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희진 시인(1931~2015) : 경기도 연천 출생.
고려대 영문과 졸업. 동성중.고등학교 교사 재임(1960~1983)
1955년 [문학예술]에 시 「무제(無題)」, 「허(虛)」, 등으로 등단.
월탄문학상. 보관 문화훈장. 펜 문학상. 녹색문학상 등 수상.
시집 『실내악』, 『가슴속의 시냇물』, 『시인아 너는 선지자 되라』 『화랑연가』 등 다수,
박희진 시 모음
◈ 시 삼백 편은 한마디로
시 삼백 편은 한마디로 말해서
사심(邪心)이 없어야 나온다는 말,
참말이니 명심하세.
시인의 마음이 거칠고 사나우면
어떻게 그의 시가 가슴에 남는 금언이 되리오?
시인의 가슴은 사랑과 영성으로 거울처럼 맑아져야
읽어도 또 읽고픈 시가 써지리.
푸른 하늘에 흰 구름 피듯이.
매화나무에 매화가 피듯이.
◈ 그의 시
그의 시를 읽으면 무엇하리
그의 시를 읽어도 모르거늘
그의 시도 한때는 생명을 가졌으리
그러나 세월이 흘러
바위엔 제멋대로 푸른 이끼가 끼고
돋아나는 햇살은 여전히 빛나건만
그의 시는 못되게 썩었더라
그의 시는 못되게 굳었더라
아아 으슥한 달밤
산새는 구슬피 울음 울건만
푸른 달빛 아래 창백히 비최이는
저 외로운 묘표(墓標)
보라 그의 시가
후폐(朽廢)한 묘표 속에
파아란 시구(詩句)의 나열...
그의 시를 읽으면 무엇하리
그의 시를 읽어도 모르거늘
-묘표(墓標): 묘비 따위와 같이 무덤 앞에 세우는 표시물.
-후폐(朽廢): 썩어서 소용이 없게 됨.
◈ 미래의 시인에게
어디서인지 자라고 있을
너의 고운 수정의 눈동자를 난 믿는다
또 아직은 별빛조차 어리기를 꺼리는
청수한 이마의 맑은 슬기를
너를 실은 한 번도 본 일은 없지만
어쩌면 꿈속에서 보았을지도 몰라
얼음 밑을 흐르는 은은한 물처럼
꿈꾸는 혈액이 절로 돌아갈 때
오 피어다오 미래의 시인이여
이 눈먼 어둠을 뚫고 때가 이르거든
남몰래 길렀던 장미의 체온을
활활 타오르는 불길로 보여다오
진정 새로운 빛과 소리와 향기를 지닌
영혼은 길이 꺼지지 않을 불길이 되리니
◈ 그대 벗이여…
소나무 아래 정자에선 녹차 한 잔 들게나
바쁜 세상일수록 마음을 비우고
솔바람 소리 듣는 법도 배워야지
차 맛은 길지만, 인생은 짧다네
◈ 행곡리 처진 소나무
운문사의 처진 소나무 말고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것이
또 하나 있네
그걸 보러 산 넘고 물 건너 왔는데
해는 이미 졌고
어둠이 밀물처럼
밀려와 있네그려
하지만 밤눈에도 키는 크지 않지만
그 수관(樹冠)은 보은의 정이품송
축소판 같아 작은 청산이다
달도 별도 없이 잔뜩 흐린 하늘
알차고 풍만한 검은 청산 둘러싸고
일행은 모두 즐거운 표정이다
싱그러운 솔기운을 받아서리
밤의 소나무도 소나무는 아름답다
이제 떠나면 언제 다시 보랴
◈ 학과 소나무
학이 소나무에 끌리는 것은
두 날개 활짝 펴며
아득한 천공에서
홀연 날아와 안기려 하는 것은
학 안에도 소나무가 있기 때문
학이 소나무에 사뿐히 내려 앉는 것은
학 안의 소나무와 밖의 소나무가
만나서 하나 되길 원하기 때문
학은 날아다니는 공중의 소나무요
소나무는 땅에 뿌리 내린 학이라오
◈ 무제
오늘은 종일 쓸쓸한 늦가을 바람이 불다
나는 홀로 솔숲을 거닐면서 시낭송을 들려주다
이 솔 저 솔 애무하며 속삭이듯 들려주다
소나무들은 즈믄 해의 거문고로 일제히 화답하다
◈ 석련지 환상
저 아름다운 연꽃못 뵈시겠지.
드높이 솟아 정토에 열려 있지
그 뿌리는 지옥에 박혔어도
연꽃잎이야 한없이 청정해도
어리석은 자에겐 돌로 뵌다면서?
이 몸은 어둡기 돌보다 더하면서
정토에 원왕생(願往生) 원왕생하여
이 몸의 업장을 맑히길 소원하여
저 연꽃못 둘레를 돌고 돌아
일곱 날 일곱 밤을 돌고 돌아
지치어 쓰러지면 이슬로 녹아질까
연꽃못 채우는 이슬로 스러질까
◈ 선생님 새해에는
저 해를 꿰뚫고 날으는 새처럼
생명의 연소 속에 앞장을 달리소서
저 백두산 천지(天池)처럼 가득히 고인
영감(靈感)의 높이에서 겨레를 살피소서
◈ 장락무극(長樂無極)
향설당 여사의 올해 연하장은
장락무극(長樂無極) 붓글씨 넉 자!
벽에 붙여놓고 조석으로 바라보니
새삼 그것이 삶의 진수임을 알겠구나
처음 그 넉 자를 본 순간 어디서인가
감로가 솟아 나를 촉촉이 적셔주었거니
이어 가슴 깊은 곳 흐르는 시냇물은
줄곧 희열을 시나브로 솟게 했다
어둠은 밝아지고 막힌 것은 뚫리고
피는 맑아져서 들숨 날숨은
더없이 고르게 편하게 되었다
찬미 무궁무진, 그것은 일찍이 내가 했던 말
대긍정과 찬미의 삶이
바로 장락무극(長樂無極)의 근본일세
실상 나는 그렇게 살아왔고, 앞으로도 부단히
그렇게 살 거라는 이 순수지속의 마음
이 세상 도처에 미(美)가 있고
그것을 기리지 않을 수 없는
시인의 혓바닥이 마르지 않는 한
찬미의 노래는 온 우주의 활력소 되리
◈ 새 봄의 기도
이 봄엔 풀리게
내 뼛속에 얼었던 어둠까지
풀리게 하옵소서
온 겨우네 검은 침묵으로
추위를 견디었던 나무엔 가지마다
초록의 눈을, 그리고 땅 속의
벌레들마저 눈뜨게 하옵소서
이제야 풀리는 하늘의 아지랑이
골짜기마다 트이는 목청
내 혈관을 꿰뚫고 흐르는
새 소리, 물소리에
귀는 열리게 나팔꽃인 양
그리고 죽음의 못물이던
이 눈엔 생기를, 가슴엔 사랑을
불붙게 하옵소서
◈ 허(虛)
밤이 되어 찬란한 보석들이 어둔 하늘을 수놓을 때엔
배가 고파도 견딜 수 있어라
실상 이렇게 유리와 같은 가슴의 벽을 넘나드는
투명한 슬픔은 내 아무런 생에의 집착을 지니지 않음이니
아 이대로 돌사람처럼 꽃다운 하늘 아래 단좌하여
허(虛)할 수 있음이여
나는 아노니 이윽고 내 야기(夜氣)에 젖어
차디찬 입가엔 그 은밀한 얇은 파문이 새겨질 것을
◈ 시들지 않는 꽃
시인은 보는 사람
모든 것을, 넋 속의 죽음, 죽음 속의 넋까지도
음악을 듣는 귀엔 고요가 들리듯이
나무를 보는 시인의 눈엔
땅 속의 뿌리가 보이는 것이다
바위까지 꿰뚫고 뻗는
그러나 뿌리는 안 보이는 땅 속에
깊이 묻혀 있어야 한다
줄기가 억세고 그 꽃이 탐스럽기 위해서는
고뇌의 보람은 언제나 꽃,
꽃만이 아름답다
◈ 새 봄의 기도
이 봄엔 풀리게
내 뼛속에 얼었던 어둠까지
풀리게 하옵소서
온 겨우네 검은 침묵으로
추위를 견디었던 나무엔 가지마다
초록의 눈을, 그리고 땅 속의
벌레들 마저 눈뜨게 하옵소서
이제야 풀리는 하늘의 아지랑이
골짜기마다 트이는 목청
내 혈관을 꿰뚫고 흐르는
새 소리, 물 소리에
귀는 열리게 나팔꽃인 양
그리고 죽음의 못물이던
이 눈엔 생기를, 가슴엔 사랑을
불 붙게 하옵소서
◈ 미래의 시인에게
어디서인지 자라고 있을
너의 고운 수정의 눈동자를 난 믿는다
또 아직은 별빛조차 어리기를 꺼리는
청수한 이마의 맑은 슬기를
너를 실은 한 번도 본 일은 없지만
어쩌면 꿈속에서 보았을지도 몰라
얼음 밑을 흐르는 은은한 물처럼
꿈꾸는 혈액이 절로 돌아갈 때
오 피어다오 미래의 시인이여
이 눈먼 어둠을 뚫고 때가 이르거든
남몰래 길렀던 장미의 체온을
활활 타오르는 불길로 보여다오
진정 새로운 빛과 소리와 향기를 지닌
영혼은 길이 꺼지지 않을 불길이 되리니
◈ 유심히 나를
유심히 나를
바라보던 네 눈에 우울한 시름이
고이었는데
이윽고 나에게 가까이 와서는
나직한 목소리로 이르는 말이
내 눈에 오히려
말할 수 없는 깊은 수심이 어리었다고...
◈ 썩은 탐관오리들에게
어떻게 세운 우리의 나라라고!
오 상기하라 아직도 한 방울 피와 눈물이 있다면 상기하라.
다 죽은 줄 알았던 목숨이 살아서 울부짖었던
저 8.15해방의 감격을 묵은 남루(襤樓)의 역사를 벗고 불사조처럼
민주공화국 나래를 떨치려고
우리 얼마나 싸워야 했던가!
또 저 6.25의 검은 살육이 이 땅을
빗발치던 악몽이 아니라, 진정
우리의 짤린 허리와 찢어진 사지가
아직도 미처 아물기 전인
그 틈을 타서 오 너희들 꼴불견인
감투를 쓰고 나르다 재던 무리, 암 누구라고,
이조(李朝)를 잡은 썩은 탐관오리의 후예어늘
반공만 내세우면 정치는 너희들
주머니칼이나 되는 줄 알았더냐.
북진통일은 너희들만의 전매특허는
결코 아니다! 이제야 알았으리 민심은 천심인걸,
그리고 어린이는 바로 어른의 아버지라는 것을
실로 무서운 건 총탄이 아니라
불의에 항거하는 민중의 육탄!
쌓이고 쌓인 울분과 갈구가 십 년 묵은 체중이 뚫리듯이 이렇게 터진거다.
이제 우리 앞엔 확 트인 자유의 대로가 열렸구나.
피로써 찾은 우리의 주권!
그것을 다시 더렵혀 되겠는가.
어떻게 세운 우리의 나라라고!
어 뉘우쳐라 아직도 한 방울 피와 눈물이 있다면 뉘우쳐라.
아니 차라리 혼비백산하라! 너희들 썩은 탐관오리쯤
다시는 이 땅에 얼씬도 말 일이다.
◈ 지상의 소나무는
지상의 소나무는 하늘로 빧어나고
하늘의 소나무는 지상으로 뻗어와서
서로서로 얼싸안고 하나를 이루는 곳
그윽한 향기 난다 신묘한 소리 난다
지상의 물은 하늘로 흘러가고
하늘의 몸은 지상으로 흘러와서
지상의 바람은 하늘로 불어가고
하늘의 바람은 지상으로 불어와서
서로서로 얼싸안고 하나를 이루는 곳
해가 씻기운다 이글이글 타오른다
지상의 소나무는 하늘로 뻗어나고
하늘의 소나무는 지상으로 뻗어와서
◈ 고요는 이제
가장 깊숙한 영혼의 밑바닥에 보이지 않는
언어의 절에까지 꿰뚫고 들어가야
비로소 만날 빛샘물 고요, 무궁의 고요,
고요는 이제 시의 핵심에서나 찾을 수 있다.
◈ 탐라의 길
탐라섬은 섬 전체가 휘황한 보석임.
그 안엔 길이 거미줄처럼
종횡무진으로 신나게 뚫려 있음。
그 길은 천변만화의 길임。
설사 같은 길이라 하더라도
달릴 때마다 새롭게 보임。
설사 같은 풍광이라 하더라도
지날 때마다 다르게 보임。
수시로 안개의 애무를 받아
또는 비바람에 말끔히 씻겨
티끌은 도무지 구경할 수도 없음。
무지개 뜨는 공기는 달고
보석가루 같은 햇빛은 눈부심。
어떤 길은 그대로 하늘에 닿아 있음。
어떤 길은 그대로 바다에 닿아 있음。
어떤 길은 그대로 초록의 터널임。
어떤 길은 그대로 안개의 터널임。
문득 조팝꽃내 코를 찌르는 길。
문득 더덕내 골수에 스미는 길。
문득 억새밭길 있는가 하면
환상적인 삼나무 거목길이。
문득 협죽도夾竹桃길 있는가 하면
개민들레나 찔레꽃 사태 길이。
멀리 한라산은 영원처럼 솟았는데
올망졸망 오름들이 둘레춤 추는 길도,
칠색 띠를 두른 바다에 눈 주며
연거푸 찬탄의 한숨을 쉬는 길도,
구멍 숭숭 뚫린 곰보바위
검은 현무암에 부서지는 파도길도,
은싸락 같은 달빛이 깔린 길도,
들리는 것이라곤 벌레소리뿐인
칠흑의 밤길도, 동트는 새벽길도,
제주도 휘파람새 휘파람 부는 길도,
여러 번 거듭거듭 누비고 달렸으나
번번이 새로운 감동에 흐느낌。
더구나 가도 가도 끝없이 전개되는
대초원길을 달릴 때의 후련한
상쾌함이라니! 가슴이 타악
트이는 맛이라니! 특히 해질 무렵
대초원에 자욱이 이내 낄 때,
하늘 땅이 온통 하나로 녹아
푸르스름한 기운으로 충만할 때
누구들 눈물이 솟지 않으리오
그저 살아 있다는 뿌듯한 충일감에。
탐라에는 끊임없이 전신轉身하지 않는
사물이 없음。하늘도 땅도,
비도 바람도, 대초원도 수많은 오름도,
칠색 바다와 사나운 현무암도
시시각각 달라지는 이유가 거기 있음。
온갖 기화요초, 노루와 조랑말도
족제비도 마찬가지。이따금 느닷없이
푸드덕 날아가는 꿩도 마찬가지。
모든 사물에 원초적인 혁신의 에너지,
기가 넘쳐흐름。그 속에 종횡무진
나 있는 길을 누비고 달리는 일,
미끄러지듯 또는 쏜살처럼
신나게 달리는 일
어찌 그 일이 신선놀음 아니리오。
탐라의 길은 천변만화의 길。
끝없이 이어지는 신비와 환상의 길。
◈ 성산포 일출봉
삼십 년 전에
내가 처음 일출봉에 올랐을 때
나는 감동의 회오리바람으로 압도되었거니
원래 일출봉은
해저에서 솟아오른 소화산도나
언제부터인가 한 쪽이 제주땅에 붙고 말아
삼면이 출렁이는 짙푸른 바다인데
산상 둘레에는
뾰족뾰족 들쭉날쭉 아흔아홉 암봉들이
안의 분화구를 에워싸고 있는 것이
정히 해상의 요새인 것이다
산이 그대로 성채인 것이다
산상의 넓이는 일만 평 된다는데
이 대규모 산정분화구의 핵심을 이룬
최초의 구멍은 크지도 않다
안으로 깊숙이 패이긴 하였어도
넓고 완만한 초지 한가운데
그것이 있다
하지만 나에게는 신비의 신비
가슴 설레며 그 곁을 지났을 때
달나라에 온 것 같은 환상에 빠졌었지
다음날 새벽 일출봉에서
해돋이를 봤을 때엔
우화등선 체험했고
오늘 실로 삼십 년 만에
나는 이곳 일출봉에 올라왔다
관광지로서 이곳이 더욱 정비된 것과
내가 흰 수염을 달고 있다는 것
그 밖엔 달라진 게 없어서 좋았다
나는 여전히 처음과 같은
압도적 감명 받고 한동안 취했으니
◈ 사진가 김영갑金永甲
1.
사진의 매력이
한 젊은이의 뼛속에까지 바람을 넣어
오로지 사진 미치광이로,
미의 사냥꾼, 피사체 찾는 떠돌이 되게,
사진기 둘러메고 방방곡곡을 누비고 다니게
만들 수가 있는 걸까。
그렇다, 김영갑은
오랜 방랑 끝에
최선의 피사체로, 절해의 고도,
제주도를 선택했다。
이래 십여 년
‘섬에 홀려 필름에 미쳐’
그는 제주도를 구석구석 쏘다녔다。
침식을 잊고 작업에 몰두했다。
날감자 하나로 허기를 달래다가
인적이 끊인 오지에서 쓰러지기도 했다。
때로는 간첩으로 오인되는 곤욕을
치르기도 했거니와
홍수를 만나 목숨처럼 소중하게
간직했던 것들, 필름 뭉치들을
몽땅 쓸려 버리기도 하였었다。
게다가 그 삶아도 구워도
못 먹을 옹고집, 자존과 오기라니!
간섭이라고는 죽어도 받기 싫어
세속과는 죽어도 타협이 싫어
그는 우선 가족과의 인연을 끊었다。
친척과도 애인과도 인연을 끊었다。
하여 혈혈단신 절해의 고도에서
그가 자초한 건 고독과 소외。
철저하게
하고 싶은 일에만 몰두하기 위해서는
스물네 시간의
집중과 지속의 도취를 위해서는
오직 사진예술에의
헌신을 위해서는
그럴 수밖에 없다고 믿었기에
그는 완강하게 밀고 나갔던 것。
도대체 고독과 소외가 무엇이냐。
처음 그것은
바늘구멍보다도 비좁고 답답한
벼랑길이겠지만,
이윽고 그것은 광활한 바다로,
하늘땅이 하나 되는
대화엄경大華嚴境으로 통하고 말거늘。
2.
일체의 분심잡념分心雜念을 여의고
오직 한 가지 예술에만 매달려야,
성심성의껏 전력을 기울여야,
그때 비로소 미의 여신은
조금씩 미소를 보내는 법이다。
어느 때부터인가
김영갑 사진에
아연 서광이 비치기 시작했다。
초차원의 새로운 빛이。
아무리 고성능의 초정밀 사진기
이라고 할지라도
그것이 기계의 한계를 벗어나서
어떤 기적적 성취를 이루려면
그것은 전적으로 사진가에 달려 있다。
그가 얼마나 마음을 비우느냐,
그가 얼마나 무아無我와 무위無爲에
투철할 수 있느냐,
그가 얼마나 순수하고 열렬하게
사진예술에 골몰할 수 있느냐,
그가 얼마나 자신의 능력을
극한의 극한까지 신장시키느냐,
그가 과연 사물의 본질을
꿰뚫어 보는 혜안을 갖느냐,
그가 정말
마침내 사진예술을 통해
사랑과 자유를 최대한으로
터득할 수 있느냐에 달렸다 할 것이다。
이런 사진가라야
비로소 하늘의 도움을 받게 된다。
바로 입신入神의 경지가 그것。
바로 천인묘합天人妙合의 경지가 그것。
3.
사계절 따라
기상의 변화 따라, 시간대 따라
보는 위치와 각도에 따라
풍경은 시시각각 천변만화한다。
(특히 탐라의 풍경은 그러하다)
그것이 풍경의 생태라 하더라도
그 진면목,
그 아름다움의 핵심이 도달하는
극치의 찰나를,
사진가는 기어이 놓쳐서는 안 되나니。
그 유일무이한 찰나를 위하여
사진가는 기어이
최적의 촬영장소를 찾아내야,
미리 준비하고 대기할 줄 알아야,
늘 수도하는 마음을 길러야,
그 결정적인 찰나가 다가올 때
마침내 카메라 셔터를 누를 때
마치 기적처럼
탐라의 황홀은 삽시간에 포착된다。
김영갑의 머릿속엔
피사체 따라 다를 수밖엔 없는
최적의 촬영장소,
그것들이 밤하늘 별자리 모양
점 찍혀 있다。
4.
해 질 무렵 세 시간과
해 뜰 무렵 세 시간이
그가 선호하는 촬영시간이다。
한 낮의 무료함
한 낮의 게으름
한 낮의 잡념을 말끔히 쫓기 위해
그는 나름대로 묘법을 갖고 있다。
즉 손을 쓰는 일。
광목을 구해 옷감을 재단하여
염색하고 바느질하는 일。
옷을 빨래하고 풀 먹이고 다리는 일。
또는 목수처럼
식탁이나 걸상을 만드는 일。
헐린 옛집의 목재를 사다가
깎고, 자르고, 반질반질 다듬어서
사진을 넣을 액자를 만들거나,
사진걸이 따위 용구를 만드는 일。
또는 남의 땅에나마
나무를 심고
수석을 갖다 놓고
이끼를 입히거나 난초를 키우는 일。
그는 말하자면
제주도의 로빈슨 크루소인 것이다。
5.
제주도 전체가
그의 야외 촬영장인 셈。
동에 번쩍 서에 번쩍
수시로 출몰한다고 하여
그를 도깨비라 말하는 이도 있다。
사진 제일주의,
촬영시간 우선 확보,
그러다 보니 사람과의 약속도
부실해지는 경우가 있다。
하여 그를 실없는 사람이라고 욕하는 이도。
어쨌거나 그는
다른 무엇보다도 제주도에 홀려 있다。
필름에 미쳐 있다。
거미줄처럼 종횡무진으로 나 있는 길을,
연변에 펼쳐지는 환상적 풍경을,
아무리 보아도 싫증이 안 나고
아니, 볼 때마다 새롭게 다가오는
풍경을 사랑한다。칠색의 바다,
광활한 초원, 멀리서 보면
그대로 제주도 전체이기도 한
한라산을 사랑한다。기생화산들,
오름들을 사랑한다。그 손잡고
춤추는 오름들의 초록의 곡선,
초록의 볼륨, 초록의 평화,
초록의 원경과 근경을 사랑한다。
삼다三多의 섬, 바람과 돌과 해녀뿐
아니라, 섬의 모든 것
공기와 햇빛과 야생화를 사랑한다。
소와 노루와 조랑말을 사랑한다。
비와 안개와 구름을 사랑한다。
해돋이와 해넘이와 이내를 사랑한다。
그에게 있어 제주도는 사랑이고
자유이고 구원이다。
실로 제주도는
티끌 하나 묻지 않는 불멸의 보석이다。
비교를 불허하는 이 나라 산수미山水美의
총집결체다。시간 속의 영원이다。
부단한 매력과 신비의 덩어리다。
그런 보석에
겁 없이 카메라를 들이대는 자신이
허망하게 느껴지는 경우도 있다。
설사 백만 장의
걸작사진이 찍힌다 하더라도
결국 사진이란
티끌로 화하는 것。
하지만 엄연히 미가 존재하고
부단히 유혹의 미소를 던지는 한,
자석에 이끌리는 쇳가루처럼
유혹에 넘어가는 마음이 있는 한,
사진가의 두 눈과 카메라가 있는 한
풍경을 찍으려는, 미를 담으려는
노력은 무궁무진 계속될 수밖에 없다。
어제도 찍었고
오늘도 찍고
내일도 무궁무진 찍을 수밖에 없다。
예컨대 함덕이나 곽지 바닷가
언덕에 서서 (주변에 사람 그림자라곤 없다)
삼각가 세워놓고
하염없이 기적의 순간을 기다리는,
또는 자욱이 이내 낀 저녁
대초원 복판에서
멀리 영원처럼 떠올라 있는
보랏빛 한라산과
그 둘레의 작은 오름들에
카메라 초점을 맞추고 있는
김영갑 모습은
차라리 거인 같다
단독으로 제주도를 덮고 있는。
◈ 섭지코지
섭지코지는 제주도의 제주도다
제주도의 진수인 초원과 오름과 바다의 삼중주다
아니 하늘과 별과 구름과
햇빛과 야생화와 갯바위와 맑은 공기
검붉은 흙과 꿩과 말까지도
하나로 어울리는 목숨 잔치이다
춤추며 노래하는 합환合歡의 자리이다
협잡이 이곳에 틈입해선 안되지만
문명에 지친이여
도시의 혼탁에서 귀를 찢는 소음에서
광란의 속도 무지막지한 차들의 충돌에서
벗어나고 싶은 이여 이곳에 오라
치명적인 수질과 대기의 오염에서
느닷없이 발생하는 도시가스 폭발에서
산성비에서 대낮의 어둠에서
지뢰처럼 복병처럼 도처에 숨어있는
살인 강도 강간의 위협에서
탈출하고 싶은 이여 이곳에 오라
인간적인 너무도 인간적인
갈애渴愛와 증오의 굴레를 못 벗어나
밤낮 지글지글 지지고 볶는 이여
괴로운 사람이여 병든 사람이여
고혈압 당뇨 중풍 동맥경화 신경과민에서
치유되고 싶은 이여 이곳에 오라
섭지코지에 들어오기 위해서는
우선 신발을 벗어야 한다
냄새나는 양말도 벗어 던져야 한다
그리고 맨발로 살뜰히 풀밭을 밟아야 한다
차츰 그대는 발바닥 감촉 통해
온몸으로 굽이도는 초록의 희열을 느끼리라
그 희열로 심신의 찌든 때를 씻어내라
온갖 번뇌 망상을 털어내라
찰거머리 같은 집착을 여의어라
그대의 마음을 아무 데도 두지 말라
허공처럼 비우고 거울처럼 맑히어라
그러면 눈에서 비늘이 떨어지리
그대를 캄캄절벽이게 했던 우치의 비늘이
순간 사방에서 쏟아지는 빛과 함께
비로소 광활한 초원이 펼쳐지리
초원 위에 또 초원 초원 아래 또 초원
초원 옆에 또 초원…
무한으로 이어지는 초록의 목숨 잔치
저절로 아 아아… 초록빛 장탄식이
초록빛 모음이 입술 뚫고 나오리라
초록이 이렇게 부드러운 것일 줄야
초록이 이렇게 아름답고 평화롭고
황홀히 꿈꾸는 신나는 것일 줄야
저 굴레 벗은 초원의 말처럼
그대가 알몸이 될 수는 없다 해도
혹은 저 두 마리 낏낏한 수꿩처럼
저공비행을 할 수는 없다 해도
단추를 풀고 풀밭에 벌렁
누울 수는 있으리라 세념世念을 잊고
홀가분하게 잠들 수는 있으리라
그대의 들숨은 초록빛 될 것이고
그대의 날숨도 초록빛 될 것이리
잠결에도 들려오는 파도 소리
그것은 그대의 꿈꾸는 피를 맑혀
더없이 달콤한 휴식을 안겨 주리
이윽고 눈 뜨거든
이번엔 야생화를 살펴볼 일이다
잘못 만졌다간 찔리기 십상인 꽃
엉겅퀴꽃이 이렇게 탐스럽고
이렇게 곱게 필 수도 있는 걸까
그 자줏빛 꽃빛깔의 신선함과
예쁜 양지꽃의 순노랑을 찬미하라
또한 이곳의 쑥부쟁이꽃은 유난히 크고
산뜻한 보랏빛 지녔음을 찬미하라
햇빛을 찬미하라 구름을 찬미하라
갯바위에 피는 갯메꽃을 찬미하라
보고 또 보고 음미하고 탄복하고
찬미하고 찬미하라 소리높이 찬미하라
참으로 이 찬미한다는 것
그 일을 빼놓고
어떻게 인간이 구제될 수 있으리오
어떻게 인간이 극복되고 정화되고
고양될 수 있으리오
보라 저 바다 넘실대는 푸른 바다
시원의 바다 티끌 하나 없는 바다
보기만 해도 눈물이 솟는 바다
해탈과 현실이 둘이 아닌 바다
죽음과 삶이 하나로 꿰뚫리매
더는 태어날 수도 죽을 수도 없는 바다
늘 새롭게 시작하는 바다
진여眞如의 바다 무궁동 바다
보라 그 바다의 밑바닥에서
어느 날 분출한 저 기생화산들
탐라의 수많은 오름들 중에서도
가장 특이한 모양새 지닌
성산포 일출봉 해상의 성채城砦를
바다가 있는 한 일출봉은 영원하리
뭇 생명의 근원인 바다
바다가 있는 한 갯바위는 영원하리
바다가 있는 한 갈매기는 영원하리
바다가 있는 한 구름은 영원하리
바다가 있는 한 해와 달은 영원하리
그렇다 섭지코지
본질적이 아닌 것 근원적이 아닌 것은
이곳에 도무지 있을 수 없다
본원적인 것에 대한 향수가 없는 이는
이곳에 들어와도 사막과 같으리라
일체의 것이 여기서는 저절로
균형과 조화를 이루고 있다
모든 사물은 아주 선명하게 제 빛깔 지니면서
제 가락대로 제구실 다하지만
전체와의 합일에서 일탈하는 법이 없다
낱낱의 사물이 서로 떨어져 있기는 하나
실은 상호 삼투적 순수연관 속에
숨 쉬고 있다 은밀히 안 보이게
바로 그 호흡이 삶의 에너지
사랑의 순수지속 불멸의 기다
무한 친화력의 근거인 것이다
그렇다 섭지코지
거기엔 기가 때묻지 않은 시원의 에너지가
도처에 바람처럼
넘쳐흐르고 있음을 본다
◈ 제주 칼바람은
제주 칼바람은 바위에도 구멍을 뚫는다。
제주 칼바람은 방풍림도 깎고 다듬는다。
제주 칼바람은 공중의 갈매기도 떨어뜨린다。
제주 칼바람을 가장 잘 견디는 건 엎드린 바다。
◈ 탐라섬 무지개
탐라섬의 아름다운 칠색 무지개,
한쪽 끝은 초원에 박혔지만
다른 한쪽은 보이지 않는다。
아마도 바다에 꽂히지 않았을까。
◈ 오름의 유혹
오름 유혹에
서울서 제주도로
단숨에 날음
오름 올라야
영원에 가닿는다
심신의 탈락
칠십 노옹이
죽기 아님 살기로
오름에 오름
세속 여의고
우화등선 하려면
오름 올라라
◈ 돌하르방
비 오나 바람 부나 돌눈을 부릅뜬 채
제주도 돌하르방 늘 빙그레 미소를 흘리시네
돌은 너로 하여 천 년도 순간임을 깨달은 모양
공기는 너를 따라 늘 빙그레 웃는 법을 익혔다네
◈ 다랑쉬오름
다랑쉬는 오름 중의 여왕이다。
크고 의젓하고 품위가 있다。
다랑쉬는 주변의 모든 오름들의 거울이다。
다랑쉬는 그 안이 온통 깔때기 모양
둥글고 깊게 패인 굼부리임을
감쪽같이 숨기지는 않는다。
오히려 살짝 암시하고 있다。
다랑쉬는 보름밤이면 희고 둥근 알,
은쟁반 같은 달을 쏘아올린다。
그러고는 슬그머니 풀빛 옷을 벗고
황홀히 아름다운 살결을 드러낸다。
다랑쉬는 한낮에 더러 심심할 때엔
패러글라이더 날리기도 한다。
다랑쉬는 사람들이 새가 된 양 활공하며
기뻐하는 모습을 즐기는 것이다。
다랑쉬는 초원을 사랑한다。
특히 흰 찔레꽃을 너무도 좋아한다。
달빛 받고 반투명이 된
다랑쉬 살결에서 찔레꽃 향기가
풍기는 것은 그래서인 것이다。
다랑쉬는 오름 중의 여왕이다。
크고 의젓하고 품위가 있다。
◈ 아끈다랑쉬
아끈다랑쉬
새끼다랑쉬
하지만 그 야트막한 오름 위로
한 발 들어서면
누구나 새로운 체험을 하게 된다
대우주 공간으로 활짝 열려있는
원형의 풀밭
생각보다 엄청 넓다
약간 패인 듯한
풀밭 한가운데 굼부리는 있겠지만
보이지 않는다
어떤 불가사의한 향기에 이끌리어
무성한 풀밭 사이 영원에 닿아있는
오솔길 따라 가면
무한정 걷다 보면
대기권 밖의 외계인 신세가
될지도 모를 일
그렇다 이 특별한 오름은
아득한 그 옛날 이곳에 불시착한
비행접시인 것이다
U. F. O.
◈ 추자도(楸子島) 첫날
1
유인도 네 개에 무인도 서른 여덟
제주의 다도해多島海
하지만 막상 가까이 가 보면
외롭지 않은 섬이 없다
크면 큰대로 작으면 작은대로
무궁무진 무량의 검푸른 바다로
둘러싸인 까닭이리
섬의 가장자리
왜 그 대부분이 요새와도 같은
갯바위들인지 알 만하지 않겠는가
2
새똥으로 하얗게 덮인
작은 바위섬
그 위에 앉은 검은 가마우지
그 한 마리가 어찌나 커 뵈는지
그 가마우지의 검은 고독보다
더 준열峻烈한 삶은 없다
잔뜩 드리운 흐린 하늘과
사나운 파도로도 어쩌지 못한다
3
직구도直龜島 한쪽은 천야만야 바위 절벽
그 꼭대기에 미동도 않고 서 있는 검은 염소
일자一字 눈에는 수평선밖에
뵈는 게 없으리
염소는 언제부터 그렇게 서 있을까
절벽 아래 험상궂은 갯바위엔 여기 저기
홀로 떨어져서 서 있는 낚시꾼
낚시를 드리운 채 미동도 않고 있다
그의 눈엔 ‘찌’밖에 뵈는 게 있겠는가
지금 이곳이 그에겐 천국天國이다
오늘 하루만은 처자도 잊고
생업도 뿌리치고 무념무상無念無想에 젖는 재미
이런 때 고기들은 어김없이 걸려든다
보라 이 엄청 큰 농어의 요동을
붉은 빛 참돔이 황금알 낳는 것을
4
멀리 가물가물 절명도絶命島 모양은
꼭 바다 위의 작은 피라미드
낚시꾼들에겐 무한한 매력 지닌
황금어장이라지만
그곳 지극히 험상궂은 갯바위
겨우 한 사람이나 웅크릴 만한
포인트에는 무서운 자력磁力 있어
일단 낚시를 드리운 낚시꾼은
꼼짝도 못한단다
시간을 잊고 공간도 잊는단다
그러다가 갑자기 (끔찍도 하여라!)
하늘 흐리고 풍랑風浪이 세게 일면
낚시꾼은 별수없이 당하고 만단다
검푸른 바다의 새하얀 이빨로
5
추자민박집엔
이우석李禹錫 씨가 격렬한 고전 끝에
바로 어제 낚았다는
돌돔의 광목 탁본 벽면에 걸려 있다.
몸길이 69센티
몸무게 5.2킬로
그만하면 어김없는 신기록이라는 것
돌돔은 바야흐로 물방울 튀기며
광목 밖으로 광목 밖으로
뛰쳐나올 듯한 생생한 기세다
◈ 씨앗
하나의 씨앗이 마침내 다른
하나의 씨앗으로 남기까지
그 많은 싱싱한 줄기와 잎들과 꽃은
씨앗의 꿈이었나 삶의 노래였나
◈ 초록 예찬
조물주가 지상의 태반을 초록으로 물들인 것은
너무도 잘 한 일, 너무도 잘 한 일.
만약 초록 대신 노랑이나 빨강으로 물들였다면
사람은 필시 눈동자가 깨지거나 발광하고 말았으리.
◈ 잎이 시들면 떨어지듯이
잎이 시들면 떨어지듯이
우리도 자라면 처음이 자리에서 까마득하게
떨어진다는 것을 예전엔 몰랐어요.
내 어린 수정의 눈동자가 맑기만 해서
뭇 형상이 그 안에 도사릴 티가 없었을 때
또 이 손이 고사리처럼 귀여웠을 땐.
시간은 없었지요. 연지빛 노을 속을
뜨는 해, 지는 해가 낮과 밤을 번갈아 불러
들었을 따름. 울긋불긋한 세상은 언제나
조금은 무서웠고 조금은 덩달아 줄거웠지요.
그런데 나의 잔뼈가 굵어진 먼 여로에서
돌아온 어는 날, 나는 보았어요 산천은 어이없이
바뀌었다는 것을. 내 거기 벗들과 멍석딸기를
따기도 하고 뛰놀던 숲이 겨우 다복솔 몇 그루
뿐인 것을. 또 사철 가슴의 높이까지 흐르던
냇물의 신비는 사라지고 바닥이 드러나서 송사리
한 마리 없다는 것을. 내 기억 속에 그 빛바랜
이름만 남겨 좋고 지금은 그림자도 없는 벗들.
나는 알았지요 우리도 이젠 떨어졌다는 것을.
가없는 사막 위에 촉각을 잃은 개아미처럼
헤매는 우리, 이제 다시는 그 천상의 보석 방석 같은
처음의 자리에로 되돌아갈 수는 없다는 것을.
그동안 함부로 눈물을 탕진해서 흐려진 눈동자와
그동안 지은 죄로 더럽힌 이 손을 가지고서는.
◈ 시보다 맑은 시
샘물 같은 시를 읽다가
출출해진 아이들 성화에
곰삭은 김장김치 한 포기 꺼내어
김치전을 부친다
두근거리는
다음 한 구절이 안타까워
후라이팬을 잡은 손은
분주히 떨리는데
맛스럽게 쏘옥쏙
잘도 집어먹는
아이의 분홍색 입술은
한길 우물에서 막 건져낸
시린 물 한 두레박이 되어
주르륵 그 시의 다음 연이 된다
◈ 백두산 미인송
미인송 키가 왜 그렇게 큰지 아십니까?
그 뿌리가 땅속에 스민
백두산 하늘못 물에 닿았기 때문。
보통 사람 눈엔 미인송 우듬지가
왜 보이지 않는지 아십니까?
그 높이가 하늘 뚫고 별들에 닿았기 때문。
하지만 영성적 투시력 지닌 사람에겐
분명히 보입니다。대낮에도
미인송 가지에는 수많은 별들이
보석처럼 주렁주렁 열려 있는 것이。
◈ 서백두 노호배老虎背 길
서백두 정상 향해 오르는 길 따라
쉬엄쉬엄 가는데,
지팡이 짚고 백발에 흰 수염 길게 늘인 것이
예사롭지 않았던지
하산길의 중국 청소년들
왁자그르르 내게로 몰려온다。
만면에 웃음을 머금고 있다。
같이 사진을 찍자는 거다。
하, 나도 웃으며 포즈를 취했다。
그런 패거리를 두어 차례 만났지만
(나중에 들으니 일행 중 한 사람이
한국에서 도인이 왔다고 귀뜸한 모양)
인산인해 이룬 서백두 정상 일대
운무에 가려져서
천지天池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일행은 내일을 기약하기로 하고
노호배老虎背 길로 하산하잔다。
노호배, 노호배라!
늙은 호랑이 등허리 길이라니,
이름 참 멋지구나。
확 트인 전후좌우 전망도 좋거니와
완만하게 경사진 길을
호랑이 등허리라 생각하니
절로 신이 난다。우리 조상들은
그 옛날 이런 호랑이 타고
길림성 밀림지대 누비지 않았을까。
발치를 살피니
일대는 온통 야생화 투성이다。
밤하늘 별들이 떼 지어 내려와서
수줍게 미소 짓고 있는 듯도 하다。
꽃은 작을수록 예쁘다더니,
여기는 노랑빛 잔물결 이루었고
저기는 보랏빛 융단을 깔았네。
허리 구부리고 코를 갖다 댄다。
한두 송이 따서 가슴에 꽂는다。
옆에 다가오는 사람이 있다。
수필가 권오분 씨,
야생화를 유난히 사랑하는 분이다。
제비꽃만 따모아 혼례식 때
꽃다발로 삼았다니 더 말해 무엇하랴。
불쑥 코앞에 꽃을 내밀면서
무슨 꽃인지 아느냐 한다。
‘두메양귀비’ 아닙니까?
얼결에나마 맞춘 게 신통하다。
내가 아는 야생화란
쑥부쟁이나 엉겅퀴가 고작인데。
멀리 벽공엔 흰 구름 둥실둥실,
꽃바람이 향기롭다。
일행은 약속이나 한 듯이
풀밭에 주저앉아 탄성을 지른다。
공기가 꿀맛이네!
햇살은 마치 백금 가루에 향수를 친 듯
온몸에 두루 뒤집어쓰고 싶다。
마침 어느 분이 주섬주섬 배낭에서
‘참이슬’을 꺼낸다。
일행은 그야말로 구세주 만난 듯
밝은 표정이다。 저마다 있는 것
다 털어 놓으니, 즉석에서
작은 파티가 열릴 수밖에。
한 잔 술에 그렇게 흥이 날 수가 없다。
노래와 춤이 절로 솟구친다。
악의라곤 없는 호언장담에
농담도 나오고 패설도 나온다。
그러나 어떤 비속어들도 이곳에서는
깡그리 정화淨化되어
바람에 날리는 꽃가루일 뿐이다。
지금 이곳에 흐르고 있는 것은
대호연지기大浩然之氣 바로 그것이기에。
이윽고 일행은 자리에서 일어선다。
술이 떨어진 때문만이 아니다。
해가 지기 전 하산해야 되므로。
결국 하산길은 더불어가 아니라
뿔뿔이 홀로가 될 수밖에。
오르락내리락 험한 길이
한없이 이어져서
무거운 발 내딛는 것이 나로선 쉽지 않다。
나중엔 그만 우거진 자작나무
밀림에 휘말려서
여러 번 헛딛고 미끄러지기도。
문득 지용의 이런 시구 떠올랐다。
「백화白樺 옆에서 백화가
촉루髑髏가 되기까지 산다。
내가 죽어 백화처럼
흴 것이 숭없지 않다」
늙은 호랑이 등허리 길 타는 일이
쉽지만은 않았지만
오늘은 아주 기분 좋은 날이었다。
◈ 장백폭포長白瀑布
좀 거리를 두고 보면
분명 세 갈래로 떨어지는 물줄기,
순백의 장백폭포!
가까이 가서 옆에서 보면 한 줄기인데
와, 와, 와, 와, 무서운 속도로
떨어지는 물벼락! 엄청난 수량水量!
물 두께가 굉장하다。백만 섬
진주알을 간단없이 쏟아 붓고 있는 걸까。
그 속에 한번 휘말려 들어가면
하늘 땅 찢는 굉음에 귀 먹고
순식간에 흘러내려
정신이 들었을 땐 만주 광야 누비다가
멀리 송화강松花江 끝자락에나
가 닿아 있을지도。
그러면 송화강은
내게 이렇게 속삭일 지도 몰라。
여보게, 이 사람아
자네는 바로 대고구려인 후예가 아닌가。
만주 광야 누빈 기분이 어떤가。
그 옛날 말 달리던 조상들 웅지와
기백을 한번 떠올려 보게。
나는 여전히 장백폭포 보고 있다。
저 엄청난 수량의 근원은?
저렇게 무궁무진 쏟아져 내려도
줄지도 않고 늘지도 않는 까닭은 무엇인가?
일 년의 절반은 눈과 얼음에 잠겨있는 곳,
이천칠백 미터 백두산 정상에
넓고, 크고, 깊게 고여 있는 신비의 호수,
하늘못 있기에 가능한 일 아닌가。
하늘못 있기에 송화강뿐 아니라
압록강 두만강도 부단히 흐르나니。
우리 배달겨레 생명의 근원,
어서 저 하늘못으로 경배하러 가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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