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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詩 같은 삶을 위하여
☞ 문학의 뜨락

노산 이은상(李殷相) 시(시조) 모음

by 石右 尹明相 2022. 10. 24.

 

노산 이은상(李殷相, 1903~1982). 시인. 시조시인, 경남 마산.

연희전문학교, 와세다대학교 졸. 서울대학교·영남대학교 교수

대한민족문화협회장·한국시조작가협회장· 등 역임.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투옥.

국민훈장 무궁화장. 금관문화훈장 수훈

 

 

이은상(李殷相) 시(시조) 모음

 

 

진달래

 

수집어 수집어서 다 못타는 연분홍이

부끄러워 부끄러워 바위틈에 숨어 피다

그나마 남이 볼세라 고대 지고 말더라

 

 

개나리

 

매화꽃 졌다 하신 편지를 받자옵고

개나리 한창이라 대답을 보내었소

둘이 다 봄이란 말은, 차마 쓰기 어려워서

 

 

성불사의 밤

 

성불사 깊은 밤에 그윽한 풍경 소리,

주승은 잠이 들고 객이 홀로 듣는구나.

저 손아 마저 잠들어 혼자 울게 하여라.

 

뎅그렁 울릴 때면 더 울릴까 맘 졸이고,

끊일 젠 또 들릴까 소리 나기 가다려져,

새도록 풍경소리 데리고 잠 못 이뤄 하노라.

 

 

가고파

내 마음 가 잇는 그 벗에게

 

내 고향 남쪽 바다 그 파란 물 눈에 보이네.

꿈엔들 잊으리오 그 잔잔한 고향 바다.

지금도 그 물새들 날으리, 가고파라 가고파.

 

어릴 제 같이 놀던 그 동무들 그리워라.

어디 간들 잊으리오, 그 뛰놀던 고향 동무.

오늘은 다 무얼 하는고, 보고파라 보고파.

 

그 물새 그 동무들 고향에 다 있는데

나는 왜 어이타가 떠나 살게 되었는고.

온갖 것 다 뿌리치고 돌아갈까 돌아가.

 

가서 한데 어울려 옛날같이 살고지라.

내 마음 색동옷 입혀 웃고 웃고 지내고저.

그 날 그 눈물 없던 때를 찾아가자 찾아가.

 

물 나면 모래판에서 가재 거이랑 달음질하고

물 들면 뱃장에 누워 별 헤다 잠들었지.

세상 일 모르던 날이 그리워라 그리워.

 

여기 물어보고, 저기 가 알아보나.

내 몫엔 즐거움은 아무데도 없는 것을.

두고 온 내 보금자리에 되안기자 되안겨.

 

처자들 어미 되고 동자들 아비 된 사이

인생의 가는 길이 나뉘어 이렇구나.

없어진 내 기쁨의 길이 아까와라 아까와.

 

일하며 시름없고 단잠 들어 죄없는 몸이

그 바닷물 소리를 밤낮에 듣는구나.

벗들아 너희는 복된 자다, 부러워라 부러워.

 

옛 동무 노젓는 배에 얻어 올라 치를 잡고

한 바닷물 따라 나명들명 살까이나

맞잡고 그물을 던지며 노래하자 노래해.

 

거기 아침은 오고, 거기 석양도 져도

찬 얼음 센 바람은 들지 못하는 그 나라로

돌아가 알몸으로 살꺼나, 깨끗이도 깨끗이.

 

 

동무생각

 

봄의 교향악이 울려 퍼지는

청라언덕 위에 백합 필적에

나는 흰 나리꽃 향내 맡으며

너를 위해 노래 노래 부른다

 

청라언덕과 같은 내 맘에

백합 같은 내 동무야

네가 내게서 피어날 적에

모든 슬픔이 사라진다.

 

더운 백사장에 밀려 들오는 저녁

조수 위에 흰 새 뛸 적에

나는 멀리 산천 바라보면서

너를 위해 노래 노래 부른다

 

조수와 같은 내 맘에

흰 새 같은 내 동무야

네가 내게서 떠돌 때에는

모든 슬픔이 사라진다.

 

 

봄처녀

 

봄처녀 제 오시네

새 풀옷을 입으셨네

하얀구름 너울쓰고

진주이슬 신으셨네

꽃다발 가슴에 안고

뉘를 찾아오시는고

 

님 찾아 가는 길에

내 집 앞을 지나시나

이상도 하오시다

행여 내게 오심인가

미안코 어리석은 양

나가 물어 볼까나.

 

 

그리워

 

그리워 그리워 찾아와도

그리운 옛님은 아니 뵈네.

들국화 애처롭고

갈꽃만 바람에 날리고

마음은 어디 두고

먼 하늘만 바라본다네

 

눈물도 웃음도 흘러간 세월

부질없이 헤아리지 말자.

그대 가슴엔 내가

내 가슴엔 그대 있어

그것만 지니고 가자꾸나.

 

그리워 그리워 찾아와서

진종일 언덕길을

헤메다 가네.

 

 

그리움

 

뉘라서 저 바다를 밑이 없다 하시는고

백천(百千)길 바다라도 닿이는 곧 잇으리만

님 그린 이 마음이야 그릴스록 깊으이다

 

하늘이 땅에 이엇다 끝잇는냥 알지마소

가보면 멀고멀고 어늬끝이 잇으리오

님 그린 저 하늘같해 그릴스록 머오이다

 

길고 먼 그리움을 노래 우에 얹노라니

정회(情懷)는 끝이 없고 곡조(曲調)는 짜르이다

곡조(曲調)는 짜를지라도 남아울림 들으소서

 

 

갈림길에서

 

체온도 지탱하기 어려운

이 음산한 고난의 땅

역사의 실패한 땅에서

일어서야 할 민족이기에

한 가닥

희망의 길을 찾아

우리 갈 길을 가야 한다

 

인류의 역사 위에

수많은 의인들이 걸어간

거룩한 피와 눈물이 밴

진리와 아름다움의 길

그 길이

너무도 또렷이

우리 앞에 놓여 있구나

 

눈물과 땀과 피는

인간이 가진 세 가지 재산

기원과 봉사와 희생

거기 영생의 길이 있네

험하고

가파로와도

오직 그 길만이 사는 길!

 

너와 나, 식어져버린

가슴 속의 사랑의 피

그 피 다시 끓이면

거기 화사한 장미꽃 피고

눈부신

부활과 영광의 길

우리 앞에 열리리라

 

강둑에 주저앉아

 

문득 보니 미국 병정

총 들고 길 앞을 막네

미군의 담당구역이라

통행증을 보이라 하네

남한 쪽

분계선 안에서마저

자유 없는 이 지역!

 

산도 내 산이요

강도 내 강인데

날더러 그 누구 앞에

무슨 증표 뵈란 말요

강둑에

주저앉아서

목을 놓고 울어버린다

 

지지리도 못난 주인아

네 강산 보기가 부끄러우냐

정녕 부끄럽거든

고개 숙이고 지나가렴

말없이

돌장승처럼

눈 내려 감고 서있는 사람

 

언덕에서 내려다 뵈는

악마의 골짜기 군사분계선

옛날엔 남북으로

기차 다니던 정거장 자리

레일은

우거진 잡초 속에

가로누운 채 잠들었고

 

녹슨 레일 위에

괴물 같은 저 기관차

벌떡 일어나 우렁차게 울어

이 적막한 하늘 못 흔드느냐

지금 곧

북으로 북으로

냅다 한 번 달리자꾸나

 

검은 구름 토하는 고개

 

이름조차 험한 산 고개

'검은 구름 토하는 고개'

구름이 장막처럼 몸을 휩싸고

비를 몰아오는 바람소리

세기의

종말을 고하는

선지자의 선언과도 같이

 

진실! 진실을 잃어버리면

거기는 캄캄한 지옥

허위의 얼굴을 대하면

악마보다 더 무서워

지구가

온통 검은 구름에

휩싸여 있는 오늘이다

 

여기 불타고 말라 죽어

잎사귀 하나 없이 헐벗은 나무

인간들이 받아야 할 형벌을

대신 받고 서 있는 것 같아

경건히

그 십자가 아래 서서

속죄의 기도를 올린다

 

방향을 잃은 인간들

허위적거리는 발등에

차라리 이 순간

뇌성벽력이라도 쳤으면 싶다

주춤 서

검은 구름 토하는 고개

올려다보는 심정이여!

 

고석정(孤石亭)

 

아름다 와라 절경 한 구역

예부터 이름난 고석정

물은 깊어 검푸르고

골은 돌아 몇 굽인데

3백 척

큰 바위 하나

강 복판에 우뚝 솟았네

 

위태론 절벽을

다람쥐 기어올라

갈 길도 잊어버리고

강물을 내려다보는 뜻은

여기서

전쟁을 끝내고

총 닦고 칼 씻던 곳이라기

 

고석정 외로운 돌아

오늘은 아직 너 쓸쓸하여도

저 뒷날 많은 사람들

여기 와 평화의 잔치 차리는 날

낯익은

시인은 다시 와서

즐거운 시 한 장 또 쓰고 가마

 

 

고지가 바로 저긴데

 

고난의 운명을 지고, 역사의 능선을 타고

이 밤도 허우적거리며 가야만 하는 겨레가 있다.

고지가 바로 저긴데 예서 말 수는 없다.

 

넘어지고 깨어지고라도 한 조각 심장만 남거들랑

부둥켜안고 가야만 하는 겨레가 있다.

새는 날 핏속에 웃는 모습 다시 한번 보고 싶다.

 

고통과 부활

 

이 고통 아프다 말라

차라리 값진 고통이다

발로 짓밟고 눈얼음 쌓여도

새 싹 움트는 밀알과 같이

믿어라

의심치 말고 믿어라

우리에겐 분명히 부활이 있다

 

길이 끝났다 말라

여기서부터 시작되는 길

철조망 장벽 앞에서

우리 갈 길을 보았다

열어라

살육의 광야에서

부활의 길을 뚫어라

 

통일과 사랑 이뤄지는 날

자유와 평화 도로 찾는 날

탁류에 휩쓸려 가는

인간의 양심 회복하는 날

거기에

민족과 인류가 되살아나는

영광의 부활이 있다

 

 

그 집 앞

 

오가며 그 집 앞을 지나노라면

그리워 나도 몰래 발이 머물고

오히려 눈에 뛸까 다시 걸어도

되오면 그 자리에 서졌읍니다

 

오늘도 비 내리는 가을 저녁을

외로이 이집 앞을 지나는 마음

잊으려 옛날 일을 잊어버리려

불빛에 빗줄기를 세며갑니다

 

나무의 마음

 

나무도 사람처럼 마음이 있소

숨 쉬고 뜻이 있고 정도 있지요

만지고 쓸어주면 춤을 추지만

때리고 꺾으면 눈물 흘리죠

 

꽃 피고 잎 퍼져 향기 풍기고

가지 줄기 뻗어서 그늘 지우면

온갖 새 모여들어 노래 부르고

사람은 찾아가 쉬며 놀지요

 

찬서리 눈보라 휘몰아쳐도

무서운 고난을 모두 이기고

나이테 두르며 크고 자라나

집집이 기둥 들보 되어주지요

 

나무는 사람 마음 알아주는데

사람은 나무 마음 왜 몰라주오

나무와 사람은 서로 도우면

금수강산 좋은 나라 빛날 것이오

 

새 역사는 개선장군처럼

 

사랑의 큰 진리를

배반한 죄의 값으로

고통 속에서 몸부림치는

조국과 아시아의 세계

멸망의

낭떠러지에서 발을 멈추고

새 역사를 기다리자

 

우리들의 새 역사는

어떤 모습으로 올 것인가

순풍에 돛 달고 오는

유람선같이 오진 않으리

얼굴과

몸뚱이 성한 데 없이

상처투성이로 오리라

 

우리들의 새 역사는

상처투성이지만 이기고 돌아오는

역전의 개선장군으로

우리 앞에 다가서리니

그 날에

우리는 그와 함께

분명 그와 함께 서리라

 

스승과 제자

 

또 한 고개 높은 재 넘어

낭떠러지 길가에 앉아

고달픈 다리를 쉬노랄 제

뒤에서 돌격대처럼 달려와

'선생님'

부들부들 떨면서

나를 껴안는 병정 한 사람

 

반가와라 이게 누군고

군인이 된 나의 제자

길목 지키는 파수병으로

이 깊은 산협에서 만나보다니

두 손목

서로 붙들고

어루만지다 이야기하다

 

산협길 멀고 험하고

해조차 뉘엿이 기울건마는

차마 서로 못 나뉘어

손목을 놓았다 잡았다

헤어져

산모퉁이 돌 때까지

몇 번이나 되돌아보고

 

 

신록 속에 서서

 

흙탕물 쏟아져 내리던

전쟁의 악몽과 화상

여기선 신록조차 눈에 서툴러

다른 나라의 풍경화 같네

역사의

배반자라는

낙인찍힌 우리들이기에

 

이 시간에도 온갖 죄악을

아편처럼 씹으면서

갈수록 비참한 살육의

설계도를 그리면서

거룩한

신록의 계절을

모독하는 무리들!

 

그러나 우리들 가슴속에는

마르지 않은 희망의 샘 줄기

어둠의 세기 복판을

운하처럼 흐르고 있다

기어이

이 물줄기 타고 가리라

통일과 평화의 저 언덕까지

 

오륙도(五六島)

 

五六島 다섯 섬이 다시 보면 여섯 섬이

흐리면 한두 섬이 맑으신 날 五六島

흐리락 맑으락 하매 몇 섬인 줄 몰라라.

 

취하여 바라보면 열 섬이 스무 섬이

안개나 자욱하면 아득한 먼바다라

오늘은 비속에 보매 더더구나 몰라라.

 

그엣 날 어느 분도 저 섬을 헤다 못해

헤던 손 내리고서 五六島라 이르던가

돌아가 나도 그대로 어렴풋이 전하리라.

 

 

천지송

 

보라, 저 울멍줄멍 높고 낮은 산줄기들

저마다 제자리에 조용히 엎드렸다.

산과 물 어느 것 한 가지도 함부로 된 것 아니로구나.

 

황금 방울같이 노오란 저녁 해가

홍비단 무늬 수를 놓고 있다.

저기 저 구름 한 장도 함부로 건 것 아니로구나.

 

지금 저 들 밖에 깔려 오는 고요한 황혼!

오늘밤도 온 하늘에 보석 별들이 반짝이리

그렇다! 천지자연이 함부로 된 것 아니로구나.

 

 

칡꽃마을 이야기

 

시인은 막대 끌고

또 한 고지에 올랐더니

파수 서 있는 병정 한 사람

산 밑 마을 가리키며

겪어 온

기구한 사연

들려주는 이야기

 

'바로 저 아래 보이는

칡꽃마을이 내 고향이죠

저기 약수터가 있어

거기 가 빌면 소원성취 한다기

약속한

처녀랑 하냥

아침저녁 같이 다녔죠'

 

'그러다 전쟁이 터져

온 마을이 불타버리고

모두들 죽고 흩어지고

나는 뽑혀서 군인이 되고

처녀는

마을을 못 벗어나

비참하게도 숨져버리고'

 

'나는 전투부대 따라

이곳저곳 옮아 다니다

지금은 뜻밖에도

이 고지 감시대 파수병이 되어

날마다

칡꽃마을 내 고향

내려다보며 섰지요'

 

'저기 있는 약수터도

영험이 없나 봐요

그렇게도 빌었었는데

소원성취 못하고서

옛 처녀

그려 보면서

명복을 빌며 살지요

 

 

장안사

 

장하던 금전벽위 찬재되고 남은 터에

이루고 또 이루어 오늘을 보이도다.

흥망이 산중에도 있다 하니

더욱 비감하여라

 

 

사랑

 

탈대로 다 타시오 타다 말진 부디 마소

타고 다시 타서 재 될 법은 하거니와

타다가 남은 동강은 쓸 곳이 없느니다

 

반 타고 꺼질진 대 아예 타지 말으시오

차라리 아니 타고 생나무로 있으시오

탈진대 재 그것조차 마저 탐이 옳으니다

 

 

성천강(城川江)

 

도련포 천리장성 헐어졌어도

성천강 만세교야 길기도하이

하란평 넓고넓다 끝도없어라

사나이 큰숨한번 내쉬어보자

 

 

심산풍경(深山風景)

 

도토리, 서리나무 썩고 마른 고목 등걸

천 년 비바람에 뼈만 앙상 남았어도

역사는 내가 아느니라 교만스레 누웠다

 

풋내기 어린 나무 저라사 우쭐대도

숨기신 깊은 뜻이야 나 아니고 누가 알랴

다람쥐 줄을 태우며 교만스레 누웟다

 

 

옛 동산에 올라

 

내 놀던 옛 동산에 오늘 와 다시 서니

산천의구란 말 옛 시인의 허사로고

예 섰던 그 큰 소나무 버혀지고 없구료.

 

지팡이 도로 짚고 산기슭 돌아서니

어느 해 풍우엔지 사태져 무너지고

그 흙에 새 솔이 나서 키를 채려하는구료

 

 

단풍 한 잎

 

단풍 한 잎사귀 손에 얼른 받으오니

그대로 내 눈 앞에 서리치는 풍악산을

잠긴 양 마음이 뜬 줄 너로 하여 알겠구나.

 

새빨간 이 한 잎을 자세히 바라보매

풍림(楓林)에 불 태우고 넘는 석양같이 뵈네

가을 밤 궂은 비소리도 귀에 아니 들리는가.

 

여기가 오실 텐가 바람이 지옵거든

진주담 맑은 물에 떠서 흘러 흐르다가

그 산중 밀리는 냇가에서 고이 살아 지올 것을.

 

 

공초경

 

오고 싶지 않은 곳으로 온 공초여

가고 싶은 곳도 없는 공초여 그러기에

공초는 오지도 않았고 가지도 않을 것이다

 

 

계조암

 

계조암 너덜바위 길도 바위 문도 바위

바위 뜰 바위 방에 석불 같은 중을 만나

말없이 마주섰다가 나도 바위 되니라

 

 

나의 조국 나의 시

 

나는 가난한 사람 그러나 나는 가멸한 사람

누가 날 가난하다는고 내 가슴속은 보지 못하고

내게는 보배가 있다 나의 조국 나의 시.

 

 

애국시

 

겨레여 우리에겐 조국이 있다

내 사랑 바칠 곳은 오직 여기뿐

심장의 더운 피가 식을 때까지

즐거이 이 강산을 노래 부르자.

 

 

백결선생전을 읽고

 

옛날에 백결선생 낭산(狼山) 아래 막을 매고

안해와 마주 앉아 굶주리고 살면서도

즐거운 거문고 소리 끊일 줄이 없더니라

 

앞집은 방아 찧고 뒷집에선 다듬이질

있다는 그네들은 근심 걱정 도로 많아

이 세상 어이 살꺼나 한숨 못 꺼 하더니라

 

풋나물 입에 넣고 괴로워 마올 것이

누더기 몸에 걸고 부끄러워 마올 것이

진실로 마음 곧 편하면 무얼 부러하리오

 

 

가윗날에

 

가을 들 마르는 풀 바람에 흔드는데

반계(半溪) 단풍(丹楓)은 석양에 타는구야

천리객(千里客) 이내 상혼(傷魂)을 뉘게 말씀하리오

 

북산(北山)에 홀로 올라 누누중총(累累衆塚) 바라보니

가위라 군데군데 곡() 소리 슬프도다

우리 님 누우신 산()을 멀리 그려 우노라

 

유자(遊子)의 돌아감이 기약조차 없노왜라

천리(千里) 향사(鄕思)를 남산(南山) 어이 가리는고

타산(他山)에 뿌리는 눈물 더 쓰린 줄 아소서

 

뫼와 물 바랄수록 자란 마슬 보고지고

세파(世波)에 불릴수록 님 그리움 쌓이건만

이제야 어느 분 뫼려 옛 땅 찾아가리오

 

님은 가오시고 기억(記憶)만 남기도다

정녕히 못 오시면 기억(記憶)마저 걷으소서

철철이 더한 쓰림을 어이 몰라 하신고

 

동봉(東峯)에 달이 솟아 마슬길을 비취나다

중추(中秋) 야흥(夜興)을 사람마다 겨워할 제

어떠타 외로운 한 사람은 눈물 못 금()하나니

 

아실이 누구신고 이 가슴 내 진정(眞情)

천행루(千行淚) 만곡가(萬曲歌)론들 어이 능()히 표할손가

상월(霜月)이 죽창(竹窓)에 드니 잠 못 이뤄하노라

 

시름 잊자 취()한다니 못 믿을 말이로다

잊으려 잊을진댄 님 여의다 슬플 것가

낙엽(落葉)이 어즐은 밤은 더 못 잊어하노라

 

() 마슬 깊은 밤을 뜰에 가득 달이로다

마음을 둘 데 없어 사립 열고 나와 선 제

귀뚜린 누구를 그려 저대도록 우나니

 

머문 곳 이러이러 갈 곳은 어드메오

석화(石火) 일생(一生)이 어이 이리 괴로운고

삼경(三更)에 비가(悲歌)를 불러 만리한(萬里恨)을 붙이노라

 

 

거울 앞에서

 

나는 분명히 나를 속이고 또 남을 속이는 자다.

슬픔이 있어도 기쁜 듯이. 괴롬이 있어도 편한 듯이

못나고도 잘난 듯이. 약하고도 강한 듯이.

미움이 있고 사랑이 있어도 이것저것이 다 범상한 듯이

이리하여 가련(可憐)한 나의 삶이 나를 끄을고 간다.

그러나 다만 한때 벽()에 걸린 거울을 보는 그때만은

내 얼굴 내 마음 내 그림자가 너무나 소연(昭然)하여

속이지 못하는 정직(正直)한 내가 되는 것이다.

 

거울 속 저 사람아 바로 뵈는 저 사람아

잘나나 못나나 간에 이제야 바로 너로구나

무삼일 너 아닌 너로 너인 듯이 사나니

 

저와 남 다 속이는 이런 곳에 왜 사는고

안 속고 안 속이는 그런 세상 어디온지

있다면 천리만리(千里萬里)라도 거기 가서 살과저

 

 

계월송(溪月頌)

 

뒷시내 흐르는 물 여흘여흘 옥()소리를

네 소리 들을 제면 만단고(萬端苦) 쓸리나니

꿈에도 들리오시라 부대 들리오시라

 

맑은 물 흰 돌 위에 휘엉청이 밝으신 달

내 가슴 덮은 그늘 다 열어 주시나니

꿈에도 비치오시라 부대 비치오시라

 

하늘 땅 온갖 것이 다 흩어져 없어지고

나마저 숨을지라도 청계명월(淸溪明月)은 남기과저

만고(萬古)에 흐르고 밝아 그치지 마시오시라

 

 

곡성첩(哭城堞)

 

어져 이 토석(土石)아 무삼 일 서 있더니

풍마(風磨) 우세(雨洗)로 부질없이 삭단 말가

흙덩이 발 끝에 채어 마저 깨어지더라

 

백악(白岳)에 높이 올라 만보장성(萬步長城) 둘러보니

분주(奔走) 반천년(半千年)이 한가(閑暇)한 꿈이로다

꿈이야 꿈일지언정 우일 꿈을 짓다니

 

 

구정(球庭)

 

수우피(水牛皮) ()을 들고 마류구(碼瑠球) 치올 적에

장전(帳殿) 소고(簫鼓)는 천지를 흔들랏다

백마(白馬)의 미쳐 나는 양을 보는 듯이 느껴라

 

채의(彩衣)를 떨쳐입고 행구(行球)하던 저 무사(武士)

광명동(廣明洞) 흐르는 물 물따라 어이 간고

황천(黃泉)에 누워 있어도 예 못잊어하리라

 

창검(槍劍) 부러지고 향등(香燈)도 꺼진 뒤에

남북(南北) 구정(球庭)이 이랑이랑 밭이 되어

석양(夕陽)에 찾아온 손을 울려 돌려보내더라

 

 

귀해심(歸孩心)

 

길가에 두세 아이 소꼽질에 즐기나다

무심코 지나든들 마음 이리 아프리오

옛날이 눈 앞에 보여 발 머물고 서노라

 

가든 길 돌아서서 그 문 앞에 다가서니

돌밥에 사긔국이 고기도곤 부러워라

어드메 누구 살림이 저만하다 할소냐

 

다시는 저런 살림 차려보지 못할런가

풍우(風雨) 삼십 년(三十年)을 울어보나 부질없다

이 봄도 또 간다 하니 눈물 겨워하노라

 

 

그대 대답하시오

 

가물에 시들어진 옥잠화(玉簪花) 두어 잎새

물주고 비 나리면 다시 살아날 것이오

아이는 물 뜨러 보내고 나는 하늘 바라오

 

저보 바람결에 파초(芭蕉)닢 찢기었소

찢어진 저 잎사귀 붙이는 풀 없는지요

처져서 마르는 반()닢 어이할 길 없구료

 

외롭고 쓰린 내 맘 어느 것에 비기올꼬

시들은 옥잠(玉簪)이랄까 찢어진 파초(芭蕉)랄까

아니오 나는 모르오 그대 대답하시오

 

 

금강(金剛)에 살으리랏다

 

금강(金剛)에 살으리랏다 금강(金剛)에 살으리랏다

운무(雲霧) 데리고 금강(金剛)에 살으리랏다

홍진(紅塵)에 썩은 명리(名利)야 아는 체나 하리오

 

이 몸이 쓰러진 뒤에 혼()이 정녕 있을진댄

()이나마 길이길이 금강(金剛)에 살으리랏다

생전(生前)에 더러인 마음 명경(明鏡)같이 하과저

 

 

금강(金剛)을 바라보며

 

금강(金剛)이 저기로다 구름 밖에 저기로다

꿈인지 상해[]런지 그림인지 실상(實相)인지

알고도 모를 것이야 금강(金剛)인가 하노라

 

바쁜 양 몸은 아직 먼 곳에 있건마는

마음은 언제 벌써 금강(金剛) 중에 들었구나

만이천(萬二千) 구구층층(區區層層)이 낯익은 듯하여라

 

 

금강귀로(金剛歸路)

 

금강(金剛)이 무엇이뇨 돌이요 물이로다

돌이요 물일러니 안개요 구름일러라

안개요 구름이어니 있고 없고 하더라

 

금강(金剛)이 어드메뇨 동해(東海)의 가이로다

갈 제는 거길러니 올 제는 흉중(胸中)에 있네

라라라 이대로 지켜 함께 늙자 하노라

 

 

기봉(起峰) 위에 서서

- 햇볕 아래 오르고 빗속에 돌아오다

 

정방산(正方山) 가운데 두고 이백리(二百里) 두른 벌판

벼 향기 무륵무륵 향적불국(香積佛國) 여기로다

이게 다 내 것 아닌가 왜 모르고 울던고

 

벌 건너 하늘 밑에 월하산(月下山)이 아득한데

! ()할시고 비 몰려오시는 경()

어서 와 날 뿌려 주소 먼지 씻어 주시오

 

이 좋은 기봉(起峰) 위에 장막들을 지어 두고

양식(糧食)에 주린 이 자연(自然)에 주린 이들

번갈아 모시어다가 배부르게 하과저

 

 

꿈 깬 뒤

 

임술년(壬戌年) 5월 한양(漢陽)에서 병()을 얻어

마침내 어느 병원의 구석방에 외로이 앓는 몸을 누이게 되었다.

입원한 지 삼 주간이 지난 65일의 밤

기이(奇異)하고도 고마운 꿈은 오히려 깬 뒤에

더한 적막(寂寞)을 남기고 사라졌다.

 

온 날을 앓은 몸이 잠을 겨우 이뤘는데

꿈속에 어인 님이 진달래를 병에 꽂아

() 맡에 가만이 놓시고 웃고 돌아가누나

 

누은 몸 문득 놀라 그 보고 하온 말이

당신이 누구완대 이 꽃을 내게 주오

병실(病室)을 잘못 드셨소 나는 아니오이다

 

내게는 이런 이 없소 있을 리()도 없으니다

외치다 깨어 보니 혼자 던져 누웠구나

눈 돌려 꽃 찾는 마음 더욱 쓸쓸하여라

 

 

노돌[鷺梁津]

 

차중(車中). ()가 한강철교(漢江鐵橋)를 지나자

어느 한 분이 바깥을 가리키며 `저기가 노돌이오' 하매

다른 한 분 놀라 보며 하는 말 `! 역사(歷史) 깊은 노돌이지하는지라.

그가 누군지는 알지 못하나 나는 문득 이 노래를 속으로 읊어 드렸다.

 

노돌이 여기란다고 놀라 보는 저 길손아

오백년(五白年) 옛 풍류(風流)를 어느 곳서 찾으리오

모래요 강물뿐이니 그냥 지나가시소

 

 

눈보라 치는 밤에

 

내 방도 차건마는 여기는 방인 것이

그 어린 거지들 어데서 이 밤을 새노

따뜻한 물 한 그릇이나마 못 먹었으면 어이나

 

() 속에 갇힌 이들 이 밤 어이 지나시노

찬마루에 눕는 몸이 매맞지나 않사온지

눈보라 창치는 소리에 가슴 덜렁하여라

 

 

답우(答友)

 

길에서 고우(故友)를 반가이 만난지라

내 부끄러움 없이 우거(寓居)하는 토실(土室)로 뫼셔 왔더니

그이 돌아가 후일(後日)에 글을 보내어

내 토실(土室)의 좁고 누()함을 심히 근심하여 주기로

내 이에 두어 장() 노래를 적어 그에게 답()하니라.

 

세존(世尊)은 거리 돌아 걸식(乞食) 아니 하셨는가

인자(人子)도 한 평생을 머리 둘 곳 없었나니

내 이제 드는 데 있음을 부끄러워하노라

 

강산(江山)을 둘러보소 내 집 없는 아우 형()

등지고 서로 헤쳐 가시는 양 보옵시오

해 진 뒤 돌아올 곳 있음을 부끄러워하노라

 

 

맹서(盟誓)

 

자비(慈悲)가 님의 뜻이 희생(犧牲) 또한 님의 뜻이

내 몸은 죽사와도 남 도와 사올 것이

님께서 이 길로 예시오니 나도 따라 가오리다

 

썩어질 몸이어늘 영화안락(榮華安樂) 무엇이뇨

불의(不義)엔 침 배앝고 향기(香氣)로이 살았어라

내 일생(一生) 이 뜻을 지켜 님의 뒤를 이으리다

 

 

박연(朴淵)

 

불타는 홍엽(紅葉)길에 분별없이 취()한 몸이

청애(靑靄)로 깨고 나니 앉은 곳이 범사정을

어느새 그리던 선경(仙境)을 저도 몰래 들었더라

 

성거산(聖居山) 가을 저녁 검고 붉고 누르러고

() 넘어 긴 하늘은 쪽 푼 듯이 푸르른데

떨어진 흰 빛 한 줄기 박연(朴淵)이라 하더라

 

눈을 날리시나 구슬을 굴리시나

바람을 이루시고 구름을 피우시나

안개와 연기에 싸여 아무 그인 줄 몰라라

 

암학(岩壑)에 나린 폭포 선악(仙樂)을 아뢰올 제

유인(遊人)은 소매 들고 사장(沙場)에 나리놋다

송백(松栢)도 풍류(風流)를 알아 그냥 섰지 못하더라

 

물 나린 푸른 벽()에 위태히 선 저 노송(老松)

어드메 땅이 없어 구태 거기 심겼느뇨

우리도 심산절경(深山絶景)을 찾아왔소 하더라

 

야폭경(夜瀑景) 더 좋으이 오르는지 나리는지

우렁찬 물소리도 우에선지 아래선지

다만지 천도용궁(天都龍宮)이 이로 이어졌더라

 

지화자 달이로다 구룡산령(九龍山嶺)에 달이로다

물만도 족()한 것을 달이조차 오르시네

구을다 송림(松林)에 앉으며 같이 놀자 하더라

 

이 폭포(瀑布) 은하(銀河)라니 아마도 옳은 말이

바위에 올라 앉아 고모담(姑姆潭) 굽어보니

명월(明月)도 은하(銀河)를 못 잊어 함께 내려 왔더라

 

물 아래 저 용낭(龍娘)아 옥()저 부는 님 데리고

달 밝은 이런 밤에 나와 논들 어떠하리

아마도 진객(塵客)을 끄는가 하여 돌아갈까 하노라

 

이 승지(勝地) 찾아 들며 바삐 오던 저 사람아

돌아서 가는 걸음 어이 저리 더딘게오

청형(淸馨)이 성관(城關)에 남았기로 넘지 못해 그리노라

 

 

밤비 소리

 

천하(天下) 뇌고인(惱苦人)들아 밤비소리 듣지 마소

두어라 이 한 줄밖에 더 써 무엇하리오

 

 

비로봉(毘盧峰) 기일(其一)

 

비로봉(毘盧峰) 오르는 길은

`()서들'이라 부르는 푸른 이끼 앉은 돌무더기와

`()서들'이라 부르는 흰 이끼 앉은 돌무더기로 되었는데

`서들'이란 말은 `()'의 뜻이며 혹 이를 `사다리'라고도 하니

이는 `서들'의 와()일 것이나 밟고 오르는 층계(層階)라는 뜻으로 보면

그 역() 무방(無妨)하다.

 

()길 은()길 밟고 올라 상청궁(上淸宮)에 높이 서니

일성(日星) 운한(雲漢)과 벗하는 오늘이라

천풍(天風)은 무수(舞袖)를 날리며 몸 가으로 돌더라

 

백운대(白雲臺) 여기로다 청벽(靑壁)을 만지노라

팔황(八荒) 운물(雲物)이 발 아래 다 깔리니

내 몸이 어디 섰는지 분별(分別) 못해하노라

 

 

산 위에 올라

 

() 위에 올라

안개 싸인 산()을 헤히고 올라선 제

새소리 들리건마는 새는 아니 보이오

 

안개 걷고 나니 울던 새 인곧 없고

이슬만 잎사귀마다 방울방울 맺혔소

 

 

산전(山田)을 지나며

 

산전(山田)에 저 농부(農夫)야 빈고(貧苦)를 울지 마소

세상에 허다우부(許多愚夫) 마음 팔아 낙()을 사오

넋 없는 허수아비들 웃어준들 어떠리

 

 

삼개에서

 

찾으니 장강(長江)인데 강() 건너 은()모랫벌

벌 지나 뫼이온데 뫼 넘어 구름일네

천지(天地)에 봄바람만이 불어 왕래(往來)하더라

 

돌길이 좁고 험()해 홑몸도 어려워늘

무거운 세상 시름 지고 안고 무삼 일고

강문(江門)에 다 부려 두고 몸만 돌아 들까나

 

푸른 물 검은 돌에 흰옷 빠는 저 아씨들

옷 치는 방치 소리 뱃노래에 절로 맞네

이따금 아미를 고치는지 장단(長短) 흐려지더라

 

바위벽() 돌아드니 한마당 백사(白沙)로다

거니는 이 발자옥 물이 밀면 쓸리려니

진객(塵客)에 더러힌 자취 남겨 무삼하리오

 

물새의 노래 듣소 이 분명 거문고를

흰구름 물에 드니 이 정녕 그림일사

소리 빛 한데 모이니 승경(勝景)인가 하노라

 

봄바람 노는 양을 이 강()에 와 보완제고

가벼운 노()소리를 붙여 함께 듣노매라

사람은 승지(勝地)를 찾아 멀리로만 가더라

 

청류(淸流)에 낚시 던져 놀이하는 저 분들아

고기야 네 것이냐 취적(取適)이나 하올 것이

어조(魚鳥)도 봄을 아나니 같이 논들 어떠리

 

언덕에 올라 앉아 봄바람에 눈물 지고

돌아서 새소리에 혼자 웃는 내 모양을

저 물도 흘러가나니 전할 뉘를 몰라라

 

해는 지려하고 애는 더욱 끊이랴

한가락 미친 노래 석벽(石壁) 넘어 들려오네

저 분은 무슨 한()으로 목에 피를 올리나니

 

두세 돛 강풍을 띄어 포구(浦口)로 바삐 드네

석양(夕陽)에 돌아서니 진환이 고대로다

강두(江頭)에 취객(醉客)이 모여 오락가락 하더라

 

 

삼태동(三台洞)을 지나며

 

삼태동(三台洞)은 고향 합포(合浦)에서 서(西)로 칠십리를 나가 있는 곳이다.

192572일 내 그 산촌(山村)을 지나다가 서숙(書塾)을 찾아

강선생(姜先生)이란 이와 인사하고 이 노래를 지어 드리고 가다.

 

삼태산(三台山) 깊은 골에 먼지 없는 이 마슬은

차움의 세상 밖에 따로 베푼 평화(平和)동산

내 길이 바쁘건마는 쉬다 갈까 하오

 

고목(古木)선 우물가에 물 긷는 저 아가씨

동이를 이기 전에 한 모금만 마셔 주오

타는 목 그 생명수(生命水)로 축여 볼까 하오

 

옷 벗은 아이들아 천사(天使)의 후신(後身)들아

풀 한 줌 흙 한 줌을 쥐고 옴은 무삼 일고

옳아 참 상처 난 내 몸에 그 약() 발라 다오

 

 

선죽교(善竹橋)

 

충신(忠臣)의 남긴 뜻이 돌에 스며 붉었으니

하마배(下馬拜) 하온 이들 몇 만()인지 모르리만

돌아가 행()하신 이는 몇 분이나 되는고

 

충신(忠臣)의 타는 넋이 홍엽(紅葉)에 배어들어

용수(龍岫) 송악(松岳)에 두루 심겨 천만수(千萬樹)

유객(遊客)이 헛보고 지나니 그를 설워하노라

 

 

설야음(雪夜吟)

 

삼경(三更)이 넘어서야 거리를 벗어나서

눈빛에 길을 찾아 산() 마슬로 돌아오니

등잔불 그무는 저기 내 집인가 아닌가

 

눈보라 휘불리어 얼굴을 치는구나

찬 뺨에 흐르는 물 눈녹음만 아니오나

이 한밤 외진 산길에 어느 분이 알리오

 

지게에 다달아서 언 고리 잡다 말고

타는 애 끌 길 없어 되나서 산모루로

송림(松林)에 눈비 맞으며 돌아올 줄 몰라라

 

 

소경 되어지이다

 

소경 되어지이다

뵈오려 못 뵈는 님 눈감으니 보이시네

감아야 보이신다면 소경 되어지이다

 

 

어포(漁浦) 달 밝은 밤에

 

어포(漁浦) 달 밝은 밤에 모래 위를 거니노라

밀물을 피()하는 걸음 깨달으니 초제(草堤)로다

무심(無心)코 풀 위에 앉을 제 반디 놀라 날더라

 

청도암(淸濤岩) 밤 물결에 띄우노라 조각배를

시원한 바람 따라 흘리노라 백마도(白馬島)

새벽만 넘는 달빛에 갈밭 돌아 오리라

 

빈 배에 몸을 맡겨 달 더불어 누웠거늘

어즐은 세상일을 생각하여 무삼하리

밤고기 뛰는 소리에 그만인가 하노라

 

 

옛 강물 찾아와

 

옛 강()물 그리워서 봄 따라 나왔더니

물도 그도 다 가시고 봄도 그 봄 아니온데

호을로 아니 간 것은 내 맘인가 하노라

 

물 건너 하늘가에 떠도는 구름같이

뭉쳤단 바람 따라 헤어지고 마는 것을

지금도 고개 돌리니 곁에 선 듯하여라

 

그 옛날 이 모래 위에 서로 쓴 두 이름은

흐르는 물에 씻겨 길이 길이 같이 예리

몸이야 나뉘시온들 한()할 줄이 있으랴

 

 

옛 동산에 올라

 

내 놀던 옛 동산에 오늘 와 다시 서니

산천의구(山川依舊)란 말 옛 시인(詩人)의 허사(虛辭)로고

예 섰던 그 큰 소나무 버혀지고 없구료

 

지팽이 더저 짚고 산()기슭 돌아나니

어느 해 풍우(風雨)엔지 사태(沙汰)져 무너지고

그 흙에 새 솔이 나서 키를 재려 하는구료

 

 

오수(午睡) 아닌 오수(午睡)

 

안두(案頭)에 놓인 책은 저대로 펴어 있고

나는 나대로 눈감고 앉았으니

이 사이 무한(無限)한 고요를 어느 뉘가 알리오

 

이윽고 눈을 떠서 깨달으니 황혼인데

아이는 내 그 동안 졸은 줄만 알았든지

대야에 물 떠놓으며 세수하소 하더라

 

 

옥류동(玉流洞)

 

옥석을 씻어 나려 옥류(玉流)가 되옵든가

옥류(玉流)로 닦아 내어 옥석(玉石)이 되옴인가

두 옥()이 씻고 닦이니 어느 것인 줄 몰라라

 

금강(金剛) 계상석(溪床石)이 다토아 희올 적에

백석담(白石潭) 저 바위야 참으로 희옵도다

희고서 아니 검으니 그를 좋아하노라

 

옥류(玉流)면 옥류(玉流)이오 옥석(玉石)이면 옥석(玉石)이지

구태어 이 동()안에 향()내는 어디선고

앞선 이 한 곳을 가리키며 천화대(天華臺)라 하더라

 

 

이 마음

 

거닐다 깨달으니 몸이 송림(松林)에 들었구나

고요히 흐른 달빛 밟기 아니 황송한가

그늘져 어둔 곳만을 골라 딛는 이 마음

 

나무에 몸을 지혀 눈감고 섰노랄 제

뒤에서 나는 소리 행여나 그대신가

솔방울 떨어질 적마다 돌려 보는 이 마음

 

 

인생

 

차창(車窓)을 내다볼 제 산()도 나도 다가드니

나려서 둘러보니 산()은 없고 나만 왔네

다 두고 저만 나가니 인생(人生)인가 하노라

 

 

임진강(臨津江)을 지나며

 

임진강(臨津江) 밤물결이 달 아래 굽이치며

여대(麗代) 풍류(風流)를 아뢰려 드는구나

송경(松京)이 남아 있으니 잠잠한들 어떠리

 

대하여 말할 뉘 없고 조수어별(鳥獸魚鼈) 다 자는 밤에

강월(江月) 강풍(江風)이 빈 하늘에 깨어 있어

() 품은 나그네 하나 지나감을 보더라

 

 

자하동(紫霞洞)

 

선인교(仙人橋) 나린 물은 예같이 흐르는데

중화당(中和堂) 삼한국로(三韓國老) 그들은 어디 간고

자하곡(紫霞曲) 남은 장단(長短)만 추풍(秋風) 속에 들었더라

 

 

장안사(長安寺)

 

()하던 금전벽우(金殿碧宇) 찬 재 되고 남은 터에

이루고 또 이루어 오늘을 보이도다

흥망이 산중에도 있다 하니 더욱 비감(悲感)하여라

 

 

절름발이

 

길 가다 문득 보니 어이한 절름발이

룸 절룸 빈정대며 걸어가네

세상이 아니 고름을 비웃는 것 같구려

 

 

태자궁지(太子宮址)

 

혹자왈(或者曰) `마의초식(麻衣草食)한 이가 무슨 정()에 궁()을 세웠겠느냐.

이는 전설(傳說)이요 사실(史實)은 아니라'고 한다.

답왈(答曰) 그는 잘못이다.

궁이 반드시 화려굉대(華麗宏大)를 뜻함이 아닐지니

일간두옥(一間斗屋)도 태자(太子)가 거()하시매

사람들이 말하되 궁()이라 하였으리라.

 

마의(麻衣) 초식(草食)하되 님이시니 님인 것이

님이 계오시니 막이라도 궁()인 것이

높으신 그 뜻을 받들어 섬기올까 하노라

 

풀이 절로 나고 나무가 절로 썩고

나고 썩고를 천년(千年)이 넘었으니

유신(遺臣)의 뿌린 눈물이야 얼마인 줄 알리오

 

그 모른 외인(外人)들은 경()만 보고 지나가네

뜻 품은 후손(後孫)이라도 해만 지면 가는 것을

대대(代代)로 예 사는 새들만 지켜 앉아 우나니

 

오늘은 비 뿌리고 내일은 바람 불어

계오신 대궐은 터 쫓아 모를노다

석양(夕陽)에 창태(蒼苔)를 헤치니 눈물 앞서 흐르네

 

() 터를 홀로 찾아 초석(礎石)을 부드안고

옛날을 울어내어 오늘을 조상(弔喪)할 제

뒷시내 흐르는 여울도 같이 울어 예더라

 

 

포은구거(圃隱舊居)

 

계옵던 옛 집터를 절하고 굽혀 드니

벽상(壁上) 영정(影幀)이 사신 듯 말하실 듯

맞추어 울 밑 황국(黃菊)이 서리 속에 섰더라

 

묻노라 저 읍비(泣碑)야 네 눈물 얼마완대

이토록 흘리고서 상기 아니 마르나니

만고한(萬古恨) 맺힌 눈물이니 그칠 날을 몰라라

 

 

할미꽃

 

겉보고 늙다 마소 속으로 붉은 것을

해마다 봄바람에 타는 한 끄지 못해

수심에 숙이신 고개 알 이 없어하노라

 

 

화원(花園)

 

화원(花園) 터 어드매오 왕자공손(王子公孫)은 누구시오

팔각전(八角殿) 화초 향기 끊인 적이 오랜 이제

빈가(貧家)에 낙엽(落葉)져 날리니 아무덴 줄 몰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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