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재영 시인(1948년~ ). 충남 천안
경희대학교 문과대학 겸임교수
1973년 [풀과 별]에 시 '그믐'으로 등단.
중앙시조대상, 오늘의 시조문학상 수상
유재영 시.시조 모음
▶ 여름 이후
훗잎나무 아래
청동 빛 곤충 몇 마리
작은 허리로 울고
사랑은 늦은 저녁 한때
셀로판지처럼 투명하구나.
지금쯤 우리들의 별자리에는
무슨 색깔의비가 내릴까.
문득 다가오는 정갈한 공포여
꼿꼿이 긴장한 어둠 사이로
내 사춘기의 물소리가
하얀 등을 보인다.
▶ 깨끗한 슬픔
눈물도 아름다우면 눈물꽃이 되는가
깨끗한 슬픔 되어 다할 수만 있다면
오오랜 그대 별자리 가랑비로 젖고 싶다
새가 울고 바람 불고 꽃이 지는 일까지
그대 모습 다 비추는 거울이 되었다가
깨끗한 슬픔 하나로 그대 긴 손잡고 싶다
▶ 봄의 원근법
모래무지가 물살을 빤히 쳐다보다가
괜시리 화들짝 놀라 바위틈으로 숨는
그 시간,
느릅나무 나이테는
남쪽으로
조금 더 기울었다
▶ 첫사랑
말간 햇빛 속을
혼자 우는 새가 있다
부드러운 물소리에도
금이 가는 돌이 있다
첫사랑
모올래 숨긴
단물 들던 그 가을!
▶ 꽃의 조건
일어서고 다시 스러지는
그윽한 빛의 사유와
내면 가까이 물이 되어 흐르는
귀여운 음계音階들의 작은 속삭임
하나 둘 셋 넷
분홍빛 품사들은 제가끔
비인 자리마다 향기로 날아가
하늘 저 멀리
초록색 꿈을 끌어당긴다.
아아 하나의 거룩한 아름다움은
죽음의 신비보다도 깊은 것!
이 세상
모든 빛깔들이
모음과 자음으로 짜여지고
우리들 빛이 마지막 퇴적을
끝낼 때
나는 그 그늘 아래를
비극처럼 살고 싶다.
▶ 오월
상추꽃 핀
아침
자벌레가
기어가는
지구 안쪽이
자꾸만
간지럽다
▶ 칠월―햇빛 시간·5
언덕을
넘어오는
저 무량의
바람에도
초록빛
똥처럼
나뭇잎에
앉아 있는
청매미
울음소리가
지워지지
않는다
▶ 불일암 달맞이꽃
화살표를 따라
불일암에 올랐더니
걸어온 돌길들이 문득 환하다.
▶ 시월
목이 긴
그 가을
씨방엔
잘 여문
갈색 안부가
점자처럼
모여 있고
아직도
은조롱
마른 잎사귀에
파랗게
묻어 있는
지난여름
비단 벌레
기어가던
소리
오오,
누구의 별자리냐
멀리
기우는
북극성
문득
창을 여는
아이의
이마가
▶ 시월도 이런 날은
수목 빛 그 가지 끝
간지럼 잘 타는
휘바람 새 한 마리
햇빛도 금이 가는
시월도 이른 날은
갈대꽃 십리 길이
은잎새 같아라.
올 가을 씨방에는
감보다 마알간 꿈이
점자처럼 모여 살고
손차양 눈빛 멀리
자꾸 누가 올 듯싶다.
▶ 뻐꾸기로 우는 봉분
해마다 모시면서 그 해 봄도 함께 묻어
해마다 이맘때면 뻐꾸기고 우는 봉분
옆 자리 우리 어머니 함께 듣고 계실까
저승도 보인다는 오동꽃 환한 날엔
눈에 익은 행서체로 나직히 휘어지는
그 말씀 무릎을 꿇고 잔처럼 받습니다
▶ 익명의 등불
풀무치 날아간 숲 무슨 일이 일어나나
자음과 모음으로 다 못 쓰는 수사학
우리들 찔레순 사랑 등성이를 넘는다
억새에 베인 바람 우우우 몰려가고
초롱꽃 이운 자리 멀리 가는 향기 있어
그 날 밤 잠 못 이루던 익명의 등불 하나
▶ 무채색 사내-김상유 <연못>
불혹의 물살들은 휴식하는 자세로
그 위를 오리 둘이 예서체로 서 있다
바람은 세상 밖에서 길 없는 길을 가고
화려한 적막처럼 서쪽으로 달이 한 채
호올로 피고 지는 환각 같은 명상이....
무채색 사내 하나가 아득하니 앉아 있다
▶ 저 경이(驚異)-김상유 <花開>
봄은 며칠 동안 햇빛만을 키웠다
어깨 넓은 나무와 창 밝은 집도 한 채
하늘엔 연기 한 줄기 단음절로 떠 있고
털갈이 마악 끝낸 부리 연한 새 두 마리
불현듯 피어난 저 경이를 보고 있다
그 시간 형용사처럼 날아가는 나비 한 쌍!
▶ 햇살이 놀러와서
아가위 열매 익자 가만 휘는 무게여
잎사귀 뒤에 숨은 고 열매 빛깔까지
벌레에 물린 가을이 가랑잎처럼 울었다
보랏빛 여운 두고 과꽃으로 지는 하루
오늘은 한종일 햇살들이 놀러 와서
마른 풀 남은 향기가 별빛처럼 따스했다
▶ 그 해 가을 월정리
적막한 무게 이고 서서 피는 들꽃이여
투명한 기척으로 낯선 별이 지고 있다
길 숨긴 잡목림 너머 등불 켜는 작은 집
어느 마을 누군가 이별을 하고 있나
가을새 날개 소리 먹물처럼 번져 가는
대숲은 음력달 한 채 가슴 속에 묻었다
▶ 다시 월정리에서
정강이 말간 곤충 은실 짜듯 울고 있는
등 굽은 언덕 아래 추녀 낮은 집이 한 채
나뭇잎 지는 소리가 작은 창을 가리고
갈대꽃 하얀 바람 목이 쉬는 저문 강을
집 나간 소식들이 말없이 건너온다
내 생애 깊은 적막도 모로 눕는 월정리
▶ 사월도 상순 무렵-햇빛시간 1
미나리 새순 같은
사월도 상순 무렵
초록빛 따옴표로
새 한 마리 울다 가면
내 누이
말간 눈물엔
나이테가 돌았다
▶ 어린 바람 한나절-햇빛시간 2
종이배 등 떠미는 어린 바람 한나절
아직도 일곱 살 때 헤어진 물소리가
삘기꽃 목마른 언덕 은빛 새가 와서 운다
덩굴손 머문 자리 연둣빛 자국 같은,
관절 긴 생각들이 그렇게 물이 들고
키 낮은 무덤 너머로 낮달 하나 떠 있다
▶ 그 세상-햇빛시간 3
아무도 모른다
나뭇잎 뒤 그 세상
버려 둔 생각들이
귀리처럼 자랐구나
누군가
새로 난 창을
가만히 열고 닫는,
▶ 둑방길-햇빛시간4
개오동 밑둥 적시는
여우비도 지났다
목이 긴 메아리가
자맥질을 하는 곳
마알간 꽃대궁들이 물빛으로 흔들리고,
빨강머리물총새가
느낌표로 물고 가는
피라미 은빛 비린내
문득 번진 둑방길
어머니 마른 손 같은 조팝꽃이 한창이다
▶ 칠월-햇빛시간 5
언덕을 넘어오는
저 많은 바람에도
초록빛 똥처럼
나뭇잎에 앉아 있는
청매미
울음소리가
지워지지 않는다
▶ 종이배 한 척-햇빛시간 7
오늘도 뻐꾸기가
후렴처럼 와서 우는
그 마을 여울목엔
유년의 시간들이
지금 막
종이배 한 척
하얀 돛을 내린다.
▶ 여울목 한나절
허리 가는 바람이 자꾸만 간지러워
뿔대 말간 달팽이 천천히 옮겨 가고
장다리 푸른 꽃대엔 봄을 물고 앉은 새
낮달도 풀물이 든 여울목 한나절은
피부 하얀 햇빛들이 레이스를 짜고 있다
호밀밭 지나서 오는 메아리도 은빛이다
▶ 장자 내편을 읽다
어제의 햇살은 확실히 부드러웠다
입추를 보내고 난 셔츠 색깔은 다갈색이다
바다는 더 큰 돛배를 멀리멀리 띄우리라
새들은 새로운 가사로 노래를 바꾸고
손님맞이 잔술도 오래 전에 끝났다
접어 둔 책갈피 열자 달도 크렁 밝았다
▶ 장자 외편을 읽다
- 차운次韻 강현덕 시인
푸른 감 몇 개가
저절로 떨어지고
슬픈 생각 하나가
별이 되고 있었다
까칠한
벌레 울음이
점선처럼 나는 밤.
▶ 생가의 밤
종갓집 용마루에 음각으로 달이 뜨고
우리 누님 울음처럼 월화꽃이 지고 있다
스무 살 나의 어둠도 함께 지고 있었다
언제나 흰 두루막 해서체로 꼿꼿하신
아버지는 일생을 먹을 갈듯 사셨다
사랑채 큰 그림자가 빈 가득 앉는 밤
▶ 그 여름의 명상
섬진강 물소리가 평사리를 지날 때
소린 없고 빛만 남아 마른들을 적시더라
은어도 하늘빛 닮아 반짝이는 이런 날
지리산 어린 바람 오던 길로 달아나고
비 개인 대숲으로 맑게 트인 산새 울음
초록빛 오 저 사투리 화두처럼 듣는다
▶ 월포리 산조
녹이 슨 배경 하나 비스듬히 버려졌고
그 날 밤 빈 배 두엇 저음으로 가라 앉는
바다는 4악장쯤서 가로 접혀 있었어
하얀 뼈로 떠오르는 달이며 늙은 구름
누군가가 가만히 해안선을 끌고 와서
먼 기억 풍금 소리를 꺼내 듣고 있었어
▶ 무변기4
어둠은 조금씩 상하기 시작했고
이제 남은 것이란 한 접시 절망뿐
아득히 살아 빛나는 한 접시 절망뿐
흰 이빨로 갈리는 이 세상 어디쯤
아 마지막 강물같은 것이 풀리고
크낙한 셔터 하나가 내려지고 있었다.
▶ 가을에
1
마른 잎에 얹히는
그리움의 무게처럼
까마득 지난 생각
눈물보다 맑아서
마음속
숨겨둔 갈피
등을 거는 먼 사람
2
연잎만 한 세상에서
가을이란 남은 여백
사소한 소리에도
햇빛들은 금이 가고
갈대꽃
야윈 가슴만
하얀 뼈로 우느니
▶ 남과 북
산들은
푸른 갈기를 세운채
저마다 목덜미를 숙이고 말없이
말없이
자욱한 세상을 내려다보고 있다
▶ 햇빛 좋은 날-가을詩 1
생각마저 갈색뿐인
햇빛 차암 좋은 날
등 마알간 바람이
길을 가다 멈춘 곳
마가목
고, 가지 끝에
초롱 닮은 알집 하나!
▶ 다 못 쓴 시-가을詩 2
지상의
벌레소리
씨앗처럼
여무는
밤
다 못 쓴
나의 시
비워둔
행간 속을
금 긋고
가는 별똥별
이 가을의
저 은입사(銀入絲)!
* 은입사 : 청동이나 주석 등에 새겨 넣은 은 줄.
▶ 그리운 편지 -꿈같은 절망6
행간들은 말없이
가슴을 풀어 놓고
그 사이를 보랏빛 음성
누가 이 한장 종이 위에
가만히
받아 놓았나
그대의 안부들이
일인칭으로 반짝이는.
▶ 그리움 너머 -꿈같은 절망15
그리움 너머로 또
얼마나 많은 햇빛들인가
숲속으로 허리를 감추는
바람 소리가 사치스럽다
저 빈 들의 고요처럼
잠시 세상이 바이올렛 빛일 때
찬란함이여.
숨겨 둔
그대 사랑 하나
▶ 물로 그린 그림
누가 나에게
우리나라 가을을 실제 크기로 그리라고 한다면
나는 항아리에 물을 붓고 기다리겠습니다.
저 푸른 하늘이 다 잠길 때까지
▶ 홍시를 두고
1
첫서리 내린 마당 누구의 발작처럼
어디서 날아왔나 등 붉은 감잎 한 장
고향집 노을이 되어 사뿐히 누워있네
2
지우고 고쳐 쓰다 확 불 지른 종장(終章)같이
와와와 소리치면 금방 뚝 떨어질 듯
우주 속 소행성 하나 발그라니 물이 든다
3
굽 높은 그릇 위에 향기 높은 전신 공양
가만히 귀 기울면 실핏줄 삭는 소리
말갛게 고인 저 투명 문득 훔쳐 갖고 싶다
▶ 백년의 그늘
새 한 마리가 똥을 누네.
느릅나무 가지 사이로 반짝,
빛나는 지상의 얼룩.
조금 전 밀잠자리 사냥으로 배가 부른 채
어슬렁어슬렁 산책을 즐기시던 버마재비가
순간 놀라 속옷까지 다 보이며 날아가네.
며칠 전 알에서 깨어난
금빛어리표범나비 날갯짓 한참하고 가더니
오랫동안 입 다물고 있던 금강초롱이
비로소 꽃이 되었다.
보는 이 없어도 그냥 이루어지는
저 아름다운 기교여 소풍 나온 어린 바람
저희끼리 치고받으며 히히대고
어느덧 개망초꽃 너머 한결 팽팽해진 햇빛들,
느릅나무는 오늘도 그냥
그 자리 백 년도 더 된
커다란 그늘을 평평하게 깔고 있었다.
▶ 또 다른 세상
말간 귀를 세운
은사시나무가
비발디를 듣고 있다
야윈 바람은
가볍게 가볍게
발을 헛딛고
방금 숲에서 달려 나온
찌르레기 울음소리가
또 다른 세상을
만나고 있다
얼마를 버리고 나면
저리도 환해지는 것일까
오늘도, 나뭇잎에는
나뭇잎 크기의
햇살이 얹혀 있고
눈물에는 눈물 크기만 한
바다가 잠겨 있다
▶ 소리
벌써
몇 번째
어둠을 뚫고,
고요에
이마를
부딪치는
열매가 있다.
▶ 이 순간
덩굴손 긴 봄날이
흘림체로 쓰여 지고
뻐꾸기 울음소리에
번져 가는 푸른 적막
못 이룬
지상의 꿈이
메꽃으로 지고 있다
▶ 물총새에 관한 기억
작자 미상 옛 그림 다 자란 연잎 위를
기름종개 물고 나는 물총새를 보았다
인사동 좁은 골목이 먹물처럼 푸른 날
일곱 문 반짜리 내 유년이 잠겨 있는
그 여름 흰 똥 묻은 삐딱한 검정 말뚝
물총새 붉은 발목이 단풍처럼 고왔다
텔레비전 화면 속 녹이 슨 갈대밭에
폐수를 배경으로 실루엣만 날아간다
길 없는 길을 떠돌다 되돌아온 물총새
▶ 익명의 등불
풀무치 날아간 숲 무슨 일이 일어나나
자음과 모음으로 다 못 쓰는 수사학
우리들 찔레순 사랑 등성이를 넘는다
억새에 베인 바람 우우우 몰려가고
초롱꽃 이운 자리 멀리 가는 향기 있어
그 날 밤 잠 못 이루던 익명의 등불 하나
▶ 햇살들이 놀러 와서
아가위 열매 익자 가만 휘는 무게여
잎사귀 뒤에 숨은 고 열매 빛깔까지
벌레에 물린 가을이 가랑잎처럼 울었다
보랏빛 여운 두고 과꽃으로 지는 하루
오늘은 한종일 햇살들이 놀러 와서
마른 풀 남은 향기가 별빛처럼 따스했다
▶ 박재삼의 어린 바다
천 년의 바람도 여기서 시작이다
나뭇잎 반짝이듯 저 소슬한 이치여
가볍고 연한 허기증 아득하면 되리라
가늘고 먼 울음을 이제는 누가 듣나
오늘도 더 푸르게 자맥질하는 바다
어쩌면 그것은 모두 가망 없는 허무였다
첫사랑 물소리도 제삿날 불빛들도
어린 시절 익혔던 친구들의 이름도
끝없이 그리워지는 저 햇빛 속으로
없는 듯한 세상을 설움도 넉넉하게
눈물로 아로새긴 은빛 문양이었다
그것은 꽃으로 서서 지켜보는 어린 바다
▶ 겨울 당초문
북극성을 비껴가는 외기러기 울음소리
보랏빛 별을 보던 그 소년도 떠나가고
우물 속 가을 잎새가 일생을 보내는 밤
먹물 삭은 궁서체를 운문으로 읽다 보면
누군가 먼저 짚은 아득한 감탄사여
미닫이 밝힌 절구絶句가 댓잎보다 푸르다
▶ 운문사 가는 길
기러기 한 쌍만이 어젯밤에 날아갔을
숲 짙은 대숲 아래 지체 높은 어느 문중
남겨둔 월화감 몇 개 등불 마냥 밝구나
장삼 입은 먹바위 햇빛도 야윈 곳에
무심코 흘림체로 떨어지는 잎새 하나
가만히 바라다보면 참 아득한 이치여
사랑도 그리움도 어쩌지를 못 할 때
청도 운문 골짜기 구비구비 돌아나온
득음은 저런 것인가, 옷을 벗는 물소리
▶ 여울목 한나절
허리 가는 바람이 자꾸만 간지러워
뿔대 말간 달팽이 천천히 옮겨 가고
장다리 푸른 꽃대엔 봄을 물고 앉은 새
낮달도 풀물이 든 여울목 한나절은
피부 하얀 햇빛들이 레이스를 짜고 있다
호밀밭 지나서 오는 메아리도 은빛이다
▶ 생가의 밤
종갓집 용마루에 음각으로 달이 뜰고
우리 누님 울음처럼 월화꽃이 지고 있다
스무 살의 나의 어둠도 함께 지고 있었다
언제나 흰 두루막 해서체로 꼿꼿하신
아버지는 일생을 먹을 갈듯 사셨다
사랑채 큰 그림자가 빈 뜰 가득 앉는 밤
▶ 혼자 온 가을
줄기 삭은 갈대밭 기러기 마른 울음
몰래 익은 산초열매 가지 끝이 휘어지고
낙엽 진 산허리 돌며 등고선이 풀어진다
길 떠난 동고비 아직 오기 이른 시간
긴 목하고 서 있는 구절초 야윈 대궁
저만큼 중년의 구름 만연체로 떠 있구나
가만히 불러 보면 물빛으로 다가서는
첫사랑, 그 이름이 더욱 맑게 보이고
올해도 가을은 혼자 뒷모습만 두고 갔다
▶ 이 가을 들자
오는 봄 가는 봄을 쑥국새만 날리더니
온 여름 두고두고 꽃물만을 재우더니
새로이 이 가을 들자 귀뚜리로 우는 손톱
강바람 불어 오는 쑥내 하얀 언덕배기
뉘 감밭을 질러왔나 저 기러기 떫은 목청
소년은 손차양 멀리 자꾸 누굴 기다리고
손금 행간마다 화안히 불을 밝혀
가을을 서두 빌려 고이 접은 사각 봉투
마음은 파란 휘파람 산번지를 달린다
▶ 남풍권
내 손금 어둔 골짝
풀려나는 이 쾌청
경사진 뉘 꿈밭
뒤적이던 풀무치는
고, 동작
손에 얹힐 듯
푸른 운韻만 쪼아대네.
▶ 가을 손님
여름이 떠나가는 마른 풀잎 사이로
밤새 벌레 울음이 가등처럼 하얗고
쓰다 만 그대 안부가 반쯤 젖어 있구나
놓아 둔 어둠 저쪽 길 밖에 길이 있어
기억의 지번地番으로 목선 저어 오는 이
내 갈밭 그 몇 평 근심 서걱이며 오는 이
'☞ 문학의 뜨락'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신석정 시 모음 (0) | 2022.08.16 |
---|---|
솔제니친의 시 몇 편 (0) | 2022.08.13 |
황무지1. 하마 - T.S 엘리엇의 시 두 편 (0) | 2022.08.08 |
조선시대의 유명 시조 모음(2) (0) | 2022.08.04 |
조선시대의 유명 시조 모음(1) (0) | 2022.08.0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