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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詩 같은 삶을 위하여
☞ 문학의 뜨락

홍해리 시 모음

by 石右 尹明相 2023. 3. 8.

 

 

홍해리 시인(1942). 청주.

고려대 영문과. 1969년 시집 투망도投網圖출간하며 등단.

시집으로 황금감옥』『독종』『금강초롱』『치매행』『매화에 이르는 길외 다수.

시선집 洪海里 詩選』『비타민 』『시인이여 詩人이여』『洪海里는 어디 있는가

도서출판 움 대표, 월간우리편집인.

 

 

홍해리 시 모음

 

 

치매행致梅行

 

아내는 어린아이가 되었습니다

내가 밖에 나갈라 치면

어느 새 먼저 문밖에 나가 있습니다

억지로 떼어놓고 외출을 하면

왜 안 와?

언제 와?

늘 똑같은 두 마디

전화기 안에서 계속 울고 있습니다.

 

내가 자기를 낳은 어미도 아니고

아버지도 아닌데

한평생 살 비벼 새끼 낳고 기른

죄 많은 지아비라서

나는 나이 든 아기의 아빠가 되었습니다

 

오늘도 내 사랑하는 아가는

내게 매달려 한마디 말은 없지만

그냥, 그냥, 말문을 닫고 웃기만 합니다.

 

 

유채꽃

 

내가 쓰는 글마다

하나같이 노란 연서 같다

성산일출 바다가 풀어놓는 물감보다

시적인 사랑이 어디 있겠는가

세상이 온통 노랗다

어쩌자고

제주 현무암처럼

내 가슴에 구멍이 숭숭 뚫리는가

봄이 오면.

 

 

할미꽃

 

생전에 고개 한 번 들지 못한

삶이었으니

죽어서도 여전하구나

있을 때 잘해! 라고 말들 하지

지금 여기가 극락인 줄 모르고

떨며 사는 삶이 얼마나 추우랴

천둥으로 울던 아픈 삶이었기

시린 넋으로 서서

절망을 피워 올려 보지만

자줏빛 한숨소리 우레처럼 우는

산자락 무덤 위

할미꽃은 고갤 들지 못한다

이 에미도 이제

산발한 머리 하늘에 풀고 서서

훨훨 날아가리라, 할미꽃.

 

 

명자꽃

 

꿈은 별이 된다고 한다

너에게 가는 길은

별과 별 사이 꿈꾸는 길

오늘 밤엔 별이 뜨지 않는다

별이 뜬들 또 뭘 하겠는가

사랑이란

지상에 별 하나 다는 일이라고

별것 아닌 듯이

늘 해가 뜨고 달이 뜨던

환한 얼굴의

명자 고년 말은 했지만

얼굴은 새빨갛게 물들었었지

밤이 오지 않는데 별이 뜰 것인가

잠이 오지 않는데 꿈이 올 것인가

 

 

배꽃

 

1

바람에 베어지는 달빛의 심장

잡티 하나 없는 하얀 불꽃이네

호르르 호르르 찰싹이는 은하의 물결.

 

2

천사들이 살풀이를 추고 있다

춤 끝나고 돌아서서 눈물질 때

폭탄처럼 떨어지는 꽃이파리

그 자리마다 그늘이 파여

 

3

고요가 겨냥하는 만남을 위하여

배꽃과 배꽃 사이 천사의 눈짓이 이어지고

꽃잎들이 지상을 하얗게 포옹하고 있다

사형집행장의 눈물일지도 몰라.

 

4

배와 꽃 사이를 시간이 채우고 있어

배꽃은 하나지만 둘이다

나와 내가 하나이면서 둘이듯이

시간은 존재 사이에 그렇게 스민다.

 

 

서향瑞香-화적花賊

 

꽃 중에서도 특히 이쁜 놈이 향기 또한 강해서

다른 놈들은 그 앞에서 입도 뻥끗 못하듯,

계집 가운데도 특히나 이쁜 것들이 있어서

사내들도 꼼짝 못하고 나라까지 기우뚱하네.

 

 

헌화가獻花歌

 

그대는 어디서 오셨나요.

그윽이 바윗가에 피어 있는 꽃

봄 먹어 짙붉게 타오르는

춘삼월 두견새 뒷산에 울어

그대는 냇가에 발 담그고

먼 하늘만 바라다 보셨나요.

바위병풍 둘러친

천 길 바닷가 철쭉꽃

바닷속에 흔들리는 걸

그대는 하늘만 바라다보고

볼 붉혀 그윽이 웃으셨나요.

꽃 꺾어 받자온 하이얀 손

떨려옴은 당신의 한 말씀 탓

그대는 진분홍 가슴만 열고.

 

 

아름다운 남루 - 산수유

 

잘 썩은 진흙이 연꽃을 피워 올리듯

산수유나무의 남루가

저 눈부시게 아름다운 빛깔을 솟구치게 한

힘이었구나!

누더기 누더기 걸친 말라빠진 사지마다

하늘 가까운 곳에서부터

잘잘잘 피어나는 꽃숭어리

바글바글 끓어오르는 소리

노랗게 환청으로 들리는 봄날

보랏빛 빨간 열매들

늙은 어머니 젖꼭지처럼, 아직도

달랑, 침묵으로 매달려 있는

거대한 시멘트 아파트 화단

초라한 누옥 한 채

쓰러질 듯 서 있다.

 

이 막막한 봄날

누덕누덕 기운 남루가 아름답다.

 

 

개나리꽃

 

그대는

땅 속의 사금가루를 다 모아

겨우 내내

달이고 달이더니,

 

드디어

24금이 되는 어느 날

모두 눈감은 순간

천지에 축포를 터뜨리었다.

 

지상은 온통 금빛 날개

종소리 소리

순도 100%의 황홀

이 찬란한 이명이여.

 

눈으로 들어와

귀를 얼리는

이 봄날의 모순을

누구도 누구도 어쩌지 못하네.

 

 

조팝나무꽃

 

숱한 자식들

먹여 살리려

죽어라 일만 하다

가신

어머니,

 

다 큰 자식들

아직도

못 미더워

이밥 가득 광주리 이고

서 계신 밭머리,

 

산비둘기 먼 산에서 운다.

 

 

빈 들

 

가을걷이 끝나고

눈 시린 하늘 아래 빈 들에 서면, 빈 들

빈 들, 놀던 일 부끄러워라

빈 들만큼, 빈 들만큼 부끄러워라

이삭이나 주우러 나갈까 하는

마음 한켠으로

떼 지어 내려앉는 철새 떼

조물조물 주물러 놓은 조물주의 수작들!

 

새벽 그믐달

 

팔월 그믐께

동쪽 하늘

앞가슴 풀어헤친

푸른 바다 위

 

목선 한 척

떠 있다

어둠 가득 싣고 있다

 

모두 부리고

쓸쓸함만 싣고 있다

모두 내리고

빈 배가 가고 있다

 

별 몇 개 거느리고

넉넉한,

빈배가 더 무거워

하늘이 기우뚱,

 

중심을 잡고 있는 우주가

있는 듯 없는 듯

이제 곧 적막에 닿으리라.

 

오죽烏竹

 

빈 가슴속

천년 세월을 담아

노래의 집을 엮네

 

마디마디

시커멓게 멍이 들고

온몸이 까맣게 타도

 

靑靑히 열고

푸르게 푸르게

서는

 

초겨울

대밭의

피리 소리여!

 

5월이 오거든

 

날선 비수 한 자루 가슴에 품어라

미처 날숨 못 토하는 산것 있거든

명줄 틔워 일어나 하늘 밝히게

무딘 칼이라도 하나 가슴에 품어라.

 

 

가을 들녘에 서서

 

눈멀면

아름답지 않은 것 없고

 

귀먹으면

황홀치 않은 소리 있으랴

 

마음 버리면

모든 것이 가득하니

 

다 주어버리고

텅 빈 들녘에 서면

 

눈물겨운 마음자리도

스스로 빛이 나네.

 

 

개운開雲

 

매화가 피었어도

눈으로도

귀로도 향기를 맡을 수 없더니

병원에서 돌아오자

꽃은 이미 다 지고

꽃이 있던 자리

쥐눈이콩만한 열매

가녀린 탯줄에 매달린 아기처럼

조롱조롱 맺혀 있다

초록빛 앙증맞은 눈빛을 찾아

내가 건너뛴 시간의

간극間隙.

개운하다, 풋사랑!

 

겨울바다에 가서

 

세월이 무더기로 지는

겨울바다

아득한 물머리에 서서

 

쑥대머리

하나

사흘 밤 사흘 낮을

이승의 바다 건너만 보네

 

가마득하기야

어디

바다뿐일까만

 

울고 웃는 울음으로

빨갛게 타는

그리운 마음만 부시고

 

파도는 바다의 속살을 닦으며

백년이고 천년이고

들고나는데,

 

까마아득하기야

어찌

사랑뿐일까 보냐.

 

그리움을 두고

 

가을이 깊어지면

마음의 거문고 줄을 적시다

세상에 귀를 열어 보라

꽃 지고 난 사이 허공길 걸어

내 갈 곳 어디런가

저린 삭신 풀어 놓고

눈뜨고 자며 뒤척이다가

속내 감춘 한줄기 바람

꿈꾸며 가다 숨길 멈춘 곳

시리리시리리 시리다 우는

천지간에 지천인 풀벌레소리

이미 한세상 내디딘 걸음

어찌 돌아갈 수 있으랴

그것이 우리의 밥술인 것을

손톱 반달만한 그리움도 있어.

 

그리움을 위하여

 

서로 스쳐 지나면서도

만나지 못하는 너를

보고 불러도 들리지 않는 너를

허망한 이 거리에서

이 모래 틈에서

창백한 이마를 날리고 섰는 너를 위하여,

 

그림자도 없이 흔들리며 돌아오는 오늘밤은

시를 쓸 것만 같다

어두운 밤을 몇몇이 어우러져 막소주 몇 잔에

서대문 네거리 하늘은 더 높아 보이고

두둥럿이 떠오른 저 달도 하늘의 술잔에 젖었는지

뿌연 달무리를 안고 있다

잠들기 전에 잠들기 전에 이 허전한 가슴으로

피가 도는 노래를 부르고 싶다.

 

네 속에 있는 나를

내 속에 있는 너를

우린 벌써 박살을 냈다.

 

아득한 나의 목소리

아득한 너의 목소리

아득한 우리 목소리.

 

돌아가야지 돌아가야지

썩은 사과 냄새에 취해

나는 내 그림자도 잃고 헤매임이여.

 

흙벽에 등을 대고 듣던

새벽녘 선한 공기를 찍는 까치소리

한낮 솔숲의 뻐꾸기 울음

그믐밤 칠흑 n빛 소쩍새 울음.

 

보리 푸름 위 종달새 밝은 봄빛과

삘기풀 찔레꽃의 평활 위하여

이 묵은 시간 거리의 떠남을 위하여.

 

 

꽃 무릇 천지

 

우리들이 오가는 나들목이 어디런가

 

너의 꽃 시절을 함께 못할 때

나는 네게로 와 잎으로 서고

나의 푸른 집에 오지 못할 때

너는 내게로 와서 꽃으로 피어라

 

나는 너의 차꼬가 되고

너는 내 수갑이 되어

속속곳 바람으로

이 푸른 가을날 깊은 하늘을 사무치게 하니

안팎으로 가로지나 세로지나 가량없어라

 

짝사랑이면 짝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만나지 못하는 사랑이라서

나는 죽어 너를 피우고

네가 죽어야 내가 사는가

 

나란히 누워보지도 못하고

팔베개 한 번 해 주지 못한 사람

촛불 환히 밝혀 들고 두 손을 모으면

너는 어디 있는가

 

나는 마음만, 마음만 붉어라

 

꽃 지는 날

 

마음에 마음 하나

겹치는 것도 버거워라

 

누가 갔길래

그 자리 꽃이 지는지

 

그림자에 꽃잎 하나

내려앉아도

 

곡비 같은 여자 하나

흔들리고 있네.

 

낙엽 편지

 

제 무게에 겨워

스스로

몸을 놓고

 

한없이 가벼움으로

세월에 날리며

돌아가고 있는

한 생의 파편,

 

적막 속으로

지고 있다

가벼이

다 버리고

다 비우고도

한평생이 얼마나 무거웠던가

 

이제

우주가 고요하다

눈썹 위에

바람이 잔다.

 

난잎 질 때

 

곧던 잎 점점 휘어지고

검푸르던 빛깔 누렇게 변해

마침내 똑! 떨어질 때

 

저 하늘의 작은 별

깜빡! 하며

마지막 숨을 놓는다

 

광대무변의 세상 점 하나 지워지고

한 순간

눈물방울 하나 갸우뚱한다

 

아무 일 없었던 듯 지구는 돌고

그렇다, 권위도 순서도 없는

죽음이란 분명한 사실일 뿐

 

아버지도 그랬고 할아버지도

할아버지의 아버지 할아버지도 그랬듯이

아들도 아들의 아들도 손자도 그럴 것이듯

 

눈물도 이슬처럼 햇빛 속에 숨고

자신이 몸을 낮추어

울음으로 찰나의 집 한 채 짓는다.

 

노을

 

보내고 난

비인 자리

그냥 수직으로 떨어지는

심장 한 편

투명한 유리잔

거기 그대로 비치는

첫 이슬

빨갛게 익은

능금나무 밭

잔잔한 저녁 강물

하늘에는

누가 술을 빚는지

가득히 고이는

담백한 액체

아아,

보내고 나서

혼자서 드는

한 잔의 술.

 

늦가을

 

이제 그만 돌아서자고

돌아가자고

바람은 젖은 어깨 다독이는데

옷을 벗은 나무는 막무가내

제자리에 마냥 서 있었다.

 

찌르레기 한 마리 울고 있었다

늦가을이었다.

 

단순한 기쁨

 

나이 들수록,

눈이 침침해지고

귀가 희미해져도,

 

보이는 것이 더 많고

들리는 것이 더 많네.

 

둔해지는 몸으로

느끼는 것이 더 많은,

이 투명한 세상!

 

살아 있다는

단순한,

이 기쁨.

 

 

달개비 꽃

 

마디마디

정을 끊고

내팽개쳐도,

 

금방

새살림 차리는

저 독한 계집.

 

이제는

쳐다보지도,

말도 않는다고

 

말똥말똥 젖은 눈

하늘 홀리는

저 미친 계집.

 

 

담쟁이의 길

 

길이라곤 오직 벽뿐이어서

아니면 살아있는 나무들이라서

담쟁이는 타고 오를 수밖에 없다

밤낮없이 수직으로 기어가는 길

높을수록 바람은 거세지만

타고 오르는 힘은 더욱 푸르다

하늘이 머리 위에 있으니

숨차다고 손을 놓을 수는 없다

바람아 불어라

흔들리는 하늘길

홀로 가는 곳

길은 늘 시작이다

끄트머리는 끝의 머리이기 때문

입때껏 바람결은 부드러웠지만

벽이란 것은 쩌개지고

나무는 눈바람에 깎이기 마련

담쟁이는 맨발이라서 하늘에 오를 수 있다

너도 맨 정신이면

하늘에 닿을 수 있으리라

느릿느릿 천천히 맨발로 가거라

아득한 끄트머리를 위하여

그러나 벽아 나무야

너를 타고 오르는 내가 미안하다

 

마음이 도둑이다

 

비운다 비운다며 채우려 들고

보이지 않는 것도 보려고 들고

들리지 않는 것도 들으려 들고

먹지 못할 것까지 먹으려 들고

해서 안 될 말까지 하려고 드는

요놈의 미운 마음, 도둑이구나!

 

無花果

 

애 배는 것 부끄러운 일 아닌데

그녀는 왜 꼭꼭 숨기고 있는지

대체 누가 그녀를 범했을까

애비도 모르는 저 이쁜 것들, 주렁주렁,

스스로 익어 벙글어지다니

은밀이란 말이 딱 들어맞는다

오늘밤 슬그머니 문지방 넘어가 보면

어둠이 어둡지 않고 빛나고 있을까

벙어리처녀 애 뱄다고 애 먹이지 말고

울지 않는 새 울리려고 안달 마라

숨어서 하는 짓거리 더욱 달콤하다고

열매 속에선 꽃들이 난리가 아니다

질펀한 소리 고래고래 질러대며

무진무진 애쓰는 혼뜬 사내 하나 있다.

 

 

바다에 홀로 앉아

 

도동항 막걸리집 마루에 앉아

수평선이 까맣게 저물 때까지

수평선이 사라질 때까지

바다만 바라다봅니다

두 눈이 파랗게 물들어

바다가 될 때까지

다시 수평선이 떠오를 때까지.

 

바다와

 

난바다 칠흑의 수평선은

차라리 절벽이어서

바다는 대승大乘의 시를 읊는데

나는 소승小乘일 수밖에야

죽어 본 적 있느냐는 듯 바다는

눈물 없는 이 아름다우랴고

슬픔 없는 이 그리워지랴고

얼굴을 물거울에 비춰보라 하네.

 

제 가슴속 맺힌 한

모두어 품고 아무 일도 없는 양

말 없는 말 파도로 지껄일 때

탐방탐방 걸어나오는 수평선

밤새껏 물 위에 타던 집어등

하나 둘 해를 안고 오는 어선들

소외도 궁핍도 화엄으로 피우는

눈 없는 시를 안고 귀항하고 있네.

 

백목련 날다

 

영혼이 맑으면 날 수 있다는

소녀가 있었습니다.

 

고층건물에서 뛰어내린 소녀

땅 위에 사뿐 앉았습니다.

 

해마다 봄이 오면

얼굴이 흰 소녀는 수많은 꽃등을 들고

여학교 화단가에 서 있습니다.

 

올해도 어김없이 목련나무는

서늘한 불길에 싸여

환하게 타오르고 있습니다.

 

봄바람 속에

 

겨울바람 속에는 날카로운 솜방망이가 들어 있다

두억시니

어처구니

칼 찬 사내들 말발굽소리 대지를 가르지만

미나리꽝 얼음장 밑 푸른 미나리

살 오르는 소리 들어 보아라

 

봄바람 속에는 부드러운 칼이 들어 있으니

눈이 빠지게 기다리던 너

눈에 빠지며 엎어지며 불원천리 찾아왔다

기다린다는 것은

살을 찢고 뼈를 깎고 피를 말리는

환장의 세월이었지

 

남은 겨울의 꼬리를 가차없이 잘라내려고

겨우내 부드럽게 칼을 갈았다

봄비는 조용히 울어 눈물로 겨울을 씻어내며

역습해 오는 꽃샘바람을 수비하기 위하여

비수를 가슴에 품는 것이니

봄바람 속에 감추고 있는 비밀문자를 보라

 

봄이라고 바람 분다 봄바람 분다

봄바람 봄바람 바람이 분다.

 

 

부드러움을 위하여

 

물이랑 연애하고 싶다

물 가르는 칼이고 싶다

 

이슬아침 댓잎에 맺힌 적요로

빛나는 물이 스미듯이 자르는,

 

칼에 베어지기 전의 작은 떨림

그 푸른 쓸쓸함 한 입 베어 물고,

 

길 지우는 배경 물로 살아나듯

칼 지우는 투명한 물이고 싶다.

 

비 그친 오후

선연가嬋娟歌

 

집을 비운 사이

초록빛 탱글탱글 빛나던 청매실 절로 다 떨어지고

그 자리

매미가 오셨다, 떼로 몰려 오셨다

 

조용하던 매화나무

가도 가도 끝없는 한낮의 넘쳐나는 소리,

소낙비 소리로,

나무 아래 다물다물 쌓이고 있다

 

눈물 젖은 손수건을 말리며

한평생을 노래로 재고 있는 매미들,

단가로 다듬어 완창을 뽑아대는데, 그만,

투명한 손수건이 '하염없이 또 젖고 젖어,

 

세상모르고

제 세월을 만난 듯

쨍쨍하게 풀고 우려내면서

매미도 한철이라고 노래하고 있는 것인가

 

비 그친 오후

일제히 뽑아내는 한줄기 매미소리가

문득

매화나무를 떠안고 가는 서녘 하늘 아래

 

어디선가

심봉사 눈 뜨는 소리로 연꽃이 열리고 있다

얼씨구! 잘한다! 그렇지!

추임새가 덩실덩실 춤을 추고 있다.

 

설중매(雪中梅)

 

창밖, 소리 없이 눈 쌓일 때

방안, 매화,

소문 없이 눈트네.

몇 생을 닦고 닦아

만나는 연인지

젖 먹던 힘까지, 뽀얗게

칼날 같은 긴, 겨울밤

묵언默言으로 피우는

한 점 수묵水墨

고승,

사미니,

한 몸이나

서로 보며 보지 못하고

적멸寂滅, 바르르, 떠는

황홀한 보궁寶宮이네.

 

숫돌은 자신을 버려 칼을 벼린다

 

제 몸을 바쳐

저보다 강한 칼을 먹는

숫돌,

 

영혼에 살이 찌면 무딘 칼이 된다.

 

날을 세워 살진 마음을 베려면

자신을 갈아

한 생을 빛내고,

 

살아 남기 위해서는 버려야 한다.

 

서로 맞붙어 울어야

비로소 이루는

相生,

 

칼과 숫돌 사이에는 시린 영혼의 눈물이 있다.

 

영혼의 사리

 

눈물이 얼마나 단단한 강철인가

아는 이는

죽음이 얼마나 편안한 꿈인가를

알 수 있으리

 

온 길을 되짚어 가는 일도

때로는 절벽 어둠의 길

평정의 봉긋한 봉분을 짓고

대지를 한 벌의 수의로 삼아

 

갈대들이 흔드는 발마소리

강을 건너 억새밭을 오르는

달도 이울어 밤이 오면

고요로운 휴식의 품으로

 

꺼이꺼이

되돌아갈 일이네

이 청정한 가을날

눈물 같은 하늘 아래.

 

옐레나 이신바예바

 

하늘 높이 떠밀어 준 장대를

슬쩍,

놓는 순간

 

한 마리 새가 되어

바르르 떠는 난초잎 같은

천평선天平線을 넘어

 

허공으로

날개 없는 새는 추락하지만

나는,

더 높이 날아오른다

 

우화羽化

 

바닥을 본 사람은

그곳이 하늘임을 안다

위를 올려다보고

일어서기 위해 발을 딛는 사람은

하늘이 눈물겨운 벽이라는 것을

마지막 날아오를 허공임을, 알고

내던져진 자리에서

젖은 몸으로

바닥을 바닥바닥 긁다 보면

드디어,

바닥은 날개가 되어 하늘을 친다

바닥이 곧 하늘이다.

 

은자의 북

 

나의 는 북, 은자의 북이다

삶의 빛과 향으로 엮는

생명의 속삭임과

격랑으로 우는,

 

북한산 물소리에 눈을 씻고

새소리로 귀를 채워

바람소리, 흙냄새로 마음 울리는

나의 시는 북이다, 隱者의 북.

 

 

자란紫蘭

 

너를 보면

숨이 멎는다.

 

가슴속으로 타는

불꽃의 교태

 

심장을 다 짜서

혓바닥으로 핥고

 

하늘에 뿜어 올렸다

다시 초록으로 씻어

 

피우는 고운 불꽃

너를 보면

 

숨이 멎는다

현기증이 인다.

 

 

자화상

 

내 몸에 흐른 강이 몇 개

수직으로 떨어지는 폭포가 몇 개

이마에 매달린 납덩이가 몇 개

가슴 속 갈매기 깃발이 몇 개

털 빠진 기회의 꼬리가 몇 개

너무 가까워 보이지 않는 눈썹이 몇 개

, 무엇이 무엇인가 무엇이 몇 개.

 

 

적아소심赤芽素心

 

세상 오다 마는 것이 얼마나 많은가

비는 우주공간을 떠돌다 떠돌다

몸 바꾸기에 얼마나 힘들었는지

걸어오다 뛰어오다 도망치다

다시 달라붙기도 하네

번개도 치지 않고 천둥도 울지 않고

사냥개처럼 하늘이 젖어도

그대의 행성에는 달맞이꽃이 피고

우기의 구름 사이, 문득

적아소심이 푸른 하늘처럼 잠을 깼다는

삽상한 소식이 귓속에 찬란히 피네

그리운 심정으로 꽃대를 올려

슬픔 같은 꽃잎으로 가을날을 밝히니

눈 마주치기도 두려우리, 그대여

부드러운 물칼 같은 혓바닥으로

우주의 초연한 질서를 노래하는

꽃 속으로 천리를 가면

적멸보궁 지붕 끝이 보이리.

 

절정을 위하여

 

조선낫 날빛 같은 사랑도

풀잎 끝의 이슬일 뿐

절정에 달하기 전

이미 내려가는 길

풀섶에 떨어진 붉은 꽃잎, 꽃잎들

하릴없이 떨어져 누운 그 위에

노랑나비 혼자 앉아

하마하마 기다리고 있다

절망이 아름답다고

노래하는 시인이여

슬픔도 눈물로 씻고 씻으면

수정 보석이 되고

상처도 꽃으로 벌어

깊을수록 향으로 피어오르는가

마음을 닦아 볼까

스스로 깊어지는 숲

속으로 들어가

흔적도 남기지 않는

바람을 만나네

무거운 마음 하나 머물고 있는

바윗속을 지나니

절정은 이미 기울어지고

풀 새 벌레 한 마리 들리지 않네

목숨 지닌 너에게나 나에게나

절정은 없다.

 

중복

 

한낮

들녘 파아란 하늘

미루나무 이파리

환상의 구름장을 몰아다

등줄기에 쏟는

소나기

쏴아하아,

매미 소리여.

 

지는 꽃에게 묻다

 

지는 게 아쉽다고 꽃대궁에 매달리지 마라

고개 뚝뚝 꺾어 그냥 떨어지는 꽃도 있잖니

지지 않는 꽃은 추억이라는 이름으로 피어나

과거로 가는 길 그리 가까웁게 끌고 가나니

너와의 거리가 멀어 더욱 잘 보이는 것이냐

먼 별빛도 짜장 아름답게 반짝이는 것이냐.

 

 

찔레꽃

 

장미꽃 어질머리 사이

찔레꽃 한 그루

옥양목 속적삼으로 피어 있다.

 

돈도 칼도 다 소용없다고

사랑도 복수도 부질없다고

지나고 나서야 하릴없이 고개 끄덕이는

천릿길 유배와 하늘보고 서 있는 선비.

 

왜 슬픔은 가시처럼 자꾸 배어 나오는지

무장무장 물결표로 이어지고 끊어지는 그리움으로

세상 가득 흰 물이 드는구나.

 

밤이면 사기등잔 심지 돋워 밝혀 놓고

치마폭 다소곳이 여미지도 못하고 가는

달빛 잣아 젖은 사연 올올 엮는데,

 

바람도 눈감고 서서 잠시 쉴 때면

생기짚어 피지 않았어도

찔레꽃 마악 몸 씻은 듯 풋풋하여

선비는 귀가 푸르게 시리다.

 

 

찬란한 세상

 

소리는 귓속에 집을 짓지만

귓속에 들어가 보면

소리는 하나도 없다

사랑은 사람소리

떡에는 떡메소리

엿장수는 가윗소리

파도는 물소리를 소유하지만

모두 다 비웠을 때

비로소

소리의 집은 소리로 차서

소라껍데기 같은 이 귀가 빛난다

비어 있는 여자들의 소리는 귀에서 나와

이 세상을 찬란히 채운다.

 

처녀치마

 

철쭉꽃 날개 달고 날아오르는 날

은빛 햇살은 오리나무 사이사이

나른, 하게 절로 풀어져 내리고,

은자나 된 듯 치마를 펼쳐 놓고

과거처럼 앉아 있는 처녀치마

네 속으로 한없이 걸어 들어가면

몸 안에 천의 강이 흐르고 있을까

그리움으로 꽃대 하나 세워 놓고

구름집의 별들과 교신하고 있는

너의 침묵과 천근 고요를 본다.

 

첫눈

 

하늘에서 누가 피리를 부는지

그 소리가락 따라

앞 뒷산이 무너지고

푸른빛 하늘까지 흔들면서

처음으로 처녀를 처리하고 있느니

캄캄한 목소리에 눌린 자들아

민주주의 같은 처녀의 하얀 눈물

그 설레이는 꽃이파리들이 모여

뼛속까지 하얀 꽃이 피었다

울음소리도 다 잠든

제일 곱고 고운 꽃밭 한가운데

텅 비어 있는 자리의 사내들아

가슴속 헐고 병든 마음 다 버리고

눈뜨고 눈먼 자들아

눈썹 위에 풀풀풀 내리는 꽃비 속에

젖빛 하늘 한 자락을 차게 안아라

빈 가슴을 스쳐 지나는 맑은 바람결

살아생전의 모든 죄란 죄

다 모두어 날려 보내고

머릿결 곱게 날리면서

처음으로 노래라도 한 자락 불러라

사랑이여 사랑이여

홀로 혼자서 빛나는 너

온 세상을 무너뜨려서

거대한 빛

無地한 손으로

언뜻

우리를 하늘 위에 와 있게 하느니.

 

청명(淸明)

 

손가락만한 매화가지

뜰에 꽂은 지

몇 해가 지났던가

어느 날

밤늦게 돌아오니

마당 가득

눈이 내렸다

발자국 떼지 못하고

청맹과니

멍하니 서 있는데

길을 밝히는 소리

천지가 환하네.

 

추상

 

할 일 다한 밤나무 꽃이삭

공중에서 교미를 마친 수벌처럼

숭얼숭얼 떨어져 땅에 누웠다

밤느정이 세상사 부질없다고

이별이야, 님과 나의 이별이야

이리저리 얽혀 응어리진 매듭

마지막 혼불로 풀고 있는 것인가

온몸이 꽃으로 무너져내린 사내

여장한 사내

푸른 치마 꺼꾸로 입고 그린

추상화 한 폭

밤늦게 홀로 돌아오는 길

대낮 같이 밝은 오월 보름날

느정느정 솔지 않은 희망이여

파란과 만장인 의 만날이었던가

한 치 건너 두 치인 세상

달빛이 밤늦으로 그린 그림을 본다

땅 위에 그린 밤늦의 추상화를.

 

 

 

나비의 꿈을 엮다

나비가 되는 일

노래를 엮다

노래가 되고

학을 흉내내다 학이 되는 일

 

사위 속에 멈추고

정지 중에 이어지는

찰나와 영원

솟구치고 가라앉는

흐름과 멎음

 

물소리 그러하고

바람소리 그러하고

불길이 모여

빛으로 흘러가는

지상의 이 순간

 

영원을 타고 앉아

손끝에 피워 내는

꽃 한 송이

빙그르르

도는

우주.

 

 

토란잎에 이슬방울

 

한 치 앞까지 가리던 낙월도 안개

저기 있네

 

물 꽃을 피우던 뜨거운 파도와 폭포

거기 있네

 

아슬아슬 눈에 밟히는 슬픈 사랑

여기 있네

 

수정처럼 빛나는 동그마한 우주

저기 있네.

 

 

푸른 유곽 - 아카시아

 

오월이 오고

아카시아 초록 물이 올라

천지를 진동시키는

유백색 향기

검은 스타킹의 서양 계집애들

쭉쭉 뻗은 다리

늘어진 꽃숭어리 숭어리

댕그랑댕그랑

지독한 그리움에 흔들흔들

눈 맑고 귀 밝은 조선 사내들

다 어디로 숨어버리고

점령군 같은,

게릴라 같은

천하의 무서운 사내들

부산한 발자국 소리

요란한 거리, 거리

질펀한 사랑

어질어질 어지러운

오오, 저 진동하는 단내

흐드러진 푸른 유곽의.

 

하루살이

 

하루살이에게는

하루가 천년이니

하루살이가 얼마나 멀고 무거우랴.

먹지도 않고

똥도 싸지 않고

하루 종일 날기만 하다

알만 까고 죽는다.

날개가 다 타서

더는 잉잉대며 날 수 없을 때

우주의 천년은 얼마나 짧은 것인가.

 

하루에 천년,

천리를 가는 것이 부끄러워

미치도록 떼지어 나는

저 하루살이 떼!

 

 

하얀 고독

 

너는

암코양이

밤 깊어 어둠이 짙을수록

울음소리 더욱 애절한

발정 난 암코양이

동녘 훤히 터 올 때

슬슬슬 꼬리를 감추며 사라지는

밤새도록 헤매 다녀

눈 붉게 충혈된

새벽이슬에 젖은 털을 털며

사라지는

비릿한 발걸음

유령 같은.

 

 

하현下弦

 

초겨울 호수 아래

깊은 잠 속

물고기 한 마리

반짝

얼음장 위로 뛰어올랐다.

 

머릿속에 밤새 반짝이던

시 한 편

번뜩

눈을 뜨는

시월 스무사흘 새벽,

 

날빛을 세운 채

또랑또랑 눈뜨고

떠 있는

하늘바다의 눈썹

냉염冷艶함이라니!

 

 

해질 녘

 

꽃들이 만들어내는 그늘이 팽팽하다

서늘한 그늘에서도

어쩌자고 몸뚱어리는 자꾸 달뜨는가

 

꽃 한 송이 피울 때마다

나무는 독배를 드는데

달거리 하듯 내비치는 그리운 심사

 

사는 일이 밀물이고 썰물이 아니던가

꽃이 피고 꽃이 지는 세상

하늘과 땅 다를 것이 무엇인가

 

가만히 있어도

스스로 저물어 막막해지는

꽃 그늘 해질 녘의 풍경소리!

 

 

홍시

 

밤마다 철썩철썩 파도 소리에

섬 마을 가시버시 금슬이 좋아

 

바다 위에 노는 달

물 속 달 안고

 

물결 따라 일렁이다

흐물히 젖어

 

단내 나는 붉은 해

금방 밀어 올리겠네

 

홍시 한 알, !

떨어지겠네.

 

 

황태의 꿈

 

아가리를 꿰어 무지막지하게 매달린 채

외로운 꿈을 꾸는 명태다, 나는

눈을 맞고 얼어 밤을 지새고

낮이면 칼바람에 몸을 말리며

상덕 하덕에 줄줄이 매달려 있는

만선의 꿈

지나온 긴긴 세월의 바닷길

출렁이는 파도로 행복했었나니

부디 쫄태는 되지 말리라

피도 눈물도 씻어버렸다

갈 길은 꿈에서도 보이지 않는

오늘밤도 북풍은 거세게 불어쳐

몸뚱어리는 꽁꽁 얼어야 한다

해가 뜨면

눈을 뒤집어쓰고 밤을 지샌 나의 꿈

갈갈이 찢어져 날아가리라

말라 가는 몸 속에서

난바다 먼 파돗소리 한 켜 한 켜 사라지고

오늘도 찬 하늘 눈물 하나 반짝인다

바람 찰수록 정신 더욱 맑아지고

얼었다 녹았다 부드럽게 익어가리니

향기로운 몸으로 다시 태어나

뜨거운 그대의 바다에서 내 몸을 해산하리라.

 

흔적

 

창 앞 소나무

까치 한 마리 날아와

기둥서방처럼 앉아 있다

폭식하고 왔는지

나뭇가지에 부리를 닦고

이쪽저쪽을 번갈아 본다

 

방안을 빤히 들여다보는 저 눈

나도 맥 놓고 눈을 맞추자

마음 놓아 둔 곳 따로 있는지

훌쩍 날아가 버린다

날아가고 남은 자리

따뜻하다.

 

 

가벼운 바람

 

사람아

사랑아

외로워야 사람이 된다 않더냐

괴로워야 사랑이 된다 않더냐

개미지옥 같은 세상에서

살얼음판 같은 세상으로

멀리 마실갔다 돌아오는 길

나를 방생 노니

먼지처럼 날아가라

해탈이다

밤안개 자분자분 사라지고 있는

섣달 열여드레 달을 배경으로

내 생의 무게가 싸늘해

나는 겨자씨만큼 가볍다.

 

우리들의 말

 

거리를 가다 무심코 눈을 뜨면

문득 눈앞을 가로막는 산이 있다

머리칼 한 올 한 올에까지

검은 바람의 보이지 않는 손이

부끄러운 알몸의 시대

그 어둠을 가리우지 못하면서도

그 밝음을 비추이지 못하면서도

거지중천에서 날아오고 있다

한밤을 진땀으로 닦으며 새는

무력한 꿈의 오한과 패배

어깨에 무거운 죄 없는 죄의 무게

깨어 있어도 죽음의 평화와 폭력의 설움

눈뜨고 있어도 우리의 잠은 압박한다

물에 뜨고 바람이 불리우고

어둠에 묻히고 칼에 잘리는

나의 시대를

우리의 친화를

나의 외로움

우리의 무예함

한 치 앞 안개에도 가려지는 불빛

다 뚫고 달려갈 풀밭이 있다면

그 가슴속 그 아픔 속에서

첫사랑 같은 우리의 불길을

하늘 높이 올리며 살리라 한다.

 

 

, 벼락치다

 

천길 낭떠러지다, 봄은.

 

어디 불이라도 났는지

흔들리는 산자락마다 연분홍 파르티잔들

역병이 창궐하듯

여북했으면 저리들일까.

 

나무들은 소신공양을 하고 바위마다 향 피워 예불 드리는데

겨우내 다독였던 몸뚱어리 문 열고 나오는게 춘향이 여부없다

아련한 봄날 산것들 분통 챙겨 이리저리 연을 엮고

햇빛이 너무 맑아 내가 날 부르는 소리,

 

우주란 본시 한 채의 집이거늘 살피가 어디 있다고

새 날개 위에도 꽃가지에도 한자리 하지 못하고 잠행하는

바람처럼 마음의 삭도를 끼고 멍이 드는 윤이월 스무이틀

이마가 서늘한 북한산 기슭으로 도지는 화병,

 

벼락치고 있다, 소소명명!

 

 

가을 들녘에 서서

 

눈멀면

아름답지 않은 것 없고

귀먹으면

황홀치 않은 소리 있으랴

 

마음 버리면

모든 것이 가득하니

다 주어버리고

텅 빈 들녘에 서면

 

눈물겨운 마음자리도

스스로 빛이 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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