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詩 같은 삶을 위하여
☞ 문학의 뜨락

정두리 시(동시) 모음

by 石右 尹明相 2022. 10. 1.

 

 

정두리 시인(1947~ ) 아동문학가. 경남 마산.

단국대학교 국문학과, 중앙대학교신문방송대학원.

1982년 한국문학에 시 <뜨개질> 당선.

1984<동아일보> 신춘문예 동시 당선.

시집 슈베르트의 집, 기억창고의 선물외 다수.

동시집 안녕 눈새야,어머니의 눈물』 『찰코의 붉은 지붕

 

 

정두리 시(동시) 모음

 

 

그대

 

우리는 누구입니까

빈 언덕의 자운영꽃

혼자 힘으로 일어설 수 없는 반짝이는 조약돌

이름을 얻지 못할 구석진 마을의 투명한 시냇물

일제히 흰 띠를 두르고 스스로 다가오는 첫눈입니다

 

우리는 무엇입니까

늘 앞질러 사랑케 하실 힘

덜어내고도 몇 배로 다시 고이는 힘

! 한목에 그대를 다 품을 수 있는 씨앗으로 남고 싶습니다

허물없이 맨발이 넉넉한 저녁입니다

뜨거운 목젖 까지 알아내고도 코끝으로 까지

발이 저린 우리는 나무입니다

 

우리는 어떤 노래입니까

이노리나무 정수리에 낭낭 걸린 노래 한 소절

아름다운 세상을 눈물나게 하는

눈물 나는 세상을 아름답게 하는

그대와 나는 두고두고 사랑해야 합니다

그것이 내가 네게로 이르는 길

 

네가 깨끗한 얼굴로 내게로 되돌아오는 길

그대와 나는 내리 내리 사랑하는 일만

남겨두어야 합니다.

 

 

소나무

 

나이테를 보지 않고

눈어림으로 알 수 있는 버젓한 어깨

튼튼한 다리가

보기 좋다.

 

꽃보다 더 나은

푸른 솔이 좋다.

 

이런 거구나

이래야 하는구나.

 

냄새도 빛깔도

이름과 닮은

의젓한 나무.

 

네 모습을 보면서

소나무야

꿈까지 푸르게 꾸고 싶다.

 

 

먼지의 자리

 

먼지는 어디에건

주저앉으려고 든다

살금살금

가볍게

무엇보다 사람들의

무관심 위에 앉기를 좋아한다

 

아무도 몰래

숨어 만든 자리

그 자리 엄청 넓어서

나중엔 먼지가 먼저 놀라

풀석 일어난다

 

 

멍게 또는 우렁쉥이

 

'우리 고향에서는 멍게가 아니라 우렁쉥인기라'

돌아가신 박재삼 선생님의 말씀 생각난다

선생께는 우렁쉥이였던 멍게

한참 주체할 수 없이

여드름 같은, 열꽃 같은 게 돋아 난

빵빵하게 기운차 아랫배 그들먹한

녀석의 춘기

바다 기운을 양껏 먹고 붉디붉은

다글다글 얽혀 있는 몸뚱이를 듣기 좋게

'바다의 꽃'이라고 한다는데

꽃이라? 그래 꽃이라 불러주자

칼을 대면 분수같이 솟구치는

네가 품었던 바다가 있고

내보내지 못한 부끄러운 똥 줄기까지

접시에 얹혀 온 보들보들한 네 살점을 씹으면

희한하다, 혀를 휘돌게 하는 그 씁쓸함이

끝판에는 어찌하여 덜큰하게 느껴지는가?

덜큰 쌉싸래해서 입맛을 돋우게 한다는 그 맛

그걸 느낄 양이면

나잇살을 먼저 먹고 나서야 가능하다는 걸

어린 아들아 아는가?

 

 

다리

 

엘리베이터 안에서

처음 만난 나를 보며

-안녕?

너는 웃으며 인사했어

 

서로 아는 사이도 아닌데

인사하는 너를 보며

-안녕?

엉겁결에 나도 따라서 했지

 

우리 사이에

금세 다리가 놓이는 거야

그 짧은 인사 한 마디로

 

 

어머니의 눈물

 

회초리를 들었지만 차마

못 때리신다

아픈 매보다 더 무서운

무서운 목소리보다 더 무서운

어머니의 눈물이 손등에

떨어진다

어머니의 굵은 눈물에 내가

젖는다.

 

 

코스모스

 

나란히 나란히 누가 불렀나

들길에 나란한 코스모스

외로운 들길이 얼마나 환한지

그 길 지나면서 그냥 가긴 싫어

바람도 꽃잎 속에 숨었다 가네

 

 

씨앗

 

씨앗은 크지 않아도 된다

까만 점 하나가 만든 나무숲

그 숲에 둥지 튼 비비새 한 마리

까만 씨앗 한 개가 하는 일은

작은 점 하나서부터 시작하는 일이다.

 

 

꽁보리밥

 

보리밥보다

더 어두운 밥

 

''

그 말 하나가 보태는

 

먹어도 고픈

듣기만 해도

먼저 허기지는

남루한 음식

 

그래도 입 속에서

머물대다 넘어가는 것이

 

과욕을 누르고

과식을 용서해 줄

이름만으로도

참으로 낮아지는

꽁보리밥.

 

 

바람의 울음

 

아기 소나무를 보며

바람이 매를 듭니다

 

-

가슴을 펴!

 

매를 맞으며 우는 것은

소나무가 아닙니다

 

회초리 내던지고

긁힌 자국 만져주며

오래도록

 

바람은 울고 있습니다.

 

 

산수유 꽃

 

이른 봄

햇살이 씨앗을 뿌렸다

산수유나무

품었던 씨앗을 틔운다

차조알 같이 자잘한 노란 꽃

아직 뺨이 시려

깨알만큼 얼굴을 내민

그래도 촘촘히 달린 산수유 꽃

 

 

애기똥풀꽃

 

아기가 기저귀 벗고

들에다 똥을 누었다네

아기 똥은 이쁘기도 하지

노랑 노랑 노랑 꽃

아기는 온종일 혼자 놀았네

여기 저기 조오기

애기똥풀꽃은

그렇게 자꾸자꾸 피어났다네

 

 

 

밭에서 김매던 할머니

호미 던지고

혼잣말 한다

"에구, 무섭게 자라네."

 

누구도 기운 내라고

물 한 모금 뿌려 주거나

응원해 주지 않았다

그냥 업신여기며

이름이 없이

, 풀 불렀다는데~

 

풀은 자기가

힘이 센 줄도 모르고

무서운 줄도 모르고 산다

 

 

라일락

 

가지마다 숨겨진

작은 향기 주머니

 

이름 석 자 뒤에도

묻어나는 냄새

 

향기로만

나무가 되려는 나무

 

소올솔

작은 주머니가

올을 풀어서

 

봄 하늘을

향긋하니 덮어 버렸다.

 

 

눈꺼풀에게

 

아침이면

세상에서 제일 힘 센

너랑 겨룬다

 

밀어낼수록

무겁다

마구 짜증이 난다

 

눈시울, 속눈썹까지

한편인 거 알아

 

나는 니들과

함께 할 수 없어

혼자 힘으로 널 이겨내고

오늘을 열어가야 하거든.

 

 

귀띔

 

우리 할아버지 텃밭에

며칠 사이

고라니가 몇 번이나

다녀갔다

 

고 녀석, 꼭 배추 고갱이만 골라 먹어.’

할아버지는 아침나절

꼼꼼하게 담장의 그물망을 손보았다.

 

이젠 고라니 어림없다.’

 

그것도 모르고 찾아올 고라니

헛걸음하지 말라고

알려주고 싶다.

 

 

두리랑 두리

 

두리 글방, 두리 호프

혼자 있기 외로워

두리, 둘이라고 붙여 보는가?

그 심사 알 듯도 하다

 

돌아서는 길목마다 눈에 띄는

흔하게 되어버린 이름

홀로 있기 보담

둘이라면 의지가 될 것 같아

붙인 이름인가?

정분나기 좋은 것이 둘이 인가?

 

우리 모두 혼자였다가

이제 두리, 둘이 되었다

셋도, 넷도 된다

더 많이 쌓여지고, 포개진다

그래서 서로 모여 얼크러지고

쓰러지고 아파하고 미워한다

때로는 놓아 주지 않는

모진 사람이 된다

 

더러 외로워도

그리움이란 거 지니고 싶다면

보고픔을 간직하려면

둘도 많다,

혼자여야 누릴 수 있는 정복임을

알아야 한다

 

 

떡볶이

 

달콤하고 조금 매콤하고

콧잔등에 땀이 송골송골

그래도 호호거리며 먹고 싶어.

 

벌써 입 속에 침이 고이는걸

맛있다소리까지 함께 삼키면서

단짝끼리 오순도순 함께 먹고 싶어.

 

 

눈빛 맑은 시인에게

 

눈이 먼저

말을 하는 이를

나는 보았네

 

아주 선()한 말

그리고 정겨운 말

 

그 눈이

전신을 닦는 맑은 샘이 되어

언제나 청청한 그,

아는 이는 이미 알고 있었네

 

우리의 좋은 사람

올곧은 시인

 

오늘 그를 위한

뜨겁고 힘찬

박수를,

 

꽃보다 오래 머물

푸른 노래를 띄워 보내네.

 

 

소행성에 이름 붙이기-별 이야기

 

세종 별, 장영실 별, 허준 별

이렇게 별에 이름을 달아 줄 수 있대

23만 개의 소행성 중에

스스로 빛을 내지 못하는 별은

아직 이름을 얻지 못하고 있다는 거야

저 부끄럼 타는 숨은 작은 별에게

이름을 붙여 주고 반짝이게 할 순 없을까?

내 목소리가 하늘에 닿게

너도 별이야, 반짝일 수 있다고!

외쳐 주고 싶어

사실은 말이야,

내 친구 이름, 신은별!

그 이름 꼭 별에 붙여 주려고 해.

 

 

푸르고 싶다

 

들판에

서 있으면 될까?

 

눈길 닿는 곳 모두

푸르른 들에 가서

누워보면 어떨까?

 

오로지

풀풀풀 싱그런 냄새가

내 몸 속 어딘가에 스며 있다가

 

누군가를 물들일 수 있게

그렇게

푸른 벌판같이

푸르고 싶다.

 

 

엄마가 아플 때

 

조용하다.

빈 집 같다.

 

강아지 밥도 챙겨 먹이고

바람이 떨군

빨래도 개켜 놓아두고

 

내가 할 일이 뭐가 또 있나.

 

엄마가 아플 때

나는 철든 아이가 된다.

 

철든 만큼 기운 없는

아이가 된다.

 

 

다리 놓기

 

빠안하던

강 건너 동네에서

우리 마을로

다리를 거는 일이 시작되었습니다.

작은 아이들 같이 아저씨들이

무쇠차로 장난감 놀이에

열심입니다.

다릿발이 높이 세워집니다.

갈꽃이 나부끼는

강둑 한 끝에서 보면

징검다리 밟고 건너던 시절

이름도 얼굴도 희미한

책보를 낀 옛 아이

노 젓던 사공의 노래

강 건너 수양버들 가지에

걸려 있던 달도 보입니다.

이제 징검다리도 나룻배도

모두 거두어 두고

강물 위를 가로질러

지름길이 놓입니다.

오늘은

하얀 초승달이

다릿발 위에 걸렸습니다.

물오리의 놀이터 위에

무지개가 서듯

다리가 걸리면

소리쳐야 들리던

두 마을이 하나로 이어지겠지요.

백 리 밖 서울까지도

한 마을이 될 것입니다.

 

 

먹을 가는 마음

 

할아버지는 오래도록

먹을 가셨다

까만 먹물에 얼굴이 비쳐야 한다셨다

 

먹물을 찍어

붓 끝에 정성을 담아

한 획 한 획 글을 쓰시는 할아버지

 

-유나야

너도 이번 피아노 경연대회에서

갈고닦은 솜씨를 빛내야지?

 

-

큰 소리로 대답하며

피아노 앞에 앉았다

할아버지께 먼저 칭찬을 듣고 싶어서다

 

 

봄바람

 

부끄러움

모두가 잠깐 수줍음

한 생애의 시작은

이렇게 만나고 시작입니다

 

아물아물

일제히 반짝거림

한 생애의 처음은

이렇게 여리고 미쁘기만 합니다

 

따갑지 않은 목마름

달작지근한 향내

조그만 유혹

실눈을 뜨고 걸러온 바람을 마시고

, 벌어지는 입술

햇살이 닿으면 전부가 꽃이 됩니다

 

봄에는

멀리로 달음질해서

그만큼 더 많이 봄을 가지려 합니다

골고루 아득하게

부자가 될 것입니다.

 

 

눈길

 

땅 끝 어디에서 밝힌 불일까?

하얗게 밝혀진

눈길을 걷는다.

 

하얀 길에

누가 먼저 갔을까?

점 하나, 점 둘

눈 위를 디딜 때

두려웠겠다.

 

앞장서서 걷기가

힘들었다고

깨끗한 길 걸어가기

조심스러웠다고

 

누군가

눈길 위에다

내가 알기 쉽도록

한 자, 한 자

마음을 표시해 놓고 갔었다.

 

 

당일치기

 

서두르지 않으면 안된다

五臺山

上院寺

하늘을 보는 일

하늘이 나를 보는 일

 

근처의

키만 키운 풀들은

욕심껏 누운 자세다

때묻은 마음 한 쪽을 잘라내고

그래도 남아 있을

부끄러운 그림자도 버리고

도망질하듯

서두르지 않으면 안된다

 

가까스로 얻어온

가을을

흘리지 않기 위해서.

 

 

씨앗

 

씨앗을 크지 않아도 된단다.

까만 점 하나가 만든 푸른 숲

그 숲에 둥지 튼 비비새 한 마리

까만 씨앗 한개 하는 일은

작은 점 하나서부터 시작하는 일이다.

 

 

'☞ 문학의 뜨락'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역대 노벨상 수상작품(시) 모음  (0) 2022.10.09
쉴리 프뤼돔의 시 네 편  (0) 2022.10.07
소솔 류재하 시(동시) 모음  (0) 2022.09.26
박두순 시(동시) 모음  (2) 2022.09.21
윤석구 시 모음  (0) 2022.09.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