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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詩 같은 삶을 위하여
☞ 문학의 뜨락

신경림 시 모음

by 石右 尹明相 2022. 7. 15.

 

 

신경림 시인(1936~ ). 충북 충주.

동국대학교 영문학과를 졸

1956<문학예술>갈대, 墓碑등이 추천되어 등단.

대표작 : , 낙타, 바람의 풍경, 가난한 사랑노래 등

수상 : 대산문학상, 단재문학상, 은관문화훈장

 

 

신경림 시 모음

 

 

가난한 사랑 노래

-이웃의 한 젊은이를 위하여

 

가난하다고 해서 외로움을 모르겠는가

너와 헤어져 돌아오는

눈 쌓인 골목길에 새파랗게 달빛이 쏟아지는데

 

가난하다고 해서 두려움이 없겠는가

두 점을 치는 소리

방범대원의 호각 소리 메밀묵 사려 소리에

눈을 뜨면 멀리 육중한 기계 굴러가는 소리

 

가난하다고 해서 그리움을 버렸겠는가

어머님 보고 싶소 수없이 뇌어 보지만,

집 뒤 감나무에서 까치밥으로 하나 남았을

새빨간 감 바람 소리도 그려 보지만

 

가난하다고 해서 사랑을 모르겠는가

내 볼에 와 닿던 네 입술의 뜨거움

사랑한다고 사랑한다고 속삭이던 네 숨결

돌아서는 내 등 뒤에 터지던 네 울음

 

가난하다고 해서 왜 모르겠는가

가난하기 때문에 이것들을

이 모든 것들을 버려야 한다는 것을

 

 

 

갈대

 

언제부턴가 갈대는 속으로

조용히 울고 있었다.

그런 어느 밤이었을 것이다. 갈대는

그의 온몸이 흔들리고 있는 것을 알았다.

 

바람도 달빛도 아닌 것,

갈대는 저를 흔드는 것이 제 조용한 울음인 것을

까맣게 몰랐다.

산다는 것은 속으로 이렇게

조용히 울고 있는 것이란 것을

그는 몰랐다.

 

 

 

나무1 지리산에서

 

나무를 길러본 사람만이 안다

반듯하게 잘 자란 나무는 제대로 열매를 맺지 못한다는 것을.

너무 잘나고 큰 나무는

제 치레하느라 오히려 좋은 열매를 갖지 못한다는 것을.

 

한 군데쯤 부러졌거나 가지를 친 나무에

또는 못나고 볼품없이 자란 나무에

보다 실하고 단단한 열매가 맺힌다는 것을

나무를 길러본 사람만이 안다

 

우쭐대며 웃자란 나무는 이웃 나무가 자라는 것을 가로막는다는 것을.

햇빛과 바람을 독차지해서

동무 나무가 꽃 피고 열매 맺는 것을 훼방한다는 것을.

그래서 뽑거나 베어 버릴 수밖에 없다는 것을

사람이 사는 일이 어찌 꼭 이와 같을까만.

 

 

 

나무 2 -늙은 광부 김충선 형에게

 

한자리에 붙박혀서는

살지 못하는 나무가 있다

한자리에 뿌리박고는

자라지 못하는 나무가 있다

잎이 시들고 줄기가

뒤틀리는 나무가 있다

때로는 옮겨주고 또 때로는

흙도 갈아주어야

제대로 꽃도 피고

열매를 맺는 나무가 있다

나보다도 더 많이 세상을

떠돌면서 살아온 나의 친구야

 

 

 

우리 동네 느티나무들

 

산비알*에 돌밭에 저절로 나서

저희들끼리 자라면서

재재발거리고 떠들어 쌓고

밀고 당기고 간지럼질도 시키고

시새우고 토라지고 다투고

시든 잎 생기면 서로 떼어 주고

아픈 곳은 만져도 주고

끌어안기도 하고 기대기도 하고

이렇게 저희들끼리 자라서는

늙으면 동무나무 썩은 가질랑

슬쩍 잘라 주기도 하고

세월에 곪고 터진 상처는

긴 혀로 핥아 주기도 하다가

열매보다 아름다운 이야기들을

머리와 어깨와 다리에

가지와 줄기에

주렁주렁 달았다가는

별 많은 밤을 골라 그것들을

하나하나 떼어 온 고을에 뿌리는

우리 동네 늙은 느티나무들

 

*산비알: ‘산비탈의 방언.

 

 

 

다시 느티나무가

 

고향집 앞 느티나무가

터무니없이 작아 보이기 시작한 때가 있다

그때까지는 보이거나 들리는 것들이

문득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

나는 잠시 의아해하기는 했으나

내가 다 커서거니 여기면서

이게 다 세상 사는 이치라고 생각했다

 

오랜 세월이 지나 고향엘 갔더니

고향집 앞 느티나무가 옛날처럼 커져 있다

내가 늙고 병들었구나 이내 깨달았지만

내 눈이 이미 어두워지고 귀가 멀어진 것을

나는 서러워하지 않았다

 

다시 느티나무그 커진 눈에

세상이 너무 아름다웠다

눈이 어두워지고 귀가 멀어져

오히려 세상의 모든 것이 더 아름다웠다

 

 

 

더딘 느티나무

 

할아버지는 두루마기에 지팡이를 짚고

훠이훠이 바람처럼 팔도를 도는 것이 꿈이었다

집에서 장터까지 장터에서 집까지 비칠걸음을 치다가

느티나무 한그루를 심고 개울을 건너가 묻혔다

할머니는 산을 넘어 대처로 나가 살겠노라 노래삼았다

가마솥을 장터까지 끌고 나가 틀국수집을 하다가

느티나무가 다섯자쯤 자라자 할아버지 곁에 가 묻혔다

아버지는 큰돈을 잡겠다며 늘 허황했다

광산으로 험한 장사로 노다지를 찾아 허둥댄 끝에

안양 비산리 산비알집에 중풍으로 쓰러져 앓다가

터덜대는 장의차에 실려 할아버지 발치에 가 누웠다

그 사이 느티나무는 겨우 또 다섯자가 자랐다

내 꿈은 좁아빠진 느티나무 그늘에서 벗어나는 것이었다

그래서 강을 건너 산을 넘어 한껏 내달려 스스로

할아버지와 할머니와 아버지와 다른 사람이 되었다

나는 그런 자신이 늘 대견하고 흐뭇했다

하지만 나도 마침내 산을 넘어 강을 건너 하릴없이

할아버지와 할머니와 아버지 발치에 가 묻힐 때가 되었다

나는 그것이 싫어 들입다 내달리지만

느티나무는 참 더디게도 자란다

 

 

 

수유나무에 대하여

 

네가 살아온 나날을 누가

어둠뿐이었다고 말하는가

몸통 군데군데 썩어

흉한 상처 거멓게 드러나고

팔다리 여기저기 잘리고 문드러져

온몸이 일그러지고 뒤틀렸지만

터진 네 살갗 들치고

바람과 노을을 동무해서

어깨와 등과 손끝에

자잘한 꽃들 노랗게 피어나는데

비록 꽃향기 온 들판을 덮거나

산을 넘고 바다를 건더지는 못해도

노란 꽃잎 풀 속에 떨어지면

옛얘기보다 더 애달픈

초저녁 풀벌레의 노랫소리가 되겠지

누가 말하는가 이 노래 듣는 이

오직 하늘과 별뿐이라고

 

 

 

다시 수유나무에 대하여- 전우익 선생에게

 

사람들이 한결같이 귀가 없어 남의 말은 듣지 못하고

오직 입만 있어 제 말만 소리 높여 외치는 세상에서

혼자서만 넓고 큰 귀를 가지고 있어 이 집 저 집

담 너머로 기웃거리며 달고 신 사랑애기에 미소짓기도 하고

땀에 젖은 짜증을 듣고 때에 절은 한숨도 마주하다가

문듣 제 몸에 달린 새빨간 열매 한줌 훑어 던져주는

지금도 어렸을 때처럼 온 몸이 노란 수유꽃과

새파란 잎새들로 덮여 있는 이 시대의 늙은 산수유나무

 

 

 

나목

 

나무들이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서서

하늘을 향해 길게 팔을 내뻗고 있다

밤이면 메마른 손끝에 아름다운 별빛을 받아

드러낸 몸통에서 흙 속에 박은 뿌리까지

그것으로 말끔히 씻어내려는 것이겠지

터진 살갗에 새겨진 고달픈 삶이나

뒤틀린 허리에 밴 구질구질한 나날이야

부끄러울 것도 숨길 것도 없이

한밤에 내려 몸을 덮는 눈 따위

흔들어 시원스레 털어 다시 알몸이 되겠지만

알고 있을까 그들 때로 서로 부둥켜안고

온몸을 떨며 깊은 울음을 터트릴 때

멀리서 같이 우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늙은 소나무 - 밀양에서

 

나이 쉰을 넘어야

비로소 여자를 안다고

 

나이 쉰을 넘어야 비로소

사랑을 안다고

 

나이 쉰을 넘어야

비로소 세상을 안다고

 

늙은 소나무들은

이렇게 말하지만

 

바람소리 속에서

이렇게 말하지만

 

 

 

나무여, 큰 나무여

 

이 큰 나무를 키워온 것은

비와 햇빛만이 아니었다

뿌리를 타고 오르는

맑고 시원한 물줄기만은 아니었다.

뿌리를 몸통을 가지를 이루면서

얽히고설켜 서로 붙안고 뒹굴면서

때로는 종주먹질 다툼질도 하는

수만 수십만의 숨결이 있었으니,

비와 햇빛과 함께 물줄기와 함께

이 큰 나무를 키워온 것은

이 숨결이었다 이 뜨거움이었다.

 

이 숨결들의 등살에 몸부림에

나무는 자라면서 몸살을 앓기도 하고

아예 여러 날 몸져 눕기도 하고

잔가지를 수없이 잃기도 했으나

이때마다 나무는 새롭게 푸르고

한 뼘씩 한 발씩 더 자랐다.

보라, 숨결들은 굵은 몸통에

불거져 있다, 가지 끝에 우뚝 솟아 있다.

온 나무에서 아름다움으로

잔결의 아름다움으로 피고 있다.

 

어려서는 발길질에

이웃 도둑들의 윽발지름에

새벽 잘리고 가지 꺽여

앙상하게 뿌리만으로 버티기도 했고

또 전쟁통에는 뿌리째 뽑혀

심한 목마름에 협박이기도 했다.

이때마다 숨결들은 더욱 뜨거워지고

이때마다 숨결들은 더욱 단단해졌다.

비와 햇빛을 불러올 사람들이

오히려 그것을 막아서고

물줄기를 빼돌릴 때도

숨결들은 더욱 올곧고 굳세여졌다.

 

이 숨결들이 만들어놓은

그 등살과 몸부림이 만들어놓은

그 생체기 그 흠집과 함께

나무는 자라고 큰 나무가 되었다.

그리하여 이제 숨결들은

나무를 타고 하늘 끝까지 오르지만

아니다, 이 큰 나무 더욱 크게 하는 것은

하늘만도 땅만도 아니다

짓궂은 장난질로 나무를 온통 뒤흔들고

때로는 휘청거리게도 하면서

서로 얽히고설켜 굳게 버티고 섰는

수만 수십만의 숨결이 있으니.

하늘과 땅과 함께

이 큰 나무 더욱 크게 하는

숨결들을 보라, 나무를 타고

하늘 끝까지 오르는 뜨거움을 보라.

 

 

 

나무를 위하여

 

어둠이 오는것이 왜 두렵지 않으랴

불어닥치는 비바람이 왜 무섭지 않으랴

잎들 더러 썩고 떨어지는 어둠 속에서

가지들 휘고 꺽어지는 비바람 속에서

보인다 꼭 잡은 너희들 작은 손들이

손을 타고 흐르는 숨죽인 흐니낌이

어둠과 비바람까지도 삭여서

더 단단히 뿌리와 몸통을 키운다면

너희 왜 모르랴 밝은 날 어깨와 가슴에

더 많은 꽃과 열매를 달게 되리란걸

산바람 바닷바람보다도 짓궂은 이웃들의

비웃음과 발길질이 더 아프고 서러워

산비알과 바위너설에서 몸 움추린 나무들아

다시 고개 들고 절로 터져나올 잎과 꽃으로

숲과 들판에 떼지어 설 나무들아

 

 

 

떠도는 자의 노래

 

외진 별정우체국에 무엇인가를 놓고 온 것 같다

어느 삭막한 간이역에 누군가를 버리고 온 것 같다

그래서 나는 문득 일어나 기차를 타고 가서는

눈이 펑펑 쏟아지는 좁은 골목을 서성이고

쓰레기들이 지저분하게 널린 저잣거리도 기웃댄다

놓고 온 것을 찾겠다고

 

아니, 이미 이 세상에 오기 전 저 세상 끝에

무엇인가를 나는 놓고 왔는지도 모른다

쓸쓸한 나룻가에 누군가를 버리고 왔는지도 모른다

저 세상에 가서도 다시 이 세상에

버리고 간 것을 찾겠다고 헤매고 다닐는지도 모른다

 

 

 

그 길은 아름답다

 

산벚꽃이 하얀 길을 보며 내 꿈은 자랐다.

언젠가는 저 길을 걸어 넓은 세상으로 나가

많은 것을 얻고 많은 것을 가지리라.

착해서 못난 이웃들이 죽도록 미워서.

고샅의 두엄더미 냄새가 꿈에서도 싫어서.

 

그리고는 뉘우쳤다 바깥으로 나와서는.

갈대가 우거진 고갯길을 떠올리며 다짐했다.

이제 거꾸로 저 길로 해서 돌아가리라.

도시의 잡답에 눈을 감고서.

잘난 사람들의 고함소리에 귀를 막고서.

 

그러다가 내 눈에서 지워버리지만.

벚꽃이 하얀 길을, 갈대가 우거진 그 고갯길을.

내 손이 비었다는 것을 깨달으면서.

내 마음은 더 가난하다는 것을 비로소 알면서.

거리를 날아다니는 비닐봉지가 되어서

잊어버리지만. 이윽고 내 눈앞에 되살아나는

 

그 길은 아름답다. 넓은 세상으로 나가는

길이 아니어서, 내 고장으로 가는 길이 아니어서

아름답다. 길 따라 가면 새도 꽃도 없는

황량한 땅에 이를 것만 같아서.

길 끝에서 험준한 벼랑이 날 기다릴 것만 같아서.

내 눈앞에 되살아나는 그 길은 아름답다.

 

 

 

먼 데, 그 먼 데를 향하여

 

아주 먼 데.

말도 통하지 않는, 다시 돌아올 수 없는,

그 먼 데까지 가자고.

 

어느 날 나는 집을 나왔다.

걷고 타고, 산을 넘고 강을 건너고,

몇 날 몇 밤을 지나서.

 

이쯤은 꽃도 나무도 낯이 설겠지,

새소리도 짐승 울음소리도 귀에 설겠지,

짐을 풀고

 

찾아들어간 집이 너무 낯익어,

마주치는 사람들이 너무 익숙해.

 

사람 사는 곳

어디인들 크게 다르랴,

아내 닮은 사람과 사랑을 하고

자식 닮은 사람들과 아웅다웅 싸우다가

 

문득 고개를 들고 보니,

매화꽃 피고 지기 어언 십년이다.

어쩌면 나는 내가 기껏 떠났던 집으로

되돌아온 것은 아닐까.

아니 당초 집을 떠난 일이 없는지도 모르지

그래서 다시,

 

아주 먼 데.

말도 통하지 않는, 다시 돌아올 수 없는,

그 먼 데까지 가자고.

 

나는 집을 나온다.

걷고 타고, 산을 넘고 강을 건너고,

몇 날 몇 밤을 지나서.

 

 

 

파도

 

어떤 것은 내 몸에 얼룩을 남기고

어떤 것은 손발에 흠집을 남긴다

가슴팍에 단단한 응어리를 남기고

등줄기에 푸른 상채기를 남긴다

어떤 것은 꿈과 그리움으로 남는다

아쉬움으로 남고 안타까움으로 남는다

고통으로 남고 미움으로 남는다

그러다 모두 하얀 파도가 되어 간다

바람에 몰려 개펄에 내팽개쳐지고

배다리에서는 육지에 매달리기도 하다가

내가 따라갈 수 없는 수평선 너머

그 먼 곳으로 아득히 먼 곳으로

모두가 하얀 파도가 되어 간다

 

 

 

파도(여의도의 '농민시위'를 보며)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저 바다 언제까지나

잠들어 있으리라 생각했으니.

얼마나 황홀한 일인가

저 파도 일제히 일어나

아우성치고 덤벼드는 것 보면.

얼마나 신바람 나는 일인가

그 성난 물결 단번에

이 세상의 온갖 더러운 것

씻어내리리 생각하면.

 

 

 

낙타

 

낙타를 타고 가리라, 저승길은

별과 달과 해와

모래밖에 본 일이 없는 낙타를 타고.

세상사 물으면 짐짓, 아무것도 못 본 체

손 저어 대답하면서,

슬픔도 아픔도 까맣게 잊었다는 듯.

누군가 있어 다시 세상에 나가란다면

낙타가 되어 가겠다 대답하리라.

별과 달과 해와

모래만 보고 살다가,

돌아올 때는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사람 하나 등에 업고 오겠노라고.

무슨 재미로 세상을 살았는지도 모르는

가장 가엾은 사람 하나 골라

길동무 되어서.

 

 

 

어머니와 할머니의 실루엣

 

어려서 나는 램프불 밑에서 자랐다,

밤중에 눈을 뜨고 내가 보는 것은

재봉틀을 돌리는 젊은 어머니와

실을 감는 주름진 할머니뿐이었다.

나는 그것이 세상의 전부라고 믿었다.

조금 자라서는 칸델라불 밑에서 놀았다,

밖은 칠흑 같은 어둠

지익지익 소리로 새파란 불꽃을 뿜는 불은

주정하는 험상궂은 금점꾼들과

셈이 늦는다고 몰려와 생떼를 쓰는 그

아내들의 모습만 돋움새겼다.

소년 시절은 전등불 밑에서 보냈다,

가설극장의 화려한 간판과

가겟방의 휘황한 불빛을 보면서

나는 세상이 넓다고 알았다, 그리고

 

나는 대처로 나왔다.

이곳저곳 떠도는 즐거움도 알았다,

바다를 건너 먼 세상으로 날아도 갔다,

많은 것을 보고 많은 것을 들었다.

하지만 멀리 다닐수록, 많이 보고 들을수록

이상하게도 내 시야는 차츰 좁아져

내 망막에는 마침내

재봉틀을 돌리는 젊은 어머니와

실을 감는 주름진 할머니의

실루엣만 남았다.

 

내게는 다시 이것이

세상의 전부가 되었다.

 

 

 

봄의 노래

 

하늘의 달과 별은

소리내어 노래하지 않는다

들판에 지새워 피는 꽃들은

말을 가지고 말하지 않는다

서로 사랑한다고는

 

하지만 우리는 듣는다

달과 별의 아름다운 노래를

꽃들의 숨가쁜 속삭임을

귀보다 더 높은 것을 가지고

귀보다 더 깊은 것을 가지고

 

네 가슴에 이는 뽀얀

안개를 본다 하얗게 부서지는

파도 소리를 듣는다

눈보다 더 밝은 것을 가지고

가슴보다 더 큰 아픔을 가지고

 

 

 

 

사람들은 자기들이 길을 만든 줄 알지만

길은 순순히 사람들의 뜻을 좇지는 않는다

사람을 끌고 가다가 문득

벼랑 앞에 세워 낭패시키는가 하면

큰물에 우정 제 허리를 동강 내어

사람이 부득이 저를 버리게 만들기도 한다

사람들은 이것이 다 사람이 만든 길이

거꾸로 사람들한테 세상 사는

슬기를 가르치는 거라고 말한다.

길이 사람을 밖으로 불러내어

온갖 곳 온갖 사람살이를 구경시키는 것도

세상 사는 이치를 가르치기 위해서라고 말한다

그래서 길의 뜻이 거기 있는 줄로만 알지

길이 사람을 밖에서 안으로 끌고 들어가

스스로를 깊이 들여다보게 한다는 것을 모른다.

길이 밖으로가 아니라 안으로 나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에게만 길은 고분고분해서

꽃으로 제 몸을 수놓아 향기를 더하기도 하고

그늘을 드리워 사람들이 땀을 식히게도 한다

그것을 알고 나서야 사람들은 비로소

자기들이 길을 만들었다고 말하지 않는다

 

 

 

 

길을 가다가 눈발치는 산길을 가다가

눈 속에 맺힌 새빨간 열매를 본다

잃어버린 옛 얘기를 듣는다

어릴 적 멀리 날아가버린 노래를 듣는다

 

길을 가다가 갈대 서걱이는 강길을 가다가

빈 가지에 앉아 우는 하얀 새를 본다

헤어진 옛 친구를 본다

친구와 함께 잊혀진 꿈을 찾는다

 

길을 가다가 산길을 가다가

산길 강길 들길을 가다가

내 손에 가득 들린 빨간 열매를 본다

내 가슴속에서 퍼덕이는 하얀새

 

그 날개 소리를 듣는다

그것들과 어우러진 내 노래 소리를 듣늗다

길을 가다가

길을 가다가

 

 

 

그림

 

옛사람의 그림 속으로

들어가고 싶은 때가 있다

배낭을 맨 채 시적시적

걸어 들어가고 싶은 때가 있다

주막집도 들어가 보고

색시들 수놓는 골방문도 열어보고

대장간에서 풀무질도 해보고

그러다가 아예 나오는 길을

잃어버리면 어떨까

옛사람의 그림 속에

갇혀버리면 어떨까

문득 깨달을 때가 있다

내가 오늘의 그림 속에

갇혀 있다는 것을

나가는 길을 잃어버렸다는 것을

두드려도 발버둥 쳐도

문도 길도

찾을 수 없다는 것을

오늘의 그림에서

빠져나가고 싶을 때가 있다

배낭을 메고 밤차에 앉아

지구 밖으로 훌쩍

떨어져나가고 싶을 때가 있다

 

 

 

너희 사랑 - 누이를 위하여

 

낡은 교회 담벼락에 쓰여진

자잘한 낙서에서 너희 사랑은 싹텄다

흙바람 맵찬 골목과 불기 없는

자취방을 오가며 너희 사랑은 자랐다

가난이 싫다고 이렇게 살고 싶지는 않다고

반 병의 소주와 한 마리 노가리를 놓고

망설이고 헤어지기 여러 번이었지만

뉘우치고 다짐하기 또 여러 번이었지만

망설임과 헤매임 속에서 너희 사랑은

굳어졌다 새 삶 찾아나서는

다짐 속에서 너희 사랑은 깊어졌다

돌팔매와 최루탄에 찬 마룻바닥과

푸른옷에 비틀대기도 했으나

소주집과 생맥주집을 오가며

다시 너희 사랑은 다져졌다

그리하여 이제 너희 사랑은

낡은 교회 담벼락에 쓰여진

낙서처럼 눈에 익은 너희 사랑은

단비가 되어 산동네를 적시는구나

훈풍이 되어 산동네를 누비는구나

골목길 오가며 싹튼 너희 사랑은

새 삶 찾아 나서는 다짐 속에서

깊어지고 다져진 너희 사랑은

 

 

 

동해바다

 

친구가 원수보다 더 미워지는 날이 많다

티끌만한 잘못이 맷방석만하게

동산만하게 커 보이는 때가 많다

그래서 세상이 어지러울수록

남에게는 엄격해지고 내게는 너그러워지나 보다

돌처럼 작아지고 굳어지나 보다

 

멀리 동해바다를 내려다보며 생각한다

널따란 바다처럼 너그러워질 수는 없을까

깊고 짙푸른 바다처럼

감싸고 끌어안고 받아들일 수는 없을까

스스로는 억센 파도로 다스리면서

제 몸은 맵고 모진 매로 채찍질하면서

 

 

 

산에 대하여

 

산이라 해서 다 크고 높은 것은 아니다

다 험하고 가파른 것은 아니다

어떤 산은 크고 높은 산 아래

시시덕거리고 웃으며 나지막히 엎드려 있고

또 어떤 산은 험하고 가파른 산자락에서

슬그머니 빠져 동네까지 내려와

부러운 듯 사람 사는 꼴을 구경하고 섰다

그리고는 높은 산을 오르는 사람들에게

순하디 순한 길이 되어주기도 하고

남의 눈을 꺼리는 젊은 쌍에게 짐즛

따뜻한 사랑의 숨을 자리가 되어주기도 한다

그래서 낮은 산은 내 이웃이던

간난이네 안방 왕골자리처럼 때에 절고

그 누더기 이불처럼 지린내가 배지만

눈개비나무 찰피나무며 모싯대 개쑥에 덮여

곤줄박이 개개비 휘파람새 노랫소리를

듣는 기쁨은 낮은 산만이 안다

사람들이 서로 미워서 잡아죽일 듯

이빨을 갈고 손톱을 세우다가도

칡넝쿨처럼 머루넝쿨처럼 감기고 어우러지는

사람 사는 재미는 낮은 산만이 안다

사람이 다 크고 잘난 것만이 아니듯

다 외치며 우뚝 서 있는 것이 아니듯

산이라 해서 모두 크고 높은 것은 아니다

모두 흰구름을 겨드랑이에 끼고

어깨로 바람 맞받아치며 사는 것은 아니다

 

 

 

아버지의 그늘

 

툭하면 아버지는 오밤중에

취해서 널브러진 색시를 업고 들어왔다,

어머니는 입을 꾹 다문 채 술국을 끓이고

할머니는 집안이 망했다고 종주먹질을 해댔지만,

며칠이고 집에서 빠져나가지 않는

값싼 향수내가 나는 싫었다

아버지는 종종 장바닥에서

품삯을 못 받은 광부들한테 멱살을 잡히기도 하고,

그들과 어울려 핫바지춤을 추기도 했다,

빚 받으러 와 사랑방에 죽치고 앉아 내게

술과 담배 심부름을 시키는 화약장수도 있었다.

 

아버지를 증오하면서 나는 자랐다,

아버지가 하는 일은 결코 하지 않겠노라고

이것이 내 평생의 좌우명이 되었다,

나는 빚을 질 일을 하지 않았다,

취한 색시를 업고 다니지 않았고,

노름으로 밤을 지새지 않았다,

아버지는 이런 아들이 오히려 장하다 했고

나는 기고만장했다, 그리고 이제 나도

아버지가 중풍으로 쓰러진 나이를 넘었지만,

 

나는 내가 잘못했다고 생각한 일은 없다,

일생을 아들의 반면교사로 산 아버지를

가엽다고 생각한 일도 없다, 그래서

나는 늘 당당하고 떳떳했는데 문득

거울을 쳐다보다가 놀란다, 나는 간 곳이 없고

나약하고 소심해진 아버지만이 있어서,

취한 색시를 안고 대낮에 거리를 활보하고,

호기 있게 광산에서 돈을 뿌리던 아버지 대신,

그 거울 속에는 인사동에서도 종로에서도

제대로 기 한번 못 펴고 큰 소리 한번 못 치는

늙고 초라한 아버지만이 있다.

 

 

 

 

나이 들어 눈 어두우니 별이 보인다

반짝반짝 서울 하늘에 별이 보인다

 

하늘에 별이 보이니

풀과 나무 사이에 별이 보이고

풀과 나무 사이에 별이 보이니

사람들 사이에 별이 보인다

 

반짝반짝 탁한 하늘에 별이 보인다

눈 밝아 보이지 않던 별이 보인다

 

 

 

이런 내가 되어야 한다

 

일상에 빠지지 않고

대의를 위해 나아가며

억눌리는 자에게 헌신적이며

억누르는 자에게 용감하며

스스로에게 비판적이며

동지에 대한 비판도 망설이지 않고

목숨을 걸고 치열히

순간순간을 불꽃처럼 강렬히 여기며

날마다 진보하며

성실성에 있어

동지들에게 부끄럽지 않고

자신의 모습을 정확히 보되

새로운 모습으로 바꾸어 나갈 수 있으며

진실한 용기로 늘 뜨겁고

언제나 타성에 빠지는 것을 경계하며

모든 것을 창의적으로 바꾸어내며

어떠한 고통도 이겨낼 수 있고

내가 잊어서는 안 될 이름을 늘 기억하며

내 작은 힘이 타인의 삶에

용기를 줄 수 있는 배려를 잊지 말고

한 순간도 머무르지 않고

끊임없는 역사와 함께 흐를 수 있는

그런 내가 되어야 한다

 

 

 

이쯤에서

 

이쯤에서 돌아갈까 보다

차를 타고 달려온 길을

터벅터벅 걸어서

보지 못한 꽃도 구경하고

듣지 못한 새소리도 들으면서

찻집도 기웃대고 술집도 들러야지

낯익은 얼굴들 나를 보고는

다들 외면하겠지

나는 노여워하지 않을 테다

너무 오래 혼자 달려왔으니까

부끄러워하지도 않을 테다

내 손에 들린 가방이 텅 비었더라도

그동안 내가 모으고 쌓은 것이

한줌의 모래밖에 안된다고

새삼 알게 되더라도

 

 

 

동해바다

 

친구가 원수보다 더 미워지는 날이 많다

티끌만한 잘못이 맷방석만 하게

동산만 하게 커 보이는 때가 많다

그래서 세상이 어지러울수록

남에게는 엄격해지고 내게는 너그러워지나 보다

돌처럼 작아지고 굳어지나 보다

 

멀리 동해바다를 내려다보며 생각한다

널따란 바다처럼 너그러워질 수는 없을까

깊고 짙푸른 바다처럼

감싸고 끌어안고 받아들일 수는 없을까

스스로는 억센 파도로 다스리면서

제 몸은 맵고 모진 매로 채찍질하면서

 

 

 

정릉동 동방주택에서 길음시장까지

 

정릉동 동방주택에서 길음시장까지, 이것이

어머니가 서른 해 동안 서울 살면서 오간 길이다.

약방에 들러 소화제를 사고

떡집을 지나다가 잠깐 다리쉼을 하고

동향인 언덕바지 방앗간 주인과 고향 소식을 주고받다가,

마지막엔 동태만을 파는 좌판 할머니한테 들른다.

그이 아들은 어머니의 손자와 친구여서

둘은 서로 아들 자랑 손자 자랑도 하고 험담도 하고

그러다보면 한나절이 가고,

동태 두어 마리 사들고 갔던 길을 되짚어 돌아오면

어머니의 하루는 저물었다.

강남에 사는 딸과 아들한테 한번 가는 일이 없었다.

정릉동 동방주택에서 길음시장까지 오가면서도

만나는 사람이 너무 많고

듣고 보는 일이 이렇게 많은데

더 멀리 갈 일이 무엇이냐는 것일 텐데.

 

그 길보다 백배 천배는 더 먼,

어머니는 돌아가셔서, 그 고향 뒷산에 가서 묻혔다.

집에서 언덕밭까지 다니던 길이 내려다보이는 곳,

마을길을 지나 신작로를 질러 개울을 건너 언덕밭까지,

꽃도 구경하고 새소리도 듣고 물고기도 들여다보면서

고향살이 서른 해 동안 어머니는 오직 이 길만을 오갔다.

등 너머 사는 동생한테서

놀러 가라고 간곡한 기별이 와도 가지 않았다.

이 길만 오가면서도 어머니는 아름다운 것

신기한 것 지천으로 보았을 게다.

 

어려서부터 집에 붙어 있지 못하고

미군 부대를 따라 떠돌기도 하고

친구들과 어울려 먼 지방을 헤매기도 하면서,

어머니가 본 것 수천 배 수만 배를 보면서,

나는 나 혼자만 너무 많은 것을 보는 것을 죄스러워했다.

하지만 일흔이 훨씬 넘어

어머니가 다니던 그 길을 걸으면서,

약방도 떡집도 방앗간도 동태 좌판도 없어진

정릉동 동방주택에서 길음시장까지 걸으면서,

마을길도 신작로도 개울도 없어진

고향집에서 언덕밭까지의 길을 내려다보면서,

메데진에서 디트로이트에서 이스탄불에서 끼예프에서

내가 볼 수 없었던 많은 것을

어쩌면 어머니가 보고 갔다는 걸 비로소 안다.

 

정릉동 동방주택에서 길음시장까지,

서른 해 동안 어머니가 오간 길은 이곳뿐이지만

 

 

 

또 한 번 겨울을 보낸 자들은

 

살아서 남은 자들은 기쁨에 들떠

창을 열어 따스한 바람을 맞아들고

맑은 햇살을 손에 받고

문득 잊었던 이름 생각나면 짐짓

부끄럽고 슬픈 얼굴을 하고

밤이면 서로의 몬 뜨겁게 탐하며

싹으로 트고 꽃으로 피기 위해서

머지않아 가진 것 다져 열매도 맺어야지

지상에서 가장 크고 단 열매를

흙이 되어버린 이들의 뜨거운 피를

잊지 말자고 다짐하면서

또 닥칠 비바람을 이기기 위해서

더 단단히 몸을 여미고 죄면서

잊었던 이름 더 까맣게 잊어버리며

살아서 남은 자들은

또 한 번 겨울을 보낸 자들은

 

 

 

세월

 

흙 속을 헤엄치는

꿈을 꾸다가

자갈밭에 동댕이쳐지는

꿈을 꾸다가...

 

지하실 바닥 긁는

사슬소리를 듣다가

무덤 속 깊은 곳의

통곡소리를 듣다가...

 

창문에 어른대는

하얀 달을 보다가

하늘을 훨훨 나는

꿈을 꾸다가

 

 

 

새벽은 아우성 속에서만

 

새벽은 어둠 속에서 태어난다

길고 오랜 비바람 속에서 태어나고

백 날 백 밤 온 세상을 뒤덮는

진눈깨비 속에서 태어난다

새벽은 어둠을 몰아내는

싸움 속에서 태어난다

비바람을 야윈 어깨로 막는

안간힘 속에서 태어나고

진눈깨비 맨가슴으로 받는

흐느낌 속에서 태어난다

 

새벽은 먼저 산길에 와서

굴 속에 잠든 다람쥐를 간지르고

풀잎을 덮고 누운

풀벌레들과 장난질치지만

새벽은 다시 산동네에도 와서

가진 것 날선 도끼밖에 없는

늙고 병든 나무꾼을 깨우고

들일에 지쳐 마룻바닥에 쓰러진

에미 없는 그의 딸을 어루만지지만

새벽은 이제 장거리에 와서

장사 채비에 신바람이 난

주모의 치맛자락에서 춤을 추고

해장국집에 모여 떠들어대는

장꾼들과 동무가 되기도 하지만

 

새벽은 아우성 속에서만 밝는다

어둠을 영원히 몰아내리라

굳은 다짐 속에서만 밝는다

비바람 진눈깨비 다시 못 오리라

힘껏 낀 어깨동무 속에서만 밝는다

다람쥐도 풀벌레도 산짐승도

늙고 병든 나무꾼도 장꾼도

아직 잠에서 깨지 않은 사람들도

모두 하나로 어깨동무를 하고

크고 높이 외치는

아우성 속에서만 밝는다

 

 

 

 

기둥을 세우고 서까래를 얹는다

벽을 들여 바르고 지붕을 세운다

이렇게 스스로 만든 집에서 한 30

나는 자못 만족해서

글도 쓰고 책도 읽는다

 

그러다 세월이 지나 그 집이

비도 바람도 막지 못하게 되었을 때

나는 비로소 허물 생각을 한다

지붕을 거두고 벽을 턴다

서까래를 치우고 기둥을 들어낸다

 

그러고는 이 나라를 반 바퀴는 도는

멀고 지루한 여행을 떠난다

하지만 돌아와 나는 절망한다

기둥도 벽도 형체도 없는 그 집이

오두마니 제자리에 서 있는 것을 보고

 

 

 

조선족의 달

 

달이 시원스레 옷을 벗었다

첨벙첨벙 수로 속에 들어가 멱을 감는다

가없는 옥수수밭에 바람이 인다

수로에서 나왔지만 옷이 없다

부끄러운 곳 손으로 가리고 초가집을 찾아 들어가 숨는다

달이 초가집 속에 갇혔다

 

 

 

밤차 : 신림에서

 

세상은 온통

크고 높은 목소리만이 덮어

어느 것이 참이고

어느 것이 거짓인 줄을

가릴 수 없는 세월이 많다

밤차를 탄다

산바람 엉키는 간이역에 내리면

감나무에 매달린 새파란 그믐달

비로소 크고 높은 목소리

귓가에서 걷히면서

작고 낮은 참목소리

서서히 들리기 시작한다

속삭임처럼 흐느낌처럼

멀리서 가까이서 들리기 시작한다

 

 

 

초봄의 짧은 생각 : 영해에서

 

바닷바람은 천리만리

푸른 파도를 타고 넘어와

늙은 솔숲에서 갈갬질을 치며 놀고

나는 기껏 백 리 산길을 걸어와

하얀 모래밭에

작은 아름다움에 취해 누웠다

갈수록 세상은 알 길이 없고

 

 

 

세밑에 오는 눈

 

상처를 어루만지면서

등과 가슴에 묻은 얼룩을 지우면서

세상의 온갖 부끄러운 짓, 너저분한 곳을 덮으면서

깨어진 것, 금간 것을 쓰다듬으면서

파인 길, 골진 마당을 메우면서

 

밝은 날 온 세상을 비칠 햇살

더 하얗게 빛나지 않으면 어쩌나

더 멀리 퍼지지 않으면 어쩌나

솔나무 사이로 불어 닥칠 바람

더 싱그럽지 않으면 어쩌나

걱정하면서

 

창가에 흐린 불빛을 끌어안고

우리들의 울음, 우리들의 이야기를 끌어안고

스스로 작은 울음이 되고 이야기가 되어

상처가 되고 아픔이 되어서

 

 

 

목계장터

 

하늘은 날더러 구름이 되라 하고

땅은 날더러 바람이 되라 하네

청룡 흑룡 흩어져 비 개인 나루

잡초나 일깨우는 잔바람이 되라네

뱃길이라 서울 사흘 목계 나루에

아흐레 나흘 찾아 박가분 파는

가을볕도 서러운 방물장수 되라네

산은 날더러 들꽃이 되라 하고

강은 날더러 잔돌이 되라 하네

산서리 맵차거든 풀 속에 얼굴 묻고

물여울 모질거든 바위 뒤에 붙으라네

민물 새우 끓어 넘는 토방 툇마루

석삼년에 한 이레쯤 천치로 변해

짐 부리고 앉아 쉬는 떠돌이가 되라네

하늘은 날더러 바람이 되라 하고

산은 날더러 잔돌이 되라 하네

 

 

 

새벽안개

 

사랑을 배우고

미움을 익혔다

이웃을 만나고 동무를 사귀고

그리고 더 많은 원수와 마주쳤다

헛된 만남 거짓 웃음에 길들여지고

헤어짐에 때로

새 힘이 솟기도 했으나

 

사랑을 가지고 불을 만드는 대신

미움을 가지고 칼을 세우는 법을

먼저 배웠다

법석대는 장거리에서

저무는 강가에서

 

이제 새롭게 외로움을 알고

그 외로움으로

노래를 만드는 법을 배운다

그 노래로 칼을 세우는 법을 배우고

그 칼을 가지고

바람을 재우는 법을 배운다

새벽안개 속에서

다시 강가에서

 

 

 

파장(罷場)

 

못난 놈들은 서로 얼굴만 봐도 흥겹다

이발소 앞에 서서 참외를 깎고

목로에 앉아 막걸리를 들이키면

모두들 한결같이 친구 같은 얼굴들

호남의 가뭄 얘기 조합 빚 얘기

약장사 기타 소리에 발장단을 치다 보면

왜 이렇게 자꾸만 서울이 그리워지나

어디를 들어가 섰다라도 벌일까

주머니를 털어 색시집에라도 갈까

학교 마당에들 모여 소주에 오징어를 찢다

어느새 긴 여름해도 저물어

고무신 한 켤레 또는 조기 한 마리 들고

달이 환한 마찻길을 절뚝이는 파장

 

 

 

원격지(遠隔地)

 

박서방은 구주에서 왔다 김형은 전라도

어느 바닷가에서 자란 사나이.

시월의 햇살은 아직도 등에 따갑구나.

포장 친 목로에 들어가

전표를 주고 막걸리를 마시자.

이제 우리에겐 맺힌 분노가 있을 뿐이다.

맹세가 있고 그리고 맨주먹이다.

느티나무 아래 자전거를 세워 놓은

면서기 패들에게서 세상 얘기를 듣고.

아아 이곳은 너무 멀구나, 도시의

소음이 그리운 외딴 공사장.

오늘밤엔 주막거리에 나가 섰다를 하자

목이 터지게 유행가를 부르자.

사이렌이 울면 밥장수 아주머니의

그 살찐 엉덩이를 때리고 우리는

다시 구루마를 밀고 간다.

흙먼지를 뒤집어쓰고 밀린 간조날을

꼽아 보고 건조실 앞에서는 개가 짖어 댄다

고추 널린 마당가에서

동네 아이들이 제기를 찬다.

수건으로 볕을 가린 처녀애들은 킬킬대느라

삼태기 속의 돌이 무겁지 않고

십장은 고함을 질러 대고. 이 멀고

외딴 공사장에서는 가을해도 길다.

 

 

 

겨울밤

 

우리는 협동조합 방앗간 뒷방에 모여

묵내기 화투를 치고

내일은 장날. 장꾼들은 왁자지껄

주막집 뜰에서 눈을 턴다.

들과 산은 온통 새하얗구나. 눈은

펑펑 쏟아지는데

쌀값 비료 값 얘기가 나오고

선생이 된 면장 딸 얘기가 나오고.

서울로 식모살이 간 분이는

아기를 뱄다더라. 어떡할거나.

술에라도 취해 볼거나. 술집 색시

싸구려 분 냄새라도 맡아 볼거나.

우리의 슬픔을 아는 것은 우리뿐.

올해에는 닭이라도 쳐 볼거나.

겨울밤은 길어 묵을 먹고.

술을 마시고 물세 시비를 하고

색시 젓갈 장단에 유행가를 부르고

이발소 집 신랑을 다루러

보리밭을 질러가면 세상은 온통

하얗구나. 눈이여 쌓여

지붕을 덮어 다오 우리를 파묻어 다오.

오종대 뒤에 치마를 둘러 쓰고

숨은 저 계집애들한테

연애편지라도 띄워 볼거나.

우리의 괴로움을 아는 것은 우리뿐.

올해에는 돼지라도 먹여 볼거나.

 

 

 

경칩

 

흙 묻은 속옷 바람으로 누워

아내는 몸을 떨며 기침을 했다.

온종일 방고래가 들먹이고

메주 뜨는 냄새가 역한 정미소 뒷방.

십촉 전등 아래 광산 젊은 패들은

밤 이슥토록 철 늦은 섰다판을 벌여

아내 대신 묵을 치고 술을 나르고

풀무를 돌려 방에 군불을 때고.

볏섬을 싣고 온 마차꾼까지 끼어

판이 어울어지면 어느새 닭이 울어

버력을 지러 나갈 아내를 위해 나는

개평을 뜯어 해장국을 시키러 갔다.

경칩이 와도 그냥 추운 촌 장터.

전쟁 통에 맞아 죽은 육발이의 처는

아무한테나 헤픈 눈웃음을 치며

우거지가 많이 든 해장국을 말고.

 

 

 

친구여 네 손아귀에

 

1.

창돌 애비가 죽던 날은 된서리가 내렸다

오동잎이 깔린 기름틀 집 바깥마당

그 한 귀퉁에 그의 시체는 거적에 싸여 뒹굴고

그의 아내는 그 옆에 실신해 누웠다

 

창돌이와 나는 팽이를 돌렸다

무서워서 끝내 돌아가지 못하고

싸전 마당에서 저물도록 팽이만 돌렸다

 

2.

소줏잔을 거머쥔 네 손아귀에 친구여

날카로운 칼날이 숨겨져 있음을 나는 안다

 

상밥집에서 또는 됫술집에서 다시 만났을 때

네 눈 속에 타고 있는 불길을 나는 보았다

네 편이다 아무리 우겨대도

믿지 않는 네 어깨짓을 나는 보았다

 

거적에 싸인 시체 위에 떨어지던 오동잎

친구여 나는 보았다

 

 

 

가을비

 

젖은 나뭇잎이 날아와 유리창에 달라붙는

간이역에는 찻 시간이 돼도 손님이 없다

플라타너스로 가려진 낡은 목조 찻집

차 나르는 소녀의 머리칼에서는 풀냄새가 나겠지

오늘 집에 가면 헌 난로에 불을 당겨

먼저 따끈한 차 한잔을 마셔야지

빗물에 젖은 유행가 가락을 떠밀며

화물차 언덕을 돌아 뒤뚱거리며 들어설 제

붉고 푸른 깃발을 흔드는

늙은 역무원 굽은 등에 흩뿌리는 가을비

 

 

 

농무

 

징이 울린다 막이 내렸다

오동나무에 전등이 매어달린 가설 무대

구경꾼이 돌아가고 난 텅빈 운동장

우리는 분이 얼룩진 얼굴로

학교 앞 소줏집에 몰려 술을 마신다.

답답하고 고달프게 사는 것이 원통하다

꽹과리를 앞장 세워 장거리로 나서면

따라붙어 악을 쓰는 건 쪼무래기들뿐

처녀애들은 기름집 담벽에 붙어 서서

철없이 킬킬대는구나

보름달은 밝아 어떤 녀석은

꺽정이처럼 울부짖고 또 어떤 녀석은

서림이처럼 해해대지만 이까짓

산구석에 처박혀 발버둥친들 무엇하랴

비료값도 안 나오는 농사 따위야

아예 여편네에게나 맡겨 두고

쇠전을 거쳐 도수장 앞에 와 돌 때

우리는 점점 신명이 난다

한 다리를 들고 날나리를 불거나

고갯짓을 하고 어깨를 흔들거나.

 

 

 

묘비

 

쓸쓸히 살다가 그는 죽었다.

앞으로 시내가 흐르고 뒤에 산이 있는

조용한 언덕에 그는 묻혔다.

바람이 풀리는 어느 다스운 봄날

그 무덤 위에 흰 나무비가 섰다.

그가 보내던 쓸쓸한 표정으로 서서

바람을 맞고 있었다.

그러나 비는 아무것도 기억할 만한

옛날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어언듯

거멓게 빛깔이 변해가는 제 가날픈

얼굴이 슬펐다.

무엇인가 들릴 듯도 하고 보일 듯도 한 것에

조용히 귀를 대이고 있었다.

 

 

 

말과 별

 

나는 어려서 우리들이 하는 말이

별이 되는 꿈을 꾼 일이 있다.

들판에서 교실에서 장터거리에서

벌떼처럼 잉잉대는 우리들의 말이

하늘로 올라가 별이 되는 꿈을.

 

머리 위로 쏟아져 내릴 것 같은

찬란한 별들을 보면서 생각한다.

 

어릴 때의 그 꿈이 얼마나 허황했던가고.

아무렇게나 배앝는

쓰레기 같은 말들이 휴지조각 같은 말들이

욕심과 거짓으로 얼룩진 말들이

어떻게 아름다운 별들이 되겠는가.

 

하지만 다시 생각한다.

역시 그 꿈은 옳았다고.

 

착한 사람들이 약한 사람들이

망설이고 겁먹고 비틀대면서 내놓는 말들이

괴로움 속에서 고통 속에서 내놓는 말들이

어찌 아름다운 별들이 안 되겠는가.

 

아무래도 오늘밤에는 꿈을 꿀 것 같다.

내 귀에 가슴에 마음속에

아름다운 별이 된

차고 단단한 말들만을 가득

주워 담는 꿈을.

 

 

 

낮달

 

주문을 받은 주인은 가슴에

베트남 전쟁의 상처를 안고 산다

중년을 넘긴 아낙은 얼굴에

쌍꺼풀 수술 자국을

지니고 산다

 

상 위에 날려와 놓이는 보리밥에는

언덕에 피어 있던 달착지근한

찔레꽃이 묻어 있다

앞동산 애총의 황토가 섞여 있다

뚱뚱한 본처의 앙칼진 강짜가

씁쓸한 맛으로 끼여 있다

이것들에다

 

된장에 고추장에 산나물을 섞어

진한 화냥기까지 두루 섞여

썩썩 비비는 아낙의 손에는

낮달처럼 바랜 지난날의

얘기가 묻어 있다

 

 

 

파장(罷場)

 

못난 놈들은 서로 얼굴만 봐도 흥겹다

이발소 앞에 서서 참외를 깎고

목로에 앉아 막걸리를 들이켜면

모두들 한결같이 친구 같은 얼굴들

호남의 가뭄 얘기 조합 빚 얘기

약장수 기타 소리에 발장단을 치다 보면

왜 이렇게 자꾸만 서울이 그리워지나

어디를 들어가 섰다라도 벌일까

주머니를 털어 색싯집에라도 갈까

학교 마당에 모여 소주에 오징어를 찢다

어느새 긴 여름 해도 저물어

고무신 한 켤레 또는 조기 한 마리 들고

달이 환한 마찻길을 절뚝이는 파장

 

 

 

눈길

 

아편을 사러 밤길을 걷는다

진눈깨비 치는 백 리 산길

낮이면 주막 뒷방에 숨어 잠을 자다

지치면 아낙을 불러 육백을 친다

억울하고 어리석게 죽은

빛바랜 주인의 사진 아래서

음탕한 농짓거리로 아낙을 웃기면

바람은 뒷산 나뭇가지에 와 엉겨

굶어 죽은 소년들의 원귀처럼 우는데

이제 남은 것은 힘없는 두 주먹뿐

수제비국 한 사발로 배를 채울 때

아낙은 신세타령을 늘어놓고

우리는 미친놈처럼 자꾸 웃음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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