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산 이은상(李殷相, 1903~1982). 시인. 시조시인, 경남 마산.
연희전문학교, 와세다대학교 졸. 서울대학교·영남대학교 교수
대한민족문화협회장·한국시조작가협회장· 등 역임.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투옥.
국민훈장 무궁화장. 금관문화훈장 수훈
이은상(李殷相) 시(시조) 모음
▶ 진달래
수집어 수집어서 다 못타는 연분홍이
부끄러워 부끄러워 바위틈에 숨어 피다
그나마 남이 볼세라 고대 지고 말더라
▶ 개나리
매화꽃 졌다 하신 편지를 받자옵고
개나리 한창이라 대답을 보내었소
둘이 다 봄이란 말은, 차마 쓰기 어려워서
▶ 성불사의 밤
성불사 깊은 밤에 그윽한 풍경 소리,
주승은 잠이 들고 객이 홀로 듣는구나.
저 손아 마저 잠들어 혼자 울게 하여라.
뎅그렁 울릴 때면 더 울릴까 맘 졸이고,
끊일 젠 또 들릴까 소리 나기 가다려져,
새도록 풍경소리 데리고 잠 못 이뤄 하노라.
▶ 가고파
−내 마음 가 잇는 그 벗에게
내 고향 남쪽 바다 그 파란 물 눈에 보이네.
꿈엔들 잊으리오 그 잔잔한 고향 바다.
지금도 그 물새들 날으리, 가고파라 가고파.
어릴 제 같이 놀던 그 동무들 그리워라.
어디 간들 잊으리오, 그 뛰놀던 고향 동무.
오늘은 다 무얼 하는고, 보고파라 보고파.
그 물새 그 동무들 고향에 다 있는데
나는 왜 어이타가 떠나 살게 되었는고.
온갖 것 다 뿌리치고 돌아갈까 돌아가.
가서 한데 어울려 옛날같이 살고지라.
내 마음 색동옷 입혀 웃고 웃고 지내고저.
그 날 그 눈물 없던 때를 찾아가자 찾아가.
물 나면 모래판에서 가재 거이랑 달음질하고
물 들면 뱃장에 누워 별 헤다 잠들었지.
세상 일 모르던 날이 그리워라 그리워.
여기 물어보고, 저기 가 알아보나.
내 몫엔 즐거움은 아무데도 없는 것을.
두고 온 내 보금자리에 되안기자 되안겨.
처자들 어미 되고 동자들 아비 된 사이
인생의 가는 길이 나뉘어 이렇구나.
없어진 내 기쁨의 길이 아까와라 아까와.
일하며 시름없고 단잠 들어 죄없는 몸이
그 바닷물 소리를 밤낮에 듣는구나.
벗들아 너희는 복된 자다, 부러워라 부러워.
옛 동무 노젓는 배에 얻어 올라 치를 잡고
한 바닷물 따라 나명들명 살까이나
맞잡고 그물을 던지며 노래하자 노래해.
거기 아침은 오고, 거기 석양도 져도
찬 얼음 센 바람은 들지 못하는 그 나라로
돌아가 알몸으로 살꺼나, 깨끗이도 깨끗이.
▶ 동무생각
봄의 교향악이 울려 퍼지는
청라언덕 위에 백합 필적에
나는 흰 나리꽃 향내 맡으며
너를 위해 노래 노래 부른다
청라언덕과 같은 내 맘에
백합 같은 내 동무야
네가 내게서 피어날 적에
모든 슬픔이 사라진다.
더운 백사장에 밀려 들오는 저녁
조수 위에 흰 새 뛸 적에
나는 멀리 산천 바라보면서
너를 위해 노래 노래 부른다
조수와 같은 내 맘에
흰 새 같은 내 동무야
네가 내게서 떠돌 때에는
모든 슬픔이 사라진다.
▶ 봄처녀
봄처녀 제 오시네
새 풀옷을 입으셨네
하얀구름 너울쓰고
진주이슬 신으셨네
꽃다발 가슴에 안고
뉘를 찾아오시는고
님 찾아 가는 길에
내 집 앞을 지나시나
이상도 하오시다
행여 내게 오심인가
미안코 어리석은 양
나가 물어 볼까나.
▶ 그리워
그리워 그리워 찾아와도
그리운 옛님은 아니 뵈네.
들국화 애처롭고
갈꽃만 바람에 날리고
마음은 어디 두고
먼 하늘만 바라본다네
눈물도 웃음도 흘러간 세월
부질없이 헤아리지 말자.
그대 가슴엔 내가
내 가슴엔 그대 있어
그것만 지니고 가자꾸나.
그리워 그리워 찾아와서
진종일 언덕길을
헤메다 가네.
▶ 그리움
뉘라서 저 바다를 밑이 없다 하시는고
백천(百千)길 바다라도 닿이는 곧 잇으리만
님 그린 이 마음이야 그릴스록 깊으이다
하늘이 땅에 이엇다 끝잇는냥 알지마소
가보면 멀고멀고 어늬끝이 잇으리오
님 그린 저 하늘같해 그릴스록 머오이다
길고 먼 그리움을 노래 우에 얹노라니
정회(情懷)는 끝이 없고 곡조(曲調)는 짜르이다
곡조(曲調)는 짜를지라도 남아울림 들으소서
▶ 갈림길에서
체온도 지탱하기 어려운
이 음산한 고난의 땅
역사의 실패한 땅에서
일어서야 할 민족이기에
한 가닥
희망의 길을 찾아
우리 갈 길을 가야 한다
인류의 역사 위에
수많은 의인들이 걸어간
거룩한 피와 눈물이 밴
진리와 아름다움의 길
그 길이
너무도 또렷이
우리 앞에 놓여 있구나
눈물과 땀과 피는
인간이 가진 세 가지 재산
기원과 봉사와 희생
거기 영생의 길이 있네
험하고
가파로와도
오직 그 길만이 사는 길!
너와 나, 식어져버린
가슴 속의 사랑의 피
그 피 다시 끓이면
거기 화사한 장미꽃 피고
눈부신
부활과 영광의 길
우리 앞에 열리리라
▶ 강둑에 주저앉아
문득 보니 미국 병정
총 들고 길 앞을 막네
미군의 담당구역이라
통행증을 보이라 하네
남한 쪽
분계선 안에서마저
자유 없는 이 지역!
산도 내 산이요
강도 내 강인데
날더러 그 누구 앞에
무슨 증표 뵈란 말요
강둑에
주저앉아서
목을 놓고 울어버린다
지지리도 못난 주인아
네 강산 보기가 부끄러우냐
정녕 부끄럽거든
고개 숙이고 지나가렴
말없이
돌장승처럼
눈 내려 감고 서있는 사람
언덕에서 내려다 뵈는
악마의 골짜기 군사분계선
옛날엔 남북으로
기차 다니던 정거장 자리
레일은
우거진 잡초 속에
가로누운 채 잠들었고
녹슨 레일 위에
괴물 같은 저 기관차
벌떡 일어나 우렁차게 울어
이 적막한 하늘 못 흔드느냐
지금 곧
북으로 북으로
냅다 한 번 달리자꾸나
▶ 검은 구름 토하는 고개
이름조차 험한 산 고개
'검은 구름 토하는 고개'
구름이 장막처럼 몸을 휩싸고
비를 몰아오는 바람소리
세기의
종말을 고하는
선지자의 선언과도 같이
진실! 진실을 잃어버리면
거기는 캄캄한 지옥
허위의 얼굴을 대하면
악마보다 더 무서워
지구가
온통 검은 구름에
휩싸여 있는 오늘이다
여기 불타고 말라 죽어
잎사귀 하나 없이 헐벗은 나무
인간들이 받아야 할 형벌을
대신 받고 서 있는 것 같아
경건히
그 십자가 아래 서서
속죄의 기도를 올린다
방향을 잃은 인간들
허위적거리는 발등에
차라리 이 순간
뇌성벽력이라도 쳤으면 싶다
주춤 서
검은 구름 토하는 고개
올려다보는 심정이여!
▶ 고석정(孤石亭)
아름다 와라 절경 한 구역
예부터 이름난 고석정
물은 깊어 검푸르고
골은 돌아 몇 굽인데
3백 척
큰 바위 하나
강 복판에 우뚝 솟았네
위태론 절벽을
다람쥐 기어올라
갈 길도 잊어버리고
강물을 내려다보는 뜻은
여기서
전쟁을 끝내고
총 닦고 칼 씻던 곳이라기
고석정 외로운 돌아
오늘은 아직 너 쓸쓸하여도
저 뒷날 많은 사람들
여기 와 평화의 잔치 차리는 날
낯익은
시인은 다시 와서
즐거운 시 한 장 또 쓰고 가마
▶ 고지가 바로 저긴데
고난의 운명을 지고, 역사의 능선을 타고
이 밤도 허우적거리며 가야만 하는 겨레가 있다.
고지가 바로 저긴데 예서 말 수는 없다.
넘어지고 깨어지고라도 한 조각 심장만 남거들랑
부둥켜안고 가야만 하는 겨레가 있다.
새는 날 핏속에 웃는 모습 다시 한번 보고 싶다.
▶ 고통과 부활
이 고통 아프다 말라
차라리 값진 고통이다
발로 짓밟고 눈얼음 쌓여도
새 싹 움트는 밀알과 같이
믿어라
의심치 말고 믿어라
우리에겐 분명히 부활이 있다
길이 끝났다 말라
여기서부터 시작되는 길
철조망 장벽 앞에서
우리 갈 길을 보았다
열어라
살육의 광야에서
부활의 길을 뚫어라
통일과 사랑 이뤄지는 날
자유와 평화 도로 찾는 날
탁류에 휩쓸려 가는
인간의 양심 회복하는 날
거기에
민족과 인류가 되살아나는
영광의 부활이 있다
▶ 그 집 앞
오가며 그 집 앞을 지나노라면
그리워 나도 몰래 발이 머물고
오히려 눈에 뛸까 다시 걸어도
되오면 그 자리에 서졌읍니다
오늘도 비 내리는 가을 저녁을
외로이 이집 앞을 지나는 마음
잊으려 옛날 일을 잊어버리려
불빛에 빗줄기를 세며갑니다
▶ 나무의 마음
나무도 사람처럼 마음이 있소
숨 쉬고 뜻이 있고 정도 있지요
만지고 쓸어주면 춤을 추지만
때리고 꺾으면 눈물 흘리죠
꽃 피고 잎 퍼져 향기 풍기고
가지 줄기 뻗어서 그늘 지우면
온갖 새 모여들어 노래 부르고
사람은 찾아가 쉬며 놀지요
찬서리 눈보라 휘몰아쳐도
무서운 고난을 모두 이기고
나이테 두르며 크고 자라나
집집이 기둥 들보 되어주지요
나무는 사람 마음 알아주는데
사람은 나무 마음 왜 몰라주오
나무와 사람은 서로 도우면
금수강산 좋은 나라 빛날 것이오
▶ 새 역사는 개선장군처럼
사랑의 큰 진리를
배반한 죄의 값으로
고통 속에서 몸부림치는
조국과 아시아의 세계
멸망의
낭떠러지에서 발을 멈추고
새 역사를 기다리자
우리들의 새 역사는
어떤 모습으로 올 것인가
순풍에 돛 달고 오는
유람선같이 오진 않으리
얼굴과
몸뚱이 성한 데 없이
상처투성이로 오리라
우리들의 새 역사는
상처투성이지만 이기고 돌아오는
역전의 개선장군으로
우리 앞에 다가서리니
그 날에
우리는 그와 함께
분명 그와 함께 서리라
▶ 스승과 제자
또 한 고개 높은 재 넘어
낭떠러지 길가에 앉아
고달픈 다리를 쉬노랄 제
뒤에서 돌격대처럼 달려와
'선생님'
부들부들 떨면서
나를 껴안는 병정 한 사람
반가와라 이게 누군고
군인이 된 나의 제자
길목 지키는 파수병으로
이 깊은 산협에서 만나보다니
두 손목
서로 붙들고
어루만지다 이야기하다
산협길 멀고 험하고
해조차 뉘엿이 기울건마는
차마 서로 못 나뉘어
손목을 놓았다 잡았다
헤어져
산모퉁이 돌 때까지
몇 번이나 되돌아보고
▶ 신록 속에 서서
흙탕물 쏟아져 내리던
전쟁의 악몽과 화상
여기선 신록조차 눈에 서툴러
다른 나라의 풍경화 같네
역사의
배반자라는
낙인찍힌 우리들이기에
이 시간에도 온갖 죄악을
아편처럼 씹으면서
갈수록 비참한 살육의
설계도를 그리면서
거룩한
신록의 계절을
모독하는 무리들!
그러나 우리들 가슴속에는
마르지 않은 희망의 샘 줄기
어둠의 세기 복판을
운하처럼 흐르고 있다
기어이
이 물줄기 타고 가리라
통일과 평화의 저 언덕까지
▶ 오륙도(五六島)
五六島 다섯 섬이 다시 보면 여섯 섬이
흐리면 한두 섬이 맑으신 날 五六島라
흐리락 맑으락 하매 몇 섬인 줄 몰라라.
취하여 바라보면 열 섬이 스무 섬이
안개나 자욱하면 아득한 먼바다라
오늘은 비속에 보매 더더구나 몰라라.
그엣 날 어느 분도 저 섬을 헤다 못해
헤던 손 내리고서 五六島라 이르던가
돌아가 나도 그대로 어렴풋이 전하리라.
▶ 천지송
보라, 저 울멍줄멍 높고 낮은 산줄기들
저마다 제자리에 조용히 엎드렸다.
산과 물 어느 것 한 가지도 함부로 된 것 아니로구나.
황금 방울같이 노오란 저녁 해가
홍비단 무늬 수를 놓고 있다.
저기 저 구름 한 장도 함부로 건 것 아니로구나.
지금 저 들 밖에 깔려 오는 고요한 황혼!
오늘밤도 온 하늘에 보석 별들이 반짝이리
그렇다! 천지자연이 함부로 된 것 아니로구나.
▶ 칡꽃마을 이야기
시인은 막대 끌고
또 한 고지에 올랐더니
파수 서 있는 병정 한 사람
산 밑 마을 가리키며
겪어 온
기구한 사연
들려주는 이야기
'바로 저 아래 보이는
칡꽃마을이 내 고향이죠
저기 약수터가 있어
거기 가 빌면 소원성취 한다기
약속한
처녀랑 하냥
아침저녁 같이 다녔죠'
'그러다 전쟁이 터져
온 마을이 불타버리고
모두들 죽고 흩어지고
나는 뽑혀서 군인이 되고
처녀는
마을을 못 벗어나
비참하게도 숨져버리고'
'나는 전투부대 따라
이곳저곳 옮아 다니다
지금은 뜻밖에도
이 고지 감시대 파수병이 되어
날마다
칡꽃마을 내 고향
내려다보며 섰지요'
'저기 있는 약수터도
영험이 없나 봐요
그렇게도 빌었었는데
소원성취 못하고서
옛 처녀
그려 보면서
명복을 빌며 살지요
▶ 장안사
장하던 금전벽위 찬재되고 남은 터에
이루고 또 이루어 오늘을 보이도다.
흥망이 산중에도 있다 하니
더욱 비감하여라
▶ 사랑
탈대로 다 타시오 타다 말진 부디 마소
타고 다시 타서 재 될 법은 하거니와
타다가 남은 동강은 쓸 곳이 없느니다
반 타고 꺼질진 대 아예 타지 말으시오
차라리 아니 타고 생나무로 있으시오
탈진대 재 그것조차 마저 탐이 옳으니다
▶ 성천강(城川江)
도련포 천리장성 헐어졌어도
성천강 만세교야 길기도하이
하란평 넓고넓다 끝도없어라
사나이 큰숨한번 내쉬어보자
▶ 심산풍경(深山風景)
도토리, 서리나무 썩고 마른 고목 등걸
천 년 비바람에 뼈만 앙상 남았어도
역사는 내가 아느니라 교만스레 누웠다
풋내기 어린 나무 저라사 우쭐대도
숨기신 깊은 뜻이야 나 아니고 누가 알랴
다람쥐 줄을 태우며 교만스레 누웟다
▶ 옛 동산에 올라
내 놀던 옛 동산에 오늘 와 다시 서니
산천의구란 말 옛 시인의 허사로고
예 섰던 그 큰 소나무 버혀지고 없구료.
지팡이 도로 짚고 산기슭 돌아서니
어느 해 풍우엔지 사태져 무너지고
그 흙에 새 솔이 나서 키를 채려하는구료
▶ 단풍 한 잎
단풍 한 잎사귀 손에 얼른 받으오니
그대로 내 눈 앞에 서리치는 풍악산을
잠긴 양 마음이 뜬 줄 너로 하여 알겠구나.
새빨간 이 한 잎을 자세히 바라보매
풍림(楓林)에 불 태우고 넘는 석양같이 뵈네
가을 밤 궂은 비소리도 귀에 아니 들리는가.
여기가 오실 텐가 바람이 지옵거든
진주담 맑은 물에 떠서 흘러 흐르다가
그 산중 밀리는 냇가에서 고이 살아 지올 것을.
▶ 공초경
오고 싶지 않은 곳으로 온 공초여
가고 싶은 곳도 없는 공초여 그러기에
공초는 오지도 않았고 가지도 않을 것이다
▶ 계조암
계조암 너덜바위 길도 바위 문도 바위
바위 뜰 바위 방에 석불 같은 중을 만나
말없이 마주섰다가 나도 바위 되니라
▶ 나의 조국 나의 시
나는 가난한 사람 그러나 나는 가멸한 사람
누가 날 가난하다는고 내 가슴속은 보지 못하고
내게는 보배가 있다 나의 조국 나의 시.
▶ 애국시
겨레여 우리에겐 조국이 있다
내 사랑 바칠 곳은 오직 여기뿐
심장의 더운 피가 식을 때까지
즐거이 이 강산을 노래 부르자.
▶ 백결선생전을 읽고
옛날에 백결선생 낭산(狼山) 아래 막을 매고
안해와 마주 앉아 굶주리고 살면서도
즐거운 거문고 소리 끊일 줄이 없더니라
앞집은 방아 찧고 뒷집에선 다듬이질
있다는 그네들은 근심 걱정 도로 많아
이 세상 어이 살꺼나 한숨 못 꺼 하더니라
풋나물 입에 넣고 괴로워 마올 것이
누더기 몸에 걸고 부끄러워 마올 것이
진실로 마음 곧 편하면 무얼 부러하리오
▶ 가윗날에
가을 들 마르는 풀 바람에 흔드는데
반계(半溪) 단풍(丹楓)은 석양에 타는구야
천리객(千里客) 이내 상혼(傷魂)을 뉘게 말씀하리오
북산(北山)에 홀로 올라 누누중총(累累衆塚) 바라보니
가위라 군데군데 곡(哭) 소리 슬프도다
우리 님 누우신 산(山)을 멀리 그려 우노라
유자(遊子)의 돌아감이 기약조차 없노왜라
천리(千里) 향사(鄕思)를 남산(南山) 어이 가리는고
타산(他山)에 뿌리는 눈물 더 쓰린 줄 아소서
뫼와 물 바랄수록 자란 마슬 보고지고
세파(世波)에 불릴수록 님 그리움 쌓이건만
이제야 어느 분 뫼려 옛 땅 찾아가리오
님은 가오시고 기억(記憶)만 남기도다
정녕히 못 오시면 기억(記憶)마저 걷으소서
철철이 더한 쓰림을 어이 몰라 하신고
동봉(東峯)에 달이 솟아 마슬길을 비취나다
중추(中秋) 야흥(夜興)을 사람마다 겨워할 제
어떠타 외로운 한 사람은 눈물 못 금(禁)하나니
아실이 누구신고 이 가슴 내 진정(眞情)을
천행루(千行淚) 만곡가(萬曲歌)론들 어이 능(能)히 표할손가
상월(霜月)이 죽창(竹窓)에 드니 잠 못 이뤄하노라
시름 잊자 취(醉)한다니 못 믿을 말이로다
잊으려 잊을진댄 님 여의다 슬플 것가
낙엽(落葉)이 어즐은 밤은 더 못 잊어하노라
산(山) 마슬 깊은 밤을 뜰에 가득 달이로다
마음을 둘 데 없어 사립 열고 나와 선 제
귀뚜린 누구를 그려 저대도록 우나니
머문 곳 이러이러 갈 곳은 어드메오
석화(石火) 일생(一生)이 어이 이리 괴로운고
삼경(三更)에 비가(悲歌)를 불러 만리한(萬里恨)을 붙이노라
▶ 거울 앞에서
나는 분명히 나를 속이고 또 남을 속이는 자다.
슬픔이 있어도 기쁜 듯이. 괴롬이 있어도 편한 듯이
못나고도 잘난 듯이. 약하고도 강한 듯이.
미움이 있고 사랑이 있어도 이것저것이 다 범상한 듯이
이리하여 가련(可憐)한 나의 삶이 나를 끄을고 간다.
그러나 다만 한때 벽(壁)에 걸린 거울을 보는 그때만은
내 얼굴 내 마음 내 그림자가 너무나 소연(昭然)하여
속이지 못하는 정직(正直)한 내가 되는 것이다.
거울 속 저 사람아 바로 뵈는 저 사람아
잘나나 못나나 간에 이제야 바로 너로구나
무삼일 너 아닌 너로 너인 듯이 사나니
저와 남 다 속이는 이런 곳에 왜 사는고
안 속고 안 속이는 그런 세상 어디온지
있다면 천리만리(千里萬里)라도 거기 가서 살과저
▶ 계월송(溪月頌)
뒷시내 흐르는 물 여흘여흘 옥(玉)소리를
네 소리 들을 제면 만단고(萬端苦) 쓸리나니
꿈에도 들리오시라 부대 들리오시라
맑은 물 흰 돌 위에 휘엉청이 밝으신 달
내 가슴 덮은 그늘 다 열어 주시나니
꿈에도 비치오시라 부대 비치오시라
하늘 땅 온갖 것이 다 흩어져 없어지고
나마저 숨을지라도 청계명월(淸溪明月)은 남기과저
만고(萬古)에 흐르고 밝아 그치지 마시오시라
▶ 곡성첩(哭城堞)
어져 이 토석(土石)아 무삼 일 서 있더니
풍마(風磨) 우세(雨洗)로 부질없이 삭단 말가
흙덩이 발 끝에 채어 마저 깨어지더라
백악(白岳)에 높이 올라 만보장성(萬步長城) 둘러보니
분주(奔走) 반천년(半千年)이 한가(閑暇)한 꿈이로다
꿈이야 꿈일지언정 우일 꿈을 짓다니
▶ 구정(球庭)
수우피(水牛皮) 봉(棒)을 들고 마류구(碼瑠球) 치올 적에
장전(帳殿) 소고(簫鼓)는 천지를 흔들랏다
백마(白馬)의 미쳐 나는 양을 보는 듯이 느껴라
채의(彩衣)를 떨쳐입고 행구(行球)하던 저 무사(武士)야
광명동(廣明洞) 흐르는 물 물따라 어이 간고
황천(黃泉)에 누워 있어도 예 못잊어하리라
창검(槍劍) 부러지고 향등(香燈)도 꺼진 뒤에
남북(南北) 구정(球庭)이 이랑이랑 밭이 되어
석양(夕陽)에 찾아온 손을 울려 돌려보내더라
▶ 귀해심(歸孩心)
길가에 두세 아이 소꼽질에 즐기나다
무심코 지나든들 마음 이리 아프리오
옛날이 눈 앞에 보여 발 머물고 서노라
가든 길 돌아서서 그 문 앞에 다가서니
돌밥에 사긔ㅅ국이 고기도곤 부러워라
어드메 누구 살림이 저만하다 할소냐
다시는 저런 살림 차려보지 못할런가
풍우(風雨) 삼십 년(三十年)을 울어보나 부질없다
이 봄도 또 간다 하니 눈물 겨워하노라
▶ 그대 대답하시오
가물에 시들어진 옥잠화(玉簪花) 두어 잎새
물주고 비 나리면 다시 살아날 것이오
아이는 물 뜨러 보내고 나는 하늘 바라오
저보 바람결에 파초(芭蕉)닢 찢기었소
찢어진 저 잎사귀 붙이는 풀 없는지요
처져서 마르는 반(半)닢 어이할 길 없구료
외롭고 쓰린 내 맘 어느 것에 비기올꼬
시들은 옥잠(玉簪)이랄까 찢어진 파초(芭蕉)랄까
아니오 나는 모르오 그대 대답하시오
▶ 금강(金剛)에 살으리랏다
금강(金剛)에 살으리랏다 금강(金剛)에 살으리랏다
운무(雲霧) 데리고 금강(金剛)에 살으리랏다
홍진(紅塵)에 썩은 명리(名利)야 아는 체나 하리오
이 몸이 쓰러진 뒤에 혼(魂)이 정녕 있을진댄
혼(魂)이나마 길이길이 금강(金剛)에 살으리랏다
생전(生前)에 더러인 마음 명경(明鏡)같이 하과저
▶ 금강(金剛)을 바라보며
금강(金剛)이 저기로다 구름 밖에 저기로다
꿈인지 상해[眞]런지 그림인지 실상(實相)인지
알고도 모를 것이야 금강(金剛)인가 하노라
바쁜 양 몸은 아직 먼 곳에 있건마는
마음은 언제 벌써 금강(金剛) 중에 들었구나
만이천(萬二千) 구구층층(區區層層)이 낯익은 듯하여라
▶ 금강귀로(金剛歸路)
금강(金剛)이 무엇이뇨 돌이요 물이로다
돌이요 물일러니 안개요 구름일러라
안개요 구름이어니 있고 없고 하더라
금강(金剛)이 어드메뇨 동해(東海)의 가이로다
갈 제는 거길러니 올 제는 흉중(胸中)에 있네
라라라 이대로 지켜 함께 늙자 하노라
▶ 기봉(起峰) 위에 서서
- 햇볕 아래 오르고 빗속에 돌아오다
정방산(正方山) 가운데 두고 이백리(二百里) 두른 벌판
벼 향기 무륵무륵 향적불국(香積佛國) 여기로다
이게 다 내 것 아닌가 왜 모르고 울던고
벌 건너 하늘 밑에 월하산(月下山)이 아득한데
아! 장(壯)할시고 비 몰려오시는 경(景)
어서 와 날 뿌려 주소 먼지 씻어 주시오
이 좋은 기봉(起峰) 위에 장막들을 지어 두고
양식(糧食)에 주린 이 자연(自然)에 주린 이들
번갈아 모시어다가 배부르게 하과저
▶ 꿈 깬 뒤
임술년(壬戌年) 5월 한양(漢陽)에서 병(病)을 얻어
마침내 어느 병원의 구석방에 외로이 앓는 몸을 누이게 되었다.
입원한 지 삼 주간이 지난 6월 5일의 밤
기이(奇異)하고도 고마운 꿈은 오히려 깬 뒤에
더한 적막(寂寞)을 남기고 사라졌다.
온 날을 앓은 몸이 잠을 겨우 이뤘는데
꿈속에 어인 님이 진달래를 병에 꽂아
상(床) 맡에 가만이 놓시고 웃고 돌아가누나
누은 몸 문득 놀라 그 보고 하온 말이
당신이 누구완대 이 꽃을 내게 주오
병실(病室)을 잘못 드셨소 나는 아니오이다
내게는 이런 이 없소 있을 리(理)도 없으니다
외치다 깨어 보니 혼자 던져 누웠구나
눈 돌려 꽃 찾는 마음 더욱 쓸쓸하여라
▶ 노돌[鷺梁津]
차중(車中). 차(車)가 한강철교(漢江鐵橋)를 지나자
어느 한 분이 바깥을 가리키며 `저기가 노돌이오' 하매
다른 한 분 놀라 보며 하는 말 `아! 역사(歷史) 깊은 노돌이지’ 하는지라.
그가 누군지는 알지 못하나 나는 문득 이 노래를 속으로 읊어 드렸다.
노돌이 여기란다고 놀라 보는 저 길손아
오백년(五白年) 옛 풍류(風流)를 어느 곳서 찾으리오
모래요 강물뿐이니 그냥 지나가시소
▶ 눈보라 치는 밤에
내 방도 차건마는 여기는 방인 것이
그 어린 거지들 어데서 이 밤을 새노
따뜻한 물 한 그릇이나마 못 먹었으면 어이나
옥(獄) 속에 갇힌 이들 이 밤 어이 지나시노
찬마루에 눕는 몸이 매맞지나 않사온지
눈보라 창치는 소리에 가슴 덜렁하여라
▶ 답우(答友)
길에서 고우(故友)를 반가이 만난지라
내 부끄러움 없이 우거(寓居)하는 토실(土室)로 뫼셔 왔더니
그이 돌아가 후일(後日)에 글을 보내어
내 토실(土室)의 좁고 누(陋)함을 심히 근심하여 주기로
내 이에 두어 장(章) 노래를 적어 그에게 답(答)하니라.
세존(世尊)은 거리 돌아 걸식(乞食) 아니 하셨는가
인자(人子)도 한 평생을 머리 둘 곳 없었나니
내 이제 드는 데 있음을 부끄러워하노라
강산(江山)을 둘러보소 내 집 없는 아우 형(兄)들
등지고 서로 헤쳐 가시는 양 보옵시오
해 진 뒤 돌아올 곳 있음을 부끄러워하노라
▶ 맹서(盟誓)
자비(慈悲)가 님의 뜻이 희생(犧牲) 또한 님의 뜻이
내 몸은 죽사와도 남 도와 사올 것이
님께서 이 길로 예시오니 나도 따라 가오리다
썩어질 몸이어늘 영화안락(榮華安樂) 무엇이뇨
불의(不義)엔 침 배앝고 향기(香氣)로이 살았어라
내 일생(一生) 이 뜻을 지켜 님의 뒤를 이으리다
▶ 박연(朴淵)
불타는 홍엽(紅葉)길에 분별없이 취(醉)한 몸이
청애(靑靄)로 깨고 나니 앉은 곳이 범사정을
어느새 그리던 선경(仙境)을 저도 몰래 들었더라
성거산(聖居山) 가을 저녁 검고 붉고 누르러고
산(山) 넘어 긴 하늘은 쪽 푼 듯이 푸르른데
떨어진 흰 빛 한 줄기 박연(朴淵)이라 하더라
눈을 날리시나 구슬을 굴리시나
바람을 이루시고 구름을 피우시나
안개와 연기에 싸여 아무 그인 줄 몰라라
암학(岩壑)에 나린 폭포 선악(仙樂)을 아뢰올 제
유인(遊人)은 소매 들고 사장(沙場)에 나리놋다
송백(松栢)도 풍류(風流)를 알아 그냥 섰지 못하더라
물 나린 푸른 벽(壁)에 위태히 선 저 노송(老松)아
어드메 땅이 없어 구태 거기 심겼느뇨
우리도 심산절경(深山絶景)을 찾아왔소 하더라
야폭경(夜瀑景) 더 좋으이 오르는지 나리는지
우렁찬 물소리도 우에선지 아래선지
다만지 천도용궁(天都龍宮)이 이로 이어졌더라
지화자 달이로다 구룡산령(九龍山嶺)에 달이로다
물만도 족(足)한 것을 달이조차 오르시네
구을다 송림(松林)에 앉으며 같이 놀자 하더라
이 폭포(瀑布) 은하(銀河)라니 아마도 옳은 말이
바위에 올라 앉아 고모담(姑姆潭) 굽어보니
명월(明月)도 은하(銀河)를 못 잊어 함께 내려 왔더라
물 아래 저 용낭(龍娘)아 옥(玉)저 부는 님 데리고
달 밝은 이런 밤에 나와 논들 어떠하리
아마도 진객(塵客)을 끄는가 하여 돌아갈까 하노라
이 승지(勝地) 찾아 들며 바삐 오던 저 사람아
돌아서 가는 걸음 어이 저리 더딘게오
청형(淸馨)이 성관(城關)에 남았기로 넘지 못해 그리노라
▶ 밤비 소리
천하(天下) 뇌고인(惱苦人)들아 밤비소리 듣지 마소
두어라 이 한 줄밖에 더 써 무엇하리오
▶ 비로봉(毘盧峰) 기일(其一)
비로봉(毘盧峰) 오르는 길은
`금(金)서들'이라 부르는 푸른 이끼 앉은 돌무더기와
`은(銀)서들'이라 부르는 흰 이끼 앉은 돌무더기로 되었는데
`서들'이란 말은 `뢰(磊)'의 뜻이며 혹 이를 `사다리'라고도 하니
이는 `서들'의 와(訛)일 것이나 밟고 오르는 층계(層階)라는 뜻으로 보면
그 역(亦) 무방(無妨)하다.
금(金)길 은(銀)길 밟고 올라 상청궁(上淸宮)에 높이 서니
일성(日星) 운한(雲漢)과 벗하는 오늘이라
천풍(天風)은 무수(舞袖)를 날리며 몸 가으로 돌더라
백운대(白雲臺) 여기로다 청벽(靑壁)을 만지노라
팔황(八荒) 운물(雲物)이 발 아래 다 깔리니
내 몸이 어디 섰는지 분별(分別) 못해하노라
▶ 산 위에 올라
산(山) 위에 올라
안개 싸인 산(山)을 헤히고 올라선 제
새소리 들리건마는 새는 아니 보이오
안개 걷고 나니 울던 새 인곧 없고
이슬만 잎사귀마다 방울방울 맺혔소
▶ 산전(山田)을 지나며
산전(山田)에 저 농부(農夫)야 빈고(貧苦)를 울지 마소
세상에 허다우부(許多愚夫) 마음 팔아 낙(樂)을 사오
넋 없는 허수아비들 웃어준들 어떠리
▶ 삼개에서
찾으니 장강(長江)인데 강(江) 건너 은(銀)모랫벌
벌 지나 뫼이온데 뫼 넘어 구름일네
천지(天地)에 봄바람만이 불어 왕래(往來)하더라
돌길이 좁고 험(險)해 홑몸도 어려워늘
무거운 세상 시름 지고 안고 무삼 일고
강문(江門)에 다 부려 두고 몸만 돌아 들까나
푸른 물 검은 돌에 흰옷 빠는 저 아씨들
옷 치는 방치 소리 뱃노래에 절로 맞네
이따금 아미를 고치는지 장단(長短) 흐려지더라
바위벽(壁) 돌아드니 한마당 백사(白沙)로다
거니는 이 발자옥 물이 밀면 쓸리려니
진객(塵客)에 더러힌 자취 남겨 무삼하리오
물새의 노래 듣소 이 분명 거문고를
흰구름 물에 드니 이 정녕 그림일사
소리 빛 한데 모이니 승경(勝景)인가 하노라
봄바람 노는 양을 이 강(江)에 와 보완제고
가벼운 노(櫓)소리를 붙여 함께 듣노매라
사람은 승지(勝地)를 찾아 멀리로만 가더라
청류(淸流)에 낚시 던져 놀이하는 저 분들아
고기야 네 것이냐 취적(取適)이나 하올 것이
어조(魚鳥)도 봄을 아나니 같이 논들 어떠리
언덕에 올라 앉아 봄바람에 눈물 지고
돌아서 새소리에 혼자 웃는 내 모양을
저 물도 흘러가나니 전할 뉘를 몰라라
해는 지려하고 애는 더욱 끊이랴ㄹ제
한가락 미친 노래 석벽(石壁) 넘어 들려오네
저 분은 무슨 한(恨)으로 목에 피를 올리나니
두세 돛 강풍을 띄어 포구(浦口)로 바삐 드네
석양(夕陽)에 돌아서니 진환이 고대로다
강두(江頭)에 취객(醉客)이 모여 오락가락 하더라
▶ 삼태동(三台洞)을 지나며
삼태동(三台洞)은 고향 합포(合浦)에서 서(西)로 칠십리를 나가 있는 곳이다.
1925년 7월 2일 내 그 산촌(山村)을 지나다가 서숙(書塾)을 찾아
강선생(姜先生)이란 이와 인사하고 이 노래를 지어 드리고 가다.
삼태산(三台山) 깊은 골에 먼지 없는 이 마슬은
차움의 세상 밖에 따로 베푼 평화(平和)동산
내 길이 바쁘건마는 쉬다 갈까 하오
고목(古木)선 우물가에 물 긷는 저 아가씨
동이를 이기 전에 한 모금만 마셔 주오
타는 목 그 생명수(生命水)로 축여 볼까 하오
옷 벗은 아이들아 천사(天使)의 후신(後身)들아
풀 한 줌 흙 한 줌을 쥐고 옴은 무삼 일고
옳아 참 상처 난 내 몸에 그 약(藥) 발라 다오
▶ 선죽교(善竹橋)
충신(忠臣)의 남긴 뜻이 돌에 스며 붉었으니
하마배(下馬拜) 하온 이들 몇 만(萬)인지 모르리만
돌아가 행(行)하신 이는 몇 분이나 되는고
충신(忠臣)의 타는 넋이 홍엽(紅葉)에 배어들어
용수(龍岫) 송악(松岳)에 두루 심겨 천만수(千萬樹)를
유객(遊客)이 헛보고 지나니 그를 설워하노라
▶ 설야음(雪夜吟)
삼경(三更)이 넘어서야 거리를 벗어나서
눈빛에 길을 찾아 산(山) 마슬로 돌아오니
등잔불 그무는 저기 내 집인가 아닌가
눈보라 휘불리어 얼굴을 치는구나
찬 뺨에 흐르는 물 눈녹음만 아니오나
이 한밤 외진 산길에 어느 분이 알리오
지게에 다달아서 언 고리 잡다 말고
타는 애 끌 길 없어 되나서 산모루로
송림(松林)에 눈비 맞으며 돌아올 줄 몰라라
▶ 소경 되어지이다
소경 되어지이다
뵈오려 못 뵈는 님 눈감으니 보이시네
감아야 보이신다면 소경 되어지이다
▶ 어포(漁浦) 달 밝은 밤에
어포(漁浦) 달 밝은 밤에 모래 위를 거니노라
밀물을 피(避)하는 걸음 깨달으니 초제(草堤)로다
무심(無心)코 풀 위에 앉을 제 반디 놀라 날더라
청도암(淸濤岩) 밤 물결에 띄우노라 조각배를
시원한 바람 따라 흘리노라 백마도(白馬島)로
새벽만 넘는 달빛에 갈밭 돌아 오리라
빈 배에 몸을 맡겨 달 더불어 누웠거늘
어즐은 세상일을 생각하여 무삼하리
밤고기 뛰는 소리에 그만인가 하노라
▶ 옛 강물 찾아와
옛 강(江)물 그리워서 봄 따라 나왔더니
물도 그도 다 가시고 봄도 그 봄 아니온데
호을로 아니 간 것은 내 맘인가 하노라
물 건너 하늘가에 떠도는 구름같이
뭉쳤단 바람 따라 헤어지고 마는 것을
지금도 고개 돌리니 곁에 선 듯하여라
그 옛날 이 모래 위에 서로 쓴 두 이름은
흐르는 물에 씻겨 길이 길이 같이 예리
몸이야 나뉘시온들 한(恨)할 줄이 있으랴
▶ 옛 동산에 올라
내 놀던 옛 동산에 오늘 와 다시 서니
산천의구(山川依舊)란 말 옛 시인(詩人)의 허사(虛辭)로고
예 섰던 그 큰 소나무 버혀지고 없구료
지팽이 더저 짚고 산(山)기슭 돌아나니
어느 해 풍우(風雨)엔지 사태(沙汰)져 무너지고
그 흙에 새 솔이 나서 키를 재려 하는구료
▶ 오수(午睡) 아닌 오수(午睡)
안두(案頭)에 놓인 책은 저대로 펴어 있고
나는 나대로 눈감고 앉았으니
이 사이 무한(無限)한 고요를 어느 뉘가 알리오
이윽고 눈을 떠서 깨달으니 황혼인데
아이는 내 그 동안 졸은 줄만 알았든지
대야에 물 떠놓으며 세수하소 하더라
▶ 옥류동(玉流洞)
옥석을 씻어 나려 옥류(玉流)가 되옵든가
옥류(玉流)로 닦아 내어 옥석(玉石)이 되옴인가
두 옥(玉)이 씻고 닦이니 어느 것인 줄 몰라라
금강(金剛) 계상석(溪床石)이 다토아 희올 적에
백석담(白石潭) 저 바위야 참으로 희옵도다
희고서 아니 검으니 그를 좋아하노라
옥류(玉流)면 옥류(玉流)이오 옥석(玉石)이면 옥석(玉石)이지
구태어 이 동(洞)안에 향(香)내는 어디선고
앞선 이 한 곳을 가리키며 천화대(天華臺)라 하더라
▶ 이 마음
거닐다 깨달으니 몸이 송림(松林)에 들었구나
고요히 흐른 달빛 밟기 아니 황송한가
그늘져 어둔 곳만을 골라 딛는 이 마음
나무에 몸을 지혀 눈감고 섰노랄 제
뒤에서 나는 소리 행여나 그대신가
솔방울 떨어질 적마다 돌려 보는 이 마음
▶ 인생
차창(車窓)을 내다볼 제 산(山)도 나도 다가드니
나려서 둘러보니 산(山)은 없고 나만 왔네
다 두고 저만 나가니 인생(人生)인가 하노라
▶ 임진강(臨津江)을 지나며
임진강(臨津江) 밤물결이 달 아래 굽이치며
여대(麗代) 풍류(風流)를 아뢰려 드는구나
송경(松京)이 남아 있으니 잠잠한들 어떠리
대하여 말할 뉘 없고 조수어별(鳥獸魚鼈) 다 자는 밤에
강월(江月) 강풍(江風)이 빈 하늘에 깨어 있어
한(恨) 품은 나그네 하나 지나감을 보더라
▶ 자하동(紫霞洞)
선인교(仙人橋) 나린 물은 예같이 흐르는데
중화당(中和堂) 삼한국로(三韓國老) 그들은 어디 간고
자하곡(紫霞曲) 남은 장단(長短)만 추풍(秋風) 속에 들었더라
▶ 장안사(長安寺)
장(壯)하던 금전벽우(金殿碧宇) 찬 재 되고 남은 터에
이루고 또 이루어 오늘을 보이도다
흥망이 산중에도 있다 하니 더욱 비감(悲感)하여라
▶ 절름발이
길 가다 문득 보니 어이한 절름발이
절―룸 절―룸 빈정대며 걸어가네
세상이 아니 고름을 비웃는 것 같구려
▶ 태자궁지(太子宮址)
혹자왈(或者曰) `마의초식(麻衣草食)한 이가 무슨 정(情)에 궁(宮)을 세웠겠느냐.
이는 전설(傳說)이요 사실(史實)은 아니라'고 한다.
답왈(答曰) 그는 잘못이다.
궁이 반드시 화려굉대(華麗宏大)를 뜻함이 아닐지니
일간두옥(一間斗屋)도 태자(太子)가 거(居)하시매
사람들이 말하되 궁(宮)이라 하였으리라.
마의(麻衣) 초식(草食)하되 님이시니 님인 것이
님이 계오시니 막이라도 궁(宮)인 것이
높으신 그 뜻을 받들어 섬기올까 하노라
풀이 절로 나고 나무가 절로 썩고
나고 썩고를 천년(千年)이 넘었으니
유신(遺臣)의 뿌린 눈물이야 얼마인 줄 알리오
그 모른 외인(外人)들은 경(景)만 보고 지나가네
뜻 품은 후손(後孫)이라도 해만 지면 가는 것을
대대(代代)로 예 사는 새들만 지켜 앉아 우나니
오늘은 비 뿌리고 내일은 바람 불어
계오신 대궐은 터 쫓아 모를노다
석양(夕陽)에 창태(蒼苔)를 헤치니 눈물 앞서 흐르네
궁(宮) 터를 홀로 찾아 초석(礎石)을 부드안고
옛날을 울어내어 오늘을 조상(弔喪)할 제
뒷시내 흐르는 여울도 같이 울어 예더라
▶ 포은구거(圃隱舊居)
계옵던 옛 집터를 절하고 굽혀 드니
벽상(壁上) 영정(影幀)이 사신 듯 말하실 듯
맞추어 울 밑 황국(黃菊)이 서리 속에 섰더라
묻노라 저 읍비(泣碑)야 네 눈물 얼마완대
이토록 흘리고서 상기 아니 마르나니
만고한(萬古恨) 맺힌 눈물이니 그칠 날을 몰라라
▶ 할미꽃
겉보고 늙다 마소 속으로 붉은 것을
해마다 봄바람에 타는 한 끄지 못해
수심에 숙이신 고개 알 이 없어하노라
▶ 화원(花園)
화원(花園) 터 어드매오 왕자공손(王子公孫)은 누구시오
팔각전(八角殿) 화초 향기 끊인 적이 오랜 이제
빈가(貧家)에 낙엽(落葉)져 날리니 아무덴 줄 몰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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