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복신앙과 한국교회
한국 불교계가 최근 자성의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조계종은 지난 18일 “기복신앙 문화에서 탈피하겠다.”며
‘신행(信行) 혁신운동’을 시작한다고 강조하고
“불교와 적잖은 종교가
무속적 기복의 차원에 머물러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불교계 자신들의 문제를 반성하고 혁신하겠다는 이야기인데,
어째서 한국교회를 바라보는 목사가
그러한 불교계의 자성의 목소리에
부끄러움을 느끼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기복신앙의 문제는 어제 오늘의 일도,
그리고 불교의 문제만도 아니다.
오히려 기복신앙에 대한 통절한 회개와
‘자신을 쳐서 복종시키는’ 뼈저린 회초리는 그 누구보다 먼저,
그리고 근본적으로 교회가 취할 태도이기 때문이다.
그동안 한국교회는 기복신앙을 앞세워
노골적으로 예배당의 규모를 키워왔다.
교회의 ‘부흥’과 ‘성장’이라는 그럴듯한 명칭을 붙이긴 했지만
사실 교회는 부흥도 성장도 필요 없는 진리이기 때문에
‘예배당(교회당)의 부흥과 성장’이라는 표현이 맞는 말이다.
게다가 한술 더 떠 ‘삼박자 축복’을 비롯하여
일천번제, 삼천번제, 오천번제까지 축복을 앞세운
기복신앙의 유형들이 홍수를 이루고 있다.
인간의 내재된 현세적 물질적 욕구를 자극하여
축복을 빌미로 기도와 헌신을 강조하며
열심과 충성을 유도하고 있는 것이다.
실제 한국갤럽이 지난해 조사한 내용을 보면
‘마음의 평안과 삶의 의미를 찾고 복을 받기 위해’
종교를 믿는다고 답한 기독교인은 73%에 달했지만,
‘영원한 삶을 위해’ 예수를 믿는다고 답한 비율은 26%에 불과했다.
불교(5%)나 천주교(12%)에 비해 다소 높긴 하지만
이는 교회의 직무유기, 즉 사명포기를 의미하기 때문에
심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너도나도 축복을 앞세워 예배당 건축에 혈안이 되고
‘그랜저는 쪽팔리니 에쿠스 타야한다’는
유물주의에 절여진 목사들에 의해
기복신앙은 교회를 점령하고 지배하게 된 것이다.
지금도 방송이나 인터넷, 그리고 SNS를 통해
쏟아져 나오는 설교들을 보면 한결 같이 기복적이다.
건강이나 물질, 형통과 번성, 평안과 잘됨 등,
신앙의 목적을 왜곡시켜 영원한 삶보다는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한 이기적인 종교인으로
양산하고 있음을 볼 때마다 탄식이 나온다.
기독교의 시각으로 볼 때 이교(異敎)인
불교계의 이번 ‘기복신앙’에 대한
자성과 혁신을 위한 다짐은 매우 고무적인 반면,
교회를 향해서는 부끄러움을 안겨준다.
교회들도 이제 정신을 차리고 진리에 바로 서기를 힘써야 한다.
규모가 큰 예배당의 후임자 모집에
수백 명의 내로라하는 목사들이 몰려들어 이전투구를 벌이거나
욕을 바가지로 먹더라도 교회세습을 시도하고 있는데,
그런 일은 결코 있어서는 안 될 일이다.
만약 ‘아골 골짝 빈들’에 다 쓰러져가는 예배당과
몇 안 되는 신자만 있는데도 서로 앞 다투어 세습을 하고
학력과 경력을 부풀려 가며 부임하려 하겠는가.
이 같은 현상이 기복신앙의 단적인 예다.
목사들이 기복신앙에 빠져 있는데 교인들은 어떠하겠는가.
기복신앙은 일종의 신기루다.
당장은 흥미롭고 기대가 부풀겠지만
결국 인생의 연수가 다하는 그 날,
또는 주님의 날이 임하는 그 때에
비로소 깨닫게 될 것이다. 신기루였다는 것을…
교회는 눈앞의 복이 아닌 영원한 삶을 바라야 한다.
이 땅에서는 조금 초라해 질지라도
천국에 소망을 둔 교회가 더 아름답고
주님이 기뻐하신다는 사실을 깨달았으면 한다.
2016. 8. 20 새생명교회 윤명상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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