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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詩 같은 삶을 위하여
☞ 문학의 뜨락

이병기 시조 모음

by 石右 尹明相 2023. 1. 27.

 

이병기(李秉岐.가람(嘉藍) 시조시인, 1891~1968. 전북 익산.

1913년 한성사범학교 졸업, 남양, 전주제2, 여산공립보통학교 교사.

1930년 이후 한글맞춤법통일단 제정위원과 조선어표준어사정위원으로 활동하다가

1942년 조선어학회사건으로 피검되었다.(1943년 출감)

단국대, 동국대, 국민대, 숙명여대, 서울대 교수,

1952년 전북대학교 문리과대학 학장 역임.

 

 

이병기 시조 모음

 

 

난초

1

한 손에 책을 들고 조오다 선뜻 깨니

드는 볕 비껴가고 서늘바람 일어 오고

난초는 두어 봉오리 바야흐로 벌어라

 

2

새로 난 난초잎을 바람이 휘젓는다.

깊이 잠이나 들어 모르면 모르려니와

눈뜨고 꺾이는 양을 차마 어찌 보리아.

 

산듯한 아침볕이 발틈에 비쳐 들고

난초 향기는 물밀 듯 밀어오다

잠신들 이 곁에 두고 차마 어찌 뜨리아.

 

3

오늘은 온종일 두고 비는 줄줄 나린다.

꽃이 지던 난초 다시 한 대 피어나며

고적한 나의 마음을 적이 위로하여라.

 

나도 저를 못 잊거니 저도 나를 따르는지

외로 돌아 앉아 책을 앞에 놓아두고

장장(張張)이 넘길 때마다 향을 또한 일어라.

 

4

빼어난 가는 잎새 굳은 듯 보드랍고

자줏빛 굵은 대공 하이얀 꽃이 벌고

이슬은 구슬이 되어 마디마디 달렸다.

 

본디 그 마음은 깨끗함을 즐겨하여,

정한 모래 틈에 뿌리를 서려 두고

미진(微塵)도 가까이 않고 우로(雨露)밭아 사느니라.

 

 

계곡

 

맑은 시내 따라 그늘 짙은 소나무 숲

높은 가지들은 비껴드는 볕을 받아

가는 잎 은바늘처럼 어지러이 반작인다

 

청기와 두어 장을 법당에 이어 두고

앞뒤 비인 뜰엔 새도 날아 아니 오고

홈으로 나리는 물이 저나 저를 울린다

 

헝기고 또 헝기어 알알이 닦인 모래

고운 옥과 같이 갈리고 갈린 바위

그려도 더러일까봐 물이 씻어 흐른다

 

폭포 소리 듣다 귀를 막아도 보다

돌을 베개삼아 모래에 누워도 보고

한손에 해를 가리고 푸른 허공 바라본다

 

바위 바위 위로 바위를 업고 안고

또는 넓다 좁다 이리저리 도는 골을

시름도 피로도 모르고 물을 밟아 오른다

 

얼마나 험하다 하리 오르면 오르는 이길

물소리 끊어지고 흰구름 일어나고

우러러 보이던 봉우리 발아래로 놓인다.

 

 

풍란

 

잎이 빳빳하고도 오히려 령롱하다

썩은 향나무껍질에 옥 같은 뿌리를 서려 두고

청량한 물기를 머금고 바람으로 사노니

 

꽃은 하얗고도 여린 자연 빛이다

높고 조촐한 그 품이며 그 향을

숲속에 숨겨 있어도 아는 이는 아노니

 

 

 

바람이 서늘도 하여 뜰앞에 나섰더니

서산머리에 하늘은 구름을 벗어나고

산뜻한 초사흘 달이 별과 함께 나오더라

 

달은 넘어가고 별만 서로 반짝인다

저 별은 뉘 별이며 내 별 또한 어느게오

잠자코 호올로 서서 별을 헤어 보노라

 

 

 

나의 무릎을 베고 마즈막 누우시든 날

쓰린 괴로움을 말도 참아 못하시고

매었든 옷고름 풀고 가슴 내어 뵈더이다

 

깜안 젖꼭지는 옛날과 같으오이다

나와 나의 동긔 어리든 八九 남매

따뜻한 품안에 안겨 이 젖 물고 크더이다

 

 

아차산(대성암)

 

고개 고대 넘어 호젓은 하다마는,

풀섶 바위 서리 빨간 딸기 패랭이꽃,

가다가 다가도 보며 휘휘한 줄 모르겠다.

 

묵은 기와 쪽이 발끝에 부딪히고,

성을 고인 돌은 검은 버섯 돋아나고,

성긋이 벌어진 틈엔 다람쥐나 넘나든다.

 

그리운 옛날 자취 물어도 알 이 없고,

벌건 메 검은 바위 파란 물 하얀 모래

맑고도 고운 그 모양 눈에 모여 어린다.

 

깊은 바위굴에 솟아나는 맑은 샘을

위로 뚫린 구멍 내려오던 공양미를

이제도 의상(義湘)을 더불어 신라시절 말한다

 

볕이 쨍쨍하고 하늘도 말갛더니

설레는 바람 끝에 구름은 서들대고

거뭇한 먼 산머리에 비가 몰아 들온다

 

 

 

짐을 매어놓고 떠나려 하시는 이날

어둔 새벽부터 시름없이 나리는 비

내일도 나리오소서 연일 두고 오소서

 

부디 머나먼 길 떠나지 마오시라

날이 저물도록 시름없이 나리는 비

지옥이 말리는 정은 날보다도 더하오

 

잡았던 그 소매를 뿌리치고 떠나신다

갑자기 꿈을 깨니 반가운 비소리라

매어둔 짐을 보고는 눈을 도로 감으오

 

 

오동꽃

 

담머리 넘어드는 달빛은 은은하고

한두개 소리 없이 내려지는 오동꽃을

가려다 발을 멈추고 다시 돌아보노라

 

 

보리

 

눈눈 싸락눈 함박눈 펑펑 쏟아지는 눈

연일 그 추위에 몹시 볶이던 보리

그 참한 포근한 속의 문득 숨을 눅여

 

강보에 싸인 어린애마냥 고이고이

자라노니

눈 눈 눈이 아니라 보리가 쏟아진다고

나는 홀로 춤을 추오

 

 

매화 1

 

외로 더져 두어 미미히 숨을 지고

따뜻한 봄날 돌아오기 기다리고

음음한 눈얼음 속에 잠을 자던 그 매화.

 

손에 이아치고 바람으로 시달리다

곧고 급한 성결 그 애를 못 삭이고

맺었던 봉오리 하나 피도 못한 그 매화.

 

다가오는 추위 천지를 다 얼려도

찾아드는 볕은 방으로 하나 차다

어느 뉘 다시 보오리 자취 잃은 그 매화.

   

 

매화 2

 

더딘 이 가을도 어느덧 다 지나고

울 밑에 시든 국화 캐어 다시 옮겨 두고

호올로 술을 대하다 두루 생각나외다.

 

뜨다 지는 달이 숲 속에 어른거리고

가는 별똥이 번개처럼 빗날리고

두어 집 외딴 마을에 밤은 고요하외다.

 

자주 된서리 치고 찬바람 닥쳐 오고

여윈 귀뚜리 점점 소리도 얼고

더져 둔 매화 한 등걸 저나 봄을 아외다.

 

 

수선화

 

풍지에 바람 일고 구들은 얼음이다.

조그만 책상 하나 무릎 앞에 놓아두고,

그 위엔 한두 숭어리 피어나는 수선화.

 

투술한 전복껍질 발달아 등에 대고

따뜻한 볕을 지고 누워 있는 해형수선

서리고 잠들던 잎도 굽이굽이 펴이네.

 

등에 비친 모양 더우기 연연하다.

웃으며 수줍은 듯 고개 숙인 숭이숭이

하이얀 장지문 위에 그리나니 수묵화를.

 

 

냉이꽃

 

밤이면 그 밤마다 잠은 자야 하겠고

낮이면 세때 밥을 먹어야 하겠고

그리고 또한 때로는 시도 읊고 싶구나.

 

지난 봄 진달래와 올 봄에 피는 진달래가.

지난여름 꾀꼬리와 올 여름에 우는 꾀꼬리가

그 얼마 다를까마는 새롭다고 않는가.

 

태양이 그대로라면 지구는 또 어떨 건가?

수소탄 원자탄은 아무리 만든다더라도

냉이꽃 한두 송이에겐들 그 목숨을 뉘 넣을까.

 

 

파랑새

 

파랑새 날아오면 그이도 온다더니

파랑새 날아가도 그 이는 아니온다.

오늘도 아니 오시니 내일이나 올는가?

 

기다려지는 마음 하루가 백년 같다.

새로 이가 나고 흰머리 다시 검어라.

그이가 오신 뒤에야 나는 죽어 가리라.

 

 

. 수선.

 

零下 十五度大寒도 다 지내고

잦았던 눈도 어제부터 다 녹이고

뜰 앞의 梅花 봉오리도 볼록볼록 하고나

 

한잠 자고 나면 꿈만 시설스러웠다.

이 늙은 몸에도 이게 벌써 봄 아닌가

일깨어 손주와 함께 뛰고 놀고 하였다

 

盆 水仙은 농주를 지고 있고

여러 는 잎새만 퍼런데

호올로 병을 기울여 菊花酒를 마셨다

 

 

풍란-그 잡란

 

잎이 빳빳하고도 오히려 영롱하다

썩은 향나무 껍질에 같은 뿌리를 서려두고

청량한 물기를 머금고 바람으로 사노니

 

꽃은 하얗고도 여린 紫煙 빛이다

높고 조촐한 그 이며 그

숲속에 숨겨 있어도 아는 이는 아노니

 

 

도림난(道林蘭)

 

의 만여 이 온 대륙에 펼쳐 있다

계손溪蓀 맥문동麥門冬이라 일컷는데

봄에 핀 이 一莖 一花가 정말 이었다

 

하이얀 줄거리에 비취옥翡翠玉 같은 그 花冠

오늘 새벽에야 바야흐로 벌었다

으늑히 떠 이는 에 나는 자못 놀랬다

 

 

梅花

 

을 나는 캐어다 심어도 두고

좀먹은 古書를 한옆에 쌓아도 두고

만발한 野梅와 함께 八 九年을 맞았다

 

다만 빵으로 사는 이도 있고

영예 또는 신앙으로 사는 이도 있다.

그러나 나는 이 세상을 이러하게 살고 있다

 

 

낙엽

 

담머리 굴참나무 그늘도 짙을러니

높은 가지 끝에 한두잎 달려 있고

소소리바람이 치는 벌써 가을이구려

 

지는 잎 너도 어이 갈 바를 모르고서

바람에 흩날리어 이리저리 헤메느냐

그러나 발에 밟히어 흙이 되고 마느냐

 

날이 드던 잎이 뜰 앞에 가득하다

바람이 자고 달은 고히 비쳐들고

밤마다 서리는 내려 하얗게도 덮는다

 

 

 

봄날 궁궐 안은 고요도 고요하다

어원御苑 넓은 언덕 버들은 푸르르고

소복素服宮人은 홀로 하염없이 거닐어라

 

썩은 고목 아래 전각殿閣은 비어있고

파란 못물 우에 비오리 한 자웅雌雄

온 종일 서러 따르며 한가로이 떠돈다

 

 

홍원저조洪原低調

 

어둑 새벽부터 빤히 트이는 하늘

가로 푸른 은 담록淡綠과 연분홍빛

내 매양 자고 일어나 거울삼아 보노니

 

몹시 기다리다 아이들 편지 보니

八旬된 아버지 주야로 염려하시니

차디찬 방에 겨오셔 이 겨울을 나신다고

 

바다를 앞에 두고 보랴 보든 못하여도

전진前津과 송도松島의 그 모양 그 이름과

아울러 파도波濤 소리는 귀에 이미 젖었다

 

졸다 깨어보니 산뜻한 별이 난다

한나절 오던 눈이 지붕마다 소복하고

흐리던 구름 걷히며 파란 하늘 돋는다

 

뜰에 나던 볕이 창으로 다시 든다

하루를 보내기 한해도곤 더디더니

어느덧 제 돌을 이어 가을이 되었다

 

 

 

우리 방으로는 으로 눈을 삼았다

종이 한 장으로 宇宙를 가렸지만

永遠太陽과 함께 밝을 대로 밝는다

 

너의 앞에서는 술 먹기도 두렵다

너의 앞에서는 參禪키도 어렵다

珍貴古書를 펴어 書卷氣 기를까

 

나의 도 네가 가장 잘 알리라

나의 도 네가 가장 잘 알리라

그러나 나의 臨終도 네 앞에서 하려 한다

 

 

한강을 지나며

 

어머님 가시던 날이 오늘밤 같았으면

저 좋은 달 아래서 이 강을 건너시련만

그 밤은 모진 물결에 등불조차 없었어라.

 

 

시름

 

그대로 괴로운 숨 지고 이어 가랴하니

좁은 가슴 안에 나날이 돋는 시름

회도는 실꾸리같이 감기기만 하여라

 

아아 슬프단 말 차라리 말을 마라

물도 아니고 돌도 또한 아닌 몸이

웃음을 잊어버리고 눈물마저 모르겠다

 

쌀쌀한 되바람이 이따끔 불어온다.

실낱만치도 볕은 아니 비쳐든다

친구들 외로이 앉아 못내 초조하노라

 

 

풀벌레

 

해만 설핏하면 우는 풀벌레 그 밤을 다하도록 울고 운다

 

가까이 멀리 예서 제서 쌍져 울다 외로 울다

연달아 울다 꾹 그쳤다 다시 운다

연달아 울다 뚝 그쳤다 다시 운다

그 소리 단조하고 같은 양해도 자세 들으면

이놈의 소리 저 놈의 소리 다 다르구나

 

남몰래 계우는 시를 누워도 잠 아니 올 때

이런 소리도 없었던들

내 또한 어이 하리

 

 

박연폭포(朴淵瀑布)

 

이제 산에 드니 산에 정이 드는구나

오르고 나리는 길 괴로움을 다 모르고

저절로 산인이 되어 비도 맞어 가노라

 

이골 저골 물을 건느고 또 건느니

발밑에 우는 폭포 백이요 천이러니

박연(朴淵)을 이르고 보니 하나 밖에 없어라

 

봉머리 이는 구름 바람에 다 날리고

바위에 새긴 금발 메이고 이지러지고

다만 이 흐르는 물이 굳지 아니 하도다

 

 

석굴암(石窟庵)

 

한 고개 또 한 고개 고개를 헤어 오다

토함산 넘어 서서 동해바다 바라보고

저믄날 돌아갈 길이 바쁜 줄을 모르네

 

보고 보고지어 이곳에 석굴암(石窟庵)

험궂은 고개 넘어 굽이굽이 도는 길을

잦은 숨 잰걸음 치며 오고 오고 하누나

 

 

내 한 생

 

(1)

한몸에 지은 짐이 너무나 무거웠다

그 짐을 다 버리고 이리저리 오고 가세

새로이 두 어깨 밑에 날개 단 듯하고나

 

(2)

쌀값은 높아가며 양화는 범람하고

걸 거리에 자동차 트럭 버스

이것이 서울특별시 새 풍경이로고나

 

(3)

늙어 가면서도 술잔은 놓을 수 없고

늙어 가면서도 분필은 던질 수 없다

분필과 술잔으로나 내 한 생을 보낼까

 

 

저무는 가을

 

들마다 늦은 가을 찬바람이 움직이네

벼이삭 수수이삭 으슬으슬 속살이고

밭머리 해 그림자도 바쁜 듯이 가누나

 

무 배추 밭머리에 바구니 던져두고

젖 먹는 어린아이 안고 앉은 어미 마음

늦가을 저문 날에도 바쁜 줄을 모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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