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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詩 같은 삶을 위하여
☞ 문학의 뜨락

하정 최순향 시조(시) 모음

by 石右 尹明相 2022. 10. 13.

 

 

최순향(崔順香,1946) 경북 포항, 시조시인.

숙명여대 졸업, 1997년 계간 시조생활로 등단.

시조집 옷이 자랐다, Happy Evening』, 아직도 설레이는.

국제PEN한국본부 시조문학상, 한국문협작가상, 시천시조문학상 등 수상.

 

 

하정 최순향 시조() 모음

 

 

낙엽1

 

가을 숲 빈 의자에 내려앉은 소식 하나

형용사 하나 없이 느낌표와 말없음표

하늘이 그리 곱던 날 내가 받은 옆서 한 장

 

 

낙엽2

 

눈부시게 차려 입고 춤추듯 떠나가네

이승을 하직하는 가뿐한 저 발걸음

언젠가 나 떠나는 날도 저랬으면 좋겠네

 

 

인생

 

비옥한 잡초밭이 내 안에 있습니다

아침마다 뽑아내도 자고나면 무성하고

잡초만 뽑다키우다 한 생애가 갑니다.

 

 

섣달 그믐밤

 

탁본 떠서 벽에 걸 듯 지난 세월 펼쳐 보다

남루가 부끄러워 두 눈을 감는다.

하나님, 당신만 아소서 아니 당신만 모르소서.

 

 

입춘

 

겨울 속에 서 있는 한 남자를 봤습니다

두 손이 시린지 주머니에 넣습니다

목련이 가슴 부풀어 터지는 아침입니다

 

겨울로 걸어가는 한 여자를 봤습니다

꽃다발 풀어헤쳐 길에다 뿌립니다

떨어진 그 자리마다 얼음꽃이 핍니다

 

해질녘 봄 바다는 노을을 끌어안고

여자와 그 남자는 노을 위에 눕습니다

파도는 비단 말듯이 일렁이며 말아갑니다

 

 

옷이 자랐다

 

구순의 오라버니 옷이 자꾸 자랐다

기장도 길어지고 품도 점점 헐렁하고

마침내 옷 속에 숨으셨다 살구꽃이 곱던 날에

 

 

슬픔이 차오를 때

 

슬픔보다 더 높이, 높이 나는 새가 되다

까만 허공 향해 몸 던지는 비가 되다

꺾일 듯 휜 가슴으로 바람 안는 풀이 되다

 

 

비와 홍어

 

봉천동 뒷골목에 허름한 삼합집

얼룩진 벽지와 고개 숙인 선풍기와

첫사랑 남도 사투리가 빗소리에 젖고 있다

 

그 한 때 싱싱했던 우리들 젊은 날이

구호와 최루탄과 상처 난 사랑들이

곰삭은 홍어가 되어 탁자 위에 앉아 있다

 

두 손도 가슴까지 모두 비운 뒷자리에

그리운 이름 하나 입안에서 뱅뱅 돈다

뱉지도 삼키지도 못하는 홍어가 되어간다

 

 

그대는

 

봄비야 첫눈이야 눈물겨운 기다림이야

첫 번 눈길이라 벼랑 끝 황홀이야

한 줄기 바람결에도 가슴 뛰는 형벌이야

 

 

이제야 보이네

 

사랑할 것들이 이렇게 많은 것을

비켜서 호접란이 갸웃 고개 숙이고

고요가 그 옆에 서서 나를 보고 웃고 있네

 

 

손톱

 

꼭 그만큼 손톱은 밤마다 자라났다

봉숭아물이 져도 고운 눈매 그대로다

누굴까 이 단단한 갑주(甲冑)

슬픔 한 줌 심은 이는

 

 

불야성 도시

 

주황색 비늘 흐드러져

어지러운 도시의 거리

밤마다 취객을 흔들고 가는 빈 술병들은

땅 어디에도 내려앉지 못해

쓰디 쓴 운명을 노래하네.

 

벗겨진 탈들이

어둠의 저 편 정물처럼 앉아

시간을 쪼아 먹고

귀먹고 눈멀은 도깨비 유희가

막을 내릴 즈음

 

하루와 하루의 만남이

소리 없이 음모하며

스러진 도시를 일으킨다.

미끄러운 거리를 씻긴다.

 

 

노래방에서 - 그녀

 

술 취한 그녀 뺨이 단풍보다 고왔습니다

트로트 가사를 안고 펑펑 울고 있었습니다

가을 밤

수줍게 걸린

눈썹달을 보았습니다

 

 

, 그 눈부심

 

윤기 입은 초록 위로 한 닷새 쌓인 햇살

떨어져 내리다가 다시 날아오르고

내 안의 빼곡한 숲 속 자유하는 새의 노래

 

 

거리에서

 

나른한 한나절을 거리에 나서보면

오가는 발걸음도 부딪치는 어깨도

이제는 한 점 섬이 될 낯선 얼굴들이다

 

어머님의 흙냄새와 유년의 내 고향이

지하도에 펼쳐놓은 씀바귀 함지 속에

그렇게 누워있었다 먼지를 쓰고 앉아

 

그 한 해 막달에 쓴 나의 연서 한 토막이

뿌연 낮달로 와 퇴기(退妓)처럼 걸려 있고

빈손에 들려 있는 건 지하철 차표 한 장

 

 

이런 미학

 

흐르지 않는 것은 이미 강이 아닙니다

버릴 것 다 버리고야 겨울 숲은 숲이 됩니다

그래요, 바람이 옵니다 강과 숲을 건너옵니다

 

제 살을 깎고 있는 그믐달이 참 곱네요

하늘 두고 떠나는 철새 떼도 그렇구요

노을은 찰나로 하여 또 얼마나 아름다운가요

 

 

귀뚜리에게

 

어차피 풀잎 위에 자리한 귀뚜리였다

창틀에 매달린 채 창이 울고 너도 울고

새벽달 서슬에 겨워 밤을 갈()고 있었다

 

사막을 휘돌아온 바람 맛도 보다가

징징대는 창호지를 지켜보고 앉았다가

이슬 빛 고운 자리로 옮겨 앉아 울었다

 

촉수(觸手)에 들어온 것 버릴 일이 있거들랑

세찬 울음발로 휘저어 버려라

그 다음 댓돌에 올라 진하게 배설하라

 

 

석류, 웃다

 

고독도 잘 익으면 너에겐 웃음일라

고운 치열 자랑하며 활짝 웃는 그 모습

부시게, 눈이 부시게 사리舍利로 꽉 찬 속내

 

 

그대는

 

봄비야 첫눈이야 눈물겨운 기다림이야

첫 번 눈길이라 벼랑 끝 황홀이야

한 줄기 바람결에도 가슴 뛰는 형벌이야

 

 

갈대와 강물

 

거기 그냥 그대로 그렇게 계셔요

나 여기 이만큼 이렇게 있을게요

하늘은

오늘도 푸르고

숲에선 바람이 울고

 

 

가장家長의 구두

 

감당한 무게만큼 닳아버린 뒤축하며

조이느라 다 해진 가장의 구두끈이

핏덩이 울컥 솟듯이 목에 걸린 아침나절

 

 

봄 날

 

뼛가루와 하얀 햇살 여전히 파란하늘

바람은 무덤에 와 자장가를 부르고

느리게

아주 느리게

봄날이 가고 있다

 

 

그 사람

 

눈 감으면 밟히는 그렇게 아른대는

조그마한 바람에도 깃발 되어 흔들리는

내 하늘 고운 자리에 물살 접듯 오는 사람

 

 

고요에 대하여

 

길게 누운 고요 위로 소리가 지고 있다

꽃의 울음소리를 고요가 먹고 있다

유리벽 뚫다 넘어진 그림자가 흩어진다

 

바람을 데리고 혼자 길을 나선다

생각이 달려 나가 저만치 길을 열면

고요는 발자국 위에 흔적으로 고인다

 

바람이 쌓인 언덕 그 너머로 봄은 오고

엉겅퀴는 자꾸만 가시를 키워대고

고요는 찔려도 좋을 하늘을 먹고 있다

 

 

행복한 저녁

 

사람보다 피곤이 먼저 와 앉습니다

막걸리 한 사발에 잔치국수 한 그릇

육십 촉 전구 아래서 제일 환한 얼굴입니다.

 

 

석양 무렵

 

나무는 제 울음을 발아래 내려놓고

한 줄 그림자로 나직이 흔들린다

풍경 속 빈 자리에는 몸을 푸는 바람 소리

 

 

동학사의 뻐꾸기

 

세월이야 가라 하렴 뻐꾸기는 울게 두고

동학사 주련까지 분에 넘친 푸르름 속

나 또한 뻐꾹뻐꾹 다시 뻐꾹 또 하나 산이 된다

 

 

봄비 온 뒤

 

빗방울 떨어진다 연두빛 파닥거리고

수많은 상형문자 구조하다 해체하다

누군가 밤 새워 써놓은 파스텔화 연서 한 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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