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두순 시인(1950년~ ) 경북 봉화. 아동문학가.
(前)초등학교 교사. 한국일보사 기자.
1977년 <아동문학평론>, <아동문예> 동시 추천.
동시집 <나도 별이다> <들꽃> <사람 우산> <박두순 동시선집>등 13권,
시집 <행복 강의><인간 문장><어두운 두더지> 등 5권.
「대한민국문학상」「소천아동문학상」「한국아동문학상」 방정환문학상」
「한국문협 작가상」「자유문학상」 등 수상.
박두순 시(동시) 모음
▶ 새우 눈
새우를 그렸다
눈은 까만 점만 하나 톡 찍으면 되니
아주 그리기 쉬웠다
문득 궁금해졌다
고 작은 눈으로 어떻게 앞을 보나?
고 작은 눈으로 어떻게 바다를 다니나?
고 작은 눈으로 어떻게 먹이를 찾아내나?
아니다
새우 눈은 크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그 넓은 바다를 보나
그 넓은 바닷길을 다니나
그 커다란 잠수함을 피하나
망원경 마음눈 가진 모양이지?
▶ 이빨
1학년에게 물었다.
- 너 앞니 누가 빼어 갔니?
- 치과요!
- 왜?
- 흔들려서요
- 흔들리면 빼는 거야?
- 그럼요, 아빠가 그러는데
우리 마음도 흔들리면
누가 빼어 가버린대요.
▶ 꽃에게
나는 사람들에게
네 칭찬을 자주 한다
신이 만든 것 중
가장 성공한 게 너라고.
널 아무리 헐뜯으려고 해도
아름다워 번번이 실패다
너 앞에선
절망이다 희망이다
아름다움 밖에 보지 못해서.
▶ 서운함
지우개가 돼
그를 지웠다
바람에 날려 지웠다
구름에 얹어 지웠다
땀방울에 뭉개 지웠다
빗소리에 섞어 지웠다
파도에 밀어 넣어 지웠다
지워졌나 했는데 지워지지 않았다
그는 찌든 때 같았고 붉은 녹 같았고
아스팔트에 들러붙은 껌 같았다
떨어지는 꽃잎에도 묻고
낙엽으로 덮었는데도
그는 살아있었다.
▶ 시국(時局)
너도 나에게
읽히지 않고
나도 너에게
읽히지 않는
서로 난해한 때이다.
▶ 채식주의자
벌은 원래 육식이었다네
1억 5천만 년 전엔
파리 진딧물 나비 거미를 잡아먹는 육식이었다네
공룡이 들끓어 좁아진 육식의 자리 견디지 못해
육식을 그만 포기했다네
꽃가루받이 택배 대가로
꿀을 얻어다 새끼를 길렀다네
그게 편해 채식주의로 바꾸었다네
그보다 채식주의자가 된 다른 이유가 있었다네
꽃을 사랑했다네, 아주 열심히
채식주의자가 된 진짜 원인은 그것도 아니라네
꽃 몰래 향기를 훔쳐가는 거라네.
▶ 비밀 가게
자물쇠 가게의
셀 수 없을 정도의 자물쇠와 열쇠는
닫힘과 열림, 비밀과 풀림이다
무슨 잠글 일 그리 많고
열어젖힐 일 또 그리 많을까
하긴 그렇지
살아오면서 따라오던 문제들은 자물쇠였고
하나씩 해결될 때 그것들은 열쇠였으니
삶의 문제와 해결이 자물쇠 가게
자물쇠와 열쇠 수보다 적지 않으리
이젠 사는 문제에 비밀까지 많아지고
비밀에도 번호까지 붙어
살아가는 일이 온통 비밀스럽다
스마트폰 사람과 대화에도
컴을 여닫으며 편지 쓸 때도
비밀스런 존재가 되고
비밀 공간에 사니.
비밀이 없으면
사람도 아니다
넌 500715-18*****
태어나면서부터 비밀번호로 봉인되었다
비밀도 생명을 얻어 신성해졌다나
난 누구인가, 비밀
▶ 기생충
인간이 위대하다고?
아니야, 영화를 보니 기생충이야
식물 기생충
사과를 먹는
고추를 먹는
호박을 먹는
바나나를 먹는
상추를 먹는 기생충
식물에 빌붙어 사는 벌레더란 말이야
나뭇잎을 갉아 먹는 벌레와 동급이야
풀잎 뜯어먹는 토끼와도 동급
지구 위 70억의 징글징글한 벌레
나뭇잎 풀잎 꽃잎 열매 앞에서
나대지 마
▶ 개명改名
쉬지 않고 걸어 내려오는
계곡물
굽어진 길
바위가 막아선 길
다 넘어서고
길 끊어버린 낭떠러지를 만나서도
갈길 멈출 수 없어
이름까지 바꾸고
허옇게 부서져 뛰어내리며
얻은 이름
‘폭포’
서늘한 개명이다
가슴 서늘한 개명.
▶ 식사 예절
밥 한 숟갈씩 떠 넣을 때마다
이건 이마 주름
이건 배설물
이건 웃음
이건 성질머리
이건 이기심
이건 괜찮은 정신
이건 욕설
이건 게으름
이건 골똘한 생각
이건, 시답잖은 글 한 줄이 되었다
마침내 배가 부르자
사상들이 슬며시 자리를 떴다.
▶ 음성
냇물은
목소리를 높이지 않는다.
언제나 낮은 목소리를
제 자리에 깔아놓고 거닌다.
그건 그대로 잔잔한 음역이 되어
제대로 귀를 가진 사람의 소유가 된다.
폭우가 화를 돋우어도
잠시 헝클어졌던 음성을 가다듬고
낮은 목소리로
흐트러진 속을 씻어낸다.
떠났던 산이 내려와
냇물의 옷을 입고 만족한 자세다.
조용한 교감, 조용한 음성에서 비롯되었다..
▶ 담쟁이의 절벽
절벽은
담쟁이가 사는 마을이다
지친 기색도 없이
푸른 몸으로 절벽을 올랐다
오르는 것이 숙명
푸른 발로
푸른 손으로
푸른 눈빛으로
마침내 절벽을 덮는다
절벽이 그만 푸르다
절벽이 그의 영토가 되었다
여름 내내 푸른 점령,
정상에 다달아
오름길이 시들었는데도
또 오를 절벽을 찾아 두리번거린다
하강의 미덕을 가르치려고
바람과 햇볕은 속삭이지만
오를 데가 없는 생이 시들하다
돌아보면 걸어온 길이
자신의 절벽이었다
가을이 오자
내려갈 길이 없어 엉거주춤하다
머리 위엔 허공만 가득하고.
▶ 가난한 가로수
도시 사람들은 잘 산다는데
가로수는 가난하다
한때는 부자였는데
가지들 왕창 잘리는 학대를 당하고
풍성했던 몸도 빈곤해지고
그늘이 가난해졌다
무더위에 모여 땀을 훔치던
사람들을 잃어버렸다
노래로 유유자적하던
매미들이 찾아오지 않는다
바람의 휘파람 소리도 가늘어졌다
무엇보다
이웃 나무와 사이가 벌어지면서
가로수 마을이 서운해졌다.
▶ 고요한 시간
고요는 고요하게 있는 것 같지만
시간을 밀고 간다, 고요히
고요히 밀려온 시간이
하루를 밀고 한 달을 밀고 일 년을 민다
지구를 밀고 온지 30억 년
돌아보면 지나간 시간은 고요하다
일 년이 고요했고 10년이 고요했고,
내 뒤에 수십 년이 고요히 서 있다
그것은 적막이 될 것이다, 영원한 적막을
수레에 담아 싣고 올 것이다
그 속에 나도 담아서 밀고 갈 것이다.
▶ 신의 가지
가을날
햇과일들을 보면
나는 어느 가지에 열린 열매일까
기억이 안 난다
다만
당신의 나무에
열리기를 바란다는 것만 안다.
▶ 상처
나무줄기를 따라가 보면
상처 없는 나무가 없다
그렇지 바람에 흔들리지 않고
눈보라에 시달리지 않는 나무가
어디 있겠는가
흔들린 만큼
시달린 만큼
높이와 깊이를 가지는 상처
상처를 믿고
맘놓고 새들이 집을 짓는다
상처를 믿고
꽃들이 밝게 마을을 이룬다
큰 상처일수록
큰 안식처가 된다
▶ 인간 원본
박물관에서 본
고서 원본
빛바래고 낡아도
새것보다 신선하다.
나도 이젠 낡은
한 권의 고서다
내면이 빛바랜 내 고서
원본은 어디 있나
몸을 뒤져 보니
가슴 안쪽에
파릇이 피어 있는
유년 시절
펴 들면 가슴 뛰는
신선한 나의 원본
인간 원본은
오로지 유년 시절이다.
▶ 꽃을 보려면
채송화
그 낮은 꽃을 보려면
그 앞에서
고개 숙여야 한다.
그 앞에서
무릎도 꿇어야 한다.
삶의 꽃도
무릎을 꿇어야 보인다.
▶ 나무
해마다
조금씩
조금씩
뒤꿈치를 들어
키를 높여요
▶ 나도 별이다
밤하늘이 품고 있는 별은
푸른 별이지요
나도 우리 집에선 별이지요
엄마는 나를
품에 안을 때마다
-'내 작은 별' 하고 말하지요
그땐 나도
밤하늘에 안겨있는 별처럼
어머니의 별이지요.
▶ 가물 때 땅은
빗방울 다 받으려고
온 힘을 다하고 있다
방울 방울 다 받으려고,
산골 도랑과
마을의 시내
들의 강과
넓디넓은 바다까지
다 열어 놓고,
그 큰 땅이
조그마한 빗방울을
다 받으려고
고기들 입까지 오물거리게 하지요
▶ 강아지 방울
강아지가
좋아서 달리면
방울도 좋아서
딸랑 딸랑
강아지가
열심히 달리면
방울도 열심히
딸랑 딸랑
강아지가
아파서 누워 있으며
방울도 아파서
가만히 엎드려
▶ 다람쥐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조그만
도토리도
두 손으로
받쳐 들고 먹지요
▶ 큰 행사
하나님이
겨우내 준비해 온
봄 행사
산에서 들에서
우리 집 꽃밭에서도 벌이는
꽃잔치
복사꽃 살구꽃 철쭉 제비꽃을
맘껏 보아라
맘껏 보아라
찬바람 등 뒤에서 준비한
꽃잔치
하나님의 큰 행사
▶ 땅덩어리 집
조그마해도 새싹은
집 한 채씩 지어놓고
나오지요.
커다란 땅덩어리 집 지어놓고
나오지요.
아주 조그만 창문을 열고
나 여기 있지 하며 나오지요.
▶ 발자국
바닷가 모래밭에서
외줄기 발자국을 본다.
문득
무언가 하나
남기고 싶어진다.
바람이 지나고
물결이 스쳐
모든 흔적이 사라져도
자그만
발자국을 남기고 싶다.
▶ 친구에게
친구야
너는 나에게 별이다
하늘 마을 산자락에
망초꽃처럼 흐드러지게 핀 별들
그 사이의 한 송이 별이다
눈을 감으면
어둠의 둘레에서 돋아나는
별자리 되어
내 마음 하늘 환히 밝히는
넌
기쁠 때도 별이다
슬플 때도 별이다
친구야
네가 사랑스러울 땐
사랑스런 만큼 별이 돋고
네가 미울 땐
미운 만큼 별이 돋았다
친구야
숨길수록 빛을 내는 너는
어둔 밤에 별로 떠
내가 밝아진다
▶ 어떤 하루
사용 설명서도 잘 읽지 않고
나는 나를 너무 많이 사용했다
삐거덕거리는 몸
유통기한이 다 되어가는 듯,
오늘 하루
내 몸의 스위치를 다 내리고
흘러가는 구름을 쳐다본다
냇물 소리에 귀기울여본다
뛰는 개구리를 바라본다
제대로 보인다
사용 설명서에 없는
하루치 삶이
나를 더 밝혔다.
▶ 혁명으로
누군가의 혁명으로
세상이 바뀌었다고 했다
그런데 잎과 꽃은
그 색깔로 피고
그 향기로 섰고
열매도 그 모양으로 맺었다
누군가의 혁명으로
세상은 바뀌었다고 하는데.
▶ 건망증
나의 건망증은 심하고 심하다
인생이 짧다는 걸 돌아서면 잊어버린다
인생이 허무하다는 걸 돌아서면 잊어버린다
그러니 욕심내지 말라는 걸 돌아서면 잊어버린다
내면이 아름다워야 한다는 걸 돌아서면 잊어버린다
세월을 아껴 써야 한다는 걸 돌아서면 잊어버린다
▶ 가랑비 오는 날
가랑비가 촉촉이 내렸어요.
꽃들 머리를 어루만지며
우리 머리를 어루만지며
하나님이 오늘만큼은 우리를
꽃으로 여기셨나 봐요.
꽃같이 여기셨나 봐요.
모처럼 오늘은
나도 한 송이 꽃이 아니었을까?
▶ 소
큰 입을 가지고도
물지 않는다
큰 눈으로
보기만 한다.
▶ 나의 크기
나머지 공부를 하고
혼자서
텅 빈 운동장을
힘없이 걸어 나오다
문득
뒤돌아보니
학교는 우뚝 높고
운동장은 퍽도 넓은데
나는 왜 이리도 작나?
커다란 도화지 귀퉁이에 찍힌
점 하나의 크기
그 점은
외로웠다.
▶ 향수
욕실에 향수를 뿌리려다가
향수병을 떨어뜨려 박살이 났다
향수는 하수구로 몽땅 흘러들어갔다
향수가 다 사라진 줄 알았다
그런데 웬일인가
역한 냄새만 올라오던 하수구에서
며칠 동안 향수 냄새가 올라왔다
진짜 좋은 냄새는 역한 데서 살아난다
냄새 좋은 사람도
어느 곳에 두어도 냄새가 날까.
죽어서 더 향기로운 사람이 있다
50년 넘게 앉아서 잠자고 세상 떠난 스님의
사진과 일생이 신문 한 면을 가득 메웠다
며칠 동안은 세상 역한 냄새가 덜 났다
봐라, 그가
깨어진 향수병이었다
▶ 들꽃
밤하늘이
별들로 하여
잠들지 않듯이
들에는
더러
꽃이 피어 허전하지 않네
너의 조용한 숨결로
들이 잔잔하다
바람이 너의 옷깃을 흔들면
들도
조용히 흔 들린다
꺾은 사람의 손에도
향기를 남기고
짓밟는 사람의 발길에도
향기를 남긴다
▶ 가난해도
꽃은 아무리 가난해도
향기를 파는 일이 없다
벌 나비에게
맨 먼저 한 줌
들판에도 한 줌
개똥에게도 한 줌
저를 쓰러뜨리는
폭풍에게도 한 줌
꽃은
향기를 파는 일이 없다.
▶ 줄
연은 늘 줄에 매여 있지
줄에 매어 하늘을 높이 올라가지
그래도 좋다고 몸을 마구 흔들지
엄마 줄에 매어 좋아하는 우리처럼
우리 때로는 야단을 맞고
맘속 엄마 줄을 떼어버리기도 하지
줄을 아주 떼어버리면 어떻게 되나?
서로 끝없이 어디론가 날아가 버리겠지
연처럼, 줄이 없으면 어떻게 되나?
연이라는 이름이 없어지듯
아빠 엄마라는 이름도 없어지지.
▶ 사람 우산
집에 오는 길
소낙비가
와르르 쏟아졌다
형이 나를
와락 끌어안았다
그때 형이
우산이었다
들에서 일하는데
소낙비가
두두두 쏟아졌다
할머니가 나를
얼른 감싸 안았다
그때 할머니가
우산이었다
따뜻한 사람 우산이었다
▶ 태양의 길
큰길만 다니는 게 아니다
꽃 속
오솔길에서
한나절 놀다 가고
창턱에 걸터앉아
한나절 쉬다 가고
물경 위에서
찰랑찰랑
하루를 노래하고
들로 걸어와
일하는 어머니의
이마도 짚어 보고.
▶ 몸무게
내 몸무게는
엄마의 몇 개
눈물방울로 이뤄져있다
등불처럼 밤새워
아픈 머리맡을 지키며 흘리던
몇 개의 눈물방울
일터에서 흘리던
아버지의 땀방울과
선생님의 가르침
친구들과 나눈
따뜻한 이야기들도 있다
책이 들려준 말씀 몇 마디는
가슴의 무게를 더하고,
그래서 내 몸무게는
저울로 달 수 없다.
▶ 하느님에
때맞춰 비를 내리시고
동네 골목길을
청소해 주셔서 고마워요.
그런데 가슴 아픈 일이 있어요.
개미네 집이
무너지는 것이지요.
개미네 마을은
그냥 두셔요.
구석에 사는 것만 해도
불쌍하잖아요.
가끔 굶는다는 소식도 들리는 데요.
▶ 펄럭펄럭
빨래들이
왜 펄럭이는 줄 아니?
좋아서!
햇볕이 좋아서
바람이 좋아서
함께 펄럭이는 거야.
우리도 그렇지
좋아하는 사람이 찾아오면
팔도 다리도 말도 눈빛도 펄럭이잖아
몸이 온통 펄럭이는 깃발 되지.
깃발도 바람이 좋으면
마구 펄럭이잖아.
▶ 맑은 날
아지랑이의
일렁이는 살결이 보인다.
환한 물의 속살도 비친다.
산의 둥그스럼한 어깨도
잘 보인다
푸름에 젖어
잔잔한 어깨.
슬쩍했던 거짓말이
맘에 걸린다.
▶ 처음 안 일
지하철 보도 계단 맨바닥에
손 내밀고 엎드린
거지 아저씨
손이 텅 비어 있었다.
비 오는 날에도
빗방울 하나 움켜쥐지 못한
나뭇잎들의 손처럼
동전 하나 놓아줄까
망설이다 망설이다
그냥 지나치고,
내내
무얼 잊어버린 듯…
집에 와서야
가슴이 비어 있음을 알았다.
거지 아저씨의 손처럼
마음 한 귀퉁이
잘라주기가 어려운 걸
처음 알았다.
▶ 둥근 것
둥근 것은 곱다.
이슬 눈빛이 곱고
빗방울 속삭임이 곱다.
둥근 것은 향기롭다.
모난 과일이 어디 있나
맛이 향기롭다.
둥근 것은 소중하다.
땅덩이도, 해도 별도 달도 둥글다.
씨앗도 둥글다
잎과 꽃과 뿌리까지 품으려니.
사랑스런 널 보는 눈이 둥글다.
네가 나를 용서할 때의
웃음도 둥글었다
▶ 웃음
친구가 웃어주었어요.
갑자기 몸 속 전구들이 반짝 켜지며
온 몸이 환해지는 듯하고
몸의 나쁜 병균들이 사라지는 것 같았어요.
외로움, 슬픔, 괴로움 마음 병균들이 사라졌어요.
웃음은 한줄기 적외선이었나 봐요.
미움, 화냄, 쓸쓸함 같은 마음,
병균들을 살균했어요.
▶ 알 수 없는 일
햇살이 내 무릎에
손바닥만 한 보자기를 펴 놓곤
창밖으로 나가
저 나무들 위에서
몸을 빛내는 아침
알 수 없다
무릎에다 왜 햇살을 펴 놓고 갔는지
그리고 잎새들과 무슨 애기를 하고 있는지
그걸 바라보는
마음은 왜 남루해지고 또 괴로워지는지,
세상은 알 수 없는 일들로
차있다
▶ 이별
별똥별 하나가
우주 밖으로 사라진다.
하늘과
별들이
두리번거린다.
▶ 새
새 한 마리가
마당에 내려와
노래를 한다.
지구 한 모퉁이가 귀 기울인다.
새떼가
하늘을 날며
이야기를 나눈다.
하늘 한 귀퉁이가 반짝인다.
▶ 누군가 나를
누군가 나를
커다란 지우개로
지우고 있다.
몰래 지우고 있다.
안에서
밖에서
조금씩
내가 지워지고 있다.
아무리 찾아봐도
보이지 않던 내가
지워지고 나니 보인다.
지워진 내가 보인다.
나도 지우고
남도 지우고
조금씩 지워 들어간
내가 요즘은
초승달로 떠 있다.
▶ 물의 뼈
1백 년만의 폭설
얼어붙은 말간물의 뼈들
순하게 순하게 속 다 보이던 물
단단히 몸 걸어 잠그고
찬 길바닥에 드러누워
단단하게 농성하는 물의 뼈
뼛속에 차디찬 맛
굳은 위태로움이다
모두 그 앞에 와선 설설 긴다
허리를 빳빳이 세우고 고개 쳐들었다간
꽈당, 바닥에 내동댕이쳐지는
물의 뼈 맛을 볼 것이다
조심스럽게 다가오는 자에게만
따끔한 맛 감춰버리고 마는 물의 뼈
걷는 일은 늘 조심스러우니 조심하라며.
▶ 절
길의 끝자락에 산다
길이 더 가지 않는 곳에 산다
길이 열려는 몸부림으로
길의 끝에 산다
길의 깊은 몸부림 끝에
절이 산다.
▶ 딱따구리의 식사
한 끼의 식사를 위해
딱 딱 딱
목관 악기의 음색으로
나무의 몸을 뒤진다.
맑음 음향 다발을
나무에게 주고
벌레 몇 마리 얻어가는
경건한 노동,
딱따구리의
식사가 푸르다.
▶ 준비
마른나무더미는 맘먹고 있다,
몸 사를 준비
언 손
언 몸
찾아와
녹여 달라 할 때,
몸 사를
각오를 하고 있다.
▶ 눈
자장
자장
하늘이 불러 주는
하얀 자장가
풀잎 머리 위에
나무의 팔 위에
산의 어깨 위에
자장
자장
지붕이 하얗게 잠들고
들이 하얗게 잠들고.
▶ 공인 어르신
이제 나는 어르신이 되었다
'서울특별시 어르신 교통 카드'를 받고
국가 공인 어르신이 된 거다.
서울시와 국가가 공인한
어르신이니, 처신에 주의해야겠다며
제자들에게 이야기했더니, 마구 웃는다
늙었다는 것인데, 뭐 그리 좋으냐는 웃음이다
친구들도 어르신 카드를 받고 시무룩했다던데
나는 아직 덜떨어진 어르신일까
40년 가까이 시를 쓴 시인인데도
시 1년 원고료가 10만원도 안 된다
나잇값도 못하는 시인이다
어르신 한 달 지하철비 7만원이 거저
1년이면 84만 원이 공짜, 원고료 8배이다
시인보다 국가 공인 어르신이 낫다
이런 나라에 시인이 산다, 하.
▶ 나무의 나이
– 안면도 솔숲에서
소나무 그루터기에
선명한 나무의 나이
90년을 살다 간 나무
이승에 남겨 놓은 유산이라곤
둥그런 원 90개
세월을 둥글게 밟아나간 흔적들
어떤 세월 발걸음은 넓고 굵다
어떤 세월 발걸음은 좁고 가늘다
견디기 힘들어 주저하며 걸은 흔적도 여러 해
비바람 거센 날도 밟아가고
혹독한 눈보라도 밟아갔으리
아프고 힘겨웠던 기록 다 구부려
원 안에다 묻어두었다
햇살 목에 두르고 하늘에 몸을 얹어
원만히 사는 법을
몸 안에다 받아 내렸으니
나무의 나이는 원으로만 읽힌다
▶ 우주 동거
공원 의자에 앉아 있는데
벌레 한 마리가
무릎에 툭 떨어졌다
우주에서
한때
벌레와 지냈다
▶ 누가 나의 시를 읽고
어떤 사람은 나더러 시인이라 부른다
그럴 땐 자랑스레 어깨를 조금 올리지만
귀뚜라미 노래 앞에 이르면
나의 자랑스러움은 무너진다.
평생을 바쳐 몇 편의 시를 남긴다 해도
누가 나의 시를 읽고
눅눅하고 어두운 마루 밑을 밝히는
귀뚜라미 노래만큼 곱다고 하겠는가.
정말이지
내 시 한 줄이
어느 쓸쓸한 아이의 어두운 가슴 골목길에
한 줄기 햇살로 비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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