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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詩 같은 삶을 위하여
☞ 문학의 뜨락

유재영 시.시조 모음

by 石右 尹明相 2022. 8. 9.

 

 

유재영 시인(1948~ ). 충남 천안

경희대학교 문과대학 겸임교수

1973[풀과 별]에 시 '그믐'으로 등단.

중앙시조대상, 오늘의 시조문학상 수상

 

 

유재영 시.시조 모음

 

 

여름 이후

 

훗잎나무 아래

청동 빛 곤충 몇 마리

작은 허리로 울고

사랑은 늦은 저녁 한때

셀로판지처럼 투명하구나.

지금쯤 우리들의 별자리에는

무슨 색깔의비가 내릴까.

문득 다가오는 정갈한 공포여

꼿꼿이 긴장한 어둠 사이로

내 사춘기의 물소리가

하얀 등을 보인다.

 

 

 

깨끗한 슬픔

 

눈물도 아름다우면 눈물꽃이 되는가

깨끗한 슬픔 되어 다할 수만 있다면

오오랜 그대 별자리 가랑비로 젖고 싶다

 

새가 울고 바람 불고 꽃이 지는 일까지

그대 모습 다 비추는 거울이 되었다가

깨끗한 슬픔 하나로 그대 긴 손잡고 싶다

 

 

 

봄의 원근법

 

모래무지가 물살을 빤히 쳐다보다가

괜시리 화들짝 놀라 바위틈으로 숨는

그 시간,

느릅나무 나이테는

남쪽으로

조금 더 기울었다

 

 

 

첫사랑

 

말간 햇빛 속을

혼자 우는 새가 있다

 

부드러운 물소리에도

금이 가는 돌이 있다

 

첫사랑

모올래 숨긴

단물 들던 그 가을!

 

 

 

꽃의 조건

 

일어서고 다시 스러지는

그윽한 빛의 사유와

내면 가까이 물이 되어 흐르는

귀여운 음계音階들의 작은 속삭임

하나 둘 셋 넷

분홍빛 품사들은 제가끔

비인 자리마다 향기로 날아가

하늘 저 멀리

초록색 꿈을 끌어당긴다.

아아 하나의 거룩한 아름다움은

죽음의 신비보다도 깊은 것!

이 세상

모든 빛깔들이

모음과 자음으로 짜여지고

우리들 빛이 마지막 퇴적을

끝낼 때

나는 그 그늘 아래를

비극처럼 살고 싶다.

 

 

 

오월

 

상추꽃 핀

아침

자벌레가

기어가는

지구 안쪽이

자꾸만

간지럽다

 

 

 

칠월햇빛 시간·5

 

언덕을

넘어오는

저 무량의

바람에도

초록빛

똥처럼

나뭇잎에

앉아 있는

청매미

울음소리가

지워지지

않는다

 

 

 

불일암 달맞이꽃

 

화살표를 따라

불일암에 올랐더니

걸어온 돌길들이 문득 환하다.

 

 

 

시월

 

목이 긴

그 가을

씨방엔

잘 여문

갈색 안부가

점자처럼

모여 있고

 

아직도

은조롱

마른 잎사귀에

파랗게

묻어 있는

지난여름

비단 벌레

기어가던

소리

 

오오,

누구의 별자리냐

멀리

기우는

북극성

 

문득

창을 여는

아이의

이마가

 

 

 

시월도 이런 날은

 

수목 빛 그 가지 끝

간지럼 잘 타는

휘바람 새 한 마리

 

햇빛도 금이 가는

시월도 이른 날은

갈대꽃 십리 길이

은잎새 같아라.

 

올 가을 씨방에는

감보다 마알간 꿈이

점자처럼 모여 살고

 

손차양 눈빛 멀리

자꾸 누가 올 듯싶다.

 

 

 

뻐꾸기로 우는 봉분

 

해마다 모시면서 그 해 봄도 함께 묻어

해마다 이맘때면 뻐꾸기고 우는 봉분

옆 자리 우리 어머니 함께 듣고 계실까

 

저승도 보인다는 오동꽃 환한 날엔

눈에 익은 행서체로 나직히 휘어지는

그 말씀 무릎을 꿇고 잔처럼 받습니다

 

 

 

익명의 등불

 

풀무치 날아간 숲 무슨 일이 일어나나

자음과 모음으로 다 못 쓰는 수사학

우리들 찔레순 사랑 등성이를 넘는다

 

억새에 베인 바람 우우우 몰려가고

초롱꽃 이운 자리 멀리 가는 향기 있어

그 날 밤 잠 못 이루던 익명의 등불 하나

 

 

 

무채색 사내-김상유 <연못>

 

불혹의 물살들은 휴식하는 자세로

그 위를 오리 둘이 예서체로 서 있다

바람은 세상 밖에서 길 없는 길을 가고

 

화려한 적막처럼 서쪽으로 달이 한 채

호올로 피고 지는 환각 같은 명상이....

무채색 사내 하나가 아득하니 앉아 있다

 

 

 

저 경이(驚異)-김상유 <花開>

 

봄은 며칠 동안 햇빛만을 키웠다

어깨 넓은 나무와 창 밝은 집도 한 채

하늘엔 연기 한 줄기 단음절로 떠 있고

 

털갈이 마악 끝낸 부리 연한 새 두 마리

불현듯 피어난 저 경이를 보고 있다

그 시간 형용사처럼 날아가는 나비 한 쌍!

 

 

 

햇살이 놀러와서

 

아가위 열매 익자 가만 휘는 무게여

잎사귀 뒤에 숨은 고 열매 빛깔까지

벌레에 물린 가을이 가랑잎처럼 울었다

 

보랏빛 여운 두고 과꽃으로 지는 하루

오늘은 한종일 햇살들이 놀러 와서

마른 풀 남은 향기가 별빛처럼 따스했다

 

 

 

그 해 가을 월정리

 

적막한 무게 이고 서서 피는 들꽃이여

투명한 기척으로 낯선 별이 지고 있다

길 숨긴 잡목림 너머 등불 켜는 작은 집

 

어느 마을 누군가 이별을 하고 있나

가을새 날개 소리 먹물처럼 번져 가는

대숲은 음력달 한 채 가슴 속에 묻었다

 

 

 

다시 월정리에서

 

정강이 말간 곤충 은실 짜듯 울고 있는

등 굽은 언덕 아래 추녀 낮은 집이 한 채

나뭇잎 지는 소리가 작은 창을 가리고

 

갈대꽃 하얀 바람 목이 쉬는 저문 강을

집 나간 소식들이 말없이 건너온다

내 생애 깊은 적막도 모로 눕는 월정리

 

 

 

사월도 상순 무렵-햇빛시간 1

 

미나리 새순 같은

사월도 상순 무렵

 

초록빛 따옴표로

새 한 마리 울다 가면

 

내 누이

말간 눈물엔

나이테가 돌았다

 

 

 

어린 바람 한나절-햇빛시간 2

 

종이배 등 떠미는 어린 바람 한나절

아직도 일곱 살 때 헤어진 물소리가

삘기꽃 목마른 언덕 은빛 새가 와서 운다

 

덩굴손 머문 자리 연둣빛 자국 같은,

관절 긴 생각들이 그렇게 물이 들고

키 낮은 무덤 너머로 낮달 하나 떠 있다

 

 

 

그 세상-햇빛시간 3

 

아무도 모른다

나뭇잎 뒤 그 세상

버려 둔 생각들이

귀리처럼 자랐구나

누군가

새로 난 창을

가만히 열고 닫는,

 

 

 

둑방길-햇빛시간4

 

개오동 밑둥 적시는

여우비도 지났다

목이 긴 메아리가

자맥질을 하는 곳

마알간 꽃대궁들이 물빛으로 흔들리고,

 

빨강머리물총새가

느낌표로 물고 가는

피라미 은빛 비린내

문득 번진 둑방길

어머니 마른 손 같은 조팝꽃이 한창이다

 

 

 

칠월-햇빛시간 5

 

언덕을 넘어오는

저 많은 바람에도

초록빛 똥처럼

나뭇잎에 앉아 있는

청매미

울음소리가

지워지지 않는다

 

 

 

종이배 한 척-햇빛시간 7

 

오늘도 뻐꾸기가

후렴처럼 와서 우는

그 마을 여울목엔

유년의 시간들이

지금 막

종이배 한 척

하얀 돛을 내린다.

 

 

 

여울목 한나절

 

허리 가는 바람이 자꾸만 간지러워

뿔대 말간 달팽이 천천히 옮겨 가고

장다리 푸른 꽃대엔 봄을 물고 앉은 새

 

낮달도 풀물이 든 여울목 한나절은

피부 하얀 햇빛들이 레이스를 짜고 있다

호밀밭 지나서 오는 메아리도 은빛이다

 

 

 

장자 내편을 읽다

 

어제의 햇살은 확실히 부드러웠다

입추를 보내고 난 셔츠 색깔은 다갈색이다

바다는 더 큰 돛배를 멀리멀리 띄우리라

 

새들은 새로운 가사로 노래를 바꾸고

손님맞이 잔술도 오래 전에 끝났다

접어 둔 책갈피 열자 달도 크렁 밝았다

 

 

 

장자 외편을 읽다

- 차운次韻 강현덕 시인

 

푸른 감 몇 개가

저절로 떨어지고

 

슬픈 생각 하나가

별이 되고 있었다

 

까칠한

벌레 울음이

점선처럼 나는 밤.

 

 

 

생가의 밤

 

종갓집 용마루에 음각으로 달이 뜨고

우리 누님 울음처럼 월화꽃이 지고 있다

스무 살 나의 어둠도 함께 지고 있었다

 

언제나 흰 두루막 해서체로 꼿꼿하신

아버지는 일생을 먹을 갈듯 사셨다

사랑채 큰 그림자가 빈 가득 앉는 밤

 

 

 

그 여름의 명상

 

섬진강 물소리가 평사리를 지날 때

소린 없고 빛만 남아 마른들을 적시더라

은어도 하늘빛 닮아 반짝이는 이런 날

 

지리산 어린 바람 오던 길로 달아나고

비 개인 대숲으로 맑게 트인 산새 울음

초록빛 오 저 사투리 화두처럼 듣는다

 

 

 

월포리 산조

 

녹이 슨 배경 하나 비스듬히 버려졌고

그 날 밤 빈 배 두엇 저음으로 가라 앉는

바다는 4악장쯤서 가로 접혀 있었어

 

하얀 뼈로 떠오르는 달이며 늙은 구름

누군가가 가만히 해안선을 끌고 와서

먼 기억 풍금 소리를 꺼내 듣고 있었어

 

 

 

무변기4

 

어둠은 조금씩 상하기 시작했고

이제 남은 것이란 한 접시 절망뿐

아득히 살아 빛나는 한 접시 절망뿐

 

흰 이빨로 갈리는 이 세상 어디쯤

아 마지막 강물같은 것이 풀리고

크낙한 셔터 하나가 내려지고 있었다.

 

 

가을에

 

1

마른 잎에 얹히는

그리움의 무게처럼

까마득 지난 생각

눈물보다 맑아서

마음속

숨겨둔 갈피

등을 거는 먼 사람

 

2

연잎만 한 세상에서

가을이란 남은 여백

사소한 소리에도

햇빛들은 금이 가고

갈대꽃

야윈 가슴만

하얀 뼈로 우느니

 

 

 

남과 북

 

산들은

푸른 갈기를 세운채

저마다 목덜미를 숙이고 말없이

말없이

자욱한 세상을 내려다보고 있다

 

 

 

 

햇빛 좋은 날-가을1

 

생각마저 갈색뿐인

햇빛 차암 좋은 날

등 마알간 바람이

길을 가다 멈춘 곳

마가목

, 가지 끝에

초롱 닮은 알집 하나!

 

 

 

 

다 못 쓴 시-가을2

 

지상의

벌레소리

씨앗처럼

여무는

다 못 쓴

나의 시

비워둔

행간 속을

금 긋고

가는 별똥별

이 가을의

저 은입사(銀入絲)!

 

* 은입사 : 청동이나 주석 등에 새겨 넣은 은 줄.

 

 

 

그리운 편지 -꿈같은 절망6

 

행간들은 말없이

가슴을 풀어 놓고

그 사이를 보랏빛 음성

누가 이 한장 종이 위에

가만히

받아 놓았나

그대의 안부들이

일인칭으로 반짝이는.

 

 

 

그리움 너머 -꿈같은 절망15

 

그리움 너머로 또

얼마나 많은 햇빛들인가

숲속으로 허리를 감추는

바람 소리가 사치스럽다

저 빈 들의 고요처럼

잠시 세상이 바이올렛 빛일 때

찬란함이여.

숨겨 둔

그대 사랑 하나

 

 

 

물로 그린 그림

 

누가 나에게

우리나라 가을을 실제 크기로 그리라고 한다면

나는 항아리에 물을 붓고 기다리겠습니다.

저 푸른 하늘이 다 잠길 때까지

 

 

 

홍시를 두고

 

1

첫서리 내린 마당 누구의 발작처럼

어디서 날아왔나 등 붉은 감잎 한 장

고향집 노을이 되어 사뿐히 누워있네

 

2

지우고 고쳐 쓰다 확 불 지른 종장(終章)같이

와와와 소리치면 금방 뚝 떨어질 듯

우주 속 소행성 하나 발그라니 물이 든다

 

3

굽 높은 그릇 위에 향기 높은 전신 공양

가만히 귀 기울면 실핏줄 삭는 소리

말갛게 고인 저 투명 문득 훔쳐 갖고 싶다

 

 

 

백년의 그늘

 

새 한 마리가 똥을 누네.

느릅나무 가지 사이로 반짝,

빛나는 지상의 얼룩.

조금 전 밀잠자리 사냥으로 배가 부른 채

어슬렁어슬렁 산책을 즐기시던 버마재비가

순간 놀라 속옷까지 다 보이며 날아가네.

 

며칠 전 알에서 깨어난

금빛어리표범나비 날갯짓 한참하고 가더니

오랫동안 입 다물고 있던 금강초롱이

비로소 꽃이 되었다.

보는 이 없어도 그냥 이루어지는

저 아름다운 기교여 소풍 나온 어린 바람

 

저희끼리 치고받으며 히히대고

어느덧 개망초꽃 너머 한결 팽팽해진 햇빛들,

느릅나무는 오늘도 그냥

그 자리 백 년도 더 된

커다란 그늘을 평평하게 깔고 있었다.

 

 

 

또 다른 세상

 

말간 귀를 세운

은사시나무가

비발디를 듣고 있다

 

야윈 바람은

가볍게 가볍게

발을 헛딛고

방금 숲에서 달려 나온

찌르레기 울음소리가

또 다른 세상을

만나고 있다

 

얼마를 버리고 나면

저리도 환해지는 것일까

오늘도, 나뭇잎에는

나뭇잎 크기의

햇살이 얹혀 있고

눈물에는 눈물 크기만 한

바다가 잠겨 있다

 

 

 

소리

 

벌써

몇 번째

어둠을 뚫고,

 

고요에

이마를

부딪치는

열매가 있다.

 

 

 

이 순간

 

덩굴손 긴 봄날이

흘림체로 쓰여 지고

뻐꾸기 울음소리에

번져 가는 푸른 적막

못 이룬

지상의 꿈이

메꽃으로 지고 있다

 

 

 

물총새에 관한 기억

 

작자 미상 옛 그림 다 자란 연잎 위를

기름종개 물고 나는 물총새를 보았다

인사동 좁은 골목이 먹물처럼 푸른 날

 

일곱 문 반짜리 내 유년이 잠겨 있는

그 여름 흰 똥 묻은 삐딱한 검정 말뚝

물총새 붉은 발목이 단풍처럼 고왔다

 

텔레비전 화면 속 녹이 슨 갈대밭에

폐수를 배경으로 실루엣만 날아간다

길 없는 길을 떠돌다 되돌아온 물총새

 

 

 

익명의 등불

 

풀무치 날아간 숲 무슨 일이 일어나나

자음과 모음으로 다 못 쓰는 수사학

우리들 찔레순 사랑 등성이를 넘는다

 

억새에 베인 바람 우우우 몰려가고

초롱꽃 이운 자리 멀리 가는 향기 있어

그 날 밤 잠 못 이루던 익명의 등불 하나

 

 

 

햇살들이 놀러 와서

 

아가위 열매 익자 가만 휘는 무게여

잎사귀 뒤에 숨은 고 열매 빛깔까지

벌레에 물린 가을이 가랑잎처럼 울었다

 

보랏빛 여운 두고 과꽃으로 지는 하루

오늘은 한종일 햇살들이 놀러 와서

마른 풀 남은 향기가 별빛처럼 따스했다

 

 

 

박재삼의 어린 바다

 

천 년의 바람도 여기서 시작이다

나뭇잎 반짝이듯 저 소슬한 이치여

가볍고 연한 허기증 아득하면 되리라

 

가늘고 먼 울음을 이제는 누가 듣나

오늘도 더 푸르게 자맥질하는 바다

어쩌면 그것은 모두 가망 없는 허무였다

 

첫사랑 물소리도 제삿날 불빛들도

어린 시절 익혔던 친구들의 이름도

끝없이 그리워지는 저 햇빛 속으로

 

없는 듯한 세상을 설움도 넉넉하게

눈물로 아로새긴 은빛 문양이었다

그것은 꽃으로 서서 지켜보는 어린 바다

 

 

 

겨울 당초문

 

북극성을 비껴가는 외기러기 울음소리

보랏빛 별을 보던 그 소년도 떠나가고

우물 속 가을 잎새가 일생을 보내는 밤

 

먹물 삭은 궁서체를 운문으로 읽다 보면

누군가 먼저 짚은 아득한 감탄사여

미닫이 밝힌 절구絶句가 댓잎보다 푸르다

 

 

 

운문사 가는 길

 

기러기 한 쌍만이 어젯밤에 날아갔을

숲 짙은 대숲 아래 지체 높은 어느 문중

남겨둔 월화감 몇 개 등불 마냥 밝구나

 

장삼 입은 먹바위 햇빛도 야윈 곳에

무심코 흘림체로 떨어지는 잎새 하나

가만히 바라다보면 참 아득한 이치여

 

사랑도 그리움도 어쩌지를 못 할 때

청도 운문 골짜기 구비구비 돌아나온

득음은 저런 것인가, 옷을 벗는 물소리

 

 

 

여울목 한나절

 

허리 가는 바람이 자꾸만 간지러워

뿔대 말간 달팽이 천천히 옮겨 가고

장다리 푸른 꽃대엔 봄을 물고 앉은 새

 

낮달도 풀물이 든 여울목 한나절은

피부 하얀 햇빛들이 레이스를 짜고 있다

호밀밭 지나서 오는 메아리도 은빛이다

 

 

 

생가의 밤

 

종갓집 용마루에 음각으로 달이 뜰고

우리 누님 울음처럼 월화꽃이 지고 있다

스무 살의 나의 어둠도 함께 지고 있었다

 

언제나 흰 두루막 해서체로 꼿꼿하신

아버지는 일생을 먹을 갈듯 사셨다

사랑채 큰 그림자가 빈 뜰 가득 앉는 밤

 

 

 

혼자 온 가을

 

줄기 삭은 갈대밭 기러기 마른 울음

몰래 익은 산초열매 가지 끝이 휘어지고

낙엽 진 산허리 돌며 등고선이 풀어진다

 

길 떠난 동고비 아직 오기 이른 시간

긴 목하고 서 있는 구절초 야윈 대궁

저만큼 중년의 구름 만연체로 떠 있구나

 

가만히 불러 보면 물빛으로 다가서는

첫사랑, 그 이름이 더욱 맑게 보이고

올해도 가을은 혼자 뒷모습만 두고 갔다

 

 

 

이 가을 들자

 

오는 봄 가는 봄을 쑥국새만 날리더니

온 여름 두고두고 꽃물만을 재우더니

새로이 이 가을 들자 귀뚜리로 우는 손톱

 

강바람 불어 오는 쑥내 하얀 언덕배기

뉘 감밭을 질러왔나 저 기러기 떫은 목청

소년은 손차양 멀리 자꾸 누굴 기다리고

 

손금 행간마다 화안히 불을 밝혀

가을을 서두 빌려 고이 접은 사각 봉투

마음은 파란 휘파람 산번지를 달린다

 

 

 

남풍권

 

내 손금 어둔 골짝

풀려나는 이 쾌청

경사진 뉘 꿈밭

뒤적이던 풀무치는

, 동작

손에 얹힐 듯

푸른 운만 쪼아대네.

 

 

 

가을 손님

 

여름이 떠나가는 마른 풀잎 사이로

밤새 벌레 울음이 가등처럼 하얗고

쓰다 만 그대 안부가 반쯤 젖어 있구나

 

놓아 둔 어둠 저쪽 길 밖에 길이 있어

기억의 지번地番으로 목선 저어 오는 이

내 갈밭 그 몇 평 근심 서걱이며 오는 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