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철 시인(1943~ ), 경남 거창
영남대학교 졸, 현)영남대 명예교수
전국대학생문예작품 현상 공모 당선.
1972년 <현대문학>에 ‘5월에 들른 고향’으로 등단.
시집 ≪낱말추적≫, ≪청산행≫, ≪열하를 향하여≫ 등 다수.
김수영문학상(1993), 후광문학상(1993), 시와시학상(2000) 등 수상
이기철 시 모음
◈ 마음속 푸른 이름
아직 이르구나
내 이 지상의 햇빛, 지상의 바람 녹슬었다고 슬퍼하는 것은
아직 이르구나
내 사람들의 모두 재가 되었다고
탄식하는 것은
수평으로 나는 흰 새의 날개의 내려앉는
저 모본단 같은 구름장과
우단 같은 바람 앞에 제 키를 세우는 상수리나무들
꿈꾸는 유리 강물
햇볕 한 웅큼씩 베어 문 나생이 잎새들
마음 열고 바라보면 아직도 이 세상 늙지 않아
외출할 때 돌아와 부를 노래만은
언제나 문고리에 매어둔다
이제 조그맣게 속삭여도 되리라
내일 아침에는 이 봄에 못 피었던 수제비 꽃 한 송이
길옆에 피고
수제비 꽃 한 송이 길옆에 피고
수제비 꽃 옆에 이제까지 없던 우체국이 하나
새로 지어질 것이라고
내 귓속말로 전해도 되리라
오늘 태어나는 아이가 내일 아침에는 주홍신을 신고
가장 따뜻한 말을 사서 부치러
우체국으로 갈 것이라고
◈ 맑은 날
이렇게 하늘이 푸르른 날은
너의 이름 부르기도 황홀하여라
꽃같이 강물같이 아침빛같이
멀린 듯 가까이서 다가오는 것
이렇게 햇살이 투명한 날은
너의 이름 쓰는 일도 황홀하여라
◈ 백지의 말
나의 몸은 언제나 하얗게 비워두겠습니다
네 모는 날카로워도 속은 늘 부드럽겠습니다
설령 글씨를 썼다 해도 여백은 늘 갖고 있겠습니다
진한 물감이 있어도 내 몸을 칠하지 않겠습니다
가까이 가고 싶어도 늘 멀리 떨어져 있겠습니다
바람이 불면 납작하게 엎드리겠습니다
칼날이 다가오면 물처럼 연해지겠습니다
그러나 불빛에는 되도록 반짝이겠습니다
노래가 다가오면 치렁치렁 몸으로 받겠습니다
언제나 당신이 들어올 문을 열어두겠습니다
당신이 들어오면 이 세상에서 가장 귀한
향기가 되겠습니다
그땐 당신이 내 몸에 단 한 폭 그림을 그리십시오
그러기 위해 한 필 붓을 마련해 두겠습니다
◈ 벚꽃 그늘에 앉아보렴
벚꽃 그늘 아래 잠시 생애를 벗어놓아 보렴
입던 옷 신던 신발 벗어놓고
누구의 아비 누구의 남편도 벗어놓고
햇살처럼 쨍쨍한 맨몸으로 앉아보렴
직업도 이름도 벗어놓고
본적도 주소도 벗어놓고
구름처럼 하이얗게 벚꽃 그늘에 앉아보렴
그러면 늘 무겁고 불편한 오늘과
저당 잡힌 내일이
새의 날개처럼 가벼워지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벚꽃 그늘 아래 한 며칠
두근거리는 생애를 벗어 놓아보렴
그리움도 서러움도 벗어놓고
사랑도 미움도 벗어놓고
바람처럼 잘 씻긴 알몸으로 앉아보렴
더 걸어야 닿는 집도
더 부서져야 와성되는 하루도
동전처럼 초조한 생각도
늘 가볍기만 한 적금통장도 벗어놓고
벚꽃 그늘처럼 청청하게 앉아보렴
그러면 용서할 것도 용서받을 것도 없는
우리 삶
벌떼 잉잉거리는 벚꽃처럼
넉넉하고 싱싱해짐을 알 것이다
그대, 흐린 삶이 노래처럼 즐거워지길 원하거든
이미 벚꽃 스친 바람이 노래가 된
벚꽃 그늘로 오렴
◈ 봄밤
가난도 지나고 보면 즐거운 친구라고
배춧국 김 오르는 양은그릇들이 날을 부딪치며 속삭인다
쌀과 채소가 내 안에 타올라 목숨이 되는 것을
나무의 무언(無言)으로는 전할 수 없어 시로 써보는 봄밤
어느 집 눈썹 여린 처녀가 삼십촉 전등 아래
이별이 긴 소설을 읽는가보다
땅 위에는 내가 아는 이름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이
서까래 아래 제 이름 가꾸듯 제 아이를 다독여 잠재운다
여기에 우리는 한 生을 살러 왔다
누가 푸른 밤이면 오리나무 숲에서 비둘기를 울리는지
동정 다는 아낙의 바느질 소리에 비둘기 울음이 기워지는
봄밤
잊혀지지 않은 것들은 모두 슬픈 빛깔을 띠고 있다
숟가락으로 되질해온 생이 나이테 없어
이제 제 나이 헤는 것도 형벌인 세월
낫에 잘린 봄풀이 작년의 그루터기 위에
또 푸르게 돋는다
여기에 우리는 잠시 주소를 적어두려 왔다
어느 집인들 한 오리 근심 없는 집이 있으랴
군불 때는 연기들은 한 가정의 고통을 태우며 타오르고
근심이 쌓여 추녀가 낮아지는 집들
여기에 우리는 한줌의 삶을 기탁하러 왔다
◈ 사람이 있어 세상은 아름답다
달걀이 아직 따뜻할 동안만이라도
사람을 사랑할 수 있으면 좋겠다
우리 사는 세상엔
때로 살구꽃 같은 만남도 있고
단풍잎 같은 이별도 있다
지붕이 기다린 만큼 너를 기다려 보았느냐
사람 하나 죽으면 하늘에 별 하나 더 뜬다고
믿는 사람들의 동네에
나는 새로 사온 호미로 박꽃 한 포기 심겠다
사람이 있어 세상은 아름답다
내 아는 사람이여
햇볕이 데워 놓은 이 세상에
하루만이라도 더 아름답게 머물다 가라
◈ 사랑의 기억
시집 한 권 살 돈이 없어 온종일 헌책방 돌 때 있었네
남문 시장 고서점, 시청 옆 헌책방 돌 때 있었네
하루에 서른 편 키 큰 서가 아래 지팡이처럼 서서 읽을 때 있었네
모두들 서럽고 쓸쓸한 말로 시의 베를 짜고 있었네
귀에는 벌 떼 잉잉거리고 눈시울엔 안개비 촉촉이 서렸었네
어쩌다 맘에 드는 시 한 편 만나면 발길 돌리지 못하고
꽃술의 꿀벌처럼 뱅뱅거리다가
주인 눈살 피해 서너 번 문을 여닫을 때 있었네
더러는 노트 조각 찢어 열 줄 시를 베꼈네
주인 몰래 책장을 찢고도 싶었으나, 이게 시인데 시는 아름다운 것인데,
나를 달래며 내일 또 오지, 모레 또 오지
문을 밀고 나올 때 있었네
그때마다 엷은 등에는 시구들이 고딕으로 찍혔었네
시집 이름 기억 안 나도 머릿속에 베껴 논 시구 선명해
내일 또 와 베낄 거라고
문을 밀고 나오는 발등에 뜨거운 것이 툭-하고 떨어졌네
머리카락 위로 낙엽이 시가 되어 내려앉았네
사랑이 깊었던 날들이었네
지금도 너 어디 있느냐 묻고 싶은 날들이었네
달려가 와락 끌어안고 싶은 날들이었네
◈ 생은 과일처럼 익는다
창문은 누가 두드리는가, 과일 익는 저녁이여
향기는 둥치 안에 숨었다가 조금씩 우리의 코에 스민다
맨발로 밟으면 풀잎은 음악 소리를 낸다
사람 아니면 누구에게 그립다는 말을 전할까
불빛으로 남은 이름이 내 생의 핏줄이다
하루를 태우고 남은 빛이 별이 될 때
어둡지 않으려고 마음과 집들은 함께 모여 있다
어느 별에 살다가 내게로 온 생이여
내 생은 나 혼자만의 것이 아니구나
나무가 팔을 벋어 다른 나무를 껴안는다
사람은 마음을 벋어 타인을 껴안는다
어느 가슴이 그립다는 말을 발명했을까
공중에도 푸른 하루가 살듯이
내 시에는 사람의 이름이 살고 있다
붉은 옷 한 벌 해지면 떠나갈 꽃들처럼
그렇게는 내게 온 생을 떠나보낼 수 없다
귀빈이여, 생이라는 새 이파리여
네가 있어 삶은 과일처럼 익는다
◈ 슬프다고만 말하지 말자
저렇게 푸른 잎들이 날빛을 짜는 동안은
우리 슬프다고만 말하지 말자
저녁이면 수정 이슬이 세상을 적시고
밤이면 유리 별들이 하늘을 반짝이고 있는 동안은,
내 아는 사람들 가까운 곳에서
펄럭이는 하루를 씻어 널어놓고
아직 내 만나지 못한 사람들
먼 곳에서 그날의 가장 아름다운 꿈을 엮고 있는 동안은,
바람이 먼 곳에서 불어와 머리카락을 만지고
햇빛이 순금의 깁으로 들판을 어루만지는 동안은,
우리들 삶의 근심이 결코 세상의 저주가
되어서는 안 된다
밤새 꾸던 꿈 하늘에 닿지 못하면 어떠랴
하루의 계단을 쌓으며
일생이라는 건축을 쌓아 올리는 사람들,
우리 슬프다고만 말하지 말자
그 아름답고 견고한 마음들 눈감아도 보이는 동안은
그들 숨소리 내일을 여는 빗장 소리로
귓가에 들리는 동안은
◈ 시월의 사유
텅 빈자리가 그리워 낙엽들은 쏟아져 내린다
극한을 견디려면 나무들은 제 껍질을 튼튼히 쌓아야 한다
저마다 최후의 생을 간직하고 싶어 나뭇잎들은
흙을 향하여 떨어진다
나는 천천히 걸으면서 나무들이 가장 그리워했던 부분을 기억하려고 나무를 만진다
차가움에서 따스함으로 다가오는 나무들
모든 감각들은 너무 향기 쪽으로 기울어져 있다
엽록일까 물관일까, 향기를 버리지 않으면 나무들은 삭풍을 이기지 못한다
어두워야 읽혀지는 가을의 문장들, 그 상형문자들은 난해하다
더러 덜컹거리는 문짝들도 제자리에 머물며 더 깊은 가을의 심방을 기다린다
나뭇잎들, 저렇게 생을 마구 내버릴 수 있다니, 그러니까 너희에게도 생은 무거운 것이었구나
나는 면사무소 정문으로 한 노인이 자전거를 끌고 들어가는 것을 보고,
사람이 나뭇잎보다 더 가벼워질 수도 있겠구나라고 생각하며
염소들이 지나간 길을 골라 걷는다
가벼운 것들,
뽕나무잎 누에고치 거미줄 잠자리 제비집 종이컵 볼펜 다 읽은 시집들
그러나 나를 짓누르는 것들, 무거운 것들
불면증 월급봉투 서문시장 팔공산 조지 부시 아프간 전쟁 매리어트 호텔 비자금
영변 경수로 대북송금 김정일 트로츠키 조정래 천리안 이회창 인천공항 유에스 달러
면사무소 은행나무 위에도 가을이 오고
이제 무들이 더 뿌리를 내리지 않는다
병든 새들과 거지들은 어서 집을 지어야 한다
이 주식의 가을에 사람들은 끝없이 회의를 하고
쫓겨난 염소처럼 나는 혼자 면사무소 옆길을 걷는다
나뭇잎은 아무것도 추억하지 않는다
은행나무가 그렇듯이. 염소가 그렇듯이
◈ 아침 언어
저렇게 빨간 말을 토하려고
꽃들은 얼마나 지난밤을 참고 지냈을까
뿌리들은 또 얼마나 이파리들을 재촉했을까
그 빛깔에 닿기만 해도 얼굴이 빨갛게 물드는
저 뜨거운 꽃들의 언어
하루는 언제나 어린 아침을 데리고 온다
그 곁에서 풀잎이 깨어나고
밤은 별의 잠옷을 벗는다
아침만큼 자신만만한 얼굴은 없다
모든 신생이 거기 있기 때문이다
초록이 몸속으로 스며드는 아침 곁에서
사람을 기다려 보면 즐거우리라
내 기다리는 모든 사람에게 꽃의 언어를 주고 싶지만
그러나 꽃의 언어는 번역되지 않는다
나무에서 길어낸 그 말은
나무처럼 신선할 것이다
초록에서 길어낸 그 말은
이 세상 가장 아름다운 모음일 것이다
◈ 거짓말
한 알의 사과 알 속에 여름 물소리와 저녁 햇살이
익어 있다는 한 줄의 표현을
나는 이제 허용하려고 한다.
참말보다 거짓말의 아름다움을
거짓말의 저 철저한 속임수의 아름다움을
나는 이제 허용하려고 하고 있다.
바닷가에선 물새의 죽음에 절망하고
돌아와선 참말에 능한
書冊의 한 句節에 절망하고
절망하면서 절망을 딛고 돋아나는 풀잎처럼
여름은 또 한번 가을로 가고 있다는
이 거짓말의 平和에 기대는 즐거움
거짓말의 平和
거짓말의 거짓에 기대는 즐거움
◈ 그늘은 나무의 생각이다
나무의 생각이 그늘을 만든다
그늘을 넓히고 좁히는 것은 나무의 생각이다
사람들이 아무리 잡아당겨도 나무는
나무가 벋고 싶은 곳으로 가서 그늘을 만든다
그늘은 일하다가 쉬는 나무의 자리다
길을 아는가 물으면 대답하지 않고
가고 싶은 곳으로만 가서 제 지닌 만큼의 자유를 심으면서
나무는 가지와 잎의 생각을 따라 그늘을 만든다
수피 속으로 난 길은 숨은 길이어서 나무는
나무 혼자만 걸어 다니는 길을 안다
가지가 펴놓은 수평 아래 아이들이 와서 놀면
나무는 잎을 내려 보내 아이들과 함께 논다
가로와 세로로 짜 늘인 넓은 그늘
그늘은 나무의 생각이다
◈ 그리움 측정법
다 말해버리지 못해 입안에 오래오래 불덩이로 남아 있는 것
스러진 줄 알았는데 가보면 새록새록 살아 있는 것
책에만 있는 줄 알았는데 자세 보니 창에도 서려 있는 것
오다가 자꾸 뒤가 궁금해 다섯 번은 돌아보게 하는 것
수숫대처럼 가늘고 힘겹게 등뒤에서 오래오래 흔들리는 것
양말까지 다 챙겼는데 도착해보니 그것 하나만 남겨두고 온 것
事實이 아니고 實在가 아닌 것 實體가 아니고 實物이 아닌 것
어제까지 내 안에 소복했는데 오늘은 어디에도 없는 것
지금까지 부르던 이름을 지우고 새 이름 붙여주고 싶은 것
개화보다 더 일찍 영글어 버린 것
내다버렸다고 생각하면 어느새 내 곁에 와 있는 것
일찌감치,라고 말하면 훨씬 늦게 오는 것
천천히, 라고 말하면 일찌감치 내 안에 와 있는 것
내가 익혀온 공부 중 가장 어려운 공부법
그리움 측정법
◈ 꽃잎은 오늘도 지면서 붉다
오늘 내 발에 밟힌 풀잎은 얼마나 아팠을까
내 목소리에 지워진 풀벌레 노래는 얼마나 슬펐을까
내 한 눈 팔 때 져버린 꽃잎은 얼마나
내 무심을 서러워했을까
들은 제 가슴이 좁고 산은 제 키가 무겁지만
햇빛 비치는 곳에는
세상의 아름다운 삶도 크고 있다
길을 걸으며 나는
오늘 이 길을 걸어간 사람들을 생각한다
그들은 모두 나보다 아름다운 사람들일 것이다
나는 그들이 걸어간 길의
낙엽 한 장도 쓸지 않았다
제 마음에도 불이 켜져 있다고
풀들은 온종일 꽃을 피워들고
제 마음에도 노래가 있다고
벌레들은 하루 종일 비단을 짠다
마른 풀잎은 이름만 불러도 마음이 따뜻하다
나는 노래보다 아름다운
풀꽃 이름 부르며 세상길 간다
제 몸 부서지는 소리를 들으며
나뭇잎은 땅으로 떨어지고
제 사랑 있어 세상이 밝다고
꽃잎은 오늘도 지면서 붉다
◈ 나무 같은 사람
나무 같은 사람 만나면 나도 나무가 되어
그의 곁에 서고 싶다
그가 푸른 이파리로 흔들리면 나도 그의 이파리에 잠시 맺는
이슬이 되고 싶다
그 둥치 땅 위에 세우고
그 잎새 하늘에 피워 놓고도
제 모습 땅 속에 감추고 있는 뿌리 같은 사람 만나면
그의 안 보이는 마음 속에
놀 같은 방 한 칸 지어
그와 하룻밤 자고 싶다
햇빛 밝은 날 저자에 나가
비둘기처럼 어깨 여린 사람 만나면
수박색 속옷 한 벌 그에게 사주고
그의 버드나무 잎 같은 미소 한 번 바라보고 싶다
갓 사온 시금치 다듬어놓고
거울 앞에서 머리 빗는 시금치 같은 사람,
접으면 손수건만하고 펼치면 저녁놀만한 가슴 지닌 사람
그가 걸어온 길, 발에 맞는 편상화
늦은 밤에 혼자서 엽록색 잉크를 찍어 편지 쓰는 사람
그가 잠자리에 들 때 나는 혼자 불켜진 방에 앉아
그의 치마 벗는 소리를 듣고 싶다
◈ 나무들은 때로 불꽃 입술로 말한다
사랑하는 시간만 생이 아니다
고뇌하고 분노하는 시간도 끓는 생이다
기다림만이 제 몫인 집들은 서 있고
뜨락에는 주인의 마음만 한 꽃들이
뾰루지처럼 붉게 핀다
날아간 새들아, 어서 돌아오너라
이 세상 먼저 살고 간 사람들의 안부는 이따 묻기로 하고
오늘 아침 쌀 씻는 사람의 안부부터 물어야지
햇빛이 우리의 마음을 배춧잎처럼 비출 때
사람들은 푸른 벌레처럼 지붕 아래서 잠깬다
아무리 작게 산 사람의 일생이라도
한 줄로 요약되는 삶은 없다
그걸 아는 물들은 흔적을 남기지 않고 흘러간다
반딧불만 한 꿈들이 문패 아래서 잠드는
내일이면 이 세상에 주소가 없을 사람들
너무 큰 희망은 슬픔이 된다
못 만난 내일이 등 뒤에서 또 어깨를 툭 친다
생은 결코 수사가 아니다
고통도 번뇌도 힘껏 껴안는 것이 생이다
나무들을 때로 불꽃 입술로 말한다
생은 피우는 만큼 불게 핀다고
◈ 내가 바라는 세상
이 세상 살면서 내가 하고 싶은 일은
사람이 많이 다니는 길가에 꽃모종을 심는 일이다
이름 없는 꽃들이 길가에 피어나면
지나가는 사람들이 그 꽃을 제 마음대로 이름 지어 부르게 하는 일이다
아무에게도 이름 불려지지 않은 꽃이 혼자 눈시울 붉히면
발자국 소리를 죽이고 그 꽃에 다가가
시처럼 따뜻한 이름을 그 꽃에 달아주는 일이다
부리가 하얀 새가 와서 시의 이름을 단 꽃을 물고 하늘을 날아가면
그 새가 가는 쪽의 마을을 오래오래 바라보는 일이다
그러면 그 마을도 꽃처럼 예쁜 이름을 처음으로 달게 되겠지
그러고도 내가 하고 싶은 일이 남아 있다면, 그것은
이미 꽃이 된 사람의 마음을 시로 읽는 일이다
마을마다 살구꽃 같은 등불 오르고
식구들이 저녁상가에 모여 앉아 꽃물 든 손으로 수저를 들 때
식구들의 이마에 환한 꽃빛이 비치는 것을 바라보는 일이다
어둠이 목화송이처럼 내려와 꽃들이 잎을 포개면
그날 밤 갓 시집 온 신부는 꽃처럼 아름다운 첫 아일 가질 것이다
그러면 나 혼자 베갯모를 베고
그 소문을 화신처럼 듣는 일이다
◈ 내일은 영원
나에게 따뜻함을 준 옷에게
나에게 편안함을 준 방에게
배고픔을 이기게 한 식탁에게
고백을 들어줄 수 있는 귀를 가진 침묵에게
나는 고마움을 전해야 한다
바느질 자국이 많은 바지에게
백 리를 데려다준 발에게
늘 분홍을 지닌 마음에게
고단한 꿈을 누인 집에게
유언을 써본 일 없는 나무에게
늘 내부를 보여주는 꽃에게
부리로 노래를 옮겨 주는 새에게
분홍을 실어오는 물에게
나는 가난 한 벌 지어 입고
너의 이름으로 초록 위를 걸어간다
언제나 처음 오는 얼굴인 아침에게
하루치의 숨을 쉬게 하는 공기에게
절망을 희망으로 바꿔주는 햇빛에게
그리고 마지막
사랑이라고 쓸 수 있는 손에게
수저를 들 때처럼 고마움 전해야 한다
손을 사용할 수 있는 힘에게
백합 한 송이를 선물하고 싶은 가슴에게
흙 위에 그의 이름을 쓸 수 있게 하는 마음에게
아, 영원이라고 부를 수 있는 내일에게
◈ 네 켤레의 신발
오늘 저 나직한 지붕 아래서
코와 눈매가 닮은 식구들이 모여 앉아 저녁을 먹는 시간은
얼마나 따뜻한가
늘 만져서 반짝이는 찻잔, 잘 닦은 마룻바닥
조금만 바람이 불어도 소리 내는 창문 안에서
이제 스무 해를 함께 산 부부가 식탁에 앉아
안나 카레리나를 이야기하는 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누가 긴 휘파람으로 불어왔는지, 커튼 안까지 달려온 별빛으로
이마까지 덮은 아들의 머리카락 수를 헬 수 있는
밤은 얼마나 아늑한가
시금치와 배추 반 단의 저녁 식사에 초대하고 싶은 사람의 전화번호를
마음으로 외는 시간이란 얼마나 넉넉한가
흙이 묻어도 정겨운, 함께 놓이면 그것이 곧 가족이고 식구인
네 켤레의 신발
◈ 들판은 시집이다
천천히 걷는 들길은 읽을 것이 많이 남은 시집이다
발에 밟히는 풀과 꽃들은 모두 시어다
오전의 햇살에 일찍 데워진 돌들
미리 따뜻해진 구름은 잊혀지지 않는 시행이다
잎을 흔드는 버드나무는 읽을수록 새로워지는 구절
뻐꾸기 울음은 무심코 떠오르는 명구다
벌들의 날갯소리는 시의 첫 행이다
씀바귀 잎을 적시는 물소리는 아름다운 끝줄
넝쿨풀은 쪽을 넘기면서 읽는 행이 긴 구절
나비 날갯짓은 오래가는 여운이다
바람이 지나가고 나면 혼자 남는 파밭
종달새 날아오르면 아까 읽은 구절이 되살아나는
보리밭은 표지가 푸른 시집이다
갓 봉지 맺은 제비꽃은
초등학교 국어책에 나오는 동시다
벅찬 약속도 아픈 이별도 해본 적 없는 논밭
물소리가 다 읽고 간 들판의 시집을
풀잎과 내가 다시 읽는다
◈ 따뜻한 책
행간을 지나온 말들이 밥처럼 따뜻하다
한 마디 말이 한 그릇 밥이 될 때
마음의 쌀 씻는 소리가 세상을 씻는다
글자들의 숨 쉬는 소리가 피 속을 지날 때
글자들은 제 뼈를 녹여 마음의 단백이 된다
서서 읽는 사람아
내가 의자가 되어줄게 내 위에 앉아라
우리 눈이 닿을 때까지 참고 기다린 글자들
말들이 마음의 건반 위를 뛰어 다니는 것은
세계의 잠을 깨우는 언어의 발자국 소리다
엽록처럼 살아 있는 예지들이
책 밖으로 뛰어나와 불빛이 된다
글자들은 늘 신생을 꿈꾼다
마음의 쟁반에 담기는 한 알 비타민의 말들
책이라는 말이 세상을 가꾼다
◈ 산그늘에 마음 베인다
햇빛과 그늘 사이로 오늘 하루도 지나왔다
일찍 저무는 날 일수록 산 그늘에 마음 베인다
손 헤도 별은 내려오지 않고
언덕을 넘어가지 못하는 나무들만
내 곁에 서 있다
가꾼 삶이 진흙이 되기에는
저녁놀이 너무 아름답다
매만져 고통이 반짝이는 날은
손수건만한 꿈을 헹구어 햇빛에 늘고
덕석 편 자리만큼 희망도 펴 놓는다
바람 부는 날은 내 하루도 숨 가빠
꿈 혼자 나부끼는 이 쓸쓸함
풀뿌리가 다칠까 봐
흙도 골라 딛는 이 고요함
어느 날 내 눈물 따뜻해지는 날 오면
나는 내 일생 써 온 말씨로 편지를 쓰고
이름 부르면 어디든 그 자리에 서서
나를 기다릴 사람 만나러 가리라
써도 써도 미진한 시처럼
가도 가도 닿지 못한 햇볕 같은 그리움
풀잎만이 꿈의 빛깔임을 깨닫는 저녁
산그늘에 고요히 마음 베인다
◈ 봉투
봉투를 뜯자 그가 왔다
예쁜 우표처럼 그가 왔다
그는 본래 진객이어서
깨끗한 흰 종이의 길만 골라 딛고 온다
그가 걸으면 굽이 많은 길의 가슴이 유순해진다
그는 본래 조심스런 손님이어서
손을 씻고 마음을 잘 말려 맞아야 한다
봉투를 열자 아무 글자도 쓰이지 않은 그가 왔다
그러나 아무 것도 없다고 말하는 것은
너의 잘못이다
가장 순하고 깨끗한 말은
읽히지 않는다
아니다, 가장 맑은 속엣것이 다 읽힌다
그의 숨소리와 그의 눈빛과
그가 주고자 하는 실핏줄의 마음까지 다 읽힌다
봉투를 뜯자 그의 가슴이 왔다
가위가 닿자 그의 심장박동이 왔다
다 안을 수도 없는 벅차고 아름다운 것이 왔다.
◈ 사람의 이름이 향기이다
아름다운 내일을 기다리기에
사람들은 슬픔을 참고 견딘다.
아름다운 내일이 있기에
풀잎이 들판에 초록으로 피어나고
향기로운 내일이 있기에
새들은 하늘에 노래를 심는다.
사람이 사람 생각하는 마음만큼
이 세상 아름다운 것은 없다.
아름다운 사람의 이름이 노래가 되고
향기로운 사람의 얼굴이 꽃이 된다.
이름 부를 사람 있기에
이 세상 넉넉하고
그리워할 사람 있기에
우리 삶 부유하다.
◈ 민들레 꽃씨
날아가 닿는 곳 어디든 거기가 너의 주소다
조심 많은 봄이 어머니처럼 빗어준 단발머리를 하고
푸른 강물을 건너는 들판의 막내둥이 꽃이여
너의 생일은 순금의 오전
너의 본적은 햇빛 많은 초록 풀밭이다
달려가도 잡을 수 없던 어린 날의 희망
열다섯 처음 써본 연서 같은 꽃이여
너의 영혼 앞에서 누가 짐짓 슬픔을 말할 수 있느냐
고요함과 부드러움이 세상을 이기는 힘인 것을
지향도 목표도 없이 떠나는 너는
가장 큰 자유를 지닌 풀밭 위의 나그네
보오얀 봄빛, 버선 신은 한국 여인의 모시 적삼 같은 꽃이여
너는 이 지상의 가장 깨끗한 영혼
공중을 날아가도 몸이 음표인
땅 위의 가장 아름다운 소녀들
◈ 삼월
밖에서 누군가가 쫑알거려 나가보니
입학식에 온 1학년 같은
개나리 피는 소리였습니다
여기는 시메산골
버스도 우체부도 발자국 예쁜 사람도
조금씩은 늦게 옵니다
슬리퍼를 운동화로 갈아 신는 동안
몇 송이가 더 피어 제 얘길 들어 달라고
입술을 쫑긋거리고 있습니다
햇살이 몰고 오는 노란 말들을 낱낱 귀에 담습니다
저쪽 솔 그늘에는 진달래가 저도 늦지 않으려고
얼굴이 붉어져 있고
응달에서 뛰어나오려는 자두꽃이
흰 봉투를 막 뜯고 있습니다
한 스무날은 이래저래
집 안이 소란할 것입니다
삼월은 자식 많은 어머니같이
손 쉴 틈이 없습니다
◈ 영원히 사랑하고 싶어
내가 널 사랑하여
널 나의 동반자로 세웠다
주는 것이 사랑이라서
나는 네게 이 땅을 다 주었다
네가 내게 줄 사랑은
한 가지만 포기하고 버리면 되는 것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포기하고 버려라
그 열매는 네 것이 아니니까
그것을 포기하고 버림이
나에 대한 너의 사랑이니까
포기하고 버림을 쉽다 여기지마라
너 자신을 포기하고 버리는 일이니까
왜 먹지 말라 하지?
의혹도 품지마라
의혹은 나에 대한 포기가 되니까
네가 그 의혹에 무너졌을 때
내 마음은 찢어지는 아픔이었다
그것은 네가 날 포기하고 버린 것이라서
사랑하는 너였기에 울었다
그렇지만 너에 대한 내 사랑은
애절(哀切)하여 무너지질 않는구나
그래서 나는 너의 포기와 버림을
소생시키기 위해 치러야 할
너의 대가적 희생을 네가 치를 수 없어
내가 대신 치르기 위해 날 포기하기로 했다
나와 독생자의 결의가 이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아득한 하늘에서
머나 먼 지상으로
벌거벗은 몸으로 널 찾아왔다
사랑은 목숨보다 질긴 것이라서
널 버릴 수 없었다
그래야 너도 너를 포기하고 버려
나와 영원한 동반자로
살아갈 길이 열리는 것이기에
내 생일이다
◈ 인생
인생이란 사람이 살았다는 말
눈 맞은 돌맹이처럼 오래 견뎠다는 말
견디며 숟가락으로 시간을 되질했다는 말
되질한 시간이 가랑잎으로 쌓였다는 말
글 읽고 시험치고 직업을 가졌다는 말
연애도 했다는 말
여자를 안고 집을 이루고
자식을 얻었다는 말
그러나 마지막엔 혼자라는 말
그래서 산노루처럼 쓸쓸하다는 말
◈ 여자를 위하여
너를 이 세상의 것이게 한 사람이 여자다
너의 손가락이 다섯 개임을 처음으로 가르친 사람
너에게 숟가락질과 신발 신는 법을 가르친 사람이 여자다
생애 동안 일만 번은 흰 종이 위에 써야 할
이 세상 오직 하나뿐인 네 이름을 모음으로 가르친 사람
태어나 최초의 언어로, 어머니라고 네 불렀던 사람이 여자다.
네 청년이 되어 처음으로 세상에 패배한 뒤
술 취해 쓰러지며 그의 이름을 부르거나
기차를 타고 밤 속을 달리며 전화를 걸 사람도 여자다
그를 만나 비로소 너의 육체가 완성에 도달할 사람
그래서 종교와 윤리가 열 번 가르치고 열 번 반성케 한
성욕과 쾌락을 선물로 준 사람도 여자다
그러나 어느 인생에도 황혼은 있어
네 걸어온 발자국 헤며 신발에 묻은 진흙을 털 때
이미 윤기 잃은 네 가슴에 더운 손 얹어 줄 사람도 여자다
깨끗한 베옷을 마련할 사람 그 겸허하고 숭고한 이름인 여자
◈ 울음의 영혼
울음이 작별을 만든 것은 아니지만
작별은 모든 울음을 다 이해한다
울음 곁에서 울음의 영혼을 만지면서
나는 최초의 금강(金剛)을 배웠다
울음의 방식은 고독이다
고독은 너무 많이 만져서 너덜너덜해졌다
눈물은 울음이 남겨놓은 흑요석
눈물은 고독보다 훨씬 더 깊은 데서 길어올린 샘물이다
울음 하나에 담긴 백 가지의 마음
모든 미소는 울음의 누이뻘이다
꼭 한번만 아파보고 싶었던 병처럼
가장 맑을 때 울리는 영혼이 울음을 낳는다
나는 시간을 쪼개 울음을 해부한다
울음 곁에서 울음의 성분을 분해하는 시간이
가장 행복한 시간이다
도대체 울음 없이 누가 제 속살을 만질 수 있나
그런데 들판의 프란넬꽃을 짓밟으며
금방 떠난 기차의 울음은 어디까지 갔죠?
◈ 시 읽는 시간
시는 녹색 대문에서 울리는 초인종 소리를 낸다
시는 맑은 영혼을 담은 풀벌레 소리를 낸다
누구의 생인들 한 편의 시 아닌 사람 있으랴
그가 걸어온 길 그가 든 수저 소리
그가 열었던 창의 커튼 그가 만졌던 생각들이
실타래 실타래로 모여 마침내 한 편의 시가 된다
누가 시를 읽으며 내일을 근심하랴
누가 시를 읽으며 적금통장을 생각하랴
첫 구절에서는 풀피리 소리 둘째 구절에서는 동요 한 구절
마지막 구절에서는 교향곡으로 넘실대는 싯발들
행마다 영혼이 지나가는 발자국 소리들
나를 적시고 너를 적시는
초록 위를 뛰어다니는 이슬방울들
◈ 어쩌다 시인이 되어
내 어쩌다 시인이 되어
이 세상길 혼자 걸어가네
내 가진 것 시인이라는 이름밖엔 아무것도 없어도
내 하늘과 땅, 구름과 시내 가진 것만으로도 넉넉한 마음이 되어
혼자라도 여럿인 듯 부유한 마음으로
이 세상길 걸어가네
어쩌다 떨어지는 나뭇잎 발길에라도 스치면
그것만으로도 기쁨이라 여기며
냇물이 전하는 마음 알아들을 수 있으면
더없는 은총이라 생각하며
잠시라도 꽃의 마음, 나무의 마음에 가까이 가리라
나를 채찍질 하며
남들은 가위 들어 마음의 가지를 잘라낸다 하지만
나는 풀싹처럼 그것들을 보듬으며 가네
내 욕망의 강철이 부드러운 새움이 될 때까지
나는 내 체온으로 그것들을 다듬고 데우며 가네
내 어쩌다 시인이 되어
사람과 짐승, 나무와 풀들에 눈맞추며
맨발이라도 아프지 않게
이 세상길 혼자 걸어가네
◈ 여기에 우리 머물며
풀꽃만큼 제 하루를 사랑하는 것은 없다
얼마큼 그리움에 목말랐으면
한 번 부를 때마다 한 송이 꽃이 필까
한 송이 꽃이 피어 들판의 주인이 될까
어디에 닿아도 푸른 물이 드는 나무의 생애처럼
아무리 쌓아 올려도 무겁지 않은 불덩이인 사랑
안 보이는 나라에도 사람이 살고
안 들리는 곳에서도 새가 운다고
아직 노래가 되지 않은 마음들이 살을 깁지만
상처 없는 영혼이 어디 있느냐고
보석이 된 상처들은 근심의 거미줄을 깔고 앉아 노래한다
왜 흐르느냐고 물으면 강물은 대답하지 않고
산은 침묵의 흰새를 들 쪽으로 날려보낸다
어떤 노여움도 어떤 아픔도
마침내 생의 향기가 되는
근심과 고통 사이
여기에 우리 머물며
◈ 유등리
지나는 어디에도 유등리는 있다
오래 만진 삶이 문고리처럼 닳아 반짝이고
잘못 만지면 바스러지고 말 집들이
종이 연처럼 가볍게 추녀 끝에 걸려 있다
닳은 신발 잠시 뜨락에 벗어놓으면
굳이 문자로 쓰지 않아도 언문체로 남을 골목들
나는 어제도 이 비슷한 골목을 걸어갈 것이다
돌담 아래 겨우 몸 부지하고도
제 기쁨만큼 웃는 꽃들을 보면
가난이 아름다움임을 여기서 깨닫는다
가을이 조금씩 여름의 치마끈을 물어뜯는 유등리에 와서
오래 잊고 있던 들깻단과
들판에 내려앉는 구름 그림자에 마음 베이며
한 촌락이 외씨 같은 사람들을 키우고
조선 솥 같은 사람들을 껴안는 것을 본다
남쪽 섬돌에 벌레가 울 때까진
나는 길 떠나지 않으리라
돌담처럼 오래 여기 서 있으리라
◈ 이것만 쓰네
내 언어로는 다 쓸 수 없어 이것만 쓰네
산방에 벗어놓은 흰 고무신 안에 혼자 놀다 간 낮달을
내게로 날아오다 제 앉을 자리가 아닌 줄 미리 알고 되돌아간 노랑나비를
단풍잎 다 진 뒤에 혼자 남아 글썽이는 가을 하늘을
한 해 여름을 제 앞치마에 싸서 일찌감치 풀숲 속으로 이사를 간 엉겅퀴 꽃씨를
내 언어로는 다 쓸 수 없어 이것만 쓰네
사월 달래순이 묵은 돌덩이를 들어 올리는 힘을 본 것도 같은데
저를 좀 옮겨달라고 내 바지 자락에 매달리는, 어언 한 해를 다 살아버린
풀씨의 말을 알아들은 것도 같은데
아직도 흙 이불로 돌아가지 못한 고욤 열매의 추위를 느낀 것도 같은데
다 쓸 수 없어 이것만 쓰네
◈ 자주 한 생각
내가 새로 닦은 땅이 되어서
집 없는 사람들의 집터가 될 수 있다면
내가 빗방울이 되어서
목타는 밭의 살을 적시는
여울물로 흐를 수 있다면
내가 바지랑대가 되어서
지친 잠자리의 날개를 쉬게 할 수 있다면
내가 음악이 되어서
슬픈 사람의 가슴을 적시는
눈물이 될 수 있다며
아, 내가 뉘 집 창고의 과일로 쌓여서
향기로운 향기로운 술이 될 수 있다면
◈ 작은 이름 하나라도
이 세상 작은 이름 하나라도
마음 끝에 닿으면 등불이 된다
아플 만큼 아파 본 사람만이
망각과 폐허도 가꿀 줄 안다
내 한때 너무 멀어서 못 만난 허무
너무 낯설어 가까이 못 간 이념도
이제는 푸성귀 잎에 내리는 이슬처럼
불빛에 씻어 손바닥 위에 얹는다
세상은 적이 아니라고
고통도 쓰담으면 보석이 된다고
나는 얼마나 오래 악보 없는 노래로 불러왔던가
이 세상 가장 여린 것, 가장 작은 것
이름만 불러도 눈물겨운 것
그들이 내 친구라고
나는 얼마나 오래 여린 말로 노래했던가
내 걸어갈 동안은 세상은 나의 벗
내 수첩에 기록되어 있는 모음이 아름다운
사람의 이름들
그들 위해 나는 오늘도 한 술 밥, 한 쌍 수저
식탁 위에 올린다
잊혀지면 안식이 되고
마음 끝에 닿으면 등불이 되는
이 세상 작은 이름하나를 위해
내 쌀 씻어 놀 같은 저녁밥 지으며
◈ 저물어 그리워지는 것들
나는 이 세상을 스무 번 사랑하고
스무 번 미워했다
누군들 헌 옷이 된 생을
다림질하고 싶지 않은 사람 있으랴
유독 나한테만 칭얼대는 생
돌멩이는 더 작아지고 싶어서 몸을 구르고
새들은 나뭇잎의 건반을 두드리며 귀소 한다.
오늘도 나는 내가 데리고 가야 할 하루를 세수시키고
햇볕에 잘 말린 옷을 갈아입힌다.
어둠이 나무 그림자를 끌고 산 뒤로 사라질 때
저녁 밥 짓는 사람의 맨발이 아름답다.
개울물이 필통 여는 소리를 내면
갑자기 부엌들이 소란해진다
나는 저녁만큼 어두워져서는 안 된다.
남은 날 나는 또 한 번 세상을 미워할는지
아니면 어제보다 더 사랑할는지
◈ 청산행(靑山行)
손 흔들고 떠나 갈 미련은 없다
며칠째 청산(靑山)에 와 발을 푸니
흐리던 산(山)길이 잘 보인다.
상수리 열매를 주우며 인가(人家)를 내려다보고
쓰다 둔 편지 구절과 버린 치솔을 생각한다.
남방(南方)으로 가다 길을 놓치고
두어 번 허우적거리는 여울물
산 아래는 때까치들이 몰려와
모든 야성(野性)을 버리고 들 가운데 순결해진다.
길을 가다가 자주 뒤를 돌아보게 하는
서른 번 다져 두고 서른 번 포기했던 관습(慣習)들.
서(西)쪽 마을을 바라보면 나무들의 잔 숨결처럼
가늘게 흩어지는 저녁 연기가
한 가정의 고민의 양식으로 피어 오르고
생목(生木) 울타리엔 들거미줄
맨살 비비는 돌들과 함께 누워
실로 이 세상을 앓아 보지 않은 것들과 함께 잠들고 싶다.
◈ 추억은 혼자 분주하다
저녁이 되면 먼 들이 가까워진다
놀이 만지다 두고 간 산과 나무들을
내가 대신 만지면
추억이 종잇장 찢는 소리를 내며 달려온다
겹겹 기운 마음들을 어둠 속에 내려놓고
풀잎으로 얽은 초옥에 혼자 잠들면
발끝에 스미는 저녁의 체온이 따뜻하다
오랫동안 나는 보이는 것만 사랑했다
이제는 보이지 않는 것도 사랑해야 하리라
내 등뒤로 사라진 어제, 나 몰래 피었다 진 들꽃
한 번도 이름 불러보지 못한 사람의 이름
눈 속에 묻힌 씀바귀
겨울 들판에 남아 있는 철새들의 영혼
오래 만지다 둔 낫지 않은 병,
추억은 어제로의 망명이다
생을 벗어버린 벌레들이 고치 속으로 들어간다
너무 가벼워서 가지조차 흔들리지 않는 집
그렇게 생각하니 내 생이 아려온다
짓밟혀서도 다시 움을 밀어 올리는 풀잎
침묵의 들판 끝에서
추억은 혼자 분주하다
◈ 가을 나비
여름이 제 한 살림 거두어 떠나려다가
호박의 무게에 치마가 눌려 주저앉는다
잠자리들이 산을 떠메고 가려고 떼 지어 몰리다가
제 그림자에 놀란다
옥수수 잎 서걱이는 소리 뒤로 가을 나비가 날아왔다
아, 저 나비
서리가 드리는 결별 뒤에서 저리도 천천히 떠날 수 있다니
떠남이 저토록 아름다울 수 있다니
모든 부재를 부르는 존재들의 이마가
저토록 오래 눈부실 수 있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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