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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詩 같은 삶을 위하여
☞ 문학의 뜨락

김제현 시조 모음

by 石右 尹明相 2022. 11. 7.

 

 

김제현 시조시인(1939, 전남 장흥)

경희대학교 국문과, 한양대학교 대학원. 2002.~ 경기대 교육대학원장

1960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고지(高地)> 입선,

1962년 현대문학 등단,

중앙일보 시조대상, 2회 월하시조문학상, 홍조근정훈장, 한국시조대상

 

 

김제현 시조 모음

 

 

후일담後日談

 

한 평생 가난에 찌든

울엄니 징한 시상*

"살다보면 살아진다"시고

"숨만 자주 쉬니 살더라"시는

엄니들 웃음 띤 후일담

, 먹먹한 오도송悟道頌이여

 

 

정통 트롯을 듣다

 

흥이 많은 민족이라

도 그리 깊던가

한 소절 한 시절을

울먹이는 노래여

너보다 내가 먼저 운다

아파서 그리워서

 

 

우물 안 개구리

 

암록색 무당개구리

우물 안에서 산다.

 

바깥세상 나가봐야

패대기쳐져 죽을 목숨

온전히 보존키 위해

우물 안에서 산다.

 

짝 짓고 알 슬기에

깊고 넉넉한 공간

이따금 두레박 소리에

잠을 설치고

별들의 전갈을 기다리며

눈이 붓도록 운다.

 

 

상수리 나무 - 더부살이

 

동네 아이들이

도토리를 줍고 있다

날짐승 길짐승

온갖 벌레들을

먹이며 재우며 서 있는

한 그루 상수리나무

 

 

도라지꽃

 

뿔 여린 사슴의 무리

신화神話같이 살아온 산

서그럭 흔들리는

몸을 다시 가눈 곳에

이 고장 마음 색 띄고

도라지꽃 피는가

 

신음과 기도 위로

선지피 뚝뚝 듣던 산

이대로 이울고 말

입상立像인가 말이 없어

먼 하늘 머리에 이고

도라지꽃 피었다

 

 

풍경

 

뎅그렁 바람 따라

풍경이 웁니다

그것은 우리가

들을 수 있는 소리일 뿐.

아무도 그 마음 속 깊은

적막을 알지 못합니다

 

만등卍燈이 꺼진 산에

풍경이 웁니다

비어서 오히려

넘치는 무상의 별빛

, 쇠도 혼자서 우는

아픔이 있나 봅니다

 

 

시간

 

1.

시간은 말이 없다

보이지도 않는다

시간은 오지도 않고

가지도 않는다

언제나

그 자리에 그대로

가득 차 있고 텅 비어 있다

 

2.

째깍째깍 초침소리

맥박 뛰는 소리

그 사이 자연은

힌 경치를 이루고

사람들

저희 끼리 붉어

허둥대다 지나간다

 

 

무상

 

오는 듯

가버린 것이여

친숙한 낯섦이여

 

너 곧

아니더면

이 업을 어이하리

 

오늘도

멍청한 짓을

또 했구나 너를 믿고

 

 

로봇은 불평하지 않는다

 

한종일 서빙을 하고 있는 식당 종업원 로봇

넓은 홀 빽빽한 좌석을 잘도 찾아다닌다

지칠 줄

모르는 에너지

따르지 못하는 알바들

 

야간작업도 서슴지 않는 조립공장 로봇들

아무리 힘들어도 불평하지 않는다

하지만

저들도 언젠간

노조를 만들 것이다

 

 

건강검진

 

건강검진표를 들고 병원엘 간다

167체중 64

시력은 좌우 0.7 청력은 좌우 정상

 

늘 궁금하던 영혼의 무게를 달아 본다

아무런 숫자도 떠오르지 않는다

아마도 내 머리 속엔 영혼이 없나 보다

 

 

雨日

 

비가 오고 바람이 분다.

그것은 오늘의 날씨.

신발을 적시며

지나가는 사람 몇

내일은

개인다지만

그 또한, 지상의 날씨.

 

때를 묻히면서

세상을 알게 되고

눈이 흐려지면서

밝아오는 이치의

적당이

흐린 눈으로

밖을 보는 우일.

 

 

無爲

 

비가 온다 오기로니

바람이 분다 불기로니

세상은 비바람에

젖는 날이 많지만

언젠간

개이리란다

그러나 개이느니

 

 

짐지기

 

이제는 알만하다

이슬녘 한 잔의 술맛을

잠간, 꺼내 무는

한 모금 연기의 맛을

이제는

알만도 하다

멀리 있는 사람아.

 

발부리 채이던

앞앞이 아픈 길을

뒤뚱이는 걸음으로

예까지 왔느니

짐 속의

어느 것 하나

온전치 못함이여.

 

 

소재·1 - 종이배

 

그저 먼 나라가

그리운 해변의 아이들은

바다에 길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면서

갯가에

온 물살 따라

종이배를 띄웠다.

 

햇볕만 잔뜩 싣고 떠난

내 유년의 배 한 척.

지금은 어느 바다에

출렁이고 있을까

그러나

그 키를 부림은

이미 내가 아니어라.

 

 

어제표

 

바람만 서물거린다.

밤에 실려온 簡易驛口.

숱하게 허송해 버린

통로를 나오는,

진하게

타다 무안한

눈 뜨는 나의 成熟.

 

드러난 팔꿈치

더불어 온 그리매와

어슬녘 바람 속에

던져버린 어제표.

寒天

머리칼 날리며

긴 뚝길을 걷는다.

 

 

·菊花

 

일몰의 물살이 든다.

해체의 가슴 밑창을

방금도 서로의 想念

곤두치는 벼랑엔,

나 어린

새들 깃을 뽑아

방석을 짠다.

 

바람 바람 속으로

손 흔들고 멀어지는

네 입술 엷은 웃음은

눈물 크렁한 완수.

가난한

시인은 연신,

딱한 世代의 손을 꼰다.

 

 

눈이 내린다

 

발목 삔 길 위로

밤눈이 내린다

팔 잘린 나무들의

저 무뚝뚝한 표정들

노오란

자가용 불빛이

언뜻언뜻 스쳐간다.

 

부도(浮屠) 위로 하얗게

눈 내리던 고향은 멀고

시대를 질주하는

영악한 지성들의

안방엔

스티로폼의

눈발이 내린다.

 

 

바람

 

바람은 처음부터

세상에 뜻이 없어

이날토록 빈 하늘만

떠돌아다니지만

눈 속의

매화 한송이

바람 먹고 벙근다.

 

매이지 말라 매이지 말라

무시로 깨워 주던

포장집 소주맛 같은

, 한국의 겨울 바람.

조금은

안 됐다는 듯

꽃잎 하나 떨구고 간다.

 

 

무제

 

산은 우뚝하고

골짜기로 물이 흐르는,

절로 난 흐름의 길가.

꽃들은 피어서

바쁘게

몸을 추스리는

이것을 무엇이라 하랴.

 

시냇물 제 혼자

소리내어 흐르고

나뭇잎 하나 달빛 싣고

흔들리며 가느니

이것을

무엇이라 하랴

먼 산 뻐꾹이 운다.

 

 

외항(外港)에서

 

빛 바랜 배 한 척이

외항에 떠 있다.

더는 실을 것도

부릴 것도 없는

화물선

비인 무게가

물살에 밀리운다.

 

바람에 펄럭이는

위도 없는 해도(海圖)

다만 깊다 하고

아득타 할 뿐인

바다여,

나의 항해는

흐름인가 떠돌음인가.

 

 

지는 꽃

 

춥고 가난스런

바람손을 놓고

한 잎 한 잎 어제의

꽃들이 떨어진다.

진실한

빛깔로 타던

그 하늘은 지금 침묵.

 

한 모금 물 찾던 눈 감기고

너무나 조용한 지상(地上).

무수히 내려 쌓이는

멀어져 간 전설은

고독이

띄우는 아픈

웃음의 음성이었다.

 

 

경기(競技)

 

공은 또 라인 밖으로 나갔다.

딸리는 나의 주력(走力).

열한명의 공수(攻守) 포지션의

이동을 공이 이끈다.

끝내 승부가 나지 않는

그것은 나의 경기.

 

천심(天心)에 차 올린 공이

라인 밖으로 떨어진다.

등 뒤로 흐르는

호르라기 소리.

 

 

 

새벽 두시,

취한 내 영혼을 부축해 와서

 

초인종을 눌러 주고는

돌아가지 못한

길 하나

 

밤새워 비를 맞으며 기다리고 있구나.

 

 

시간

 

그대,

그대 모습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는데

 

이미 나를 스쳐간

50년간의

샤넬 향수·

 

그물에

걸리지 않는

햇살 같은, 바람 같은,

 

 

부재不在

 

길을 잃고 매화꽃 속

빈 방 몰래 들어서면

 

누가 올려놓았나

화로엔 찻물 끓고

 

주인은

달마중 갔다나

촛불만이 흔들리는데

 

 

토기

 

내 가난이 탄로날까 봐

세월을 비웠습니다

 

전생, 다시 그 전생

신라서부터 숨겨 온

 

긴 욕망

감당치 못해

마음마저 버렸습니다

 

 

달밤에

 

시린 달빛을 타고

가만가만 산이 내려와

 

헤진 베적삼 벗어

솔가지에 걸어 놓고

 

용화龍華

깊은 강물 속

걸어가고 있었네

 

 

.1 <飛天>을 보고

 

나는 불이었다. 그리움이었다.

구름에 싸여 어둠을 떠돌다가

바람을

만나 예까지와

한 조각돌이 되었다.

 

천둥 비바람에 깨지고 부서지면서도

아얏, 소리 한번 지르지 못하는 것은

아직도

견뎌야 할 목숨이

남아 있음에서라.

 

사람들이 와 절망을 말하면 절망이 되고

소망을 말하면 또 소망이 되지만

억 년을

엎드려도 깨칠 수 없는

땅의 소리. 하늘 소리.

 

 

그물

 

늙은 어부, 혼자 앉아

그물을 깊고 있다.

매양 끌어 올리는 것은

파도소리며 달빛 뿐이지만

내일의

투망을 위해

그물코를 깁고 있다.

 

알 수 없는 水深

자맥질해 온 어부의

젖은 생애가

가을볕에 타고 있다.

자갈밭

널린 그물에

흰 구름이 결린다.

 

 

바위 섬

 

천 년 바람속 難破의 바다를 안고

바위는 목이 마르다.

 

젖은 날개를 말리던 작은 새 한마리

먼 바다 깊이를 휘저어 가고..

 

바위는

옆구리 터진 살에 石蘭을 기른다.

 

 

도라지꽃

 

뿔 여린 사슴의 무리

神話같이 살아온 .

서그럭 흔들리는

몸을 다시 가눈 곳에

이 고장

마음색 띄고

도라지 꽃 피는가.

 

신음과 祈禱 위로

鮮血이 임하던 .

이대로 이울고 말

목숨인가 말이 없이

먼 하늘

머리에 이고

도라지 꽃 피었다.

 

 

중동부中東部

 

고요하다 中東部.

어느 큰 흐름의 단층.

죽이지 않으면 죽는

싸늘한 배역의 시공.

故鄕

生命도 멀고

銃口만 밤을 겨눈다.

 

꽃과 鐵條網을 빠져

손금처럼 흐르는 .

얼마를 몸부림쳐 왔고

또 몸부림쳐 갈 것인가

兵士

가슴속 깊이

파아란 배낭을 진다.

 

 

步行

 

나의 오랜 보행은

허공에 한 발 지상에 한 발

생애의 체적은

바람에 날리고

무시로

바닥이 닳는 발은

허공에 떠 있다.

 

뒤뚱 발이 기울면

따라 기우는 세상

맥이 다 풀린 발은

무릎을 꿇는 비굴이 된다.

이윽고

발이 확인한 지상엔

딛고 설 하루가 없다.

 

 

해질 녘

 

속에서 어둠이 내려 와

꽃밭의 빛갈을 서서히 거두고 있다.

 

(, 묵묵한 반환)

 

아내는 나무마다 발등에 물을 붓는다.

어느 새 꽃들은 저 거뭇한 하늘

깊이를 휘저어 가고,

 

아내는 뜰에 찬 바람을 한아름 안고

瞑目에 잠긴다.

 

 

동천冬天에서

 

가마귀 한 마리

나뭇가질 흔들어

내 얼굴에 눈가루를

뿌리고 간 冬天,

생애의

깊고 어두운

번뇌를 다스린다.

 

넘어가는 저녁 햇살에

맨살을 문지르며

산허리에 흩어져 간

가을 꽃 消盡이여

이승에

한 몫의 눈물을

뿌리며 가는가.

 

 

山番地

 

질펀한 노을 앞에

허무히 주저앉아

흉흉한 일상의

등피를 닦는 산번지

 

산 넘어온 시간속에서

마른 바람이 인다.

 

바위산

기슭에 올라

아무리 외쳐보아도

메아리도 지지않는

삭막한 산번지

 

어느 덧 도 다 저물고

바람소리만 가득하다.

 

 

풍경風磬

 

뎅그렁 바람따라

풍경이 웁니다.

그것은, 우리가 들을 수 있는 소리일 뿐,

아무도

그 마음 속 깊은

적막을 알지 못합니다.

 

卍燈이 꺼진 산에 풍경이 웁니다.

비어서 오히려 넘치는 無上의 별빛.

, 쇠도

혼자서 우는

아픔이 있나 봅니다.

 

 

세상은

 

세상은 불쌍한 사람들이

사는 곳이 아니다.

 

세상은 잘난 사람만

사는 곳도 아니다

 

세상은

보통 사람들이

공평하게 사는 곳이다.

 

 

여일(餘日)

 

그리하여 모든 것은 지나가고 남은 자리.

잔잔한 감동이 수묵 속에 번지고

한 소절

비가 내렸다.

눈부신 목련의 오후.

 

 

가을 일기

 

혼자 밥 먹고 혼자 놀다

책을 읽다 깜박 졸다.

 

새소리에 깨어보니

새들은 간데없고

 

가을만

깊을 대로 깊었다.

나무들도 아픈가보다

 

 

거짓말

 

거짓말도 가만히 들어보면

재미가 있다. 사연이 있다

 

여자는 거짓말로 참말을 하고

남자는 참말로 거짓말을 한다

 

헛말로 헤아려 듣는 나의 귀

난청이 고맙다

 

 

바람

 

바람은 처음부터

세상에 뜻이 없어

이날토록 빈 하늘만

떠돌아 다니지만

눈 속의

매화 한 송이

바람 먹고 벙근다.

 

매이지 말라 매이지 말라

무시로 깨워 주던

포장집 소주맛 같은

, 한국의 겨울바람.

조금은

안 됐다는 듯

꽃잎 하나 떨구고 간다.

 

 

직립보행

 

침팬지가 걷는다

뒤뚱뒤뚱 걷는다

사람 따라 서서 걷다

주저앉고 마는 침팬지

사람들 사는 일이란

쉬운 일이 아니네

 

얼마나 따라왔나

머나 먼 옛날을

신기한 걸음걸이

혼자서도 걷는 날이

허리통(腰痛)* 산통産痛 못 이겨

절룩절룩 울며 가리

 

 

꽃을 보다

 

꽃들은 나를 모른다

나도 저들을 모른다

 

같은 땅에 살면서도

말을 건넨 적이 없다

 

서로들 낯이 익다고

웃고 있을 뿐이다

 

 

어머님의 눈물

 

어머님이 우신다

외로워서 우신다

 

내놓고 말 못한 한을

소리 내어 우신다

 

이제는 사랑할 시간이

없어서 우신다

 

 

패각

 

먼 들 끝 파도에 얹힌 작은 방은 비었다

깊고 추운 날을 추운 귀는 잠 못들고

영원을 돌앉은 정물 등 뒤로 환한 달빛

 

 

, 귀를 닫다

 

보내지 않아도

갈 사람은 다 가고

기다리지 않아도

올 사람은 오느니

때 없이 서성거리던 일

부질없음을 알겠네

 

산은 귀를 닫고

말문 또한 닫은 강가

느끼매 바람소리,

갈대 서걱이는 소리뿐

한종일 마음 한 벌 벗고자

귀를 닫고 서 있네

 

 

달팽이

 

경운기가 투덜대며

지나가는 길섶

시속 6m의 속력으로

달팽이가 달리고 있다.

천만 년 전에 상륙하여

예까지 온 것이다.

 

어디로 가는지

가야 하는지 알 수 없는 길을

산달팽이 한 마리

쉬임 없이 가고 있다.

조금도 서두름 없이

전속으로 달리고 있다.

 

 

바람

 

바람은 처음부터

세상에 뜻이 없어

이날토록 빈 하늘만

떠돌아 다니지만

눈 속의 매화 한송이

바람 먹고 벙근다.

 

매이지 말라 매이지 말라

무시로 깨워주던

포장집 소주맛 같은

, 한국의 겨울바람

조금은 안 됐다는 듯

꽃잎 하나 떨구고 간다.

 

 

 

나는 불이었다. 그리움이었다.

구름에 싸여 어둠을 떠돌다가

바람을 만나 예까지 와

한 조각 돌이 되었다.

 

청둥 비바람에 깨지고 부서지면서도

아얏, 소리 한 번 지르지 못하는 것은

아직도 견뎌야 할 목숨이 남아 있음이다.

 

사람들이 와 절망을 말하면 절망이 되고

소망을 말하면 또 소망이 되지만

억년을 엎드려도 깨칠 수 없는

하늘소리,

땅의 소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