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제현 시조시인(1939, 전남 장흥)
경희대학교 국문과, 한양대학교 대학원. 2002.~ 경기대 교육대학원장
1960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고지(高地)> 입선,
1962년 현대문학 등단,
중앙일보 시조대상, 제2회 월하시조문학상, 홍조근정훈장, 한국시조대상
김제현 시조 모음
▶ 후일담後日談
한 평생 가난에 찌든
울엄니 징한 시상*
"살다보면 살아진다"시고
"숨만 자주 쉬니 살더라"시는
엄니들 웃음 띤 후일담
오, 먹먹한 오도송悟道頌이여
▶ 정통 트롯을 듣다
흥이 많은 민족이라
한恨도 그리 깊던가
한 소절 한 시절을
울먹이는 노래여
너보다 내가 먼저 운다
아파서 그리워서
▶ 우물 안 개구리
암록색 무당개구리
우물 안에서 산다.
바깥세상 나가봐야
패대기쳐져 죽을 목숨
온전히 보존키 위해
우물 안에서 산다.
짝 짓고 알 슬기에
깊고 넉넉한 공간
이따금 두레박 소리에
잠을 설치고
별들의 전갈을 기다리며
눈이 붓도록 운다.
▶ 상수리 나무 - 더부살이
동네 아이들이
도토리를 줍고 있다
날짐승 길짐승
온갖 벌레들을
먹이며 재우며 서 있는
한 그루 상수리나무
▶ 도라지꽃
뿔 여린 사슴의 무리
신화神話같이 살아온 산
서그럭 흔들리는
몸을 다시 가눈 곳에
이 고장 마음 색 띄고
도라지꽃 피는가
신음과 기도 위로
선지피 뚝뚝 듣던 산
이대로 이울고 말
입상立像인가 말이 없어
먼 하늘 머리에 이고
도라지꽃 피었다
▶ 풍경
뎅그렁 바람 따라
풍경이 웁니다
그것은 우리가
들을 수 있는 소리일 뿐.
아무도 그 마음 속 깊은
적막을 알지 못합니다
만등卍燈이 꺼진 산에
풍경이 웁니다
비어서 오히려
넘치는 무상의 별빛
아, 쇠도 혼자서 우는
아픔이 있나 봅니다
▶ 시간
1.
시간은 말이 없다
보이지도 않는다
시간은 오지도 않고
가지도 않는다
언제나
그 자리에 그대로
가득 차 있고 텅 비어 있다
2.
째깍째깍 초침소리
맥박 뛰는 소리
그 사이 자연은
힌 경치를 이루고
사람들
저희 끼리 붉어
허둥대다 지나간다
▶ 무상
오는 듯
가버린 것이여
친숙한 낯섦이여
너 곧
아니더면
이 업을 어이하리
오늘도
멍청한 짓을
또 했구나 너를 믿고
▶ 로봇은 불평하지 않는다
한종일 서빙을 하고 있는 식당 종업원 로봇
넓은 홀 빽빽한 좌석을 잘도 찾아다닌다
지칠 줄
모르는 에너지
따르지 못하는 알바들
야간작업도 서슴지 않는 조립공장 로봇들
아무리 힘들어도 불평하지 않는다
하지만
저들도 언젠간
노조를 만들 것이다
▶ 건강검진
건강검진표를 들고 병원엘 간다
키 167㎝ 체중 64㎏
시력은 좌우 0.7 청력은 좌우 정상
늘 궁금하던 영혼의 무게를 달아 본다
아무런 숫자도 떠오르지 않는다
아마도 내 머리 속엔 영혼이 없나 보다
▶ 雨日
비가 오고 바람이 분다.
그것은 오늘의 날씨.
신발을 적시며
지나가는 사람 몇…
내일은
개인다지만
그 또한, 지상의 날씨.
때를 묻히면서
세상을 알게 되고
눈이 흐려지면서
밝아오는 이치의
적당이
흐린 눈으로
밖을 보는 우일.
▶ 無爲
비가 온다 오기로니
바람이 분다 불기로니
세상은 비바람에
젖는 날이 많지만
언젠간
개이리란다
그러나 개이느니
▶ 짐지기
이제는 알만하다
이슬녘 한 잔의 술맛을
잠간, 꺼내 무는
한 모금 연기의 맛을
이제는
알만도 하다
멀리 있는 사람아.
발부리 채이던
앞앞이 아픈 길을
뒤뚱이는 걸음으로
예까지 왔느니
짐 속의
어느 것 하나
온전치 못함이여.
▶ 소재·1 - 종이배
그저 먼 나라가
그리운 해변의 아이들은
바다에 길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면서
갯가에
온 물살 따라
종이배를 띄웠다.
햇볕만 잔뜩 싣고 떠난
내 유년의 배 한 척.
지금은 어느 바다에
출렁이고 있을까
그러나
그 키를 부림은
이미 내가 아니어라.
▶ 어제표
바람만 서물거린다.
밤에 실려온 簡易驛口.
숱하게 허송해 버린
통로를 나오는,
진하게
타다 무안한
눈 뜨는 나의 成熟.
드러난 팔꿈치
더불어 온 그리매와
어슬녘 바람 속에
던져버린 어제표.
寒天에
머리칼 날리며
긴 뚝길을 걷는다.
▶ 山·菊花
일몰의 물살이 든다.
해체의 가슴 밑창을
방금도 서로의 想念이
곤두치는 벼랑엔,
나 어린
새들 깃을 뽑아
방석을 짠다.
바람 바람 속으로
손 흔들고 멀어지는
네 입술 엷은 웃음은
눈물 크렁한 완수.
가난한
시인은 연신,
딱한 世代의 손을 꼰다.
▶ 눈이 내린다
발목 삔 길 위로
밤눈이 내린다
팔 잘린 나무들의
저 무뚝뚝한 표정들
노오란
자가용 불빛이
언뜻언뜻 스쳐간다.
부도(浮屠) 위로 하얗게
눈 내리던 고향은 멀고
시대를 질주하는
영악한 지성들의
안방엔
스티로폼의
눈발이 내린다.
▶ 바람
바람은 처음부터
세상에 뜻이 없어
이날토록 빈 하늘만
떠돌아다니지만
눈 속의
매화 한송이
바람 먹고 벙근다.
매이지 말라 매이지 말라
무시로 깨워 주던
포장집 소주맛 같은
아, 한국의 겨울 바람.
조금은
안 됐다는 듯
꽃잎 하나 떨구고 간다.
▶ 무제
산은 우뚝하고
골짜기로 물이 흐르는,
절로 난 흐름의 길가.
꽃들은 피어서
바쁘게
몸을 추스리는
이것을 무엇이라 하랴.
시냇물 제 혼자
소리내어 흐르고
나뭇잎 하나 달빛 싣고
흔들리며 가느니
이것을
무엇이라 하랴
먼 산 뻐꾹이 운다.
▶ 외항(外港)에서
빛 바랜 배 한 척이
외항에 떠 있다.
더는 실을 것도
부릴 것도 없는
화물선
비인 무게가
물살에 밀리운다.
바람에 펄럭이는
위도 없는 해도(海圖)위
다만 깊다 하고
아득타 할 뿐인
바다여,
나의 항해는
흐름인가 떠돌음인가.
▶ 지는 꽃
춥고 가난스런
바람손을 놓고
한 잎 한 잎 어제의
꽃들이 떨어진다.
진실한
빛깔로 타던
그 하늘은 지금 침묵.
한 모금 물 찾던 눈 감기고
너무나 조용한 지상(地上).
무수히 내려 쌓이는
멀어져 간 전설은
고독이
띄우는 아픈
웃음의 음성이었다.
▶ 경기(競技)
공은 또 라인 밖으로 나갔다.
딸리는 나의 주력(走力).
열한명의 공수(攻守) 포지션의
이동을 공이 이끈다.
끝내 승부가 나지 않는
그것은 나의 경기.
천심(天心)에 차 올린 공이
라인 밖으로 떨어진다.
등 뒤로 흐르는
호르라기 소리.
▶ 길
새벽 두시,
취한 내 영혼을 부축해 와서
초인종을 눌러 주고는
돌아가지 못한
길 하나
밤새워 비를 맞으며 기다리고 있구나.
▶ 시간
그대,
그대 모습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는데
이미 나를 스쳐간
50년간의
샤넬 향수·
그물에
걸리지 않는
햇살 같은, 바람 같은,
▶ 부재不在
길을 잃고 매화꽃 속
빈 방 몰래 들어서면
누가 올려놓았나
화로엔 찻물 끓고
주인은
달마중 갔다나
촛불만이 흔들리는데
▶ 토기
내 가난이 탄로날까 봐
세월을 비웠습니다
전생, 다시 그 전생
신라서부터 숨겨 온
긴 욕망
감당치 못해
마음마저 버렸습니다
▶ 달밤에
시린 달빛을 타고
가만가만 산이 내려와
헤진 베적삼 벗어
솔가지에 걸어 놓고
용화龍華의
깊은 강물 속
걸어가고 있었네
▶ 돌.1 <飛天>을 보고
나는 불이었다. 그리움이었다.
구름에 싸여 어둠을 떠돌다가
바람을
만나 예까지와
한 조각돌이 되었다.
천둥 비바람에 깨지고 부서지면서도
아얏, 소리 한번 지르지 못하는 것은
아직도
견뎌야 할 목숨이
남아 있음에서라.
사람들이 와 절망을 말하면 절망이 되고
소망을 말하면 또 소망이 되지만
억 년을
엎드려도 깨칠 수 없는
땅의 소리. 하늘 소리.
▶ 그물
늙은 어부, 혼자 앉아
그물을 깊고 있다.
매양 끌어 올리는 것은
파도소리며 달빛 뿐이지만
내일의
투망을 위해
그물코를 깁고 있다.
알 수 없는 水深을
자맥질해 온 어부의
젖은 생애가
가을볕에 타고 있다.
자갈밭
널린 그물에
흰 구름이 결린다.
▶ 바위 섬
천 년 바람속 難破의 바다를 안고
바위는 목이 마르다.
젖은 날개를 말리던 작은 새 한마리
먼 바다 깊이를 휘저어 가고…..
바위는
옆구리 터진 살에 石蘭을 기른다.
▶ 도라지꽃
뿔 여린 사슴의 무리
神話같이 살아온 山.
서그럭 흔들리는
몸을 다시 가눈 곳에
이 고장
마음색 띄고
도라지 꽃 피는가.
신음과 祈禱 위로
鮮血이 임하던 山.
이대로 이울고 말
목숨인가 말이 없이
먼 하늘
머리에 이고
도라지 꽃 피었다.
▶ 중동부中東部
고요하다 中東部.
어느 큰 흐름의 단층.
죽이지 않으면 죽는
싸늘한 배역의 시공.
故鄕도
生命도 멀고
銃口만 밤을 겨눈다.
꽃과 鐵條網을 빠져
손금처럼 흐르는 江물.
얼마를 몸부림쳐 왔고
또 몸부림쳐 갈 것인가
兵士는
가슴속 깊이
파아란 배낭을 진다.
▶ 步行
나의 오랜 보행은
허공에 한 발 지상에 한 발
생애의 체적은
바람에 날리고
무시로
바닥이 닳는 발은
허공에 떠 있다.
뒤뚱 발이 기울면
따라 기우는 세상
맥이 다 풀린 발은
무릎을 꿇는 비굴이 된다.
이윽고
발이 확인한 지상엔
딛고 설 하루가 없다.
▶ 해질 녘
山속에서 어둠이 내려 와
꽃밭의 빛갈을 서서히 거두고 있다.
(아, 묵묵한 반환)
아내는 나무마다 발등에 물을 붓는다.
어느 새 꽃들은 저 거뭇한 하늘
깊이를 휘저어 가고,
아내는 뜰에 찬 바람을 한아름 안고
긴 瞑目에 잠긴다.
▶ 동천冬天에서
가마귀 한 마리
나뭇가질 흔들어
내 얼굴에 눈가루를
뿌리고 간 冬天,
생애의
깊고 어두운
번뇌를 다스린다.
넘어가는 저녁 햇살에
맨살을 문지르며
산허리에 흩어져 간
가을 꽃 消盡이여
이승에
한 몫의 눈물을
뿌리며 가는가.
▶ 山番地
질펀한 노을 앞에
허무히 주저앉아
흉흉한 일상의
등피를 닦는 산번지
산 넘어온 시간속에서
마른 바람이 인다.
바위산
기슭에 올라
아무리 외쳐보아도
메아리도 지지않는
삭막한 산번지
어느 덧 山도 다 저물고
바람소리만 가득하다.
▶ 풍경風磬
뎅그렁 바람따라
풍경이 웁니다.
그것은, 우리가 들을 수 있는 소리일 뿐,
아무도
그 마음 속 깊은
적막을 알지 못합니다.
卍燈이 꺼진 산에 풍경이 웁니다.
비어서 오히려 넘치는 無上의 별빛.
아, 쇠도
혼자서 우는
아픔이 있나 봅니다.
▶ 세상은
세상은 불쌍한 사람들이
사는 곳이 아니다.
세상은 잘난 사람만
사는 곳도 아니다
세상은
보통 사람들이
공평하게 사는 곳이다.
▶ 여일(餘日)
그리하여 모든 것은 지나가고 남은 자리.
잔잔한 감동이 수묵 속에 번지고
한 소절
비가 내렸다.
눈부신 목련의 오후.
▶ 가을 일기
혼자 밥 먹고 혼자 놀다
책을 읽다 깜박 졸다.
새소리에 깨어보니
새들은 간데없고
가을만
깊을 대로 깊었다.
나무들도 아픈가보다
▶ 거짓말
거짓말도 가만히 들어보면
재미가 있다. 사연이 있다
여자는 거짓말로 참말을 하고
남자는 참말로 거짓말을 한다
헛말로 헤아려 듣는 나의 귀
난청이 고맙다
▶ 바람
바람은 처음부터
세상에 뜻이 없어
이날토록 빈 하늘만
떠돌아 다니지만
눈 속의
매화 한 송이
바람 먹고 벙근다.
매이지 말라 매이지 말라
무시로 깨워 주던
포장집 소주맛 같은
아, 한국의 겨울바람.
조금은
안 됐다는 듯
꽃잎 하나 떨구고 간다.
▶ 직립보행
침팬지가 걷는다
뒤뚱뒤뚱 걷는다
사람 따라 서서 걷다
주저앉고 마는 침팬지
“사람들 사는 일이란
쉬운 일이 아니네”
얼마나 따라왔나
머나 먼 옛날을
신기한 걸음걸이
혼자서도 걷는 날이
허리통(腰痛)* 산통産痛 못 이겨
절룩절룩 울며 가리
▶ 꽃을 보다
꽃들은 나를 모른다
나도 저들을 모른다
같은 땅에 살면서도
말을 건넨 적이 없다
서로들 낯이 익다고
웃고 있을 뿐이다
▶ 어머님의 눈물
어머님이 우신다
외로워서 우신다
내놓고 말 못한 한을
소리 내어 우신다
이제는 사랑할 시간이
없어서 우신다
▶ 패각
먼 들 끝 파도에 얹힌 작은 방은 비었다
깊고 추운 날을 추운 귀는 잠 못들고
영원을 돌앉은 정물 등 뒤로 환한 달빛
▶ 산, 귀를 닫다
보내지 않아도
갈 사람은 다 가고
기다리지 않아도
올 사람은 오느니
때 없이 서성거리던 일
부질없음을 알겠네
산은 귀를 닫고
말문 또한 닫은 강가
느끼매 바람소리,
갈대 서걱이는 소리뿐
한종일 마음 한 벌 벗고자
귀를 닫고 서 있네
▶ 달팽이
경운기가 투덜대며
지나가는 길섶
시속 6m의 속력으로
달팽이가 달리고 있다.
천만 년 전에 상륙하여
예까지 온 것이다.
어디로 가는지
가야 하는지 알 수 없는 길을
산달팽이 한 마리
쉬임 없이 가고 있다.
조금도 서두름 없이
전속으로 달리고 있다.
▶ 바람
바람은 처음부터
세상에 뜻이 없어
이날토록 빈 하늘만
떠돌아 다니지만
눈 속의 매화 한송이
바람 먹고 벙근다.
매이지 말라 매이지 말라
무시로 깨워주던
포장집 소주맛 같은
아, 한국의 겨울바람
조금은 안 됐다는 듯
꽃잎 하나 떨구고 간다.
▶ 돌
나는 불이었다. 그리움이었다.
구름에 싸여 어둠을 떠돌다가
바람을 만나 예까지 와
한 조각 돌이 되었다.
청둥 비바람에 깨지고 부서지면서도
아얏, 소리 한 번 지르지 못하는 것은
아직도 견뎌야 할 목숨이 남아 있음이다.
사람들이 와 절망을 말하면 「절망」이 되고
소망을 말하면 또 「소망」이 되지만
억년을 엎드려도 깨칠 수 없는
하늘소리,
땅의 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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