쉴리 프뤼돔(Sully Prudhomme, 1839~1907. 프랑스). 시인. 철학자.
1865년 첫 시집 《구절과 시 (Stances et Poèmes)》를 발간.
1901년 노벨문학상수상.
쉴리 프뤼돔 시 모음
▶ 금 간 꽃병
이 마편초꽃이 시든 꽃병은
부채가 닿아 금이 간 것.
살짝 스쳤을 뿐이겠지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으니.
하지만 가벼운 상처는 하루하루 수정을 좀먹어 들어
보이지는 않으나 어김없는 발걸음으로
차근차근 그 둘레를 돌아갔다.
맑은 물은 방울방울 새어 나오고
꽃들의 향기는 말라 들었다.
손대지 말라, 글이 갔으니.
곱다고 ㅆ다듬는 손도 때론 이런 것
남의 마음을 절로 금이 가
사랑의 꽃은 말라죽는다.
사람들의 눈에는 여전히 온전하나
마음은 작고도 깊은 상처에 혼자 흐느껴 운다.
금이 갔으니 손대지 말라.
▶ 물가에서
흘러가는 물가에 둘이 앉아
흐르는 물을 바라보리
구름이 허공을 스쳐가면,
둘이서
스치는 구름을 바라보리
지평선 위 초가지붕에 연기 솟으면,
솟는 연기를 바라보리
근처에서 꽃이 향기 품으면,
그 향기가 몸에 배게 하리
꿀벌들이 나무 열매에 꾀면
우리도 그 맛을 보리
귀 기울인 나무숲에 어떤 새가
노래하면 우리도 귀를 세우고..
물이 소곤거리는 수양버들 아래서
물의 속삭임을 우리도 들으리
이 꿈이 이어가는 동안은,
시간의 흐름을 안 느끼리
차라리 스스로를 못내 사랑하는
깊은 정열만을 가슴에 간직하고
번거로운 세상에 다툼질엔 아랑곳 없이
그것들을 잊으리
그래서 여증나는 모든 것 앞에서
홀로 행복해 지칠 줄을 모르며,
사라져 가는 모든 것 앞에서
사라질 줄 모르는 사랑을 느끼리
▶ 사랑의 가장 좋은 순간
사랑에서 가장 좋은 순간은
"너를 사랑한다"고 말할 때가 아니다
그것은 어느 날 깨뜨리다 만
침묵, 바로 그 속에 있는 것
그것은 마음의 재빠르고도 남모를
은근한 슬기 속에 깃든 것
그것은 짐짓 꾸민 엄격함 속에
은밀한 너그러움이 있는 것
그것은 바르르 떠는 손이 놓여진
팔의 설렘 속에 있는 것
둘이서 넘기는, 그러나 읽진 않는
책 페이지의 갈피 속에 있는 것
그것은 다문 입이 수줍음만으로
말을 하는 유일한 시간
마음이 터지면 장미 눈 모양
살며시 소리 낮게 열리는 시간
머리카락 향긋한 내음만이
얻어진 사랑으로 보이는 시간
공경이 바로 고백이 되는
그지없이 부드럽고 다정한 시간
▶ 눈
사랑받던 고운 눈, 파란 눈 까만 눈,
무수한 눈들이 새벽빛을 보았다.
이제 그 눈들은 무덤 깊이 잠들었지만,
태양은 여전히 솟아오른다.
낮보다도 더욱 다정한 밤들이,
무수한 눈들을 호렸었다.
별은 지금도 밤하늘에 반짝이지만,
눈들은 어둠에 가득 차 있다.
오! 그 많은 눈들이 멀었다니,
아무래도 믿어지지 않을 일!
그 눈들은 다만 그 어느 딴 곳
안 보이는 세계로 돌려졌겠지.
그래서 지는 별들이 우리의 눈을
떠나서도 그냥 하늘에 머무르듯이,
눈동자들도 비록 어딘가로 져갔으나,
죽었다는 건 아무래도 거짓말.
사랑받던 고운 눈, 파란 눈 까만 눈,
감겨진 눈들이 지금도 사뭇,
무덤 저쪽에서 그지없이 큰
새벽빛에 다시 떠서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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