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는 대로 된다는 '긍정의 힘'의 함정
‘긍정(肯定)’은 인본주의 사고(思考)에서
가장 형이상학적인 가치 중 하나이다.
그래서 긍정적인 마음으로 산다는 것은
삶을 여유롭고 품위 있게 할 뿐 아니라
인간관계에 있어서도 성숙하고 원만한 관계를 형성하는데 도움을 준다.
그러나 긍정을 신앙적 특성으로 연관시키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긍정은 자의적 생각이고 행동일 뿐이지 믿음 자체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믿는 대로 된다'며 긍정의 힘을 강조하는
조엘 오스틴은 ‘긍정의 힘'을 마치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인
믿음과 동격으로 이해하고 강조하는 우(愚)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
긍정은 우리 자신이 가지는 마음의 형태이고 생각인데,
내가 “어찌어찌 될 것이다”고 생각하는 긍정적 마음을
기독교의 본질적인 믿음으로 착각해서는 안 된다.
조엘 오스틴은 긍정을 ‘최선의 삶을 위한 단계’라고 제안하면서도
신앙적 가치로 둔갑시켜 기독교인의 믿음을
인본주의적인 신념으로 타락시키는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성경은 ‘예수님을 믿으라’고 했지 긍정하라고 하지 않았다.
예수님이나 성경말씀에 대하여 긍정하는 것은
믿음이 아니라 단순한 인지적 동의이며 인간이 가지는
이해의 범주에서 나오는 자기결정일 뿐임을 알아야 한다.
조엘 오스틴이 말하는 긍정은 자기암시이며 자기최면에 불과하다.
성경이 말하는 ‘믿는 대로 된다’는 것은
‘그 일을 이루어 가실 하나님을 믿고
전적으로 순종한다’는 의미로서 주체가 하나님이지만,
조엘 오스틴은 ‘이루어질 것이다’라고 자신의 마음에
긍정적 암시를 가지면 이룰 수 있다는
심리학에 기반을 둔 전형적인 인본주의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성경 어디에도 ‘긍정’이라는 낱말은 없다.
긍정을 성경적이라거나 신앙적인 용어라고
착각하는 일도 없어야 한다.
긍정이라는 말을 가장 많이 필요로 하고
사용하는 곳이 있다면 그것은 기업체들이다.
긍정적인 사고와 경영학은 떼려야 뗄 수 없는 조합인데,
기업들마다 사원교육에서 빠지지 않는 단골 주제가
바로 ‘긍정’이라는 낱말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같은 경영논리가 교회 안에,
그리고 목회에 유입되면서 이제는 교회들마다 설교를 통해서
긍정적인 말이나 태도가 복음인양 선포되고 있는 것이다.
긍정은 사회생활과 인간관계에서 매우 중요한 요소이기는 하다.
긍정적인 생각이나 태도는 자신 뿐 아니라
주변 사람들에게 까지 안정을 주고 화목하게 하는 장점 뿐 아니라
어떤 도전이나 혹은 이루어야 할 목표를 두고
망설이거나 두려워하는 경우, 이를 극복할 수 있는
키(key)가 바로 긍정적인 마음가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긍정은 믿음이 아니기에
긍정만으로는 구원 받을 수 없고 천국에 갈 수 없다.
그럼에도 조엘 오스틴은 마음의 힘을 강조하며
하나님 안에서 긍정의 힘을 품으라고 말한다.
마치 긍정의 힘으로 초월적인 어떤 일이라도
이룰 수 있는 것처럼 말하지만, 그 자체가 인본주의이고
비성경적인 함정임을 알아야만 한다.
조엘 오스틴은 이 같은 경영논리로
현재 메가처치(MegaChurch)를 이룩했고 도서판매와 강연,
그리고 후원금 등으로 갑부가 되었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라
종교를 이용한 탁월한 사업수완의 결과일 뿐이다.
목사들이 한 눈을 팔면 팔수록
신자들은 인본주의로 세속화로 빠질 수밖에 없다.
긍정은 좋은 말이지만 믿음을 대신 할 수는 없기에
긍정이 아닌 믿음을 가르치고, 자기 마음(긍정적인)을
의지하기 보다는 하나님만을 의지하게 해야 한다.
이제 더 이상 믿는 대로 된다는
긍정의 힘의 함정에 빠지지 말자.
우리에게는 긍정의 힘보다
더 능력 있는 예수님이 계시지 아니한가.
2016. 7. 7 / 새생명교회 윤명상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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