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자들
/ 석우 윤명상
옥상에 덩그러니
주인 없는 아이스박스 하나.
미국 서부개척시대,
깃발만 꽂으면 내 땅이 되던 것처럼
몇 년째 주인이 없던 아이스박스에
이주자들이 몰려들어 깃발을 세우고 있다.
분갈이하고 남은 흙들이 모여
광야가 된 척박한 땅이지만
몰래 잠입한 단풍마와 고들빼기,
쥐도 새도 모르게 터 잡은 채송화.
낙하산을 타고 들어온 버드나무까지
누구 하나 허락받은 정착은 없었다.
이주자들은 나름, 치열하게 적응 중이다.
세력 확장을 위해 까치발은 기본이고
높이와 넓이를 선점하려는 기 싸움은
화분이 된 작은 박스 속의 시대상이다.
다만, 마의 일방적인 횡포를 막기 위해
대나무 가지를 꽂으며 내가 개입했을 뿐이다.
나는 적절한 때를 맞춰 물이 되었다.
채송화는 피고 지며 2세를 만들고
고들빼기는 서너 개씩 자기 복제를 하고
마는 하늘을 향해 치솟았지만
버드나무는 속을 감추고 아기 티를 낸다.
나무가 될 거라고는 아무도 모른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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