기쁨이 있었을 것입니다.
책을 몇 페이지 읽으려면 자연 마음이 흩어지려 합니다.
그것은 책 속에 배열해 놓은 이론보다
당신의 산 설교가 더 마음에 동경되는 까닭입니다.
시몬!
그러나 저는 책보다 당신을 더 동경하여서는 안 될 것을 알아요.
저 하늘에 윤회하는 성좌의 비밀을 알기 전에
당신이란 환상의 비밀을 알려고 고민함이 의롭지 못함인 줄 잘 압니다.
시몬!
당신의 애무를 원하기보다 당신의 냉담을 동경해야 할 저입니다.
용서하세요.
그러나 저는 당신의 빛난 혼의 광채를 벗어나서는 살 수 없습니다.
당신이 알려 준 인생의 길, 진리, 평화에 대한 높은 대화들을 떠날 수는 없습니다.
당신은 때로 내 생명을 장성시켜 주는 거룩한 사도이기도 합니다.
신에게 향한 이 신앙의 비애를 마음속으로부터 물리치려고 때로 노력합니다.
당신은 저에게 고독의 벗이 되라고 일러 주셨습니다.
감정을 초월한 곳에 우리 인생이 들여다볼 수 있는 영원한 나라가 있다고.
인생을 젊음으로 사귀지 말라시던!
시몬!
죽음 위에 이 생명을 빛나게 조각할 수 있도록 순결한 몸과 마음으로
인생의 관문을 지나치고 싶습니다.
종교, 예술, 철학이 설명하는 진리의 일부분이나마
이 뇌수로 해득하여 그것으로 평생의 양식을 삼을 수 있다면
그것은 저의 가장 큰 욕망이요 소원이 최후입니다.
이 소원을 이루는 데에 당신은 큰 도움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말씀과 같이 저는 제 자신을 바르게 하는 데 힘쓰고
제 의무에 노력하다가 세상을 마칠 수 있도록 힘써 보오리다.
램프는 피곤한 듯 좁니다. 벌써 새로 두 시.
시몬!
들으세요. 성당에서 부활제의 종이 웁니다.
불안한 육체 속에 폐쇄되었던 영혼이 천성문의 암시를 기다리듯
창문 옆에 가까이 기대었습니다.
저는 오늘 밤 침상으로 가기보다 저 거룩한 음향으로부터 들을 수 있는
내 운명의 암시와 함께 탁자에서 밤을 보내렵니다.
시몬!
당신이 좀 더 내게 가까이 계셨다면!
그리고 숭엄한 저 종소리를 함께 들으셨다면!
그러나 시몬!
당신은 너무 제게서 멀리멀리 계십니다.
내 창문은 너무 당신이 알지 못하는 곳에 새워져 있어요.
두 번째 종이 웁니다.
빈 벌판에 유랑의 나그네가 되어 가던 카츄샤의 애처로운 심정도
이 새벽종이 다시금 알려주는 애련한 소식이 아닐 수 없습니다.
시몬!
당신이 걸어 주시고 가신 수정 십자가를 만져 봅니다.
검은 구름이 가까운 하늘에 돌고 있습니다.
이제 창문을 닫습니다.
오늘 밤 당신을 연상함으로 어두운 밤 시간을 행복으로 지냈습니다.
날이 오래지 않아 밝아올 테니 아름다운 수면으로 이 밤을 작별하소서.
◈ 밤 호수
호수 밑 그윽한 곳
품은 꿈 알길 없고
그 안에 지나는 세월의 움직임도
내 알길 없네.
오직 먼 세계에서 떠온 밤 별 하나
그 안에 안겨 흔들림 없노니
바람 지나고 티끌 모여도
호수 밑 비밀 모르리.
아무도 못 듣는 그곳
눈물어린 가슴속 같이
호수는 별 하나 안은 채 조용하다.
◈ 어린 날개
날아라 맑은 하늘 사이로
억센 가슴 힘껏 내밀어
산에 들에 네 날개 쫙 펼쳐라.
꽃은 웃으리 잎은 춤추리.
아름드리 희망에 팔을 벌리고
큰 뜻 큰 세움에 네 혼을 타올라
바다로 광야로 나는 곳마다
승리의 태양이 너를 맞으리.
고운 피에 고운 뼈에
한번 새겨진 나라의 언약
아름다운 이김에 빛나리니
적의 숨을 끓을 때까지
사막이나 열대나 솟아솟아 날아가라.
사나운 국경에도
험준한 산협에도
네가 날아가는 곳엔
꽃은 웃으리 잎은 춤추리라.
◈ 이 생명을
임이 부르시면 달려가지요.
금띠로 장식할 치마가 없어도
진주로 꿰맨 목도리가 없어도
임이 오시라면 나는 가지요.
임이 살라시면 사오리다.
먹을 것 메말라 창고가 비었어도
빚더미로 옘집 채찍 맞으면서도
임이 살라시면 나는 살아요.
죽음으로 갚을 길이 있다면 죽지요.
빈손으로 임의 앞을 지나다니요.
내 임의 원이라면 이 생명을 아끼오리.
이 심장의 온 피를 다 빼어 바치리다.
무엔들 사양하리. 무엔들 안 받치리.
창백한 수족에 힘나실 일이라면
파리한 임의 손을 버리고 가다니요.
힘 잃은 그 무릎을 버리고 가다니요.
◈ 나의 별
밤마다 나의 창문가에
밤새워 깨어있는 나의 별아
너와 나 사이 길은 멀고도 멀어
저녁이면 내미는 이 팔이
오늘밤도 창문턱에 고달치 누워있다.
이 마음의 떠 있는 그 사람과 같이도
영원히 푸르러 있는 나의 별아
너와 나 사이 검은 공간은 꿈같이도 아득해
밤마다 헤엄치는 나의 나래는
오늘밤도 내 자리에 피곤히 돌아왔다.
오 나의 별 나의 사랑하는 너
나는 너의 푸른 눈동자에 취하여
맑은 영혼의 강변에 잠들고 싶다.
맘 아픈 인생의 허무한 잠꼬대를
너의 빛 아래서 산산이 깨쳐보고 싶다.
이 마음의 그리움이 구슬로 피었다면
흩어진 설움의 이 내 곡조를
한줄 두 줄 이어서 그 하늘에 매이련만
무궁한 창공은 높고도 멀어
그리움 이 꿈은 깰 길도 없어라.
◈ 묵도
나에게 시원한 물을 주든지
뜨거운 불꽃을 주셔요,
덥지도 차지도 않은 이 울타리 속에서
어서 나를 처치해 주셔요.
주여, 나를 이 황혼 같은 빛깔에서 빼내시와
캄캄한 저주를 내리시든지
광명한 복음을 주셔요.
이 몸이 다아 시들기 전에 오오 주여.
◈ 국화(菊花)
하얀 섬돌 언저리
귀뚜리 울던 밤은 지나고
서리 아래 맑게 풍기는
하늘의 내음새
상긋이 불어오는
소향(素香)의 안개
밤도 낮도 없는 마음씨라
베게도 거울도 너는 갖지 않았다.
웃음이나 설움이 자랑 아닌 너는
번거로운 화원에선 멀리 떠난
미(美)의 여인, 성(聖)의 청춘.
오묘한 말로 못 이르노라.
어여쁜 눈짓으로도 못 피게 하노라.
별이 시원히 둘린 밤에
신(神)의 손길에서 길러진 품위.
이슬의 아가씨
숨 쉬는 고움이여.
해 솟을 무렵
창 앞에 한그루
소복한 정열인가 하면
아련한 의지(意志)에 밝다.
마음 감기는 한은
차고 밝음에 더하여
바람 비에 속정 사리고
조용히 피는 향기에
나의 창문은 따뜻하다.
검은 옷은 벽에서 치우자.
낙엽 아래 다정한 객(客)
국화 핀 날은.
◈ 떠나는 카츄샤
어둡고 험한 광야 밤은 깊은데
늦어진 밤길을 홀로 걷는 여자를 보라.
풀어진 머리 창백한 얼굴
그는 이제 사나이의 가슴에 안긴
아름다운 천사가 아니다.
그의 울분에서 터지는 싸늘한 고함은
사현금 깊은 숲에서 들리는 종달새
노래도 아니다.
그 소리, 그 마음의 저항은
운명의 바퀴를 깨물고 흐르며
위선자의 웃는 얼굴을 창백케 하리니
시베리아 쌓인 눈
짓밟힘의 괴롬
위협과 속임에 떨던 마음
낡은 담 밑에서 속삭이던 사랑
아아 그 아픔을 어이 기억하랴
해는 지고 별도 없는 캄캄한 광야에
눈물로 길 적시며 헤매는 여인을 보라.
◈ 무덤에 내리는 소낙비
썩은 냄새에 몸이 저리다.
헐린 무덤 새에
번개에 몰리는 소나기 내리는 밤
짙은 칠빛으로 웅웅거리고
파도 같은 바람이 머리올을 끄은다.
해공이 고운 옷을 입고
요녀처럼 웃는다.
그는 다시 옷을 벗고
길다란 엿가락이 되어 입을 벌린다.
몸은 벌써 석고처럼 굳었건만
마음은 살아 무서움과 싸운다.
차라리 나는 진비를 맞으며
시체 곁에 죽음을 빈다.
◈ 샘가에 앉아
자주 빛으로 물든 하늘 아래
잎잎이 늘어진 힘없는 나무 그늘
여름날 황혼은 나른한 혈관 밑으로 저물어 가노니
샘가에 앉아 고달픈 하루를 쉬는 몸
저녁 하늘에 떠도는 구름과도 같아라.
나무숲에 저녁 새소리 요란하고
수줍은 월계 향기 담 너머로 흘러
해 진 후 녹음, 새엔 꿈같은 추억이 스미노니
샘가에 앉아 옛날을 헤아리는 몸
바다에 헤엄치는 마풀과도 같아라.
구름가로 휘도는 노을
파란하늘 위로 이름 모를 꽃폭을 그려
잃었던 낭인의 노래를 자아내나니
샘가에 앉아 노래 읊는 몸
야자수 그늘에 헤매는 집시와도 같아라.
◈ 소망
나는 때때로 칠빛 나는 어둠에서
신음하는 내 혼의 소리를 듣습니다.
막힌 골짜기 서려 있는 안개 밑으로
빠져가는 내 발길을 봅니다.
그럴 때마다 나는 머리를 들고
구름 속에 속삭이는 외마디 음성을 들어요.
또 한 번 더 웃어보라
또 한 번 더 일어나 보라는,
저 앞엔 나를 기다리는 등대 있어
날마다 내 손길을 불러 줍니다.
저 높은 미래의 하늘에는
승리의 은빛 십자가 나의 생을 비쳐줍니다.
그 등대 앞에 내 몸이야 가든 말든
오늘의 길을 쉬지 않고 걸을 랍니다.
그 십자가 밑의 샘물이야 마시든 말든
오늘의 내 눈은 쉬지 않고 그 빛을 바라봅니다.
가다가 이 몸이 부서져도
그 등대 바라고 힘을 냅니다.
사나운 바람이 그 길을 막는대도
진실한 하루의 일은 끊지 않으렵니다.
이 한 줄의 굳은 희망을 끊을 자 뉘뇨.
이 한 길의 오랜 침묵을 비난할 자 뉘뇨.
목숨이야 비탈에서 빼앗기든 말든
그 한 빛에 내 조국은 안기고 말 것을.
◈ 어머니
맑은 새벽에
산골의 안개 밀려가듯이
조용한 요람 속 어머니 호흡이여
광란스런 마음 바다를 잔잔히 하옵니다.
탄식과 멍에로 삶이 비틀거리고
위선과 속임에서 이 몸이 찢기울 때
등대마저 꺼진 세상 거리로
자애로운 어머니 손이 저를 부르더이다.
수많은 사랑 그 화려한 세상엔
꺼지고 흩어지는 색등이 어렸거늘
수식 없는 내 어머니 맑은 그 가슴에
영원한 사랑이 끓어 흐르옵니다.
깊어 끝없고 넓어 한없는 그 정을
좁고 거칠은 이 정성이 당하리이까.
자비한 내 어머니 끝없는 사랑에
고달픈 이 마음 고이 잠드옵니다.
◈ 오빠의 눈에
시내 밑에 작은 돌을 사뿐사뿐 밟아가며
고기잡이 하노라고 숨죽이던 오빠
나 주려고 딸기 따러 비탈길을 가던 오빠
그 오빠 오늘은 슬픈 눈을 가졌소.
산에 올라 내 손 잡고 피리 불던 오빠
내 머리 쓰다듬고 노래하던 그 오빠
누이야! 함부로 울지 마라 부탁하시던
그 오빠의 눈동자에 안개가 끼었소.
구름 낀 달빛 아래 나 혼자 걷노라면
내 어깨 꼭 잡고 숨바꼭질 하던 오빠
눈물이 귀하거니 달에 취해 우느냐 던 오빠
그 오빠의 뺨 위에 설은 눈물 내리오.
굳세인 오빠 내 등대이던 그 눈에
어느 누가 아픔을 주었는가 야속도 하이
물어도 대답 없는 그 슬픔을 뉘라 알까.
오늘은 오빠 눈에 눈물이 가득하오.
◈ 옥비녀
그날 옷섶에서
가만히 내어주신 선물
싸고 싸고 또 싸서
보드라이 감추어두었던 옥비녀!
산뜻 눈부신 그 빛
졸음 낀 눈이 총명스레 밝아집니다.
말 없는 이 비녀
어느 날 내 머리에 꽂으오리까.
그 날이 올 때까지 우리의 날이 오기까지
품 안에 간직하라 일러주시고
임은 육조 앞 넓은 길로 사라지셨습니다.
싸우는 당파 사이로
옳음 위해 쓰러지는 청년을 일으키려
임은 불 가운데 뛰어드셨습니다.
어제는 어디선가 테러당이 나타났습니다.
오늘은 누가 칼로 어느 정당 수령을 죽였답니다.
아아, 지금 저 종로엔 불길이 하늘을 찌르고 있지 않습니까.
아가들은 방에서 무서워 떨고
색시들은 골목마다 서서 남편을 기다립니다.
어디서는 반역자를 반역하자고
피 튀는 연설을 합니다.
참을 수가 없어 참을 수가 없어
선배를 매장하자 삐라를 돌립니다.
순하디 순한 예의의 나라
깨끗하기 흰 꽃이라 불리우던 이 겨레에게
이 무슨 미혹의 시련입니까.
그날을 창조하러 나가신 임
임은 테러의 앞잡이는 아니시겠지요.
임이여! 사랑하는 임이여
임은 혁명을 사랑하십니다.
반역자를 미워하십니다.
조선이 커지기 위해서라면
살인도 방화도 때로는 무서울 바 없습니다.
그러니 임이여
반역자를 죽이기 전
자본가의 빌딩에 불을 놓기 전
먼저 조선의 생명을 살리는 길
오오 이런 투쟁에 있나 가슴에 물어 보소서.
성내어 이론을 자랑하기 전
어루만져 불쌍한 동족을 이해해 보셨나이까.
이러지 않고야 임이여
언제 약속한 그 날이 온단 말입니까.
임이 주신 옥비녀
깨끗하고 맑은 그 마음속에 살고
불붙는 의지와 혼 그 안에 숨겼으되
조용한 선조의 넋 잃지 않습니다.
진실한 조선의 맘 변함없습니다.
임이여 손잡아 서로 겸손하소서
비웃는 웅변들
자만의 애국심
비밀의 연회
우리의 앞날은 여기 있지 않습니다.
오늘도 남몰래
임이 주신 옥비녀 만져봅니다.
천년 고운 이 나라의 짝
나의 옥비녀
조을던 이 마을이 임의 손에 깨는 날
나는 사뿐히 임이 주신 이 비녀를
머리에 꽂아 새날 맞이하오리다.
◈ 유월의 아침
보리밭 넘어 온 유월 아침은
우리 집 헌 바자에 웃고 머뭅니다.
남빛 나팔꽃 돌담에서 잠깨어
회조조 이슬에 맑은 세수하노라.
새빨간 적삼에 물동이 이고
돌각담 돌아서는 앞집 새아씨
오늘 아침 어느 골의 손님 오셨나
수줍은 물바가지 동당동당하노나
고불거린 작은 산길에
호박국에 오똑 솟은 조밥이고
이슬에 대일세라 치마꼬리 휘감으며
남편 찾아 논길에 종종걸음 바빠라.
안개에 휘감긴 먼 산은 양의 빛으로 하얗고
숨차 흐르는 바윗골 산 냇 소리
유월의 아침은 처녀의 꿈처럼 수줍어라.
유월 아침은 내 마음 위에 한가히 누워 가노라.
◈ 즐겨 부르던 내 노래야
연둣빛이었습니다.
내가 기대어 지절대던 그 느티나무는
머리끝에 팔랑거리는 댕기가
바람에 못 견디어 허리에 되감기던 때
나는 도톨밤이랑 까먹으며
무슨 노랜지 그저 불렀습니다.
맵싸한 촌마을의 저녁연기
파란 잎사귀에 가물가물 피어오를 무렵
나는 그 연기를 쏘이면서도
누구를 위해선지 노래를 불렀습니다.
마음 가는 대로 소리 나는 대로
바람 속에서 구름 뒤를 따르며
즐거워 희망을 노래했습니다.
내 머리서 빨간 댕기 가버린지
벌써 까마득한 옛날
나는 그 때에 지절대던 노래를
더듬어 더듬어 옛 길로 갑니다.
아무것도 아니었어요.
아무렇지도 않은 곡조였어요.
그저 어디선가 기다리는 시절에
눈과 귀에 향내를 퍼부어 내리기
한없이 한없이 따라 올라가
무슨 노랜지 그렇게 불렀답니다.
이만치 커진 나이엔
그 황홀한 희망에 안기려니 하고
이 나이를 애써 기다리며 노래했어요.
이제 그 나이에 왔습니다.
가까울 듯 속삭이던 그 희망은
지금 내 귀에 들리지도 보이지도 않습니다.
그 연둣빛 느티 잎새 밑
빨간 댕기 끝에서 오던 소리는.
◈ 침묵
사모(思慕)는 그늘을 입고 잠들어
시체처럼 잠 속에 파묻히다
바람이 불어와 언덕의 풀이 흩어지고
큰 하늘의 번개가 여기 흔들려도
그는 이제 깨지 않는다.
높은 가지 위에
오늘 밤도 먼 기쁨이 나타나서
흰 꽃 검은 꽃을 뿌려준다.
그 속에 형용하는
슬픈 마음 짓의 가지가지를
세상에 또 없을 보석처럼
싸고 또 싸서 맘의 천국을 이루노라.
◈ 어느 여인
물가의 한밤은 깊어서
향 어린 나무 냄새 풍기는
잠든 마을 옆
낡은 성 위로 기우는 달이
그 집 들창에 스러져 간다.
헐린 요 위에 누운
늙은 여인의 얼굴
바람은 이따금 그 머리 날려
산란히 흩어가나
베개의 꿈은 깊어
근심과 탄식 밤 그늘에 숨긴다.
고생의 무늬 그 몸에 새긴 채
옛날 즐겁던 우물 길
그리운 물동이
배추밭 이랑이 흘려둔
다복한 이야기들
지금은 지나 온 고향의 저녁연기
기억에 아람이 피어났다 사라지는
한가한 이야기의 끝처럼
저 별이 빛나고 새롭게
가난한 창 안에 밤새도록
그 여인의 빈 잔을 채우리니
생명이 좀먹어 마지막 숨질 때
그는 한갓 저녁 숲 위에 엎드려
헐린 치마귀로 신(神)의 음성을 모으리.
◈ 하수(河水)로 간다
고독은 드디어 언어를 잃고
깊은 숲에 잠든다.
지나가는 바람도
흘러내리는 달빛도
그 얼굴에 검은 침묵을 깃들일 뿐.
수많은 가지 새로
휘뿌리는 별빛도
이 밤엔 오직 한적하여
그리움은 마음에서 숨진다.
베개에 지친 피곤
갈하여 떠오를 제
스며오는 물소리 물소리
멀고 긴 골짜기로
저 혼자 흘러가는 물소리
눈 감으면 이 마음 고요한 품에
안기어 지나가는 듯 가까운 그 소리
나는 문득 깨어
아무도 없는 하수로 간다.
가시덤불 어두운 숲으로
나는 달려달려 새벽으로 간다.
물은 맑은지도 모르고
물은 흐린지도 모르고
나는 마음의 슬픈 장미를 살리려
물가로 달리노라, 아무도 모르게
◈ 사랑은 슬픔이 아니에요
사랑한다고 슬퍼하지 말아요.
사랑은 슬픔이 아니에요.
이제는 잊으세요. 그의 목소리는
하나의 추억일 뿐이에요.
지워야 해요. 그의 그림자는
스쳐지나가는 바람이었으니까요.
그는 내 앞에서 바로 서지 못했어요.
깊은 뿌리가 없었기 때문이죠.
화초 같았을 뿐이에요.
한철 예쁘게 피었을 뿐
계절이 바뀌면 의미가 없어요.
슬퍼하지 마세요.
사랑은 슬픔이 아니에요.
◈ 꺼진 촛불
그는 나에게 흰 수건으로 싼
가느다란 촛대를 보내며
그 불이 영원히 살아있을 것이라
내 귀에 속삭이고 갔다.
마음 속 향로 위에
그가 보낸 촛대를 조심히 세웠건만
한 폭의 시절 한 고개의 산도 넘기 전
촛불은 새까맣게 꺼지고 말았네.
그대가 주신 촛불이
오늘엔 험한 바람에 꺼졌습니다.
가슴에 타오르는 따뜻한 피도
지금은 싸늘히 식었습니다.
◈ 그리움
바람소리 들 위에 헤엄질치고
빈방 설렌 가슴 홀로 떠돌아
어둠 위로 그 물결 가엾은 생각이여
북성이라 밤하늘은 쓸쓸도 하이.
한숨 섞인 이 한밤 구름가에 떠돌듯이
잃어진 옛 벗의 마음을 찾아보노니
그 옛날 정답던 내 어릴 때 짝이
오늘은 어느 곳에서 세월을 보내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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