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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詩 같은 삶을 위하여
☞ 문학의 뜨락

쉴리 프뤼돔의 시 네 편

by 石右 尹明相 2022. 10. 7.

 

 

쉴리 프뤼돔(Sully Prudhomme, 1839~1907. 프랑스). 시인. 철학자.

1865년 첫 시집 구절과 시 (Stances et Poèmes)를 발간.

1901년 노벨문학상수상.

 

 

쉴리 프뤼돔 시 모음

 

 

금 간 꽃병

 

이 마편초꽃이 시든 꽃병은

부채가 닿아 금이 간 것.

살짝 스쳤을 뿐이겠지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으니.

하지만 가벼운 상처는 하루하루 수정을 좀먹어 들어

보이지는 않으나 어김없는 발걸음으로

차근차근 그 둘레를 돌아갔다.

맑은 물은 방울방울 새어 나오고

꽃들의 향기는 말라 들었다.

손대지 말라, 글이 갔으니.

곱다고 다듬는 손도 때론 이런 것

남의 마음을 절로 금이 가

사랑의 꽃은 말라죽는다.

사람들의 눈에는 여전히 온전하나

마음은 작고도 깊은 상처에 혼자 흐느껴 운다.

금이 갔으니 손대지 말라.

 

 

물가에서

 

흘러가는 물가에 둘이 앉아

흐르는 물을 바라보리

구름이 허공을 스쳐가면,

둘이서

스치는 구름을 바라보리

 

지평선 위 초가지붕에 연기 솟으면,

솟는 연기를 바라보리

근처에서 꽃이 향기 품으면,

그 향기가 몸에 배게 하리

 

꿀벌들이 나무 열매에 꾀면

우리도 그 맛을 보리

귀 기울인 나무숲에 어떤 새가

노래하면 우리도 귀를 세우고..

물이 소곤거리는 수양버들 아래서

물의 속삭임을 우리도 들으리

 

이 꿈이 이어가는 동안은,

시간의 흐름을 안 느끼리

차라리 스스로를 못내 사랑하는

깊은 정열만을 가슴에 간직하고

번거로운 세상에 다툼질엔 아랑곳 없이

그것들을 잊으리

 

그래서 여증나는 모든 것 앞에서

홀로 행복해 지칠 줄을 모르며,

사라져 가는 모든 것 앞에서

사라질 줄 모르는 사랑을 느끼리

 

 

사랑의 가장 좋은 순간

 

사랑에서 가장 좋은 순간은

"너를 사랑한다"고 말할 때가 아니다

그것은 어느 날 깨뜨리다 만

침묵, 바로 그 속에 있는 것

 

그것은 마음의 재빠르고도 남모를

은근한 슬기 속에 깃든 것

그것은 짐짓 꾸민 엄격함 속에

은밀한 너그러움이 있는 것

 

그것은 바르르 떠는 손이 놓여진

팔의 설렘 속에 있는 것

둘이서 넘기는, 그러나 읽진 않는

책 페이지의 갈피 속에 있는 것

 

그것은 다문 입이 수줍음만으로

말을 하는 유일한 시간

마음이 터지면 장미 눈 모양

살며시 소리 낮게 열리는 시간

 

머리카락 향긋한 내음만이

얻어진 사랑으로 보이는 시간

공경이 바로 고백이 되는

그지없이 부드럽고 다정한 시간

 

 

 

사랑받던 고운 눈, 파란 눈 까만 눈,

무수한 눈들이 새벽빛을 보았다.

이제 그 눈들은 무덤 깊이 잠들었지만,

태양은 여전히 솟아오른다.

 

낮보다도 더욱 다정한 밤들이,

무수한 눈들을 호렸었다.

별은 지금도 밤하늘에 반짝이지만,

눈들은 어둠에 가득 차 있다.

! 그 많은 눈들이 멀었다니,

아무래도 믿어지지 않을 일!

그 눈들은 다만 그 어느 딴 곳

안 보이는 세계로 돌려졌겠지.

그래서 지는 별들이 우리의 눈을

떠나서도 그냥 하늘에 머무르듯이,

눈동자들도 비록 어딘가로 져갔으나,

죽었다는 건 아무래도 거짓말.

 

사랑받던 고운 눈, 파란 눈 까만 눈,

감겨진 눈들이 지금도 사뭇,

무덤 저쪽에서 그지없이 큰

새벽빛에 다시 떠서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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