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구 시인(1940~ ). 충남 예산. (전)에이스침대 대표.
시인, 작사가. 한국동요문화협회 회장. 전국병아리창작동요제 주최.
경기 이천에 ‘한국동요박물관’ 개관.
시집 <첫눈에 반하다>, <늙어 가는 길>. <젊어 가는 길> 출간
윤석구 시 모음
▶ 늙어가는 길
처음 가는 길입니다.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 길입니다.
무엇 하나 처음 아닌 길은 없었지만
늙어가는 이 길은 몸과 마음도 같지 않고
방향 감각도 매우 서툴기만 합니다.
가면서도 이 길이 맞는지
어리둥절할 때가 많습니다.
때론 두렵고 불안한 마음에
멍하니 창밖만 바라보곤 합니다.
시리도록 외로울 때도 있고
아리도록 그리울 때도 있습니다.
어릴 적 처음 길은
호기심과 희망이 있었고
젊어서의 처음 길은
설렘으로 무서울 게 없었는데
처음 늙어가는 이 길은
너무나 어렵습니다.
언제부터 인가
지팡이가 절실하고 애틋한
친구가 될 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그래도 가다 보면
혹시나 가슴 뛰는 일이 없을까 하여
노욕인 줄 알면서도
두리번두리번 찾아봅니다.
앞길이 뒷길보다 짧다는 걸 알기에
한발 한발 더디게 걸으면서 생각합니다.
아쉬워도
발자국 뒤에 새겨지는 뒷모습만은
노을처럼 아름답기를 소망하면서
황혼 길을 천천히 걸어갑니다.
꽃보다 곱다는 단풍처럼
해돋이 못지않은 저녁노을처럼
아름답게
아름답게 걸어가고 싶습니다.
▶ 얼굴 없는 사랑
잠이 많은 나는
아침이면 일어나기 싫은데도
포근한 잠자리를
벌떡 일어나게 하는 것은
당신의 아름다운 글을
밤새도록 기다린 이유입니다
하루의 아침을 여는 건
은은한 커피향도 아니고
밤새 참았던 허기진 그리움도 아닌
당신의 글에 중독 된 그리움이
내 아침을 열어 줍니다.
예쁜 그림과 배경 음악이 어울려
마음을 사로잡는
글 샘에 빠지게 하는
당신의 글을 보고 있노라면
나도 모르게 당신 품에 안겨
편안한 영혼이 되기도 합니다
당신의 글은
어느 한 사람을 위해
써낸 글이 아님을 알면서도
당신의 영혼을 빚어 낸 글 샘에서
나만이 느끼는 감정으로
나 자신도 모르는 사이
당신은 나의 그리운 님이 되었습니다
당신의 글을 마주하노라면
굳게 닫혀 지냈던 내 가슴은
봄비에 녹아 내리는 얼음처럼
빗장이 열리고 가슴 떨림으로
사랑의 샘물이 흐르고 있습니다
어느 날에
당신의 기쁜 글을 보면
같이 기뻐하며 웃음 지어 보고
당신의 슬픈 글을 보면
내 마음도 슬퍼져 눈물을 흘리며
밤새 잠을 이루지 못하고
소리 없이 흐느끼곤 합니다
당신과 사랑을 나눌 수 있다면
나는 보랏빛 사랑으로
황홀함을 오랫동안 간직하고 싶은
허황된 꿈을 꾸어 봅니다
그리운 님!
당신이 꿈꾸는 사랑을 기다리며
오늘도 지독한 고독 속에 갇혀서
선홍빛 그리움의 피를 토하고 계실까?
그리운 님!
밤 깊어 자정을 넘어
새벽을 향하는 시간이지만
당신이 부른다면
나 당장 달려가
당신과 함께 별을 헤아리며
길섶의 풀잎향기도 맡아보며
다정히 걸으면서
여름밤의 추억을 당신과 도란도란
가슴에 담고 싶습니다.
오늘밤도
내 그리운 님과 마주하면서...
▶ 나 가리다
그대 그리워 잠 못 이루는 밤
창 밖 소슬바람이 서성일 때
혼자 불타던 단풍잎 외로워
흐르는 물 위에 울음 던지네
가을 가고 겨울 되어
물빛마저 시리게 되면 나도 가리라
그대 그리워 가리라 그대 따라 가리라
그대 그리워 나도 가리라
가을 가고 겨울 되어
물빛마저 시리게 되면
나도 가리라 그대 그리워 가리라
그대 따라 가리라
그대 그리워 나도 가리라
▶ 겨울밤에는
그림 속 샤갈의 눈 내리는 마을처럼
고요하고 깊고 깊은 겨울밤에는
달빛도 하얗게 호수에 잠기고
밤바람만 혼자서 윙윙 울다가 간다
벽난로 불꽃 빨갛게 빨갛게 흔들릴 때면
나도 머언 사랑 다시 만나서
그렇게 타오르고 싶다
뜨겁게 뜨겁게 그렇게 타오르고 싶다
고요하고 깊고 깊은 겨울밤에는
▶ 그리움
잠시라도 당신의 숨결을 느낄 수 없으면
어느새 나도 모르게 가난해지는 내 마음
음악이 흘러도 소용없고
바람이 속삭여도 외면합니다.
이 마음 오직 당신만을 바라봅니다.
하루라는 시간은 끝도 없이 당신을 기다리는
이토록 길고 긴 그리움입니다.
그리움입니다.
▶ 저 푸르름 그대로이고 싶다
저 푸르름 그대로이고 싶다
밤꽃 향기 가득한 마을 어귀
징검다리 사이로 돌돌돌거리며
어디론가 흐르는 시냇물이고 싶고
반딧불 모아 등 밝혀둔 초막집 작은 뜰이고 싶다
밤이슬 내려 풀잎은 젖고 북두칠성마저 기울어지면
어디선가 들려오는 풀벌레소리 밤은 깊어가고
푸르름 향한 이 마음도 깊어만 간다
푸르름 향한 이 마음도 깊어만 간다
▶ 봄 마중
지금은 어디 쯤
지금은 어디 오고 있을까
지금은 어디쯤 오고 있을까
지금은 어디 쯤
지금은 어디 오고 있을까
지금은 어디쯤 오고 있을까
조바심이 하도 나서
남녘만 바라보는데
저 멀리 산에 잔설보고
뒤로 갔을까봄은 아니 보이고
지나가는 바람이 기운만 살짝 전하네
지금은 어디쯤 어디쯤 오고 있을까
▶ 당신은 내 소중한 편지
당신은
내 인생에 있어서
가장 아름답고
소중한 편지입니다.
날마다
내 삶의 편지지에
즐거움과 기쁨의 밀어로
빛고운 향기로 편지를 쓸 수 있으니
당신은
내 인생에 있어서
가장 보고픔과 그리움으로
긴 편지를 쓰게 합니다.
밤마다
흔들리는 불빛의 그리움처럼
슬픔과 아픔의 조각들로
눈물 젖은 석양의 노을빛 사연으로
기다림의 편지를 보낼 수 있으니
▶ 첫눈
언젠가는 만날 것 같은
아름다웠던 기다림이 바로 너였어.
봄여름 가을 지나고
한 해를 보내는 어느 겨울 밤
너를 만난 그 순간이 그랬어.
어디엔가 꼭꼭 숨겨놓고
너만 바라보고 싶었지
네가 말없이 훌쩍 떠나도
이미 가져버린 너의 향기는
나는 절대 내놓지 않을 거야
나는 절대 내놓지 않을 거야
언젠가는 만날 것 같은
아름다웠던 기다림이 바로 너였어.
바로 너였어, 바로 너였어.
▶ 어찌하다가
어찌하다가 인연의 끈으로 매어
날마다 떨치지 못하는
그리움의 씨앗을 잉태하고
작은 가슴 밭에 눈물 강을 만들었나.
어찌하다가 버리지 못하는
정 하나 심어 놓고 밤마다
외로운 창살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그대를 찾는 그림자가 되었나.
어찌하다가 마음에 보이지 않는
사랑의 꽃 한 송이 심어놓고
날마다 그 꽃잎 질까 괴로워하며
침묵하는 영혼 앞에 기도하게 되었나.
당신이 울컥 보고 싶은 날엔
벌거벗은 겨울나무처럼.
그렇게 떨고 서 있겠습니다.
당신이 울컥 보고 싶은 날엔
바다처럼, 엎으러지면서
당신에게 달려가 파도로 울겠습니다.
당신이 울컥 보고 싶은 날엔
벼랑 끝에 아슬하게
매달린 바위위의 꽃이 되어
그렇게 당신을 안타깝게 바라만 보렵니다.
당신이 울컥 보고 싶은 날엔
겨울비가 되어 눈물처럼.
당신의 가슴을 차갑게 적셔 놓으렵니다.
당신이 울컥 보고 싶은 날엔
어두운 밤에 잠 못 드는 새처럼.
나뭇가지에 앉아 밤새 당신의 이름을 부르렵니다.
당신이 울컥 보고 싶은 날엔
기다림의 종착역에서
당신이 오시는 선로위에서
레일이 되어 당신을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 노인은 난로 앞에서도 춥다
노인은 들켜도 상처 받지 않는
짝사랑을 좋아한다
그래서 나이가 들수록
자연을 더욱 사랑하고 싶어 한다
항상 봄을 그리워하는
노인의 가슴은
노을보다 진하고
이별보다 서럽고
실연처럼 눈물겹다
죽은 듯 했던 나뭇가지에도
새싹이 돋아나고 꽃이 피고
얼어붙었던 대지에도
새로운 생명이 솟아오르는 봄처럼
노인은 그 봄을
한시라도 놓치고 싶지 않으려 한다
마른 풀잎처럼 시들어가던 노인의 심장에도
새로운 사랑이 새로운 꿈으로
봄을 사랑하고 싶어
겨울에도 다시 돌아올 새봄을
간절히 기다리며 그리워한다
작은 숨소리에 살아 있음을 느끼며
그래도 누군가를 지독히 사랑하고 싶은
노인의 길고 긴 겨울밤의 고독은 아프기만 하다
이제 몇 번이나 봄을 맞이할 수 있을까
내 몸 구석구석에서 불어대는
찬바람 조차도 두려워 견디기 힘들어진다
그렇다
노인은 난로 앞에 있어도 외롭고 춥다
▶ 커피가 그리운 날
커피 잔
입술에 닿으려하니
향이 저 먼저 알고
유혹을 하네
함께 있어도
그리운 님 같은 향기여
오늘도
이야기가 목말라
그대를
찾아 왔노라.
▶ 너 없다고 생각하면
하늘빛이
너무 푸르다
가슴으로 다가와
마음에 머무는
내 고운 사람아
하늘아래 단 한사람
내 목숨보다 더 소중한 사람아
너 없이는 단 한순간도 살아 갈 수 없는
황무지(荒蕪地)같은 내 삶이기에
너 없다고 생각하면 내 가슴은 너무 아프다
바람결이
너무 부드럽다
사랑으로 다가와
그리움에 머무는
내 고운 사람아
하늘아래 단 한사람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람아
너 없이는 사랑의 기쁨도 행복도 없는
불모지(不毛地) 같은 내 삶이기에
너 없다고 생각하면 내 슬픔은 너무 깊다.
▶ 진달래꽃
깊은 산
골짜기에도
봄은 거르지 않는가 보다
양지쪽 보다는
한참은 뒤에 오지만
소나무 아래 진달래가
꽃망울을 준비하고 있구나
인적이 거의 없는
깊은 음지에서
밤에는 소쩍새와 함께
같이 울 것만 같고
낮에는 바람이나 만날 뿐인
저 진달래
올해도 그전처럼
외롭게 피었다 갈
저 진달래는
누구를 그렇게도
길게 길게 기다리는가.
▶ 마주보는 그대가 아름답다
보이지 않는 것이
더 아름답다고 하지만 나는 다르다
구름에 가려
별이 보이지 않는다고
별이 떠난 것은 아닌 것처럼
그대 손 흔들며 떠나갔지만
떠난 것은 아니라는 걸 나는 안다
영롱한 별빛이
구름 너머에서 더 찬란하듯
그대 떠난 가슴에선
그리움이 더 황홀한 것 같지만
나는 다르다
마음이 겨울 들판처럼 황량하다
생각과 말은 우아한 것처럼
말들을 하는데
내 마음은 왜 그렇지 못하고 다를까
그리움은 아름다운 것 같지만 잔인하다.
보고 있어도
보고 싶은 그대가 항상 앞에
있는 것이 나는 참 좋다.
▶ 그곳에 가고 싶다
쉬는 듯 머무는 듯
동구 밖 밭머리 감돌아
흐르는 시냇물에
아랫마을 이어주던
징검다리 하나 있었지
하나 건너 하나씩
잠길 듯 말듯 한 그곳에서
물장구치던 어린 시절은
만양 첨벙거리고 놀았어지
밤이면 달빛 아래에서
물방개 뛰어놀던 그곳
풀벌레 소리 따라 논둑길 걸으면
들꽃 이야기도 함께 들리던 마을
봄바람 불어오면 개나리 진달래
봄소식 전해주고
봉선화 곱게 피어
여름 알리고
가을바람 불어오면
동산에 들국화 피고
길가 코스모스도 울긋불긋
수를 놓는다.
찬서리 낙엽지고 겨울이 오면
눈꽃이 피어나는 아름다운 그곳
언제나 가고 싶은
나의 유년의 고향
세월이 흘러 먼 추억이 되었어도
지금도 생각하면 한없이, 한없이
달려가고 싶은 내 고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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